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장간지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룡정변 5대 공신)] ||<-2> {{{#ece5b6 '''{{{+1 신룡정변 5대 공신[br]한양문정왕(漢陽文貞王)[br]{{{+1 張柬之 | 장간지}}}}}}'''}}} || || '''{{{#fff 작호}}}''' ||<(> 한양군공^^(漢陽郡公)^^ → 한양군왕^^(漢陽郡王)^^ || || '''{{{#fff 시호}}}''' ||<(> 문정^^(文貞)^^ || || '''{{{#fff 성}}}''' ||<(> 장(張) || || '''{{{#fff 이름}}}''' ||<(> 간지(柬之) || || '''{{{#fff 자}}}''' ||<(> 맹장(孟將) || || '''{{{#fff 부친}}}''' ||<(> 장현필(張玄弼) || || '''{{{#fff 조부}}}''' ||<(> 장칙(張則) || || '''{{{#fff 출생}}}''' ||<(> 625년 ~ 706년 || || '''{{{#fff 출신}}}''' ||<(> 양주(襄州) 양양현(襄陽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맹장(孟將). [[신룡정변]]의 5대 공신 중 한 명으로, 원로격 인물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양주(襄州) 양양현(襄陽縣) 출신으로 625년에 태어난 장간지는 유가의 경전와 사학을 섭렵하였고 태학생이 되었다. 당시 [[영호덕분]]이 장간지의 뛰어난 재능을 보고 그를 귀중하게 여겼다. 이후 장간지는 진사에 급제하여 청성현승(靑城縣丞)으로 보임되었고, 689년(영창 원년)에는 현량과에 응시하고 1등으로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로 발탁되었다. 689년 당시 장간지의 나이는 64세였다. === 무주 시기 === 장간지는 성력 연간에는 봉각사인(鳳閣舍人)까지 올랐다. [[돌궐]]의 [[묵철가한]]이 딸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측천무후]]는 [[무승사]]의 아들인 회양왕(淮陽王) [[무연수]](武延秀)에게 묵철가한의 딸을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장간지는 “예로부터 오랑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중국의 왕과 짝을 지은 천자는 없습니다.”라고 간언하다가 측천무후의 분노를 사서, 합주(合州) 자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촉주(蜀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매년 5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요주(姚州)에 주둔시켰는데, 문제는 요주로 가는 길이 멀고 산세가 험해서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장간지는 이러한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측천무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뒤에 장간지는 형주(荊州) 대도독부 장사로 발령받았다. 이후 측천무후가 재상인 [[적인걸]]에게 기이한 재주를 가진 선비에 대해 물었는데, 적인걸은 장간지를 천거하였다. >적인걸: 만약 폐하께서 문장과 자격을 원하신다면 지금 재상으로 있는 이교(李嶠)와 소미도(蘇味道)가 있다면 족합니다. 어찌 문사가 사소한 일에 얽매여서 일을 이루기 부족하다 하겠습니까? >측천무후: 그렇소. >적인걸: 지금 형주 대도독부로 있는 장간지는 비록 연로하지만 재상의 재능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를 등용하신다면 반드시 나라에 절개를 다할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적인걸의 이야기를 듣고, 장간지를 낙주(洛州) 사마로 벽소하였다. 측천무후는 한참 뒤에 다시 적인걸에게 재상이 될만한 인물을 구하였는데, 적인걸은 측천무후가 장간지를 제대로 등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따졌다. >적인걸: 신이 일찍이 장간지를 천거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폐하께서는 그를 등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측천무후: 짐은 그를 발탁했소. >적인걸: 신은 장간지를 재상으로 천거했습니다만, 사마로 등용한 것은 그의 재능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적인걸은 측천무후에게 장간지를 다시 천거하여, 장간지를 사형소경(司刑少卿)으로 삼고 추관시랑(秋官侍郎)으로 승진시켰다. 뒤에 [[요숭]]이 영무(靈武)로 발령받을 때, 측천무후는 요숭에게 재상을 맡을만한 이를 물어보았다. >요숭: 장간지는 침착하고 중후하며, 모략이 있어서 능히 큰일을 결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연로하니, 폐하께서는 서둘러 그를 등용하시길 바랍니다. 요숭은 측천무후에게 장간지를 빨리 재상으로 임명하라며 그를 추천하였고, 장간지를 동봉각난대평장사(同鳳閣鸞台平章事), 봉각시랑(鳳閣侍郎)으로 삼았다. === [[신룡정변|궁중 쿠데타]] === 705년, 측천무후는 세월의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병으로 눕게 된다. 당시 측천무후의 측근은 [[장역지]], [[장창종]] 형제로, 그들은 측천무후가 병으로 누운 틈을 타서 정사를 좌우하였다. 장간지는 [[최현위]], [[경휘]], [[환언범]], [[원서기]]와 함께 뜻을 합쳐 [[신룡정변|궁중 쿠데타]]를 모의하였고 우림군대장군 [[이다조]]도 포섭하였다. 장간지는 측천무후의 태자인 [[중종(당)|당중종]]으로부터 쿠데타의 묵인을 받았고, 쿠데타를 일으킨 뒤 중종을 맞이하였고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처형한 뒤 측천무후에게 퇴위를 압박하였다. 측천무후는 쿠데타 일파의 퇴위 요구를 수용하여 중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이렇게 측천무후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당나라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중종이 복위한 뒤, 장간지는 천관상서(天官尙書), 봉각난대삼품(鳳閣鸞台三品)으로 발탁되었고, 한양군공(漢陽郡公)으로 책봉되었고, 실봉 500호를 받았다. 이후 얼마 안 있어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하고,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 쿠데타는 성공했지만 ===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처형되고 당나라가 부활한 뒤, 측천무후의 조카인 [[무삼사]]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무삼사는 장간지 일파가 무씨 일족들을 처형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종의 황후인 [[위황후]], [[안락공주]]와 합작하여 장간지 일파를 모함하였다. 장간지는 이로 인해 재상에서 파면되고, 특진이 더해졌으며, 한양군왕(漢陽郡王)으로 진봉되었다. 당시 특진이라는 직위는 명예직에 가까운 지위였기 때문에, 무삼사는 이러한 조치를 통해 장간지 일파가 가지고 있던 실권을 빼앗아버린 것이었다. 장간지는 실권을 상실한 뒤 고향인 양주로 돌아가 요양하기를 청하였고, 중종은 장간지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양주 자사로 임명하였다. 장간지는 정정문(定鼎門)에서 중종과 신하들의 전별을 받은 뒤 양주로 돌아와서 친지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엄벌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자신이 받은 한양군왕의 작위를 사양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거부당했다. 하지만 무삼사는 여전히 장간지 일파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들을 없앨 명분을 찾고 있었다. 때마침 왕동교(王同皎)의 반란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무삼사는 이를 장간지 일파와 연결시켜 장간지 일파를 참소하였다. 무삼사는 장간지 일파에 대해 삼족을 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중종은 장간지 일파가 세운 공을 생각해서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다. 장간지는 신주(新州) 사마로 좌천되었고 신주에 이르러 분사하였다. === 사후의 추증 === 706년에 장간지 일파가 죽고 1년 뒤인 707년에는 [[절민태자]]에 의해 무삼사 부자가 살해되었고, 710년에는 [[예종(당)|예종]]의 아들인 [[이융기]]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위황후와 안락공주 일파가 처형되었다. 복위한 예종은 장간지를 중서령으로 추증하였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장간지의 아들 1명에게 관직을 내렸다. 이후 718년에는 [[현종(당)|현종]]에 의해 [[최현위]], [[경휘]], [[환언범]], [[원서기]]와 함께 중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덕종(당)|덕종]] 건중 연간에는 사도(司徒)로 추증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25년 출생]][[분류:706년 사망]][[분류:샹양시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