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갑식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 [[정치인/목록]] [include(틀:제3대 국회의원/전라남도)] [include(틀:제4대 국회의원/전라남도)] [[파일:external/rokps.or.kr/432.jpg|width=150]] 李甲植 1904년 2월 10일 ~ 1972년 7월 8일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정치인]]이다. 1904년 [[한양|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신호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 조선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조선기계제작소 [[이사장]], 대한신철공업회 이사장, 한국군수산업촉진회 [[이사(직위)|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구례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국민당]] [[이판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자유당 [[이한창]]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자유당에서 중앙위원에 임명되었다. 1955년 국회 상공위원장 겸 자유당 전라남도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고기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다시 [[이영언]] 등과 기소되어 [[혁명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1963년 [[허정]]의 [[신정당]]에 입당하였다가 탈당하고 [[국민의당(1963년)|국민의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양시|광양군]]-구례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선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5년 통합야당 [[민중당(1965년)|민중당]]에 속하였다가 민중당을 탈당하고 1966년 [[신한당]]에 몸담았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현재(1930)|이현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분류:1904년 출생]][[분류:1972년 사망]][[분류:제3대 국회의원]][[분류:제4대 국회의원]][[분류:자유당 국회의원]][[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