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유창조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송사)] [include(틀:동도사략)] [목차] == 개요 == 劉昌祚, 1022?~1088 [[북송]]의 명장으로, 자는 자경(子京)이며, 진정(하북성 진정현) 사람이다. 시호는 의숙(毅肅)이다. == 생애 == 사람됨과 위품이 뛰어났으며, 병법에 정통하고, 기사를 잘하였다. 그의 부친인 유하는 [[서하]]와 싸운 정천의 전역에서 희생되었으며, 부친의 공훈으로 우반전직주(右班殿直主)로 임용되어 이후 서로도순검(西路都巡檢)을 지냈다. [[요나라|요]]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신종(송)|송 신종]]이 친히 그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시험해 보았는데, 백발백중이어서 송 신종에 의해 즉시 통사사인에 임명된다. 서하의 군대가 유구보로 침입해오자 이에 기병 2천 명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적군이 흑산에서 만명의 기마대를 매복시켜 먼저 적은 부대를 내세워 거짓으로 패배한 척하여 유창조를 깊이 끌어들였다. 이에 포위되어 혈전을 벌였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해질 무렵 서하 장수의 기마가 앞으로 돌진하여 유창조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유창조가 활을 쏘아 적 장수의 목을 정확하게 맞추자 서하 장수는 즉사했다. 서하의 군사들은 장수가 죽자 곧 붕괴되었다. 전투 후 송군의 장수인 이사중이 조정에 유창조가 최고의 공을 세웠다고 보고해서 지계주에 임명되었다. 1081년 서하에 내분이 발생하자[* [[한족]] 출신의 서하 장수 이청이 [[북송]]과의 전쟁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국고가 비었다고 한 뒤 [[혜종(서하)|서하 혜종]]에게 [[황하]] 이남을 돌려주고 황하를 양국 경계로 삼아 화의를 맺어야 한다고 했으며, 북송과 연합해 양태후를 퇴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를 알아챈 양태후가 측근들과 함께 궁중 정변을 일으켜 이청을 죽인 뒤, 서하 혜종을 흥경부에서 5리 밖에 떨어진 목책 안에 감금시켜 버린 것이다. 이에 장수들이 반기를 들고 양태후 일족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토번]] 수령 우장화마가 송에 군사를 일으켜 태후를 징벌하면 서하 군민들이 호응할 거라는 밀서를 보냈다.] [[충악]][* 충악은 서하에 내분이 발생한 것은 하늘이 준 기회라고 하면서 이를 잘 이용하면 서하를 정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란도 복속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열흘 치의 군량만 있으면 족하다는 등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헌(북송)|이헌]], [[고준유]][* 북송의 외척으로, 그의 조부 고경은 구준과 함께 전연지맹을 성사시켰고 송 초의 명장이었다. 또한 송 신종의 어머니인 영종 고황후의 당숙이었다.], [[왕중정]][* 이헌과 함께 환관 출신이었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충악은 부연로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폭설로 인해 실패했고 인주로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한 왕중정은 겨우 몇 리만 진군해 놓고 서하의 국경으로 진입했다고 허위 보고했다. 또한 이헌은 난주를 수복하였지만 난주를 점령한 뒤 관망하기만 했다.] 이때 그는 경원부도총관에 임명되어 총관 요린(姚麟)과 함께 5만의 군대를 총괄했다. 또한 환경도총관 고준유의 통제 하에서 환경, 경원 양 지역에서 합쳐 서하를 공격하라는 명을 받았다. 유창조의 군대는 서하의 국경에 진입했지만 고준유의 군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마재애(磨臍隘)에 이르자 서하의 군대 10만 명이 지세를 믿고 저항하여 북송군이 가로막히자 두 방패를 손에 들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먼저 관문에 올랐고, 하병은 이를 두려워하여 조물러났고, 유창조는 군대를 지휘하여 올라가 승세를 몰아 1,700여 명의 적을 몰살했을 뿐 아니라 명소천으로 진격하여 식량을 탈취한다. 영주성에 이르러 서하의 군대가 성문을 아직 닫지 않았고 북송군의 선봉이 성을 탈취하여 성 내로 들어가고자 할 때 고준유가 사신을 보내 공성을 저지하자 어쩔 수 없이 성 공격을 중단한다. 그날 밤, 고준유는 영주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서하의 군대를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수천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구원하러 갔다. 이후 서하군이 철수하자 고준유는 유창조를 시기하여 늦게 구원하러 왔다는 이유로 유창조를 죽이려다가 부하들의 권유로 인해 유창조의 병권을 박탈한다. 이후 고준유가 18일 동안이나 성을 공격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서하의 군대가 7급 수로를 뚫어 물에 잠겼고, 송군은 궤멸했다. 그 이후 고준유는 패배의 책임을 유창조에게 돌린다. 1082년 경원으로 벼슬을 옮겼고 용신위사상도지휘사, 지연주로 되었다. 마정을 잘 하였고, 보채를 잘 수리하고 군사를 잘 돌보면서 누차 서하군을 격파하고 통군 2명을 죽인다. 또한 농산에서 군사를 모아 둔전하여 군력을 강화한다. 이후 전전부지휘사, 기주관찰사, 무강절도사 직책을 지냈고 1088년 사망했다. [[분류:송나라/인물]] [[분류:1088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