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탁발목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북위의 황족[br]{{{+2 拓跋目辰 | 탁발목진}}}''' || || '''시호''' ||없음 || || '''작위''' ||남평공(南平公) → --의도왕(宜都王)-- || || '''성''' ||탁발(拓跋) || || '''휘''' ||목진(目辰) || || '''자''' ||불명 || || '''생몰''' ||? ~ [[479년]] [[6월 4일]] || || '''출신''' ||대군(代郡) 평성현(平城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황족. 환제 [[탁발의타]]의 후손. [[탁발욱]]의 동생. == 생애 == 탁발목진은 초기에 우림랑(羽林郎)에 임명되어 도무제 [[탁발규]]의 남벌에 종군하였다. 이후 [[명원제]]와 [[태무제]]를 거쳐 문성제 [[탁발준]]까지 4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누차 승진하여 관직이 어느덧 시중, 상서좌복야에 이르렀고 남평공(南平公)에 봉해졌다. 화평 5년(465년) 5월, 문성제가 붕어하고 12살의 헌문제 [[탁발홍]]이 즉위하자, 거기대장군 을혼(乙渾)이 정권을 잡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신들을 숙청하였다. 탁발목진은 형 탁발욱과 함께 을혼 주살을 모의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탁발욱은 을혼에게 살해당했지만 탁발목진은 은밀히 도망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을혼이 [[문성문명황후 풍씨|풍태후]]에 의해 제거당했을 때, 다시 돌아와 나라를 위해 여러 정책들을 제안하여 내정의 공을 세웠다. 승명 원년(476년) 6월, 태상황 [[탁발홍]] 사후, 효문제 [[탁발굉]]은 조서를 내려 탁발목진을 사도로 삼고 의도왕(宜都王)에 봉했다. 이후 효문제는 탁발목진을 옹주(雍州) 자사로 옮겨 외직으로 나가게 하고, 장안(長安)을 지키도록 하였다. 탁발목진은 성정이 강직하고 지조가 굳어 백관들도 모두 두려워 할 정도였고, 자신만의 붕당을 이루는 일도 없었으나, 재물을 좋아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는 옹주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고 공무를 처리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 소문이 효문제의 귀에 들어가 내도당장(內都幢將) 우열(于烈)이 황제의 명에 따라 진상을 조사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탁발목진의 횡령과 수뢰 행위가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태화 3년(479년) 4월 29일[* 양력으로 계산할 시 6월 4일.], 탁발목진을 비롯해 진주(秦州) 자사 울낙후(尉洛侯), 장안 진장 진제(陳提)가 모두 뇌물죄로 걸려 형벌을 받게 되었다. 효문제는 탁발목진의 작위를 삭제하고 형벌을 내려 사사하였다. [[분류:남북조시대/황족]][[분류:탁발선비]][[분류:다퉁시 출신 인물]][[분류:479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