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프레드 헤이즈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2> '''{{{+1 프레드 워레스 헤이즈 주니어}}}[br]FRED WALLACE HAISE, JR.'''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astronautscholarship.org/AAMS2012-Haise-Fred.jpg|width=100%]]}}} || ||<-2> '''[[NASA|{{{#fff NASA}}}]] 시절'''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nasa.gov/579522main_FredHaise_ED11-0244-43_672.jpg|width=100%]]}}} || ||<-2> '''노년기''' || || '''출생''' ||[[1933년]] [[11월 14일]] ([age(1933-11-14)]세) || [목차] == 개요 == FRED WALLACE HAISE, JR.는 [[NASA]]의 전직 [[테스트 파일럿]], [[우주 비행사]]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아폴로 13호]]에서의 구사일생급 고생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아폴로 시절의 활동 못지 않게 '''[[스카이랩]]''', '''[[우주왕복선]]'''의 개발에 투신하여 NASA의 포스트 아폴로 시대를 선도한 주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커리어 == 1933년 11월 14일 태어나 [[미시시피]] 주 빌록시에서 자랐는데, 처음에는 NASA의 이미지와는 좀 엇나가게 전문대학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하는 문과생이었다. 전문대학 졸업 후에 군대 갈 나이가 되자 고소공포증을 극복한다고 1952년 해군항공사관후보생을 지원, 조종훈련 이수 후 1954년부터 [[미합중국 해병대]] 전투 조종사로 3년간 복무한 뒤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항공 공학을 공부한 뒤 공학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대학 졸업 후에는 오클라호마 공군 [[주방위군]]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고, 복무 중에는 [[NASA]]의 [[테스트 파일럿]](Research pilot)에 지원해 투잡을 시작했다. 1961년 베를린 위기 사태 당시에는 소속 부대가 현역 동원령이 떨어져 독일에 10개월간 파병되기도 했다. 1964년에는 미 공군 [[테스트 파일럿 스쿨]]을 수료했고, 1966년에는 미 공군에서 대위로 전역한 뒤 NASA [[우주 비행사]]에 선발되었다. 1972년에는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특이하게 해병대와 공군 2개 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데, 공군 복무기간이 휠씬 더 길기 때문에 프로필에는 공군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파일:external/niceville.com/FredHaise-702X336.jpg]] [[아폴로 13호]] 프로필 사진 촬영. 헤이즈는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아폴로 팀에 배정되었다. 대개는 지원팀 내지 관제팀에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헤이즈는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아폴로 8호]]에서 백업 승무원 자리를 얻었고, +3 로테이션에 따라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 팀에서 달 착륙선 조종사로 배정될 예정이었지만 중요한 미션이니 베테랑을 우선으로 써먹어야 한다는 논리 하에 [[마이클 콜린스(우주비행사)|마이클 콜린스]]가 사령선 조종사로, [[버즈 올드린]]이 달 착륙선 조종사로 배정된 채 다시 [[짐 러블]]의 백업 팀에 배정되었다. 이후 [[아폴로 13호]]의 [[앨런 셰퍼드]] 팀과 러블 팀이 순서를 맞바꾸며 러블의 팀이 13호에 배정되었으나, 우주비행 중 구토를 하고 '성공적인 실패'의 순간엔 우주 감기에 걸리고[* 월면화와 장갑이 모자랐다. 왜냐하면 달 착륙은 2명만 하는 것으로 예정되었기 때문.] 신장염까지 얻어버리는[* 산소 탱크가 터지는 바람에 물 생산이 끊겨 일당 90ml만 마시는 바람에 신장이 맛이 간 것. 이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한다.] 고난을 겪는 바람에 자포자기하여 멘붕을 일으키는 등 평생 전무후무한 고생을 했으니 그래도 사고 수습 이후 [[아폴로 16호]] 백업 사령관 겸 아폴로 19호의 사령관으로 내정되며 다시금 달을 밟을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예산 지원이 줄어들며 NASA는 [[아폴로 17호]] [[취소된 아폴로 미션들|이후의 미션을 모두 취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헤이즈는 말 그대로 새된 것. 그렇게 쓰린 속을 달래며 16호 백업을 뛴 다음,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 배정된다. 그렇게 우주왕복선 개발부문에서 진행된 이벤트가 바로 '''[[엔터프라이즈]]의 활강 테스트''', 일명 ALT.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0px-Space_Shuttle_Approach_and_Landing_Tests_crews_-_cropped.jpg]] [[고든 풀러튼]]과 헤이즈, [[조 엥글]]과 [[리처드 트룰리]]가 각각 한 팀을 이뤄 테스트를 진행했다. 다만 이 테스트를 진행하고 차기 우주왕복선들의 개발, 제작이 지체되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당초 [[스카이랩]]이 스카이랩 4팀의 귀환 이후 버려진 상태로 지구를 돌고는 있었지만, 우주왕복선이 정식으로 데뷔하면 헤이즈와 풀러튼의 팀이 진행할 STS-2 미션부터 '''바로 스카이랩에 도킹하여 궤도 상승을 시도한다'''는 복안이 있었기에 관계자들은 큰 걱정까지는 없었던 것. 하지만 개발이 늦어지고 여러 무인 탐사선 프로젝트와 셔틀 외의 신형 발사체 구상, 군사용 프로젝트 등 많은 연구가 진행되며 NASA 내에서는 스카이랩을 점점 경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스카이랩은 당초 계산보다 꽤 이른 시기에 궤도 하락 현상을 겪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테스트 이후, NASA는 결국 스카이랩을 포기했다. 헤이즈는 스카이랩의 유지를 강력히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NASA(와 정치인들)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1979년 6월에 NASA를 떠난다. 스카이랩의 소멸을 휴스턴에서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 이후 [[달착륙선]]의 개발사이기도 한 [[그루먼]]의 임원으로 채용되며 1994년 [[노스롭 그루먼]]으로의 합병을 목도한 뒤 1996년 은퇴했다. == 기타 == 아내 팻과의 사이에 4남매를 두었다. 특기할 점은, 큰누나와 14살이나 차이나는 막내아들이 1970년 7월생이라는 것. [[아폴로 13호]] 미션으로 고생하던 때 아내는 사춘기 딸과 두 꼬맹이 아들로 모자라 만삭의 임산부였던 것이다. [[아폴로 13]] 영화에서도 부인의 극심한 마음고생이 묘사된다. 영화에서 헤이즈를 연기한 빌 팩스턴과의 싱크로율은 그렇게 높지는 않은데, 이는 아무래도 이 시절의 헤이즈가 헤어스타일 관리에 원체 무관심했던지라 그냥 어리버리한 인상의 빡빡이 머리를 고집했기 때문. 이후 머리에 신경을 쓴 모습을 보면 꽤 훈남이다. [[파일:external/www.collectspace.com/soarwithsnoopy_haise01.jpg]] 이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분류:미국의 우주 비행사]][[분류: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분류:1933년 출생]][[분류:빌럭시 출신 인물]][[분류:미국의 군인]][[분류:오클라호마 대학교 출신]][[분류:하버드 대학교 MBA 출신]]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