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새벽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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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오디세이 새벽 작전/20110415_110415-logo-unified-protector.jpg

1. 개요
2. 배경
3. 병력 전개
3.1. 미국
3.2. 프랑스
3.3. 기타
5. 유럽 군사력의 약화?
6. 특이점 및 반응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2011년에 국제 사회에 의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얻은 리비아의 상황에 대한 군사 개입. 작전명인 '오디세이 새벽(Odyssey Dawn)'은 지중해 부근에서 이뤄진 점을 감안해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오디세이 새벽'이라는 이름은 미군에 한정하여 사용한 것으로 참가한 각국별로 작전명이 다르다. 미국의 '오디세이 새벽'은 아프리카사령부(ARFICOM)에 배정된 작전명 알파벳은 JS-JZ, NS-NZ, OA-OF인데 이 중에서 J와 N은 최근에 썼다. O로 시작하는 단어 중 유일하게 쓸 만한 Odyssey를 정한 다음 그에 맞는 Dawn(새벽)을 착안한 것이다. 캐나다군의 '모바일'은 Mediterrannean(지중해)에서 행해지는 작전이기 때문에 M의 작전명 알파벳을 선택하였고 이중언어 국가인 캐나다의 특성상 영어프랑스어에서 같은 철자를 쓰는 단어인 Mobile을 선택하였다. 영국군의 '엘라미'는 아예 컴퓨터 무작위 생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스군하르마탄(Harmattan)은 의미를 담아 지은 것으로서 12월부터 3월까지 사하라 사막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의미한다. 즉 공습을 자연 현상에 빗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프랑스 외에는 독립적으로 항목을 작성하기엔 미비한 수준이며 어차피 서로 연합해서 공습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오디세이 새벽 작전으로 통일한다.

NATO가 리비아에 대한 작전에 전면에 나선 시점에서 작전명은 통합된 보호자(Operation Unified Protector)로 바뀌었다.


2. 배경[편집]


아랍의 봄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문서 참조.

리비아 민주화 운동이 사실상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초기에는 시민군이 동부 지역을 장악하고 수도 트리폴리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할 기세를 보였으나 제대로 된 전력도 없는 소규모 탈영병들과 자원병 중심의 시민군이 리비아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물론 리비아군도 그다지 수준이 높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명색이 정규 군대인지라 특히 시민군에는 공군 전력이 거의 없었던 것이 전세가 뒤집힌 큰 이유다.

한때는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권좌를 떠나면 망명을 허용하겠다며 호기롭게 최후 통첩을 날리던 시민군이 오히려 각지에서 패퇴해 거점인 벵가지가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했다. 더군다나 3월 11일 일본에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발생하고 뒤이어 어느 원전이 터질랑 말랑하자 세계의 관심이 모조리 일본으로 쏠렸다.

이에 크게 고무된 카다피는 세계의 이목이 일본으로 쏠린 틈을 타 잽싸게 시민군을 격파하고 내전을 끝내자는 생각으로 공세를 강화했으며 도호쿠 대지진 와중이었던 3월 17일 UN 안전보장이사회가 10개국의 찬성, 5개국의 기권으로 리비아 상공에 비행 금지 구역(No-Fly Zone)을 설정하자 카다피는 잠시 꼬리를 내리고 정전을 선언했으나 그 다음날 바로 뒤통수를 때리면서 '반란군이 먼저 정전을 파기했다'는 것을 명분삼아서 벵가지 공격을 재개했지만 증거가 없다.

정전을 선언해 놓고도 제멋대로 파기하고 공격을 재개한 것도 모자라 대규모 민간인 학살까지 우려되자 마침내 빡친 열 받은 미국에서 지상군 배치 없는 무력개입[1]을 골자로 하는 안보리 결의안[2]을 내놓기에 이르고 중국러시아의 이례적인 기권[3] 아래 압도적인 찬성표로 통과되었다. 미국은 아랍 국가와의 또 다른 전쟁을 벌인다는 부담감에 무력 개입에 신중한 입장이었으나 타 아랍 국가들이 먼저 자체적으로 비행 금지 구역 설정 움직임을 보이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시민군 최후 보루인 벵가지까지 쓸려나갈 상황이 되자 적극 개입 입장으로 선회하였으며 이전부터 적극 개입을 외치던 프랑스, 그리고 전통적인 미국의 동맹국 영국과 기타 유럽 국가들, 걸프 아랍 국가들도 참전을 약속했고 카다피와 평소에 자주 충돌했던 이집트튀니지도 지지 의사를 보냈다.

프랑스 전투기가 19일 오후 벵가지의 리비아군 탱크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하면서 시작된 다국적군의 공격에는 3척의 미국 잠수함과 25척의 서방 연합군 함정이 작전에 참여했다. 이와 더불어 함께 이루어진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적어도 민간인만 48명이 숨지고 150명이 부상당했다고 리비아 정부 측은 주장했는데 이것은 카다피 측의 주장으로 연합군 측은 발표하지 않았다.


3. 병력 전개[편집]


해당 구역에 비행 금지 구역 선포 직후 각국은 동원 가능한 항공 전력을 이탈리아 남부로 집중시키기 시작했다.[4]


3.1. 미국[편집]


미 해군은 지중해를 담당하는 제6함대를 일선에 배치했다.
본격적인 항모전단은 아니지만 토마호크 공격능력이 있는 군함만 5척 이상, 거기에 해병항공대를 전개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상황이었다.

항모가 없긴 하지만 영국내 공군 기지와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주에 위치한 아비아노 공군 기지에 다수의 F-15, F-16 전투기가 배치되었으며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F-22가 초계 활동 중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 투입은 되지 않았다. 그라울러U-2 정찰기도 가세했고 프레데터 무인기도 다수 투입되었다.


3.2. 프랑스[편집]


아프리카의 군사 개입에 가장 적극적인 프랑스[5]는 역시 다수의 전투기를 자국의 코르시카 기지와 우방국인 아프리카 차드의 기지에 전개시켰다. 라팔미라지 20여 기와 공중급유기, 조기경보기를 배치했으며 해상에는 구축함과 프리깃 각 1척이 미해군과 공동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미국을 제외하면 가장 큰 원자력 항공 모함인 샤를 드골급 항공모함을 급파했다. 드 골에는 라팔 함재형 다수가 탑재되어 있다.


3.3. 기타[편집]


영국은 트라팔가급 공격원잠 HMS 트라이엄프와 2척의 프리깃, 그리고 유로파이터 전투기와 토네이도 전폭기 10여 기를 보냈다. 영국군의 사정이 워낙 안 좋아서 이 정도면 엄청난 수준이다. 중국 환구시보와 이슬람권 IRNA에서는 영국군이 SAS를 동원한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으나 증거는 없다. 뮌헨의 지방 신문도 리비아 공격 전에 이미 SAS가 현지에서 대기 중이라고 말했지만 역시 증거는 없다.

캐나다는 C-17 대형 전략 수송기 2기로 병력 및 장비를 지원하고 CF-18 전투기 6기와 CH-124 시킹 대잠헬기 1기, 프리깃 1척을 보냈다.

덴마크는 F-16 전투기 6기를, 벨기에는 F-16 전투기 4기와 프리깃 1척을 보내기로 했으며 카타르도 전투기 4기를 보내기로 했다. 그 외에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UAE도 전력을 파견했다.

AFP에 따르면 노르웨이도 전투기 6기를 지원하였으나 다국적군을 지휘하는 나라가 불명확한 한은 작전에 투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4. 리비아 내전[편집]


이후의 내용은 1차 리비아 내전 문서 참조.


5. 유럽 군사력의 약화?[편집]


초기 공습 당시 미국의 비중은 절대적이어서 50% 이상을 담당했지만 미국이 나토에게 작전권을 넘긴 후[6] 조기경보기 등의 지원 임무만 남기고 항공 전력을 철수시키면서 리비아 공습은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유럽 공군만으로 공습을 하게 되면서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빠지니 다른 아랍권 국가들의 공군력까지 동원했음에도 미국이 공습에 참여했을 때보다 화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공습 초기에는 무서워서 벌벌 떨며 어딘가에 숨어 있던 카다피가 트리폴리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효과가 약해졌다. 또다른 심각한 문제는 공군의 정밀유도무기 부족이었다. 비록 미국이 공중 급유를 지원해 줬으나 심각한 탄약부족에 시달렸다. 이탈리아는 공군 기지 제공만으로도 할 일을 다했다는 입장에 이쪽도 집안 단속하느라 바빠서(...)[7] 발을 빼고도 미국의 폭격 비중은 20% 남짓을 유지했으며 자기 밥그릇 지키겠다고 뛰어든 프랑스군은 고작 폭격량의 33%만을 담당했을 뿐이다. 사실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다. 냉전이 끝난 후 유럽은 전례없는 평화의 시대가 왔다고 여기고 자연스레 군축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지상장비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생산라인을 폐쇄하여 핀란드나 노르웨이 같은 러시아의 위협에 있는 국가들이 멀리 떨어진 한국의 k-9 자주포를 구매할 정도다.

유럽이 미국보다 리비아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이유는 리비아산 석유의 주 소비 지역이 유럽 지역이라는 점이다. 리비아는 경질유 위주의 원유가 생산되는 지역이며 따라서 이를 소비하는 유럽 지역의 경우 탈황 설비를 갖추지 않은 정유 시설이 대부분인 반면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나 걸프 인근 국가에서 채굴되는 원유를 주로 소비하는데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원유는 탈황 시설이 따로 필요하다. 유럽은 수입 비율이 낮은 편. 따라서 리비아가 유럽 지역으로의 원유 수출을 차단하면 심각한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해지고 대체재인 결프만 원유를 공급해준다고 해도 탈황 설비가 없는 정유 시설만 보유한 유럽으로서는 미국의 입만 바라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가 앞장 서서 리비아 공습에 참여한 이유가 리비아산 원유 수입 비율이 높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리비아의 원유 수입 비율의 5% 정도만을 차지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편이다.

직접 공습 외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도로 시민군에 군사 고문단과 연락 장교가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시민군의 훈련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6. 특이점 및 반응[편집]


이 작전은 UN이 오랜만에 내전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어 무력 개입한 경우다. 그동안 UN이 양측을 중재하기 위해 내전이 일어난 나라에 개입하여 감시하거나 어느 일국의 침략 전쟁에 맞서서 다른 한쪽을 도와주러 참전한 경우는 있지만 내전에서 어느 한쪽을 위해 개입한 것은 최초다. 리비아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랍 국가에 대한 서방 세계의 무력 개입임에도 아랍 국가들의 적극적 지지를 얻은 특이 케이스다. 1990년 이라크쿠웨이트를 침략한 걸프 전쟁 외에는 서방 세계의 아랍에 대한 무력 개입은 아랍 국가들로부터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하다 싶지만 카다피가 하도 깽판을 친지라... 아랍 연맹은 오히려 나서기를 주저하는 서방 세계에게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하라고 앞장 서서 요구하면서 리비아를 아랍 연맹에서 축출시켰다. 사실 카다피는 지가 아랍 연맹의 수장이 된다고 으스대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한 동맹 수장국들에게 단단히 미운 털 박혔던 인물이다. 사우디 국왕에게 미국의 개라고 대놓고 욕하던 양반이었으니. 단지 외교적으로만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고 국민들도 리비아(정확히는 카다피)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항목의 젱가젱가송이스라엘 사람이 만든 영상인데도[8] 아랍권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정작 공습이 시작되자 아랍 연맹 의장은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습은 비행 금지 구역 설정의 목적과 다르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을 원했지 더 많은 시민을 폭격하는 것은 아니었다며 딴지를 걸었다. 전통대로 러시아, 중국은 물론 아프리카 연합도 공습에 반대하였다. BBC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극렬하게 반발했는데 카다피 자신은 아랍인이었으나 흑인 독립운동, 민권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넬슨 만델라아프리카 국민회의가 리비아의 지원을 받았고 로디지아의 흑인 게릴라도 지원했는데 그 힘으로 카다피는 아프리카 연합 제7대 의장이 되기도 했으며 미국 흑인 사회에도 지원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미국 흑인들이 공습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역으로 이 때문에 시위대가 리비아 내 흑인 주민들을 짐바브웨 용병으로 오인하고 구타하고 화풀이하는 일도 벌어졌다.

독일은 비행 금지 구역 설정에 대해 "나중에는 아예 육상 이동 금지 구역 만들고 감시를 위해 육군을 투입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1994년 르완다에서의 50만 학살 이후 국가에 의한 반인권 범죄 발생시 국제 사회 역할에 대한 성찰로 2005년 세계정상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에 국가의 국민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이 포함되었다. 결의안의 138 문단에는 각국이 자신의 국민에 대해 집단 학살, 전쟁 범죄, 인종 청소,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만약 리비아에 국제 사회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시민군의 거점 도시인 벵가지는 제2의 스레브레니차[9]가 되었을 것이다. 시위 극초기에 이미 실탄 사용이 시작되었고 초기에 중화기와 군용기를 사용한 폭격으로 진압했는데 벵가지를 차지하고 나면 과연 평화적으로 사건을 마무리할까? 지극히 자명한 문제다.

민간인에 대한 무력을 사용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는 의문점이 없으며 이는 무기 금수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여행 금지 및 자산 동결, ICC 조사 회부 등을 규정한 안보리 결의안 1970이 안보리 구성국 전원[10]의 찬성을 얻음으로서 국제 사회의 동의를 확인했다. 비행 금지 구역을 결의안 안보리 결의안 1973은 중국, 러시아, 브라질, 독일, 인도가 기권하였으나 국제 사회의 개입의 정도에 대한 이견차일 뿐이지 반인륜적 범죄가 아니라는 의견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독립을 선언한 것도 아니고 한 나라의 시민군을 그 나라(비록 잔혹하게지만)가 제압하는 것에 다른 나라가 끼어드는 것은 명백한 주권침해에 해당하여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리비아와 비슷하게 국민 탄압이 벌어진 바레인과 예멘에도 군이 투입되지 않았다는 점[11]과 비행 금지 구역이 설정된 이라크에서도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이해 관계가 얽힌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과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는 있었지만 리비아에서는 비폭력 시위 및 평화롭게 했던 이틀 간의 시위 후 첫 주에 무장 및 내전으로 번져 천 단위의 사망자가 나왔던 것에 반해 바레인과 예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며 폭력적인 진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속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리비아와 같은 상황으로 묶기에는 카다피의 행적이 너무 막장이었다.

한편 주권 국가가 국민의 주권, 인권 등을 침해했을 때 국제 기구는 주권을 제약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이전에는 외교적, 경제적 제재가 최대 한계였던 점을 생각하면 오디세이 새벽 작전과 같은 군사적 개입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주권 제재다. 다르게 말하면 '국민의 주권을 침해하는 국가는 언제고 무력 개입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군사적 제재는 아직 선례가 없고 나중에 처리해야 할 문제도 이전의 제재들에 비교하면 많을 것이 분명하며[12] 국민 주권 개념도 지켜야 할 국민의 주권이나 인권은 어디까지이며 어느 정도 선에서야 침해가 되는 것인가가 애매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나라마다 해석이 다른 주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13] 골치가 아파졌다. 이는 '국민 보호 의무'의 위반으로 인해 주권 국가에 국제 사회가 개입한 첫 사례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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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 시점은 리비아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탄 선박이 리비아를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은 후라고 한다.[2] 이와는 별도로 미국은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도하여 320억 달러가 넘는 미국 내 리비아 자금을 동결시켜 버리기도 하였다. 참고로 2010년의 리비아 국내 총생산(GDP)은 자료마다 다르지만 약 890억~961억 달러 정도로 알려졌다.[3] 중국과 러시아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거부권을 가지고 있다. 안보리는 나머지 모든 국가가 찬성하더라도 상임이사국 1개 나라가 거부권 행사하면 쿨하게 부결시키는 체제다. 다만 이 상임이사국으로서 어떤 문제 결정에 권리를 갖고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외교적으로 영향을 발휘하므로 기권한 것으로 보인다. 찬성을 하면 굴복한 것으로 보이고 반대를 하면...[4] 이탈리아는 비행 금지 구역 선포 직후 자국의 공군 기지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했다.[5] 프랑스는 리비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를 자기 앞마당 정도로 보고 있다. 북아프리카에 이권을 다수 보유하고 있기도 하고.[6] 미국은 리비아에 딱히 이권이 없다. 남의 전쟁에 돈만 쓰다가 적당한 시점이 되었다 싶으니 발을 뺀 것이다.[7]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는 카다피와 짝짜꿍하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였다.[8] 왜 이스라엘이 볼드체로 표시되어 있는지는 해당 문서 참조.[9] 1995년 보스니아 내전 중에 보스니아계 8,000여명이 인종 청소를 이유로 세르비아계 군대에 의해 학살된 사건. UN 안보리는 스레브레니차를 보호 안전 지역으로 선포를 했고 상황 당시에 현지엔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이 있었지만 학살을 막지 못했다.[10]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브라질, 콜롬비아, 독일, 가봉, 인도, 레바논, 나이지리아, 포르투갈, 남아공[11] 예멘은 시위대에 독가스까지 뿌렸다는 의혹도 있었고 바레인은 아예 자국민 진압해 달라고 사우디군을 끌어들였다.[12] 모든 국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최악의 상황이 바로 전쟁이다. 그래서 무력 개입은 정말 더 이상 방법이 없거나 물러설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만 벌어지게 된다.[13] 안보리 5개국의 성향 차이만 봐도 뭐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