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최언위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라삼최)] ---- ||<-2> '''{{{#white 나말여초의 지식인[br] {{{+2 최언위}}}}}}''' || || '''{{{#white 시호}}}''' ||'''문영공(文英公)''' || || '''{{{#white 향직 품계}}}''' ||'''정광(政匡)'''[* 사후 추증. 2품 2등위.] || || '''{{{#white 본관}}}''' ||[[경주 최씨]](慶州 崔氏) || || '''{{{#white 이름}}}''' ||신지(愼之) → 언위(彦撝) || || '''{{{#white 아들}}}''' ||최광윤, 최광원, 최행귀, 최행종 || ||<|2> '''{{{#white 출생}}}''' ||[[868년]] || ||[[신라|신라국]](新羅國) [[경주시|금성]](金城) || ||<|2> '''{{{#white 사망}}}''' ||[[944년]] (향년 76세) || ||[[고려|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 개주(開州)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삼국시대]]의 인물. [[신라]]와 [[고려]]의 문인 겸 관료.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승우]]와 더불어 [[신라삼최]]로 불렸다. == 생애 == [[6두품]] 최치원의 11살 어린 [[사촌]]동생으로 [[경주 최씨]] [[가문]] 출신이다. 886년 18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906년 [[중국]] [[당(통일왕조)|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했는데 신라와 [[발해]]의 은근한 [[경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당나라 빈공과 수석은 신라 출신 학생들이 거의 싹쓸이를 하는 수준이었는데 한 번은 발해 출신 [[오소도]](烏炤度)가 신라 학생 이동(李同)보다 높은 등수를 받아 신라를 이겼다.[* 최치원은 이를 가리켜 신라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깠다.] 이후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당나라 빈공과에 응시했는데 최언위가 오광찬보다 등수가 높았다.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는 오광찬의 등수를 최언위보다 높여줄 것을 당나라의 시험관 설정규에게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짓밟혔던 신라 학생들의 [[자존심]]을 최언위가 살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최언위는 중국에서 [[당나라]]가 907년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고[* 최언위의 지공거(시험 감독관 및 인맥)인 설정규가 당나라를 무너트리고 세워진 [[후량]]에서 어사사헌을 지냈기 때문에 그 휘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909년 [[후삼국시대]]로 혼란스러운 신라로 귀국하여 [[효공왕]]에게 집사성시랑(執事省侍郞)[* 집사성의 [[차관]]. 집사성은 신라 [[13부]] 정부 기관 중 하나.] -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 서서원 소속 직위. 서서원은 신라 [[국왕]]의 명령을 문서화하는 부서.] 직위들을 받아 역임한다. 최언위는 일찍이 [[벼슬]]을 버린 사촌형 최치원과 달리 오랫동안 벼슬을 지냈는데 특히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과 최언위의 딸이 [[혼인]]을 맺어 [[사돈]] 관계였을 정도로 크게 [[출세]]했다. 918년 [[태봉]]의 시중 [[태조(고려)|왕건]]이 고려를 건국했고, 최언위는 언젠가 고려에 귀부했는데 그 시기가 불명확하다. [[고려사]]에서는 918년 왕건이 즉위하자 경주 최씨 가문을 이끌고 고려에 귀부했다고 하는 반면, [[고려사절요]]에서는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따라서 개경으로 갔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서가 훗날 조선에서 편찬된 반면, 최언위가 직접 남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7615|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에 따르면 924년([[경애왕]] 원년)에 최언위가 신라의 집사시랑을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924년 이후에 신라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928년 정월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국서를 최언위가 썼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만약 이대로라면 고려사절요의 935년 귀부도 틀린 것이 된다. 하여간 당시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던 그가 언제인가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크게 우대해, 태자사부(太子師傅)[* ] 벼슬을 제수했다. 이는 고려 초기 [[수춘궁|태자부]]의 직위로 보인다.[* 당시 고려의 [[태자]]는 [[혜종(고려)|왕무]]였다.] 성품이 온후하고 신라 삼최로 일컬어질만큼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당시 고려의 많은 [[호족(한국사)|호족]] 가문들이 최언위를 존경했다고 한다. [[만월대|궁원(宮院)]]의 액호[* 額號 : 대문에 걸어놓는 현판.]를 모두 썼으며 높은 직위로 [[승진]]했다.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를 썼는데 당시 관작은 대상(大相) - 검교[[상서좌복야]](檢校尙書左僕射)[* 검교는 해당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걸 명시하기 위해 붙힌다.] 겸(兼) 어사대부(御史大夫)[* [[어사대]]의 장관.] - 상주국(上柱國)[* 최고위 훈위. 훈위는 실무직이 아닌 명예를 치하하기 위한 훈장에 가깝다.] -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 원봉성 소속 직위.]였다. 이후 944년 천수를 다하고 죽을 때까지 관직에 있었으며 관직이 평장사(平章事)[* 고려의 문산계 품계로는 정2품 직위이며 향직 품계로는 몇 품인지 알 수 없다.]에 이르렀다. 최언위의 최종 관작은 대상(大相)[* 향직 품계. 4품 1등위.] - 원봉대학사(元鳳大學士)[* 원봉성 소속 직위. 원봉성은 신라의 서서원과 같은 부서.] - 한림원령(翰林院令)[* 한림원의 장관. 한림원도 원봉성과 비슷한 부서.] - 평장사(平章事)[* 내의성의 차관. 내의성은 [[중서문하성]]의 전신.]였다. 사후 혜종에게서 정광(政[* 正의 오기로 보인다. [[고려사]] 선거지에는 바를 정 자로 나오기 때문.]匡) 향직 품계와 [[시호]] 문영(文英)을 추증받았다. 신라에 있던 시절부터 고려에 벼슬하던 시절까지 많은 승려들의 비문을 작성했고 상당수는 지금도 남아있다. 이 시대에 새긴 비문의 대부분이 최언위의 문장이다. 당시 시대상이 담겨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데, 흥녕사 징효대사탑비에서는 890년대 치안이 불안하던 난세 정국을, 고려에 귀부한 이후에 작성한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나 오룡사 법경대사 보조혜광탑비에서는 폭군 궁예를 물리친 왕건의 혁명과 중흥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작성하였다. == 기타 == * [[견훤]]과 [[태조(고려)|왕건]]이 주고 받았다는 국서는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견훤을 대신하여 고려왕에게 보내는 글)' 및 '대고려왕답견훤서(代高麗王答甄萱書, 고려왕을 대신하여 견훤에게 답하는 글)'로 알려진다. 간략한 고대사 기록에서 본 문장은 상대적으로 아주 자세히 [[사료(역사)|사료]]에 전해지는데 그만큼 두 글이 명문임을 반증한다.[* 출처는 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918&categoryId=62145&cid=62145|열전 견훤편]], 고려사 세가 태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788&categoryId=62161&cid=62131|10년(927)]],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789&categoryId=62161&cid=62131|11년(928)]] 기사.] 다만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상세한 내용과는 달리 필자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그나마 <[[동문선]]> 제57권에서는 '대견훤기고려왕서'의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0570_010_0020|필자를 최승우]]라 명시한 반면 '대고려왕답견훤서'의 필자는 무명씨로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0570_010_0030|소개]]하고 있으니 '최언위 집필설'은 불명확한 실정이다. == 가족 관계 == * 아들 * 최광윤(崔光胤): [[후진]](後晉)으로 유학을 가다가 [[거란]]에 붙잡혔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오히려 거란에서 관직을 주어 등용하였다고 한다. 후일 [[여요전쟁|거란의 고려 침공]]을 예측하여 본국에 서신을 보냈는데, 이는 [[정종(고려 3대)|정종]]의 광군 설치에 일조하였다. * 최행귀(崔行歸): [[오월(오대십국시대)|오월]](吳越)에서 유학하여 벼슬을 지냈다. 고려로 귀국해 관직을 제수했지만 광종의 대호족 숙청에 휘말려 죽었다. * 최광원(崔光遠) * 최행종(崔行宗) * 손자 * [[최항(972)|최항]](崔沆): 8대 현종의 배향공신. 최광원의 아들이다. == 대중매체에서 == 대중적으로 유명한 [[최치원]], [[최승우]]와는 달리 [[인지도]]가 낮다. 오히려 최언위를 대신해 [[최응]] 혹은 [[최지몽]]을 신라 3최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최승우, 최응, 최지몽이 비중있는 역할로 나왔고 최언위는 신라 3최로 이름만 언급되었다. 16화 17분 30초 무렵에는 "이 [[작품]]에서 최언위는 나중에 등장을 한다"라며 직접 등장할 것처럼 소개하기도 했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다. 최언위 정도라면 최승우의 [[라이벌]]이거나 모시는 [[주군]]은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의 [[벗]] 정도의 비중을 가져야 할텐데 이 포지션을 최응이 가져갔고, 그렇다고 명색이 신라 3최 중 1명을 일반 신료 정도로 묘사할 수도 없으니 나오지도 못한듯. 대고려왕답견훤서는 누가 썼는지는 나오지 않으며 고려는 최치원이 썼다는 거짓말로 백제 조정을 당황케하려는 술수를 부린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함께 신라 3최로 불렸던 [[최승우(태조 왕건)|최승우]]가 백제 조정에 중신으로 있는지라 효과는 없었다. *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도 이름만 언급되었다. 장남인 최광윤도 [[거란]]에 억류되어 있던터라 언급만 되는 정도이며 차남인 최행귀([[임병기]] 분)가 직접 등장하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삼국사기)] ---- [include(틀:고려사)] [[분류:후삼국시대/인물]][[분류:868년 출생]][[분류:944년 사망]][[분류:신라의 유학자]][[분류:고려의 유학자]][[분류:경주 최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