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진휴선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남강충장왕(南康忠壯王)[br]{{{+1 陳休先 | 진휴선}}}''' || || '''작위''' ||무강현공(武康縣公) → 남강군왕(南康郡王) || || '''시호''' ||충장(忠壯) || || '''성''' ||진(陳) || || '''이름''' ||휴선(休先) || || '''부모''' ||부황 [[진문찬|태조]][br]모후 안황후 || [목차] [clearfix] == 개요 == [[진문찬]]의 아들로 [[진(남조)|남진]]의 초대 황제 무제 진패선의 동복동생이었다. == 생애 == 진휴선은 젊은 시절에 호방하고 큰 뜻을 품었으며, [[간문제(양)|간문제]] 소강이 동궁에 있을 때 그에게 중시되었다. 태청(太淸) 연간,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강은 진휴선에게 천 여 명의 군사들을 모으도록 지시하고 문덕주수(文德主帥)로 임명했다. 진휴선은 얼마 뒤에 죽었다. [[경제(양)|경제]] 소방지가 즉위한 뒤인 557년, 진휴선은 시중(侍中), 사지절(使持節), 표기장군(驃騎將軍),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추증되고 무강현공(武康縣公)으로 추봉되어 식읍 1,000호를 받았다. 같은 해에 진패선이 소방지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남진의 초대 황제인 [[무제(남진)|무제]]였다. 진휴선은 다시 시중,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사도(司徒)로 추증되고 남강군왕(南康郡王)으로 추봉되었으며, 식읍 2,000호를 받고 충장(忠壯)으로 추시되었다. 진패선은 진나라를 건국한 뒤 진휴선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아우가 살아있었다면 하락(河洛)을 평정하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분류:양(남조)/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