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용산원자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9D00, #FFB200 20%, #FFB200 80%, #FF9D00)" '''고려 충숙왕의 왕자[br]{{{+1 용산원자 | 龍山元子 }}}'''}}} || ||<|2> '''출생''' ||[[1325년]]^^([[충숙왕]] 12년)^^ || ||[[고려]] [[한양]] [[용산]] || || '''사망''' ||[[1341년]][br](향년 17세) || || '''휘''' ||불명 || || '''본관''' ||[[개성 왕씨]] || || '''부왕''' ||[[충숙왕]] || || '''모후''' ||[[조국장공주]]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제27대 국왕 [[충숙왕]]과 후비 [[조국장공주]]의 아들. 이복형제로는 [[충혜왕]]과 [[공민왕]]이 있다. == 생애 == [[1325년]] 충숙왕과 후비 [[조국장공주]]가 '용산(龍山)'[* 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역]] 서쪽.] 일대를 지나다가 [[원자(왕족)|원자]]를 출산해서 '용산원자(龍山元子)'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조국장공주는 용산원자를 낳고 곧 [[산모사망|사망했다]]. [[1341년]] [[원나라]]에서 사망했다. 향년 17세. 시신은 [[고려]]로 돌아와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만약 용산원자가 더 오래 살아서 충혜왕 왕정과 공민왕 왕전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면, 말 그대로 혈통이나 정체성이나 모두 몽골인인 고려국왕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충선왕도 고려계보다 몽골계의 피가 더 많이 흘렀는데 충선왕과 몽골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용산원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었다.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 중에 하나가 어머니가 고려인이라는 것이었는데, 만약 몽골인 그 자체인 용산원자가 보위를 이었으면 고려는 몽골의 일부가 되어 국가 정체성을 상실하고 종속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에야 겨우 독립했을 가능성이 있다.] == 기타 == * 충숙왕의 아들들 중 [[요절]]한 탓에 유일하게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또한 다른 이복형제들과 달리 고려식 이름과 몽골식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용산원자가 관련된 고려시대 문헌이나 금석문이 추가로 발굴되거나, 무덤을 확인하는 방법밖엔 없는데 용산원자의 무덤으로 비정되는 곳은 현재까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 [[고려사]] 정방길 열전에 따르면, 1330년[* [[고려사절요]]에는 1330년 7월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10살 위의 이복형인 [[충혜왕]](당시 16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정방길은 [[원나라]]로 가는 충숙왕에게 "용산원자와 함께 원나라에 입조하라"고 아뢰었지만, 조익청이 "불가하다"고 간언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다만 사망당시 원나라에 있던 점을 보면, 1330년 ~ 1341년 사이에 원나라에서 갔고 체류 중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각주] [[분류:고려의 왕자]][[분류:1325년 출생]][[분류:1341년 사망]][[분류:용산구 출신 인물]][[분류:몽골계 한국인]]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