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rr20240101판에서 저장되지 않은 문서입니다.자동으로 r20210301판 문서를 읽어왔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장기민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 성명 ||장기민(張基民) || || 이명 ||장치복(張致福) || || 호 ||송곡(松谷) || || 생몰 ||[[1897년]] [[3월 17일]] ~ [[1921년]] [[2월 24일]] || || [[출생지]]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송용리[br](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 인근의 노송리·용호리와 함께 [[장(성씨)|결성 장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장홍진]]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본관]] ||[[장(성씨)|결성 장씨]] || || 사망지 ||[[충청남도]] [[연기군]] || || 추서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장기민은 1897년 3월 17일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결성 장씨 문중의 서당인 육영재(毓英齋)에서 장성휘(張星輝)의 지도 하에 학문을 수학했고, 장성휘로부터 대조선사(大朝鮮史) 교재를 숙지하며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연기군수는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각 면을 순회 강연하며 "시국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동면에서 이 연설을 지켜본 장기민은 "한국인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하다가 연설장에서 쫓겨났다. 이후 장기민은 평소 뜻을 같이하던 장홍진(張弘鎭)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3월 28일 저녁에 동네 주민들을 선도하여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21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장기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결성 장씨]][[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 인물]][[분류:1897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