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rr20240101판에서 저장되지 않은 문서입니다.자동으로 r20210301판 문서를 읽어왔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장진성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울진 장씨]][[분류:예천군 출신 인물]][[분류:1895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 || 성명 || 장진성(張進聖) || || [[본관]] || [[장(성씨)|울진 장씨]] || || 생몰 || [[1895년]] [[3월 17일]] ~ [[1943년]] [[8월 3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산택리 || || 사망지 || [[경상북도]] [[예천군]]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장진성은 1895년 3월 17일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산택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에게 가담해 포장(砲將)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이강년을 따라 단양, 풍기, 정선 일대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가 1896년 7월 이강년이 의병을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7년 이강년이 요동으로 망명한 [[유인석]]을 따라갈 때 그도 함께 수행했으며, 이강년이 다시 의병을 일으켰을 때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강년이 1908년 일본군에게 체포된 후 처형되자 보은 속리산에 은신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연행되던 중 탈출해서 승려가 되어 수도 생활을 하다가 1943년 8월 3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진성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