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홍무제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명 황제)]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홍무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홍건적 수장)] ---- [include(틀:원말명초 주요 세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명 초대 황제[br]{{{+1 태조 고황제 | 太祖 高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280px-A_Seated_Portrait_of_Ming_Emperor_Taizu.jpg|width=100%]]}}} || ||<|2> '''출생''' ||[[1328년]] [[10월 29일]][* [[율리우스력]] [[10월 21일]].][br](음력 [[문종(원)|천력]] 1년 9월 18일)|| ||호주 종리현[br](現 [[안후이성]] [[추저우시]] [[펑양현]])|| ||<|2> '''즉위''' ||[[1368년]] [[1월 31일]][*A [[율리우스력]] [[1월 23일]].][br](음력 [[혜종(원)|지정]] 28년/[[홍무]] 1년 1월 4일)|| ||금릉[br](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2> '''사망''' ||[[1398년]] [[7월 2일]][*B [[율리우스력]] [[6월 24일]].] (향년 69세)[br](음력 [[홍무]] 31년 윤5월 10일)|| ||남경 응천부 황궁 서궁[br](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 '''능묘''' ||[[명효릉|효릉]](孝陵)|| ||<|6> '''재위기간''' ||'''{{{#fff 오국공(吳國公)}}}'''|| ||[[1356년]] [[8월 5일]][* [[율리우스력]] [[7월 28일]].] ~ [[1364년]] [[2월 12일]][*C [[율리우스력]] [[2월 4일]].][br]{{{-2 (음력 [[혜종(원)|지정]] 16년 7월 1일 ~ 지정 24년 1월 1일)}}}|| ||'''{{{#fff 오왕(吳王)}}}'''|| ||[[1364년]] [[2월 12일]][*C] ~ [[1368년]] [[1월 31일]][*A][br]{{{-2 (음력 [[혜종(원)|지정]] 24년 1월 1일 ~ 지정 28년 1월 4일)}}}|| ||'''{{{#670000 초대 황제}}}'''|| ||[[1368년]] [[1월 31일]][*A] ~ [[1398년]] [[7월 2일]][*B][br]{{{-2 (음력 [[홍무]] 1년 1월 4일 ~ 홍무 31년 윤5월 10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주(성씨)#s-2.1|주(朱)]] || || '''휘''' ||원장(元璋)[* 초명은 중팔(重八)로 알려졌지만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팔'은 사촌들 이름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중팔이 아니라 중칠일 가능성도 있고 전혀 다른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이후 흥종(興宗) → 덕유(德裕) → 원장(元璋) 순으로 개명했다. 원장을 해석하면 "원나라를 주살하는 날카로운 무기"라는 뜻이 된다.[[http://m.blog.daum.net/shanghaicrab/16156877?np_nil_b=-1|#]]] || || '''부모''' ||부친 [[주세진]](인조 순황제)[br]모친 진씨(陳氏, 순황후) || || '''형제자매''' ||4남 2녀 중 4남 || || '''황후''' ||[[효자고황후]] || || '''후궁''' ||{{{#!folding 24명 [ 펼치기 · 접기 ] 성목귀비 손씨, 귀비 오씨·귀비 오씨,[* 자매 사이.] 귀비 강씨, 귀비 조씨, 숙비 이씨, 영비 곽씨, 혜비 곽씨, 혜비 최씨, 충비 호씨, 안비 정씨, 정비 달씨, 순비 호씨, 현비 이씨, 혜비 유씨, 여비 갈씨, 석비, 비 여씨, 비 양씨, 비 주씨, 비 한씨, 미인 장씨, 곡씨, 임씨 }}} || || '''자녀''' ||26남 16녀 || || '''자''' ||국서(國瑞) || || '''묘호''' ||[[태조]](太祖) || ||<|2> '''시호''' ||성신문무흠명계운준덕성공통천대효고황제[br](聖神文武欽明啓運俊德成功統天大孝高皇帝) ||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시호)|고황제]][br](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 || '''연호''' ||'''[[홍무]]'''('''洪武''', [[1368년]] ~ [[1398년]]) || || '''절일''' ||천수성절(天壽聖節) ||}}}}}}}}}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明太祖画像.jpg|width=350]] >'''명 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 >[[청나라]]의 [[고증학|고증학자]] 조익(趙翼) [[중국사]] 최후의 [[한족]] 통일[[왕조]] [[명나라]]의 [[창업군주]]. [[묘호]]와 [[시호]]를 합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라고 한다. 명나라는 [[연호#일세일원제|일세일원제]]를 따랐으므로 보통 [[연호]]인 홍무를 붙여 '''홍무제'''(洪武帝)[* [[병음]]: Hóngwǔdì (훙우디).]라고도 하는데, [[창업군주]]들이 늘 그렇듯[* (중국사) [[고제(전한)|유방]], [[고조(당)|이연]], [[태종(당)|이세민]], [[태조(송)|조광윤]], [[천명제|누르하치]] 등 / (한국사) [[동명성왕|고주몽]],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 [[고왕|대조영]], [[태조(고려)|왕건]], [[태조(조선)|이성계]] 등.] 본명인 '''주원장(朱元璋)'''으로도 유명하다. 사회적 계층의 가장 밑바닥의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국(동음이의어)|중국]]을 통일한 국가의 황제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이다.[* 민주주의적 선거 이전으로 한정했을 때 중국사에서는 [[한고제]] 유방, 세계사에서는 [[바이바르스]]와 같은 사례를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각각의 문서를 볼 것.] 여러 세력 휘하에 차례로 있으면서 갖은 고생을 하였으나, [[강남(중국)|장강 이남]]의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북벌]]을 단행하여 강북의 [[원나라]]를 [[만리장성]] 이북으로 밀어내어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중원]]을 통일한 이후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개국공신]]을 비롯한 많은 신료들과 그 가족들을 잔혹하게 [[숙청]]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유용]]의 옥과 남옥(藍玉)의 옥, 즉 '호람의 옥'에서 약 45,000 ~ 50,000 여명 가량의 측근과 일족이 목숨을 잃었고, 이를 [[호왈]] 10만으로 일컫기도 한다. == [[홍무제/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홍무제/생애)] == [[홍무제/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홍무제/평가)] == 대외 관계 == >사방의 제이(諸夷)는 모두 산으로 막히고 바다로 떨어져 있어 단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땅을 얻어도 산물을 가져올 수가 없고, 그 백성을 얻어도 감히 부릴 수 없다. 만약 그들 스스로가 살피지 못하고 우리 변경을 소란하게 한다면, 이는 그들에게 좋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중국의 걱정이 되지 않는데도 우리가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한다면, 역시 좋지 못할 것이다. > >나는 후세의 자손이 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단지 한때의 전공을 탐하여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할까 그것이 두려우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다만, 호융(胡戎: 몽골)과 중국은 국경이 붙어있어 오랫동안 전쟁을 펼쳐왔으니, 반드시 좋은 장수를 가려 뽑아 병사를 훈련시켜 그들에게 대비하여야만 한다. > >이제 나는 정벌하지 말아야 할 여러 나라의 이름을 열거하겠다. > >동북에서는 '''[[조선|조선국]].''' 정동편북에서는 [[일본]]국. 정남편북에서는 [[류큐 왕국|대유구국]], [[대만|소유구국]]. 서남에서는 안남국([[베트남]]), 진랍국([[캄보디아]]), 섬라국([[태국]]), 점성국([[참파]]), 소문달랍국([[수마트라]]), 서양국([[인도]] 남부), 일형국([[말레이시아]]), 백화국([[자바 섬]]), 삼불 제국([[팔렘방]]), 발니국([[브루나이]]). >---- ><황명조훈> 중 >짐이 조선과의 분쟁을 그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라!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이란 백성들에게 있어 재앙이 되지 않겠는가? 예부로 하여금 문서로 그들(조선)을 질책하도록 하고, 그래도 그들이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때 토벌을 이야기해도 실로 늦지 않을 것이다. >---- >《명 태조 실록》권 257 주원장은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해서, 중국은 이미 충분히 큰 나라이자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국이고, 노동력도 충분한 데다가 당시의 수준으로 상공업 및 국외 시장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경제적 차원'에서 다른 나라를 공격하기란 '무의미한 짓'이고, 이미 중국에 땅이 충분하고 사람 또한 넘치도록 있는데 풍속이 전혀 다른 나라를 점령해봐야 쓸모 있는 영토를 얻을 수도, 의미 있는 노동력을 얻을 수도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얄궂게도 그의 4남이었던 제3대 성조 [[영락제]] 주체는 아버지 홍무제가 남긴 <황명조훈>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무려 '''500,000명'''의 대군을 다섯 차례나 동원하여 북방 원정에 나섰고[* 오출삼려(五出三犁)], 남으로는 찬탈당한 황좌를 되찾기 위해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쩐 왕조의 쩐티엠빈을 돕고, 역적 [[호꾸이리]]를 처단한다는 구실로 '''8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당시 [[대월|대우]]국으로 불리던 베트남을 침공하여 호 왕조의 상황 [[호꾸이리]]와 황제 [[호한창|호안트엉]]을 잡아 남경에서 처형했다. 이후 베트남은 명나라에 합병되어 20년 동안 잠깐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역적 호꾸이리를 처단한 것까지는 좋은데 명나라가 베트남을 다시 통치하려다가 명군과 쩐 왕조 부흥군이 서로 싸웠다.(…)] [[레러이]]가 등장하여 명나라로부터 완전 독립했다. 영락제는 군사원정 이외에도 그 유명한 [[정화(명나라)|정화의 대함대]]를 조직하여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했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영락제 시기에 이르러 홍무제 주원장 말기에 비교해 60개국 이상 늘어났다. 그렇다고 유럽처럼 [[대항해시대]]를 열고 자체 발전에 뭔가를 투자한 것도 아니었다. 위세를 떨칠 수는 있었지만 돈만 잔뜩 썼을 뿐이었다. === [[고려]]·[[조선]] === 명 태조 홍무제의 치세는 한국사로 따지면 [[고려]] 말기의 [[공민왕]] ^^(1351년 ~ 1374년)^^, [[우왕]] ^^(1374년 ~ 1388년)^^, [[창왕]] ^^(1388년 ~ 1389년)^^, [[공양왕]] ^^(1389년 ~ 1392년)^^ 그리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 ^^(1392년 ~ 1398년)^^와 겹친다. 주원장이 중국을 통일해 대명을 건국한 뒤 [[고려]]에선 젊은 시절 원나라에서 유학해 중국어에 능통했던 [[이색(고려)|이색]]을 사신으로 보냈다. '''이색이 [[중국어]]에 능하다는 말을 전해들은 태조 주원장은 통역 없이 그와 대화하려 했는데 막상 이색이 [[중국어]]를 하자 알아듣질 못 했다.''' 분위기 싸해질 뻔한 걸 배석해있었던 예부의 관리가 급하게 끼어들어 입조한 지 오래되어 말을 잊어먹은 모양이라고 둘러대고 통역을 했다. 이때 주원장은 이색의 말이 꼭 요동 방면의 몽골족 군벌었던 [[나하추]]와 같다고 했는데, 원나라에서 유학한 이색은 몽골화된 대도(북경) 쪽의 중국어를 배웠고, 당시의 중국은 약 100년 동안 [[몽골족]]의 지배를 받던 [[원나라]]에서 한족의 [[명나라]]로 교체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몽골식 중국어를 일반적인 중국어로 생각해서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었다고 보면 된다. 반면 [[정몽주]]가 사신으로 왔을때는 정몽주의 강단이나, 첫 사신 방문 이후 조난을 당해 죽을뻔 함에도 다시 목숨걸고 어려운 걸음을 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는지 상당한 우대를 해주기도 했다. 어쨌든 지속적으로 태조 주원장은 고려가 원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신생 통일제국인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충성할 것을 강요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아 고려 말기 상당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조선]]의 국왕 [[이성계]]에게 대놓고 '내가 보기에 넌 왕노릇을 할 자격이 없다. 자꾸 까불면 치겠다.'고 서신으로 협박을 일삼으면서도[* 하도 갈궈대니 열이 받은 이성계가 "황제란 작자 하는 짓이 어린아이에게 공갈이나 치는 수작 아닌가?" 하고 벌컥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이성계 본인도 신하들이 "그래서 어쩌실려구요?"라고 물으면 "내가 더 사려야지 뭘 어쩌겠냐"는 식으로 대답해 화만 냈을 뿐 명나라를 침공하거나 하진 않았다.], 실제로 조선을 치자는 여론이 나오자 이를 대번에 묵살해버렸다. 이러한 점은 외교 관계에도 적용되어, 태조 주원장 시절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험악해져 갔다. 조선의 초대 왕 [[이성계]]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었던 상당한 무공을 세운 명장이었고, 만주의 [[여진족]]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명나라 건국 이후 [[철령위]] 설치 등의 문제로 인해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위해 군제 개혁을 벌이는 것이 명 태조 주원장을 자극해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정도전 일파의 사신들이 명나라에서 모욕을 받거나 사사당하면서[* 이와는 반대로 정도전의 반대파인 [[이방원]]과 그의 측근들은 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견제'를 벌인 것.] 급기야 양국 간 무력 충돌로 발전될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詔停造遼王宮室勑武定侯郭英曰遼東軍務物情來者多言其艱苦况邊境營繕朕嘗為卿言不宜盡力以困之今役作軍士皆強悍勇力善戰之人勞苦過多心必懷叛故往往逃伏草野山澤間乘間刼掠近者高麗表奏言多不實朕已命有司究之聞彼自國中至鴨綠江凡衝要處所儲軍粮每驛有一萬二萬石或七八萬十数萬石東寧女真皆使人誘之入境此其意必有深謀朕觀高麗自古常與中國爭戰昔漢唐時遼東地方。皆為所有直抵永平之境恃遠不臣時時弄兵自古無狀如此今遼東乏糧軍士飢困儻不即發沙嶺倉粮賑之必啟高麗招誘逋逃之心非至計也使高麗出二十萬人以相驚諸軍何以應之今營繕造作暫宜停止且令立營屋以居十年之後再為之古人有言人勞乃易亂之源深可念也。 > >수도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역마다 1, 2 만석 또는 7, 8만석, 10여만석에 이르고,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東寧女真)을 유인하여 넘어가고 있으니,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을 것이다. ...(중략)... 지금의 요동은 군량부족으로 군사가 굶주리고 있는 바, 즉시 사령창(沙嶺倉)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진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유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못 된다. 만일 고려가 20만을 일으켜 우리는 어떻게 응전할 수 있겠는가? (중략) > > - 태조고황제실록, 238권, 홍무28년 (1395) 4월8일2번째 기사 太祖高皇帝實錄,卷二百三十八,洪武二十八年,四月八日 - 《명실록》에 따르면 [[조선]]([[이성계]])이 '200,000명의 강병'을 동원해서 [[제3차 요동정벌|요동 정벌]]을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보고를 듣고 주원장이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가 당시 조선 내부의 상황을 잘 몰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당대의 조선은 고려 말부터 [[홍건적]]·[[나하추]]·[[여진족]]·[[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 등의 침략으로 인하여 나라가 혼란한 상황을 겪어서 왕조 초기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조선의 국경이 안정되는 것은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고 한참 뒤에야 이루어지는데 개경을 위협했던 왜구의 경우, 제4대 세종 시대에 대마도를 정벌하고 나서야 그 위세가 꺾였다. 심지어 4군 6진 지역은 세종 시대에 정벌된 이후에도 여진족이 강성하여 제7대 세조 시기, 조선군이 대규모 작전을 전개해야 했을 정도였고 제14대 선조 시기에도 신립과 이순신, 이일 등이 여진족 소탕 작전을 펼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명나라도 150,000명의 대군으로 북원을 정벌할 정도의 군세를 자랑했지만 유독 왜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국토 동남부를 탈탈 털리고 있었다. 오히려 조선이 대규모 침략을 겪지 않는 반면 명나라는 재정 상태가 좋은 강남 지방까지 계속 털리면서 재정에 부담이 갔고, 심지어 단지 53명에 불과한 왜구들이 수도 남경을 공격하여 군인들을 포함 4~5,000명의 사상자를 내는 만화같은 일까지 발생했다. 또 명나라 군대가 조선보다 강하다고는 하나 숫자에 뻥튀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일례로 서몽골 오이라트족의 수장 [[에센 타이시]]가 명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 중국측 기록에는 명나라 제6대 황제인 영종 정통제가 5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친정(親征)에 나섰다고 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정통제의 군대가 80,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직접 당사자인 중국측 기록이 더 정확하겠지만 굳이 조선에서도 숫자를 후려칠 까닭이 없고, 또한 명나라 황제 정통제는 에센 타이시의 오이라트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다.]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이 실제로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0,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공민왕]] 때 요동 정벌을 한 적이 있고, 홍건적과의 격렬한 전투에서 고려가 200,000명의 병력을 동원한 적이 있으나, 이 20만 병력에는 유생들+노비들까지 포함된 사실상 활동 가능한 남성들은 다 모은 군대라서 숫자만 많지 전투력은 의문이다. 이때 20만 군대의 선봉에 서서 개경에 입성한 군대가 바로 [[이성계]]의 사병이었던 [[가별초]]였다. 게다가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는 당시 조선은 동래·기장·동평성이 함락당하는 등 한반도 남부가 왜구에게 탈탈 털리고 있었기 때문에 요동 정벌은 커녕 당장 방어에 급급했고, 결국 조선은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된다.] 심지어 조선보다도 국력이 더 강성했던 고구려가 국운을 걸고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을 때도 단일 전투에 200,000명을 동원하지 못했으니[* 흔히 150,000명의 대군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주필산 전투 역시 15만 명이 한꺼번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고, 15만 대군 중 최대 50,000명을 고연수가 말아먹은 것이었다.] 고려 말기의 각종 폐단을 겪고 있었던 조선이 총 병력 200,000명을 정상적으로 동원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이 명나라 내부의 사정을 몰라서 이렇게까지 경계한 측면도 있는데, 실제 '''주원장의 정책은 겉으로만 엄포를 놓고 전쟁에 대비한 방어만 철저하게 하지, 실제 대외전쟁은 꺼리는 성격이었다'''. 당장 [[위화도 회군]] 직전 [[공요군]]의 진격 당시에도 주원장이 한 조치는 방어 강화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왜냐하면 당시 명나라는 천하를 제패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신생국이었고, 아직 [[북원]]이 잔존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이민족들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내부 정리가 제대로 끝나지도 않은 상황인데다가 한반도를 제외하고도 이미 몽골과 이민족 등을 모두 견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즉, 명나라 입장에서는 정말 조선과 전쟁이라도 했다가는, 내부 분란이나 북원의 재침공 등 자국에 큰 피해가 되거나 멸망의 원인이 될 만한 위험요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는, [[정난의 변]] 이후 명나라 내부가 안정되고, 제3대 태종 이방원 대에 조선과의 관계가 안정되자, 북원을 비롯한 이민족들에 대한 대원정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마무리를 짓게 된다. 그야말로 스케일의 차이만 있을 뿐 조선이나 명나라나 각자 내부의 안정화가 시급해서 외부에 국력을 투사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 부연하자면 정확히는, 주원장이 우려하는 상황은 만주 최고의 전쟁영웅 이성계가 건국을 한 여세를 몰아 정도전의 입김을 타고 여진족을 선동해 가별초와 함께 요동을 어지럽히는 것이었으며, 적어도 용장 이성계의 전투의지나 영향력만큼은 나중에 왕자의 난 이후 도성에서 탈출하자마자 웬수같은 아들놈을 때려잡기 위해 가별초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관군을 격파한 것을 볼 때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있다. 때문에 주원장이 선택한 전략은, "만약 이성계가 가별초 끌고 여진족과 요동을 도모하려 한다면 명이 조선의 본토를 먼저 침공해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대립 및 관련 전설 ==== [[주원장]]은 [[이성계]]와 분쟁을 벌인 적도 있다.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57358|항목 참조]]. 또 주원장과 이성계 사이에는 희한한 전설이 하나 있다. 주원장 집안이 원래는 한반도쪽 가문인데 어릴 때 이성계의 아버지와 명당을 다투다가 주원장이 차지한 명당으로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되고, 옆에 명당을 차지한 이성계는 조선 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구체적으로 해당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이성계의 선조가 황해도 모처에 자손이 황제가 될 묏자리와 왕이 될 묏자리를 두고는 선친을 묻으려고 했더니, 주씨 성의 노비가 몰래 묏자리를 바꾸어서 후손들이 각각 명 태조, 조선 태조로 뒤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비슷한 전설을 가진 곳이 전국에 꽤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의 '한영정'이라는 사람 집의 머슴이었는데 주인 딸인 '한여비'와 눈이 맞아 지나국으로 도망갔다던지. [[경상남도]] [[진해시]]의 천자봉 이야기라든지.] 우연히 만난 스님과 장수가 훗날 각각 명 황제, 조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한 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이성계와 주원장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탁발승에 도적 출신인 주원장과 군벌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출신은 다르지만, 변방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명당 이야기를 떠나서 사실 명 왕조가 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객관적인 근거들은 꽤 있다는 주장도 있다. 명나라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명 태조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 라는 구절이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주원장의 아들 중 4남인 명 성조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 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영락제의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가 아닌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라는 기록이다. [[명나라]] 황실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곳인 태상시의 기록인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는 영락제의 생모가 공비(碽妃)라고 했다.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는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영락제]])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다." 고 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권근]]도 이를 언급한 걸 보면 조선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조선과 명나라의 일화에는 기저에 이러한 역사적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 ====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사돈]] 논의 ==== 이와 별개로 [[이성계]]와 [[사돈]]을 맺을 뻔한 적도 있었는데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의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6013_001|《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 기사 명나라 황제가 혼사를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했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을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못되게 굴어서 못한다"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취소되었다고 한다. >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개성 왕씨|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하여 망하고 [[전주 이씨|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홍무제|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1,000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1,000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 -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4017_001|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결혼까지 하면 이성계가 침공하지 않을 것"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할 정도면 요동 정도는 [[지참금]]으로 받을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취소된 것으로 추정된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75045&exception_mode=recommend&page=1|#]] 그리고 이렇게 혼담이 완전히 물건너가자 조선에서는 거의 곧바로인 1397년 6월부터 [[제3차 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때 [[조준(조선)|조준]]이 반대하자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1397년 9월에 심씨를 공식적으로 세자 이방석의 현빈으로 삼으면서 관련 논의들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실제로 저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그 이후의 역사가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주원장이 1398년 5월에 붕어하기에 저 때 저 국혼만 성사됐으면 주원장이 죽자마자 8월에 터지는 [[정난의 변]]과, 마찬가지로 8월에 터지는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선의 입장이 굉장히 미묘해진다는 것이다.[* 그 당시 통신이 불편해서 조선은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후에야 홍무제의 붕어를 알았다. [[요동]]으로 다녀온 사신이 홍무제의 죽음을 전했다.] 아무래도 명나라 황제의 부마가 되는 만큼 세자 [[이방석]]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질 테니 아무리 이방원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다. 공식적으로 명나라랑 척을 지고 요동정벌을 할 것도 아니니 제1차 왕자의 난은 시도조차 못할 가능성이 크다. 대신 그렇게까지 명나라 황실이랑 가까워진 상태라면 아무래도 정난의 변에서는 조선이 [[건문제]]의 편을 안 들수가 없어진다. 장인의 나라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관여하지 않을 명분이 없으니 정난의 변에 조선군이 개입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 황녀와 결혼했어도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대다수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 데다가, 명나라에서도 [[정난의 변]]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 [[일본]] === 일본과는 [[왜구]]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는데, 일본에 사절을 세 번이나 보내서 단속을 요청했지만 당시 일본은 조정이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로 갈라져 있었고,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 막부]]도 별 힘이 없었던 시절이라 형식적인 답변을 듣는 것으로 그쳤다. === [[대월]] === 대월(베트남)과는 1372년 안남왕 책봉 문제가 잠시 불거졌다. 당시 안남 국왕[* 대월은 '''외왕내제'''를 취하고 있었다.]은 [[예종(쩐 9대)|진숙명]]이었는데 명 태조는 진숙명이 선대 군주인 [[즈엉냣레|일례]]를 이유없이 폐위시켰다는 이유로 정식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고 '전왕인친사'(前王印視事)라는 애매한 작위로 책봉했으며 진숙명이 사망했을 때도 애도하지 않은채 진숙명을 비판했다. >「安南自陳叔明逼逐其陳日熞,使不得其死,因篡位,廢置相,仍未來告。叔明懷奸挾詐,殘滅其王,以圖富貴,不義如此,庸可與乎?今叔明之死若遣使吊慰,是撫亂臣而與賊子也。異日四夷聞之,豈不效尤,狂謀踵發,亦非中懷憮外夷之道也。爾禮部咨其國知之。」 >---- >진숙명이 진일견(양일례)을 강제로 쫒아내어, 죽게 한 건 그릇된 일이고, 찬위 등 여러 문제가 있으며 숙명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일례를 멸하고 부귀를 탐하는 것은 불의에 해당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 숙명의 죽음을 사자를 보내서 조위하는 것은 난신[*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을 위로하고 도적과 함께 하는 것이다. === [[티무르 제국]] === 중앙아시아의 정복군주였던 [[티무르|티무르 바를라스]]와의 관계는 극도로 험악해서 서로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여건이 좋지 않아 일단 화해하고 티무르가 사절단을 보냈는데 홍무제는 이를 조공 사절로 여겼다. 결국 화가 난 티무르가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결심을 굳히게 된다. 다만 그 전에 홍무제가 붕어하고, 이후 티무르도 붕어하여 두 제국의 드림매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뒤 티무르 제국과 명나라는 티무르의 4남인 샤 루흐때 다시 국교를 복원하고, 티무르의 사절단이 다시 한 번 명나라를 방문한다.[* 당시 티무르 왕조 사절단의 공식 일지를 담당하던 기야스 웃딘 나카의 기록에 따르면 사절단은 명나라의 부유함, 역참 등의 인프라 및 명나라 조정의 행정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놀라운 점은 이들 사절단이 방문한 지역들은 강남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던 화북 지방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북로남왜로 인해 약해진 후반기의 명나라면 몰라도 [[홍무제]]~[[선덕제]] 시기의 명나라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세계 최강국이였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티무르 제국이라고 한들 무력으로 꺾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 [[외모]] == || [[파일:external/img.hani.co.kr/123814348196_20090328.jpg|width=100%]] || --각도의 중요성--[*물론 후술하겠지만 각도빨이 아니라 실제로 좌측의 어진 처럼 위엄있는 모습일 확률이 높다.] [[어진]]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얼굴로 그려졌다는 특징이 있다. 왼쪽처럼 후덕하고 위엄있는 초상화도 있는 반면, 오른쪽같이 얼굴형이 [[스크루지 맥덕]]이나 [[오리형사 다크#s-2.1.1|다크윙 덕]]처럼 턱과 입이 길게 나온 데다가 곰보 자국 투성이인 못생긴 [[도날드 덕|도날드 상]] 초상화들도[* 최소 2점 이상. 얼굴에 곰보 자국은 없지만 턱은 여전히 튀어나온 초상화도 존재.]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저 도날드스러운 얼굴을 바탕으로 홍무제를 나타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도 저 초상화를 바탕으로 주원장을 그려놓고 '돼지 같은 얼굴과 엄청난 정치적 수완을 가진 인물'이라 평했는데, 부하들을 돌아보며 진격을 명령하자 부하들이 전부 화들짝 놀라는 게 백미이다.] 그러나 기록[* 귀와 코가 크고 턱이 이마보다 튀어 나왔다든지. 참고로 얼굴의 곰보는 전염병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흔적이라고 한다.]을 볼 때는 오른쪽처럼 곰보가 많은 얼굴이긴 했던 것 같다. 대만에선 얼굴의 주걱턱이 [[망고]]와 닮았다고 하여 '芒果臉'(망고 얼굴)이라고 칭한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잘생기게 보이는 초상화가 주원장의 이미지와 위엄을 고려하여 미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곰보였는데, 자신이 나온 사진에 에어브러쉬질을 해서 곰보 자국을 지우는 일을 밥 먹듯이 했다.] 반면에 요즘 기준으로 못생기게 보이는 초상화가 오히려 당시 기준에는 귀와 코가 크고 턱이 튀어나온 것이 [[오악]]과 같고, 얼굴의 곰보 자국은 하늘의 72 개 별자리와 같아 천하 영웅의 상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여, 잘생긴 초상화가 사실에 가깝고, [[오리]]처럼 턱과 입이 나온 못생긴 초상화가 프로파간다용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선미 저, 《왕의 얼굴》에서 참조.] 여담으로 이 두 초상화는 언뜻 보면 굉장히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와 수염의 형태는 거의 똑같다. 정형화된 형식이 다를 뿐, 같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맞는 듯하다. 당장 중국의 역사 인물들 문서에 실린 초상화들은 오른쪽처럼 [[도장 찍기|단순화되어 비슷한 그림체가 많은데]], 실제 얼굴은 세밀하게 묘사된 좌측의 어진이 더 실제와 가깝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문서 상단의 청대의 학자 조익의 평가인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는 평가가 어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라 재미있는 부분이다. 호군 주연의 드라마 <주원장>에서도 두 개의 다른 어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묘사된다.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주원장은 정말 못생겼다(...). 그래서 부하들이 멀리서 명령을 내려주시면 안되겠냐고 부탁한다. ~~[[너 숙청|너 귀양]]~~ == 가족 == === 조상 === * 현조부: [[주중팔]] * 고조부: 덕조 현황제 [[주백륙]] * 증조부: 의조 환황제 [[주사구]] * 조부: 희조 유황제 [[주초일]] * 부황: 인조 순황제 [[주세진]] === 아내 === [[파일:external/a0.att.hudong.com/01200000012881117102005794355.jpg]] 위 사진의 사람은 주원장의 현처였던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씨(1332년 ~ 1382년)이다. 이름은 수영(秀英)이었으며, 회서 숙주 신풍리 출신으로 위에서 언급된 곽자흥의 양녀였다. 마 황후는 '''[[중국사]] 최고의 [[국모]]'''로 꼽히는 여인 중 한 명이었다. 자세한 건 [[효자고황후]] 항목 참고. === 자녀 === ==== 황자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1남 || [[주표|흥종 강황제 / 의문황태자 주표]] || [[1355년]] || [[1392년]] || [[건문제]]의 아버지 || || 2남 || 진왕(秦王) 주상 || [[1356년]] || [[1395년]] || || || 3남 || 진왕(晉王) 주강 || [[1358년]] || [[1398년]] || || || 4남 || [[영락제|성조 문황제 주체]] || [[1360년]] || [[1424년]] || [[영락제]]. || || 5남 || 주왕 주숙 || [[1361년]] || [[1425년]] || || || 6남 || 초왕 주정 || [[1364년]] || [[1424년]] || || || 7남 || 제왕 주부 || [[1364년]] || [[1428년]] || [[정난의 변]] 때 폐서인되었다가 이후 복권됨. || || 8남 || 담왕 주재 || [[1369년]] || [[1390년]] || || || 9남 || 조왕 주기 || [[1369년]] || [[1371년]] || || || 10남 || 노왕 주단 || [[1370년]] || [[1390년]] || || || 11남 || 촉왕 주춘 || [[1371년]] || [[1423년]] || || || 12남 || 상왕 주백 || [[1371년]] || [[1399년]] || || || 13남 || 대왕 주계 || [[1374년]] || [[1446년]] || || || 14남 || 숙왕 주영 || [[1376년]] || [[1420년]] || || || 15남 || 요왕 주식 || [[1377년]] || [[1424년]] || || || 16남 || 경왕 주전 || [[1378년]] || [[1438년]] || || || 17남 || 영왕 주권 || [[1378년]] || [[1448년]] || || || 18남 || 민왕 주편 || [[1379년]] || [[1450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한 [[주룽지]]의 직계 조상 || || 19남 || 곡왕 주혜 || [[1379년]] || [[1428년]] || 영락제 때 폐서인됨. || || 20남 || 한왕 주송 || [[1380년]] || [[1407년]] || || || 21남 || 심왕 주모 || [[1380년]] || [[1431년]] || || || 22남 || 안왕 주영 || [[1383년]] || [[1417년]] || || || 23남 || [[주경(명나라)|당왕 주경]] || [[1386년]] || [[1415년]] || || || 24남 || 영왕 주동 || [[1388년]] || [[1414년]] || || || 25남 || 이왕 주이 || [[1388년]] || [[1414년]] || || || 26남 || 황자 주남 ||<-2> [[1394년]] || 요절함. || ==== 공주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1녀 || 임안공주 주경정 || [[1360년]] || [[1421년]] || || || 2녀 || 영국공주 || [[1364년]] || [[1434년]] || || || 3녀 || 숭녕공주 ||<|3><-2> 미상 || || || 4녀 || 안경공주 || || || 5녀 || 여녕공주 || || || 6녀 || 회경공주 || [[1366년]] || [[1425년]] || || || 7녀 || 대명공주 || [[1368년]] || [[1426년]] || || || 8녀 || 복청공주 || [[1370년]] || [[1417년]] || || || 9녀 || 수춘공주 || [[1373년]] || [[1388년]] || || || 10녀 || 공주 ||<-2> 미상 || 요절함. || || 11녀 || 남강공주 주옥화 || [[1373년]] || [[1438년]] || || || 12녀 || 영가정의공주 || [[1376년]] || [[1455년]] || || || 13녀 || 공주 ||<-2> 미상 || 요절함. || || 14녀 || 함산공주 || [[1381년]] || [[1462년]] || || || 15녀 || 여양공주 ||<-2> 미상 || || || 16녀 || 보경공주 || [[1394년]] || [[1433년]] || || == 일화 == * 어느 날 주원장이 《[[맹자]]》를 읽다 한 대목에서 크게 노한다. >'''"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 그리고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라고 명령했다.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한 주원장은 명령을 내린 뒤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죄명에 '대' 자가 붙으면 '그 죄를 범한 자는 죽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정말 무릅쓰고' 그에게 간했다. 주원장이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전당은 끔찍하게 살해당할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위해 간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쩐 일인지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던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마 황후가 만류한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또 얼마 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했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1394년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맹자와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자신의 말이 정말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유교의 쌍두마차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 맹자를 탄압했다가는 전 중국의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이는 아무리 주원장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었다. 유삼오는 모두 260개 장인 《맹자》 중 무려 88개 장을 삭제하고 172개 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수만 따진다면 거의 절반을 삭제했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정을 말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되었다. 그렇게 만든 《맹자절문》을 과거 시험 교과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맹자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무 27년(1394년)에 반포되어 과거 시험 교재로 쓰이다가 영락 12년(1414년) 성조 영락제 주체의 명령으로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의 《맹자》를 과거 교재로 쓰면서 《맹자절문》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고작 20여 년 만에 끝난 셈이다. 사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주원장 특유의 의심많은 성격과 명나라 건국 초기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 안배가 합쳐진 결과였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고아에 천민 출신이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원장에 반발하는 세력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이를 가차없는 숙청으로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주원장은 온갖 영웅호걸이 나타나서 활개치던 중원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미천한 신분이었다. 심지어 평민 출신 황제였던 한고제 유방조차도 주원장 정도는 아니었고, 비록 낮은 직위기는 해도 사수정의 정장이라는 벼슬을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주원장 입장에서는 군주의 덕치를 주장하고 지방의 지주들인 사대부들이 주도하는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맹자》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원장의 표적이 되기 딱 좋았던 것. 그러나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가 즉위할 때 쯤이면 이미 황권은 안정되어 있었고, 때문에 굳이 《맹자》를 검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서민 출신으로서 일개 세력의 대장이 되었다가 통일 제국을 개창했다는 점과 말년의 [[토사구팽]] 때문에 [[전한]] [[고제(전한)|태조 고황제 유방]]과 이미지가 묘하게 겹친다. 그래서 비교도 자주 되는 편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가족애가 대단한 대신 신하들에게 가혹했고, 유방은 자녀들에게 매정한 대신 신하들에게 너그러웠다. 그리고 유방의 토사구팽 이미지는 과장과 왜곡이 가미된 편으로, 유방 사후에도 상당수의 개국공신들이 요직에 있어서 이후 외척인 여씨들을 숙청하고 유씨 황실을 지키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사실 유방이 자녀들에게 매정했다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 과장이 있는 편이다. 실제로 유방이 죽인 자녀는 공신과 마찬가지로 거의 없었다. 폐위를 생각한 혜제도 실제로는 여씨 견제를 위해 그런 거고 또, 황제의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명분이 없다고 판단하지 실행하지는 않았다.][* 공신들 숙청도 실제로는 한신, 팽월, 영포에게 집중되었다. 이들은 사실 통일 한나라의 공신이긴 했지만 동시에 위험인물이었고 또, 황제가 처벌할 만큼의 죄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처벌은 유방이 아니라 여후가 주도했고 또, 신하들 중에서도 이들을 위험시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주원장의 공신 숙청은 진짜였고, 공신들 대부분이 숙청당하다보니 [[정난의 변]]에서 손자인 건문제를 보필할만한 유능한 장수들이 별로 없었다. *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숙청해대고, 또 권력 강화를 위해 어지간한 일은 직접 처리한지라 업무량이 엄청났다. 얼마나 많았던지 하루에 처리하는 상소문이 무려 '''1,600개'''나 되었을 정도였다. 이건 홍무제가 황제권을 강화하느라 재상을 폐지하면서 생긴 현상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결국 일감이 너무 많아지자 홍무제도 감당이 안되어서 황제를 보좌하는 기구가 생겼으니 바로 그것이 '''내각'''이었다. 물론 신권이 강해지는 걸 막기 위해 정5품짜리의 낮은 관리들을 채용했으며, 이들을 [[내각대학사]]라 하며 모든 상소문에 각자의 의견을 덧붙여서 황제의 업무를 도왔다. 허나 낮은 직급 출신이다 보니까 고위 관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원활한 업무 처리를 위해서 내각의 직품은 점점 높아져, 나중엔 고위 관료들이 내각의 일을 겸하게 된다. 명말 신종 만력제때의 재상 [[장거정]]은 명나라에 본래 없었던 재상 자리나 다름없는 내각 수석대학사 또는 내각수보로서 국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직급이 낮았기에[* 이것은 제4대 인종 [[홍희제]] 때 편법을 써서 겸직 벼슬로(2, 3품직)로 품계가 상승했고, 이어서 고위급 명예직의 겸직(태자 태, 소OO)으로 종1품, 정1품으로 상승시켰다. 이때쯤이면 사실상의 재상이었지만, 단지 재상(승상)이라는 직명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또한 명나라 특유의 절대군주제로 인해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학사들은 말 그대로 재상급 비서로서 황제를 보좌했다.] 황제가 [[만력제|맘먹고 근무를 태만하게]] 하면 답이 없었다. * 중국의 <베이징커리> 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 태조 주원장을 꼽았다.[* 과거 중근세에도 배울려면 어느정도 교육비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런데 주원장은 문자그대로 길바닥에서 남에게 빌어먹어야 할 시기까지 보냈어야했던 사람인데 책자를 구한다거나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는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중원을 통일한 역대 황제들은 공자든 맹자든 충을 강조하는 유학 성현의 이론을 최대한 이용해서 오히려 자신의 권위와 통치를 안정화하려고 했는데 신권에 유리한 내용이 나왔다는 이유로 덜컥 화를 내는 걸 보면 확실히 주원장의 인문학적 소양은 다른 황제들보다 한참 떨어졌던 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 빈민 출신이어서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어진 군주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또한 빈민 시절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큰 실책을 저지른 바도 있었다. 명나라 건국 후 자신의 가난한 고향을 크게 발전시켜보자고 수도를 고향인 봉양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결국 입지조건이 적절치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문제는 작고 가난한 고을인 봉양을 수도로 건설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인데, 천도가 취소되었음에도 큰 도성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은 못버려서 이곳 주민들이 되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좁고 척박한 땅에 갑자기 수많은 인구가 모여들다보니 도리어 자기 고향인 봉양의 경제가 파탄이 나 버렸다.[* 재밌게도 이것도 한고제 유방과 반대되는 사례인데, 유방은 패현 땅에 애정이 없진 않았지만 [[옹치]]와 함께 자신을 배신했던 섭섭함도 컸기 때문에 굳이 애써서 특별대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유태공]]이 고향을 그리워할 때도 고향 땅 자체를 건드리진 않고 수도 장안 주변의 마을을 비슷하게 꾸민 뒤 고향 이웃들을 불러오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죽기 직전에 향수병이 북받쳐서 고향으로 찾아왔을 때 고향 사람들의 부탁으로 세금과 복역을 면제시켜주긴 했지만, 그때도 풍읍은 제외하려고 했다.] 또한 주원장은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해서 툭하면 부모 형제 일족이 쫄쫄 굶은 트라우마가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손들은 절대 굶는 일이 없도록 하겠답시고 황실 후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제도를 확립했는데, 일단 조금이라도 자기 피를 이은 주씨 성의 남계 후손이기만 하면 최소 200석의 녹봉을 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명나라에서 1개 현을 관리하는 지현의 녹봉이 겨우 90석이었다.] 물론 이것도 8대 이상까지 거리가 멀어진 방계의 경우에 해당되는 최저 녹봉이고, 친왕급으로 가면 더 높았다. 문제는 황실 자손들이 눈덩이 굴리듯 불어서 명나라 말기에 가면 무려 200,000명이라는 숫자를 자랑했다. 이 20만 명의 인구를 전부 명나라 재정으로 먹여 살려야 했으니, 결과적으로 그 부담이 [[백성|누구]]한테 갔는지 생각해보자. * 주원장이 얼마나 일을 많이 처리했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홍무 17년인 1384년의 9월, 급사중 장문이 이에 대해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 >"(황제 폐하)는 9월 14일부터 21일까지 딱 8일 동안 나라 안 팎에서 올린 1,660개의 상소문에 올라와 있던 3,291건의 일을 해결하셨다." * 하루는 형부 주사(刑部主事) 여태소(茹太素)가 올린 상소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주원장이 보기에 상소문의 서문에 있는 황제 찬양이 지나치게 길었고, 정확히 '''6,370자'''까지 읽자 보다못한 주원장은 결국 여태소를 친히 두들겨 팼다. 다음 날, 아무래도 상소문의 뒷부분이 신경 쓰였던 주원장은 이걸 도로 찾아다가 계속 읽었고, 총 '''16,500자'''를 넘어가자 겨우 서문이 끝났다. 반면에 본문의 글자 수는 총 500자로 5건의 건의사항이 담겨있었는데, 읽어보니 취할 점이 꽤 있다 싶었던 주원장은 이 가운데 4건을 즉시 실행했다. 그 뒤 홍무제는 여태소를 불러서 오해가 있었다는 언급을 하고 사과한 뒤 그의 정책을 칭찬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글을 번잡하게 쓰지 말라고 말한 뒤 이 일화를 전국에 널리 알렸다. 즉 주원장이 무식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전근대 중국에는 '''당팔고주의'''란 것이 있어 관공서용 문서 작성, 특히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형식이 있었고 여러 문학적인 기교가 가미된 황제 찬양을 넣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중국 뿐만이 아니라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흔히 행했던 것인데 한마디로 주원장이 흙수저 출신이라 이게 황실의 권위를 세우는 방편이라는 걸 몰라서 벌인 일이었다. 참고로 당팔고주의는 명태조 주원장의 시대로부터 500년이 지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시점에야 없어졌다. 주씨 황실의 권위 확립을 위해 공포정치도 마다하지 않았던 주원장인 만큼 만연체(蔓衍體) 황제 찬양의 목적을 알았더라면 여태소를 그렇게 두들겨 패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원장이 권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무식해서 권위를 세우는 관행을 갖고도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주원장의 신하들은 이래도 처맞고 저래도 처맞고 더러워서 그만둘 수도 없는 거지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황제 생활을 오래 하면서부터는 공부도 하고 사람이 좀 바뀌긴 했다. * 이희안(李希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크게 대단한 학자는 아니었고, 다만 인품이 뛰어나서 과거시험을 보라고 주위에서 권유를 받던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출세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은거하던 기인이었는데, 어디서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홍무제는 '''친히 손수 편지(手書)를 써서''' 보냈다. >"그대가 학문에 대해 조예가 있다고 들었다. 이번에 황자들이 공부할 대본당(大本堂)을 지었는데, 황자들을 가르칠 스승이 필요하니 궁에 와서 벼슬을 받도록 하여라." 편지의 내용은 초대였지만 그당시 황제의 친필 서한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면 경을 치게 되니 사실상 명령과 다름 없었다. 결국 이희안은 조정에서 벼슬을 받았는데, 황궁에서는 비단 옷을 입고 도롱이갓(蓑笠, 그러니까 [[삿갓]])을 쓰는 기묘한 패션으로 주목을 받았다. 왜 행색을 그렇게 하고 다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머리에 쓴) 삿갓은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고, 비단 옷은 황제께서 하사한 거(라 입고 다닌)다."(笠本質, 緋, 君賜也) 이런 기인이었던 이희안이 들어가게 된 곳은 대본당으로 황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맡았다. 일개인으로 살 때는 자유분방을 추구했어도 교육자로서는 엄격한 규범을 중시한 이희안은 어린 나이[* 홍무 원년(1368년)에 맏이인 태자 [[주표]]가 13세였다.]에 주원장이 홍건적으로 활동할 때 태어나 도적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자란 황자들은 규범은 고사하고 어른을 대하는 황실의 예법도 잘 지킬 줄 모르는 개구쟁이들이어서 수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보통은 아이이고 하니 혀나 좀 차면서 적당히 공부 가르치는 시늉만 하는 게 보통일 텐데, 하필 또 이희안은 적당히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다시 규범을 가르치려고 시도하던 이희안은 황자들이 말을 듣지 않자 화가 갑자기 치솟아서 자기가 대본당에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그중 하나를 붙잡은 다음, 자기가 시골에서 마을 아이들 가르칠 때처럼 '''머리통을 잡고 이마를 후려깠다'''(擊其額)! 먼 방계 황족도 아니고 황제의 아들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살면서 처음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이 어린 황자는 아버지 홍무제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 사실에 대해 고했다. >'황제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성을 냈다.'(帝撫而怒) 천하의 대명 천자께서 마치 유치원에서 자기 아들이 친구에게 얻어맞다 오자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마를 이 정도나 다쳤네!" 하는 보통 아버지들처럼 아들의 부어오른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다. 평소 황실의 권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주원장의 성질대로라면 이희안은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도 마 황후가 한 발 앞서서 이희안을 두둔했다. >"선생께서 스승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려는 것이니, 이는 노하실 일이 아니옵니다."(烏有以聖人之道訓吾子, 顧怒之耶) 황후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홍무제는 이희안의 벼슬을 되려 좌춘방(左春坊)의 우찬선(右贊善)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한편 이 사건을 두고 기록에서는 '엄히 벌하였다' 정도로 돌려 말하지 않고 '칠 격'(擊) 자로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북원의 [[코케테무르]]가 이끌고 있는 수만 명의 기병도 명나라 황제 아들에게 격 자를 쓸 상황을 만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자신이 나중에 묻힐 장소 근방에 [[오나라]]의 초대 황제였던 대제 [[손권]]의 능이 있어서 황릉을 만들기 위해 다른 무덤들처럼 파헤쳐질 상황에 놓였으나, 주원장이 묘지기인 셈 치자며 그대로 두라고 지시한 덕분에 손권의 능은 무사하게 되었다. 때문에 명효릉 내에서 손권의 능을 볼 수 있다. 이 일화가 무조건 다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재밌는건 600여년이 지난 뒤 [[쑨원|한족국가를 회복한 주원장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사망한 뒤 그의 무덤이 명효릉 바로 옆에 지어졌고 황제가 아니었지만 중산'''릉'''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규모와 상징성이 주원장의 명효릉보다 거대하기에 명효릉은 [[중산릉]]을 본 다음 들리는 마치 묘지기 같은 위치에 있다. *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에게는 무자비한 황제였지만, [[http://pgr21.com/?b=8&n=69738|자신이 정벌한 군벌들의 자손들에겐 되려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숙적 [[진우량]]의 아들 [[순덕후|진리]], [[명옥진]]의 아들 [[명승]]을 [[고려]]로 보내 융숭한 대접을 받도록 배려해 주었고, 붙잡은 몽골의 보르지긴씨 황족에게도 굴욕을 주지 않고 곱게 대접했다. ~~그렇지만 진우량의 병사들 수백만 명은 홍선에 태워 청나라 건국 이전까지 지옥생활을 하도록 했다.~~ 항상 그렇지만 주원장의 숙청 기준은 언제까지나 자기에게 위협이 되느냐 마느냐였기 때문에, 공신들은 눈치를 봐도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아 쳐죽이기 일쑤였던 반면, 일개 백성은 자기를 뒤에서 욕한다고 해도 대놓고 선동하거나 하는 정도가 아닌 불평불만 표시 정도로는 딱히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냥 욕만 하고 끝이니까. * 편집증적인 꼼꼼함과 기억력 덕분에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은원을 모두 잊지 않는 인물이었다. 즉 잘해준 사람들은 그만큼 대우를 받았고, 주원장에게 정당하지 않은 걸[* 다만 개인 원한을 숙청에 써먹지는 않은 듯싶다. 그랬으면 아예 국가 유지가 안 됐을 테니까.]로 원한을 샀으면 당장 황궁에 찾아가 빌어야 했다. 한편 고려의 [[정몽주]]는 그 기억력 덕에 목숨 걸고 사신으로 왔다가 공을 세울 수 있었다. [[http://egloos.zum.com/xuecheng/v/4210102|홍무제의 강박증 때문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사람]] * 본인이 신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교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직접 [[모스크]] 건설을 지시하고 예언자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https://en.wikipedia.org/wiki/The_Hundred-word_Eulogy|했다]]. 대신 원나라 때 유입된 [[후이족|회회인]]들에게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한족과 통혼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원나라 때 전래된 중세 이슬람 역법을 한문으로 번역할 것을 명령하면서 회족 천문학자와 한족 천문학자에게 협업을 지시했는데 그 결과물이 [[회회력]]이었다. * [[중국 요리]] 중에는 홍무제와 연관된 설화가 있는 음식들이 몇 가지 있다. 가령 중국식 두부전인 '''샹또우푸'''(鑲豆腐)의 경우, 주원장이 빈곤한 시절 샹또우푸를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 맛을 알았고, 황제가 된 후 궁중 요리사에게 이 음식을 만들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두부를 [[곰팡이]]로 발효해서 요리하는 '''호피모두부'''(虎皮毛豆腐)의 경우, 훔친 두부가 썩어서 곰팡이가 피자 주원장이 아까워서 그거라도 먹었더니 의외로 맛이 좋아서 황제가 된 이후에도 두부를 발효해서 만든 음식을 즐긴 게 현대의 호피모두부라는 이야기가 있다.[* [[취두부]]의 기원 일화와 약간 비슷하다.] 또 '''진주비취백옥탕'''에 관한 일화도 있는데, 주원장이 거지로 지내던 시절 어떤 가난한 노파가 [[꿀꿀이죽|먹다 남은 두부와 채소를 같이 끓여서 만든 요리]]를 대접한 적이 있었고, 맛있게 먹었던 그 요리를 잊지 못한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 다시 그 요리를 찾았지만 이미 주원장의 혀는 온갖 산해진미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 때 느꼈던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판본의 엔딩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노파가 이것을 설명해 줘서 주원장이 초심을 찾고 교훈을 얻는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요리사가 고급 식재료를 써서 모양새만 비슷하게 흉내낸 요리를 주원장이 맛있게 먹었다는 다소 블랙유머스러운 결말이다. * 《명사》(明史) 권 300 <외척전>에 따르면 [[주세진]](주오사)의 장인, 즉 홍무제의 외조부는 원나라와 남송의 마지막 혈전이었던 '''[[애산 전투]]'''의 생존자였다고 한다. 몽골에 의해 한족 왕조가 종언을 고한 애산 전투의 생존자의 후손이 몽골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웠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명사》를 집필한 주체는 청나라였으므로 청나라에서 명나라 황실을 띄워주기 위해 거짓 내용을 남겨놓을 리도 없고, 일부러 윤색을 하려면 친조부로 하는 게 더 좋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부적인 내용에서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허구는 있을 수 있어도 홍무제의 외조부가 애산 전투의 참전자라는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어진과 관련된 야사가 있는데 황제 등극 후 어진을 그리게 했는데 화공이 실제 홍무제와는 전혀 다른 미남으로 그려놓자 아첨꾼이라며 죽였다. 이에 다음 화공은 홍무제의 얼굴을 사실대로 그렸는데 못생기게 그려 기분 나쁘다고 죽였다. 결국 세 번째 화공이 묘안을 냈는데 곰보 투성이의 못생긴 외모는 그대로되 인자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그려놓자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약간 비슷한 이야기로,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어떤 왕이 있었는데 그대로 그린 화공도 죽이고 잘 생기게 그린 화공도 죽였지만 세 번째 화공은 왕이 한쪽 발을 돌 위에 디디고 한쪽 눈을 감으며 활을 조준하는 그림을 그려서 사실대로묘사하면서도 결함도 적당히 덮어감췄다는 이야기가 있다. == 대중매체 == * 인물이 인물인만큼 중국에서도 주역으로 등장할 정도로 자주 영상화되거나 주역이 아니라도 비중있는 주변인물로도 자주 등장했지만, 그를 다룬 드라마로는 [[2006년]] 제작된 호군(胡軍)[* [[영화]] <[[적벽대전]]>에서 [[조운]] 역으로 출연했다. <[[천룡팔부]]> 2003년 드라마 버전에서 [[소봉]]역을 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이 배우는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다. [[청나라|자신의 민족이 세운 나라]]에 의해 망하는 나라의 시조를 연기한 셈. 게다가 호군은 이후 <건원풍운>에서 주인공 [[쿠빌라이 칸]]을 맡았는데, 이렇게 되면 [[여진족|만주족의 조상]][[금나라|의 나라]][[몽골 제국|를 멸망시킨 나라]]의 군주까지 연기한 셈이다. ~~의도치 않은 자기 민족과의 악연~~] 주연의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ate24&logNo=9019251201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46부작 드라마 <주원장>]]이 대표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홍건적의 수령, 군벌을 거쳐 황제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홍건적의 리더에서 잔혹한 숙청을 일삼으며 고독한 황제로 변모해 나가는 주원장의 변화를 배우 호군의 열연이 어우러져 잘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해당 작품의 주원장은 흔한 사극 주인공들처럼 정의로운 절대선의 주인공은 아니다. 잔머리를 쓰거나 부하들이나 신료들을 의심하는 모습[* 특히 파양호 전투 전 진우량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 부하들이 갑론을박을 벌일 때, 아무래도 본인이 부하들 앞에 있을 때보다는 없을 때 본인을 의식하지 않은 채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가 보다 잘 나오는 점을 이용하여, 회의장 뒤켠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쪼그려앉아 부하들의 발언을 쪽지에 적으며 엿듣는 모습이 그 절정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ATWnCjX9KKA&t=2221s|13화의 28분 30초~29분 20초 경]]에서 볼 수 있다. 참모 유기는 이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을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며 잔혹한 면도 자주 묘사된다. 그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아내 마황후와 태자 주표 정도로 작중 주원장이 이들을 보고 웃는 모습이 부하들 앞에서 웃는 모습과 많이 차이가 난다. 어릴적 가난한 농민일때부터 같이 고생을 한 동료와 공신들을 숙청할때마다 괴로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어릴때 자신이 황제가 되면 모두와 행복하게 살줄알았으나 현실은 누구보다도 냉혹해야했던 황제의 의무에 외로워하는 주원장의 인간적인 고뇌 연기가 일품. * 2015년 드라마 <주원장과 유백온>에선 무술 실력은 출중하지만 도덕성이 좀 부족한 것으로 표현된다. 이미 나라는 세웠지만 [[유백온]](유기)을 제외한 [[이선장]] 같은 신하들은 국가 운영에 도움이 안 되고, 탐관에 불과해 애를 먹는다. 조정을 유능하고 청렴한 인재들로 채우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신하들로 채우는 것을 좋아한다. [[이선장]]에게 처녀를 수백 명이나 선물받을 정도로 여자를 좋아하는데 특히 발이 작은 여자를 좋아한다. * 2022년 드라마 <산하월명>에 등장한다. 자신도 지배층의 착취 때문에 거병했고, 다른 창업군주들도 이전 왕조의 착취 때문에 거병했다며 [[주표]]에게 백성을 괴롭히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장례는 최대한 간소하게 하고 숙부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유언을 건문제에게 남기고 붕어했다. * 영화로도 나온 《[[비천무]]》에서는 주인공 [[유진하]]가 [[진우량]]에게 토사구팽 당한 후 마지막으로 몸을 맡기는 주군으로, [[파양호 전투|진우량 사후]] 원작에서 딱 한 번 얼굴을 드러내 유진하와 모종의 계약을 맺는다. 이후 유진하는 주원장의 명으로 [[장사성]] 토벌 중 타루가 야훌라이 휘하 몽골 전사들과 싸우다 전사한다. 그가 주원장과 맺은 모종의 계약이란 아들을 비롯한 자기 주변 인물들의 편안한 삶의 보증으로,[* 너무 소박해 보이지만 유진하는 《비천신기》때문에 수도없이 쫓겼고 진우량의 배신까지 당해 죽을 뻔 했다. 《비천신기》를 계승한 아들까지 그런 운명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로서의 배려였던 셈.] 아리수가 현재 황제가 공신들을 숙청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래도 백성들에게 도량이 있는 분이니 유진하와의 약속은 지켜 줄 것이라는 언급을 한다. 이후 나레이션으로 그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온다. "가난한 농민 태생이라는 점 때문에 황제가 되어 공신들을 무척 괴롭혔지만, 중국 역사에서 그만큼 백성들을 위한 군주도 좀처럼 없었다." 만화에서는 많이 등장하진 않지만 작중에서 언급되거나 등장할 때마다 한 나라의 개창자로서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 게임 <[[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2와 4에서 등장하며 정치 91, 전투 72 지모는 92, 특기는 농업, 상업, 건설, 화공, 복병, 병과속성은 보병 B, 궁병 B, 기병 B, 수군 E로 내정은 물론 전투에서도 준수하게 활약할 수 있는 장수다. 시나리오 2는 미등장 재야장수지만, 시나리오 4는 명나라 군주이다. 시나리오 4의 명나라는 국력도 세계 최강급이고 무관으로는 [[서달]]이나 이문충, 남옥 등이 부하로 있고 내정으로는 요광효나 [[호유용]], [[이선장]] 등이 부하로 있으며 후계자인 [[영락제]] 역시 중국문화권 최강의 장군이라 세계구급 인재가 널려 있어서 적당히 플레이해도 충분히 세계정복을 할 수 있다. 오프닝 이벤트로는 원의 [[카라코룸]]을 정복하면 주원장의 능력치도 상승한다. 다만 이 시나리오의 주역이 [[티무르]]이고, 티무르가 명으로 원정을 가던 도중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러 모로 티무르로 플레이했을 때의 최종보스 포지션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듯. 참고로 이전 시나리오의 남송 이상으로 호전적이라서 명 주변의 국가로 플레이할 경우에도 최종보스 포지션에 가깝다. 특히 고려와 일본을 자주 공격한다. * [[김용(1924)|김용]]의 장편 소설 《[[의천도룡기]]》에서는 파계승으로 등장하며 몇몇 친구들과 함께 어린 장무기와 잠깐의 만남을 가진다. 이때 이미 명교 소속이었는데, 훗날 명교 교주가 된 장무기와 재회하게 된다.[* 이때 원나라 승려들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죄없는 말장수들을 죽이고 그 시체들을 자신 일행의 것으로 위장시켰다고 나오는데, 죄없는 사람을 해쳤다는 얘기를 듣고 장무기가 경각심을 가진다.] 후에 [[장무기]]를 반쯤 속이고 반쯤 겁박해서 교주직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다른 경쟁 군벌들마저 모두 날려버린 끝에 [[명나라]]를 건립한다. 명교 세력의 공을 잊지 않았기에 국호를 명으로 정했지만, 훗날 명교가 백성들을 감싸고 돌며 조정에 반항하자 탄압했다고 묘사된다. 1990년대 영화판에서는 장무기를 은근히 부추기다가 속내를 들키는 인물로 나오고 2019년판 드라마에서는 검열 때문인지 주 대장으로 불리는데 상당히 거칠게 나오는 외모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민심 장악을 위해 지도자로 한림아를 내세우는 등의 전략적인 행보를 보이며 교주인 장무기 몰래 여양왕을 암살하는 등의 행동이 실제 주원장에 가깝다. * 태규의 첫 무협 소설 《풍사전기》에서는 조연 백가흔[* 남궁검가 창천의혈문의 하부 세력인 제검장의 셋째 아들]으로 출연하며, 위에서 언급한 실제 역사의 인물들도 무림 고수로 출연한다. * <[[기황후(드라마)|기황후]]>에서는 51회 마지막에서 언급만 되었다. * [[KBS 1TV]] [[사극]]인 <[[용의 눈물]]>, <[[정도전(드라마)|정도전]]>,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 등장한다. <용의 눈물>의 주원장은 두 개의 초상화 중 온화한 인상의 초상화와 비슷한 통통한 인상의 배우 김순철을 섭외했고, <정도전>의 주원장은 심술굳은 표정의 두 번째 초상화에 가까운 마른 체형의 배우를 섭외했다. 이는 두 드라마의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방원이 주인공인 <용의 눈물>의 주원장은 조선에서 사신으로 온 이방원을 환대하며 그를 높게 평가해주지만 제목 그대로 정도전이 주인공인 <정도전>의 주원장은 끊임없이 조선을 의심하고 압박하는 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정도전>에선 [[https://youtu.be/-uTaQ_rvUPU|이성계가 주원장을 향해 아예 쌍욕을 박았다.]] 드라마 <정도전>에선 조광유가 맡았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김성강이 맡았다. * 《[[신승(소설)|무협소설 신승]]》에서는 주인공의 스승인 [[절세신마|절세신마 공손억]]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묘사가 상당히 끔찍하다. * 영화 <[[무사(영화)|무사]]>에서는 얼굴은 한번도 비추지 않는데 반해 자주 언급되는데, 어째 영 나쁜놈 포지션이다. 극 시작과 동시에 사이가 좋지 않던 고려의 사신단을 고비사막으로 유배를 보내버렸고, [[북원]]의 장수 쿠쿠 테무르에게는 자신의 누이를 납치해간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는다. 작중 [[장쯔이]]가 연기한 부용공주는 주원장의 막내 딸이라는 설정이다. 고려인들은 북원의 기병들에게 납치당한 그녀를 구해 남경으로 돌아가 주원장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작전을 세운다. * 액션 코미디 영화 <추영>에서는 무림고수들이 주원장이 남긴 보물을 찾고자하는 갈등에서 언급되며, 주인공 일행이 그토록 찾던 주원장의 보물은 [[곡괭이]]였다. 주원장은 단지 살기 위해서 괭이를 들고 홍건적에 들어가 노력한 것이 자신을 황궁에 갇힌 죄수로 만들었다며 한탄하면서 황궁에서 나오는 진수성찬은 가난한 시절에 먹었던 진흙통닭보다 따뜻하지도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며 "부귀영화가 반드시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내용의 유서와 함께 농민 시절에 사용했던 괭이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홍무제)] ---- [include(틀:명의 황자)] ---- [include(틀:명사)] [[분류:홍무제]]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