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창덕궁 수정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창덕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s-2|{{{#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3> {{{#ffd700 {{{+1 '''창덕궁 수정전'''}}}[br]{{{-1 昌德宮 壽靜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창덕궁,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종로구)|와룡동]] 2-71번지) || ||<-2> {{{#ffd700 '''건축시기'''}}} || [[1623년]] 이전 {{{-1 (창건 추정)}}}[br][[1654년]] {{{-1 (개수)}}} [br][[1881년]] {{{-1 (소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수정전.png|width=100%]]}}} || || {{{#gold ''' 〈동궐도〉에서 묘사한 수정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수정전 현판.jpg|width=100%]]}}} || || {{{#gold ''' 수정전 현판[*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의 대비전(大妃殿) 중 하나로, [[창덕궁 경훈각|경훈각]]의 서북쪽에 있었다. 처음 이름은 수정당(壽靜堂)이었다. 현재는 없다. == 역사 ==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궁궐지》에 ‘[[인조반정]]으로 [[궁궐]] 안이 모두 탔으나 수정당만 남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광해군]] 때에는 지은 듯 하다. [[효종(조선)|효종]]이 1654년(효종 5년)에 [[창경궁 통명전]]에 머물던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장렬왕후)[* [[인조]]의 [[왕비|계비]]. [[효종(조선)|효종]]의 [[계모]]이다.]가 아프자 [[창덕궁]]에 모시려고 기존의 있던 건물을 수리, 증축하여 고쳐지었다. 정언[* 임금에게 --목숨 걸고-- 간언하는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원.] 이상진의 [[상소|상소문]]을 볼 때 원래는 가볍게 놀던 공간이었던 듯 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qa_10502010_003|#]] 그러나 병이 잘 낫지 않자 [[장렬왕후|자의대비]]는 옛 총부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그 곳이 살기 불편하여 곧 수정당으로 돌아왔고, 이에 [[효종(조선)|효종]]은 불과 1년 뒤인(...) 1655년(효종 6년)에 '수정당이 산을 등져있어 비좁다'면서[[http://sillok.history.go.kr/id/kqa_10612004_004|#]] [[창덕궁 만수전|만수전]]이란 대비전을 따로 지었다. 만수전 완공 후 자의대비는 그 곳에서 머물렀다.[[http://sillok.history.go.kr/id/kqa_10804002_004|#]] [[정조(조선)|정조]] 시기에는 정조의 법적 할머니[* 할아버지 [[영조]]의 [[왕비|계비]]이니 할머니가 맞긴 한데 [[정조(조선)|정조]]보다 불과 7살 위이다.(...)] 예순대비([[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사용했으며 1794년(정조 18년) 12월에는 예순대비와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에게 책보와 책인을 이 곳에서 올리면서 이름 역시 ‘당(堂)’보다 더 위계가 높은 ‘전(殿)’을 붙여 수정전(壽靜殿)으로 고쳤다. 1813년([[순조]] 13년)에는 수정전의 행각이 불탔으나 수정전 본채는 무사했다. 1881년([[고종(대한제국)|고종]] 18년)에는 수정전 영역을 정비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za_11803001_001|#]], 같은 해 이름을 함녕전[* [[덕수궁]]의 침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과는 이름만 같다.]으로 바꿨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za_11807022_001|#]]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불 타 사라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811007_004|#]] 직후 바로 복구 공사에 들어갔지만 1882년 고종이 중단시켰고[[http://sillok.history.go.kr/id/kza_11906009_003|#]] [[경술국치|조선 멸망]] 때까지 끝내 재건하지 않았다. [* 다만 국권피탈까지 재건되지 않았다는 이 부분은 좀 의아하고 더 명확히 확인해봐야하는데, 1891년 7월 8일의 실록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함녕전의 상량문 제술(대들보를 올릴 때 쓰는 축문같은 것)과 옮겨짓는 길일을 고르는 기사가 확인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2807008_002|#]][[https://sjw.history.go.kr/id/SJW-K28070080-01000|##]] 함녕전의 부속건물을 옮길 때는 따로이 '함녕전의 제전각, 부속건물(별당)'로 구분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부속건물을 따로 함녕전으로 통칭하진 않았을 것이고, 옮겨짓는다는 것을 보면 1891년 당시 창덕궁의 건물들을 경복궁으로 옮기는 공사가 있었으니 함녕전을 재건해서 경복궁으로 옮겼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함녕전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면 일제강점기 때 또 헐려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9년간 중지한 공사를 재개한 것에 대한 서술은 없이 갑자기 1891년의 서술이 나타나는 것이 좀 의뭉스럽긴 하다.] 1891년(고종 28년) 함녕전의 별당들을 [[경복궁]]으로 옮겨 지었다. 그 중 하나가 현재 [[경복궁#s-4.3.6|경복궁 건청궁]]의 서쪽에 있는 [[중식|중국풍]] 건물 [[경복궁 집옥재|집옥재]]이다. == 구조 == * 《[[동궐도]]》를 보면,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를 올린 모습이다. 정면 앞의 1열은 하단에 [[암석|돌]] [[기둥]]을 놓아 누각처럼 보이게 했으며 정면 출입 칸에 월대를 4단으로 쌓았고 월대에서 건물로 올라가는 부분엔 작은 [[사다리]]를 2개 놓았다. *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정면 기준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대청 앞엔 [[마루|툇마루]]를 밖으로 두어 [[건물]] 내부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대청의 좌우로는 2칸씩 [[온돌|온돌방]]을 두었다. 동, 서 양 옆에 익각[*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을 두었고 익각은 행각과 붙어있어, 건물과 행각이 하나되는 ‘ㅁ’자 구조를 형성했다. 동쪽 온돌방과 동익각 외곽에는 가퇴를 두고 그 밑을 긴 [[나무]] [[기둥]]으로 받치게 했다. * 수정전 주변에는 많은 [[문]]들이 있는데, 수정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영훈문(迎薰門)이다. 단, 영훈문으로 들어와서 수정전이 바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널빤지로 된 [[담|담장]]과 그 담장 가운데에 있는 2칸짜리 솟을 문을 지나야 비로소 수정전이 보인다. 이렇게 동선이 복잡한 것은 아마 [[왕실]] [[여성]]의 공간이라, 외부에서 쉽게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 듯하다. 수정전 동북쪽 행각의 툇마루는 특이하게도 [[건물]] 밖으로 이어져있는데 툇마루 북쪽 끝으로 읍청문(浥淸門)과 연결된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수정전(壽靜殿)|#]] == 여담 == * 1800년(정조 24년) 6월에 [[정조(조선)|정조]]가 죽기 직전 [[유언|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수정전'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2406028_005|#]] 당시 수정전에 거처했던 [[정순왕후(조선 영조)|예순대비]](정순왕후)를 찾은 것. 부른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정황 상 뒷일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각주] ---- [[분류:창덕궁]][[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