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후패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한(육조) 황제)]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 0%, #000 20%, #000 80%, #000)" '''{{{#ECE5B6 후한 추존 존령[br]{{{+1 칙향애후 | 則鄕哀侯}}}}}}'''}}} || || '''{{{#ece5b6 묘호}}}''' ||<(> 없음 || ||<:> '''{{{#ece5b6 시호}}}''' ||<(> 칙향애후(則鄕哀侯) || || '''[[성씨|{{{#ece5b6 성}}}]]''' ||<(> 후(侯) || || '''[[휘|{{{#ece5b6 휘}}}]]''' ||<(> 패(霸) || || '''{{{#ece5b6 부친}}}''' ||<(> 불명 || || '''{{{#ece5b6 생몰}}}''' ||<(> ? ~ 37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의 개국공신으로 자는 군방(君房), 하남군(河南郡) 밀현(密縣) 출신이다. [[남북조시대]] [[후한(남북조시대)|후한]](侯漢)을 세운 [[후경]]에 의해 존령으로[* 《梁書·列傳第50 侯景》:“以漢司徒侯霸為始祖,(東)漢征士侯瑾為七世祖。於是追尊其祖周為大丞相,父標為元皇帝。”] 추존되었다. == 생애 == [[전한]] 시기 [[한성제]] 휘하에서 태자의 하인으로 일했으며, 엄숙하고 위엄이 있음과 동시에 학문에 전념하여 방봉(房鳳)을 스승으로 모셔 곡량춘추(穀梁春秋)를 학습하였다. [[신나라]] 초년 후패는 회평대윤(淮平大尹)이 되었다. 28년, [[광무제]]가 유한을 재건한 이후 상서령에 임명되어 전한 시기의 문서들을 참조하여 많은 법령 문서를 작성하였다. 후패가 작성한 문서들은 광무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29년 , 복담(伏湛)을 이어 대[[사도]],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37년 병사하자 광무제는 후패의 시호를 칙향애후(則鄕哀侯)라 한 뒤, 식읍 2천 6백호를 내렸으며 그의 아들인 후욱(侯昱)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551년, [[후경]]이 [[소동(예장왕)|소동]]을 축출하고 한나라의 황제로 즉위하자 후패의 후손임을 자처[* 후경은 자기 아버지 위의 선조는 몰랐고 그나마 할아버지는 부하중에 아는 이가 있었다만 그 이상은 아무도 몰라서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꾸몄다.]함과 동시에 그를 시조로 [[추존]]하고 칠묘에 모셨다. == 가족 == * 부친: 후씨(侯氏) * 족부(族父): 후연(侯淵) * 아들: 후욱(侯昱) * 손자: 후건(侯建) * 증손: 후창(侯昌) == 참고 항목 == * [[https://zh.wikipedia.org/wiki/%E4%BE%AF%E9%9C%B8|侯覇]] [[분류:한나라의 공신]][[분류:후한의 인물]][[분류:37년 사망]][[분류:추존된 황제]]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