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헨리 4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잉글랜드 국왕)] [include(틀:역대 아일랜드 영주)] ||<-2>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왕조 초대 국왕[br]{{{+1 헨리 4세}}}[br]Henry IV'''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Illumination_of_Henry_IV_(cropped).jpg|width=100%]]}}} || || '''왕호''' ||헨리 4세[br](Henry IV)|| || '''이름''' ||헨리 볼링브로크[br](Henry Bolingbroke) || || '''출생''' ||[[1367년]] [[4월]]경[br][[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볼링브로크 성|| || '''사망''' ||[[1413년]] [[3월 20일]] (향년 45세)[br][[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민스터]] 예루살렘 방|| ||<|2> '''재위''' ||<#E7E7E7,#2D2F34>[[잉글랜드 왕국]]의 왕|| ||[[1399년]] [[9월 30일]] ~ [[1413년]] [[3월 20일]]|| ||<|2> '''배우자''' ||마리 드 보헌 ,,(1381년 결혼 / 1394년 사망),,|| ||나바라의 호아나 ,,(1403년 결혼),,|| || '''자녀''' ||[[헨리 5세]], 토머스, [[랭커스터의 존|존]], 험프리, 블랜치, 필리파[* [[칼마르 연합]]의 [[에리크 7세]]와 결혼했다.]|| || '''아버지'''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 '''어머니''' ||랭커스터의 블랜치|| || '''형제''' ||[[랭커스터의 필리파|필리파]], 엘리자베스|| || '''종교''' ||[[가톨릭]] || || '''서명''' ||[[파일:헨리 4세 서명.svg|width=10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장미 전쟁]]의 주요 세력이 된 [[랭커스터 가문]]의 첫 번째 왕이다.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작위)|공작]] 곤트의 존과 블랜치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며[* 다만 어릴때 죽지 않고 장성한 자녀들로만 따지자면 곤트의 존은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중에 3남이었고, 헨리는 곤트의 존의 장성한 아들중에 장남이었다.] 왕이 되기 전 [[이름]]은 헨리 볼링브로크(Henry Bolingbroke)였다. == 즉위 과정 == 헨리 볼링브로크는 사촌동생이었던 국왕 [[리처드 2세]]로부터 해리퍼드 [[공작(작위)|공작]]과 더비 [[백작]]에 봉해졌는데 [[아버지]] 곤트의 존이 [[실권]]을 쥐고 있을 때는 딱히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1386년]]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으로 원정을 떠나자 20살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해 리처드 2세의 [[왕권]] 강화 시도를 반대했다. 그는 토마스 드 모브레이와 함께 청원파의 일원이 되었으며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왕에게 이를 강요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격노했고 그가 [[권력]]을 장악하자 [[1390년]] 헨리 볼링브로크는 화를 피할 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고대 프로이센|프로이센]]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리처드 2세는 헨리 볼링브로크를 끝내 용서하지 않았고 1398년 노퍽 공작 토마스 드 모브레이와의 불화를 구실삼아 국외로 추방했다. [[1399년]] 곤트의 존이 죽자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하고 헨리 볼링브로크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런데 리처드 2세는 아직 정국이 안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아일랜드]] 방문을 강행했고 이 틈을 타 헨리 볼링브로크는 [[잉글랜드]]를 침략해 뒤늦게 돌아온 [[리처드 2세]]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그를 [[퇴위]]시켰다. 이어 헨리 볼링브로크는 헨리 4세로 즉위했으며[* [[1399년]]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운명의 돌]]을 사용한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운명의 돌은 [[에드워드 1세]]가 [[1296년]]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면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져와 즉위식에 사용하는 의자를 새로 제작해 그 밑에 돌을 넣었는데 이후 현재까지 역대 잉글랜드 국왕 및 그레이트브리튼의 왕들은 이 돌 위에 앉아 왕관을 수여받았다. 물론 오늘날의 영국 왕들은 [[제임스 1세]] 이후로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기도 하니 상관없는 이야기이다만. ] 자신이 [[헨리 3세]]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인 점을 이용해 왕위 [[찬탈]]을 정당화시켰다. 그는 리처드 2세를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했고 리처드 2세는 몇달 후 여기서 사망했다. == [[귀족]]들의 [[위협]] == 하지만 결국 찬탈자였기에 몇몇 귀족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위협했다. [[1400년]]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이 꾸민 [[음모]]를 막아내고, 연달아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며 상당히 고생스럽게 왕위를 유지했다. 헨리 4세의 건강이 나빠지자 헨리 4세의 이복동생이자 곤트의 존의 [[사생아]] 가문[* 정확히는 곤트의 존이 오랜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위프트 사이에서 나온 5, 7, 8남의 가문. 헨리 4세는 이복동생들을 아버지의 적자로 인정했지만 왕위 계승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허나 [[장미 전쟁]] 시점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았다.]인 보퍼트 가문과 그의 후계자 [[헨리 5세|몬머스의 헨리]]와의 파벌이 형성되었다. 이에 헨리 4세와 몬머스의 헨리의 사이가 나빠졌으나, 몇 개월 후 헨리 4세가 죽으면서 몬머스의 헨리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 == 외교 == || [[파일:Manuel_II_Palaiologos_with_Henry_IV_of_England.png]] || || 1400년 12월 [[런던]]에서 마누일 2세를 맞이하는 헨리 4세[* 출처: St. Alban's chronicle 245페이지 - [[https://images.lambethpalacelibrary.org.uk/luna/servlet/detail/LPLIBLPL~17~17~179003~125372?page=244&qvq=&mi=244&trs=266]]] || 그의 치세 때 엘섬 팰리스에서 [[1400년]] [[12월]]부터 [[1401년]] [[2월]]까지 [[동로마 제국]]의 [[로마의 역대 황제|황제]] [[마누일 2세]]를 맞이한 뒤 함께 마상창시합도 한 적 있는데, 그는 [[잉글랜드]] 땅을 밟아본 유일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로마 황제]] 전체로 치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최초이긴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잉글랜드에 있었을 당시에는 황제가 아니었던데다, 잉글랜드 역시 당시에는 독립국이 아닌 [[로마 제국]]의 [[로만 브리튼|브리타니아 속주]]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트라키아]] 시기에 [[동로마 제국|동로마]]가 아닌 [[서로마 제국|서로마]]의 정제(正帝)로 처음 즉위했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로서 잉글랜드를 최초로 방문한 사람은 [[마누일 2세]]가 맞다.]. 헨리 4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마누일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가족관계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 '''1남''' || [[헨리 5세]][br]{{{-2 (Henry V)}}} || [[1386년]] [[9월 16일]] || [[1422년]] [[8월 31일]] || [[카트린 드 발루아]][br]슬하 1남[* [[헨리 6세]]] || || '''2남''' || 클래런스 공작 토머스[br]{{{-2 (Thomas, Duke of Clarence)}}} || [[1387년]] || [[1421년]] [[3월 22일]] || 마거릿 홀랜드[br] || ||<|2> '''3남''' ||<|2> [[랭커스터의 존|베드퍼드 공작 존]][br]{{{-2 (John, Duke of Dedford)}}} ||<|2> [[1389년]] [[6월 20일]] ||<|2> [[1435년]] [[6월 20일]] || 부르고뉴의 안 || ||<#f0f8ff>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 ||<|2> '''4남''' ||<|2>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br]{{{-2 (Humphrey, Duke of Gloucester)}}} ||<|2> [[1390년]] [[10월 3일]] ||<|2> [[1447년]] [[2월 23일]] || --에노 여백작 자클린-- || ||<#f0f0ff> --엘리너 코밤-- || || '''1녀''' || 팔츠 선제후비 블란체[br]{{{-2 (Blanche, Electress Palatine)}}} || [[1392년]] || [[1409년]] [[5월 22일]] ||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br]슬하 1남 || || '''2녀''' || 덴마크와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왕비 필리파[br]{{{-2 (Philippa, Queen of Denmark and Norway and Sweden)}}} || [[1394년]] || [[1430년]] [[1월 5일]] || [[에리크 7세]] || == [[대중매체]]에서 == * 헨리 4세는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 중 무려 2편의 주인공이다. 헨리 4세 1부와 2부로 나뉘기 때문이다.[* 영문과에서 학부 졸업을 했으면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은 알 것이다. <리처드 2세>, <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 및 <헨리 5세>가 그것이다.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에는 속하지 않지만 평론가들은 <리처드 3세>도 역사극으로 분류한다.] * 2010년대에 들어와 [[BBC]]에서는 셰익스피어 사극 4부작을 '할로우 크라운(Hollow Crown)'라는 제하로 2차례 구현하였다. 2012년판에서는 [[제러미 아이언스]]가 연기하였다.[* 본인 이야기인 '헨리 4세'에서만. 1화 리처드 2세에서의 젊은 헨리 4세(헨리 볼링브로크)는 [[007 시리즈]]의 [[빌 태너]]로 알려진 [[로리 키니어]](Rory Kinnear)가 연기하였다.]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리면서 초췌해지는 연기가 일품. 마지막에는 [[헨리 5세]][* [[톰 히들스턴]] 분]가 자신이 자는 사이에 왕관을 가져가자 분노하였으나, 이내 아들이 자신이 죽은 줄 알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는 용서하며 왕위를 승계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왕관)은 아직 네 것이 아니다. 원래 [[리처드 2세|내 것도 아니었지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망한다. 2016년판에서는 톰 스터리지가 연기하였다. *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 [[더 킹: 헨리 5세]]에서 [[벤 멘델슨]]이 연기하였다. 해리 퍼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궁정에서 장남인 헨리 5세에게 왕이 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차남인 토마스 왕자가 전사하자 죽어가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횡설수설하다가 헨리 5세에게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분류:잉글랜드 국왕]] [[분류:랭커스터 공작]] [[분류:아키텐 공작]] [[분류:랭커스터 가문]] [[분류:1366년 출생]] [[분류:1413년 사망]][[분류:링컨셔주 출신 인물]][[분류:프랑스 왕위 요구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