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원제(동진)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사마진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F015F 0%, #800080 20%, #800080 80%, #5F015F); color: #ece5b6" '''진 제5대 황제[br]{{{+1 중종 원황제 | 中宗 元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동진 사마예.jpg|width=100%]]}}} || ||<-2> {{{#ece5b6 {{{-2 사마예 상상화 (역대고인상찬)}}} }}} || ||<|2> '''출생''' ||[[276년]] || ||[[서진]]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즉위''' ||[[317년]] [[4월 6일]] || ||[[동진]]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난징시]]) || ||<|2> '''사망''' ||[[323년]] [[1월 3일]] (향년 47세) || ||[[동진]]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난징시]]) || || '''능묘''' ||건평릉(建平陵) || ||<|4> '''재위기간''' ||'''{{{#ece5b6 동진의 진왕(晉王)}}}''' || ||[[317년]] [[4월 6일]] ~ [[318년]] [[4월 26일]] || ||'''{{{#ece5b6 동진의 황제}}}''' || ||[[318년]] [[4월 26일]] ~ [[323년]] [[1월 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사마|하내 사마씨]] || || '''휘''' ||예(睿) || || '''부모''' ||부왕 [[사마근|낭야공왕]][br]모후 낭야왕비 || || '''형제자매''' ||2남 중 장남 || || '''배우자''' ||[[우맹모|원경황후]], 건안군군, 간문선태후 || || '''자녀''' ||6남 1녀 || || '''자''' ||경문(景文) || || '''작호''' ||낭야왕(琅邪王) → 진왕(晉王) || || '''묘호''' ||'''[[중종]](中宗)''' || || '''시호''' ||원황제(元皇帝) || || '''연호''' ||[[건무]](建武, [[317년]] ~ [[318년]])[br]대흥(大興, [[318년]] ~ [[321년]])[br]영창(永昌, [[322년]] ~ [[323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진(晉)의 5대 황제이자, [[동진]]을 세운 황제. 묘호는 중종(中宗)이고, 시호는 원황제(元皇帝). 휘는 예(睿). 자는 경문(景文). 즉위 이전의 작위는 낭야왕(琅邪王)[* 사마예를 도운 왕씨가 낭야 출신이다.]. 당대의 명필이다. 잡혀간 [[회제(서진)|회제]]를 대신해 고위직이 되어 조정의 권한 대부분을 부여받았고 친척인 [[민제(서진)|민제]]가 잡혀가 진나라가 본토를 잃자 강남으로 천도하여 왕조를 중흥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간성에 결함이 있어 전형[* 銓衡= [[시험]]이나 [[추천]], [[음서]] 등으로 사람을 뽑는 것]을 부당하게 하는등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 생애 == === 초기 === 함녕 2년(276년), [[낙양]]에서 태어났다. [[사마의]]의 증손자로, 사마의의 넷째 아들인 [[사마주]]의 손자이며 낭야공왕 [[사마근]]과 하후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사마예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후광희(夏侯光姬)이고 [[자(이름)|자]]는 동환(銅環)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하후장(夏侯莊), 외증조할아버지는 [[하후위]](夏侯威)이며[* 점괘 상 하후위는 나중에 황제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괘가 있었는데 그걸 죽은 후에 이루게 되었다.], 외고조할아버지가 [[하후연]]이었다. 즉 사마예는 하후연의 외현손자가 되는 셈이다.[* 사마근의 부장이었던 [[우금(서진)|우금]]과 [[성관계|썸씽]]이 있어서 사마예는 사실 우금의 아들이란 이야기가 있는데 진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 이야기는 남북조시대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역사책)|위서]]에 나오는 것으로, 북조에서 남조의 정통성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서진]]이 [[팔왕의 난]]으로 [[막장]]이었을 때, 사마예는 공손하고 검소하며 양보를 잘하고 도량이 넓어서 명성이 높았다. 15세에 부친 사마근의 뒤를 이어 낭야왕(琅邪王)이 되었으며, 원강 2년(292년), 원외산기상시가 되어 업성에 있었다. 건무 원년(304년) 8월, 사마예의 숙부였던 동안왕 [[사마요]]가 성도왕 사마영에게 피살되자 사마예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는데, 사마영은 사마예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남몰래 도망쳐 하양을 거쳐 낙양에 이르러 모친 하후씨를 모시고 임지인 낭야로 돌아왔다. 영흥 2년(305년) 8월, 사공이었던 동해효헌왕 [[사마월]]이 그를 평동 장군으로 임명하여 서주를 감독하게 하고 하비를 지키게 했다. 이에 사마예는 자신의 친한 벗이었던 [[왕도(동진)|왕도]]를 사마에 임명하여 병무를 맡겼다. 영가 원년(307년) 7월, [[회제(서진)|회제 사마치]]는 6촌 형 사마예를 안동 장군으로 임명하여 양주와 강남을 총관장하게 하고 건업을 지키게 했다. 영가 5년(311년) 5월에는 진동 대장군이 되어 양주, 강주, 상주, 교주, 광주 등 5주의 업무를 맡았다. 건흥 원년(313년), [[민제(서진)|민제 사마업]]이 즉위하자 좌승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마업이 사마예에게 북벌을 명령했으나, 사마예는 강남의 안정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곧 사마예는 서진의 승상이 되었으며 316년 장안이 곧 [[유총(전조)|유총]]에게 함락될 것을 예견한 사마업은 사마예에게 조정의 모든 권한을 맡기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이 조서는 길이 늦어서 다음 해인 317년 2월에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사마예는 진왕(晉王)으로 즉위했다. === 즉위 === 결국 서진이 멸망하고 사마업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마예는 [[건업]]에서 [[사마의]]의 종통과 진의 계승을 선언하면서 황제에 즉위했고 후대인들은 이 때부터 동진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사마예는 건업(建業)의 이름이 서진 민제 [[사마업]](鄴 또는 業)의 [[피휘|이름과 같다 하여]] 이름을 [[건강]](建康)으로 바꿨다. 사마예는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는데 대신 서진을 멸망시킨 [[유총(전조)|유총]]과 [[석륵]]은 이 사면에서 제외되었다. 사마예는 진나라를 중흥했으나, 초기에는 명성이 낮고 북쪽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라 강남 호족들[* 황제의 성씨는 손씨에서 사마씨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한나라 시절부터 번영하던 [[오의 사성|육씨 등의 강남 호족]]들이 건재했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 지방 풍속에 따르고 청렴한 정치와 은덕으로 보살피라는 왕도의 조언을 따라 호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치니 차츰 강남 호족들이 귀순해 와서 서진 시절부터 난리가 났던 나라를 강남에서 겨우 안정시켰다. 사마예는 [[왕도(동진)|왕도]]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그의 사촌형 [[왕돈(동진)|왕돈]]을 정남대장군에 봉했는데 장강 북부 일부 지방을 회복해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태흥 2년(319년), 북쪽의 전조 황제 유요가 숭양릉을 도굴한다는 소식을 듣자 분개하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통곡만 했다. 숭양릉은 [[사마소]]와 [[왕원희]]가 죽으면서 합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덤을 파헤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악질적 행위였고 사마예의 간곡한 부탁으로 유요가 도굴 계획을 뒤를 미루었고, 이후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켜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동진은 왈칵 뒤집어졌다. 이 때 도굴당한 화북의 진나라계 황릉은 나중에 유유가 북벌을 단행한 뒤 이민족들을 격파하고 황릉의 유물 등을 수습하면서 마무리되었다. 한편 [[영가의 난]]에 휘말려 행방불명된[* 실은 전온에게 팔려가서 노비가 되었다.] 임해공주가 우연히 건강에 들렀다가, 원제 사마예를 만났다. 임해공주는 전온의 딸이 자신에게 온갖 가혹 행위를 저지른 것을 사마예에게 알리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사마예는 임해공주를 구출하는 동시에 아울러 임해공주에게 가혹 행위로 일관한 전온의 딸과 그 아비 전온을 잡아들여 참수해버렸다. 이후 임해공주와 종정 조통[* 조운의 아들과는 동명이인.]의 중매를 서준 후에 그대로 조통에게 시집보냈다. 사마예가 왕도와 왕돈 등 낭야 지방 호족의 도움과 강남 호족의 연합으로 진나라를 중흥하여 강남만큼은 진나라의 영토에서 건져낸 것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본토를 수복하여 안정을 시키려는 큰 뜻은 없었고 자질이 평범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고 강남에 안주했다. 군자좨주 조적이 북벌을 건의했을 때는 마지 못해서 그를 예주 자사로 봉하고 경구를 지키게 했다. 조적은 뛰어난 용병술로 장강을 건너서 회음과 그 일대를 회복하고, 남하하는 석륵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사마예의 무관심과 동진 조정의 지원 미비로 결국 철수해야 했고, [[화병]]을 앓다가 옹구의 진채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봉조정 주숭은 진원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북벌을 먼저 해서 중원을 수복하고, 칭제할 것을 간했다가 분노한 사마예에게 죽을 뻔 했다. 무엇보다 사마예는 강동에서의 입지 강화를 최우선시했다. 권세가 나날이 강해지던 낭야 왕씨 가문을 견제하고자 점차 [[왕도(동진)|왕도]]와 [[왕돈(동진)|왕돈]] 형제를 멀리하고, 허물을 잘 들춰내어 호족들의 미움을 받던 [[유외(동진)|유외]]와 [[조협]]을 심복으로 중용했다. 이들은 성품이 워낙 강직해 권세가들을 채찍질할 줄만 알지 다스릴 줄은 몰랐으며, 황권이 분명 강화되긴 했으나 동시에 수많은 호족들의 불만을 샀다. 이에 일찍부터 반역의 뜻을 품게 된 왕돈은 불만을 가지고 상소했으나, 사마예는 그냥 무시하였다. === [[붕어#s-2|붕어]] === 영창 원년(322년) 정월, 왕돈은 유외와 조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창에서 군사를 일으켜 3월에 건강으로 쳐들어갔다. 사마예는 조협과 유외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들에게 말을 주어 각기 스스로 살 길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유외는 간신히 후조의 석륵에게 망명했지만[* 그러나 유외는 이로부터 11년 후인 333년에 [[석호(후조)|석호]]가 석랑과 석생의 난을 토벌하러 갈 때 종군했다가 석생의 장수 곽권에게 패하고 전사했다.] 조협은 연로해서 말을 못 타는 바람에 멀리 가지 못했다. 거기에 그는 인심을 잃어 결국 강승에서 사로잡혀 즉결 처형당하고 머리는 건강의 왕돈에게 보내졌다. 왕돈은 [[승상]]이 되었으나, 교만하고 횡포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공물은 대부분 그에게 들어가고 심충, 전봉, 제갈요 등을 앞잡이로 세웠는데 이들은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남의 땅과 가옥을 멋대로 침입하고 빼앗으며 대낮에도 약탈을 일삼고 옛 무덤을 도굴했다. 이로 인해 사마예는 분통이 터져 윤11월, 재위 6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영창 2년(323년) 2월, 건평릉에 안장되었다. == 평가 == 전대의 황제들이 망쳐서 사실상 멸망한 [[서진]]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기틀을 다진 만큼 능력은 있었으나 리더십과 인재 등용 등이 부족하여 결국은 [[동진]]을 강성하게 유지할 토대를 마련하지 못한 아쉬운 점도 좀 있었다. == 여담 == [[삼국지]]의 [[마초]]보다 생년과 몰년이 둘 다 정확히 100년이 늦는다. 마초는 176년생에 222년 몰, 원제는 276년생에 322년 몰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사마진 낭야왕)] [include(틀:진서)] [include(틀:서진의 계보도)] [include(틀:위서(북조))]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276년 출생]][[분류:323년 사망]][[분류:하내 사마씨]][[분류:뤄양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