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최언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송나라/인물]][[분류:922년 출생]][[분류:988년 사망]][[분류:한단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崔彦進 (922년 ~ 988년) [[오대십국시대]] [[후주]], [[북송]]의 장수. == 생애 == 대명부(大名府) 출신으로 순박했고 담력과 지략이 있었으며, 궁술과 기마술에 뛰어났다.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 건우 연간[* 乾祐, 948년~950년]에 [[곽위]]의 수하가 되었고 [[후주]]가 들어선 뒤 위사(衛士)로 보임되었다. 곽위의 양자 시영이 전연(澶淵)에 진수할 때 최언진은 금병을 이끌고 시영을 따랐으며, 시영이 즉위한 뒤 공학지휘사(控鶴指揮使)가 되었다. 뒤에 후주에서 [[남당]]을 정벌할 때 종군하고 공을 세워 산원도우후(散員都虞候)로 승진하였으며, 와교관(瓦橋關)을 평정할 때도 종군하여 동서반지휘사(東西班指揮使)로 전임되고 소주자사(昭州刺史)를 겸임하였다. 960년, [[북송]]이 들어선 뒤 공학우상지휘사(控鶴右廂指揮使)로 전임되고 과주단련사(果州團練使)를 겸임하였다. 같은 해에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이균]]이 반란을 일으키자 최언진은 선봉부서(先鋒部署)로 임명되고 이균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워 상주방어사(常州防禦使)로 승진하였다. 최언진은 [[이중진]]을 평정할 때도 종군하여 호첩우상지휘사(虎捷右廂指揮使)로 전임되었다. 961년, 시위보군도지휘사(侍衛步軍都指揮使)로 승진하고 무신군절도사(武信軍節度使)를 겸임하였다. 북송이 [[후촉]]을 정벌할 때 최언진은 봉주로행영전군부도부서(鳳州路行營前軍副都部署)로 임명되었으나, 후촉이 멸망한 뒤 부하들의 약탈을 방조하거나 기타 다른 죄를 저질러 소화군절도관찰유후(昭化軍節度觀察留後)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태조(송)|태조]]가 서락(西洛)에서 교사(郊祀)를 올릴 때 내조하여 창신군절도사(彰信軍節度使)로 제수되었다. 977년, 하양(河陽)에 진수하였다. 979년, 북송이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 정벌을 단행할 때 군대를 나누어 태원성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이때 최언진과 영주방어사(郢州防禦使) 윤훈(尹勳)이 태원성 동쪽을 공격하고, 창덕군절도사(彰德軍節度使) [[이한경(북송)|이한경]]과 기주자사(冀州刺史) 우사진(牛思進)이 태원성 남쪽을 공격하고, 계주관찰사(桂州觀察使) [[조한(북송)|조한]]과 한림사(翰林使) 두언규(杜彦圭)가 태원성 서쪽을 공격하고, 창신군절도사(彰信軍節度使) 유우(劉遇)와 광주자사(光州刺史) [[사규(북송)|사규]]가 태원성 북쪽을 공격하였다. 최언진은 매우 신속하게 북한군을 공격하여 [[태종(송)|태종]]의 칭찬을 받았으며, 북한이 평정되고 유주(幽州)를 정벌할 때도 종군하여 다시 내공봉관(內供奉官) 강수균(江守鈞)과 함께 군대를 이끌어 유주성의 서북쪽을 공격하였다. 송군이 회군할 때 최언진과 서상합문부사(西上閤門副使) 설계흥(薛繼興)·합문지후(閤門祗候) 이수빈(李守斌)에게 군대를 거느려 관남(關南)에 주둔하도록 명했고 최언진은 검교태위(檢校太尉)가 더해졌다. 같은 해 가을에 [[요나라|요군]]이 수성(遂城)을 침공하자, 최언진은 [[유정한]], [[최한(북송)|최한]] 등과 함께 요군을 격파하고 1만 명을 참수하였다. 980년, 태종이 북쪽을 순행할 때 최언진은 관남도부서(關南都部署)로 임명되어 당흥구(唐興口)에서 요군을 물리쳤다. 986년, 태종이 요나라 정벌을 단행한다. 이때 최언진은 유주도행영마보군수륙부도부서(幽州道行營馬步軍水陸副都部署)로 임명되어 [[조빈(북송)|조빈]], [[미신(북송)|미신]]과 함께 웅주(雄州)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최언진은 조빈의 지휘를 어기고 다른 길을 따라 회군했다가 도리어 요군에게 패배했으며, 조정으로 소환되어 우무위상장군(右武衛上將軍)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최언휘는 987년 보정군절도사(保靜軍節度使)로 제수되었고 이듬해인 988년 병에 걸려 조정으로 복귀하라는 부름을 받은 뒤 그 해에 사망하여 시중(侍中)으로 추증되었다. 최언진은 자주 전공을 세웠으나 재화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고 이르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지 않았다. 최언진이 죽은 뒤 최언진의 아들들이 집안의 재산을 놓고 다투자, 결국 조정에서 해당 사안을 처리했다. 태종은 최언진의 아들들을 소견하고 사안을 해결한 뒤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자질구레한 사무라 짐이 관여해서는 안 되지만 단지 최언진이 일찍이 절도사를 맡았으니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