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rr20240101판에서 저장되지 않은 문서입니다.자동으로 r20190312판 문서를 읽어왔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일본 국철 3대 미스테리 사건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国鉄三大ミステリー事件 1949년, [[일본국유철도]](국철)을 둘러싸고 잇달아 벌어진 의문의 사건들을 통칭하는 말. == 배경 == 당시 [[일본]]은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SCAP/GHQ]])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북한]]이 수립되고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자 그동안 일본의 민주화를 정책기조로 삼는 것에서 일본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반공 방파제로 삼는 것으로 정책기조가 변화했다. 이에 따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소위 [[닷지 라인]]이라는 일본의 긴축재정안을 시행한다. 일본의 경제를 재건해야만 일본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긴축]] 정책을 시행한다는 명분하에 행정기관 정원법을 만들어 [[공무원]] 28만명 감축을 단행했다. 문제는 일본 국철에서만 무려 10만여명의 인원감축 바람이 불었고 [[일본 공산당]]과 [[일본국유철도|일본 국철]] 노조는 인원감축안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 열린 [[1949년]] 1월의 [[중의원]] 선거에서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일본 자유당]]이 264석의 과반의석을 확보했지만 또한 동시에 [[일본 공산당]]이 기존 4석에서 35석으로 약진한 것은 이런 불만이 반영된 결과였다. 일본 공산당이 약진하자 일본 공산당과 공산당의 영향하에 있던 전일본 산업별 [[노동조합]] 회의와 일본 국철노조는 이 여세를 몰아 요시다 내각의 타도와 일본에 사회주의 인민정부 수립을 목표로 거센 저항을 시사했다. 그런 가운데서 7월 4일, 일본 국철의 초대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는 일차로 3만명의 직원들에게 [[해고]] 통고를 단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9년]] 7월 6일 일본국철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실종 끝에 열차에 참혹하게 치인 시체로 발견된 '''[[시모야마 사건]]'''을 시작으로 7월 15일에는 [[미타카역]]에서 무인열차가 폭주해 일어난 '''[[미타카 사건]]'''이, 8월 17일에는 [[마츠카와역]]과 [[카나야가와역]] 사이의 선로에서 고의로 레일에 손을 대 열차가 탈선하게 된 '''[[마쓰카와 사건]]'''들이 거의 한두 달 사이에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시모야마 사건은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사했음에도 결국 유야무야 마무리된 뒤 시모야마의 [[자살]]로 결론을 내렸으며, 미타카 사건과 마쓰카와 사건에서는 공산당원과 일본 국철 내의 노조원 등이 벌인 범행으로 발표하고 기소했으나, 재판 과정에서 기소된 이들의 혐의가 풀리고 [[무죄판결]]이 잇다르는 반전이 발생했다. 당시 국철을 두고 잇다른 이 사건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탓에 일본 국철의 3대 미스터리 사건들로 불리고 있다. 일본 내에서는 좌파 척결과 노동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연합군 최고 사령부나 일본 정부, 경찰이 벌인 음모 내지는 [[자작극]]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일부 인사의 증언에도 그와 같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기묘하게도 이 사건들 외에도 [[1949년]] 비슷한 사건들이 더 있었던 걸로 드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대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의혹과 논란이 일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들은 일본 공산당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인식을 최악으로 바꾸어 버렸고, [[1952년]]에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는 공산당의 모든 후보들이 낙선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났다. [[데즈카 오사무]]의 아야코, [[우라사와 나오키]]의 [[빌리 배트]]에서도 시모야마 사건의 음모론을 이야기한다. === 3대 미스터리 사건 === * [[마쓰카와 사건]] * [[미타카 사건]] * [[시모야마 사건]] === 유사사건 === * [[니와사카 사건]] * [[마리모호 탈선 사건]] * [[요산선 사건]] [[분류:일본의 미제 사건]][[분류:쇼와 시대/철도사고]] 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