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r13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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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백년전쟁(百年戰爭)은 중세 서유럽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서로마 멸망)-프랑크 왕국-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근대까지도 이어진 양국의 자존심 대결은 유럽 내 분쟁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카스티용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동유럽에서는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하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을 기준으로 인구 1600만 이상의 강대국이었고[7] , 잉글랜드는 인구가 프랑스의 절반도 안되는 500만 정도인 데다 한때 이웃 왕국인 스코틀랜드한테도 털리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이때의 실전 경험으로 쌓은 용병술을 통하여 프랑스군과 승리할 수 있었는데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녔고, 프랑스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며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비교적 빠른 시기인 장 2세 치세부터 군제개혁을 시작해서 136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기동전술을 잉글랜드군보다 잘 구사했고,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한타를 걸어오는 잉글랜드군을 청야전술과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1370년 퐁발랭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면서 크레시 전투 이후 24년간 지속된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를 종결시켰다.
이름은 백년 전쟁이지만 양국이 116년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지속해서 계속 싸우지는 않았고, 단지 양국이 1337년에 처음 선전포고를 하고나서 116년 뒤에야 협상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전을 선언했기 때문에 백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때문에 실제로는 중간에 몇 차례 휴전이 있었고 최소 휴전만 10년이 넘는다.[8]
시작은 보통 1337년 4월 아키텐 공작위 몰수 선언 직후 가스코뉴 지방에서 벌어진 전면전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기 구분에서 1360년의 휴전까지를 1기로 두는 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가끔 1380년대로 두는 케이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간헐적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태자 에드워드의 사망을 휴전기의 기준으로 한 것.
그러나 이후 구분이 문제인데, 심재윤의 《서양중세사의 이해》는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2기(잉글랜드 우위)와 3기(프랑스 우위)를 가르고 있고, 위키피디아와 Osprey 출판사는 1429년 잔다르크의 활약을 계기로 2, 3기와 4기를 가른다.[9] 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396년[10] 과 양측의 왕이 모두 사망한 1422년을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 뒤에 보듯 휴전으로 취급되는 여러 기준도 1340년~1355년도, 1375년, 1396년도 등이 있어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비슷한 개념으로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9년 전쟁(일명 팔츠계승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 독립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충돌을 제2차 백년 전쟁(1701~1815)[11] 으로 부르기도 하나, 잉-프 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들은 잘 통용되지 않는다.
2. 배경[편집]
전쟁의 단초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2.1. 가스코뉴의 주권 (1259~1327)[편집]
이들의 크고도 좋은 사무실은 궁전 북벽에 특별한 출입문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여기에서 처리되는 까다로운 업무들이 고도의 평온함과 완벽한 칩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고등법원 판사들이라고 부르는 언제나 깨어있는 노련한 인사들이 그들의 법정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법과 관습법에 대한 확실한 지식들로 노련하고도 관대하게 소송들에 대해 논의하고 결정적 선고를 벼락같이 내리친다. 이 선고들은 어느 누구도 또 어느 배석자들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신과 법에 대한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백한 자들과 정의로운 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악한 자들과 불경한 자들은 자신들의 불공정함에 비례하여 고난과 불행에 빠져들게 된다.
장 드 장덩 저, 홍용진 역, '파리 예찬', 1322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권(lordship)을 지주권(landlordship)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Kenneth Alan Fowler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의 국왕은 왕이긴 한데 프랑스 왕의 신하기도 하다는 기묘한 위치였다. 이는 프랑스 왕국의 봉작인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프랑스의 봉신인 것이며,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직위가 프랑스의 국왕보다 하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래도 12세기 중반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봉건제'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12] 단순히 이전까지는 카페 왕조의 권위가 일드프랑스를 넘어서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이 7세와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나 리처드 1세에게 감히 신하로서 신서를 하거나 부조를 바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1200년 존 왕이 필리프 2세에게 신서를 하고 프랑스 영토에 대한 대가로 2만 마르크를 바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얼마 뒤 존 왕이 대륙 영토를 한방에 다 잃어버리는 대사건이 벌어지면서 거의 반세기 동안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헨리 3세는 1259년 파리 조약으로 가스코뉴의 영토를 보장받는 대신 신서를 다시 시작했고, 그렇게 잉글랜드의 왕들은 프랑스 땅의 영주로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노르망디 공작위는 몰수당했지만 가스코뉴의 일부 영토와 함께 아키텐 공작으로서의 지위가 남아 있었다.
가스코뉴 지방은 아키텐 영지의 일부로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이 지방을 가져갔다. 12세기까지만 해도 북쪽의 푸아투에 비하면 가난하고 낙후된 지방이었지만 존 왕이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륙 영토를 전부 잃은 뒤로 잉글랜드의 와인 수요를 독점하면서 이후 100년 동안 꾸준히 개발이 이루어졌다.
특히 다섯 개의 강과 바다가 교차하는 지점을 통제하는 최요충지에 위치한 보르도 시는 바다를 통한 곡물 수입과 와인 수출에 의존하는 내륙 도시들의 목숨줄을 대놓고 쥐고 있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왕들은 보르도 시민들의 충성심만 유지해도 지역 전체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들인 노력에 비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보르도 시의 면적은 100년 사이 3배까지 늘어났으며 가스코뉴에서 왕실이 얻은 수입은 1307년 17000파운드, 1324년 13000파운드로, 평시에 13000파운드 정도[13] 였던 잉글랜드 양모 관세 수입과 비슷했다.
그러나 13세기와 14세기초 프랑스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가스코뉴의 영지는 단지 평생에 한두 번 자존심을 굽히고 프랑스 왕에게 찾아가서 신서를 하는 것 이상의 가혹한 대가를 잉글랜드 왕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핵심은 프랑스 왕이 아키텐의 주권자로서 가진 사법권이었다.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중세 후기의 국가이론에 의하면 프랑스 왕의 신하인 가스코뉴인들은 왕의 대관이 주재하는 지방의 국왕법정이나 1270년대에 확립된 파리고등법원에 항소를 제기할 권리를 가졌고, 프랑스의 왕은 항소를 수리하고 봉신인 아키텐 공작을 법정에 소환할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아키텐의 공작일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이기도 한 그들에게 프랑스 왕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가스코뉴인들은 프랑스 왕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헨리 3세 이후로 외국인이나 다름없어진 공작들[14] 에게 마음 깊이 충성하는 것도 아니라서 기회만 있으면 파리고등법원에 찔렀다. 프랑스에서 가장 공정한 판결을 한다는 당시 고등법원의 선전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라서 1311년에는 작은 농촌 마을인 쿠슈의 주민들이 대귀족이자 왕의 측근인 부르고뉴 공작을 상대로 승소한 적도 있었다. 초기 파리고등법원은 귀족들의 법정과 경쟁 중이었는데, 다른 법정과 똑같다는 평판은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왕의 대관들이 조사를 하기 위해 파견될 때마다 보르도에 있는 공작의 정부는 마비되었고 권위에 손상을 입었으며 재정적 피해가 발생했다.
결국 1293년 보르도와 바욘에서 반프랑스 폭동이 발생했고 프롱삭에서는 국왕의 세관원 4명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필리프 4세는 가스코뉴에 대관들을 파견해서 폭동에 책임이 있는 도시 유력자들의 신병을 양도하라고 명령했고, 에드워드 1세가 이를 거부하자 그를 법정에 소환했다.
에드워드가 소환 명령에도 불응하자 필리프는 에드워드에게 사실상 자치권은 인정할 것이니 왕으로서 위신을 지키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항복하고 대관과 일부 수행원들을 주요 도시에 입성시키라고 요구한다. 완벽하게 속은 에드워드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고 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혼인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필리프는 애초부터 아키텐을 먹을 생각인터라 '수행단'의 행렬은 몇 주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에드워드에게 내린 소환 명령도 취소되지 않았다. 당연히 에드워드가 나타나지 않자 필리프는 공작령 몰수를 선언하고 가스코뉴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까지 엮이게 된 이 전쟁은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플랑드르 반란군에게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하면서 정체 국면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은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주둔군을 쫓아냈는데, 프랑스군은 보르도 시 없이는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03년 5월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에드워드는 마침내 대륙 영토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1308년 에드워드 2세가 이자벨 공주와 결혼하면서 일시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에드워드가 이 전쟁에서 가스코뉴를 방어하는 데 소모한 전비는 총 40만 파운드로, 공작 정부의 10년치 수입을 훨씬 상회했다. 필리프는 비록 에드워드를 상대로는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과 파리고등법원 관료들의 선전과 달리 프랑스군은 무적이 아니며 동시다발적 전장에는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후대의 왕들에게 불안 요소를 남겨두었다.[15]
프랑스 왕과 아키텐 공작 중 누구도 전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가스코뉴는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파리고등법원이 항소를 수리하고 대관을 파견하고 반프랑스파가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제 관계의 주도권은 완전히 프랑스로 넘어갔고 시간은 프랑스 편이었다. 1313년 보르도의 파산한 공작 정부는 필리프 4세가 스스로 일으킨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키텐의 '폭력, 약탈, 무정부 상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명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323년 10월에는 내륙 개척지의 작은 마을인 생사르도스가 프랑스 왕의 특허를 받고 이주민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자 노동력을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은 지역 귀족 레몽 베르나르가 마을을 습격해서 불태우고 프랑스 왕의 대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합리적 의심에 따라 프랑스인들은 모두 보르도의 공작 정부를 배후로 지목했고 샤를 4세는 에드워드 2세에게 책임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에드워드와 그의 무능한 정부 고문들이 외교적 대응이건 전쟁 준비건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1324년 7월 공작위 몰수 선언과 함께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고작 1년도 안 돼서 아키텐 공작의 영토는 가스코뉴 서부 해안의 얇은 면으로 축소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결국 항복하고 1325년 8월 이자벨 왕비와 열두 살 된 어린 아들 에드워드를 파리로 보내서 샤를 4세에게 신서를 하게 했다. 하지만 이자벨 왕비는 외교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애인인 로저 모티머와 함께 프랑스에서 모집한 용병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그동안 잇따른 실정으로 런던시를 포함해 잉글랜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지를 잃고 있었던 에드워드 2세는 한순간에 몰락하고 퇴위당한 뒤 1327년 9월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사망한다.
2.2. 프랑스 왕위 계승권 (1328~1331)[편집]
에드워드가 스스로 프랑스의 왕이라고 주장할 바에야, 차라리 바빌론의 술탄이나 천국의 왕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로체스터의 익명의 연대기 작가. (Historia Roffensis: BL, Cotton MS Faustina B.V, fol.88)
많은 현대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실제로 프랑스 왕이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테일러가 말했듯, '왕위에 대한 주장은 백년전쟁 시기 동안 잉글랜드에게 부차적인 목표였으며, 본질은 대륙 영토의 확장과 그 땅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 종식을 위한 협상의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Gwilym Dodd, 'English Politics and the Hundred Years War'
왕위 계승권 문제는 기존 카페 왕조의 왕인 샤를 4세(재위 1322~1328, 단려왕)가 직계 없이 6년 만에 사망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샤를의 뒤를 이을 후보로는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 그리고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살리카법은 여성이 포함된 가계로의 상속을 명시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에드워드의 계승권이 높다고 볼 수 있었지만, 굳이 살리카법을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귀족들이 그를 거부해야 할 이유는 많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외국 이름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30년 가까이 프랑스의 왕과 귀족들과 대립했고 프랑스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침공하거나 점령하기도 했다. 어머니인 이자벨은 왕족이지만 특유의 성격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인망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악명만 넘쳤다.
반면에 발루아의 필리프는 프랑스의 대귀족으로서 프랑스 귀족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으며, 카페 왕조 말기의 위기 때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솔선수범했던 리더로써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 샤를[16] 의 후광을 입고 있었다. 결국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발루아의 필리프가 섭정이 되었고, 샤를 4세의 유복자를 임신한 왕비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자 즉시 필리프 6세로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이자벨 왕대비가 보낸 사절단은 프랑스에 발을 딛자마자 잉글랜드로 쫓겨났으며, 그녀와 달리 프랑스에서의 이해관계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었던 잉글랜드 귀족들은 의회에서 에드워드에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1329년 9월 프랑스를 방문해 아키텐 공작으로서 필리프에게 신서를 함으로써 그를 프랑스 왕으로는 인정했지만, 의식 도중 손을 맞잡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공작령에 대해 그가 가진 주권을 부정했다. 이자벨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한 이 어설픈 반항에 대해 필리프는 1330년 7월까지 기한을 주고 완전한 신서를 다시 하지 않으면 공작령을 몰수하겠다고 경고했다.
예고한 기한이 지나자 필리프는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으며, 잉글랜드 왕실은 이번에는 진짜로 가스코뉴를 완전히 상실할 위험에 처한다. 결국 1330년 10월 로저 모티머를 축출하고 모후 이자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멈추기 위해 이듬해 4월 신서를 다시 함으로써 필리프를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 대해 주권을 가진 명실상부한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다.
필리프는 에드워드의 아버지(2세)는 명백히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과거 생사르도스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토를 돌려줄 수는 없지만, 대신 올해 초의 군사원정으로 에드워드가 입은 피해는 배상하겠다고 관대하게 제안했으며, 에드워드는 필리프가 계획 중인 십자군에 동참하고 싶다고 대답함으로써 호의를 표했다. 이듬해 호아나 2세의 아들인 나바라의 샤를이 태어나면서 에드워드의 계승권은 법적으로도 근거가 미약해졌다. 그렇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 문제는 해결되는 듯 보였다.
2.3. 스코틀랜드 침공 (1332~1337)[편집]
로버트 경이 우리 민족을 구원했고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므로 우리는 왕국의 법과 그가 쌓은 공로 때문에 그를 신하로서 섬기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따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작했던 일을 포기하고 우리 왕국이나 민족을 잉글랜드 왕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바치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체 없이 그를 그 자신의 권리와 우리의 권리에 대한 배신자이자 우리의 적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고작 백 명의 스코트인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는 절대 잉글랜드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영광도 부유함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유, 의로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아브로스 선언, 1320년
프랑스의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의 왕이 스코틀랜드인들을 모욕하는 일에 그토록 힘써왔으므로 그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왕이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헨리 나이튼의 연대기
이런저런 갈등이 씨앗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필리프 6세는 아비뇽 유수를 통해 확립한 프랑스 국왕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1331년부터 십자군을 준비한다. 목적지인 레반트의 도시들에 첩자들이 파견되었고, 왕실 기술자는 공성무기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으며, 대규모 군대와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이 이루어졌다. 결국 출항일이 1336년 8월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1332년 8월 11일,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스코틀랜드의 왕위주장자 에드워드 발리올이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다섯 배가 넘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격파하고 9월 24일 스콘에 입성해 대관식을 치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얼마 못 가서 발리올은 휴전 조약을 맺고 방심한 틈에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기습을 받고 칼라일로 쫓겨났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를 끝장낼 기회로 여기고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발리올과 그의 동맹인 잉글랜드군이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로우랜드를 장악하자 어린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한편 필리프의 매제인 아르투아의 로베르는 부르고뉴 공작부인으로부터 아르투아 백작위를 빼앗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수배중이었는데, 에드워드는 1334년 봄에 그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교활한 음모가인 로베르가 어린 에드워드를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왕위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는 음모론이 유행했지만, 당대 잉글랜드측 연대기나 공문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가설은 나중에 잉글랜드로도 건너와 후대의 잉글랜드 작가들에게 수용된다.
필리프는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주요 동맹국이 몰락한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인 잉글랜드 왕을 뒤에 남겨두고 원정을 떠날 수 없었다. 1334년 5월 에드워드는 생사르도스 전쟁으로 몰수된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신도 십자군에 동참하겠다는, 스코틀랜드만 제외하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절충안을 내놓지만 필리프는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동정심 또는 왕으로서의 명예 때문에 거부한다. 그는 아직 십자군 왕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잉글랜드를 대놓고 적대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스코틀랜드의 저항군에게 동맹으로서 자금을 지원하고 영불해협에서 스코틀랜드와 노르망디 사략선의 활동을 허가하는 등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의 지원이 효과가 있었는지 1334년 8월 스코틀랜드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발리올이 또다시 쫓겨났다. 에드워드도 단념하지 않고 또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지만 유난히 혹독했던 그해 겨울 날씨 때문에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이듬해 7월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로우랜드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에 필리프는 시테 왕궁에 모인 관료들 앞에서 선대 왕들이 스코틀랜드와 맺은 동맹 조약을 언급하며 스코틀랜드에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6000명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갑작스럽게 발표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어쩌면 스코틀랜드가 다시 침공당한 동시에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가 중병에 걸려 쓰러진 일을 신이 내린 벌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8월에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필리프가 누구의 편인지는 분명해졌고, 정부의 지령을 받는 잉글랜드의 교구 사제들은 미사 시간마다 '스코틀랜드의 배후에 있는 외국 동맹군'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프는 에드워드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공동 중재자 역할을 제안했지만,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던 교황은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편을 들고 있는 필리프에게는 중재자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며 혼자서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필리프 6세와 데이비드 2세는 결국 발리올과 에드워드 3세 측이 제안한 모든 협상안을 거부했고, 1336년 4월 에드워드는 휴전 기간이 끝나는 즉시 스코틀랜드를 재침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신이 파견한 중재인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교황은 필리프에게 십자군을 취소할 것을 제안했다.
1336년 6월 에드워드는 약속대로 스코틀랜드를 다시 침공했지만 이번에는 대군을 이끌고 가지 않았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이제 프랑스군의 스코틀랜드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기병을 포함한 수천 명의 병력이 상륙하고 보급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은 북동부의 비옥한 해안 평야뿐이었다. 에드워드는 800명의 병력만 이끌고 해안가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경작지를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수도원의 식량창고를 약탈한 뒤 마지막으로 애버딘을 철저히 파괴했다.(1335~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거의 같은 시기에 십자군 원정을 위해 준비된 프랑스 남부 함대가 노르망디에 도착해서 북부 함대와 합류했으며, 8월 20일 파리에서 진행된 협상에서 필리프는 이 함대로 잉글랜드를 침공해 동맹인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바로 프랑스 군함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가스코뉴 국경에도 새로운 세네샬이 임명되는 등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반역죄와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선언하기 위한 밑작업으로 파리고등법원은 우선 나바유 영주가 에드워드에게 제기한 소송에 대해 3만 플로린이라는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12월에는 문서위조범 아르투아의 로베르의 신병을 양도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맞서 에드워드도 1337년 2월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북동부 해안을 불태운 작전이 너무 성공적이었는지 필리프가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상륙시킨다는 처음의 계획을 바로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기껏 모인 함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마을들을 불태우는 의미 없는 무력시위만 반복했고 에드워드는 이를 잉글랜드 내부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잘 활용했다. 이제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인들의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인들의 친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스코틀랜드에 프랑스군이 이미 상륙해 있고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학살당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항구에는 군함 700척이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arriere-ban)이 프랑스 왕국에 선포되었고, 곧이어 파리에서 열린 대심의회는 반역죄를 저지른 에드워드의 아키텐 공작위를 몰수하는 것에 동의했다. 7월경에는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마을과 소도시를 불태우기 시작했지만 끝내 요충지에 자리 잡은 요새들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에드워드와 그의 동맹들은 프랑스 북부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동맹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평소 필리프 6세를 '자칭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며 공공연히 깎아내렸는데, 이 명칭은 1337년 10월부터 잉글랜드의 공문서들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반역 혐의를 반박하고 가스코뉴 지방에 대한 필리프의 주권을 부정하기 위해 그의 정통성을 부정했을 뿐 아직 스스로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필리프가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자칭 왕일 뿐이라면 진정한 왕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신중하게 무시되었다.
2.4. 독일 저지대 국경 분쟁 (1330~1338)[편집]
제국의 모든 영주들이 할레 시에 모여 오랫동안 논의한 뒤 잉글랜드 왕에게 말했다. "전하, 프랑스 왕은 제국에 속한 것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고대 법령이 있습니다. 지금 필리프 왕은 캉브레지의 크레브쾨르 성, 아르투아의 아를뢰 성, 그리고 캉브레 시를 소유하고 있으니, 우리의 명예를 위해 황제의 동의를 구해주십시오."
그 후 황제의 칙령이 공개적으로 낭독되었고, 이로써 잉글랜드 왕은 황제의 대리인이자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이름으로 모든 신민에게 법과 정의를 집행하거나 금과 은으로 돈을 주조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독일 저지대 지역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봉신이었지만 사실상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공국들로 이루어졌으며, 13세기부터 이미 프랑스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해 있었다. 직물 산업이 발전한 브라반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전부 넓은 영토에 비해 생산력은 낮고 인구도 적은 가난한 농업국에 불과했으므로 감히 프랑스 왕의 권위에 대항할 수 없었고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다른 공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적인 동기 외에도 독일의 귀족들 중에는 필리프 6세의 열성적인 지지자이자 훗날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보헤미아 국왕 겸 룩셈부르크 백작 얀 루쳄부르스키처럼 프랑스어를 쓰며 프랑스의 궁정 문화에 애착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었다.
브라반트 공국은 1278년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지만 아키텐 공작위 몰수로 시작된 전쟁이 필리프 4세의 판정승으로 끝나자 1303년부터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지켰다. 에노 백작 기욤은 심지어 에드워드 3세의 장인이었지만 1328년 필리프의 왕위 계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카셀 전투에도 참전했다. 캉브레 주교는 부르고뉴 출신으로 프랑스 왕실의 후원을 받아 주교가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1330년대 초부터 저지대 지역 전체가 왕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프랑스 상서성(Chancery) 관료들의 급발진은 프랑스에 호의적인 군주들마저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1337년 2월 필리프가 프랑스와 저지대 공국들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캉브레 시와 주변 성채들을 구입하자 불안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도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명목상 봉신인 캉브레 주교에게 거래를 취소하라고 명령했지만 주교는 그냥 무시해버렸다.
저지대의 군주들은 필리프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황제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공국에 간섭할 빌미를 주기는 싫었으므로 대신 프랑스 왕의 맹렬한 적이자 에노 백작의 사위인 잉글랜드 왕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편 에드워드는 1337년 초까지만 해도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방어할 계획이었지만, 의회는 언제라도 잉글랜드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왕이 주력군과 함께 원정을 나가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며 그렇게 멀리 떠나있으면 위급할 때 제시간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렇게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 1337년 8월 발랑시엔과 프랑크푸르트에 파견된 사절단이 저지대 군주들과 독일 황제가 동맹의 대가로 요구한 조건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에드워드는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솔즈베리 백작을 비롯한 왕의 고문들은 과거 에드워드 1세가 독일인들에게 당한 배신을 상기하며 그들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에드워드는 무시했다. 그는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며 곧 군대를 이끌고 저지대에 상륙해서 11월 30일까지 황제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전비 조달에 실패하면서 원정은 지연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각계각층에 널리 퍼져 있기는 했지만 당장 영불해협을 넘나드는 함대를 어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독일인들에게 20만 파운드를 바치면서까지 바다 너머의 프랑스 영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원정이 지연되면서 12월부터는 에드워드가 독일인들에게 동맹의 대가로 지불해야 할 금액이 27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그해 의회에서 승인된 약 5만 파운드의 전쟁세는 전부 저지대와 이탈리아의 은행들에게 진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고, 에드워드의 유일한 희망은 양모에 부과된 관세뿐이었다. 양모 관세 수입은 평시에는 13000파운드였지만 에드워드 1세 시절에 이미 의회의 승인을 받고 6배까지 늘린 전례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완벽한 계획이 준비돼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 전역에서 양모 3만 자루를 최저 가격으로 징발한 뒤, 작년의 수출금지령으로 가격이 폭등한 양모를 왕실과 계약을 맺은 잉글랜드 상인들이 저지대 도시들에 가져가 비싸게 팔아넘기며, 그 수익의 절반을 챙기는 대가로 20만 파운드가 마련되는 즉시 왕에게 대출한다. 이렇게 해서 왕실은 간편하게 전비를 마련하고, 잉글랜드 농촌의 소작농들과 지주들은 조금 낮은 가격이지만 양모값을 받고, 무역상들은 큰 이익을 얻으며, 외국인들만 고통받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농민들의 저조한 참여 때문에[17] 양모 징발과 운송이 지연되자, 조급해진 왕실 관료들은 저지대에 양모 1만 자루가 도착한 즉시 모든 양모를 거둬서 현지 상인들에게 직접 팔았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당장 필요한 27만 파운드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대부분 그저 행정 실무를 익힌 법학자나 신학자들이라 상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호구만 잡히고 4만 파운드밖에 못 벌었다. 수출금지령 이전 저지대에서 잉글랜드 양모 시세는 자루당 6에서 10파운드 사이였으니 최젓값도 못 받은 것이다.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면서 남은 2만 자루를 받지도 못하게 됐고 정부의 신용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필리프는 독일에 많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저지대 군주들이 잉글랜드와 맺은 동맹이나 프랑스 북부 침공 계획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악했지만 잉글랜드 내부의 최신 정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1337년 9월 프랑스 정부 고문들은 11월쯤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될 것이라 확신했고, 분노한 왕과 황제가 얼마나 많은 군사를 소집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7월부터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이제야 간신히 보르도 포위전을 시작한 프랑스 남부군은 북부 전선에서 왕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회군한다.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에드워드의 대담한 결단은 결과적으로 가스코뉴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1338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파기된 뒤 남은 양모 2만 자루를 징발하겠다는 왕의 요청을 승인했고, 7월 22일 에드워드는 결국 3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에드워드를 맞이한 저지대 군주들은 거의 반년 동안 징발된 양모가 3000자루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8월부터 전쟁세 평가 금액을 기준으로 해서 헌드레드마다 양모 할당량을 부과한다는 특단의 조처를 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돈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동맹들에게 약속한 보상의 일부라도 지불하기 위해 대관식 왕관을 저당 잡히고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슬슬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갑자기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치솟은 저지대 군주들은 황제의 승인 없이는 외국 영토를 공격할 수 없다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황제 자신은 필리프와 협상 날짜까지 잡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경악한 에드워드는 12000파운드를 수레에 싣고 코블렌츠로 달려가 황제에게 약속한 돈의 1/5인 6000파운드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황제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뇌물로 뿌렸다. 다행히 기분이 풀린 황제는 9월 5일 선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에드워드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에드워드의 전쟁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제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에 대한 불복종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선언했다.
에드워드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오자마자 황제 대리인의 이름으로 불복종 시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며 저지대 군주들을 소환했고, 10월 12일 내륙에 있는 소도시 헤르크에서 그들 모두의 충성 맹세를 받았다. 프랑스 침공은 이듬해 7월로 예정되었다.
2.5. 플란데런 반란 (1323~1338)[편집]
"잉글랜드 왕의 호의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플랑드르는 옷감을 만들어서 먹고 사는데 양모 없이는 옷감을 못 만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잉글랜드를 친구로 삼아야 한다."
프랑스 대연대기
플란데런은 지금의 벨기에 지방으로 북부 유럽 상권의 중심지로 유명한데, 프랑스의 세력권이었지만 잉글랜드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지방이라 항상 갈등이 존재했다. 잉글랜드는 양모 수출국이었고 플랑드르는 유명한 모직물 제조 지역이었다.
결국 1302년 5월 브뤼헤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주둔군과 친프랑스파 유력자들이 학살당한다. 한달 뒤에는 기병대도 없이 급하게 소집된 방직공, 축융공, 소작농들의 군대가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플랑드르는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긴장은 지속되었고, 1322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된 느베르의 루이가 대놓고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자 다시 브뤼헤에서 직물 노동자들의 봉기가 터졌다. 봉기는 플랑드르 전역의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고 불만을 품은 하층민들이 프랑스인이나 친프랑스파 귀족들과 유력자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군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해 있었던 백작이 1328년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필리프 6세의 도움을 받아 카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봉기는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브뤼헤의 시장도 에드워드 3세에게 필사적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때는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맞서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시장은 프랑스군에 붙잡혀 반역죄로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해진다. 이후 플랑드르에서는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심이 한층 더 깊어진 백작에 의해 반프랑스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공포 통치가 시작되었다. 전쟁 직전 잉글랜드 상서성의 정부 회의 기록에서 언급된 비유처럼 플랑드르는 더도 덜도 아닌 '프랑스의 스코틀랜드'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문제로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1336년 8월 에드워드 3세가 양모 수출 금지령을 내리자 프랑스 정부는 플랑드르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상실해갔다. 플랑드르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1337년 8월에는 이전의 반란에 대한 배상금을 감면했고 11월에는 전액 면제한다는 특단의 조처까지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1337년 12월 헨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이후 7년 동안 플랑드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될 헨트 상인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를 필두로 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1338년 1월 헨트 임시정부는 곧바로 도착한 잉글랜드 사절단과 협상을 벌여,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앙모 수출 금지령의 해제를 약속받았다. 4월에는 플랑드르 백작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진압군을 격파한 뒤 브뤼헤로 진격해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백작의 항복을 받아냈다.
궁지에 몰린 필리프는 1338년 6월 '생계수단을 잃은 헨트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임시정부가 잉글랜드와 맺은 중립 조약을 인정하고 반역죄를 사면할 수밖에 없었다.
3. 제1기 (1337~1360)[편집]
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제1기 (1337-1360)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북부 프랑스 침공 작전 (1337~1340)[편집]
성 마태오 축일 전야 에드워드 왕은 기치를 들며 중장병 12000명을 이끌고 출정해 프랑스 왕의 도시와 성들을 가는 곳마다 불태우기 시작했다. 매우 어두운 밤, 왕의 사법관인 제프리 스크롭 경이 추기경을 높은 탑의 꼭대기로 안내했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15리그 내의 모든 장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하, 프랑스를 둘러싼 비단실이 끊어진 것 같지 않습니까?"
제프리 베이커의 연대기
프랑스의 팽창주의에 위기감을 느낀 잉글랜드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저지대 군주들이 연합한다. 잉글랜드 정부가 전비 마련에 실패하면서 출정이 오랫동안 지연되지만 결국 연합군이 프랑스 영토를 침공한다. 플랑드르 시민 정부도 뒤늦게 반 프랑스 연합에 합류한다.
잉글랜드 해군이 슬로이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이후 치러진 생오메르 전투와 투르네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면서 휴전이 체결된다.
그렇게 에드워드 3세의 원대한 작전은 막대한 액수의 빚만 남기고 사실상 실패로 끝난다. 필리프 6세 역시 상대보다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서 두 번이나 전투를 회피했기에 위신에 손상을 입는다. 그러나 양측 모두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한다.
3.2. 브르타뉴 내전의 시작 (1341~1344)[편집]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 왕이 최근 브르타뉴에 도착해서 광범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샤를 드 블루아 경이 그에게 지원군이 오지 않으면 모든 마을과 도시가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에게 필요한 모든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며, 귀족과 평민들 모두에게 소집령을 내려 왕세자를 따라 브르타뉴로 원정을 갈 준비를 하게 했다. 귀족과 평민 모두의 호응이 너무 대단해서 도로와 경작지가 군사들로 가득 찼다.
장 르 벨의 연대기
브르타뉴 공작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조카를 지지하는 블루아 파벌과 동생을 지지하는 몽포르 파벌의 내전이 시작된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몽포르가 선수를 쳐서 공령의 수도인 낭트 등 요충지를 장악한다. 하지만 몽포르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필리프 6세는 조카인 블루아를 지원한다. 이에 잉글랜드도 몽포르 파벌을 지원하면서 뒤늦게 내전에 개입한다.
잉글랜드 주력군이 기습적으로 브르타뉴에 상륙해 광범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다. 뒤늦게 프랑스의 대군이 지원을 오지만 블루아 파벌의 저항 의지는 이미 꺾였고 북부 프랑스의 겨울은 대군이 기동하기에는 불리한 계절이었다. 결국 전면전이 일어나기 전에 다시 휴전이 체결된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대부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블루아 파벌이 몽포르를 압도한다.
3.3. 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1345~1348)[편집]
그는 노르망디 원정이 전략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며 이렇게 설득했다. "노르망디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방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그곳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정복할 수 있으리란 사실에 저의 목을 걸 수 있습니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쟁을 겪은 적이 없고 프랑스의 모든 기사들은 왕세자를 따라 에귀용을 점령하러 떠났습니다. 폐하, 이 지방은 성벽이 없는 큰 도시들로 가득하고 그곳에서 폐하의 군사들은 앞으로 20년은 봉급을 받지 않아도 족할 부귀를 누릴 것입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휴전이 끝나자 더비 백작 헨리가 이끄는 분견대가 보르도에 상륙해 남부 프랑스의 요충지들을 기습한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주력군도 슬로이스에서 출항하지만 비밀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폭풍을 만나 잉글랜드로 포류하고 원정은 취소된다. 그러나 더비 백작은 적은 수의 군사들만으로 베르주라크와 오베로슈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남부 프랑스 야전군이 해산된다.
왕세자 장이 북부 프랑스에서 소집된 대규모 야전군을 이끌고 다시 내려와 남부 전선의 요충지 에귀용을 포위한다. 그 사이 에드워드 3세는 주력군을 이끌고 노르망디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파리로 진격한다. 그러나 파리 시 앞에서마저 필리프 6세가 전투를 회피하자 에드워드 3세는 동맹인 플랑드르 국경으로 후퇴한다. 잉글랜드군은 기적적으로 솜 강의 저지선을 돌파하지만 플랑드르군의 도착이 예정보다 늦어져 프랑스 영토 안에 고립된다. 이 소식을 들은 필리프 6세는 강행군으로 잉글랜드군을 추격해 따라잡지만 크레시 전투에서 대패한다. 그렇게 프랑스군이 와해된 사이 잉글랜드군이 플랑드르 국경 근처의 요충지에 위치한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를 포위하고 11개월만에 점령한다. 북부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에서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의 동맹인 스코틀랜드와 블루아 파벌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크레시 전투의 충격에서 막 벗어난 프랑스에게도 반격의 기회가 찾아온다. 하지만 때마침 서유럽에 도달한 흑사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휴전을 체결한다. 한편 플랑드르에서는 시민 정부가 내분 끝에 해체되고 백작의 통치가 다시 시작된다.
3.4. 프랑스 정부의 위기와 푸아티에 전투 (1350~1356)[편집]
고귀한 에드워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조프루아 경! 내가 싸워서 손에 넣은 것, 지금까지 많은 돈을 쏟은 것을 그대가 밤을 틈타 내게서 빼앗으려 했으니 내가 경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오. 그러니 경을 이리 한가하게 만든 것이 몹시 기쁘오. 경은 이곳을 나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그러니까 2만 에퀴로 손에 넣으려고 했소.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경이 실패하고 말았군.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마음이 내키신다면 나의 더 커다란 사업을 도와주실 거요."
장 르 벨의 연대기
전쟁이 재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필리프 6세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장 2세가 즉위한다. 크레시 전역으로 전비가 바닥난 잉글랜드는 당분간 내정에 집중하면서 요충지의 요새들을 기반으로 방어전을 수행한다. 프랑스도 가스코뉴 원정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으로 전략을 수정해 국경의 요새들을 하나씩 공략하면서 전선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는 아직도 프랑스를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국민들은 전면전을 회피하는 전략을 정부의 비겁함과 무능함으로 이해한다. 새 국왕과 총신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개혁가들과 기회를 찾는 야심가들은 카페 왕가의 후손이자 뛰어난 정치가인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를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한다. 국내외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문제들에 진이 빠진 장 2세는 결국 긴 조약에서 에드워드 3세에게 가스코뉴의 주권을 양도하고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곧 카를로스 2세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닫고 조약을 파기한다.
에드워드 3세와 랭커스터 공작이 북부 프랑스에서 조공으로 프랑스 주력군의 시선을 끈다. 그 사이 흑태자 에드워드가 보르도에서 출정해 가스코뉴와 랑그독을 횡단하는 기마약탈로 남부 프랑스를 불태우고 돌아온다. 이 원정으로 랑그독에서 세금 징수가 당분간 중단된다. 얼마 뒤 흑태자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가스코뉴 전선에서 네 방향으로 동시에 공세를 가해 많은 거점을 점령하고 전선을 크게 밀어낸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는 늙고 지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을 포기한다.
부족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장 2세가 시도한 개혁들은 전부 실패하거나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참다 못한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를 체포하고 추종자들 중 일부를 처형한다. 이에 카를로스 2세의 동생 펠리페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다. 장 2세는 랭커스터 공작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에브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의 주공은 예상된 목표인 랑그독 대신 북쪽으로 진군한다. 장 2세는 크레시 이전의 국왕군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가용한 모든 전력을 긁어모은 최후의 야전군 편성을 가까스로 끝낸다. 흑태자는 남쪽으로 후퇴하지만 장 2세는 강행군 끝에 잉글랜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고 장 2세는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다.
3.5.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브레티니 조약 (1357~1360)[편집]
프랑스는 한때 학문, 기사도, 상업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샘터이자 꽃이었으며, 고결함, 우아함, 도의심 등 모든 미덕의 모범이 되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한 후 포로로 잡히거나 죽지 않고 도망친 기사들은 자치도시에는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모든 평민들의 경멸을 받았으며 왕국에 끊임없이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왕세자나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도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장 2세가 포로로 잡혀서 잉글랜드로 끌려가자 왕세자 샤를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파리 삼부회는 우선 장 2세의 총신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서 전부 숙청한다. 그렇게 공동의 목적이 달성되고 나자 귀족들과 평민 대표들은 국정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한다. 여기에 카를로스 2세를 프랑스 왕으로 지지하는 나바라 파벌까지 가세한다.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듣고 경악한 장 2세는 삼부회에서 의결된 정책을 따르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한다.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보인 용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한편 랭커스터 공작이 브르타뉴의 대도시 렌을 포위공격하지만 무명에 가까운 향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를 유격전으로 물리치고 명성을 얻는다.
충분한 세력을 모은 나바라 파벌은 아를뢰 성을 습격해 카를로스 2세를 구출한다. 카를로스 2세는 파리로 돌아가서 왕세자를 제압하고 정부를 장악하지만 장 2세가 곧 풀려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노르망디로 도망친다. 프랑스 정부는 다시 파리 상인조합장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 부르주아들에게 장악된다. 카를로스 2세는 장 2세에 맞서기 위해 에티엔 마르셀과 동맹을 맺고 모든 권력을 잃은 왕세자를 허울뿐인 섭정으로 추대한다. 왕세자가 간신히 군대를 모아서 저항하자 에티엔 마르셀은 민병대를 이끌고 왕궁을 습격해 왕세자의 신병을 확보한다.
우연한 계기로 탈출에 성공한 왕세자는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를 물리치고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농촌 공동체의 관습적인 특권도 무시하는 강화된 징발령을 선포한다. 이에 불만이 폭발한 보베지의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난다. 농민군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장 2세가 포로로 잡힌 것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매수된 귀족들이 왕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며 귀족들을 학살한다. 카를로스 2세는 멜로 고원에서 농민군에게 거짓으로 협상을 제안한 뒤 그 말에 속은 농민군을 기습해서 짓밟는다. 카를로스 2세는 북부 프랑스 귀족 난민들을 통제하고 이끌면서 상황을 주도하려 하지만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귀족들은 농민들을 학살하고 같은 평민인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까지 적대한다. 카를로스 2세는 결국 도시 세력을 선택하고 에티엔 마르셀은 그를 파리 시의 수비대장으로 추대한다. 이에 실망한 귀족들은 대부분 왕세자 샤를을 지지한다. 카를로스 2세가 고용한 잉글랜드 용병들 때문에 파리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카를로스 2세는 도주하고 에티엔 마르셀도 곧 암살당하며 왕세자는 결국 파리에 입성한다. 개혁파 지도층 일부는 처형되나 대부분의 시민들과 자크리 반란군은 곧 사면을 받는다.
전쟁이 재개되지만 프랑스군이 결전을 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잉글랜드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에드워드 3세는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선다. 에드워드 3세는 가스코뉴의 점령지들과 칼레, 퐁티외와 푸아투의 영토와 주권을 양도받는 대신 프랑스 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둔다. 이 브레티니 조약으로 일단은 전쟁이 끝난다.
4. 제2기 (1360~1389)[편집]
4.1. 대용병시대의 서막 (1360~1365)[편집]
"우리는 들과 강의 주인이 되었고, 그곳에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조약의 내용에 의하면 모든 중장병과 자유부대는 전쟁 기간 동안 점령한 성과 요새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대장 아래 종군하는 수많은 가난한 부대원들이 한데 뭉쳤고,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왕들은 전쟁을 관뒀지만, 우리는 전쟁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우리는 부르고뉴로 행군했습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왕들은 전쟁을 끝냈지만 군인들은 전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싸우던 직업군인들은 브레티니 조약 이후 용병이나 도적이 되어 프랑스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일부는 교황에게 고용되어 이탈리아로 향한다.
프랑스는 클레르몽 조약을 체결해 용병들을 카스티야 내전에 참전시킨다. 그러나 많은 용병들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도적단을 진압한다는 명분과 장 2세의 개혁을 기반으로 왕세자 샤를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통일적이고 정기적인 조세 체제를 확립한다. 얼마 뒤 장 2세가 런던에서 병사한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코슈렐 전투에서 승리한다. 그렇게 부르고뉴 공령을 차지하고 프랑스 왕위를 찬탈하겠다는 카를로스 2세의 야심은 좌절된다. 승전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샤를 5세가 랭스에서 즉위한다. 한편 오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샤를 드 블루아가 전사하면서 브르타뉴 내전은 몽포르파의 승리로 끝난다.
프랑스는 용병 도적단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지휘하에 또다시 카스티야 내전에 참전시킨다. 카스티야 원정대는 아비뇽을 포위하여 교황으로부터 면죄와 보호비를 받아낸다.
4.2. 카스티야 내전 (1366~1369)[편집]
이제 여러분이 듣게 될 것처럼, 여기서부터는 연민, 사랑, 그리고 정의가 함께 어울리는 고귀하고 인상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챈더스 해럴드, '흑태자의 삶'
아라곤의 페드로 4세는 바르셀로나 왕궁에서 프랑스군 지휘관들을 환영한다. 프랑스군이 사라고사를 향해 진군하자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는 병력을 집중시킨다. 프랑스군은 나바라를 통해 우회하여 카스티야군의 방어선을 무력화한다. 프랑스군은 부르고스를 점령하며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를 카스티야 왕으로 선포한다. 페드로 1세는 톨레도로 후퇴한 뒤 포르투갈로 망명한다.
흑태자는 페드로 1세와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를 침공한다.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는 엔리케를 배신하고 피레네 산맥의 통로를 연다. 나헤라 전투에서 흑태자의 군대가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페드로 1세와 흑태자의 분쟁으로 동맹은 파기되며 페드로 1세의 권위는 실추된다.
엔리케는 카스티야로 돌아와 지지를 얻는다. 해산된 카스티야 원정군은 다시 대군세를 형성하여 프랑스 영토에 침입하지만 부르고뉴 도시들은 청야전술로 대응해 이를 격퇴한다.
흑태자는 건강 악화와 재정적 압박으로 가스코뉴에 화로세를 도입한다. 이로 인해 가스코뉴 귀족들과의 갈등이 심화된다. 샤를 5세는 아르마냑 백작의 항소를 받아들이고 가스코뉴의 귀족들과 비밀 협정을 맺는다. 흑태자는 파리 고등법원의 소환 명령을 거부한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지원군을 이끌고 카스티야에 도착한다.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가 몬티엘 전투에서 승리하고 페드로 1세를 살해한다.
4.3. 프랑스의 반격 (1369~1375)[편집]
진실의 여왕이 물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 그대들이 만든 과부, 거지, 불구자, 고아들이 얼마나 많은지, 폐허로 만든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셀 수나 있을까? 비록 주님의 뜻에 따라 스코틀랜드 왕을 포로로 잡고 크레시와 푸아티에의 끔찍한 전장에서 승리했지만, 그 결과 그대들은 지금 이 두 왕국의 백 분의 일에 불과한 영토만을 차지하고 있다네."
필리프 드 메지에르, '늙은 순례자의 꿈'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이 재개된다. 이전 세대에 활약한 잉글랜드의 지휘관들은 전쟁 초기에 대부분 전사하거나 병사하고 흑태자도 건강이 악화되어 움직이지 못한다. 몇 년 이내에 프랑스가 대부분의 영토를 탈환한다.
4.4. 아서 왕의 죽음 (1376~1379)[편집]
아서 왕 자신은 치명상을 입었고, 그 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발론 섬으로 옮겨지면서, 콘월 공작 카도르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척인 콘스탄틴에게 브리튼의 왕관을 넘겨주었다. 그리스도 강생 542년에 있었던 일이다.
몬머스의 제프리, '브리튼 열왕사'
흑태자가 결국 병사한다. 이듬해에는 에드워드 3세도 노환으로 사망하며 리처드 2세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4.5. 북부 도시들의 반란 (1379~1385)[편집]
"나는 7년 전 우리 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새끼 고양이가 지배하던 궁궐은 힘든 곳이었다'란 말을 기억한다. 성경도 그 말씀을 증명하고 있다. '아이가 왕인 나라에 슬픔이 있을지니!' 그러니 그의 권위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자. 한 명의 폭군을 제거한 결과가 가져오는 해악과 슬픔보다는 작은 손실이 더 나으니까. 궁궐의 고양이가 갑작스런 공격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다면 시궁쥐들은 사람들의 옷가지를 씹고 우리 생쥐들은 맥아를 먹을 것이다."
윌리엄 랭글런드, '농부 피어스의 꿈'
플랑드르의 세 대표 도시들이 또다시 백작에게 반기를 든다. 이에 영향을 받아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에서도 가난한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조세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난다. 잉글랜드에서도 인두세 부과를 계기로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난다.
장 드 비엔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에 상륙해 북부 잉글랜드를 침공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이미 비참하게 쇠락했으며 프랑스군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만 밝혀진다. 이 원정을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를 통해 잉글랜드 본토를 공격한다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한다.
부르고뉴의 호담공 필리프 2세가 거의 항복에 가까운 조건으로 헨트 시의 반란군과 타협하면서 플랑드르 백작과 시민들 사이의 내전이 끝난다. 그러나 내전은 플랑드르 직물 산업의 쇠퇴를 가속했고 헨트 시의 부와 권력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4.6. 금성의 기사들 (1386~1389)[편집]
이들은 전장 대신 침실에서 기량을 떨치는, 창 대신 혀로 싸우는, 언변은 능숙하지만 무술 시연은 굼뜬, 마르스의 기사들이 아닌 비너스의 기사들이었으므로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토머스 월싱엄의 연대기
프랑스군의 잉글랜드 본토 침공 위협이 가시화된다. 리처드 2세의 미성년 섭정 기간이 끝나가면서 의무와 책임은 늘지만 전황은 호전되지 않는다. 의회는 에드워드 3세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명분 삼아 리처드 2세의 권위에 도전한다. 궁지에 몰린 리처드 2세는 일시적으로 의회와 타협하지만 권력을 되찾은 즉시 프랑스와 평화 협상을 시작한다.
5. 장기 휴전 (1389~1415)[편집]
5.1. 평화 협상 (1389~1396)[편집]
"이 왕의 옥좌, 이 홀을 쥔 섬, 이 장엄한 땅,
이 군신의 자리, 이 두 번째 에덴, 이 절반의 낙원,
이 자연이 오염과 전쟁을 막기 위해 스스로 만든 요새,
이 행복한 사람들의 무리, 이 작은 세상,
이 덜 행복한 땅의 질투를 막는 해자 역할을 하는 은빛 바다에 놓인 보석,
이 축복받은 장소, 이 땅, 이 왕국, 잉글랜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종전 협상을 전제로 휴전이 체결되지만 주권 문제 때문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샤를 6세는 리처드 2세와 곤트의 존이 제시한 모든 타협안을 거부한다. 잉글랜드 의회 역시 그런 어중간한 타협이 실제로 지켜질 것이라 믿지 않는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다. 샤를 6세는 브르타뉴 공작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공작위를 몰수한다. 그러나 샤를 6세는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하던 중 정신이상이 발병한다. 왕이 부재한 사이 정부를 장악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전쟁을 멈추고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을 숙청하는 대가로 잉글랜드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브르타뉴 공작과 합의한다.
리처드 2세는 결국 종전 대신 프랑스와 28년의 장기 휴전을 체결하고 샤를 6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한다.
5.2. 잉글랜드의 내전 (1397~1403)[편집]
"부탁이니, 바닥에 앉아서
왕들의 죽음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자.
어떤 왕은 폐위되고 어떤 왕은 전장에서 죽었지,
어떤 왕은 자신이 짓밟은 이들의 유령에 홀렸고
어떤 왕은 아내에게 독살당하고 어떤 왕은 자다가 질식했지
모두 살해당했다. 인간인 바에야 죽을 수밖에 없는 왕.
그 왕의 이마를 두르고 있는 이 텅 빈 왕관 속에는
죽음의 신이 거느리는 궁정이 있기 때문이야.
거기 광대 하나가 죽음의 왕좌에 앉아, 막간극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왕으로 군림하며 나라를 주무르고 온갖
영화를 누리지. 눈빛 하나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고, 세상이
경외하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하고, 생명을 지탱하는 자기
육신이 놋쇠나 구리라도 되는 듯한 착각과 끝없는 자만심에
사로잡히기도 하지. 그러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죽음의 신이 그
철옹성의 벽을 작은 바늘 하나로 살짝 찌르는 거야. 그러면,
왕이여 안녕! 모자를 벗지 마시오. 그런 허례 허식으로
살과 피를 조롱하지 마시오. 존경과 예의, 전통과 격식 따위는
내던져버리시오. 당신들은 그동안 나를 착각했을 뿐입니다.
나는 당신들처럼 빵을 먹고 살고, 결핍을 느끼고,
슬픔을 맛보고, 친구가 필요하오."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니코폴리스 전투가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난다. 이로써 십자군을 명분으로 종전이 합의될 가능성이 사라진다.
리처드 2세는 샤를 6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한다. 하원 의원들이 대놓고 불만을 표하자 리처드 2세는 격노한다. 브레스트 시 할양을 계기로 런던에서 반프랑스 폭동이 일어난다. 전 청원파 귀족들이 대중의 지지에 취해 눈치 없이 선을 넘는다. 리처드 2세는 이들을 전부 반역죄로 체포하지만 끝내 역모의 증거를 찾지 못한다. 결국 이전에 내린 사면령을 뒤집어 재산을 몰수하고 전부 죽이거나 유배한다.
리처드 2세가 선을 넘기 시작하자 노퍽 공작이 반란을 준비한다. 그는 리처드 2세의 음모를 누설하며 랭커스터 가문을 포섭한다. 랭커스터 부자는 노퍽 공작을 배신하고 리처드 2세에게 공개적으로 해명을 요구한다. 결국 노퍽 공작과 헨리 볼링브로크가 결투 재판에 나선다. 재판은 국제적인 관심을 받는다. 정적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질 것을 우려한 리처드 2세는 결투를 취소하고 두 사람을 왕국에서 추방한다.
곤트의 존이 노환으로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재산을 몰수한다.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난 사이 볼링브로크가 잉글랜드로 돌아온다. 리처드 2세는 신변의 안전에 집착하느라 귀환이 늦어진다. 볼링브로크는 노섬벌랜드 백작과 동맹을 맺는다. 반란군은 요충지를 장악하며 유력자들을 포섭한다. 리처드 2세는 국왕군을 소집할 기회도 없이 궁지에 몰려 항복한다. 리처드 2세는 퇴위 문서에 도장을 찍고 볼링브로크가 헨리 4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프랑스인들은 리처드 2세의 폐위를 사실상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불안해한다. 하지만 헨리 4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여유가 없다.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를 침공하고 웨일즈에서도 반란이 일어난다. 브린글라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웨일즈군에게 참패하지만 험블턴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프랑스에서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절치부심 끝에 삼촌을 끌어내고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얻는다. 정적들이 평화 노선을 추구했으므로 오를레앙 공작은 철저한 반잉글랜드파가 된다.
헨리 4세가 정적인 네빌 가문을 후원하고 정부의 재정난 때문에 지원금마저 끊기자 퍼시 가문이 반란을 일으킨다. 핫스퍼 헨리 퍼시가 웨일즈 변경에서 랭커스터 왕가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신속히 결집하지만 슈루즈베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한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항복하고 사면을 받는다.
5.3. 돌아온 해적 시대 (1403~1407)[편집]
우리 방패병들과 쇠뇌수들이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면서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 잉글랜드의 중장병들이 진군해왔다. 이 중장병들은 전열 가운데로 들어와서 페로 니뇨의 부대 앞에 이르렀다. 페로 니뇨는 이에 맞서 중장병들을 진군시켰다.
많은 강한 창 찌르기가 가해졌고 그 결과 양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일부는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창을 버리면서 중장병들은 도끼와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혼전이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면갑이 떨어져 나가거나 팔 갑옷과 다리 갑옷이 벗겨져 나갔고, 다른 이들은 도끼와 검을 손에서 놓쳤다. 어떤 이들은 서로 맞붙어 드잡이질했고, 다른 이들은 단검을 손에 쥐었다. 어떤 이들은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이들은 다시 일어섰다. 많은 곳에서 피가 넘치게 흘렀다.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의 연대기
헨리 4세의 찬탈과 오를레앙 파벌의 부상으로 양국 관계가 냉각되면서 영국해협에서 사략선의 활동이 재개된다. 부르고뉴 공작은 해상무역에 의존하는 플랑드르와 브르타뉴 도시들의 압력에 굴복해 잉글랜드와 협상을 시작한다.
오를레앙 공작이 부르고뉴파를 제압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양국의 관계는 협상 이전보다도 험악해진다. 프랑스의 대규모 사략 함대가 다시 잉글랜드 상선을 약탈하고 해안 마을을 습격해서 불태우기 시작한다. 다트머스 인근 해안에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이 상륙하지만 수비대의 반격에 참패한다. 같은 시기 부르고뉴 공작이 병사하면서 부르고뉴파는 모든 권력을 잃는다.
오를레앙파는 오와인 글린두르와 동맹을 맺고 웨일즈에 지원군을 보내지만 해상에서의 잉글랜드군의 우위와 악천후 때문에 실패한다. 그 대신에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습격하지만 또다시 수비대에게 참패한다. 이어진 잉글랜드 함대의 반격에 플랑드르와 북부 프랑스의 해안 지역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오를레앙 공작의 군사적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신임 부르고뉴 공작과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4면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잉글랜드 정부 역시 파산 직전에 몰리지만 웨일즈에서 상당한 승리를 거두고 퍼시 가문의 2차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면서 숨통이 트인다.
부르고뉴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오를레앙 파벌과 대치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 시와 북부 프랑스 도시 세력의 지지를 받지만 정부의 요직은 오를레앙파에 의해 장악돼 있다. 결국 양측 모두 상대를 제압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평화 조약을 맺는다. 한편 잉글랜드군이 해상에서 우위를 점한 결과 오를레앙파는 보르도 점령에 실패한다. 웨일즈에 상륙한 프랑스 지원군도 퍼시 가문의 반란이 진압되고 웨일즈 반란군의 기세가 꺾이자 퇴각한다.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선의 요충지인 브랑돔을 점령한다. 파산 직전인 잉글랜드 정부는 결국 지원군을 보내지 못한다. 가스코뉴인들의 사기가 크게 꺾이고 많은 요새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오를레앙 공작은 대군을 소집해 직접 보르도를 공격한다.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북부 전선을 담당한 부르고뉴 공작 몫의 지원금마저 강탈해서 원정을 계속하지만 생쥘리앵 해전에서 참패하고 회군한다.
5.4. 프랑스의 내전 (1407~1415)[편집]
"평화 조약. 다시 평화 조약. 하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1409년 파리 고등법원 서기의 낙서
부르고뉴 공작이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한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부르고뉴 공작은 범행을 자백하고 도망친다. 지도자를 잃은 오를레앙파는 지리멸렬한다. 용기를 얻은 부르고뉴 공작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해 오를레앙 공작은 폭군이므로 죽여도 된다는 논리로 사면을 받는다.
리에주 시민들이 주교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부르고뉴 공작이 동맹인 리에주 주교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나자 오를레앙파는 사면을 취소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오테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군사적 명성을 얻고 저지대를 장악한다. 부르고뉴 공작이 파리로 돌아오자 오를레앙파는 저항 의지를 잃고 도망친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다시 평화 조약이 맺어진다.
부르고뉴 공작은 오를레앙파의 고위 관료들을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하고 정부를 공포로 장악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재무부를 숙청하고 정부 수입을 독점한 뒤 이자보 왕비를 압박해 국왕 대리인 지위와 왕세자의 신병을 양도받는다.
신임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 아르마냑 백작과 동맹을 맺는다. 아르마냑파는 군사를 소집해 파리로 진격하지만 센 강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진다. 비세트르에서 또다시 이름뿐인 평화 조약이 맺어진다.
오를레앙 공작이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을 납치하면서 내전이 재개된다. 지난 가을의 굴욕에서 교훈은 얻은 아르마냑파는 선발대를 보내 센 강의 교두보를 점령하고 파리 인근의 주요 도로들을 장악한다. 아르마냑파 주력군이 센 강을 건너지만 파리 공략에 실패하고 생클루 전투에서 패배한다. 부르고뉴군은 후퇴하는 아르마냑군을 추격하며 주요 요새들을 점령한다. 절박해진 아르마냑파는 잉글랜드에 상당한 영토를 양보하며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 부르주 포위전에서 부르고뉴군 진영에 전염병이 퍼지고,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부르고뉴 공작은 아르마냑파와 협상해 평화 조약을 맺는다. 잉글랜드군은 아르마냑파 공작들의 영지로 진군해 약탈을 벌이며 배상금을 뜯어낸다. 잉글랜드군이 아무런 피해 없이 가스코뉴를 통해 귀환하면서 프랑스의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곧 성인이 되는 왕세자 루이는 아르마냑파와 협력해 부르고뉴 공작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 시 도축업 조합의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왕세자 파벌을 습격하고 정부를 공포로 통제한다. 이들 박피단은 부르고뉴 공작의 통제에서 벗어나 귀족과 고위 관료들을 반역죄로 처형하고 부유한 시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강요한다. 박피단의 계급투쟁으로 부르고뉴파가 분열된 사이 왕세자와 아르마냑파가 파리 시를 탈환하고 부르고뉴 공작은 플랑드르로 달아난다.
왕세자 루이는 지나치게 강해진 아르마냑파를 견제하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과 협력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왕세자의 도움으로 세력을 결집해 파리 시로 진군하지만 패배하고 궁지에 몰린다. 국왕 대리인으로서 권한을 강화한 왕세자의 중재로 또다시 평화 조약이 맺어진다.
아르마냑파는 왕세자 루이를 통제하기 위해 납치 감금한다.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아르마냑파 지도부가 믈룅 성에서 대책 회의를 하는 동안 몰래 탈출한 왕세자는 브르타뉴 귀족들의 도움으로 파리 시를 장악하고 아르마냑파를 숙청한다. 헨리 5세는 왕세자 루이의 협상 제안을 무시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6. 제3기 (1415~1431)[편집]
6.1. 돌아온 기사도의 시대 (1415~1422)[편집]
"이 나라 사람들은 전쟁을 즐기지. 이들은 에드워드 왕과 웨일즈 공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전리품으로 돈더미에 앉기 위해 대담하게 싸움터에 뛰어들 거야. 우리에게 진짜 왕이 있다면, 프랑스인들에게 빼앗긴 유산을 되찾기 위해 싸우려는 왕이 있다면, 그는 함께 해협을 건너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10만 명의 궁수와 6천 명의 중장병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지금 우리 잉글랜드에는 그런 왕이 없다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센강 하구에 상륙한다. 포위공격 끝에 아르플뢰르를 점령하지만 잉글랜드군 역시 큰 피해를 입는다. 헨리 5세는 칼레로 후퇴하지만 프랑스군의 발빠른 대응에 솜강에서 가로막힌다. 가까스로 솜강의 저지선을 돌파하지만 아쟁쿠르에서 프랑스의 대군에 다시 가로막힌다. 헨리 5세는 대담한 선제공격으로 대승을 거두고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힌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아르마냑파가 약화된 틈에 부르고뉴 공작이 또다시 파리로 진군한다. 아르마냑 백작은 강경한 대응으로 부르고뉴군을 물리치지만 파리 시민들의 증오를 산다. 정치가로서 재능을 보인 왕세자 루이가 병사하고 어린 동생 장이 왕세자가 된다. 아르마냑 백작은 아르플뢰르를 탈환하려 하지만 치열한 포위공격과 해전 끝에 프랑스군이 패배한다. 파리 시에서 부르고뉴파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돼 많은 시민들이 처형당하고 부르고뉴파의 근거지로 지목된 정육점 거리가 철거된다.
헨리 5세는 신성로마제국과 저지대와의 동맹을 추진하지만 왕세자 장과 이자보 왕비가 부르고뉴파와 타협하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왕세자 장이 병사하고 아르마냑 백작이 이자보 왕비를 납치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또다시 파리로 진군한다. 북부 프랑스 도시들이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하며 성문을 연다. 프랑스 정부가 내전으로 마비된 동안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를 유린한다.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점령한다. 아르마냑 백작을 비롯해 파리 시의 수많은 아르마냑 지지자들이 학살당한다. 아르마냑파는 왕세자 샤를을 중심으로 저항한다. 왕세자파와 부르고뉴파가 파리 인근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동안 잉글랜드군이 루앙을 점령하고 파리 교외까지 진출한다. 왕세자파와 부르고뉴파는 평화 조약을 맺고 공동의 적에 맞서 연합하지만 곧 다시 분열된다. 왕세자파가 부르고뉴 공작을 암살한다. 파리 시가 잉글랜드군에 함락될 상황에 처하자 신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다. 헨리 5세는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의 섭정이자 후계자로 지목된다.
왕세자파는 브르타뉴의 이탈을 막기 위해 브르타뉴 공작을 납치하지만 공작부인의 발빠른 대응으로 실패한다. 왕세자파는 스코틀랜드에서 도착한 지원군의 도움으로 보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많은 프랑스 귀족과 도시들이 왕세자파로 전향한다. 왕세자파는 샤르트르를 포위하지만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주력군이 접근하자 후퇴한다. 헨리 5세는 강행군으로 루아르강을 건너 왕세자군 주력을 기습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동쪽으로 후퇴한다.
헨리 5세는 치열한 포위공격 끝에 모를 점령하고 일드프랑스를 완전히 장악한다. 하지만 잉글랜드군 역시 큰 피해를 입고 헨리 5세 자신도 병에 걸린다. 헨리 5세는 왕세자파와의 타협을 모색하고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그리고 글로스터 공작을 잉글랜드 호국경으로, 베드퍼드 공작을 프랑스 총독으로 임명한 뒤, 외교 협상에서 노르망디만은 양보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병사한다.
얼마 뒤 샤를 6세 역시 노환으로 사망하고 왕세자 샤를이 뮈엉 성에서 샤를 7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도팽이라 부른다.
6.2. 부르주 왕국 (1423~1428)[편집]
친구들아, 뭐가 남았어,
우리 도팽에게, 참 고귀한 그분께?
오를레앙, 보장시,
노트르담 드 클레리, 그리고
방돔, 방돔!
프랑스 동요, 방돔의 종
베드퍼드 공작은 어려운 임무를 하나씩 해결하려 노력한다. 크라방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북부 프랑스의 거점들을 대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베르뇌유 전투에서 프랑스 주력군이 전멸하고 잉글랜드군 야전 무적 신화가 부활한다. 후방이 안정화된 잉글랜드는 메인 지방으로 공세를 시작하고, 프랑스로 편을 바꾼 브르타뉴도 침공해서 굴복시킨다.
글로스터 공작과 저지대의 상속녀 자클린의 결혼이 동맹을 무너뜨릴 뻔한다. 글로스터 공작은 결국 아내를 버리고 부르고뉴 공작이 저지대의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
메인 정복을 끝낸 잉글랜드는 보스 지방에서 공세를 시작한다. 프랑스군이 몽타르지와 몽두블로에서 대승을 거두고 역습을 가한다. 솔즈베리 백작이 공격적인 전략으로 보스 지방을 점령하고 오를레앙을 포위한다. 솔즈베리 백작이 포위공격 도중 포탄에 맞아 전사한다. 직접 공격을 포기하고 증원된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을 봉쇄하면서 불안한 대치가 이어진다.
6.3. 오를레앙의 처녀 (1429~1431)[편집]
여기저기서 흔히 보고되는 것처럼, 자신을 장느 라 퓌셀이라고 불렀던 그 여자는 거짓 예언자로서, 신의 섭리와 자신의 성별에 반하여 두 해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며 이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우리의 주적에게 가서 그의 당파에 속한 성직자, 귀족, 평민들과 함께 자신이 주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여러 번 주장하고, 오만하게도 성 미카엘과 천국의 많은 천사와 성인들, 그리고 성 카타리나와 성 마가렛과 자주 개인적이고 명백한 교제를 했다고 자랑했다. 또한 마치 기사와 향사들처럼 갑옷을 입고, 전투 깃발을 세우고, 매우 큰 악의와 자만과 오만으로 가장 고귀하고 우수한 프랑스 왕의 문장기를 요구하고 얻어내 많은 전투와 포위전에서 그것을 직접 휘둘렀고... 그런 모습으로 그녀는 전장에 나가 군인들을 이끌고 큰 부대를 지휘하여 살상을 하고 광범위한 소요와 혼란을 일으켰으며, 그들을 위증과 반역과 거짓되고 미신적인 믿음으로 선동했고,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방해하고 죽음의 전쟁을 다시 일으켰으며, 많은 이들에게 성스러운 여성으로 숭배받고 존경받는 것을 즐겼고, 그밖에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저주받은 일들을 저질렀으며, 이는 많은 곳에서 거의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큰 불쾌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1431년 6월 잉글랜드 정부의 포고문
오를레앙 주둔군이 출격해 잉글랜드 보급대를 습격하지만 격퇴당한다. 이 패배로 프랑스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된다.
잔 다르크가 프랑스군 보급대와 함께 오를레앙에 입성한다. 잔 다르크의 리더십 하에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의 오를레앙 봉쇄를 성공적으로 깨뜨린다. 파테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을 크게 격파한다. 이 승리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다.
야전군의 큰 손실로 잉글랜드군이 재배치되는 동안 프랑스군이 트루아를 포위하고 점령한다. 이 승리는 랭스로 가는 길을 열어주어 샤를 7세의 대관식이 랭스에서 치러진다. 잔 다르크가 왕명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파리를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잔 다르크는 부상을 입고 프랑스군은 퇴각한다.
프랑스군이 센강과 마른강의 요충지를 점령하자 시민들이 봉기해 잉글랜드군을 축출한다. 부르고뉴군이 콩피에뉴를 포위하고,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다. 이후 콩피에뉴 수비군은 포위를 견디며 승리를 거둔다. 잔 다르크는 결국 이단적인 주장을 철회하지만 얼마 뒤 철회를 취소하고 화형당한다.
잉글랜드군이 루비에를 탈환하고 헨리 6세가 파리에 입성해 대관식을 치른다. 그러나 대관식 행사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엉망으로 치러지며, 프랑스 방식이 아닌 잉글랜드 대관식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는 루머까지 퍼진다.
7. 제4기 (1432~1453)[편집]
7.1. 앙주 파벌의 부상과 아라스 조약 (1432~1436)[편집]
"짐과 그대에게 어떤 영예를 주겠는가, 이 기념비를 파괴하고, 베드퍼드의 유해를 땅에서 끄집어내어 짐의 아버지와 그대의 선조들이 모든 힘, 권력, 그리고 친구들을 동원해도 살아생전에 한 발짝도 물러서게 하지 못했던 그를 모독하는 것이? 그는 힘, 지혜, 정책으로 프랑스 왕국의 주요 영토들과 이 고귀하고 이름난 노르망디 공국을 전부 지켜냈다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영혼을 거두시길. 그리고 살아있을 때 우리 중 가장 거만한 자들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을 그의 육신이 이제 편히 쉬게 놔두세."
에드워드 홀의 연대기
프랑스군이 루앙 성을 기습 점령하지만 잉글랜드군의 반격에 의해 곧 탈환된다. 브르타뉴 공작과 알랑송 공작 간의 오랜 분쟁이 렌 조약으로 해결되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샤를 7세가 화해하면서 프랑스의 권력 구조에 변화가 생긴다.
일드프랑스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면서 몽타르지와 생세느리 등 여러 도시가 점령되고 재탈환된다. 코탕탱 반도에서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지만 실패로 끝난다.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한다.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 잉글랜드, 부르고뉴 간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다. 이후 프랑스군이 파리를 점령하지만 칼레 포위전은 부르고뉴의 대패로 끝난다.
7.2. 오를레앙 칙령과 최후의 승자 (1437~1448)[편집]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은 상기한 왕의 신하로서, 왕의 명령에 따라 그의 보호와 안전통행권 아래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상기한 시간과 장소에서 상기한 공작이 그들에게 상기한 지역으로의 안전통행권에 대해 통지하고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읽은 후, 상기한 왕과 왕국에 대한 반역자이자 적으로서 중범죄와 반역 혐의로 붙잡혔다. 그들은 그를 죄수로서 구금하고, 상기한 왕의 안전통행권을 무시하고, 그들이 상기한 왕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기한 왕권은 곧 상기한 왕국의 공동체이며, 왕국의 공동체는 곧 왕국의 왕권이라고 말했다.
1450년 6월 30일, 서퍽 공작을 납치 살해한 선원들에 대한 대배심 기소장
요크 공작 리처드가 베드퍼드 공작의 후임으로 임명되고 존 탈보트가 노르망디를 회복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한다. 샤를 7세가 귀족들의 보조금을 취소하자 부르봉 파벌이 반란을 준비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프랑스군이 모를 포위하고 점령한다. 잉글랜드는 부르고뉴와 평화 조약을 맺고 양모 수출을 재개한다. 다시 부르봉 파벌의 주도로 프라그리 반란이 일어나지만 샤를 7세가 이를 진압한다.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동부와 가스코뉴에서 잉글랜드의 여러 요충지를 점령한다. 서머싯 공작 존 보퍼트가 프랑스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여 격멸하기 위한 원정에 나서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투르 조약으로 헨리 6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 사이의 정략 결혼과 함께 휴전이 체결된다. 샤를 7세는 군제개혁을 단행해 상비군인 칙령군과 자유 궁수대를 창설한다.
브르타뉴 공작의 동생이자 헨리 6세의 친구인 질 드 브르타뉴가 반역죄로 체포되면서 브르타뉴와 잉글랜드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다. 잉글랜드에서는 휴전 반대파의 수장인 글로스터 공작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의문사한다. 글로스터 공작의 죽음은 잉글랜드 내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다. 곧 메인 지방의 양도를 둘러싼 논쟁이 끝나고 프랑스가 르망을 점령한다.
7.3. 보르도에서 시작해 보르도에서 끝나다 (1449~1453)[편집]
하지만 마침내 잉글랜드인들과 가스코뉴인들은 협상을 요청했고, 프랑스 국왕이 그들의 주권자이자 군주임을 인정하며, 앞으로 프랑스 왕실에 결코 반역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진실하고 순종적인 신민들로 남으리라는 맹세를 했다. 이 협정은 1453년에 맺어졌다.
장 샤르티에, 샤를 7세의 정복
아라곤 출신 용병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국경의 푸제르를 기습 점령한다. 서퍽 공작의 목표는 브르타뉴 공국을 중립 세력으로 되돌리는 것이었으나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이에 강력히 반발한다.
프랑스군이 반격해 여러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한다. 회담에서 잉글랜드는 푸제르 점령을 쉬리엔의 단독 행동이라 주장하지만 먹히지 않는다. 주민들의 봉기를 두려워한 잉글랜드군이 주요 도시들로 흩어진 사이 프랑스군은 여러 전략적 위치를 점령하며 승기를 잡는다. 베르뇌유가 완전히 점령되면서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주둔지가 동서로 단절된다. 샤를 7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루앙을 포위한다. 루앙 주민들의 봉기로 잉글랜드군은 결국 항복하고 노르망디에서 철수한다.
서퍽 공작이 의회에서 탄핵을 받고 국외로 추방된다.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이 서퍽 공작을 해상에서 납치한다. 서퍽 공작은 모의 재판 끝에 반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참수형을 당한다. 계속되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잉글랜드는 바이외 등 주요 거점들을 상실한다.
켄트에서 잭 케이드의 반정부 봉기가 일어나 런던을 포위하고 요구 사항을 제시한다. 잭 케이드와 반란군은 런던에 입성하지만 최종적으로 런던 시민들과 왕실 군대에 의해 진압된다. 노르망디에서는 잉글랜드의 마지막 거점들이 연달아 항복하여 잉글랜드는 노르망디의 영토를 전부 잃는다.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패배하고 탈보트와 그의 아들이 전사한다. 보르도가 함락되면서 가스코뉴 전체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116년에 걸친 전쟁에서 프랑스에 패배하며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한다.
8. 주요 전투 목록[편집]
8.1.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1332~1357)[편집]
- 킹혼 전투(1332)
- 더플린 무어 전투(1332)
- 아난 전투(1332)
- 할리돈 힐 전투(1333)
- 컬블린 전투(1335)
- 1335~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 던바 공방전(1338)
- 네빌스 크로스 전투(1346)
- 네스빗 무어 전투(1355)
- 베릭 공방전(1355 ~ 1356)
- 번트 캔들마스(1356)
8.2. 제1기(1337~1360)[편집]
- 카잔트 전투(1337)
- 아르네뮤이덴 해전(1338)
- 영국 해협 전역(1338~1339)
- 캉브레 공방전(1339)
- 슬로이스 해전(1340)
- 생오메르 전투(1340)
- 투르네 공방전(1340)
- 베르주라크 전투(1345)
- 오베르슈 전투(1345)
- 에기용 공방전(1346)
- 1차 캉 공방전(1346)
- 블랑슈타크 전투(1346)
- 크레시 전투(1346)
- 랭커스터 공작의 슈보시(1346)
- 1차 칼레 공방전(1346~1347)
- 루나롱주 전투(1349)
- 칼레 전투(1350)
- 윈첼시 해전(1350)
- 생장당젤리 공방전(1351)
- 아르드르 전투(1351)
- 긴 공방전(1352)
- 흑태자의 슈보시(1355)
- 브레퇴유 공방전(1356)
- 푸아티에 전투(1356)
- 자크리의 난(1358)
- 샤르트르 공방전(1360)
8.3. 브르타뉴 내전(1341~1365)[편집]
- 샹토소 전투(1341)
- 엔봉 공방전(1342)
- 반 공방전(1342)
- 브레스트 해전(1342)
- 모를레 전투(1342)
- 생폴드레옹 전투(1346)
- 라 로슈데리앙 전투(1347)
- 30인의 결투(1351)
- 모롱 전투(1352)
- 렌 공방전(1356~1357)
- 오레 전투(1364)
8.4. 제2기(1360~1389)[편집]
- 브리네 전투(1362)
- 코르슈렐 전투(1364)
- 나헤라 전투(1367)
- 몬티엘 전투(1369)
- 리모주 공방전(1370)
- 퐁발랭 전투(1370)
- 라 로셸 해전(1372)
- 시세 전투(1373)
- 곤트의 존의 슈보시(1373)
- 와트 타일러의 난(1381)
- 루즈베케 전투(1382)
- 이프르 공방전(1383)
- 브레스트 공방전(1386)
- 마게이트 해전(1387)
- 오터번 전투(1388)
8.5. 포르투갈 공위기(1383~1385)[편집]
- 아톨레이로스 전투(1384)
- 리스본 공방전(1384)
- 알주바호타 전투(1385)
- 발베르데 전투(1385)
8.6. 오와인 글린두르의 난(1401~1415)[편집]
- 마이니드 해드겐 전투(1401)
- 브린 글라스 전투(1402)
- 슈루즈버리 전투(1403)
- 스톨링 다운 전투(1403)
- 푸울 멜린 전투(1405)
8.7. 제3기(1415~1431)[편집]
- 아르플뢰르 공방전(1415)
- 아쟁쿠르 전투(1415)
- 발몽 전투(1416)
- 셰프드코 해전(1416)
- 2차 캉 공방전(1417)
- 루앙 공방전(1418~1419)
- 보제 전투(1421)
- 모 공방전(1421~1422)
- 크라방 전투(1423)
-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1423)
- 베르뇌유 전투(1424)
- 생잠 요새 공방전(1426)
- 몽타르지 공방전(1427)
- 오를레앙 공방전(1428~1429)
- 루브레 전투(1429)
- 루아르 원정(1429)
- 파테 전투(1429)
- 랭스 행진(1429)
- 1차 파리 공방전(1429)
-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1429)
- 콩피에뉴 공방전(1430)
- 안통 전투(1430)
8.8. 제4기(1432~1453)[편집]
- 푸앙세 공방전(1432)
- 라니쉬르마른 공방전(1432)
- 제르베로이 전투(1435)
- 생드니 공방전(1435)
- 2차 파리 공방전(1436)
- 2차 칼레 공방전(1436)
- 타르타 공방전(1440~1442)
- 퐁투아즈 공방전(1441)
- 디에프 공방전(1442~1443)
- 포미니 전투(1450)
- 잭 케이드의 난(1450)
- 블랑크포르 전투(1450)
- 카스티용 전투(1453)
9. 관련 인물[편집]
9.1. 프랑스 왕국[편집]
9.1.1. 제1기[편집]
- 필리프 6세
- 장 2세
- 샤를 5세
- 위그 키에레
- 니콜라 바후셰
- 라울 1세 드 브리엔
- 라울 2세 드 브리엔
- 샤를 2세 달랑송
- 필리프 도를레앙
- 루이 1세 드 부르봉
-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 자크 1세 드 부르봉
- 루이 1세 드 푸아티에
- 장 1세 다르마냐크
- 장 드 클레르몽
- 고티에 6세 드 브리엔
-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
- 기욤 베르트랑
- 샤를 1세 드 몽모랑시
- 루이스 데 라 세르다
- 샤를 드 라 세르다
- 루이 1세 드 샤티옹
- 고데마르 1세 뒤 페이
- 조프루아 드 샤르니
- 기 2세 드 네슬
- 에두아르 1세 드 보주
- 장 드 릴
- 장 2세 드 멜룬
- 로베르 드 파인즈
- 아르눌 도드랭
- 아르노 드 세르볼
- 보두앵 드 랑스
- 장 4세 다르쿠르
- 장 5세 다르쿠르
- 장 1세 르 맹그르
- 에티엔 마르셀
- 로베르 르콕
- 기욤 칼레
- 우다르 드 렌티
- 앙게랑 6세 드 쿠시
9.1.2. 제2기[편집]
- 샤를 5세
- 샤를 6세
- 베르트랑 뒤 게클랭
- 앙주의 루이 1세
- 장 드 베리
- 장 3세 드 상세르
- 루이 드 상세르
- 로베르 드 상세르
- 장 드 비엔
- 장 3세 드 뷔에이
-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
- 로베르 드 파인즈
- 아르노 드 세르볼
- 아르눌 도드랭
- 루이 2세 드 부르봉
- 장 1세 드 부르봉라마르슈
- 보두앵 드 랑스
- 피에르 2세 달랑송
- 장 2세 드 리외
- 장 6세 다르쿠르
- 장 2세 다르마냐크
- 장 3세 다르마냐크
- 장 다르투아
- 필리프 다르투아
- 샤를 다르투아
- 올리비에 드 모니
- 피에르 도르주몽
- 니콜 오렘
- 피에르 아이슬랭 드 몽타구
- 뷔로 드라리비에르
- 장 드 몽테규
- 피에르 드 빌렌
- 장 르 메르시에
- 피에르 데 에사르
- 앙게랑 7세 드 쿠시
9.1.3. 제3~4기[편집]
- 샤를 6세
- 이자보 드 바비에르
- 샤를 7세
- 루이 11세
- 잔 다르크
- 아르튀르 드 리슈몽
- 장 드 뒤누아
- 라 이르
- 장 포통 드 생트라유
- 장 1세 달랑송
- 장 2세 달랑송
- 앙투안 드 샤반
- 자크 1세 드 샤반
- 장 1세 드 부르봉
- 샤를 1세 드 부르봉
- 장 2세 드 부르봉
- 자크 2세 드 부르봉라마르슈
-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
- 라울 6세 드 고쿠르
- 앙브루아즈 드 로레
- 장 2세 르 맹그르
- 루이 1세 도를레앙
- 샤를 1세 도를레앙
- 장 드 브로세
- 장 뷔로
- 가스파르 뷔로
- 질베르 모티에 드라파예트
- 질 드 레
- 샤를 1세 달브레
- 샤를 2세 달브레
- 장 5세 드 뷔에이
- 알랭 블랑샤르
- 앙주의 루이 2세
- 앙주의 루이 3세
- 앙주의 르네
-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 기 14세 드 라발
- 루이 드 라발
-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 움베르 드 그로슬리
-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
- 타네기 3세 뒤 샤스텔
- 기욤 2세 드 나르본
- 장 7세 다르쿠르
- 장 8세 다르쿠르
-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
- 베르나르 8세 다르마냐크
- 장 4세 다르마냐크
- 장 5세 다르마냐크
- 피에르 드 브레제
- 피에르 드 리외
- 자크 쾨르
- 로베르 드 플로크스
- 루이 드 기옌
- 장 드 투렌
- 로베르 르 마숑
- 장 루베
-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잔
-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 피에르 프로티에
- 피에르 2세 드 지악
- 장 베르네
- 르노 드 샤르트르
- 기욤 주브넬 데 우르생
- 장 주브넬 데 우르생
- 기욤 쿠지노 드 몽트뢰유
- 자크 겔뤼
- 장 르 샤를리에 드 제르송
- 장 2세 드 샹브스
- 장 들롱
- 외 백작 샤를 다르투아
- 샤를 4세 뒤 멘
9.2. 잉글랜드 왕국[편집]
9.2.1. 제1기[편집]
- 에드워드 3세
- 흑태자 에드워드
- 그로스몬트의 헨리
- 윌리엄 드 보훈
- 윌리엄 드 클린턴
- 장 3세 드 그레일리
- 제11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 제1대 워릭 남작 존 드 뷰챔프
- 토머스 다그워스
- 월터 벤틀리
- 랄프 드 스태퍼드
- 제1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
-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
- 존 챈더스
- 월터 매니
- 로버트 몰리
- 로베르 3세 다르투아
- 랄프 네빌
- 제2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 제3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 토머스 코크
- 존 드 체버스턴
-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
- 로렌스 헤이스팅스
- 휴 헤이스팅스
- 로버트 우퍼드
- 제임스 오들리
- 가이야르 1세 드 듀퐁
- 2대 부르게르시 남작 바르톨로뮤 부르게르시
- 3대 부르게르시 남작 바르톨로뮤 부르게르시
- 재무장관 남작 윌리엄 드 라 폴
- 조프루아 다르쿠르
- 존 드 베레
- 에노의 필리파
- 제2대 탈보트 남작 리처드 탈보트
- 초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 존 드 스트랫퍼드
- 로버트 부르시에
- 토머스 우트레드
- 헨리 드 보몽
-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
- 제2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 잉글랜드 대법관 제프리 르 스크루프
- 연대기 작가 토머스 그레이
- 코드너의 제3대 그레이 남작 존 그레이
- 레이놀드 코밤
- 존 크랩
- 윌리엄 드 라 주쉬
- 윌리엄 드 그레이스토크
9.2.2. 제2기[편집]
- 에드워드 3세
- 흑태자 에드워드
- 리처드 2세
- 곤트의 존
- 랭글리의 에드먼드
- 우드스톡의 토머스
- 장 3세 드 그레일리
- 장 1세 다르마냐크
- 제11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 제1대 베르게베니 남작 윌리엄 뷰챔프
-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
-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
- 존 챈더스
- 제임스 오들리
- 험프리 드 보훈
- 로버트 놀스
- 휴 칼블리
- 토머스 그랜디슨
- 제3대 피츠월터 남작 월터 피츠월터
- 존 민스터워스
-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
- 헨리 르 디스펜서
- 토머스 르 디스펜서
- 존 네빌
- 존 데버루
- 제1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 헨리 퍼시
- 초대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
- 윌리엄 우퍼드
- 사이먼 벌리
-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 초대 아룬델 남작 존 피츠앨런
- 존 헤이스팅스
- 토머스 펠튼
-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
- 제 4대 노퍽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
- 초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
-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
-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 마치 기사 에드먼드 모티머
-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 제3대 탈보트 남작 길버트 탈보트
- 토머스 2세 드 움프라빌
- 8대 옥스퍼드 백작 토머스 드 베레
- 9대 옥스퍼드 백작, 아일랜드 공작 로버트 드 베레
-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아룬델
-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
- 초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
- 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 초대 서리 공작 토머스 홀랜드
- 존 부르시에
- 와트 타일러
- 존 볼
- 초대 럼리 남작 랄프 럼리
- 칼라일 주교 토머스 머크
- 토머스 블라운트
- 버나드 브로카스
- 초대 메섬의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
- 제2대 메섬의 스크루프 남작 스티븐 르 스크루프
-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
- 제5대 바르톨프 남작 토머스 바르돌프
- 휴 드 스태퍼드
- 토머스 드 스태퍼드
- 랄프 드 그레이스토크
- 제5대 클리퍼드 남작 로저 드 클리퍼드
- 제6대 클리퍼드 남작 토머스 드 클리퍼드
- 베르투카 달브레
9.2.3. 제3~4기[편집]
- 헨리 4세
- 헨리 5세
- 헨리 6세
- 랭커스터의 존
- 랭커스터의 토머스
- 랭커스터의 험프리
- 노리치의 에드워드
- 요크의 리처드
- 토머스 카모이스
- 로저 카모이스
- 토머스 아핑햄
- 제4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
- 초대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
- 페르슈 백작 토머스 보퍼트
- 2대 서머셋 백작 헨리 보퍼트
- 초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 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 잉글랜드 추기경 헨리 보퍼트
- 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
-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 초대 켄트 백작 윌리엄 네빌
- 2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
- 3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
- 초대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
- 윌리엄 글라스데일
- 로버트 4세 드 움프라빌
- 길버트 5세 드 움프라빌
- 제12대 아룬델 백작 토머스 피츠앨런
- 제14대 아룬델 백작 존 피츠앨런
- 로버트 윌러비
- 제5대 탈보트 남작 길버트 탈보트
- 초대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
- 초대 리슬 자작 존 탈보트
- 존 파스톨프
- 토머스 스케일스
- 윌리엄 페이토
- 프랑수아 드 쉬리엔
- 토머스 키리엘
- 11대 옥스퍼드 백작 리처드 드 베레
- 12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
- 로버트 드 베레
- 매튜 고프
- 헨리 노베리
-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
- 장 드 푸아
- 4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홀랜드
- 2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
- 토머스 램프스턴
- 존 드 클린턴
- 가디페르 쇼트호세
- 헨리 레트퍼드
- 제2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
- 제3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
- 존 보몬트
- 에드먼드 스태퍼드
- 험프리 스태퍼드
- 윌리엄 로스
- 존 로스
- 토머스 로스
- 윌리엄 부르시에
- 헨리 부르시에
- 6대 피츠월터 남작 월터 피츠월터
- 존 콘월
-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
- 잭 케이드
- 피에르 드 몽페랑
-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 제3대 메섬의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
- 히튼 기사 토머스 그레이
- 제1대 탱커빌 백작 존 그레이
- 제3대 루틴의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그레이
- 제4대 코드너의 그레이 남작 리처드 그레이
- 존 올드캐슬
- 존 드 그레이스토크
- 제7대 클리퍼드 남작 존 드 클리퍼드
- 제8대 클리퍼드 남작 토머스 드 클리퍼드
9.3. 스코틀랜드 왕국[편집]
- 데이비드 2세
- 로버트 2세
- 로버트 3세
- 제임스 1세
- 제임스 2세
- 에드워드 발리올
- 돔놀 2세
- 리데스데일 기사 로버트 브루스
- 파이프 백작 던컨 4세
- 제2대 머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 앤드류 머레이
- 알락산더르 램지
- 패트릭 5세 드 던바
- 던바 백작부인 아그네스 랜돌프
- 조지 1세 드 던바
- 조지 2세 드 던바
- 초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
- 리데스데일 기사 아치볼드 더글러스
- 리데스데일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
- 제2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
- 제3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 제5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 제2대 엥거스 백작 토머스 스튜어트
- 초대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
- 제2대 올버니 공작 머독 스튜어트
-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
- 단리의 존 스튜어트
- 존 랜돌프
- 로빈 페틸로우
9.4. 웨일스 공국[편집]
9.5. 브르타뉴 공국[편집]
- 장 3세 드 브르타뉴
- 잔 드 팡티에브르
- 샤를 드 블루아
- 장 드 몽포르
- 잔 드 플란데런
- 장 4세 드 브르타뉴
- 장 5세 드 브르타뉴
-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
- 피에르 2세 드 브르타뉴
- 라울 드 카우르
-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
- 잔 드 벨빌
-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 장 드 보마누아르
9.6. 부르고뉴 공국[편집]
- 외드 4세
- 필리프 1세
- 호담공 필리프
- 용맹공 장
- 선량공 필리프
-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
- 장 빌리에 드 릴라당
- 시몽 모히어
-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
- 장 2세 드 툴롱옹
- 앙투안 드 툴롱옹
- 리옹넬 드 부르농빌
- 앙게랑 드 부르농빌
- 알레움 드 부르농빌
- 앙투안 드 부르농빌
- 장 4세 도시
- 라울 당크통빌
- 장 프티
- 필리프 드 느베르
- 페리 1세 드 보데몽
- 앙투안 드 보데몽
9.7. 푸아 백국[편집]
9.8. 저지대[편집]
플란데런 백국
브라반트 공국
에노 백국
생폴 백국
헬러 공국
9.9. 신성 로마 제국[편집]
보헤미아 왕국
로렌 공국
율리히 공국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국
9.10. 이탈리아[편집]
제노바 공화국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콘도티에로
9.11. 이베리아[편집]
나바라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
마요르카 왕국
- 하이메 3세
- 하이메 4세
포르투갈 왕국
10. 시대상과 용어 해설[편집]
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시대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입문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대 서유럽의 시대상과 용어들의 의미를 설명하는 문서.
10.1. 일상생활[편집]
10.2. 생애 주기[편집]
10.3. 일년 주기[편집]
10.4. 행정[편집]
10.5. 군사[편집]
11. 추천 도서[편집]
11.1. 현대문학[편집]
○ 백년전쟁
- 『끝없는 세상』 (2007) 켄 폴릿 1권
- 『둠즈데이 북』 (1992) 코니 윌리스 #
- 『Harlequin』 (2000) Bernard Cornwell #
『Heretic』 (2003)
『1356』 (2012)
『Azincourt』 (2008)
버나드 콘웰의 성배 탐색(The Grail Quest) 시리즈. 훌륭한 궁수이자 군인이며 저주받은 혈통을 가진 가상인물 용병대장 훅턴의 토머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역사소설 시리즈다. 프랑스 사략선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교구사제의 사생아 토머스는 사제 수업을 그만두고 약탈당한 성물과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프랑스로 떠난다. 그의 모험은 블루아 파벌이 몽포르파 잔당과 소수의 잉글랜드 주둔군을 압도하고 있지만 어떤 계기만 있으면 용병대와 도적단의 천국이 될 가능성을 안고 있는 1346년 초 브르타뉴의 습격전과 소규모 접전들을 시작으로 크레시 전투와 네빌스 크로스 전투, 칼레 포위전과 랑그독 지방에 확산되는 혼란과 흑사병, 그리고 푸아티에 전투로 이어진다. 아쟁쿠르 전역을 다룬 Azincourt는 같은 시리즈는 아니며 이미 고인이 된 기사 훅턴의 토머스가 간략하게 언급된다.
- 『The Ill-Made Knight』 (2013) Christian Cameron #
『The Green Count』 (2017)
『Sword of Justice』 (2018)
『Hawkwood's Sword』 (2021)
크리스찬 카메론의 기사도(Chivalry) 시리즈. 호크우드의 부하이자 도망친 정부를 찾기 위해 만토바에 보낸 편지[18] 로 유명한 실존인물 용병대장 윌리엄 골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역사소설 시리즈다. 버나드 콘웰의 성배탐색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백년전쟁 1기를 다루고 있어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된다. 두 소설 모두 전체적으로 잘 쓰인 작품이고 고증이 뛰어나지만 성배탐색 시리즈가 잉글랜드 장궁병 만능주의라면 이 소설은 원거리 무기의 위력을 상대적으로 저평가하고 판금 갑옷과 맨앳암즈 만능주의 성향이 좀 있다. 그래도 더 최근에 쓰여진 소설답게 최신 이론이 많이 적용돼 있고, 소설적으로도 모험과 전투에 중점을 두는 성배탐색과 달리 14세기 유럽의 사회상 묘사가 더 디테일하며 갈등이 세련되고 등장인물들도 생동감 있는 편이다.
○ 중세 후기 서유럽 전반
11.2. 개론서[편집]
○ 백년전쟁 전반
- 『백년전쟁 1337~1453』 (1978) 데스먼드 수어드 #
- 『옥스퍼드 영국사』 (1984) <후기 중세시대(1290~1485)> 랠프 A. 그리피스 #
- 『The Hundred Years War 1: Trial by Battle』 (1990) Jonathan Sumption #
『The Hundred Years War 3: Divided Houses』 (2009)
『The Hundred Years War 4: Cursed Kings』 (2015)
『The Hundred Years War 5: Triumph and Illusion』 (2023)
입문자에게 추천.
- 『The Three Edwards』 (2003) Michael Prestwich #
- 『The Wars of Scotland, 1214-1371』 (2004) Michael Brown #
○ 중세 후기 서유럽 전반
- 『1215 마그나카르타의 해』 (2003) 존 길링엄 #
- 『The Struggle for Mastery: The Penguin History of Britain, 1066-1284』 (2003) David Carpenter #
○ 정치사
- 『중세 유럽의 정치사상』 (1980) W. 울만, J. 모랄 #
○ 생활사
- 『The Time Traveler's Guide to Medieval England: A Handbook for Visitors to the Fourteenth Century』 (2011) Ian Mortimer #
- 『Standards of Living in the Later Middle Ages: Social Change in England c.1200–1520』 (1989) Christopher Dyer #
- 『Going to Church in Medieval England』 (2021) Nicholas Orme #
○ 군사사
- 『Armies and Warfare in the Middle Ages: The English Experience』 (1999) Michael Prestwich #
- 『Deception in Medieval Warfare: Trickery and Cunning in the Central Middle Ages』 (2022) James Titterton #
11.3. 학술서[편집]
○ 백년전쟁 전반
- 『The Hundred Years War Revisited』 (2019) ed. Anne Curry #
○ 전기(傳記)
- 『John Hawkwood: An English Mercenary in Fourteenth-Century Italy』 (2006) William Caferro #
- 『Daughters of Edward I』 (2021) Kathryn Warner #
○ 정치사
- 『The Reign of Philip the Fair』 (1980) Joseph R. Strayer #
○ 생활사
- 『몽타이유 -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1975)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
- 『The Ties That Bound: Peasant Families in Medieval England』 (1988) Barbara A. Hanawalt #
- 『A Medieval Life: Cecilia Penifader and the World of English Peasants Before the Plague』 (2020) Judith M. Bennett #
- 『The Routledge Handbook of Medieval Rural Life』 (2021) ed. Miriam Müller #
○ 군사사
- 『Medieval Warfare 1300–1450』 (2010) ed. Kelly DeVries #
- 『War, Politics and Finance: The Reign of Edward I』 (1972) Michael Prestwich #
- 『1415 Agincourt: A New History』 (2015) Anne Curry #
11.4. 논문[편집]
○ 정치사
- <14세기 전반기 프랑스의 정치현실과 공공성> (2011) 홍용진 #
- <14세기 초반 프랑스 왕정의 화폐 정책과 사회적 갈등> (2002) 성백용 #
- <14세기 수도 파리의 등장과 정치적 의사소통으로서의 왕궁 건축> (2011) 홍용진 #
- <프랑스 필리프 5세 통치 시기 정치적 문제들과 왕권의 대응> (2012) 홍용진 #
- <중세 말 프랑스의 화폐 개주와 왕권 이미지 생산(1290-1360)> (2019) 홍용진 #
- <중세 말 수도 파리에 대한 국가적 경제조치 시도: 장 2세 정부의 경우> (2017) 홍용진 #
- <1358년 쟈끄리와 프랑스 농촌의 위기> (1992) 성백용 #
- <1358년 7월 31일, 에티엔 마르셀의 죽음: '중세의 당통'과 '파리의 혁명'에 대한 기억> (2016) 박용진 #
- <중세 말 프랑스 왕정과 "국가" 이데올로기: 필립 4세(1285~1314)와 샤를 5세(1364~1380)시기를 중심으로> (2006) 홍용진 #
- <14세기 후반 조세체제의 확립과 프랑스 북부 도시들의 반란> (2003) 성백용 #
-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 국가권력을 둘러싼 제후 당파들의 투쟁> (2018) 성백용 #
- <백년전쟁과 프랑스 귀족사회의 변화> (2016) 성백용 #
11.5. 고전문학[편집]
- 『샤르니의 서』 (c.1352) 조프루아 드 샤르니 #
- 『농부 피어스의 꿈』 (c.1377) 윌리엄 랭글런드 #
11.6. 역사 자료[편집]
○ 연대기
- 『잉글랜드 연대기』 (c.1360) 제프리 베이커 #
- 『진실된 연대기』 (c.1365) 장 르 벨 #
- 『스코틀랜드 민족의 연대기』 (c.1385) 존 포둔 #
-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c.1400) 장 프루아사르 1권
- 『페로 니뇨의 연대기』 (c.1448)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 #
○ 공문서
- 『검시관 기록』 (1413) #
○ 군사저술
- 『마상창시합, 토너먼트, 그리고 전쟁에 대한 질문들』 (c.1352) 조프루아 드 샤르니 #
- 『사냥서』 (c.1389) 가스통 페뷔스 드 푸아 #
- 『군사기술과 훈련 선집』 (c.1509) 피에트로 몬테 #
○ 경영서
- 『농업의 격언』 (c.1280) 월터 헨리 #
○ 철학
- 『기사도의 서』 (c.1350) 조프루아 드 샤르니 #
- 『탑의 기사의 서』 (c.1372) 조프루아 드 라 투르 랑드리 #
12. 영향[편집]
서유럽 최초의 국제전이자 중세 전성기와 근대 초기 사이의 과도기를 장식한 전쟁이다.
○ 정치
-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에드워드 1세와 필리프 4세 시대에 확립되었거나 시험적으로 시행되었던 근대적 행정 제도들이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더 크게 확장되고 통합되거나 정교해졌다. 잉글랜드 정부는 인구가 4배 정도 많은 유럽 최강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부족한 전비를 쥐어짜내기 위해 지난 세기 동안 검증되었거나 검증되지 않은 이론들을 기반으로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탁상공론과 실제로 가능한 것을 어느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도 몇 번의 큰 위기를 겪으면서 정부 제도를 개혁했다.
- 민족의식과 문학작품을 활용한 전쟁 프로파간다 전략이 장기적이고 일관되게 시행되어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전쟁이다. 에드워드 1세는 13세기에 아서 왕 전설이 전 유럽에서 대유행하면서 기사도의 상징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전설적 영웅 아서 왕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기함으로써 외교적 위신과 도덕적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헨리 3세의 치세 말기에 완성된 잉글랜드 민족의식을 자극해서 왕권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책을 펼쳤다. 에드워드 3세는 할아버지의 이러한 정책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으며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정복을 위해 준비된 노르망디 함대를 전멸시키고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를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면서 한때 아서 왕의 후계자인 기사 왕이자 잉글랜드 국민의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 그 결과 특히 잉글랜드는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근대 국가'에 가까운 모습을 전쟁 기간 동안 빠르게 갖추었다. 뒤이은 장미전쟁의 긴 혼란기와 튜더 절대왕정의 묵직한 존재감에 밀려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381년이 돼서야 국민들은 결국 인내심을 잃었고 인두세 부과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지만 반란군이 제기한 불만은 세금 자체가 아니라 그 많은 세금이 왕국의 방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어린 왕의 무능하고 부패한 섭정단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헛되이 쓰였다는 것이었다. 이들 반란군은 단순히 굶주림에 미친 농노들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 공동체'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국자들이기도 했다. 켄트 주의 자유민 소작농들도 자신들과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지역 출신의 농노 한 명이 투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했으며 반란군은 런던으로 진군하는 중에도 해안 마을들에 프랑스 함대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수비대를 배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450년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앙주와 메인을 프랑스에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서퍽 공작을 습격해 살해한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은 (기소장에 적힌 공작의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작이 헨리 6세의 인장이 찍힌 안전통행증을 내밀었음에도 "우리는 네가 말한 왕(the king)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the crown of England)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권은 곧 잉글랜드의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realm)고 왕국 공동체가 곧 왕권이다." 라고 답함으로써 이제 교육받지 않은 하층민들조차 왕국의 주권과 국왕의 인격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경제
- 국경의 요새 주둔군 유지비나 대규모 캠페인에 투입되는 전비부터 소소하게는 포로의 몸값이나 보호비 지불 등 전쟁으로 막대한 자금이 융통되면서 저지대 도시들이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은행업 등 유럽의 금융업이 발달했다.
○ 군사
- 이전에도 유럽의 전쟁에서 용병들의 비중이 낮지는 않았으나, 특히 이 전쟁은 용병들이 대활약을 한 전쟁이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실업자가 된 잉글랜드 직업군인들을 중심으로 뭉친 다국적 용병 집단 그랜드컴퍼니는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뒤 아비뇽을 포위해서 교황한테까지 보호비를 뜯어내고 프랑스 전역으로 흩어져 거의 20년 가까이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샤를 5세 시기에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통일적이고 정기적인 조세 제도가 시행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귀족 신분과 군인 직업을 구분하는 관념이 강화되었다. 국경의 요새 주둔군 사이의 전초전이 거의 백 년 동안 계속되면서 고인물화된 전문 직업군인들은 이제 몇 년에 한 번씩 왕명으로 군대에 소집되는 귀족 지주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중무장 전사는 여전히 전쟁의 주역이었고 명예로운 지위로 여겨졌으며 상당수는 귀족출신이었지만, 이전과 달리 귀족신분과 동일시되지는 않았다. 예를들어 1393년 샤를 6세의 칙령은 "전쟁에 복무하며 귀족다운 삶(중무장 전사로서 참전하는 것)을 사는 귀족이 아닌, '상업에 종사하는 귀족 가계 출신의 귀족'은 조세에 관한 한 비귀족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세금을 면제받지 않는다"고 포고했다. 군인이 아니더라도 국왕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면 덜 명예로운 방식이기는 하지만 귀족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귀족 신분과 군인 직업이 구분되는 추세는 적어도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넓게 보면 11세기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백년전쟁이 없었더라도 기존의 역사와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변화가 이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군대에 요구되는 규율이 엄격해졌다. 물론 전투에서 패배한 군대를 규율이 부족해서 졌다고 비난하며 규율을 강조하는 클리셰는 옛날부터 흔했고 이 때문에 근대 역사가들이 중세시대에는 규율이 개판인 군대밖에 없었다고 오해까지 할 정도였지만 백년전쟁 기간 동안 군대의 규율은 더 넓은 범위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었으며 낭만적인 궁정문학에까지 침투했다. 1350년대 프랑스의 유명한 궁정기사였던 조프루아 드 샤르니(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는 저서인 《마상창시합, 토너먼트, 그리고 전쟁에 대한 질문들》(Demandes pour la joute, les tournois et la guerre)에서, '개인의 영광을 좇아 지휘관의 명령을 어긴 군인이 계약상의 급료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를 '좋은 토론 주제'로 보았다. 그러나 1380년대 법학자 오노레 보네는 군인은 왕이나 왕이 임명한 지휘관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며 목숨을 걸고 군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1374년 샤를 5세가 제정한 군사법령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돼 있었다.
○ 기타
- 각종 중세배경의 게임, 소설에 수많은 영감과 이미지를 제공하는 전쟁이다.
-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에서 손등을 앞으로 해서 V를 만드는 것이 매우 심한 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현대에 만들어지진 속설이다. 우선 장궁을 당길 때는 손가락 2개가 아닌 3개를 사용하고, 백년 전쟁 시기의 기록에는 손가락 세 개(두 개가 아닌)를 자르겠다고 위협한 사례가 단 한 번 등장하며 모욕하기 위해 손가락을 펴 보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에서 궁수의 손가락을 자르거나 자르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원래 가끔 있는 일이었다. 십자군시대 튀르크 군벌인 이마드 앗딘 장기도 항복을 거부한 요새 하나를 점령한 뒤 수비군 궁수들의 엄지를 잘랐다.
- 이 전쟁과 비슷한 규모의 전쟁을 치른 두 국가가 동아시아에 있었다. 바로 송나라와 금나라인데, 이 두 국가는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약 100년 전인 1126년부터 1234년까지 총 108년 동안 전쟁을 치르는 위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