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의인왕후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조선 왕비)] ---- ||<#bf1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의인왕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이순신)]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선조의 정비[br]{{{+1 의인왕후 | 懿仁王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목릉 의인왕후릉.jpg|width=100%]]}}} || ||<-2> {{{#ffd400 {{{-2 목릉 전경}}} }}} || ||<|2> '''출생''' ||[[1555년]] [[5월 15일]]^^([[음력]] [[4월 15일]])^^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 ||<|2> '''사망''' ||[[1600년]] [[7월 26일]]^^([[음력]] [[6월 27일]])^^[br]{{{-1 (향년 45세)}}} || ||[[조선]] [[한성부]] [[덕수궁|정릉동 행궁]] [[덕수궁 석어당|석어당]][br](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세종대로]] 99) || || '''능묘''' ||[[유릉]](裕陵) → [[목릉]](穆陵) || ||<|2>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비}}}''' || ||[[1569년]] [[12월 18일]] ~ [[1600년]] [[7월 26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반남 박씨]] || || '''부모''' ||부친 반성부원군 박응순 (潘城府院君 朴應順, {{{-3 1526 ~ 1580}}}) 모친 완산부부인 [[전주 이씨|이수]][* [[세종(조선)|세종]]의 서차남 [[계양군]]의 현손녀이다.][* [[계양군]] → 영원군 이풍 → 도안군 이철 → 문천정 이수갑 → 이수][* [[태종(조선)|태종]]의 17녀 [[숙신옹주]]의 외고손녀.][* [[숙신옹주]] → 심안의의 처 윤씨 → [[청송 심씨|심빈]] → 도안군 이철의 처 심씨 → 문천정 이수갑 → 이수] (完山府夫人 李壽, {{{-3 1528 ~ 1595}}}) || ||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녀 || || '''배우자''' ||[[선조(조선)|선조]] || || '''자녀''' ||{{{#!folding 양자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임해군]](臨海君, {{{-3 1572 ~ 1609}}}) 차남 - [[광해군]](光海君, {{{-3 1575 ~ 1641}}})}}}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전호''' ||효경전(孝敬殿) || || '''존호''' ||장성(章聖) || || '''휘호''' ||휘열정헌경목(徽烈貞憲敬穆) || || '''시호''' ||'''의인왕후(懿仁王后)''' ||}}}}}}}}} || [목차] [clearfix] == 소개 == [[조선]] 제14대 [[조선/왕사|국왕]] [[선조(조선)|선조]]의 [[왕비|정비]]. 성은 박(朴)이고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이다. == 생애 ==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외할아버지 문천수 이수갑은 [[세종(조선)|세종]]과 [[신빈 김씨]]의 아들인 [[계양군]]의 증손자이다. [[1569년]](선조 2년), [[선조(조선)|선조]]와 [[결혼]]하여 15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소생은 없었다. 결혼 초기부터 [[후궁]]인 [[공빈 김씨]]와 [[인빈 김씨]]에게 밀려 평생 남편인 [[선조(조선)|선조]]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공빈 김씨]] 소생으로 일찍 생모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자기 친자식처럼 여겼으며 [[광해군]]을 [[왕세자|세자]]로 책봉 당시 직접 [[양자(가족)|양자]]로 들이기도 하였다. [[인빈 김씨]]는 [[공빈 김씨]]가 죽고 난 이후에 [[선조(조선)|선조]]의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고 자신의 장남이자 선조의 4남인 [[신성군]]을 [[왕세자]]로 만들려 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후견인인 의인왕후와 여러 의미로 [[정적]]이기도 했다. 한편 의인왕후가 [[왕비|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나 [[인목왕후|새 왕비]]가 [[영창대군|적통 왕자]]를 낳으면 [[인빈 김씨]]가 밀려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이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맞물려서 지켜주고 있던 셈이었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다만 [[불임]] 이외에 의인왕후는 [[왕비]]로서의 결격사유가 아예 없어서 쫓겨날 리가 없었기에 [[인빈 김씨]]가 기본적으로 궁녀 출신이라 왕비가 될수있었을리도 없었고 왕비에게 무례하게 굴기는 커녕 의인왕후에게 숙여야했다. 훗날의 [[숙종(조선)|숙종]]이 투기와 불임을 이유로 [[인현왕후]]를 쫓아낸 사례가 있긴하나 [[숙종(조선)|숙종]] 재위 당시에도 [[불임]]은 결격사유가 사실상 아니었으며 [[인현왕후]]의 투기는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준인데다 그 외에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매우 불합리하고, 말도 안되는 처사라고 신하들이 만장일치로 당연 반대하였고, [[숙종(조선)|숙종]]은 자신의 초특급 정통성에서 오는 [[조선/왕사|국왕]]의 권위로 찍어누르며 [[사약]]과 [[반성|고신]]이라는 수단까지 동원해서 억지로 감행했다. 이로 인해 [[숙종(조선)|숙종]]은 당대나 지금이나 매우 큰 비판을 받고있다. 하물며 아직 [[성리학|유교]]질서도 크게 정립되지 않았고, [[조선/왕사|왕권]]이 [[숙종(조선)|숙종]]만큼 강하지 않았던 [[선조(조선)|선조]]는 [[불임]]이라는 이유 하나로 정비 의인왕후를 쫓아낼 수 없었고 실제로 그 정도로 막나가는 임금은 아예 아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남편 [[선조(조선)|선조]]와 피난길에 올랐으나 군민들에게 길이 가로막혀 [[1595년]](선조 28년)에나 [[선조(조선)|선조]]와 만났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남편 [[선조(조선)|선조]]와 떨어져 [[분조]]를 이끄는 [[왕세자|세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을 갔는데 [[일본군|왜군]]이 철수할 때까지 환도하지 못하다가 2년 뒤인 [[1599년]](선조 32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 중 열악한 피난 생활 등으로 [[결핵]]을 앓게 되었고 병세에 차도가 있었지만 점점 불면증, 식욕 부진과 음식을 먹으면 구토하는 증상 및 숨이 가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등의 증상을 앓았고 결국 [[1600년]](선조 33년) 병세가 깊어져 [[6월 27일]]에 향년 46세(만 45세)로 끝내 [[사망|승하]]하였다. 죽은 뒤에는 [[유릉]](裕陵)에 매장되었으며 후에 [[선조(조선)|선조]]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위치한 '''[[동구릉|목릉]](穆陵)'''의 곁으로 이장되었다. >'''[[비망록|비망기]]''' >---- >[[의인왕후|대행]](大行)이 [[궁궐|곤전]]에 있으면서 두 대비(大妃, [[인성왕후|공의왕대비]] · [[인순왕후|의성왕대비]])를 받들어 섬김에 >정성과 효를 다하였고, [[선조(조선)|나]]를 섬김에도 공경을 다하여 한결같이 어김이 없었다. >그리고 [[반남 박씨|외가]]의 사사로운 일로 요구하지 않았으며, >[[후궁|빈어]](嬪御)를 대함에도 은애가 지극하여 그들 보기를 수족같이 할 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아이들을 어루만지기를 자기 소생보다 지나치게 하여 항상 자신의 곁에 두기에, >내가 간혹 그 소행을 시험하여 여러 아이들을 장난삼아 질책하면 문득 [[의인왕후|대행 왕비]](大行王妃)의 뒤로 도망가 숨곤 하였는데, >대행 왕비(大行王妃)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 주었다.[* 【여기에서 대행 왕비가 여러 아이들을 친애하고 여러 아이들이 대행 왕비를 친애하여 받들었던 점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아울러 언급하였다.】] >평생 동안 조급히 서두르는 언행과 표정을 나타내지 않으며, >[[궁녀|궁인]]과 [[노비|여종]]에 대해서도 또한 일찍이 화를 내어 꾸짖지 않았다. >그리고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修飾)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속에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록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仁慈)하고 관후(寬厚)하며 유순(柔順)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 >아,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어 대덕(大德)은 반드시 장수하는 법이건만, >불행히도 자식을 두지 못하고 수명 또한 길지 못하였으니, 천도는 과연 지각이 있는 것인가. >운명이란 이처럼 일정하지 않은 것인가. 마후(馬后)[* [[후한]] [[명제(후한)|명제]]의 황후인 [[명덕황후(후한)|명덕황후]]를 지칭.]의 덕행으로도 자식을 두지 못하였고 또 장수하지 못하였다. >내 이에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 >- '''[[선조(조선)|선조]]''' 의인왕후가 죽은 후 [[왕비|중전]]의 자리가 비게 되어 훗날 [[논란]]의 여지, 큰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 이후 51세의 [[선조(조선)|선조]]는 19세의 [[인목왕후]] 김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여 적통인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의 존재는 [[선조(조선)|선조]]의 유일한 적통으로 당시 [[왕세자]]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어 [[광해군]] 즉위 후에 벌어진 [[계축옥사]]와 [[경운궁|서궁 유폐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 가계 == * '''친정([[반남 박씨]])''' * '''아버지 :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 * '''어머니 : 완산부부인 [[전주 이씨|이씨]](完山府夫人 李氏)''' * 오빠 : 박동언(朴東彦)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시조부 : [[중종(조선)|중종]] 이역(李懌)''' * '''시조모 : [[문정왕후]] [[파평 윤씨|윤씨]](文定王后 尹氏)''' * '''시아버지 : [[명종(조선)|명종]](明宗) 이환(李峘)''' * '''시어머니 : [[인순왕후]] [[청송 심씨|심씨]](仁順王后 沈氏)''' * '''배우자 / 자녀''' * '''남편 : [[선조(조선)|선조]](宣祖) 이균/이연(李鈞/李昖)''' * '''양자 :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 * 양며느리 : [[문성군부인|폐비]] [[문화 유씨|류씨]](廢妃 柳氏) * 양손자 : [[폐세자 이지|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 == 평가 == [[성격]]이 좋고 현명하며 됨됨이가 착한 사람이였고 특히 어린 [[나이]]에 친어머니를 잃은 [[광해군]]을 직접 품안에 두고 키웠기에 더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의인왕후는 15세에 [[선조(조선)|선조]]의 [[왕비]]가 되었는데 [[선조(조선)|선조]]의 법적 어머니였던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 [[조선]] 13대 임금 [[명종(조선)|명종]]의 [[왕비]]. [[선조(조선)|선조]]가 [[조선/왕사|왕위]]에 올랐을 때 1년간 [[수렴청정]]했다.]와 큰어머니였던 [[인성왕후]] 박씨[* 조선 12대 임금 [[인종(조선)|인종]]의 왕비. 의인왕후와는 같은 [[반남 박씨]]이다.]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모셔 두 대비들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총애를 넘어서 아예 [[인성왕후]]와 [[인순왕후]]가 의인왕후의 입지를 위해 그녀를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1575년]](선조 8년), 의성왕대비인 [[인순왕후]]가, [[1577년]](선조 10년), 공의왕대비였던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의인왕후는 너무나 슬퍼했다고 한다. 이런 의인왕후의 성격은 바로 아버지의 영향이 컸는데 아버지인 박응순은 성격이 검소하고 바른 사람이여서 [[선조(조선)|선조]]의 국구(國舅, [[조선/왕사|왕]]의 [[장인어른]])인줄 몰랐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매우 겸손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를 닮은 의인왕후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유가 나름 있다. [[외모]]도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유순했던 의인왕후에게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바로 '''[[불임]]'''. 의인왕후 스스로도 불임 문제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때문에 남편 [[선조(조선)|선조]]는 많은 [[후궁]]들을 들여서 [[왕자]]를 생산했는데, 특히 [[후궁]]들 중에서 [[공빈 김씨]]과 [[인빈 김씨]]를 총애해서 [[공빈 김씨]]에게는 [[임해군]]과 [[광해군]], [[인빈 김씨]]에게는 [[정원군]][* [[인조]]의 친아버지. 훗날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됐으나 아들인 [[인조]]가 아예 [[인조반정|반정]]의 정당성과 정당화를 위해 아버지를 [[추존]]된 왕인 '[[원종(조선)|원종]](元宗)'으로 [[묘호]]를 내리고 [[종묘]] 영녕전에 신주를 모셨다.]을 포함한 4남 5녀를 얻었다. 이처럼 [[선조(조선)|선조]]가 [[후궁]]들에게 많은 자식을 낳은 것을 보면 불임의 문제는 [[선조(조선)|선조]]가 아니라 의인왕후에게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렇다고 [[왕세자|세자]]를 늦게 책봉한 건 그냥 [[인빈 김씨]]의 소생인 넷째 [[신성군]]을 제일 이뻐해서 그에게 [[조선/왕사|왕위]]를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지, 딱히 [[방계]]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 때문이 아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의인왕후가 그녀만의 외로움을 떨쳐내는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후궁]]들과 후궁의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의인왕후는 비록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남편 [[선조(조선)|선조]]의 자식을 낳은 [[후궁]]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사랑을 베풀었다. 사실 의인왕후는 [[인빈 김씨]]를 포함한 [[후궁]]들 사이에서 미묘한 입지를 보여왔지만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을 [[양자(가족)|양자]]로 삼아 [[왕세자|세자]]의 어머니, 후견인을 자처해 입지가 더욱 굳건해졌다. 이런 계기를 통해 의인왕후와 [[광해군]]의 관계가 모자 관계를 넘어서 [[정치]]적 동반자로 바뀌었다. 사실 의인왕후가 [[광해군]]을 예뻐하고 키우게 된 이유는 광해군의 친어머니 [[공빈 김씨]]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지 2년만에 산후 후유증(産病)으로 [[사망]]하였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선조(조선)|선조]]는 [[임해군]]과 [[광해군]] 등 [[공빈 김씨|공빈]] 소생의 [[왕자]]들을 홀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인왕후가 전적으로 [[공빈 김씨]]의 자식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의 [[양육]]을 직접 맡게 되었다. 특히 생후 2년만에 친모를 잃은 [[광해군]]이 상당히 불쌍한 [[아이]]였기에 그에게 더욱 신경을 썼다고 한다. [[광해군]]도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기에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된 의인왕후를 유난히 어머니처럼 따르게 되었고 심지어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선조(조선)|선조]]는 가장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와 함께 피난을 갔지만 의인왕후는 [[양자(가족)|양자]]인 [[광해군]]과 [[임진왜란|전]][[정유재란|란]] 내내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선조(조선)|선조]]의 [[후계자]] 건의'''(건저 문제)'''가 가속화되자 [[정철]]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광해군]]을 [[왕세자|세자]]로 추천할 만큼 [[광해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렇다고 [[광해군]] 외에 다른 [[후궁]]의 자식들도 홀대하지는 않았다. 만약 의인왕후가 [[선조(조선)|선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신성군]]을 [[양자(가족)|양자]]로 삼았다면 그의 친모인 [[인빈 김씨]]의 권한이 커질 가능성이 커서 오히려 [[광해군]]을 직접 밀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광해군]]의 경우에도 생모인 [[공빈 김씨]]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고인]]이라 [[공빈 김씨]]의 [[힘]]이 커져 [[트러블]]이 일어날 우려도 없었다. 의인왕후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광해군]]을 끝까지 지원했고 [[조선/왕사|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이렇게 훌륭하게 [[내명부]]를 다스린 의인왕후가 [[죽음|승하]]하면서 남편 [[선조(조선)|선조]] 역시 매우 슬퍼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남편 [[선조(조선)|선조]]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아이를 낳지도 못해 [[왕비]]로서의 권위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도 못한 의인왕후는 [[후궁]]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친자식마냥 잘해 줌으로서 자신의 자리와 입지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왕실]]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며 다른 [[후궁]]의 자식이 [[조선/왕사|임금]]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수긍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 의인왕후는 본래의 성품이 온화하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올바른 마음과 바른 행동을 보였던 왕비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자녀는 없었지만 [[왕비]]라는 직함으로 [[후궁]]들에게 군림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를 않았다는 점은 [[권력]]에 대한 욕망은 크지 않았고 [[광해군]]의 사람됨을 보고 [[왕세자|세자]]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의인왕후가 [[광해군]]의 후견인이 되어주면서 [[광해군]]은 물론 [[인목왕후|큰]] [[영창대군|걸림돌]]들이 있었으나 훗날 [[조선/왕사|임금]]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광해군]]이 [[조선/왕사|왕]]이 된 후 [[편집증|의심병]]이 심해지고, [[계축옥사|옥사]]를 저지르는 등 [[왕세자|세자]]시절과 다르게 삐걱대는 이유가 거의 유일한 지원군이자 심리적 버팀목이던 의인왕후가 아버지 [[선조(조선)|선조]]보다 일찍 [[사망]]한 것이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영창대군]] 이전에도 비슷한 [[신성군]]이 있었지만 그는 의인왕후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의인왕후가 더 장수해서 [[선조(조선)|선조]]보다 오래 살았다면 [[인목왕후|큰]] [[영창대군|불씨들]]과 [[계축옥사|분]][[인조반정|란]]도 없었을 테고 정실 [[왕비]]의 지지까지 얻는 [[광해군]]의 정통성은 더이상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다.[* [[선조(조선)|선조]]가 의인왕후를 다소 홀대하긴 했으나 훗날의 [[영조]]가 [[정성왕후]]를 대한것과 달리 [[후궁]] 이하의 취급을 한 것도 아니고, 싫어한 것도 아니었다. 금슬도 원랜 나쁘지 않았다가 [[불임]]으로 인해 멀어진 것이며 [[임진왜란|전]][[정유재란|쟁]] 이후 권위가 높아진 [[광해군]]을 견제하던 [[선조(조선)|선조]]에 맞서서 [[광해군]]을 계속 감쌌기 때문에 더 멀어진 것이기도 했다.][* 원래 대비의 역할에 왕의 정통성을 세워주는것이 어느정도 들어있다. 당장 광해군이 쫓겨나고 왕이 된 인조도 대왕대비인 [[인목왕후]]의 생전에는 대왕대비의 권위에 기댔고, 아버지 선조 또한 집권 초기에는 왕대비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더불어 많이 기댄 편이다. 특히 서자라는 흠이 있는 광해군에게 후견인인 왕대비가 있었다면 보증까지 있는 마당에 쫓겨날 가능성이 적었을 것이다.] 덧붙여서 의인왕후가 만일 매우 장수해서 대비의 자리까지 앉았다면[* 의인왕후는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그리 단명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의인왕후와 같은 [[반남 박씨]]이자 큰어머니 뻘인 [[인종(조선)|인종]]비 대비 [[인성왕후]]가 [[1577년]](선조 10년)까지 살아서 60대의 나이로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광해군]]도 내심 의인왕후의 장수를 매우 기대했을 것이다.] [[광해군]]은 폐모살제를 저지를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의인왕후가 살아있었으면 모두가 내심 죽기를 바라던 [[임해군]]조차 의인왕후의 커버로 간신히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임해군]]이 [[사이코패스]] [[살인마]]였다지만 의인왕후가 [[광해군]]과 함께 직접 거둬서 기른 만큼 의인왕후의 얼굴을 봐서라도 [[광해군]]이 사이코인 친형을 죽이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한 [[인조반정]]으로 쫓겨나지도 않고 [[조선/왕사|왕]]으로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 여담 == * 의인왕후의 사촌동생 박동량(朴東亮)은 자신의 아들을 [[선조(조선)|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를 혼인 시켜 며느리로 맞았다. * 의인왕후의 외가는 [[전주 이씨]]이다. 실제로 윗대를 올라가면 고조부가 [[계양군]] 이증([[세종(조선)|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의 아들)에게 닿는다.[* 더군다나 계양군의 부인은 조카인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부인인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친언니이다.] 따라서 선조는 세종의 6대손, 의인왕후는 세종의 외6대손에 해당하니 이들은 12촌이다. * 본인과 남편 선조, 실제 시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모두 세종과의 [[후손]]들로 엮인다. 선조는 세종의 적2남 [[세조(조선)|세조]]의 5대손,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세종의 적2녀 [[정의공주]]의 외증손, 본인은 세종의 서2남 [[계양군]]의 외5대손이다. * 그리고 의인왕후 본인과 남편 선조는 [[세종(조선)|세종]]과 [[한확]]을 공통 조상으로 한다. 의인왕후의 외할아버지가 문청정 이수갑인데 세종의 서2남 [[계양군]]의 증손자이며 또한 계양군의 부인인 정선군부인 한씨는 [[인수대비|소혜왕후]]의 친언니이기에 [[세종(조선)|세종]]으로 항렬을 보면 12촌, [[한확]]으로 보면 11촌이 난다. * [[조선]] 후기에 현달하는 [[반남 박씨]] 가문과 인물들은 모두 의인왕후의 형제들의 후손이라고 보면 된다. == 대중매체에서 == [[선조(조선)|선조]]가 집권할 때 [[임진왜란]]이 겹쳐 있기 때문에 반드시 등장한다. 선조가 무능력한 남편으로 늘 등장한다면, 의인왕후는 그런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후궁]]들에게 밀리지만 조용히 선조와 선조의 후궁들과 그 소생들을 조용히 내조하는 역할이다. *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드라마)|임진왜란]]에서는 배우 [[김용선#s-3]]이 연기했다. *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이효춘]]이 연기했다.[* 이때 의인왕후의 상궁으로 출연한 배우가 바로 위 항목의《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드라마)|임진왜란]]에서 의인왕후를 맡은 김용선이다.~~중궁전 상궁의 하소연이 진심으로 들린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황미선이 연기했다. * 2014년 [[KBS]]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배우 [[임지은]]이 연기했다.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는 배우 [[황인영]]이 연기했다. == 참고 문서 == * [[공빈 김씨]] * [[광해군]] * [[동구릉]] * [[명종(조선)|명종]] * [[명종실록]] * [[선조(조선)|선조]]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신성군]] * [[영창대군]] * [[인목왕후]] * [[인빈 김씨]] * [[인성왕후]] * [[인순왕후]] * [[임진왜란]] * [[임해군]] [[분류:조선의 왕비]][[분류:반남 박씨]][[분류:1555년 출생]][[분류:1600년 사망]][[분류:종로구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