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한성주보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1886년 설립]][[분류:1888년 해체]][[분류:조선의 신문]] [include(틀:대한제국의 신문)] ---- ||<-4> {{{#fff {{{+1 '''한성주보'''}}}}}}[br]{{{#fff {{{-1 漢城周報[br]Hanseong jubo (Hanseong Weekly)}}}}}} || ||<-2> '''국가''' ||<-2> [[조선|[[파일: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태극기.svg|width=30]] 조선]] || ||<-2> '''소재지''' ||<-2>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 박문국[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 ||<-2> '''창간''' ||<-2> [[1886년]] [[1월 25일]] || ||<-2> '''종간''' ||<-2> [[1888년]] [[7월 7일]] || ||<-2> '''설립기관''' ||<-2> 통리아문 박문국 || ||<-2> '''종류''' ||<-2> 주간신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성주보.jpg|width=100%]]}}} || || {{{#fff ''' 《한성주보》 제1호 표지 및[br] 1886년 2월 22일 자 《한성주보》에 실린 세창양행 광고[*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67472&ccbaKdcd=79&ccbaAsno=05050000&ccbaCtcd=11|사진 출처 - 《우리문화신문》.]]] '''}}}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 최초의 주간 [[신문]]. 《[[한성순보]]》의 후신이다. == 상세 == 1883년(고종 20년) 10월에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했다. 그러나 불과 1년 여 뒤인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박문국 사옥과 활자 · 인쇄시설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려 부득이 1년 만에 종간되었다. 《[[한성순보]]》는 종간되었으나 세간에서는 다시 신문을 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시 통리아문독판이었던 [[김윤식(조선)|김윤식]] 역시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하던 사람이었고, [[갑신정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1885년(고종 22년) 봄부터 신문 복간을 추진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처음에 민간 출판사인 광인사(廣印社)로 박문국을 이전해 신문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여건이 좋지 않아 박문국을 중건하여 제작하기로 했다. 인쇄 시설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들여오고 한성순보 편집진들을 모아 복간 작업을 한 끝에 1886년(고종 23년) 1월 25일에 마침내 《한성주보(漢城周報)》란 이름으로 제호를 바꾸어 신문을 복간시켰다.[*A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75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성주보》.]]] 개칭복간하면서 이전의 《[[한성순보]]》와는 다른 부분들이 생겨났다. 우선 《한성순보》는 10일마다 나왔으며 [[한문]]만 사용했는데, 《한성주보(漢城周報)》는 1주에 1번(매주 [[월요일]])마다 발매되었으며 [[국한문 혼용체|국한문 혼용]]이었다. 다만, 필요에 따라 한문만을, 혹은 [[한글]]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한성순보》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까지도 독자층으로 삼았다. 사실, 《한성순보》도 그러긴 했는데 순한문인데다가 관보 성격이 강해서 [[노잼|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한성주보》 역시 관보 성격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한글이 들어가서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 제국|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 광고도 실었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신문광고로, 구독료 이외에도 광고료로 수입을 얻으려는 것 역시 《한성순보》와는 달랐다. 기사는 크게 국내 정치, [[외신]], 논설, 박문국의 공고 등으로 나눠졌는데 주로 [[조선]]보다는 [[외국]] 소식을 더 많이 실었다. 외국 문물을 소개하는 기사를 많이 다루었으며 논설도 신문 기사에 대한 평이 아니라, 외국 신문에 실린 논설을 [[번역]]해서 실었다.[* 김혜진(2008), 《한성주보의 국어학적 연구》, 안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p. 15 ~ 17.] 이는 《한성주보》의 주 목적이 해외 소식을 많이 전해 백성들에게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우치게 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신문은 책자형이었으며 규격은 가로 15cm, 세로 20cm였고[*B 김혜진(2008), 《한성주보의 국어학적 연구》, 안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p. 15.] 활자는 4호를 사용했다.[*A] 초반에는 1면에 20행, 글자는 40자였다. 그러나 24호부터는 16행으로 줄어들었는데 1행 당 글자 수는 40자 그대로 유지했다.[*B] 1호 당 20면이 수록되어 있었으며 첫 면은 신문 이름과 호수, 두 번째 면은 발행한 날짜, 그리고 세 번째 면부터 기사가 실려있었다.[*B] 그러나 [[광고]]도 어느 순간부터는 잘 들어오지 않았고, 구독료 징수도 원활하지 못해 박문국의 재정난이 심해졌다. 결국 1888년(고종 25년) 7월 14일에 폐간되었다. 《한성주보》만 폐간당한 것이 아니라 신문을 제작하던 박문국 자체가 교섭아문으로 통합되었다.[* 김혜진(2008), 《한성주보의 국어학적 연구》, 안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p. 18.]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한성순보, version=20, paragraph=2)]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