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지우베르투 지우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폴라음악상 수상자)] ---- |||| '''{{{+1 지우베르투 지우}}}[br]Gilberto Gil'''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Gilberto Gil.jpg|width=100%]]}}} || || '''본명''' ||지우베르투 파수스 지우 모레이라 [br]Gilberto Passos Gil Moreira|| ||<|2> '''출생''' ||[[1942년]] [[6월 26일]] ([age(1942-06-26)]세) || ||[[브라질]] [[바이아]] 주 [[사우바도르]]|| || '''국적''' ||[include(틀:국기,국명=브라질)] || || '''직업''' ||싱어송라이터, 정치인|| || '''장르''' ||MLB, 트로피칼리아 || || '''활동''' ||1959년 ~ 현재|| ||<|2> '''재임기간''' ||제12대 브라질 문화부 장관 || ||[[2003년]] [[1월 1일]] ~ [[2008년]] [[7월 30일]] || || '''배우자''' ||Belina de Aguiar ^^(1965–67)^^ [br]Nana Caymmi ^^(1967–69)^^ [br]Sandra Gadelha ^^(1969–80)^^ [br]Flora Gil ^^(1981~현재)^^|| || '''자녀''' ||8명|| [목차][clearfix] == 개요 == 브라질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정치인. 1960년대 MPB 장르의 대부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 스타일은 보사노바, 록, 삼바, 아프리카 음악, 레게 등 다양한 장르를 합친 것이다. == 생애 == === 음악 === 바이아의 주도인 사우바도르에서 태어나 이투아수(Ituaçu)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주제 지우 모레이라는 의사였고, 어머니 클라우지나 파수스 지우 모레이라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에서 들은 드럼과 트럼펫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코디언을 사주었고, 10살 때부터 사우바도르에 있는 음악 학교에 4년 동안 재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Os Desafinados''라는 밴드를 만들고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같은 시기 [[보사노바]]가 급부상하며 인기를 끌자 [[주앙 지우베르투]]의 음악에 감명받은 지우베르투 지우는 클레식 기타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 커리어는 1962년부터 시작되었다. ''As Três Baianas''라는 여성 4인조 그룹의 'Bem Devagar'라는 노래를 작곡 및 아코디언 연주를 맡았다. 또한 국영석유기업인 페트로브라스를 위한 노래인 'Povo Petroleiro'를 녹음하고 지역 TV방송에 활발하게 출연했다. 이듬해, 개인 EP 엘범 ''Gilberto Gil: Sua Música, Sua Interpretação''를 발매했다.[* 4개 곡이 수록되었다.] 또한 대학 동문[* 벨로주는 철학과, 지우는 경영학과 전공이다.]이자 동갑내기 지기인 [[카에타누 벨로주]]를 만나며 서로 많은 음악적 영감을 교류하게 된다. 1964년 7월엔 지우와 벨로주는 3명의 가수와 협력하여 사우바도로의 빌라벨랴 극장에서 뮤지컬 ''Roberto Sant'Ana''를 공연했다. 1964년 12월, 바이아 연방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상파울루로 이주했다. 1968년 발매한 앨범 ''Tropicália: ou Panis et Circenses''은 트로피칼리아라는 새로운 브라질 음악 장르의 시초이기도 하다. 영국 [[비틀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브라질과 아프리카의 리듬을 영국과 미국의 [[로큰롤]]과 [[팝 록]]과 융합한 특징을 보였다. 당시 유행한 음악풍을 'Tropicalismo'라고 부른다. 지우의 첫 히트곡은 1969년 발매된 ''Aqule Abraço''였다. 1960년대 내내 지우는 TV 프로그램에 자주 출현했는데 1968년 12월 'Divino Maravilhoso'라는 프로에서 군부를 풍자하여 이듬해 2월 체포되어 3개월동안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영국 런던으로 추방되었고 1972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Expresso 2222'' (1972) 앨범을 시작으로 다시 활발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영어로도 발매하여 미국 투어를 돌기도 했다. 브라질 흑인 음악 장르인 아포세(Afoxê)의 부흥을 위해 'Filhos de Gandhi'라는 단체에 가입했다.[* 흑인 브라질인만 가입이 가능하다는 규칙이 있다.] [[지미 클리프]]와 공동작업한 ''No Woman, No Cry''는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히트를 친 [[레게]] 앨범이기도 한다. 1998년 발매한 ''Quanta Live''는 1999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월드 뮤직 앨범을, 2005년엔 ''Eletracústico''앨범으로 그래미상 최우수 컨템포러리 월드뮤직 앨범을, 2016년엔 ''Gilbertos Samba Ao Vivo'' 앨범으로 다시 한번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월드 뮤직 앨범을 수상했다. ''OK OK OK''(2018)는 브라질 롤링 스톤 잡지의 2018년 브라질 음반 4위, 상파울루 예술 비평가 협회가 선정한 2018년 하반기 브라질 최고의 앨범 25개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 정치 === 지우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관리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보고 싶어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1987년 사우바도르 시의 문화국장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1988년 [[브라질 민주운동당]](PMDB) 소속으로 사우바도르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 3월 21일, [[녹색당(브라질)|녹색당]]에 입당했으며 현재까지도 당적을 유지 중이다. 브라질 해역을 보호하는 환경 보호 단체인 온다 아줄(Onda Azul)을 설립했다. 2001년 10월 16일,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다. 2003년 1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브라질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임기 동안, 가난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음악 기술과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Culture Points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을 후원했다. 또한 무료 다운로드가 가능한 브라질 음악 인터넷 저장소를 만드는 것을 추진하기도 했다. 2008년 7월 30일 부로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분류:브라질 남가수]][[분류:브라질의 작곡가]][[분류:1942년 출생]][[분류:사우바도르 출신 인물]][[분류:이탈리아계 브라질인]][[분류:브라질의 클래식 기타리스트]][[분류:남성 클래식 기타리스트]]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