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유식(후한)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운대 28장)] [include(틀:후한서)] 劉植 (? ~ 26) [목차] == 개요 ==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백선(伯先). 기주 거록군(鉅鹿郡) 창성현(昌城縣) 사람이다. [[운대 28장]] 중 한명으로 마지막 서열에 위치한다. == 생애 == 경시 원년(23년) 12월, 점쟁이 왕랑이 [[전한]]의 황족을 사칭하며 한단(邯鄲)에서 거병하였다. 유식은 왕랑을 따르길 거부하고 동생 유희(劉喜), 사촌형 유흠(劉歆) 등 친족들을 거느리고 고향에서 수천의 군사를 모아 창성현을 지켰다. 이윽고 [[광무제|유수]]가 계(薊)에서 빠져나와 왕랑과 맞서자 유식은 문을 열고 유수의 군대를 맞이하였다. 유수는 유식을 효기장군, 유희와 유흠을 각각 편장군으로 삼고 모두 열후에 봉했다. 이때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揚)이 왕랑에게 항복했는데, 그가 이끌던 병력이 무려 10여 만에 이르렀다. 이에 유수가 유식을 파견해서 유양을 설득하게 하니, 유양은 유식의 말을 듣고 변심하여 유수에게 귀순하였다. 유수는 진정에 머무르며 유양과의 결속을 더 단단히 하기 위해 유양의 생질인 곽씨(郭氏)와 혼인하기로 하였다. 유양과 제장들은 칠리(漆里)에 위치한 곽씨 저택에서 술자리를 마련하며 두 집안의 결혼을 축하하였고, 그 자리에서 유양은 매우 기뻐 직접 축(筑)[* 13개의 줄로 이루어진 고대 중국의 현악기.]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후 혼례를 마친 유수는 출병하여 수 개월간의 전투 끝에 한단을 손에 넣고 왕랑을 주살하였다. 경시 2년(24년) 가을, 유수가 하북의 도적떼를 멸할 때, 유식 또한 종군하여 비(郫), 청양(淸陽), 박평(博平)에서 동마적 수십만 무리를 격파하였다. 궁지에 몰린 동마적은 또다른 도적떼인 고호적, 중련적과 연합하여 맞섰지만 유수의 용병술에 당해 패하고 투항하였다. 또, 유수가 사견(射犬)에서 청독적, 대동적, 상강적, 우래적, 오번적, 철경적 등 도합 10여만 무리의 도적떼를 섬멸할 때도 작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경시 3년(25년) 5월, 하북에서 날뛰던 도적떼들은 약소해져 대부분 투항했으나 복종하길 거부한 잔당들은 북쪽으로 도주했다. 유수는 유식 등 13명의 장수들을 보내 끝까지 추격하게 하니, 토벌군은 평곡(平谷)에서 두 번의 전투를 벌여 그 잔당 1만 3천여 명을 참하였다. 이 전투로 완전히 대륙에서 설 곳을 잃어버린 도적떼는 요서(遼西), 요동(遼東), 심지어는 오환(烏桓)이나 한반도의 [[예맥]]까지 나아갔다가 현지 주민들에게 몰살당하면서 소멸하였다. 건무 원년(25년) 7월, 유수가 호현(鄗縣)에서 황제에 오른 후, 대사마 오한(吳漢)을 대장으로 삼고 유식을 포함한 11명의 장수들을 보내 현한의 낙양성을 포위케 하였다. 낙양을 지키던 현한의 좌대사마 주유(朱鮪)는 2개월 동안 공세를 버티다가 [[잠팽]]의 설득에 넘어가 낙양성을 들어 광무제에게 항복하였다. 건무 2년(26년), 창성후(昌城侯)로 개봉되었다. 광무제는 남쪽을 평정하기 위해 집금오 가복, 기도위 음식(陰識), 효기장군 유식을 보내 오사진을 건너 [[경시제]]가 임명한 언왕(郾王) 윤존(尹尊)을 치게 하였다. 윤존은 가복의 매서운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싸운지 한 달여 만에 광무제에게 투항하였다. 그 해, 밀(密) 땅에서 도적이 일어나자 유식이 이를 토벌하러 갔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작위는 아들 유향(劉向)이 이었고 동생인 편장군 유희가 형 대신 효기장군에 임명되었다.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공신]][[분류:26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