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r1판)
편집일시 :
분류
동명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내용은 민족문제연구소 문서 참고하십시오.
컴투스에서 개발한 동명의 게임에 대한 내용은 서머너즈 워 : 백년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
아바타 아앙의 전설의 배경에 대한 내용은 백년전쟁(아바타 아앙의 전설)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백년 전쟁은 중세 서유럽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서로마 멸망)-프랑크 왕국-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1] 근대까지도 이 둘의 자존심 대결은 유럽 분쟁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을 기준으로 인구 1600만 이상의 강대국이었고[2] , 잉글랜드는 인구가 프랑스의 절반도 안되는 500만 정도인 데다 한때 이웃 왕국인 스코틀랜드한테도 털리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군과 승리할수 있었는데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비교적 빠른 시기인 장 2세 치세부터 군제개혁을 시작해서 136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기동전술을 잉글랜드군보다 잘 구사했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한타를 걸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1370년 퐁발랑(Pontvallain)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면서 크레시 전투 이후 24년간 지속된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를 종결시켰다.
이름은 백년 전쟁이지만 양국이 116년 동안 지속해서 싸우지는 않았고, 단지 처음 선전포고를 한 1337년 이래 완전한 종전 선언이 발표되기까지 116년이나 걸렸다.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이 있었다.
시작은 보통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기 구분에서 1360년의 휴전까지를 1기로 두는 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가끔 1380년대로 두는 케이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간헐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태자 에드워드의 사망을 휴전기의 기준으로 한 것.
그러나 이후 구분이 문제인데, 심재윤의 《서양중세사의 이해》는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2기(잉글랜드 우위)와 3기(프랑스 우위)를 가르고 있고, 위키피디아와 Osprey 출판사는 1429년 잔다르크의 활약을 계기로 2, 3기와 4기를 가른다.[3] 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396년[4] 과 양측의 왕이 모두 사망한 1422년을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 뒤에 보듯 휴전으로 취급되는 여러 기준도 1340년~1355년도, 1375년, 1396년도 등이 있어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일명 팔츠계승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 전쟁(1701~1815)[5] 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
2. 배경[편집]
전쟁의 단초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2.1. 가스코뉴 지배권 (1259~1327)[편집]
이들의 크고도 좋은 사무실은 궁전 북벽에 특별한 출입문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여기에서 처리되는 까다로운 업무들이 고도의 평온함과 완벽한 칩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고등법원 판사들이라고 부르는 언제나 깨어있는 노련한 인사들이 그들의 법정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법과 관습법에 대한 확실한 지식들로 노련하고도 관대하게 소송들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적 선고를 벼락같이 내리친다. 이 선고들은 어느 누구도 또 어느 배석자들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신과 법에 대한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백한 자들과 정의로운 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악한 자들과 불경한자들은 자신들의 불공정함에 비례하여 고난과 불행에 빠져들게 된다.
장 드 장덩 저, 홍용진 역, '파리 예찬', 1322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권(lordship)을 지주권(landlordship)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Kenneth Alan Fowler
노르망디 공작이던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 이는 프랑스 왕국의 봉작인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봉신인 것이며,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직위가 프랑스의 국왕보다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래도 12세기 중반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봉건제'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6] 단순히 이전까지는 카페 왕조의 권위가 일드프랑스를 넘어서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이 7세와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나 리처드 1세에게 감히 신하로서 신서를 하거나 부조를 바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1200년 존 왕이 필리프 2세에게 신서를 하고 프랑스 영토에 대한 대가로 2만 마르크를 바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얼마 뒤 존 왕이 대륙 영토를 한방에 다 잃어버리는 대사건이 벌어지면서, 거의 반세기 동안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1259년 파리 조약으로 헨리 3세는 가스코뉴의 영토를 보장받는 대신 신서를 다시 시작했고, 그렇게 잉글랜드의 왕들은 프랑스 땅의 영주로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노르망디 공작위는 몰수당했지만 가스코뉴의 일부 영토와 함께 아키텐 공작으로서의 지위가 남아 있었다.
가스코뉴 지방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인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12세기까지만 해도 북쪽의 푸아투에 비하면 가난하고 낙후된 지방이었지만, 존 왕이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륙 영토를 전부 잃은 뒤로 잉글랜드의 와인 수요를 독점하면서 이후 100년 동안 꾸준히 개발이 이루어졌다.
특히 다섯 개의 강과 바다가 교차하는 지점을 통제하는 최요충지에 위치한 보르도 시는 바다를 통한 곡물 수입과 와인 수출에 의존하는 내륙 도시들의 목숨줄을 대놓고 쥐고 있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왕들은 보르도 시민들의 충성심만 유지해도 지역 전체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들인 노력에 비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보르도 시의 면적은 100년 사이 3배까지 늘어났으며 가스코뉴에서 왕실이 얻은 수입은 1307년 17000파운드, 1324년 13000파운드로, 평시에 13000파운드 정도[7] 였던 잉글랜드 양모 관세 수입과 비슷했다.
그러나 13세기와 14세기초 프랑스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가스코뉴의 영지는 단지 평생에 한두 번 자존심을 굽히고 프랑스 왕에게 찾아가서 신서를 하는 것 이상의 가혹한 대가를 잉글랜드 왕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핵심은 프랑스 왕이 아키텐의 주권자로서 가진 사법권이었다.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중세 후기의 보편적인 정치이론에 의하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가스코뉴인들은 왕의 대관이 주재하는 지방의 국왕법정이나 1270년대에 확립된 파리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할 권리를 가졌고, 프랑스의 왕은 항소를 수리하고 봉신인 아키텐 공작을 법정에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아키텐의 공작일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한 그들에게 프랑스 왕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가스코뉴인들은 프랑스 왕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헨리 3세 이후로 외국인이나 다름없어진 공작들[8] 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기회만 있으면 파리고등법원에 찔렀다[9] . 프랑스 왕의 대관들이 조사를 하기 위해 파견될 때마다 보르도에 있는 공작의 정부는 마비되었고 권위에 손상을 입었으며 재정적 피해가 발생했다.
결국 1293년 보르도와 바욘에서 반프랑스 폭동이 발생했고, 프롱삭에서는 국왕의 세관원 4명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필리프 4세는 가스코뉴에 대관들을 파견해서 폭동에 책임이 있는 도시 유력자들의 신병을 양도하라고 명령했고, 에드워드 1세가 이를 거부하자 그를 파리고등법원에 소환했다.
에드워드가 소환 명령에도 불응하자 필리프는 에드워드에게 사실상 자치권은 인정할 것이니 왕으로서 위신을 지키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항복하고 대관과 일부 수행원들을 주요 도시에 입성시키라고 요구한다. 완벽하게 속은 에드워드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고 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혼인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필리프는 애초부터 아키텐을 먹을 생각인터라 '수행단'의 행렬은 몇 주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에드워드에게 내린 소환 명령도 취소되지 않았다. 당연히 에드워드가 나타나지 않자 필리프는 공작령 몰수를 선언하고 가스코뉴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까지 엮이게 된 이 전쟁은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플랑드르 반란군에게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하면서 정체 국면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은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주둔군을 쫓아냈는데, 프랑스군은 보르도 시 없이는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03년 5월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에드워드는 마침내 대륙 영토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1308년 에드워드 2세가 이자벨 공주와 결혼하면서 일시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에드워드가 이 전쟁에서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소모한 전비는 총 40만 파운드로, 공작 정부의 10년치 수입을 훨씬 상회했다. 필리프는 비록 에드워드를 상대로는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과 파리고등법원 관료들의 선전과 달리 프랑스군은 무적이 아니며 다구리에 장사 없다는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후대의 왕들에게 불안 요소를 남겨두었다.[10]
프랑스 왕과 아키텐 공작 중 누구도 전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가스코뉴는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파리고등법원이 항소를 수리하고 대관을 파견하고 반프랑스파가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제 관계의 주도권은 완전히 프랑스로 넘어갔고 시간은 프랑스 편이었다. 1313년 보르도의 파산한 공작 정부는 필리프 4세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키텐의 '폭력, 약탈, 무정부 상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명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324년 생사르도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에드워드 2세와 그의 무능한 정부 고문들은 공작령의 내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샤를 4세의 허세와 거짓 정보에 완전히 농락당했다.
결국 에드워드 2세는 1325년 8월 항복하고, 이자벨 왕비와 열두 살 된 어린 아들 에드워드를 파리로 보내서 샤를 4세에게 신서를 하게 했다. 하지만 이자벨 왕비는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애인인 로저 모티머와 함께 프랑스에서 모집한 용병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그동안 잇따른 실정으로 런던시를 포함해 잉글랜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지를 잃고 있었던 에드워드 2세는 한순간에 몰락하고 퇴위당한 뒤 1327년 9월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한다.
2.2. 프랑스 왕위 계승권 (1328~1331)[편집]
그가 스스로 프랑스의 왕이라고 주장할 바에야, 차라리 바빌론의 술탄이나 천국의 왕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로체스터의 익명의 연대기 작가. (BL, Cotton MS Faustina B. V, fol. 88)
왕위 계승권 문제는 기존 카페 왕조의 왕인 샤를 4세(재위 1322~1328, 단려왕)가 직계 없이 6년 만에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는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 그리고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살리카법은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명시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에드워드의 계승권이 높다고 볼 수 있었지만, 굳이 살리카법을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귀족들이 그를 거부해야 할 이유는 많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외국 이름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30년 가까이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과 대립했고 프랑스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침공하거나 점령하기도 했다. 어머니인 이자벨은 왕족이지만 특유의 성격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인망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악명만 넘쳤다.
반면에 발루아의 필리프는 프랑스의 대귀족으로서 프랑스 귀족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으며, 카페 왕조 말기의 위기 때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솔선수범했던 리더로써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 샤를[11] 의 후광을 업고 있었다. 결국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발루아의 필리프가 섭정이 되었고, 샤를 4세의 유복자를 임신한 왕비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자 즉시 필리프 6세로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이자벨 왕대비가 보낸 사절단은 프랑스에 발을 딛자마자 잉글랜드로 쫓겨났으며, 그녀와 달리 프랑스에서의 이해관계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었던 잉글랜드 귀족들은 의회에서 에드워드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1329년 9월 프랑스를 방문해 아키텐 공작으로서 필리프에게 신서를 함으로써 그를 프랑스 왕으로는 인정했지만, 의식 도중 손을 맞잡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공작령에 대해 그가 가진 주권을 부정했다. 이자벨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한 이 어설픈 반항에 대해 필리프는 1330년 7월까지 기한을 주고 완전한 신서를 다시 하지 않으면 공작령을 몰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예고한 기한이 지나자 필리프는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으며, 잉글랜드 왕실은 이번에는 진짜로 가스코뉴를 완전히 상실할 위험에 처한다. 결국 1330년 10월 로저 모티머를 축출하고 모후 이자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멈추기 위해 이듬해 4월 신서를 다시 함으로써 필리프를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 대해 주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다.
필리프는 에드워드의 아버지(2세)는 명백히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과거 생사르도스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토를 돌려줄 수는 없지만, 대신 올해 초의 군사원정으로 에드워드가 입은 피해는 배상하겠다고 관대하게 제안했으며, 에드워드는 필리프가 계획 중인 십자군에 동참하고 싶다고 대답함으로써 호의를 표했다. 이듬해 호아나 2세의 아들인 나바라의 샤를이 태어나면서 에드워드의 계승권은 법적으로도 근거가 미약해졌다. 그렇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 문제는 해결되는 듯 보였다.
2.3. 스코틀랜드 문제 (1332~1336)[편집]
그가 우리 민족을 구원했고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므로 우리는 왕국의 법과 그가 쌓은 공로 때문에 그를 신하로서 섬기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따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작했던 일을 포기하고 우리 왕국이나 민족을 잉글랜드 왕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바치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체 없이 그를 그 자신의 권리와 우리의 권리에 대한 배신자이자 우리의 적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고작 백 명의 스코트인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는 절대 잉글랜드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영광도 부유함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유, 의로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아브로스 선언, 1320년
프랑스의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의 왕이 스코틀랜드인들을 모욕하는 일에 그토록 힘써왔으므로 그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왕이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헨리 나이튼의 연대기
이런저런 갈등이 씨앗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필리프 6세는 아비뇽 유수를 통해 확립한 프랑스 국왕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1331년부터 십자군을 준비한다. 목적지인 레반트의 도시들에 첩자들이 파견되었고, 왕실 기술자는 공성무기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으며, 대규모 군대와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이 이루어졌다. 결국 출항일이 1336년 8월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1332년 8월 11일,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스코틀랜드의 왕위주장자 에드워드 발리올이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다섯 배가 넘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격파하고 9월 24일 스콘에 입성해 대관식을 치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얼마 못 가서 발리올은 휴전 조약을 맺고 방심한 틈에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기습을 받고 칼라일로 쫓겨났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를 끝장낼 기회로 여기고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발리올과 그의 동맹인 잉글랜드군이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로우랜드를 장악하자 어린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한편 필리프 6세의 매제인 아르투아의 로베르는 부르고뉴 공작부인으로부터 아르투아 백작위를 빼앗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수배중이었는데, 에드워드는 1334년 봄에 그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교활한 음모가인 로베르가 어린 에드워드를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왕위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는 음모론이 유행했지만, 당대 잉글랜드측 연대기나 공문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가설은 나중에 잉글랜드로도 건너와 후대의 잉글랜드 작가들에게 수용된다.
필리프 6세로서는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주요 동맹국이 몰락한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인 잉글랜드 왕을 뒤에 남겨두고 원정을 떠날 수 없었다. 1334년 5월 에드워드 3세는 생사르도스 전쟁으로 몰수된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신도 십자군에 동참하겠다는, 스코틀랜드만 제외하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절충안을 내놓지만, 필리프는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동정심 또는 왕으로서의 명예 때문에 거부한다. 그는 아직 잉글랜드를 대놓고 적대할 수 없었지만 스코틀랜드의 저항군에게 동맹으로서 자금을 지원하고 영불해협에서 스코틀랜드와 노르망디 사략선의 활동을 허가하는 등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의 지원이 효과가 있었는지 1334년 8월 스코틀랜드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발리올이 또다시 쫓겨났다. 에드워드도 단념하지 않고 또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지만 유난히 혹독했던 그해 겨울 날씨 때문에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이듬해 7월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로우랜드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에 필리프는 파리 왕궁에 모인 관료들 앞에서 선대 왕들이 스코틀랜드와 맺은 동맹 조약을 언급하며 스코틀랜드에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6000명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갑작스럽게 발표했다. 그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고, 어쩌면 스코틀랜드가 다시 침공당한 동시에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가 중병에 걸려 쓰러진 일을 신이 내린 벌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8월에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가의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정부의 지령을 받는 잉글랜드의 교구 사제들은 미사 시간마다 '스코틀랜드의 배후에 있는 외국 동맹군'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프는 에드워드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공동 중재자 역할을 제안했지만,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던 교황은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편을 들고 있는 필리프에게는 중재자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며 혼자서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필리프 6세와 데이비드 2세는 결국 발리올과 에드워드 3세 측이 제안한 모든 협상안을 거부했고, 1336년 4월 에드워드는 휴전 기간이 끝나는 즉시 스코틀랜드를 재침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신이 파견한 중재인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교황은 필리프에게 십자군을 취소할 것을 제안했다.
1336년 6월 에드워드는 약속대로 스코틀랜드를 다시 침공했지만 이번에는 대군을 이끌고 가지 않았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이제 프랑스군의 스코틀랜드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기병을 포함한 수천 명의 병력이 상륙하고 보급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은 북동부의 비옥한 해안 평야뿐이었다. 에드워드는 800명의 병력만 이끌고 해안가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경작지를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수도원의 식량창고를 약탈한 뒤 마지막으로 애버딘을 철저히 파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십자군 원정을 위해 준비된 프랑스 남부 함대가 노르망디에 도착해서 북부 함대와 합류했으며, 8월 20일 파리에서 진행된 협상에서 필리프는 이 함대로 잉글랜드를 침공해 동맹인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내용의 최종 답변을 발표했다. 곧바로 프랑스 군함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가스코뉴 국경에도 새로운 세네샬이 임명되는 등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반역죄와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선언하기 위한 명분 작업으로 파리고등법원은 우선 나바유 영주가 에드워드에게 제기한 소송에 대해 3만 플로린이라는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12월에는 문서위조범 아르투아의 로베르의 신병을 양도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맞서 에드워드도 1337년 2월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북동부 해안을 불태운 작전이 너무 성공적이었는지 필리프가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상륙시킨다는 처음의 계획을 바로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기껏 모인 함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마을들을 습격하는 의미 없는 무력시위만 반복했고 에드워드는 이를 잉글랜드 내부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잘 활용했다. 이제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인들의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인들의 친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스코틀랜드에 프랑스군이 이미 상륙해 있고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학살당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항구에는 군함 700척이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arriere-ban)이 프랑스 왕국에 선포되었고, 곧이어 파리에서 열린 대심의회는 반역죄를 저지른 에드워드의 아키텐 공작위를 몰수하는 것에 동의했다. 7월경에는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마을과 소도시를 불태우기 시작했지만 끝내 요충지에 자리 잡은 요새들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에드워드 3세와 그의 동맹들은 프랑스 북부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동맹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평소 필리프 6세를 '자칭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며 공공연히 깎아내렸는데, 이 명칭은 1337년 10월부터 잉글랜드의 공문서들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반역 혐의를 반박하고 가스코뉴 지방에 대한 필리프의 주권을 부정하기 위해 그의 정통성을 부정했을 뿐 아직 스스로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필리프가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자칭 왕일 뿐이라면 진정한 왕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신중하게 무시되었다.
2.4. 플란데런 반란 (1323~1338)[편집]
"잉글랜드 왕의 호의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플랑드르는 옷감을 만들어서 먹고 사는데 양모 없이는 옷감을 못 만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잉글랜드를 친구로 삼아야 한다."
프랑스 대연대기
플란데런은 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북부 유럽 상권의 중심지로 유명한데, 일단 프랑스가 이 지역에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잉글랜드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방이라 항상 갈등이 존재했다. 잉글랜드는 양모 수출국이었고 플랑드르는 유명한 모직물 제조 지역이었다.
결국 1302년 5월 브뤼헤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주둔군과 친프랑스파 유력자들이 학살당한다. 한달 뒤에는 기병대도 없이 급하게 소집된 방직공, 축융공, 소작농들의 군대가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플랑드르는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긴장은 지속되었고, 1322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된 느베르의 루이가 대놓고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자 다시 브뤼헤에서 직물 노동자들의 봉기가 터졌다. 봉기는 플랑드르 전역의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고 불만을 품은 하층민들이 프랑스인이나 친프랑스파 귀족들과 유력자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군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해 있었던 백작이 1328년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필리프 6세의 도움을 받아 카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브뤼헤의 시장도 에드워드 3세에게 필사적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때는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맞서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시장은 프랑스군에 붙잡혀 반역죄로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해진다. 이후 플랑드르에서는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심이 한층 더 깊어진 백작에 의해 반프랑스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공포 통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문제로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1336년 8월 에드워드 3세가 양모 수출 금지령을 내리자 프랑스 정부는 플랑드르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상실해갔다. 플랑드르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1337년 8월에는 이전의 반란에 대한 배상금을 감면했고 11월에는 전액 면제한다는 특단의 조치까지 취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1337년 12월 헨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이후 7년 동안 플랑드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될 헨트 상인 야콥 반 아르테벨데를 필두로 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1338년 1월 헨트 임시정부는 곧바로 도착한 잉글랜드 사절단과 협상을 벌여,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앙모 수출 금지령의 해제를 약속받았다. 4월에는 플랑드르 백작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진압군을 격파한 뒤 브뤼헤로 진격해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백작의 항복을 받아냈다.
궁지에 몰린 필리프는 1338년 6월 '생계수단을 잃은 헨트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임시정부가 잉글랜드와 맺은 중립 조약을 인정하고 반역죄를 사면할 수밖에 없었다.
3. 경과[편집]
3.1. 제1기(1337~1360)[편집]
3.1.1. 슬로이스 해전(1340, 잉글랜드 승)[편집]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을 타개하기 위해 필리프 6세는 바다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남부해안 지역을 습격하여 가스코뉴를 약탈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곧 영국과 프랑스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를 봉쇄하기 위해 슬로이스 항을 함대로 포위했다. 이에 1340년 6월 24일 프랑스 함대 및 잉글랜드, 그리고 플랑드르 간의 대규모 해전이 발생했다. 슬로이스 해전에서 플랑드르의 도움을 받은 잉글랜드 해군은 프랑스 함대 190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프랑스 해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12]
슬로이스 해전 이후 육상에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에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의 진격을 가까스로 저지하였다.[13]
이때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면서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결국 1340년 9월 25일 양국은 2년 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다.
3.1.2. 브르타뉴 공위 계승 전쟁(1341~1364)[편집]
하지만 휴전은 1년 만에 깨졌다.
1341년 4월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공작령에서 후계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브르타뉴 공작령은 프랑스 발루아 왕가,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지역이었다. 장 3세의 조카인 잔느(팡테블 여백작 - 계승순위가 우선됨)와 장 3세의 배다른 동생인 장 드 몽폴(몽폴 백작 - 어머니의 여백작 지위를 승계)간의 후계 대결이 발생했다. 프랑스 왕실령과 달리 브르타뉴에서는 자체 관습법에 의해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될 때 프랑스는 살리카법을 옹호하지 않았는데, 이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살리카법을 옹호하면서 장 드 몽폴과 손을 잡았다.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은 몽폴은 반대하는 대다수의 제후를 무찌르고 브르타뉴의 수도인 낭트를 손에 얻었다.
그러자 프랑스는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브르타뉴에 공격을 가했고, 잉글랜드가 이에 맞서 개입했다. 프랑스는 10월 몽폴을 포로로 잡았으나 아내 잔느(후계자 잔느 여백작과 이름이 같다)가 몽폴의 아들인 장(장 4세)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서부 브르타뉴의 에느본에서 강경하게 농성했다. 그래서 "두 명의 잔느가 싸웠다"라고 일컬어진다.
1342년에 벌어진 브르타뉴에서의 일련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나며 다시 한번 일시 정전이 체결되었다.
정전이 종결되고 1346년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다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면서 전쟁을 벌였고, 이 여파로 이탈리아에서 잘 나가던 가문 하나[14] 가 파산하기도 했다.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서 플랑드르까지 가는 동안 프랑스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잉글랜드군은 비용을 자체 조달하고 프랑스군을 끌어내기 위해 약탈 행렬(chevauchee)을 자행했다. 가는 길에서 돈이 되는 건 다 약탈하고 불 지르고 다니면서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런 약탈은 중세 전쟁에선 기본이었으나 잉글랜드군은 아예 싸그리 털어먹고 불 질러버린다는 점에서 한층 더 악독했다(...). 또한 프랑스 북부의 중요한 항구이자 양모 가공업이 발달한 산업 도시인 칼레를 1347년에 함락했다. 이때 '칼레의 시민들'이란 유명한 야사가 있다. 이 부분은 칼레 문서를 참고할 것.
1351년엔 브르타뉴에서 일명 30인의 전투(Combat of the Thirty/Combat des Trente)라고 부르는 독특한 전투도 벌어졌는데 기사도 정신에 따라 30인의 프랑스 기사와 30인의 잉글랜드 기사가 각국을 대표하여 전투를 벌인 것이였다
사실 이 전투는 본래 프랑스의 기사 장 드 보마누아르와 잉글랜드의 기사 로버트 벰버러 간의 1:1 결투였으나 점점 30:30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결국 토너먼트 형태가 되며 2차전까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6명 전사, 잉글랜드는 지휘관이던 로버트 벰버러를 포함해 9명이 전사하며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당시에도 모범적인 기사도의 사례로 꼽히며 전투 자체도 전사자는 있었지만 평화롭게 마무리 되었음에도 훗날 민족주의 이후에는 프랑스에선 영국(잉글랜드)의 기사가 반칙을 했다거나, 반대로 영국에선 프랑스가 반칙을 했다는 식으로 서로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변질되었다.
3.1.3. 크레시 전투(1346, 잉글랜드 승)[편집]
결국 프랑스군은 약탈 행렬을 더 두고 보기도 그렇고 충분한 군대도 모으고 해서 1346년 8월 26일 프랑스 크레시에서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0,000명의 잉글랜드군이 30,000명의 프랑스군을 패퇴시키며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단,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사료마다 다르다. 잉글랜드군은 6,000~12,000명, 프랑스군은 20,000~100,000명으로 나온다. 잉글랜드군은 10,000~12,000명, 프랑스군은 30,000~40,000명으로 보는 게 중론이다. 중기병 수로는 잉글랜드가 2,300~4,000기 대 프랑스가 최소 2/3에서 대부분이 기병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000~6,000명이 제노바의 석궁병들이다. 여하간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다.
3.1.3.1. 잉글랜드 승리의 원인[편집]
이에 대해서는 장궁을 이용한 강력한 투사 무기를 이유로 드는데 사실 좀 더 복합적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에서 좋은 자리 잡고 있음.
- 롱보우를 이용해서 상대를 투사 무기로 압도함.[15]
- 잉글랜드군이 계속 화살을 퍼붓자 프랑스군이 어쩔 수 없이 언덕 위로 올라옴.
- 잉글랜드군이 양 날개에서 화살비를 쏟아붓고 프랑스군은 화살비를 피하느라 중앙으로 밀리는 바람에 과다 밀집 상태에 빠짐.
- 프랑스 기마대는 일단 말뚝과 목책에 저지되고 지친 프랑스군을 언덕 위에서 쉬고 있던 잉글랜드 하마(下馬) 기사[16] 가 격퇴.
- 프랑스군이 퇴각하면 잉글랜드의 하마기사들이 다시 말을 타고 프랑스군을 추격.
라는 식으로 기본형이 만들어진다.
3.1.3.2. 사상자[편집]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0,000~30,000명으로 추정되며 제후 11명과 기사 1,200여 명이 포함된 수치라고 한다. 그리고 사망자 중에는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숑 백작 샤를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인 보헤미아 국왕 겸 룩셈부르크 백작 얀 루쳄부르스키 등 화려한 인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3.1.3.3. 전후 잉글랜드의 프랑스 국토 유린[편집]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는 이 전투가 끝나고 2달 후인 10월에 프랑스의 부름[17] 으로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으나 네빌스크로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에 패해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고 1357년 풀려났다.
결국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군은 이제 프랑스 북부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방 천지로 약탈 행렬을 자행하기 시작, 프랑스 전역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3.1.4. 교황의 중재와 휴전(1347 ~ 1350), 흑사병 창궐[편집]
이런 가운데 양측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1355년까지 휴전 협정을 맺는 문제를 협상했고, 그 와중에 흑사병이 널리 퍼지자 아예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자는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휴전 협정 교섭 중 필리프 6세가 사망했고(1350) 그 뒤를 이어 장 2세(1350~1364, 선량왕)가 즉위했다.
3.1.5. 소규모 교전, 나바라파의 등장 (1351 ~ 1354)[편집]
필리프 6세가 사망함으로써 휴전은 선언된 지 2개월 만에 파기되었다. 이후 전쟁은 가스코뉴의 요새들을 하나씩 점령해서 최종적으로 방어선을 붕괴시키려는 프랑스군과 프랑스 북부를 위협해서 가스코뉴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려는 잉글랜드 원정군의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초기 전황은 프랑스에 매우 유리하게 돌아갔다. 1351년 4월 프랑스군은 보르도와 베르쥬락 간의 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몽트라벨 성을 기습해서 점령한 반면,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북부에서 벌인 기마행군은 모두 눈에 띄는 성과를 얻지 못했거나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9월 장 2세는 셍장덩주엘리의 요새를 할양받는 등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352년은 프랑스가 처절하게 굴욕을 당한 해였다. 한 잉글랜드 향사가 1월 휴전 조약을 위반하고 북프랑스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긴느 성을 기습해서 점령했다. 격분한 프랑스인들은 긴느 성을 포위하고 수개월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7월 밤에 늪지대를 가로질러 기습을 걸어온 잉글랜드군의 공격에 포위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10년 전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가스코뉴의 요충지인 블레유를 탈환했고, 10월 초에는 타른 강의 조운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라프랑세즈를 점령했다.
한편 전쟁이 재개된 이후 장 2세는 거의 모든 왕실 부채의 상환을 중단해야 했고, 전황까지 나빠지면서 급격히 인기를 잃어갔다. 새 왕과 총신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왕족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결국 1353년 1월 카를로스 2세와 그의 지지자들이 장 2세의 측근이자 프랑스의 총사령관인 샤를 드 에스파냐를 암살하면서 파국이 시작되었다.
3.1.6. 흑태자 에드워드와 푸아티에 전투(1356, 잉글랜드 승)[편집]
그 후로는 통치 질서가 붕괴되고 따라서 국방이 약화되어 프랑스인들에게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 그리고 위험이 다가왔다.
14세기 중반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1354년 아비뇽에서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는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거나 그 대신으로 아키텐 영토의 인정 및 투레인, 앙주, 메인 등의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이를 거부했고 이듬해 1355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전투가 재개되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를 약탈하며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갔고, 마침내 율리우스력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에서 흑태자의 잉글랜드군과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일전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군의 병력이 잉글랜드군보다 세 배나 많았기 때문에 장 2세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결국 패배하고 말았고, 장 2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부가 대거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흑태자는 장 2세를 극진히 대우하긴 했지만 결국 몸값은 다 뜯어냈고, 심지어 프랑스가 몸값을 지불할 돈이 없자 장 2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잉글랜드로 건너가 스스로 포로(!)가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프랑스에선 왕까지 사로잡히자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왕세자(뒤의 샤를 5세, 현명왕)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삼부회의 평민 의원들은 에티엔느 마르셀을 중심으로 국왕이 국정 운영하지 못하게 하자라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제안'을 하는 바람에 1년여에 걸쳐 협상을 끝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평민 의원들과 협상을 포기한 샤를 왕세자는 자신을 국왕 섭정으로 선포하고 1358년 프로방스와 콩피에뉴에서 별도의 삼부회를 소집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농민들에 의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나자 샤를 왕세자는 이를 평정하고 파리로 쳐들어가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 내에 내분을 유도해 에티엔느 마르셀을 척살하는 데 성공했다.
곧 휴전 기간이 끝나면서 전쟁이 재개됐지만, 프랑스군이 결전을 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잉글랜드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에드워드 3세는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1360년 에드워드 3세는 확장된 아키텐과 칼레(Calais), 퐁티웨(Ponthieu)와 푸아투(Poitou)를 보장받는 대신 프랑스 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이 브레티니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한편 장 2세는 1364년 런던에서 죽었다.
3.2. 제2기(1369~1389)[편집]
3.2.1. 끝나지 않는 전쟁과 프랑스의 재기(1360~1366)[편집]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북부에는 잉글랜드, 가스코뉴, 에스파냐, 나바라, 독일, 스코틀랜드 등 온갖 지역에서 몰려온 자유계약 용병들[18] 이 프랑스의 마을과 요새를 점거하고 주민들로부터 보호비를 갈취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이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프랑스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낼 명분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얌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랑드 콩파니'(Grandes Compagnies)라고 불리는 대군세를 이루어[19] 남동쪽으로 행군하며 프랑스 동부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브리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는 교황이 거주하고 있던 아비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교황에게서까지 보호비를 뜯어내는 업적을 달성한 다음, 유명한 잉글랜드인 용병 존 호크우드를 비롯한 군대의 절반 가량은 아비뇽의 교황에게 고용돼 이탈리아 등지에서 교황의 적들과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프랑스 각지로 흩어져서 이전처럼 계속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프랑스 민중과 지방 중소귀족들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해보였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왕국과 샤를 5세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약탈을 일삼는 이들 용병 무리를 진압할 정규군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1363년부터 마침내 '주민세'(fouage)가 시행된 것이다. 1363년 11월 아미엥에서 소집된 삼부회는 그랑드 콩파니라는 국가적인 재앙에 맞서 "우리 왕국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6,000명의 전사(맨앳암즈)를 상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몫을 부담하며(le fort portant le foible) 가구 소득에 따라 최하 1프랑에서 최고 9프랑까지 평균 3프랑의 주민세를 부과[20] 한다는 데 동의했다.
샤를 5세와 샤를 6세 시기 프랑스 발루아 왕실의 연간 조세수입은 이전의 3~5배인 200만 프랑 내외에서 최대 240만 프랑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1] 참고로 전신갑옷과 각종 무기 및 2~3필 이상의 군마를 소유한 맨앳암즈 6,000명 + 준마나 조랑말을 탄 경기병과 승마궁수 18,000명 + 조랑말을 탄 종복 6,000명으로 구성된 기병대 30,000기의 365일치 봉급이 186만 프랑이었다. 샤를 5세는 이후 10년 이상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음에도 1380년 사망했을 때 아들인 샤를 6세에게 상당한 액수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통일적이고 정기적인 조세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재정사의 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 2~3년 동안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던 용병 도적떼들은 현지 주민들의 비협조와 방해, 내부 분열을 겪으며 서서히 프랑스군에 매수되거나 진압됐다.
3.2.2. 프랑스의 반격과 재정복(1366~1389)[편집]
1366~1369년 제1차 카스티야 내전에 잉글랜드[22] 와 프랑스[23] 가 둘 다 끼어들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푸아티에 패전 이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던 시기에 게릴라 전술로 전공을 세워서 명성을 얻었던 기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때부터 프랑스의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했다. 브르타뉴의 최하층 신사 집안 출신 용병대장이었던 게클랭은 탁월한 게릴라 전술을 바탕으로 약탈 행위를 거듭하는 잉글랜드군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먼치킨 유닛 흑태자 에드워드는 각지에서 프랑스, 카스티야군을 쳐바르면서 다녔지만[24] 건강이 악화되어 후기에는 가스코뉴 지방에만 웅거했고, 그 사이에 게클랭은 다른 잉글랜드 군대를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는 한편 착실히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프랑스 성채를 회복했다.
장 2세의 뒤를 이은 '현명왕' 샤를 5세와 게클랭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맺고, 1380년대에 이르러 노르망디와 가스코뉴를 제외한 기존 영토를 거의 다 회복했다. 이런 와중에 때마침 흑태자 에드워드가 병에 걸려 죽었다(1376).
브르타뉴 공위 계승 전쟁은 1364년 올레 전투에서 결국 친영파인 몽폴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끝났다. 최후의 결전에서 샤를 드 브로와가 사로잡히고, 게클랭이 포로가 되면서(!) 잔느 여백작은 승계를 포기했고, 결국 몽폴의 아들 장 4세가 브르타뉴의 공작이 되어 프랑스와 화해했다. 그러나 장 4세가 몰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것이(1372년) 발각되면서 장 4세는 다음해 추방되고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직속영지(1378년)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잔느 여백작까지 브르타뉴의 독립을 위해 들고 일어나면서(!) 샤를 6세의 즉위에 따라 1381년 장 4세가 다시 복귀했다.
전황이 불리한 가운데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잉글랜드 의회는 극빈자를 제외한 왕국의 모든 신민에게 인두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했고, 결국 1381년 5월 분노한 평민들[25] 로 구성된 수만 명의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으나(와트 타일러의 난)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가 협상 자리에 나갔다가 런던 시장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진압되었다.
1385년 5월에는 장 드 비엔느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26] 이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해 가을 스코틀랜드군 4,000명[27] 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다. 대륙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데 이어 본토를 공격당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잉글랜드는 맨앳암즈 6,000명, 장궁병 6,000명으로 주력 전투병만 12,000명, 보조병 포함 20,000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해 로우랜드 지방의 대부분을 약탈하고 불태웠지만 연합군이 결전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자 결국 보급 문제로 회군했다. 하지만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왕위를 노리지 않을까 우려하던 리처드 2세가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원정을 일찍 중단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돌았다.[28]
한편 스코틀랜드 측에서는 이 잉글랜드 원정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닌 프랑스의 이득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온 귀족들을 강제로 억류한 채 프랑스 발루아 왕실에 피해 보상금을 요구했고,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서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겼을 정도로 동맹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392년의 아미앵 회의와 1393년의 루랑쟝 협상, 1396년의 아르들 회의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은 적대행위를 종결하고 이후 1415년까지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화평을 빌미로 잉글랜드는 내전이 벌어지니...
3.3. 양국의 내전과 전쟁의 재개(1390~1415)[편집]
3.3.1. 잉글랜드의 내전과 랭커스터 왕조 설립(1399)[편집]
흑태자의 요절에 이어 에드워드 3세도 사망하자(1377)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했으나, 인두세 문제로 잉글랜드는 내전에 휩싸인다.[29] 화평이 대강 종결되고 나자 리처드 2세는 반격에 나서 글로스터 공과 알란델 백작을 처형(1397년)했으나, 아일랜드 원정에 빈틈을 보이며 결국 패배해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그렇게 랭커스터 공작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랭커스터 왕조, 1399년). 잉글랜드 중부의 노섬벌랜드와 웨일즈, 웨일즈 근처의 변경 영주들이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헨리 4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을 제압했다.
3.3.2. 프랑스 내전(1407~1435)[편집]
한편 프랑스는 샤를 5세(재위 1364~1380)의 아들인 샤를 6세(재위 1380~1422, 친애왕)가 발작으로 미쳐버렸다.
결국 부르고뉴파[30] 와 아르마냑파[31] 가 섭정 후견의 실권을 두고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은 모두 왕의 방계 후손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2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숙부와 조카 사이였다.
두 파벌의 정쟁은 결국 극단으로 치달아, 1407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32] 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재무장관 겸 아키텐 총독)[33] 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터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전이 발생한 주된 원인은 샤를 5세가 지난 세대 동안 공들여 이룩한 중앙집권화된 왕권이었다. 당시 부유한 백작령이나 공작령의 연간 조세수입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2~30만 프랑 전후에 불과했던 반면에, 프랑스 왕실의 수입은 200만 프랑을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유력한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고를 전용하기 시작하면 반대 파벌과 어마어마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경쟁상대를 간단히 말려죽일 수 있었다.
실제로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2세가 죽은 직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각종 연금과 증여 수익을 독점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용맹공 장 1세는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었다. 이런 이유로 장 1세는 사촌을 암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심복들은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와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시종이 회의에서 저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하고는 영지인 플랑드르로 달아났다.
이후 벌어진 내전의 초기 전황은 아르마냑파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1414년 아르마냑파는 부르고뉴를 침략해서 장 1세를 끌어내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기세가 올랐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아르마냑파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3.3.3. 교황청의 분열[편집]
같은 기간에 교황청마저 분열되었다(...). 1378년 로마로 돌아간 교황의 후계가 누가 정통이냐는 문제가 불거져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의 아비뇽 교회(친프랑스)와 교황 우르바노 6세의 로마 교회(반프랑스)로 분열되었다.[34] 자, 이제 대체 누가 화해를 주선할 것인가?
3.4. 제3기(1415~1453)[편집]
3.4.1. 아쟁쿠르 전투(1415, 잉글랜드 승)[편집]
헨리 4세(재위 1399 ~ 1413)의 뒤를 이은 헨리 5세(재위 1413 ~ 1422)는 의회의 지지를 끌어내고 세력 정리도 할 겸 이 기회에 다시 내분에 빠진 프랑스를 공격했다. 1415년 부르고뉴 공작파와 친교를 맺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헨리 5세는 칼레까지 진군했고, 샤를 6세(정확히는 샤를 달브레 장군이 대행)도 여기에 맞서서 응전을 준비했는데 에드워드 3세가 처음에 겪었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지친 잉글랜드군을 향해 프랑스군이 집결해 공격한 것...까진 좋은데 1415년 벌어진 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처럼 처절한 삽질을 거듭하다 대패한다. 안 그래도 점성높은 아쟁쿠르의 진흙탕(뻘밭)+장마비에 병목지형으로 프랑스군이 우르르 밀려드는데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반격하자 밀려난 부대가 뒤로 후퇴하다가 뒤섞여버린 것. 그래도 프랑스군은 어떻게 잉글랜드군 본진까지 밀어붙이긴 했는데 프랑스 하마 기사들이 잉글랜드 하마 기사들과 싸우다가 잔뜩 지친 가운데 경무장한 잉글랜드군 궁수들이 측면을 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버렸다. 총사령관인 샤를 달브레도 여기서 전사했다.
3.4.2.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 급사(1422)[편집]
부르고뉴파의 도움까지 얻은 잉글랜드군은 베르네유(Vernile)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35] 이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36] 의 지원군을 격파하며 승기를 확실히 잡았다. 1418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수도 파리를 점령하자 도팽 샤를은 파리에서 도망쳤다.
1419년 샤를의 계책으로 부르고뉴파는 잠시 이탈했으나, 당사자인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거리에서 오를레앙파에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인 선량공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에 확실히 달라붙게 되었고, 결국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가 샤를 6세가 죽으면 자기 아들인 도팽 샤를 대신 사위인 헨리 5세에게 계승권을 준다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헨리 5세가 골골한 샤를 6세에 이어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될 수 있던 순간이었다.[37]
그러나 샤를 6세보다 18세나 어려 거의 확정적으로 샤를 6세 사후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 예상되던 헨리 5세가 1422년 35세의 나이에 이질로 급서하고 말았고,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 백년 전쟁을 마무리해야 했을 헨리 6세는 젖먹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샤를 6세는 그로부터 정확히 2개월 후에 사망했다.
3.4.3. 잉글랜드군의 루아르 강 남하(1428)[편집]
당시 잉글랜드, 프랑스의 전황.
하지만 잉글랜드는 아직도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는 언플로 도팽 샤를이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고, 오를레앙 공작과의 스캔들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퍼트렸다. 그렇기에 트루아 조약이 성립이 가능했다는 논리였고, 또 오를레앙 공작의 땅에 있는 샤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도 매우 적절한 선전이었다.
거기에 잉글랜드는 또 하나의 정통성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랭스였다. 프랑스 왕은 대대로 파리가 아닌 대성당이 있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했는데 샤를이 정식으로 프랑스 왕권을 주장하려면 파리뿐만 아니라 랭스까지 회복을 해야 할 판이었다. 덧붙이면 프랑스는 아비뇽 교회마저도 교황이 난립하는 반면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한 명의 로마 교황이 있었다. 오늘날 가톨릭에선 분열시대의 아비뇽 교황은 정통 교황이 아닌 대립 교황으로 본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은 아직 건재했다. 쐐기를 박기 위해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기어이 1428년에는 샤를의 본거지가 목전인 루아르 강까지 남하했다.
잉글랜드군의 다음 목표는 오를레앙이었다. 오를레앙은 앞서 말했듯 샤를을 돕는 마지막 대영주의 영지였으며, 중부 프랑스의 요충지로서 함락될 경우, 잉글랜드군이 루아르 강을 건너 도팽[38] 샤를(샤를 7세, 재위 1422~1461, 도팽 즉위는 1417년)의 본거지인 시농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를레앙 공이 잉글랜드군에 붙잡혀 오를레앙이 혼란에 빠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중세에는 영주가 부재 중인 도시를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짓으로 간주받았고, 오를레앙의 시민과 주둔군들은 오를레앙 공을 붙잡고 도시를 포위해 온 잉글랜드군에 분개하여 결사항전했다. 문제는 장기간의 포위와 프랑스군의 구원 실패로 인해 물자와 식량이 부족해지고 방어 능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여기까지는 프랑스 왕국의 사망 플래그였다.
하지만 그렇게 잉글랜드군이 주변 요새를 전부 다 무력화 시키고 오를레앙을 꿀꺽하려던 순간 한 인물이 등장하였으니...
3.4.4. 성녀의 등장과 대반전(1429)[편집]
바로 그 유명한 잔 다르크. 잔 다르크와 프랑스군은 성공적으로 오를레앙에 입성한 뒤 농성이 아닌 야전으로 잉글랜드를 몰아내버렸다(1429년 5월). 오를레앙 공방전의 승리 이후 잔 다르크는 1429년 6월 파타이 전투에서 전설적인 명장 탈보트 경의 군대마저 아쟁쿠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역관광을 시켰고 심지어 트루아와 랭스#까지 함락시키면서(1429년 7월) 부르고뉴를 관광시켜버리고 샤를을 정식 프랑스 왕 샤를 7세로 즉위시키면서 전장의 추를 프랑스 쪽으로 돌려놓는다.
3.4.4.1. 잔 다르크 화형(1431)[편집]
잔 다르크 자신은 파리까지 수복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 상황을 안정시키려던 온건파 샤를 7세와 기존 프랑스 귀족의 견제를 받다 파리 탈환의 기회를 놓쳐버린다. 더불어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사로잡혀 1431년 루앙에서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1412~1431)가 활약한 시간은 채 2년이 되지 않지만 백년 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은 지대하다.
잔 다르크의 승리 요인으론 역시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000명이 잉글랜드군 200명만 만나도 튈 정도로 심각한 모랄빵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 성처녀라는 이미지에 스스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장 뷔로를 비롯한 유수의 대포 전문가의 활약도 들긴 하는데 대포가 활약하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이유는 아닐 것 같다.
3.4.5. 프랑스의 승리(1435 ~ )[편집]
3.4.5.1. 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 왕의 화해(1435)[편집]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그동안 앙숙이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가 프랑스 왕 샤를 7세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 관계를 단절하면서 더이상 프랑스 내에서의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샤를 7세는 마콘 백작령, 폰티우 백작령, 오세르 백작령 및 아미앵, 기타 도시의 영유권을 필리프 3세에게 양도하고, 프랑스 왕에 대한 종속의 예를 평생 면제하였다. 반면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 관계를 정식으로 파기하였으며, 그 결과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다년간에 걸친 항쟁에 종지부가 찍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동맹을 잃었기 때문에 백년 전쟁 종결을 위한 조건이 정비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를 손절하며 독립각을 잡던 부르고뉴는 용담공 샤를의 전사로 프랑스에게 합병당한다.
3.4.5.2. 파리 수복(1436)[편집]
이후 프랑스군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 경과 라 이르 같은 장수들의 활약으로 1436년 파리를 수복하고 1437년 파리를 다시 프랑스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전세를 역전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잉글랜드군은 설상가상으로 요크파와 랭커스터파간의 대립이 슬슬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서 제대로 전력 투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39]
3.4.5.3. 프랑스의 영토 수복(1441 ~ 1453)[편집]
프랑스군은 1441년 상파뉴를 수복하고, 1450년 포미니(폴미니) 전투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사실 대포 자체가 살상력이 어마어마했다기보다는 프랑스군이 대포로 포격하자 잉글랜드군이 장궁으로 언덕 위에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우세한 프랑스 병력과 기마대에 쳐발린 식이었다. 포미니 전투를 끝으로 오랫동안 잉글랜드령이었고, 잉글랜드 왕의 근거지였던 노르망디[40] 마저 프랑스 손에 떨어졌으며 앙주 일대 멘까지 수복했다.[41] 뒤이어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장 뷔로가 이끄는 군대가 마지막으로 탈보트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분전을 분쇄하고, 보르도 시를 포함한 가스코뉴를 점령해,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버렸다.
3.4.5.4.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1475)[편집]
나약한 헨리 6세가 칼레를 지키기 위해 잃어버린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1475년) 잉글랜드는 더 이상 프랑스에 전쟁을 걸 명분을 상실했고, 이것이 백년 전쟁의 끝이었다.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칼레[42] 는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칼레는 잉글랜드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 기능하며, 잉글랜드 재정 수입의 35%를 담당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잉글랜드의 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잉글랜드는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 개입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역사적 의의[편집]
백년 전쟁의 주요한 의의는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백년 전쟁을 통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화가 완료되었다. 13세기 이전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왕이나 정치 체계가 달라도 딱히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다. 예컨대 프랑스 귀족이 잉글랜드 귀족이기도 했고, 잉글랜드 왕의 측근이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기도 했으며,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었던 귀족이 잉글랜드 국왕 편을 들기도 했다.
존 왕이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잉글랜드의 상인들이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플랑드르의 외국 상인들과 본격적인 무역분쟁을 시작하게 된 헨리 3세 시절부터 잉글랜드인의 국민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1세는 고대에 브리튼섬 전체를 통치했다는 전설적인 브루투스 왕과 아서 왕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영어 사용을 금지시킨다는 '주님께서도 눈을 돌리실 혐오스러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전시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며 잉글랜드 신민들의 지지를 요구했다. 이렇게 싹트기 시작한 국가의식은 백년 전쟁이 시작되고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의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에서의 기적적인 대승으로 주입된 민족의식과 그럼에도 결국 자신들을 패배시킨 프랑스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잉글랜드인의 호전성과 민족의식은 이후에도 유럽 대륙 전역에서 유명했고, 헨리 7세 치세에 잉글랜드인들은 '외국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그 섬나라로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그 섬을 지배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고 일컬어졌다.
존엄왕 필리프 2세 이후 프랑스 왕들은 중앙집권을 시도하며 왕권을 강화해갔다.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삽질 때문에 흔히 보수적이고 무능한 이미지로 알려진 장 2세도 군대의 지휘계통을 왕권 아래로 통합하는 군제개혁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백년 전쟁을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을 느낀 독립세력들의 최후의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4세기 초의 대기근과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을 극복하고, 116년 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후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해갔다. 샤를 7세는 정부 조직을 재편하고 고등법원을 일부 지방에 설치했으며, 1438년의 부르주 칙령으로 프랑스의 교회가 교황청이 아닌 왕의 직속에 가깝게 되면서 왕권(특히 세금)이 증대되었다. 또 1448년에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이 완료되었다. 루이 11세(재위 1461 ~ 1483) 때는 부르고뉴 공의 군대가 먼치킨 스위스 용병대에게 쳐발리자 프랑스는 부르고뉴·오를레앙·브르타뉴에 이어 앙주, 프로방스를 차례로 직속으로 흡수했다. 프랑스군은 스위스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포병 전력을 증강시켜 1500년대 초에는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대로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 경이 전사하자 더이상 요크 가문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게 되었고, 나약한 헨리 6세 치세하에서 랭커스터•요크 양 세력은 장미 전쟁으로 격돌하게 되었다. 백년 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쳐 잉글랜드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등장하는 왕가가 바로 튜더 왕조였다. 추가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하게 된 잉글랜드는 대륙국가에서 완전한 섬나라/해양국가화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해양진출에 목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43]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면서 잉글랜드는 섬나라의 특성을 살려 맹활약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산업혁명을 이루어내며 막강한 해군력과 식민지를 통해 얻은 풍부한 자원으로 전 세계의 패권을 쥐어나갔다. 백년 전쟁의 패배가 잉글랜드에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물론 잉글랜드가 이 시기에 프랑스 영토 정복에 성공했었더라면, 혹은 애초에 존 왕이 원래 물려받았던 프랑스 영토들을 잃지않고 유지만 했었더라면 그 풍족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유럽 및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플랜태저넷 왕조 당대의 지배층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통합되었다면 프랑스어가 오히려 오늘날 영어를 대신했을 수도 있다.
결국 백년 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초엽[44] 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처럼 백년전쟁은 오늘날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악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100년이 넘어가는 기간 동안이나 자식세대까지 대를 이어서 오랜 세월동안 전쟁을 했으니 서로간의 국민감정이 좋을 리도 만무하다.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각각 섬나라와 대륙국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하였고, 이들은 서로 대조되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유럽 정치사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다.
주된 이미지는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프랑스 vs 이를 저지하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맞추려는 영국이다.[45] 여기에 중부유럽 세력(독일)까지 합치면 서유럽의 3강 영프독이 완성된다. 즉, 백년전쟁은 서유럽 역사의 양대 축을 만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오면서야 2번의 세계대전 때 공공의 적인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연합국으로 동맹관계을 맺었고, 냉전 시대에도 같은 서방 진영의 국가들로써 서로 동맹국이 되면서 19세기까지에 비하면 양국간의 사이는 많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부분적으로 축구 국가대항전 A매치나 국제 스포츠대회라도 열리게 되면 "다른 국가들은 몰라도 저 국가만큼은 우리가 무조건 꺾어야 된다!"라면서 서로를 강하게 비방하고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아직도 영불관계에서 설문조사를 해보면 아니나다를까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싫어하는 국가"로 여전히 서로를 지목하는 경우도 간간히 있다.
4.1. 봉건적 군사 제도의 종결[편집]
19세기의 역사학자 찰스 오만은 1898년 출간된 저서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크레시 전투까지의 1,000년을 '기사의 시대'로 규정하고 백년 전쟁을 '보병의 시대'로의 전환점으로 제시했지만, 100년이 지난 현재의 기준에서는 너무 명백한 오류가 많아서 반박이 불필요할 정도다.[46]
보병대가 중무장 창기병들의 돌격을 막아내고 승리한 사례는 13세기 이전에도 이미 수없이 많았으며, 반대로 15세기 이후에도 전장에서 중기병의 중요성은 중세 후기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다. 더 깊게 들어가면 모든 중세 기사가 창기병인 것도 아니었고, 11세기 독일 슈바벤 지방의 기사들은 마상전투보다는 말에서 내린 채 보병들 사이에 섞여서 싸우는 전술을 더 자주 썼다. 심지어 모든 기사가 군인이지도 않았다. 기사 계급이 군복무를 기피하고 방패세나 다른 수단으로 의무를 대신하는 현상은 12세기부터 이미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업과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장원제는 12세기부터 해체되기 시작했고 장원의 수익은 계속 감소해왔지만, 14세기 이후에는 그 부족한 수익마저도 중앙집권화된 왕권의 정책에 좌우되기 시작했다.
중무장 전사는 여전히 전쟁의 주역이었고 명예로운 지위로 여겨졌으며 상당수는 귀족출신이었지만, 이전과 달리 귀족신분과 동일시되지는 않았다. 예를들어 1393년 샤를 6세의 칙령은
고 포고했다. 군인이 아니더라도 국왕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면 덜 명예로운 방식이기는 하지만 귀족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전쟁에 복무하며 귀족다운 삶(중무장 전사로서 참전하는 것)을 사는 귀족이 아닌, 상업에 종사하는 귀족 가계 출신의 귀족은 조세에 관한 한 비귀족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세금을 면제받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 자체는 적어도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더 넓게 보면 11세기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백년 전쟁이 없었더라도 기존의 역사와 같이 진행되었을지는 불확실하다.
1350년대 프랑스의 유명한 궁정기사였던 조프루아 드 샤르니(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는 저서인 《마상창시합, 토너먼트, 그리고 전쟁에 대한 질문들》(Demandes pour la joute, les tournois et la guerre)에서, '개인의 영광을 좇아 지휘관의 명령을 어긴 군인이 계약상의 급료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를 좋은 토론 주제로 보았다. 그러나 1380년대 법학자 오노레 보네는 군인은 왕이나 왕이 임명한 지휘관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며 목숨을 걸고 군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1374년 샤를 5세가 제정한 군사법령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돼 있었다.
잉글랜드의 하층 신사 집안 출신인 존 찬도스는 흑태자의 최측근이자 푸아투의 사령관이 되었고, 브르타뉴의 가난한 최하층 신사 집안 출신 용병대장이었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출신이 불명확한 용병대장 로버트 놀리스는 기사작위를 받기 전부터 기사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심지어 백년 전쟁을 끝낸 프랑스의 영웅은 잔 다르크라는 시골 소녀였다.
5. 여담[편집]
- 이전에도 용병들의 비중이 낮지는 않았으나, 특히 이 전쟁은 유럽 내에서 용병들이 대활약을 시작하는 전쟁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중세시대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플랑드르 지방을 지배하면 얼마든지 돈을 뽑아낼 수 있었기에 앞다투어 용병들을 고용했고, 이로 인하여 십자군 전쟁 이후 호황을 맞이한 용병들이나 가뜩이나 발전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은행업 등 유럽의 자본이동이 더욱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 각종 중세배경의 게임, 소설에 수많은 영감과 이미지를 제공하는 전쟁이다.
-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서 손등을 앞으로 해서 V를 만드는 것이 매우 심한 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에 만들어지진 속설이다. 우선 장궁을 당길 때는 손가락 2개가 아닌 3개를 사용하고, 백년 전쟁 시기의 기록에는 손가락 세 개(두 개가 아닌)를 자르겠다고 위협한 사례가 단 한 번 등장하며 모욕하기 위해 손가락을 펴 보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궁수의 손가락을 자르거나 자르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원래 가끔씩 있는 일이었다. 십자군시대 튀르크 군벌인 이마드 앗딘 장기도 항복을 거부한 요새 하나를 점령한 뒤 수비군 궁수들의 엄지를 잘랐다.
- 이 전쟁과 비슷한 규모의 전쟁을 치른 두 국가가 동아시아에 있었다. 바로 송나라와 금나라 인데, 이 두 국가는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약 100년 전인 1126년부터 1234년까지 총 108년이라는 위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