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원건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1 源乾曜 | 원건요}}}''' || || '''작호''' ||<(> 안양군공^^(安陽郡公)^^ || || '''성''' ||<(> 원(源) || || '''이름''' ||<(> 건요(乾曜) || || '''부친''' ||<(> 원직심(源直心) || || '''조부''' ||<(> 원사(源師) || || '''출생''' ||<(> ? ~ 731년 || || '''출신''' ||<(> 상주(相州) 임장현(臨漳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대신으로 [[현종(당)|당현종]] 시기의 재상이다. == 가계 == 원건요의 조상은 [[선비족]] [[독발부]]에서 시작하여 [[남량]]을 거쳐 남량이 멸망한 이후 독발파강이 [[북위]]에 귀순하여 관작과 함께 원씨(源氏) 성을 하사받았다. 원건요는 [[수나라]] 시기에 비부시랑을 지낸 원사민(源師民)의 손자로, 원건요의 아버지인 원직심(源直心)은 [[고종(당)|당고종]] 시기에 사형태상백(司刑太常伯)을 지냈다가 유배를 당하여 죽었다. 원건요는 상주(相州) 임장현(臨漳縣) 출신이다. == 생애 == 원건요는 진사로 급제하여 전중시어사로서 강남 시찰을 맡았고 큰 치적을 쌓아서 간의대부로 승진하였다. 조정에서 사례(射禮)를 폐지하자, 원건요는 사례를 다시 실시할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원건요는 이후 양주(梁州) 도독을 맡았다. [[현종(당)|당현종]]이 즉위한 뒤 빈왕부(邠王府)의 한 관리가 법을 어기자, 현종은 왕부의 장사를 맡을 만한 인물을 대신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이때 태상경 강교(姜交)가 원건요를 천거하였다. 현종이 원건요를 소대할 때, 원건요는 태도가 시원시원하였고 대답이 조리있고 흔들림이 없어서, 현종이 매우 기뻐하여 원건요를 소부소감으로 임명하고 빈왕부 장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뒤에 원건요는 호부시랑, 어사중승, 상서좌승을 역임하였다. 716년, 원건요는 황문시랑, 동자미황문평장사로 임명되었다가, 10일도 안 되어 요숭과 함께 지정사에서 파직되었으며, 장안 유수, 경조윤을 맡으며 관대한 정치를 펼쳤다. 720년, 원건요는 다시 황문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임명되었고 은청광록대부가 더해졌으며 시중을 맡았다. 원건요는 자신의 아들 3명이 중앙의 관직에 임명되자, 자신의 아들 2명을 외직으로 내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현종은 원건요의 주청을 받아들여 하남부(河南府) 참군(參軍) 원필(源弼)을 강주(絳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태축(太祝) 원결(源潔)을 정현위(鄭縣尉)로 각각 전출시켰다. 722년, 어떤 이가 나라의 재상에게 총애를 주어야한다고 건의하면서, 원건요는 [[장가정]]과 함께 식읍 300호를 받았다. 725년, 현종이 태산에서 봉선례를 올릴 때 원건요는 봉선례 건의를 올린 [[장열]]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봉선례가 끝난 뒤, 원건요는 상서좌승상으로 임명되고 시중을 겸임하였다. 729년, 원건요는 시중에서 파직되고 상서좌승상은 유임되었다. 원건요는 뒤에 태자소사로 임명되었는데, 자신이 받은 관직이 할아버지의 이름과 같아서 대신 태자소부로 임명되고 안양군공(安陽郡公)으로 책봉되었다. 731년, 원건요는 연로하여 수도인 장안에서 요양하다가 사망하여 유주 대도독으로 추증되었다. == 기타 == * 원건요는 [[장열]], [[장가정]], [[이원굉(당나라)|이원굉]], [[두섬]]과 함께 조정의 정사를 맡았다. 원건요는 신중한 성격이라 중대한 문제에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서명만 하였다. * 자신을 천거했던 강교가 장가정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자, 원건요는 강교의 신원을 하지 않아서 이로 인해 지탄을 받았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731년 사망]][[분류:한단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