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열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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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배경
2.1. 탄생과 기원
2.2. 전열보병은 왜 이렇게 싸웠는가?
2.2.1. 머스킷의 근본적 한계와 전장의 특성
2.2.2. 병사들의 낮은 사기?
2.2.3. 전열보병의 싸움은 단순한 소모전인가?
2.3. 전열보병은 돈을 아끼기 위한 것이다?
3. 훈련
4. 장비
5. 군수 및 생활
6. 쇠퇴와 유산
7. 외부 링크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의 영국군과 미국 대륙군의 전열보병대 간의 전투[1]



나폴레옹 전쟁 시기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의 전열보병[2]


1. 개요[편집]


전열보병(, line infantry)[3]이란, 머스킷으로 무장한 다수의 보병이 행대로 나란히 서서 사격하는 전술, 혹은 그러한 전술을 사용하는 보병을 의미한다. 총기의 발전으로 아르케부스가 머스킷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자 등장한 전술이다. 18세기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에서 그 위력을 과시하였다.

의외로 한국사에서도 서양의 전열보병대와 충돌한 적이 있는데, 최초는 나선정벌 당시의 러시아군과의 교전으로 신류 장군은 북정록에서 당시 러시아 제국군의 오와 열이 맞춰진 전열보병 전술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도 프랑스군, 미군 전열보병과의 전투가 벌어졌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은 정족산성에 포격 지원도 없이 보병만으로 돌격하다가 큰 피해를 봤고, 이와 달리 신미양요 때 미 해군은 충분한 함포 및 상륙한 해병대 야포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각개전투 전술과 레밍턴 롤링블럭, 리볼버등의 후장식 총기와 연발총을 대거 장비했고, 이로 무장한 미 해병대 병력이 광성보를 함락시켰다.

종종 인터넷에서는 전열보병이 사용하는 진형인 선형진(line formation)이나 전술인 선형전술(linear tactics)을 보고 라인배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잘못된 용어이다. 비슷한 라인 오브 배틀(line of battle)이라는 용어가 있으나, 이는 일반적으로 형성되는 "전선(戰線)"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현재는 거의 사장된 병과 용어지만 영단어 'Line Infantry'는 정규 보병들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가끔씩 쓰이기도 한다. 전열을 이뤄 싸운다기보다는 전역에서 전선을 형성하는 보병들이라는 뜻이다.

2. 역사적 배경[편집]



2.1. 탄생과 기원[편집]


파일:Musketenfeuer.jpg

동방으로부터 화약이 도입된 이래, 공성무기인 화포를 시작으로 다양한 화약무기가 유럽에 전래되었고, 개인화기로서 중국의 화창에서 유래된 걸로 추정되는 핸드캐논도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화약 무기 초창기의 핸드캐논은 정밀하지 않아 명중율이 극도로 낮은 것은 물론, 제대로 적을 향해 조준하는 것도 힘든 조악한 무기였다. 당연히 효율적인 사격통제도 어려워, 언제까지나 "특공"용 무기 취급 받았을 뿐 적극적으로 운용하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러나 유럽의 철기 기술 발전과 장인들의 실력 향상이 이어지면서 변화를 맞는다. 기존의 조악했던 핸드캐논의 포신을 더 작고 정밀한 총열로 대체하여 휴대성을 높였고, 거기에 화승, 화약접시, 방아쇠, 조준장치를 추가한 화승총이 등장했다.

이 혁신적인 발명품은 핸드캐논과 달리 조준이란 걸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도통 써먹을 물건이 못 되었던 핸드캐논과 달리 비교적 균일한 성능을 제공했으므로 사냥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고, 덕분에 사냥으로 단련된 전문 포수들이 등장함에 따라 전쟁터에서도 총잡이들이 활약할 기회가 찾아오게된다.[4] 특히, 방아쇠를 당기면 화승이 화약접시에 닿아 화약을 기폭시키는 설계는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된다통일된 사격 방식을 제공하였고, 따라서 핸드캐논과 달리 사격통제가 가능해졌다. 이것은 개인 화약 무기를 "특공"용 무기가 아닌 제대로 된 사격 견제 수단으로 쓸 수 있게 바꿔준 획기적인 변화였고, 덕분에 전쟁에서 화약 무기 활용 가능성이 주목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의 아르퀘부스/머스킷이라 불리는 화승총들은 엄청나게 비싼 고급 장비였으며, 핸드캐논보다야 낫다지만, 여전히 턱 없이 부족한 안정성때문에 전문 총잡이가 아니라면 감히 다룰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시기의 총들은 오늘날의 화기에 비해 턱없이 화력이 모자란 주제에 무게는 약 16파운드/7.25kg으로 오늘날의 경기관총에 맞먹는 무게를 자랑해서 받침용 막대를 휴대해야 할 정도였기에,[5] 당연히 포수들이 근접 전투에 너무나도 취약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총기의 요긴함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기에 총사를 최대한 활용할 목적으로 파이크 진형 옆에 종대로 샷이 서서 한 줄씩 돌아가면서 사격하는 진법이 고안되었고, 이것은 원시적인 파이크엔 샷 진법인 셈이었으나, 총사들이 근접 돌격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고, 총사들이 늘어난만큼 파이크에 가해지는 부담이 늘어나서 유의미한 진형 유지력 증가 효과를 볼 수 없어 한계가 명확했다.

하지만 이런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이용하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는데, 그만큼 숙련 파이크 병과 기병대를 양성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장을 주름잡던 파이크 힘싸움은 파이크 병들이 서로 파이크를 겨눈 상태로 전진하여 다함께 꼬챙이가 되어가며 버티다 먼저 진형이 흩어진 쪽이 지는 방식이었기에, 아무리 민병대 등이 파이크 좀 다룬다 해도 고도로 숙련된 정예 파이크 부대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총사들의 활용에 전전긍긍하던 때에 가장 큰 혁신을 일으킨 것은 스페인 왕국이었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보병과 기병 운용에 일가견이 있는 나라이나, 기병대는 프랑스의 장다름에 못 미치고, 보병의 주력은 검보병이었으나 중세 말기인 13-14세기부터 검보병의 시대가 저물고 파이크 창병의 시대가 열리며, 파이크병의 힘싸움에 밀려 크게 고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파이크 힘싸움 역량 부족은 특히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겨루던 이탈리아 전쟁시기에는 이탈리아의 민병대 출신 창병들이 스위스 장창병 부대나 기타 정예 근접 보병 용병대와 붙는 족족 대판 깨지는 것으로 스페인에 엄청난 골칫거리가 되었다. 1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쓴 맛을 제대로 본 스페인 왕국은 이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총사를 이용한 여러 시행착오가 이어갔고, 덕분에 총사대 운용의 성과가 점차 개선되었으며, 16세기 내내 장창병 또한 지속적으로 양성하면서 총사대 비율을 계속 높여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총기 운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아직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여러 시행착오가 있던 중에, 16세기 초 합스부르크 제국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파비아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군 측이었던 3,000명의 스페인 총병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면서 큰 전환점을 맞게된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 기선제압 차원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파비아 요새를 공격하려 들자, 요새를 끼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요새를 통해 적 기병대의 우회 습격을 차단하고, 야전축성물을 만들고 란츠크네히트 보병이 적 파이크 병의 진입을 봉쇄하였다. 이를 통해 적의 접근으로부터 총사대를 보호해내는 운용이 정석적으로 이루어졌고, 스페인의 총사대가 프랑스군의 장다름기병대와 스위스 용병대를 무참하게 박살내는 쾌거를 이루게된다. 기관총 이후의 시대에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총기의 절대적 원칙, 적의 기동을 차단해야 한다는 개념이 점차 명확해지게 된 것이다.

냉병기 시대의 합성궁, 장궁, 석궁 따위는 고작 파비스 같은 허술한 방호 수단에 의존해야할 뿐더러, 일제 사격의 충격력과 살상력이 부족한 탓에 적의 기동을 차단하지 못하고 주력으로 활용될 수 없었던 반면, 총기는 적이 총사대에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매 사격마다 적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줄 수 있었다.[6] 이렇게 여러 전쟁을 거치며 스페인은 총사대 운영법을 정립해나가면서 동시에 그동안 빈약했던 파이크도 정예 중의 정예로 개선해냈다. 이렇게 고도로 숙련된 총사대와 파이크 장창부대는, 단순히 총사대가 파이크에 기생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기존의 파이크+샷 운용과 달리 파이크와 샷의 합동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하였는데, 샷이 사격전을 벌이다 적의 기병이나 보병이 접근해오면 창병사이로 물러섬으로써, 샷을 파이크나 기병 돌격에게서 보호하면서, 동시에 샷이 아측 파이크에게 가해지는 힘싸움 부담을 미리 적을 쏴죽여 완화하는 획기적 활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은 총사대가 투창병으로 추가된 변형 파이크 진형과 같은 효과를 내었고, 따지고보면 먼길 돌아 고대의 투창 & 파이크 진법이 부활한 셈이었다. 즉, 총기가 투창의 문제점이었던 "어쨌든 냉병기가 가지는 화력 한계"와 "최악의 휴대성"을 거의 완벽히 해결하여 투창을 좀 다른 모습으로 전장에 복귀시킨 것이다.[7][8]

이 스페인식 파이크 앤 샷(Pike and Shot)이 스페인의 부대 편제인 테르시오의 핵심 진법으로 자리 잡았고, 고도로 숙련된 파이크와 샷이 운명을 함께하는 테르시오의 방진은 아무도 깨트릴 수 없는 무적의 방진이란 명성을 얻기에 이른다. 이렇게 총기 시대의 1세대가 시작 되었으며, 이 당시의 총사들은 당시 총기의 부실한 화력과 정밀성을 극복할만큼의 사격 실력을 갖추는 것은 물론, 파이크 병들 사이에서 튀어나와서 냅다 총을 쏴길기고 적이 돌격해오면 파이크 속으로 피하는 매우 난해한 기교를 부려야 했기에, 그 훈련도와 사기가 높기로 유명해 굉장히 귀한 인력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는 총잡이들이 멋들어진 챙모자를 착용하고, 소설 삼총사의 제목 Les Trois Mousquetaires, 즉 세 명의 총사[9]로 쓰일만큼 낭만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16세기를 넘어가면서 총이 점차 대중적인 무기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숙련되지 않은 총사들이 다수 생겨났으며, 총에 대한 화력 요구가 강해짐에 따라, 빠른 재장전을 통한 빠른 연사가 필요해져 탄자 직경(총알의 지름)이 총열 직경보다 작아지는 방향으로 총기가 변화하였고, 따라서 총기 자체의 정밀성도 크게 낮아지게 되었다.[10]

때문에 소수의 많은 열을 통한 지속사격보다는 다수의 적은 열이 일제히 총알을 퍼붓는 방식으로 매 사격의 충격력을 극대화하는 대규모 화망 구성으로 교리가 변해갔으며, 테르시오 또한 점점 파이크병의 수가 줄어들고 총병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즉, 한 사람이 적 한 사람을 목표로 두고 쏘는 것이 아니라 단체로 산탄총을 쏘듯이 넓게 퍼지게끔 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총알도 한 번에 하나만 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총알 앞에 작은 총알을 두세 발 더 넣어서 진짜 간이 산탄을 쏘기도 했다.

파일:Klushino2.jpg
클루시노 전투(1610). 파이크를 앞세운 보병 전열에 돌격하는 윙드 후사르. 1620년경 그림

파일:Hollande1610.jpg
최초로 실전에 쓰였다고 알려진 마우리츠 선형진

총병의 비율은 계속해서 높아져가 16세기 말에는 50%를 넘기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네덜란드의 마우리츠는 스페인을 상대하기 위해 샷과 파이크의 비율을 2:1로 구성해 극단적으로 샷의 비중을 늘리고, 대오의 구성을 얇고 단순하게 바꾼 마우리츠 선형진이라는 과도기적 진법을 등장시킨다. 마우리츠는 파이크 숙련도 부족을 총기 화력의 극대화로 극복하려 하였고, 이는 그전의 스페인과 같은 이유였다. 물론 스페인이 파이크 문제를 피하려고 총사를 늘린 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진 못한 것처럼 마우리츠 선형진도 결국 파이크 조직력 부족을 극복할 수는 없었으나, 파이크를 대체할 방법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겨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테르시오에서도 파이크의 비중이 급격히 감소하는 와중에도 테르시오의 무적 전설은 이어졌으며, 30년 전쟁 중에서도 스페인의 테르시오들은 무적의 부대로 악명 높았다. 테르시오의 정신나간 조직력을 극복하려고 마우리츠의 실험적 선형진과 비슷하게 선형 진법이 이곳 저곳에서 시도 되었으나, 여전히 정예 파이크의 진형 유지력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특히 신교측 병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것은 물론 장교진도 매우 빈약했기에 개신교 연합은 카톨릭 연맹과 붙는 족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스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구스타프 아돌프스는 가죽포[11]와 같은 경량화된 포병 장비를 이용해 무언가 부족했던 사격 화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것은 물론, 총사들에게 검을 한자루씩 쥐어주고, 여차하면 칼 빼들고 돌격하게 하여 총병을 검보병으로 변환하는 발상의 전환을 선보였다. 이 구스타프 선형진은 이 시대의 총병이 가진 취약점을 총병을 투창을 던질 수 있는 검보병으로 개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대, 결국 이 또한 역사가 다시 반복된 셈이다.[12] 1631년 구스타프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개신교 연합 최초의 승리를 선사했고, 이후 한 세기를 주름 잡았던 파이크 엔 샷 진법이 퇴장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로크루아 전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 테르시오가 패배를 경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조차 테르시오의 진형이 무너지지 않았기에 프랑스군의 돌격이 매번 실패했다. 피해가 너무 크게 누적된 스페인 측이 끝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고 나서야 전투가 종결되었고, 결국 아직까지는 파이크의 필요성은 완전히 대체될 수 없었다.

브레이텐펠트 전투나, 로크루아 전투 이후로도 테르시오와 파이크를 든 장창병 편제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는데, 전투에서 총기와 화포의 능력이 아직은 불충분하여 백병전과 파이크 싸움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가령 네덜란드의 선형진이 스페인의 테르시오를 이긴 니우포르트 전투에서도 정작 백병전에서는 테르시오가 우세하게 밀다가, 스페인 병사들이 다 이겼다고 방심하여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대오를 이탈해대는 것을 역으로 노려 네덜란드군이 승리했던 것이고, 마우리츠는 이후 스페인 육군과의 회전을 최대한 피했다.

그런데, 장창병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엄청난 혁신이 일어난다. 바로 총검이 등장 후 제식화 된 것이다. 그전에는 총병들이 검을 장비해서 근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부족한 충격력을 보충하는 것은 가능해도, 검으로 기병 돌격을 받아낼 수는 없을 뿐더러, 총에 더불어 검이라는 어려운 무기를 함께 쓰려니 훈련 난이도가 어마어마한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 총은 정교한 기계이지만 어쨌든 생긴 건 길쭉한 막대기인데, 여기에 창날같이 생긴 날붙이를 붙여서 창처럼 쓰면 안되나? "란 발상이 어디선가 나오기 시작한다. 누가봐도 뻔한 막대기에 뭘 꼽기 편하게(?) 구멍도 있겠다 날붙이를 꼽아보는 것은 본능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전에는 총기가 상당히 비싼 것은 물론 너무나 무거워서 도저히 쓸 수가 없었기에 상상에 그쳤는데, 점점 머스킷이 대량 생산으로 인해 저렴해지고 무게도 가볍게 경량화되면서, " 요즘 총은 가벼운데 한번 뭘 꼽아보자! "란 발상을 실현시키게 된다.[13]

때마침, 기존 파이크 엔 샷 진형은 그 자체로 창병 방진이기 때문에, 제식훈련 자체가 원래 창병 방진 훈련과 동치이므로, 총잡이가 원래 하던대로 하되 근접 돌격이 가해질때 물러서는 게 아니라 그대로 총검 꼽고 맞서면 그만이니 새로운 훈련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고, 새로 부대를 편성할때도 창병 방진은 가장 단순한 방진이므로 훈련이 어렵지 않았다.[14]

하지만 총에 총검을 꼽아 백병전을 수행할 냉병기로 쓰는 것은 원래의 창이나 파이크 방진보단 못했다. 아무리 경량화 되었다곤 해도, 총열로 인한 무게와 총의 형상으로 인한 무게중심 등의 문제 때문에, 창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기 힘들었고, 파이크처럼 길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창병이 보조적으로 투입되어 왔고, 창병이 완전히 소멸한 후에도 병사를 이끄는 부사관에게 창을 주거나, 예비 물자로 비축하는 등 창이 주력에서 빠지긴 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시대에도 파리 수비군 병기창에 있던 창들을 징발해 러시아 원정에 가져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검이 발명되면서 총은 더 이상 투창의 대체제가 아닌 창과 투창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더 나은 무기로 진보하게 된다. 백병전엔 창보다 못하다곤 해도, 어처피 방진이란 돌격을 조직력을 통해 견뎌내는 것이 목적이므로, 조금 불편하단 문제는 조직력에 기여할 인원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마 가능한 단점이며, 경쟁자인 파이크병은 수준 높은 체력과 훈련이 필요해 머릿수도 부족한데 유연하고 빠른 움직임이 힘드니 사격으로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또한 기병의 근접 돌격을 버텨낼 수 있게 되면서, 처음으로 총병 부대가 자체적인 진형 유지력을 획득하게 되었고, 덕분에 파이크 엔 샷의 시대가 종결된다.

이 변화로 인해 총사들에게 직접적인 진형 유지 부담이 가해지면서 총사들은 "일시적으로 길이가 수백 미터로 늘어나는 창인지 투창인지 구분하기 힘든, 창 비슷한 것을 장비한" 보병이 되었고, 이는 곧, 총사들이 이젠 일개 총병으로서 기존의 파이크 힘싸움 역할도 같이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전열보병이다. 적 포병에 대한 위협에 방어하고, 기병의 돌격과 백병전 등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열은 조금 얇은 대신 횡으로 넓은 형태로 발전하였고, 때때로 얇은 대열로만 방어가 어려울 때는 사각방진을 이뤄 적기병의 우회 돌격에도 대처하였지만, 전열보병의 싸움 원리는 고대 보병 진형 싸움의 연장 선상에 있다.

물론 총기 시대의 싸움도 고대 보병 진형 유지력 싸움과 동일하게, 먼저 못 견디고 흩어지는 쪽이 지는 싸움이 되었으며, 결국 전열보병의 싸움이란 적의 총탄에 구멍이 송송 뚫려 죽고, 포탄에 볼링 당해 몸이 뚫리거나 그대로 박살나거나 날아가서 죽고, 기병 돌격과 적 보병의 착검 돌격에 찢기고 베이고 찔려 죽어나는걸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싸움이 되어버렸다. 이는 진형 유지라는 개념을 각 제대별이 아닌 전장 전체로 옮겨버린 기관총 이전 시대에서는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이런 변화에 의해, 챙모자 같은 낭만적인 복식이 사라지고, 대신 요란한 색상으로 멋을 부린 전열보병 특유의 제복이 도입되었다. 이렇게 전열보병이 활약하던 중에도 많은 나라들이 초창기 총사대 전통을 보존, 총 좀 쏜다 하는 포수들을 모아 척후 및 산개 전투를 하는 특수 부대 격인 경보병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강선의 등장으로 경보병들의 사격이 더욱 위협적이 됐음에도 산개대형은 근접전에 매우 취약해 지형, 지물에 영향을 많이 받아 총기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의 초창기 총사대처럼 보조적인 역할이었다. 결국 밀집 대형이 완전히 사라진 시기는 소총, 기관총과 야포가 더욱 발달하고 이를 충분히 경험한 후인 1차대전 부터였다.

2.2. 전열보병은 왜 이렇게 싸웠는가?[편집]



https://youtu.be/-8aIaj0pe64?si=OsVXM0-3-I3al8R8

총격전이라면 군인들이 산개로 작전을 이행하면서 엄폐물을 끼고 피격을 최소화시키는 전훈이 기본 소양처럼 자리잡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은 매우 엽기적인 방식으로 보일수도 있다는건 사실이다. 코앞에 엄폐물도 없이 적을 두고 일렬로 마주치고선 서로간에 턴제로 총격을 주고받으며 최전열은 총알받이로 소모해버리고, 죽거나 다친 앞의 인원은 뒷사람이 다시 채워서 메워주는 전술을 당최 신사적이라 해야할지 우스꽝스럽다 해야할지 이해하기 어려워 보일수도 있다. 아무리 병사들의 생명 철학이나 인권에 대한 존중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병사를 함무로 사지로 내몰아서 병적 자원을 낭비시키는 작태로 보이기도 충분하다.

그러나 전술이라는 것은 항상 그 시대에서 먹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르고 고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현대의 전술이 미래에는 또한 미개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듯이, 전열보병도 지금 기준에서나 미개해 보이지[15]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기에 여러 나라들이 채용 한 것이다. 정말로 저열하고 황당하기만한 전술이었다면 이 전술을 구사한 군대 및 국가들은 진작에 패퇴를 일삼았을테고 멸망까지 이어졌겠지만, 오히려 이들은 당대 승승장구만 이어나갔다.

이는 전열보병 유무끼리 겨뤘던 전과로서도 증명되는데, 제2차 아편전쟁나폴레옹 전쟁이집트 원정 등 전열보병을 구사하던 군대와 그렇지 않던 군대가 충돌하던 전쟁의 양측 피해 규모를 비교하자면 사상자 규모가 수백배 차이로서 전열보병의 압승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딜교가 심히 차이나는 전술인데, 유럽권 강대국에선 이 전술을 넘길리가 없었다. 이 전술이 없었더라면 대영제국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술했듯, 전열보병의 선형진은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보병 진형 싸움의 연장 선상에 있다.[16] 상술했듯, 기관총 이전의 모든 보병 개인 원거리 장비들은 투창으로 대표되는 고대 원거리 산병 전투와 완전히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원거리 견제 장비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 투창 : 멀리서 적을 찔러 죽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방패로 막아도 방패를 못 쓰게 만들기 때문에 원거리 견제 수단 중에서는 가장 강력하며, 일제 사격시 가장 강력한 충격력을 내는 원거리 견제 장비다. 하지만 투창은 무겁고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휴대하기 힘들고, 걸리적거리는 만큼 근접전 노출 위험이 커서 오래 싸울 수 없다는 고질적인 단점이 있다.

  • 투석 : 의외일지 모르지만 중장보병에게 매우 효과적이다. 방패로 막아도 짱돌을 계속 맞고 있으면 팔이 아파서 못 견딘다. 갑옷으로 막아도 짱돌을 맞는 충격 때문에 크게 멍이 들고, 제대로 충격을 받으면 못 견디고 쓰러진다. 투구에 맞으면 뇌진탕으로 쓰러지거나 죽는다. 하지만 투석구는 매우 다루기 힘들어, 하루종일 돌 던지는 걸 일로 삼은 용병대나 쓸만한 장비에, 돌 또한 무겁기 때문에 역시 오래 싸울 수 없다는 고질적 단점을 투창과 공유하며, 또한 투창에 비해 매 투척마다 뽑아낼 수 있는 충격력이 턱없이 부족한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어, 투석은 다트 형태로라도 꽤 오래 버텨냈던 투창과 달리 빠르게 소멸했다. 무엇보다 투석구를 빙글빙글 돌려야 하므로 병사 1인당 차지하는 공간이 넓어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공격을 가할 수 있는 활이나 투창보다 많이 비효율적이었다.

  • 활 : 투창이나 투석과 달리 장기간 사격 견제가 가능하다는 막대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투창이나 돌멩이따위보다야 화살과 활이 훨씬 가볍고 휴대하기 좋으며, 또한 엄폐가 가능하므로 전방에서 달려드는 적에게 무조건 직접 노출될 수밖에 없는 투창병, 투석병과 달리 궁병들은 야전 축성물 따위 뒤에서 숨어서 견제를 이어갈 수 있다. 대신 방패에 쉽게 막힌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고전 시대나 고대 시대의 갑옷이면 모를까, 중세 중반만 와도 어지간한 갑옷도 뚫기 힘들어져 장궁이나 석궁 같이 무식하게 다루기 힘든 중장비를 써야만 한다. 결국 투창, 투석과 동일한 문제를 안게 되며, 엄폐가 가능하다는 이점 하나만 가지고 투창과 투석을 불완전하게 대체하며 애매하게 살아남았으나 주력 위치에 들어설 수는 없었다.

기관총 이전의 총기는 투창의 계승이라 할 수 있는 무기이며, 총검이 등장한 이후의 총기는 무한 투창 기능을 가진 창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동화기 등장 이전의 총기 운용 방식은 자연히 고대 중장보병들이 투창을 던지는 것과 같은 원리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투창 전문 산병 투석병, 혹은 궁병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투사체로 적을 공격하므로 굳이 선형진이 아니어도 한번에 많은 투사체를 날릴 수 있었고, 또한 자체적인 근접전 능력이 전무했으므로 선형진을 갖출 수도 없었던 반면, 직사를 해야하는 총병들은 한번에 사격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얇고 넓게 대오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총검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총사들이 근접전 능력이 없었기에 투창병, 투석병, 궁병과 같은 이유로 선형진을 구성하지 못하고 파이크 진형에 의존해야 했는데, 총검이 등장하고 난 이후부터는 총병들이 유사시 즉시 사각 보병 방진을 짜서 근접 전투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사격 화력 집중에 유리한 선형진이 쓰이게 된 것이다. 이는 따지고보면 결국 "얇고 넓게 변형된 마니폴라 레기온 대형"과 동일한 것이다.

당시 총기의 성능 한계는 적이 너무 멀면 총을 쏴도 별 효과가 없게 되는 문제를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들에 일정거리까지 끌여들여 동시 발사하는 묘사가 많고, 실제로도 전열보병의 싸움은 누가 더 유리한 위치를 잡을 때까지 진형이 안 깨지고 버틸 수 있느냐를 겨루는 싸움이었다. 분명 개인으로선 더 먼 거리에서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적의 돌격을 주춤 혹은 저지하기 위한 제압력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위 강조했듯 우스꽝스럽고 기묘하게 보일수도 있는 전투 양상인데, 전열보병이 유행하던 당시라고 인식이 다를 바는 없던것인지 퐁트누아 전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선제사격을 양보했다는 야사 가 있을 정도다. 철학자 볼테르의 저서 『루이 15세 시대의 역사(Précis du siècle de Louis XV, 1768)』에 따르면, 영국 제1 보병 근위연대(1st Foot Guards)의 사령관 찰스 헤이 경(Sir Charles Hay)은 "프랑스 근위 연대의 신사들이여 먼저 사격하시오" 라고 권했고, 이에 프랑스 장교 드 안테로셰 백작은 "말씀은 고맙지만 우리는 먼저 사격하지 않겠소. 그쪽이 먼저 사격하시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선두에 있던 병사들 입장에서는 어이 없을 노릇. 결국, 영국군의 선제사격으로 프랑스군의 1열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이긴 건 사격을 양보한 프랑스군이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사격을 버텨내고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을 실시해 보다 더 정확한 사격으로 피해를 입힌 덕분에 영국군이 사기를 잃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볼테르의 저서 이외에는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고, 사료 검증도 되지 않는 뜬소문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된 읽어볼만한 글 링크자료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하간 당대에 저런 뜬소문이 퍼졌을 정도이니,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물론이고 당시 관점으로도 군사학에 해박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흩어져서 엎드려 쏘면 간단히 이길 수 있을 것을 굳이 열 맞춰서 마주 서서 쏘려고 하는 모습을 바보 같이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열보병들의 은엄폐사격과 포복은 정말 특별한 상황에서나 장교의 통제 하에 시행되었고, 은엄폐나 산병 및 산개대열에서의 사격전은 전열보병들이 버티고 서 있는 앞에서 척후병(skirmisher)들이 담당했다. 이것 역시 이 시대만의 특수한 모습이 아니고, 기원전의 알렉산드로스가 지휘하던 마케도니아군도 장창을 들고 밀집진형을 짠 팔랑크스의 측면 후면에는 검과 방패, 혹은 투석구로 무장한 경보병들이 대기하다가 접전시에 앞으로 튀어나와 엄호해주곤 했다.

전열보병의 싸움 방식은 고도의 조직력을 요구하는 진법이었기에, 정규 기간병을 제대로 양성하지 않고 주먹구구식 동원으로 느슨하게 군대를 운용했던 나라들은 어지간해선 전면에서 전열보병을 상대할 수 없었다. 두 군대의 차이는 겨의 비정규군과 정규군 수준의 차이였고, 이는 수많은 전훈들이 입증한다.

총기 시대에 이르러서도 고전적 전투 방식이 크게 남아있던 오스만 제국도 전열보병 전술을 받아들였고, 그래야 했을 만큼 전열보병은 가장 효과적인 정규군 운용 방식이었다. 애당초 기관총이 등장하기 이전의 모든 보병 싸움이란 진형 유지력에서 나오는 조직력 승부였으며, 이 조직력의 유무에 따라 정상적인 군대와 주먹구구식 막장 오합지졸이냐가 갈렸다. 당장 명나라만 해도 보병 방진을 재정립해 재도입하기 전에는 왜구에게 탈탈 털리고 다니는 판이었다.[17]

하물며, 총기에 기반한 보병 조직력 싸움 개념은 커녕 냉병기 조직력 싸움에도 미숙했던 나라들은 굳이 전열보병이 아니어도 제대로 된 조직력을 갖춘 정규군을 이길 수 없었다. 하물며 그 조직력 싸움에 가장 최신 장비와 그에 맞는 싸움법을 도입한 정규 전열보병 상대로는 요새라도 끼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상대의 지휘관이 어지간한 똥별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아편전쟁때 청군은 비 오는 날 뇌홍도 없는 영국의 세포이 전열보병들[18]에게 궤멸당했으며, 이후에도 육상전에서 계속 연패를 거듭했다. 제 2차 아편전쟁 당시 팔리교 전투에서도 청군의 몽골과 만주 팔기군, 그리고 보병들은 영프 연합군의 전열보병이 만들어내는 가공할 일제사격에 그야말로 궤멸되었다. 2만 5천에서 3만 명이 동원된 청군과 각각 4천 명씩 8천 명이었던 영프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청군은 궤멸되었고 영프연합군의 사상자는 12명에 불과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이집트 원정때 프랑스군 전열보병 앞으로 달려든 맘루크의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2배에서 3배의 병력을 가진 6만의 맘루크군과 그의 동맹군은 18000명의 사망자를 냈고 맘루크군의 기병돌격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2만 명의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불과 29명에서 40명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군은 군제 개혁을 통해 그들의 군제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청프전쟁에선 되려 성과를 냈고, 코바이트 난 때의 컬로든 전투나,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 그리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벌을 보면 전열보병에게 섣불리 덤빈 냉병기 중심의 구식 군대가 어떠한 피해를 입는지 잘 볼 수 있는데, 러시아의 원정만 봐도 쥘베른이 쓴 저서에서 방진을 짠 러시아군 10여 명에게 수백 명의 유목민 기병대가 격파당하는 것들이 묘사되어 있다.

같은 서구권 군대의 싸움에서도 이러한 진형 유지력 문제가 속출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13주의 민병대들은 총 하나는 기똥차게 잘 쏘았어도 정규군이 아니었기에 진형 유지 능력이 없었고, 조직력이 부족하여 레드코트가 다가오면 그냥 깨져서 도망쳤다. 결국 13주의 정규군 역량이 충분히 강화되고 영국의 본토 사정이 악화되어 전쟁을 더 수행하지 못하게 되고 나서야 독립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희대의 막장 지휘 혼선으로 다 이긴 전투를 싸그리 말아먹은 것으로 악명 높았던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하이랜더들이 고작 몇 줄 되지도 않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규모로 기병 돌격을 버텨내며 엄청 얇은데 무너지지를 않는다는 명성을 사 씬 레드 라인이란 호칭을 얻어냈고,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영국이 그나마 자존심을 덜 구긴 바가 있었을 정도로 기관총 이전의 싸움에서 진형 유지력의 존재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전열보병은 밀집하여 일제화력 투사로 제압력을 높이고, 기병 돌격, 대포사격 등의 상황에서도 진형을 유지하여 각개격파되는 것을 대비한 것이다. 멀뚱허니 맞아주는 게 바보같아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전열보병을 뛰어넘는 전술이 없었고, 양측 다 전열보병을 기용하니 자연스럽게 지금 보면 이상한 형태의 전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중에 그 유명한 마티니-헨리 소총 같은 훨씬 진보한 후미 장전식 소총이 등장하고 난 후에는 굳이 가까이 적을 끌어들이거나 내가 직접 적 앞으로 무리해서 행군할 필요는 없어져, 전열 보병 대신 척후 보병 운용법이 대세가 되었으나, 개별 사격시 근접전[19] 위협은 여전히 존재했고, 결국 적이 다가오는 걸 막으려면 일제 사격이 여전히 필요했다. 따라서, 무식하게 부대 전체가 선형으로 한꺼번에 움직이지는 않아도, 각 제대별로 선형진을 구성했다 푸는 것을 반복하는 유기적으로 변형된 선형진 운용이 지속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서도 장거리 사격 시에는 충격력이 감소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에, 대신 획기적으로 증가한 장전속도를 이용해, 한꺼번에 곡사 사격을 하는 식으로 부족한 충격력을 때우는 기묘한 운용이 이어졌다.[20]

2.2.1. 머스킷의 근본적 한계와 전장의 특성[편집]


적을 만나게 되면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달려있으니, 얼굴은 누렇게 되고 입은 마르며, 손은 떨리고 다리는 힘이 빠져서 배운 기술은 모두 잊어버린다. 화기(火器)는 더욱 일을 그르치니, 하늘을 향해 쏘기도 하고, 총을 쏘면서 머리를 돌려 도망칠 길을 보기도 하고, 탄환을 입에 머금고 조급하게 총을 쏠 준비를 하다가 뱃속으로 삼켜 버리기도 하고, 탄환 넣는 것을 잊기도 하고, 탄환을 먼저 넣고 화약을 나중에 넣기도 하고, 큰 총구에 작은 탄환을 넣어서 기울여 겨눌 때 탄환이 빠져나오기도 하고, 준비가 끝났는데 화승이 땅에 떨어져 습기에 꺼져버리기도 하고, 혹은 약선의 약이 저절로 타버리기도 한다. 열 자루의 총 중에 겨우 예닐곱 자루가 발사되고, 그 중에 두세 발의 탄환이 적중될 뿐이다. 이것들은 수많은 전투 중에 직접 보고 시험해 보아 알게 된 것이다.

기효신서』 4권 수족편[21]


Lieut.-General Beauchamp Walker, C.B.:

기병을 화기로 무장시키는 문제에 관해서. 나는 우드 대령이 그 주제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기병이 총을 소지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것을 전투에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22]

미친 사람이나 떠올릴 발상이죠. 내가 알기로 프랑스인들이 가끔 그런 짓을 하곤 합니다.

제6근위용기병연대의 명예 대장인 토머스 호커 경이 언젠가 그분의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기병돌격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반도에서의 전투에서 그분이 지휘한 기병 연대가 프랑스의 기병대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일렬로 길게 늘어선 채, 제자리에 멈춰 서서, 우리 군에게 사격을 가해 몇 사람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영국 기병대는 "프랑스인들이 카빈을 다시 메고 백병전을 준비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들이닥쳤습니다."

따라서 기병전에서 카빈을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정신나간 짓입니다.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Journal of the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 vol.22 (1878)

흔한 편견과 달리 머스킷은 그렇게 정확도가 떨어지는 무기가 아니다. 숙련된 사수의 손에서, 사거리 내의 목표를 노린다면 살벌한 명중률을 자랑하는 우수한 무기이다.

머스킷 구조 자체의 열악함은 전장식 구조강선 없는 총열 뿐이다. 머스킷이 너무 안 맞아서 엄폐가 필요없다거나 목표물에 대고 쏴야 맞는다는 말은 과장된 말이다.

징집 동원령으로 밭일 하다가 끌려온 징집병이나, 민병대는 기본적인 명중거리가 25m 정도였고, 사관학교 출신인 근위대, 척탄병, 정규병과 같은 머스킷 숙련자의 손에 들어가면, 일반적인 명중거리는 70~80m 정도였다.[23] 경보병인 엽병은 강선식 롱 라이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직업 사냥꾼 출신들이 대부분 이었기에, 이 징집된 동원병 사냥꾼의 경우 130~150m에서 괜찮은 명중률을 보여줬다. 아주 드물게 최대 200~220m까지 명중하는 엽병(샤프슈터)도 있지만 말 그대로 극소수 일뿐이다.

이 정도면 현대 시가전 교전거리와 비슷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6세기에 이미 화승총을 이용한 저격이 행해졌으며, 당시 유럽에서는 많은 스포츠 사격 클럽이 등장하고있었고 이들의 사격능력은 초기형 강선식 소총과도 맞먹을 정도였다.[24] 명나라에서는 화승총의 명중률에 감탄해서 나는 새도 쏘아 맞춘다는 의미로 조총이라 불렀다. 선조실록에도 사수와 포수를 짝지어 100보 밖에 있는 과녁을 맞추게 해 실력을 겨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5] 조선시대 1보는 일반적으로 1.2m 로 환산되니 적어도 120m 정도의 거리에선 조총과 활의 명중률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머스킷이 그 정도로 명중률이 나쁜 무기였다면 애당초 대량으로 보급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민간 사냥도구였던 활을 밀어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일반적인 조건은 아니었지만, 엽병이 아닌 일반적인 영국군 전열보병이 좋은 조건에서 175야드(160m)에서 명중률 75%를 기록했다는 기록도 있고, 고지에서 사격할 것을 전제로 하는 요새는 전열보병의 유효 사거리를 200m 이상으로 잡고 설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전열보병들의 총이 낮은 명중률을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재장전 속도의 향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활강식 머스킷의 탄약 직경을 총강보다 많이 작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탄약이 총강에 딱 맞물리지 않으니 폭발 가스가 새어 나가고 탄약도 총강에서 이리저리 튕기다 마지막에 총강에 부딪힌 방향으로 스핀이 걸린 채 날아가니 탄의 궤도는 제멋대로에 명중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총강에 딱 맞물리게 만들면 탄을 총구에 끼운 다음, 나무 망치와 비슷한 bulletstarter로 두들겨 넣어 장전해야 하기 때문에 재장전 절차가 늘어나고,[26] 자칫하면 아예 총강에 탄이 끼어서 사용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총이 폭발할 위험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당시의 머스킷의 정밀한 조준기는 비쌌고, 어설프게 견착하고 눈을 대고 쐈다간 플린트록에서 생긴 밝은 불꽃에 잠시동안 눈이 멀 수 있어서 제대로된 조준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를 재현한 영화나 리인액터들이 사격하는 것을 보면 보병들이 격발시에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다. 아래의 영상을 봐도 격발 시 눈앞에서 상당히 밝은 불꽃이 터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전열보병의 활강식 머스킷에는 가늠자가 달려있지 않았다. 가늠쇠로 보이는 것은 총검 장착용 돌기로 조준에도 도움이 되어 가늠쇠를 겸했다. 정밀한 가늠자와 가늠쇠가 달린 것은 엽병용 혹은 사냥용으로 대강 어디에 맞는지 아는 상태에서 똑같이 조준하기 수월하게 하기 위해 정확하게 맞춤식으로 달았으며, 활강식 머스킷에는 어울리지 않았다.[27] 가늠자가 있어도 영점조절이 불가능하면 있으나 마나 똑같으며 거슬리기만 한다.

세 번째는 당시 군용 머스킷의 특성이다. 활강총의 대명사로 알려진 영국군의 랜드 패턴 브라운베스의 경우 총신의 길이만 110cm(전체 길이 150cm)에 5kg이 조금 안되는 무게를 지녔고, 표준 제원상 .75구경(19mm)의 탄환을 발사한다. 방아쇠 압력도 현대의 소총들에 비해 좀 더 무거운 편이었다. 여기에 점화가 느린 흑색화약의 특성상, 노리쇠 격발과 함께 약실에 채워진 장약이 점화되는 순간 사이에 미묘한 시간 차가 존재하는데다가,[28] 방아쇠에 가해지는 손가락 힘으로 인한 조준선 흐트러짐, 그리고 대구경 소총의 큰 반동과 맞물려 정확한 탄착점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네 번째는 훈련 부족이다. 당시엔 화약이 비싸 사격 훈련을 많이 하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훈련이 필수인 포병들의 무지막지한 양의 화약 소모를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때문에 사격에 숙련된 자들은 따로 편성했고, 전열보병은 한 발도 쏴보지 못한 채로 전투에 투입되는 일이 잦았다. 전투 경험이 쌓이더라도 아비규환 속에서 일제사격을 해야 하니 자신이 맞췄는 지 아닌지도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명중률이 향상되는 건 기대하기 힘들었다. 현대의 소총도 몇 발이라도 쏴보고 말고의 차이가 매우 크니 당시엔 숙련도에 따른 차이가 얼마나 컸을 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한 이유는 머스킷 자체도 당시로선 꽤 비싼 물건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소모품인 화약이었다. 산업혁명 이후에 발전한 화학공학으로 화약을 대량생산하기 전에는 화약은 제법 값비싼 물건이었다. 화약의 중요한 원료인 초석을 유럽에서 확보하려면 별도의 초석밭을 만들어서 채취하거나, 해외에서 구아노나 땅에서 채취하는 질산염을 수입해야 했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결코 적지 않았다. 실전에서 사용할 화약이라면 모를까 평시 사격 훈련을 위해 마구잡이로 사용하기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화약은 물론 부싯돌도 소모품이었고, 생각보다 비싼 물건이기 때문에 훈련 비용이 더욱 부담되었다. 때문에 대규모 육군을 운용한 프랑스 같은 경우 사격술은 50보 안이면 실탄을 처음 쏘는 병력들도 얼추 맞추니 사격보단 총검술과 제식훈련에 더욱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백병전 훈련을 엄청 시키기도 했다. 이는 성과가 있어서 당대에 프랑스군은 백병전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시 총알을 다 쓰고 고지를 점령하느라 지친 상태임에도 프랑스 전열보병 연대가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몰려온 연합군 전열보병들을 총검 돌격으로 쓸어버리기도 했다. 한편 영국은 부유하고, 화약의 원료인 초석을 인도에서 수월하게 수급했으며, 소규모 육군을 운용했기에 보병 개개인의 사격술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실탄 사격 훈련을 자주 할 수 있어서 영국군 보병들은 당대 타국 보병들에 비해 상당히 숙달된 소총수들이었다. 특히 아주 얇은 선형진을 구성, 엄청난 화력을 뱉어내는 ‘씬 레드 라인’이라는 용어는 영국군 보병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나마 명중률은 훈련이나 다른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구조에서 나오는 본질적인 문제는 장전 방식과 속도였다. 우선 전장식 머스킷은 장전 방식은 이러하다.

  • 총을 세로로 세우고 총구에 화약을 넣는다.[29]

  • 탄약을 총구에 끼워넣고 꽂을대를 이용해 탄약을 총열 안으로 깊숙히 쑤셔 넣는다.[30]

  • 총을 가로로 들고 화약 접시를 연 후 화약을 넣고 화약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흔든 후 화약접시를 닫는다.

  • 화승(부싯돌)이 있는 해머를 당긴다.

  • 조준 후 발사한다.

이 과정을 선 채로 중력을 이용해 장전하기에, 은폐, 엄폐를 위해 엎드리거나 누운 채로는 사실상 장전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엎드려 쏘는 자세가 일반 보병 교리에 등장한 것도 후장식소총이 등장한 19세기 이후에서나 가능했다. 저 장전 방식으로 인해서 숙련된 사수가 아무리 빨리 장전한다 하더라도 머스킷의 발사 속도는 훈련상황과 같은 최적의 조건에서조차 1분에 3발이 한계였다. 조지 워싱턴은 모든 신병이 15초에 1발 사격할 수 있도록 훈련하라고 요구했었는데, 바꿔 말하면 1분에 4발만 쏠 수 있어도 당시 기준으로는 최정예라는 뜻이다.


게다가 머스킷은 방아쇠를 당긴다고 반드시 격발된다는 보장이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습기찬 날씨일 경우 화승 또는 부싯돌과 화약이 습기를 머금으면서 불발로 이어진다. 위 동영상에서는 '탄약과 총을 현대 기술로 재현'하고 '전문가가 올바른 절차를 거쳐서' 사격을 하는데도 날씨 때문에 계속 불발이 나온다. 미리 부싯돌도 미리 닦아왔음에도 그렇다. 하물며 당대의 열악한 기술로 만든 화약과 머스킷을 훈련이 충분치 않은 징집병 사수가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다룬다면 불발율은 당연히 더욱 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명중률도, 재장전 속도도 형편없고 장전방식으로 인해 은엄폐도 매우 제한되는데 가랑비에 옷 젖는 게 무서워서 산개해서 배치한다면 방진을 짤 수가 없어 적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해 각개격파되어 모조리 패주해 버린다. 총이라는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개념에 영향을 받다보니 당시의 전장환경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병의 진형이 산개로 바뀌는것은 기관총이나 고폭탄 등의 대량 살상 무기가 개발되는 기술적 발전이 더 일어나야 가능했던 일이다. 군대는 군체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복잡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적이 돌격했을때 거리를 벌리라 하고 싶어도 분위기를 타 그대로 패주하는 병사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그렇다고 맞서 싸우자니 그저 각개격파될 뿐이었다. 마법같이 이게 가능하더라도 체력소모만 상대보다 더 크게하고 금방 따라잡힌다. 사격전보다 사격전 막바지에 한쪽의 돌격으로 시작되는 육탄전으로 인한 소모가 훨씬 빠르게 일어났고 이를 근거로 프랑스나 러시아는 총 들고 돌격 훈련만 죽어라 하게 되었다. 대기병이 아닌 보병간의 맞사격전은 상대가 사격을 견디다 못해 먼저 돌격하다 지쳐 백병전을 유리하게 치르거나, 거꾸로 돌격 전 적의 머릿수를 줄이고 대형을 흐트려 성공적으로 돌파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 이게 불가능한 숲, 강가같이 돌격으로 백병전을 강요하기 불가능하거나 힘든 곳에선 사격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 경보병을 배치해 산개전술을 펼쳤다.

물론 그 당시에도 화포는 존재했고,[31] 현대전에서도 그렇듯 밀집진형은 포병의 공격에는 더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지만, 당시의 대포는 고폭탄이 아닌 쇠 공이나 산탄을 쏘아 화력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쇠공이라는 특성상 높은 확률로 지면에 박히지 않고 도탄되어 직선 상의 적군에게 추가로 피해를 줄 수 있었는데, 지형에 따라 제대로 튀지 않거나 너무 위로 튀기도 했으며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거나 하면 그냥 땅에 박혀 보병에게 보다 더 유리해졌다. 더군다나 머스킷처럼 전장식 형태에 주퇴복좌기도 없었으니 연사력이 분당 2~3발 꼴로 형편없었다. 현대에선 좌표를 찍고 계산을 하여 사격하니 목표에 대한 정밀한 사격이 가능하지만, 당시로선 어느 정도 계산을 하더라도 초탄을 쏴봐야만 명중하는 거리를 제대로 알 수 있었고, 특정 목표, 특히 대포병사격을 위한 정밀사격은 불가능해 적 대열을 노리는 수준이었다. 지금의 포병과는 비슷하면서도 역할의 차이가 컸다. 엄청난 화력과 명중률로 상황에 따라 적의 공세를 포격만으로 돈좌시킬 수도 있을 수준인 현대 포병과는 달리, 적의 방어 진형을 무너뜨려 약점을 만들거나, 적의 방어시설을 포화로 무력화 또는 약화시키거나, 본격적인 회전 전에 적에게 아측이 원하는 곳으로 오지 않으면 안되게 강요하면서도 큰 피해를 입히는 등의 역할이었다. 전열을 좀 얇고 길게 만들기만 해도 선단위의 피해는 많이 줄일 수 있었고, 최소한 산개 대형을 취했다가 돌격에 제대로 걸려서 부대 전체가 와해되는 것보다는 밀집 상태에서 대포를 얻어맞는 게 차라리 견딜만 했다. 물론 이건 지휘관의 입장이고, 일반 병사 입장에서는 개개인의 역량에 기대어 피하거나 방어해볼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운에 따라 대열 속에서 죽어야 하니 이전 시대보다 더 암울했다.

이런 와중 흑색화약 자체가 엄청난 양의 매연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병사들이 두세 번만 일제사격을 주고받아도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짙은 연무가 끼어서 시계(視界)가 제한되기 마련이었다.[32] 즉, 조준사격을 하고 싶어도 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전장 상황 때문에 사격의 효과를 확률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면 단위 일제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 명을 노리는 게 아니라 대강 적 대열을 지향 사격하면 누군가는 맞으니까. 경보병들이나 조선 포수들은 가늠쇠만으로 100m 거리의 표적을 맞추는 소총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보병을 제압할 수 있는 수류탄이 있긴 했지만 현대의 수류탄과는 달리 사용하기가 까다롭고, 위험하며, 무게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투척거리가 매우 짧아 현대의 전투공병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척탄병들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였다. 척탄병 연대들이 정예부대로 취급받은 것도 이렇게 무겁고 사용하기 어렵고, 위험한 수류탄을 다루려면 당연히 신체조건이 좋고, 배짱이 두둑하고,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는 유능한 병사들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작 수류탄은 위험하고 화력이 약한데다 비싸서 정작 수류탄 투척을 하기보단 백병전으로 적을 돌파하거나, 도끼와 망치로 전장 장애물과 포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때문에 척탄병의 약하고 잘 쓰이지도 않는 수류탄이 무섭다고 산개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전열보병과 동 시대에도 산개 대형으로 엄폐한 채 정확한 조준사격을 하는게 주 임무인 경보병은 존재했지만, 이들 역시 엄폐물이나 아군의 엄호가 없는 독자적인 행동은 적병의 먹잇감일 뿐이었다. 산개한 경보병 부대들은 정찰과 교란이 주 임무였고, 회전 이전에 선두에 서서 본대인 전열보병의 움직임을 가리거나 보조하는 정도였다. 고대에도 험한 지형을 이용해 투창을 던지거나 활을 쏘곤 도망가 전력과 사기를 깎아먹는게 한계였고, 현대전에서도 고도로 훈련받은 특수부대원들이 뜨내기 반군들에게 숫적으로 밀려 전멸하는 경우가 많듯이, 경보병들로만 벌이는 전투는 한계가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의 미니트맨들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 역시 숲이나 건물, 담벼락 등 적절한 엄폐물이 없다면 산개하는 대신 전열을 짜고 교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이들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했을 뿐, 전투의 주된 역할은 전열보병인 대륙군이 수행했다.

2.2.2. 병사들의 낮은 사기?[편집]


전쟁사 서적 등에서는 전열보병들이 방진을 이루어 싸운 이유 중의 하나로 군인들의 낮은 사기를 드는 경우가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이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말할 수 없다.

확실히 전근대~근대 초기의 많은 국가에서 병사들의 충성심이나 사기가 영 믿을만하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하고[33] 당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소속감을 일으키는 민족주의가 퍼져있는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다가 과거 18세기 초 유럽 국가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이었다.[34] 그러나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던 이들은 당연히 사기가 그다지 높지 않았고, 이들에게 지형을 이용해 엄폐하도록 산개시켜둔다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라든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지휘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경우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부대가 와해될 가능성이 충분했다.[35] 심지어 당시 장교들은 질이 안좋은 자원들만 모인 자기 휘하의 병사들보다 적국의 장교를 더 신뢰했다고 한다. 유럽 귀족들은 서로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라틴어 또는 프랑스어를 교양어로 썼으므로 언어적 장벽도 크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나 혈연적으로 따지고 들면 자국 백성들보다 적으로 만난 타국의 귀족이 더 가까웠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신뢰했다는 의미는 약속을 어기지 않을 존재로 여겼다는 점이다.

게다가 19세기만 해도 '영국 안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므로, 신분제에서 비롯되는 사관과 병사간의 불신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이 불신 문제는 절대로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쟁 양상이 변화되어 전열보다는 산병전이 더 나은 상황도 곧잘 발생했지만 이 때에도 지휘관들은 계속 전열을 고집했고 산병 상황을 훈련시키지도 않아 많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36][37] 이런 상황에서 전열은 장교가 병들을 통솔하는 데에도 실제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목숨은 누구나 아까운 법이라 강한 전투 욕망이 있는게 아니면 최전선에서 목숨걸고 싸우려 하지 않아 종국엔 아무도 전진을 하지 않는데 전열은 뒤에서 앞사람을 밀며 강제로 전진시켜 싸우게 하고, 후열이 길을 가로막기 때문에 사기를 잃은 전열이 멋대로 패주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병사들의 낮은 사기'는 전열보병이 이루어지게 된 부수적인 원인일 뿐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이 사기는 무기체계가 개인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라이플로 바뀌어 사기가 증전되었다고 평가한다. 19세기 비약적인 군대의 발전은 저 요소와 사회의 변화를 통해 군대에서 충분히 굴릴만한 사람 수가 증가했다는 것이 맞물린 덕분이다. 심리학자 데이브 그로스먼의 저서 <살인의 심리학>에 의하면, 전열보병 시대의 낮은 명중률에는, 장병 개개인의 살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의도적으로 오조준했다는 가설도 언급된다.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이런 경향이 있었다고 하니, 꽤 신빙성 있는 이론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열보병 시대의 유물 중에는 병사가 전투중에 발포를 아예 하지 않고 장전만 계속해서 총구까지 화약/총알/화약/총알이 꽉 들어차 있는 총도 간혹 발견된다.

2.2.3. 전열보병의 싸움은 단순한 소모전인가?[편집]


전열보병의 전투라고 하면, 보통 벌판 한복판에서 양군이 은엄폐도 없이 줄줄이 늘어서서 서로 쏴죽이기만 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다못해 전열보병 이전 시대의 보병은 갑옷과 방패로 공격을 막아보기라도 하고, 이후 시대의 보병은 엄폐물 뒤에 숨어보기라도 하지, 전열보병은 그런 것도 못하고 그저 덧없이 대열 속에서 부품처럼 총알이나 쏘다가 죽어나간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전열보병의 전투도 단순 소모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보병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전장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꼭 그렇지는 않다.

단순한 소모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모전은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아 끊임없는 병력과 물자의 소모가 일어나는 전쟁이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정확힌 적의 물자를 소모시켜 비전투손실, 전투능력 하락 또는 상실을 노리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수많은 양상 중 가장 익숙하고 와닿을 형태는 공성전에서 포위로 식량, 식수를 고갈시키는 것이다. 전열보병이 서로 줄을 세워 총에 맞는 모습이 그 이유를 몰라 우스꽝스러웠는지 단순한 소모전이란 이미지가 생길 수 있으나 고대인들이 단순히 서로 맞부딪혀 먼저 나가떨어지는 쪽이 지는게 아니여서 칸나이 전투를 소모전을 통한 승리라 하지 않듯이, 전열보병의 시대에도 복잡한 전술, 전략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었다.

전열보병간 전투에선 앉아봤자 자기가 맞을 총알을 뒷사람이 맞을 뿐이며, 운에 기대어 적의 사격 직전 엎드려 피하긴 힘든데다, 어차피 장전을 위해 서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대응사격을 하며 백병전 돌입 시기를 재는 것이 최선이었다. 기병들은 주연에선 밀려났다곤 하나 여전히 우수한 백병전 능력과 기동성으로 후사르, 샤쇠르 등 경기병들은 호시탐탐 보병 대열이 흐트러지는 틈을 노리고 있었고, 기회를 포착한 경기병들이 돌격하는걸 창기병이나 중기병들을 출격시켜 카운터 하고, 경보병대들은 지형, 지물과 뛰어난 사격 능력으로 일방적으로 피해를 누적시키며 적을 지연, 저지했으며, 무거운 견인포는 아군의 엄호 속에서 먼 거리의 적을 견제했고, 기마 포병대는 복잡한 난전 중 아군이 고지대를 점령한 순간 재빠르게 이동해 자리를 잡고 적 기병대나 장군을 향해 산탄을 쏘아댔고, 척탄병은 신속하게 돌파해야 하는 곳에 강력한 돌격으로 깨부수려 하였다. 이렇게 많은 병종들의 역할들 중 예시를 한두개만 들어도 단순하다 할 수 없다.

무능한 지휘로 단순한 축차투입으로 패배하거나 무의미한 승리를 가져가기도 했으나 당시의 일반적인 전투 양상이 아닌 지휘능력의 부재가 원인이었다. 로이텐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에서 열세인 상황을 정교한 기만 전술, 작전술로 뒤집는 걸 볼 수 있고 보로디노 전투와 전, 후의 상황에서 어떻게 정확한 의미의 소모전으로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결국 승리했는지 볼 수 있다.

2.3. 전열보병은 돈을 아끼기 위한 것이다?[편집]


돈을 아낀다는 것이 군비의 크기를 줄인다는 뜻이라면, 이는 당연히 틀리다. 하지만 같은 돈으로 더 많은 병력과 더 강한 전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어느정도 일리있는 말이다.

어차피 어딘가에서 아끼면 아낀 만큼 다른 데에 더 쓴다. 돈을 적게 쓰기 위해서라는 주장대로라면 당시 프랑스러시아가 대포에 미친듯이 투자하거나 영국이 함포에 투자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앙집권화와 생떼띠엔, 툴라, 엔필드 같은 조병창 시스템이 확보되고 국가세수의 증대가 이루어 졌다는 것, 그리고 국채를 발행하기 시작한 시대적 상황을 간과한 주장이다.

  1.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인용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는 주장도 있지만 17~19세기 절대왕정 시대의 조병창, 전열보병 시스템과 근세기 용병, 15~16세기 길드가 동일선상에 놓일 수는 없다.#

2. 이미 카알 5세 치하의 스페인 왕국만 해도 후로라는 공채를 발행하여 전비를 조달했을 정도로 16세기 유럽은 국채 발행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아들내미가 재위 기간 중에 4번이나 배째라를 시전해서 문제였지

결국, 전열보병의 발생과 주력화는 당시 무기의 발전과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이지 돈의 유무로 결정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전쟁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징병제를 통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프랑스군의 전례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 다수가 대규모 상비군 체계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십만 단위로 군대의 규모가 증가했다. 이 시절에도 군대는 '숙련된 사수'를 구하거나[38] 키워서 운용해왔다. 이렇듯 당시 군대 역시 경보병의 높은 전투력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열보병이 군대의 주축을 담당하게 만들었다.

100만 가까운 병력을 뽑아내면서 70만을 전선에 동원한 프랑스나 250만의 인구에서 20만의 상비군을 뽑아낸 프로이센의 사례를 보다시피 돈 때문에 전열보병을 운용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1812년 러시아 원정 시기 프랑스 대육군의 전체 대포 숫자가 1만 5천 문이었다. 돈이 문제라면 상비군이나 시민군 같은 근대적 징병제도 역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39]

전열보병의 유지비에 대한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데, 군인의 계급과 역할에 따라 임금은 판이하게 다르고, 일반 시민의 임금 역시 하는 일에 따라서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군인이 받는 돈이 일반 시민이 받는 돈에 비해 얼마나 많았는가를 통상적으로 따지기는 어렵다. 다만 한가지 예시를 들 수 있는데, 7일을 전부 일한다는 조건 안에서 영국군 보병의 경우 당시 도공(도자기 기술자)에 비해 두배정도의 임금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비싸게 보이지만 당시의 군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장비와 식사를 전부 사비로 충당(혹은 임금에서 제하는 형태)했기 때문에 실제로 손에 들어오는 임금은 그보다 더 적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돈을 아낀다는 의미가 더 높은 효용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라면 틀린말은 아니다. 냉병기는 급조된 병력과 오랜기간 신체단련과 군사훈련에 매진한 병력의 차이가 엄청나지만, 전열보병은 훨씬 싸고 빠르게 많은 병력을 적정 수준으로 훈련할 수 있었다.

3. 훈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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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톰슨 作 카트르 브라의 28연대[40]
"전열"에 살고 "전열"에 죽는다. 이는 매우 중요했으며, 전열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해당 연대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과 같았다. 1분 1초가 급박한 전투에서 한번 무너진 대형을 다시 가다듬는 것은 군사를 물리고 재정비하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전열보병은 머스킷의 부족한 제압력을 집단 사격으로 극복하고 화력을 투사했다. 이를 위한 제식훈련을 통한 대형 유지와 행군은 매우 중요하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가혹한 군기와 세뇌에 가까운 훈련이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했다고 전해지는 명언 "제식은 전력이다." 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단순히 머스킷의 화력 투사에만 관련한 것은 아니고, 보병의 생존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제식 훈련이다. 길게 횡대로 늘어선 선형진의 경우 적의 포병 세력으로부터 받는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기병대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고,[41] 보병들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진을 구성한 방진의 경우 기병의 돌격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는 좋았지만 포병들의 사격에는 무력했던데다 대열 또한 좁았으므로 상대적으로 대열이 넓고 더 광범위한 화력을 투사하는 상대 보병의 선형진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 때 즉각 상황에 맞추어 능수능란하게 진형을 바꿀 수 있어야 했고, 이를 실패할 경우 해당 제대의 생존률은 극도로 떨어졌다.

흔히 이 시기 보병 간의 전투를 겨우 100야드(90m) 떨어진 곳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서 포화를 교환한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반적으론 사정거리까지 접근하여 한두 번의 사격 후 적의 전열이 흐트러졌다고 판단한 장교의 명령하에 총검 돌격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 총검 돌격이라고 쉬운게 아니였다 적병이 한두번의 사격에 사기가 떨어져서 전열이 붕괴되었다면야 돌격하는 자세만 잡아도 도망쳤지만 사기가 굳건하거나 지휘관의 카리스마로 전열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면 역으로 돌격자가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대충 100m면 20초 안이면 달려나갈수 있으니까 한두 발만 피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대의 군장도 결코 가벼운건 아니였고,[42] 제대로 다져진 공터가 아닌 지형에서 그 거리를 전력 질주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도 체력적으로는 상당히 힘든 일이다. 당시의 전열보병들이 총알을 퍼붓고 있는 적을 향해 느릿느릿하게 움직인 것은 절대 아니고,[43] 가능한 빠르게 움직이긴 했다. 다만 적어도 2~30m까지 가까워야 전력질주와 함께 총검돌격이 가능했다. 참고로 이런 돌격에 가장 능숙했던 군대는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 제국 근위대였고, 이런 돌격에 가장 잘 대처한 군대는 철저한 실탄 훈련으로 단련된 영국의 레드 코트였다.

그럼 문제는 적의 포화를 병사들이 어떻게 견디느냐인데,[44]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 태형존재했다. 상당히 가혹하여 이로 인해 병사들이 '100% 죽는 항명을 선택하느니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는 전열에 서고 말지' 정도의 수준이었다. 영국군 레드코트들이 겉으로는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형으로 인해 죽거나 불구가 되는 비율도 상당히 많았다. 채찍질 100대 정도는 기본이고 300대, 500대, 900대 형도 존재했으며 최고는 1,200대까지도 가능했다. 1,200대면 중간에 죽을 가능성이 큰데, 원칙적으로는 중간에 죽더라도 시체에 채찍질을 해서 다 채우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시체에까지 채찍질을 하라고 하는 또라이는 굉장히 드물었고, 보통은 채찍질을 할 때 군의관이 옆에 있다 중간 중간 끊고 치료를 하고 휴식도 시켜 안 죽게 잘 조절하면서 댓수를 채웠다고 한다.

이는 공격측 말고도 방어측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화력상으로는 돌격해오는 쪽보다 사격을 지속하는 보병측이 유리하다곤 해도 묵묵히 자신쪽으로 다가오는 적에게 압도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혹독한 훈련으로 장교의 명령에 따르게 훈련을 해야만 돌격해오는 적을 명령에 따라 총알을 계속 퍼부어 돈좌-격퇴시키거나 심지어 공격자의 사기가 가장 낮아지는 걷기에서 뛰기로 전환하기 직전의 순간 역으로 맞돌격을 해서 제압할수 있었기에 철저한 복종 훈련은 공-수 양측에게 매우 중요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전열보병 시대의 체벌은 구 일본군 식의 마구잡이 구타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초급 장교나 부사관들이, 비행을 저지른 병사들의 해당 행위를 기록하고, 이를 함장 혹은 중대장 같은 부대 지휘관에게 보고하여 약식 재판을 열고 결과에 따라 공개적으로 행해졌던 군법상의 형벌이라는 것이다.[45] 그리고 그 시기에는 군대 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훈육'과 '교정'을 위한 태형이 일반적이었으니, 당시 기준으로 정도의 차이가 클지는 몰라도 그 자체가 특별하진 않았으리라고 추정된다.[46]

태형은 국가별 차이도 컸다. 미국의 경우엔 최대 태형 횟수가 100회 수준이었고, 영국군[47] 같은 경우, 하노버 출신 군 장병들로 이루어진 KGL연대는 태형을 시행한 적이 없고, 그 외 일선 부대의 지휘관들은 그로 인한 부작용을 인지하고 있던터라, 어지간하면 태형을 집행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수백개의 나라를 통일해서 만든 봉건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독일 제국군 등에서는 태형이 강력했지만 프랑스군의 경우 프랑스 혁명 이후엔 군 내 태형이 아예 금지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전쟁때는 오로지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으로도 군기가 잘 유지되었다.

또 다른 예외는 러시아인데, 러시아인들은 척박한 환경과 생활수준, 인접국들과의 긴장과 유목민들의 지속적인 침입으로 그 시대에도 마초문화가 강했고, 정교회는 서유럽에선 지성인들에게 끊임없이 비판받아 위상이 꺾인 카톨릭과 달리 비판이 적었고 영향력이 강했다.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차르와 귀족, 장교에 대해 '세금 뜯어가고 그 돈으로 거만 떨면서 명령질이나 하는 놈들'보다 '어쨌든 신이 뜻이 있어 주신 직책이겠지' 하는 경향이 더 컸다. 종교를 떠나서도 농노제와 무자비한 통치로 인해 감히 불복하면 안되는 막강한 자들이란 인식이 있었으며, 민족주의와 동방정교 신앙이 결합한 모습 또한 보였다. 전쟁을 겪어본 세대가 없는 경우엔 엄벌을 통한 강제적인 군기 유지와 똥군기가 심했지만 이런 이유로 참전자들이 있는 경우엔 분위기가 매우 완화되었다. 전우애와 신앙심을 중심으로 단합하여야만 생존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잔인하거나 불공정한 처벌과 불합리한 똥군기는 이를 해치는, 자살행위일 뿐인 것으로 여겼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사기가 높고 탈영률도 낮았다.[48] 이는 적백내전 당시 정규군으로 그저 임무에 충실하다 졸지에 역적들이 되어버린 백군들까지 이어지다가, 적백내전이 끝나 백군 병사들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숙청되고 종교탄압이 진행될 동안 이런 경향이 약해졌다. 그러다 모스크바 공방전 때 스탈린이 다급함에 사기진작을 위해 종교적 호소를 시작했고,[49] 이후 정교회의 존립이 인정되고 탄압도 점차 줄었다. 지금도 장병들에게 축복을 해주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50] 그리고 러시아는 스웨덴을 제외하면 대체로 반란군이나 중앙아시아 칸국들이 적들이었기에 전열보병보다는 경보병 경기병들이 산개 진형으로 싸우는 일이 잦았다. 다만 프랑스 혁명의 시대가 오면서 이런 장점도 소멸된다.

기타 내용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표준 화기였던 플린트락 머스킷의 경우 지금 가격으로 따지면 개당 100만원을 호가했다. 2022년 현재 한국군의 제식 소총인 K2 소총의 납품가는 처음 생산된 80년대에 30만원[51][52] 정도다.

한편 전열보병들은, 전투중 머스킷이 불발될 경우의 응급 대처 요령 또한 훈련받았으며, 모든 절차를 밟았음에도 발사가 불가능한 경우, 소대장의 허가를 받고 전열 이탈도 허용되었다. 물론 그러기 전에 보통 죽거나 다친 동료의 머스킷을 이어받는다. 다만 전황에 따라서는 그러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벌어진 전역에서 총을 쏘지 않는 병사에게 마르몽 원수가 이유를 묻자 "쏘는 방법만 알면 쏘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부사관들의 주 업무 중 하나는 부상자와 전사자의 머스킷을 회수하여, 이를 사격 도중 머스킷이 고장났다고 보고하는 이들에게 교체해주는 것이었다.

4. 장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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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기 프랑스군 전열보병의 복장과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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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기에 프랑스군이 사용한 샤를빌 머스켓.

  • 총 :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 전열보병의 제식화기는 브라운 베스, 경보병은 베이커 라이플을 사용하였는데, 제식화기인 브라운 베스는 총 무게 10.5파운드/4.8kg로 오늘날 돌격소총보다 2kg 가량 더 무거운 편이었다. 그나마 그당시 가벼운 축에 속하였던 베이커 라이플역시 9파운드/4.0kg으로 당시에나 가벼웠지 오늘날 기준으로는 꽤 무거운 편에 속한다. 혁명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 이후까지 프랑스 전열보병은 샤를빌 머스켓을 사용하였는데 영국군과 달리 생산규격이 일정치 않지만 대략 10파운드 내외로 4.53kg에 달하였다. 이들 총들은 대체로 길이 1.5미터 내외에 대검을 꽂을 경우 1.9m에 달하는 길이를 자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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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빌 머스켓의 총검.

  • 총검 :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m1777을 두고 이야기하면, 총신에 바깥에 꼽아 쓰는 소켓형에 총길이가 보통 46-47cm, 무게는 320g 정도였다. 공병이나 경보병들은 총에 꼽지 않아도 독자적으로 쓸 수 있을만한 형태의 총검을 사용하였지만, 보통 전열보병들이 쓰는 총검은 가시와 같이 끝부분만 뾰족하고 베거나 치기에는 부적합한, 찌르기에 유리한 형태가 많았다.

  • 도검 : 보병장교나, 전열보병 중에서도 정예로 취급되었던 척탄병은 총검외에도 보병용 세이버를 패용하기도 했다.

  • 가방과 배낭 등의 군장 : 보통 군장으로는 가죽으로 된 가방을 등뒤로 매고다녔고, 내용물로는 옷과 담요, 빵이나 말린 고기, 와인과 같은 것을 전투식량으로 넣었고, 담배등의 기호식품도 넣고 다녔다. 총중량은 가방의 내용물 양에 따라 20 ~ 30kg 즈음 되었는데, 이는 군복과 총을 제외한 무게다. 대한민국 육군이 규정한 완전군장의 무게가 개정전 48.7kg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것보다는 매우 가볍지만, 복장의 활동성이 현대군에 비해 크게 떨어졌고, 총기의 무게도 2kg가량 더 무거운데다 신발도 현대의 전투화에 비해 활동성이 떨어지는 구두부츠였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 게다가 이시대 전열보병은 전투시에 가방을 풀어놓고 싸우는 것이 군규정상 허용되지 않아(경보병은 가능) 군장을 그대로 등에 메고 싸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 신발 : 각국이나 병과마다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운동화가 개발되기 전의 시대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가죽구두와 장화를 주로 신었다. 장화 및 부츠도 세분화되어 발목까지 오는 것, 무릎까지 오는 것등으로 다양하다. 당시의 전투화는 대량생산을 위해 민간용과 달리 좌우 구분이 없고 끈을 꿰는 구멍도 금속 링으로 덧대놓지 않아서 내구도가 몹시 낮았기에 전장에서는 약탈품 1순위였고 그나마도 못 구해서 장기전이 되면 맨발로 싸우는 불쌍한 병사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4.1. 각국의 군복[편집]


전열보병 시대의 군복은 위장이 아닌 아군 구별과[53] 사기 증진이[54] 목표이기에 당시 유럽 군사들은 다들 각자 색깔을 정해서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군복에다가 가슴에 하얀 X자로 차려 입은 건 우리가 여기 있다는 의미로, 적에게 위치를 광고하는 게 아니라 흑색화약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서 지휘관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아군이 적군과 구별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현대와는 반대로 각이 잘 잡히고 발색이 선명해야 생존율이 올라가는 셈이기 때문에, 이 당시 병사들은 A급 군복은 군장속에 고이 넣어두고 훈련시나 행군시에는 너덜너덜한 폐기 직전의 군복이나 아예 헐렁한 사제 작업복을 입고 오직 전투 당일에만 멀끔한 군복으로 차려입었다. 매체에서는 선명한 원색의 군복을 칼같이 맞춰 입는 모습만 주로 나오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조금 세부적으로 그 시대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생활양식이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기도 한다. 영국에서 방영하던 샤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4.1.1. 영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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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레드 코트, 비칭 랍스터. 이 분야에서는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름대로 제복은 붉은색 계열. 왜 붉은색을 채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당시 붉은색 염료가 가장 가격이 쌌기 때문[55]이라는 설과 붉은색이 피를 가려주기 때문이라는 설, 영국의 전통적인 상징색이 붉은색이었기 때문에 채용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모든 영국군이 붉은색을 입은 것은 아니고, 해군과 특수 병과는 파랑, 경보병은 녹갈색을 입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mblsrf91oY1reos8uo1_1280.jpg 출처
영국 경보병. 단, 모든 경보병이 이런 녹갈색 제복을 입은 것은 아니며 레드 코트를 입은 경우도 많았다. 저 녹색 제복은 경보병 중에서도 라이플 연대만 입었다. 일반적인 머스킷이 아니라 강선이 파인 베이커 라이플[56]로 무장했고 전열을 이루어 싸우기보다 산개대형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흔히 그린 재킷이라고 불렸고 정예병 취급을 받았다. 샤프 시리즈의 샤프 대령의 제복을 보면 이 제복이다. 원래 제95 라이플 연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려 91m에서 274m에 달하는 교전거리를 자랑했고 나폴레옹 전쟁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는 토머스 플렁켓이라는 병사가 730m에 달하는 거리에서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리 프랑수아 콜베르 샤바네 장군을 저격하는데에 성공했다. 당시 전열보병들이 쓰던 활강식 머스킷이 200m 밖에서 명중을 보장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상기하자. 이렇게 뛰어난 명중률이 보장되었으니 밀집대형보다 산개대형을 선호한 것이고 허용된 것이다. 일반적인 전열보병의 총검과는 달리 24인치짜리 대형 총검이 지급되었는데 라이플이 일반적인 머스킷보다 짧을 뿐더러 워낙 재장전이 늦다보니 자위용 무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즘 미군 보병들이 권총을 따로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단 이 총검은 일반 전열보병들의 총검과는 달리 단독으로도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상 총에 끼울 수 있는 숏소드 정도의 물건을 따로 들고 다닌 셈. 일반적인 머스킷에 장착하는 총검은 단독으로 쓰기엔 좀 어려운 소켓식 총검인 경우가 많았다.


4.1.2. 프랑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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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당시 대육군 병사들. 프랑스 역시 파랑의 군복을 착용했으나, 프로이센의 그것보단 훨씬 선명한 푸른색을 사용했다. 좌측부터 도약병 및 유격병(Voltigeur), 전열보병인 소총병(Fusilier), 정예 전열보병인 척탄병(Grenadier), 뒤에 깨알같이 선 2명의 스위스 보병(Suisse) 앞치마를 입고 도끼를 든 공병(Sapeur, 영어의 Sapper를 생각하면 된다.), 북을 든 척탄병 고수다. 이 외에도 프랑스 제국 근위대 문서를 참고하면 당대 프랑스 전열보병의 모습을 좀 더 볼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프랑스군 전열보병은 부르봉 왕가의 상징색인 백색 군복을 입었다. 하지만 부대마다 군복의 색이 다르다. 이를테면 위의 퐁트누아 전투의 프랑스군은 파란(King's blue라고 한다, 부르봉 전에 카페 왕가의 색은 전통적으로 파란색이었다.) 군복을 입고있는 Garde francaise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군 내 스위스인 부대의 경우는 스위스의 상징인 붉은 색 군복을 입었다.


4.1.3. 황제군, 오스트리아 제국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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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폴레옹 전쟁 초기 전열보병의 모습으로, 이 당시에는 그림에 나온 것과 같이 헬멧을 착용하였으나, 1808년의 군제개혁 이후에는 샤코를 착용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흰색의 군복을 착용해서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작센스페인, 상술된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왕국, 나폴레옹 휘하의 이탈리아 출신 보병들도 흰 색의 군복을 착용한 것을 보면 그리 특이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부대 지휘관을 비롯한 하급 통솔장교들은 검정색 코트에 금빛 복대를 착용했기 때문에 유독 장교가 눈에 띄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작센군의 경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 측에서 싸웠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대로 작센군이 회색 군복을 입었는데, 문제는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리고 시꺼먼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서 흰색과 회색을 분간하기 어려웠다는 점. 결국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아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 양측에게 사격을 여러 번 당해서 전열을 무너뜨리고 패주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군과 싸우다가 수적으로 밀려 프랑스군 쪽으로 퇴각했더니 프랑스군이 작센군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하고 신나게 쏴제꼈던 것. 게다가 뒤에서는 진짜 오스트리아군이 추격하며 역시 신나게 쏴제끼고 있었다.

즉 프랑스군도 작센군을 아군으로 쓸 생각이 있었다면 자기네 푸른 제복을 줬어야 했다. 군복의 통일과 제식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부분. 물론 50만이 넘는 자국 군대에도 복장 지급하기 벅찼던 만큼 동맹군에게 물자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겠지만 반대로 영국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포르투갈 보병에게 영국 군복을 입혀줬으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이후에도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에까지 피복이나 물자를 팍팍 지원해준 사례가 있다. 자국의 경제력과 공업능력이 전황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였다.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을 적에도 당시 동맹군이었던 스위스군이 붉은색 군복을 입고있었던 까닭에 종종 프랑스군이 영국군으로 착각하여 오인사격한 경우도 발생하였다.


4.1.4. 프로이센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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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후반기 프로이센군의 모습. 프로이센은 주로 파랑/진녹색 계열의 군복을 착용했다고 한다. 프로이센 블라우가 여기다가 쓰려고 나온 색.[57] 사진에서 Musketiere('머스킷총병'의 복수형)로 쓰인 보병들이 전열보병. 나폴레옹 전쟁 중반부의 군제개혁 이전에는 이각모(bicorn hat)를 착용했었다.


4.1.5. 러시아 제국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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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방전쟁기 러시아군.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한 군복이며 최대한 서유럽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초록색 코트와 붉은 바지가 특징으로, 붉은 바지는 곧 폐지되었지만 초록색 코트는 나폴레옹 전쟁기까지 남아서 제정 러시아군의 상징과도 같은 진녹색의 군복 색(러시안 그린)[58]이 되었다. 이 러시아군 군복의 통칭으로 ‘그린 코트’ 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영국의 레드 코트만큼 널리 통용되지는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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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기 러시아군. 이각모를 샤코 모자로 바꾸는 등 다른 나폴레옹 전쟁기 군복들과 크게 다르진 않다.[59]


4.1.6. 스웨덴 제국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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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제국 전열보병대를 재연한 시가 행진 행사. 스웨덴군 병사들은 국기 색인 황금색과 푸른색으로 어우러진 군복을 입었다. 자세한 것은 카롤리너 문서도 참조.

4.1.7. 미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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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시기의 대륙군 전열보병대의 모습. 13개 식민지도 영국군에 맞서기 위해 미군의 근간이 되는 군대인 대륙군(Continetal army)을 13개 식민지에서 자원병력을 모집해 창설하였다. 다른 군대들에 비해 상당히 늦게 창설된 군대인 만큼 복식과 군장 양식에서 타국의 것, 특히 프랑스군을 많이 참고하였으며, 주 연대마다 복식과 군모가 달랐다. 주 장비로서는 초기에는 영국제 브라운 베스를 사용하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샤를빌 머스킷으로 대체했고 켄터키 롱 라이플을 저격용으로 민병대와 함께 사용했다.

1812년 전쟁에서는 독립전쟁 때 쓰던 트리코른 대신 샤코로 군모를 바꾸었으며 복제가 단일화되었다. 주 장비로서는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모델 1795나 모델 1812 머스킷을 사용하였다.

미합중국 대륙군의 계급장


4.1.8. 오스만 제국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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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클라바 전투당시 오스만군 전열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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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 당시 오스만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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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오스만-그리스 전쟁 당시 전열보병의 모습.

본래 오스만 제국군에는 전열보병의 개념이 없었다. 초기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경기병 위주의 전술이 성행했으니 그렇다 쳐도,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유럽영토에서 징집한 보병들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오스만 제국은 서구 군사전술의 도입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방식대로 머스킷조차도 화망 형성이 아닌 조준사격 위주로 활용해 왔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과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쓴맛을 본 이후, 그리고 니자므 제디드 등의 서구식 군제 개혁에 매우 저항이 심했던 예니체리가 혁파되고 나서 이루어진 탄지마트 이후 오스만 군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영향을 받아 전열전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보다시피 상당히 늦은 시기의 일이다. 남들은 뇌관식 소총에 연발소총에 관심 쏟는 마당에 이제서야 전열전술이라니. 하지만 후기 오스만 제국이 상대했던 나라들이 다행스럽게도 오스만 제국과 비교했을 때 전술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우위에 선 나라가 없어서 후기 오스만 군대의 전열보병 전술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발칸 전쟁 직전까지(무려 20세기다!) 군복 개혁도 안 한 채 전열전술을 고집하다가 피를 보게 된다.

오스만 전열보병의 복식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남청색 군복을 입었으며 여기에 탄지마트 개혁 이후 착용하기 시작한 페스 모자를 썼다. 출신 지역에 따라 복식이 다른데, 아랍 징집병들은 주아브 부대처럼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었고, 알바니아, 북부 그리스, 발칸 징집병들은 푸스타넬라(Φουστανέλα)라는 치마 비슷한 옷을 입은 게 특징이다.


4.1.9. 일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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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또한 근대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전열보병 전술이 같이 들어왔는데, 1834년 사가번에서 네덜란드 군제를 연구하다 최초로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60] 신식 막부육군을 비롯하여 개항 이후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신무기 등과 함께 1870년대까지 전열보병 전술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막부가 전열보병을 운용하던 시기의 유럽에선 이미 전열보병 전술은 쇠퇴하는 전술이었으며 병력의 질도 한계가 있었기에 큰 효과는 보지 못했지만, 어찌되었건 무진전쟁까지 전열전술은 계속해서 사용되었으며 산개 전술을 이용하는 경보병 또한 운용되었다. 특기할 만한 점으론 초기에는 일본 특유의 삿갓모나 털모 등을 군모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후에는 서양식 군모로 차차 변경되었다.


5. 군수 및 생활[편집]


  • 프랑스 :프랑스 보병의 경우 야전 천막이 별도로 지급되었으나, 그리 인기가 많지 않아 주변사물이나 가옥, 폐자재들을 모아서 만든 임시숙영지를 선호했다.
  • 영국 :
  • 러시아 :
  • 오스트리아
  • 미국: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야전 천막이 독립전쟁 시기부터 별도로 지급되었으며, 대륙군 시절부터 인원 규모가 많았던 미군답게 주로 야전지휘소나 야전병원, 숙영 시설 등으로 사용되었고 보통 전투 때는 참호에서 지내는 편이었다.

6. 쇠퇴와 유산[편집]


위에서 서술했던 내용을 정리하면, 1) 밀집대형을 짜도 적의 사격에 의한 피해가 견딜만 했으며 2) 산개하면 근접전이 걸렸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점 때문에 전열보병은 당대 최선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총포와 폭탄의 발전으로 인해 밀집대형을 짠 적이 근접전을 시도하기도 전에 적진을 걸레짝으로 만들 수 있는 화력이 확보되었다. 여기에 기술과 공업의 발전과 사회 변화가 얽히고 섥히며,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을 만들어낸 각 요인들은 하나하나 제거되기 시작한다.

우선 무연화약의 개발로 가스압이 크게 높아지고 매연이 거의 없어 시야를 가리지 않고, 총기가 복잡한 내부구조를 가질 수 있게 하고, 정비에 큰 도움이 되면서 극한의 상황에서도 불발률을 낮추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탄은 뇌관탄피의 발전으로 신뢰성과 장전속도가 점점 높아지고 좀더 공기역학에 충실한 탄환들이 개발되며 명중률도 증대되어 총기 성능은 점차 상향평준화 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속에 총기는 공업능력의 발전에 힘입어 강선소총의 보급량이 점점 늘어나다 표준이 되었으며, 장전 및 사격자세의 제약이 없는 후미장전식 소총이 화약과 탄의 발전에 힘입어 발전하여 연사속도가 차츰 빨라지고 현대적인 수동노리쇠 소총에 가까워진다. 여기에 1861년 개발된 개틀링 기관총은 연사력의 화룡점정을 찍기에 이르고 엄폐물도 없이 수많은 병사를 당당하게 노출시키다간 전부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만 할터, 소모적인 대형에 불과하다는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전열보병의 전성은 총기의 연사력과 역비례하고 말았던 것.

포 또한 발전을 거듭하여 특히 고폭탄의 보편화로 포병의 살상력이 치명적인 수준이 되어 밀집대형은 자살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사관학교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널리 퍼져 상비군이 생기고 대량생산을 통해 이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고 높은 강도로 훈련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병사들과 장교들의 수준과 사기가 높아져 더욱 정교한 전략 및 전술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의학과 야전병원 체계도 발전하여 다쳐도 일부는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다시 복귀할 수 있었으며, 사지가 잘려서라도 살 수는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사기에 도움이 되었다. 지휘통제는 무연화약, 광학장비, 전기통신의 발전으로 더욱 수월해지고 특히 통신의 발달이 포병의 수월한 간접사격을 가능케 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여 19세기 중반에도 산개 대형이 효율적이라는 전훈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고, 19세기 후반에선 보기 힘들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전열보병식 일명 ′라인배틀′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사라졌다고 알고 있지만 서술했듯 이미 그 이전부터 사라진 전술이다. 전열보병식 밀집대형 전투가 마지막으로 활약한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크림 전쟁[61]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시작으로 산개 돌격전술과 참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보불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도 참호와 산개 돌격을 하는 형태를 보였다. 이와같은 전술적 형태는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러서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62]

전열보병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있는 제식이 바로 18세기 전열보병을 운용할 때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63] '훈련' 타이틀에서도 설명이 되었다시피 전열보병의 대형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일렬로 길게 늘어선 보병들을 지휘관이 자유자재로 바꿔야 하는데, 그에 따른 강도높은 훈련은 필수다. 네명이 일렬로 동시에 회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64] 수 킬로미터를 일렬로 대형을 유지하면서 이동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측면을 치는 적 보병이나 기병에 맞서 대형을 회전시켜야 하는데 이때 100명이 넘는 보병의 대형을 유지한 상태로 회전시켜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대형을 유지한 상태로 각각 전장에 일어나는 상황에 맞추어 전열보병의 대형이 빠르게 이동과 후퇴, 방진을 구성하는 능력 등이 필요했다. 이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 행했던 훈련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오늘날 의장대가 하고 있는 제식도 유럽의 전열보병 제식훈련이 내려져 온 것이며 영국군 근위대의 경우 행진이나 경계근무가 18세기 당시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이 유지 중이다. 하지만 현재 이 제식은 의장대가 아니면 점점 간소화되고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전열보병 특유의 각 잡힌 멋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인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제식을 통한 집단행동은 소속부대원간의 유대감과 부대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며, 훈련병에게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버릇을 몸에 익혀줄 수 있다. 그래서 총알을 한 탄창에 30발씩 넣으면서 1초에 12발씩 쏟아내는 돌격소총이 판치는 오늘날에도[65] 군대의 열병식이나 '받들어 총'으로 대표되는 제식동작, 그리고 군대의 예식이 있을 때 입는 정복 및 예복 등에 전열보병 시대의 흔적이 면면이 남아 있다.

전열보병과 이에 영향을 받은 화려한 복장의 1차 세계대전 까지 20세기 초 군인 복장과 무기, 제식, 병과들은 그 화려한 면모 때문에 인기가 많아서 현대에도 리인액트먼트 행사등에 굉장히 많이 재현되기도 하고 보드 게임, 비디오 게임 등에서도 인기가 많다.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남북전쟁(미국내전), 벨 에포크 같은 서구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적 로망이 있있는 것이다. 비단 현대만의 로망은 아니고 1차대전이 끝나고 옛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 같은 곳들에서는 화려하고 멋진 복장을 입은 옛 제국의 군인들을 다시 못보게 되는건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7. 외부 링크[편집]


18세기 전열보병은 어떻게 싸웠는가? ㅡ 1부
18세기 전열보병은 어떻게 싸웠는가? ㅡ 2부
미국 독립전쟁기의 오해와 운용
나폴레옹 시대 보병 전술
나폴레옹 시대 보병 전술 2
나폴레옹 시대 경보병 전술
전열보병시대 사격방법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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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패트리어트[2] 영화 전쟁과 평화(1967). 포탄이 쏟아져 아군이 죽어나가는데도 아무렇지 않은듯이 평온하게 전진하는 모습이 섬뜩하다. 장면 말미엔 러시아식 우라 돌격 또한 묘사되어 있다.[3] 부대 단위로 부를 때에는 Infantry를 생략하고 'Line company(전열중대'), 'Line battalion(전열대대)'라는 식으로도 부른다.[4] 실제 16세기 사코 디 로마 당시 신성로마제국군 지휘관인 샤를 3세가 화승총에 저격당해 전사했다. 활강총은 강선총에 비해 훨씬 저열한 정밀성을 가지지만, 하루종일 사냥다니는 게 일인 포수들이 쓰기엔 충분했다. 이후 기관총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전문 포수들이 저격수로서 유격전을 뛴다는 개념은 명맥을 이어갔고, 이것이 소위 말하는 예거샤쇠르같은 명칭이 정예병의 상징이 된 이유 중 하나다.[5] 머스킷보다 가벼운 아르퀘부스라면 막대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쏴 볼만했지만 이건 크기가 작은 만큼 충격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고, 머스킷보다 가벼워봐야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6] 전열보병이 나오는 게임에서 전열보병 말고 궁사도 있는 경우, 궁사가 아무리 성능이 좋아봐야 결국 냉병기의 한계가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7] 동로마 제국이 굉장히 오랫동안 차마 투창을 버릴 수 없어 베르툼이라는 다트인 척 하는 투창의 소형화 버전을 운용한 것엔 다 이유가 있다.[8] 당대인들도 전쟁의 변화가 마치 고대 보병전 원리의 반복과 같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르네상스에 들어서 파이크가 부활한 것은 마케도니아식 장창 팔랑크스의 부활로 여겨젔으며, 마우리츠는 자신의 전술을 로마의 마니폴라에서 착안한 것이라 하기도 했다. 르네상스의 파이크전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풀 플레이트 아머 같은 더욱 진보된 갑옷과 더욱 무자비한 규율에 근거한 조직력으로 강화해 더욱 공격적으로 운용한 것과 다름 없었고, 마우리츠식 선형 진법은 고전적 단창 팔랑크스, 장창 팔랑크스 방진과, 기병 전력이란 강적을 투창과 유동성 높은 진형을 통한 기동력 강화로 극복했던 레기온의 진법의 조금 불완전한 재창조와 다름 없었다.[9] 장자 독식 체제에서 차남, 삼남들이 출세할 방법은 군 경력 말곤 마땅치 않았고, 삼총사는 바로 이 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귀족이라 하더라도 장자를 빼면 가문의 지원을 크게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장자라 하더라도 가문이 부유하지 못하면 비싼 말이 필요한 기병대가 되긴 무리였으니 남는 것은 그나마 정예 병력으로 취급되는 총사가 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총사대의 상당수를 귀족 자제들이 구성하게 된다.[10] 총알이 총열에 꼭 맞물릴수록 정확도가 올라가는데, 전장식 소총들은 탄약을 총구로 쑤셔넣어서 장전을 해야 한다. 그래서 탄약이 총열보다 미세하게 크면 명중률은 좋은 대신 장전이 힘들었고, 탄약이 작으면 명중률이 떨어지는 대신 장전이 쉬웠다.[11] 가죽을 덧대서 포신을 보강함으로써 포신을 더 얇게 주조할 수 있게 만든 대포다. 물론 내구성이 개판나긴 마찬가지로 나중에는 가죽포 운용도 버려지게 된다.[12] 팔랑크스 -> 파이크 -> 레기온[13] 구체적으로 누가 처음 전장에서 총검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총검이 주류로 올라선 것은 남부 프랑스 어딘가로부터 전파되면서 부터이다. 총검의 이름인 Bayonet은 Bayonne라는 어떤 지역의 반군들에게서 따온 이름이지만 진짜로 여기서 처음 전장에 등판 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4] 물론 적이 달려들어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용기를 주입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만...[15] 멀리 갈 것도 없이 1차 대전의 참호전은 현대의 기준으로는 뚫을 방법이 많아 별 것 아니기에 미개해 보이지만 탱크도 없고 공군도 없던 시절인 당시에는 뚫는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강요하는 전술이었기에 전쟁터가 참호 투성이로 그어졌고, 2차 대전의 대규모 폭격은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나와 지금은 미개해 보이는 전술이라 현대에는 초정밀 폭격으로 대체 되었지만, 2차 대전때에도 정밀 폭격을 시도했으나 기술력 문제로 성과가 나오지 않았고, 이에 융단 폭격으로 전환한 도쿄 대공습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16] 심지어 현대에도 전술이 아닌 전략 단위로 가면 아직까지도 이 진형 싸움 개념은 매우 유효한 현재진행형이다.[17] 서로 쌈박질 하느라 전쟁에 일가견 있다던 일본마저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 이전에는 주먹구구식 싸움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졌었다.[18] 영국군이 아편전쟁에서 세포이를 주력으로 쓴 이유는 영국 본토보다 중국과 훨씬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인도에 주둔한 연대들을 차출했기 때문이다.[19] 물론 이 시대까지 오고 나면 칼뿐만 아니라 총 자체도 근접전 위협을 내기 충분한 무기가 되었다. 가까이 있으면 더 쉽고 빠르게 쏴 죽이니까.[20] 2차 세계대전에 가서도 살아남은 괴상한 탄젠트 조준기는 바로 이런 보병 사격 운용법의 흔적이다.[21] 동시대의 스페인의 필리핀 마닐라 총독 프란시스코 데 산데(Francisco de Sande)는 명나라 정벌 계획을 펠리페 2세에게 청원하면서 명나라는 소수의 왜구에게 대도시를 뺏기는 등 형편없고 명나라의 화승총의 성능과 사격술이 조악하고 형편 없음을 근거로 정벌을 주장하기도 했다.[22] 근대 경기병 전술이론이 확립된 18세기 중반부터 미국 남북전쟁 전까지, 기병총의 주된 용도는 말에서 내린 채 보초를 서거나 징발(약탈)을 할 때의 호신무기였다. 야전에서 같은 기병을 상대할 경우, 증언에 따르면 "50보 밖에서의 권총 사격은 잘 던진 돌멩이보다 나은 게 없으며, 50보 안에서는 권총을 쏘자마자 바로 던져버리지 않으면 칼을 뽑기도 전에 머리에 칼이 박힐 것이다." 선제공격의 이점마저 화약연기에 시야가 가려지고 청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백병전에 휘말리게 됨으로써 상쇄된다. (Berenhorst, G.H., Betrachtungen über die Kriegskunst, 3 vols.)[23] 물론 머스킷의 특성에 익숙치 않으면 스톰트루퍼 효과를 연출하였지만, 현대식 소총들도 영점 조준 제대로 안 하면 못 맞히는 건 같다. 신병 입대 후 사격주간에 그렇게 열심히 영점 조준을 시키는 이유를 알면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24] 기록에 따르면 사격 클럽에서는 200m 에서 280m까지도 화승식 머스킷으로 명중시켰다고 한다. 강선식 소총은 맞히기 너무 쉬워서 금지시켰다고 한다.[25] 선조실록 61권, 선조 28년(1595년) 3월 23일 병신 2번째 기사. "포수(砲手)와 사수(射手)를 각각 30, 40명이나 혹은 40, 50명을 정밀하게 가려 뽑으라. 포수는 세 자루의 조총(鳥銃)으로 3순(巡)하고 사수는 세 개의 편전(片箭)으로 3순한다. 과녁(貫革)을 백 보(百步) 밖에 세우되, 관중(貫中)한 자는 30분(分)이고 변(邊)은 15분으로 한다. 포수와 사수를 짝지워 재주를 겨루게 하여 승부를 내고, (중략) 시험이 끝나거든 아울러 서계할 것을 훈련 도감에 말하라." 순은 화살을 세는 단위로, 조총 도입이후 총알을 셀때도 쓰였다. 5발을 1순이라고 하니 3순을 쏘았다는 건 15발을 쏘았다는 것, 백보 밖에서 15발 안에 과녁 중앙을 맞추는 사람을 30~40명씩 수십번 뽑아 부대를 만들어 내었으니, 조총의 명중률이 그리 낮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26] 장전 자체가 힘든 편은 아니다.[27] 활강식 머스킷의 직계후손이라 할 수 있는 현대의 산탄총도 기본적으로 가늠쇠만 갖춘 채 생산된다.[28] 이 때문에 나온게 퍼커션 캡이다.[29] 초기에는 화약 주머니를 따로 가지고 다녔고, 나중에는 기름종이로 탄과 화약을 한꺼번에 싸서 화약 조절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 했다. 종이를 뜯어 화약을 붓고 탄을 집어넣는 방식이다.[30] 상황에 따라 생략이 가능하다. 물론, 당시 군대 교범에는 이런 걸 수록하진 않았고, 최전선의 병사들 사이에서 장전시간을 줄이기 위해 퍼진 야매 장전법이었다.[31]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총 자체가 개인용으로 크기를 줄인 화포로부터 발전한 개념이다.[32] 이는 이 시대의 군복들이 왜 색이 튀고 화려했는지를 뒷받침하는 주장이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색이 튀고 화려해야 아군의 위치를 파악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이다.[33] 이 둘은 13세기부터 영토국가 개념이 자리잡고 원시적인 내셔널리즘이 생겨나 있었다. 다른 국가에서도 근대적인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생겨난 것은 18세기 말엽 프랑스 혁명기의 프랑스에서 최초로 국민국가 즉 네이션의 개념이 정의된 이후의 일이었다.[34] 당시 하층민에게 출세하는 유일하다시피한 길이 바로 입대였고, 시간이 지나 장교가 되는 것만이 하층민으로서 할 수 있는 출세였다.[35] 현대의 군대도 이 점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국가의 통제력이나 민족주의 등 현대의 국가들과 이 시대 국가들과는 환경이 전혀 다르다. 당대 탈영율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용병이나 가난한 하층민들로만 구성된 정도면 그래도 자질이 양호한 수준이고, 심한 경우 주정뱅이나 부랑자등의 막장인생에다 죄인들까지 형벌 대신 입대시켜 굴릴 정도였으니 각종 사건사고나 탈영이나 심지어는 적군과의 내통등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높은 기동력을 가질 수 있던 이유의 하나가 사기 높은 시민병은 약탈하러 보내도 탈영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36] 그러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미니트맨같은 경보병의 유격전에 화력이 분산되는 정석적인 전열보병은 의외로 취약했기 때문에, 결국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에는 그 영국군에도 그린 자켓(Green Jackets)과 같은 경보병 부대가 만들어지게 된다.[37]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예나전투에 있다. 프랑스군이 차지하고 있던 마을에 프로이센군이 공격해는데, 프랑스군이 건물에 숨어서 사격한 반면, 프로이센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열을 맞춰서 싸우고 있던 것. 당연히 프로이센군은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국민군인 프랑스군에 비해 구시대의 프로이센군은 산병으로 싸우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38] 유럽 각국은 평소에 사냥으로 총기를 항상 다루고 그만큼 숙련이 된 사냥꾼들을 징집하여 엽(獵, 사냥 렵)병이란 뜻인 샤쇠르예거 연대로 편성하여 군의 정예부대로 운용했다.[39] 샤프 시리즈를 보면 모병 부사관이 많은 봉급과 명예로 사람들을 꾄 다음 그들이 약속받은 돈을 갖은 핑계로 소모했다고 처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참고하면 대충 당시 어떤 분위기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40] 1815년 6월 16일 벨기에 카트르 브라(Quatre Bras)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것이다. 워털루 전투의 전초전에 속한다.[41] 만약 기병이 보병진의 정면으로 돌격한다면 보병의 입장에서는 방진을 짜는 것 보다 더 쉽게 처리가 가능하다. 당연한 것이 방진보다 선형진의 전면 화력이 더 좋기 때문이다. 후면에서 쇄도해 들어가도 보병진이 뒤로 돌면 기병으로서는 정면 돌격과 같은 상황에 빠진다. 이런 이유로 기병 돌격은 선형진을 짜고 있는 보병의 측면을 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전술로 본다. 기병이 보병진의 측면으로 돌격할 때 보병진이 좌향좌, 우향우를 해봐야 고작 1열의 3~4명 정도만 사격이 가능할 뿐이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보병이 선형진으로 대응하고자 한다면 선형진의 전면이 기병 돌격이 들어오는 방향을 마주보도록 진형을 바꿔줘야 한다. 이런 방향 맞춤을 하고 있는 사이에 기동력에서 우위에 있는 기병이 방향을 틀어버리면 보병진은 또 진형을 움직여야 한다. 보병이 이렇게 사격을 못하고 선형진의 전면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고 있는 사이에 기병은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상태로 보병진에 접근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기병은 항상 보병진의 측면을 노리고 들어오게 마련이고 이에 보병들은 측면이 존재하지 않는 사각 방진으로 대응하게 된다.[42] 지금 보병들이 드는 것 보다는 구성이 훨씬 단촐하지만, 개인 장구류 연구도 안됐고, 합성 섬유가 개발되기 이전 시대라 피복이나 군장 구성품 하나 하나가 무겁고 거추장스럽다.[43] 이런 모습들은 각종 영화로 인해 굳어진 편견이다.[44] 이 점에선 오히려 전열보병들의 전투가 자동화기와 각종 폭발물들이 난무하는 현대전보다도 훨씬 가혹했는데, 현대전이면 적당히 흩어져서 은엄폐를 실시하면 기관총이든, 수류탄이든, 심지어 포격이나 폭격에 노출되더라도 생존 확률이 상당히 올라가지만, 전열전에서는 현대전과 같은 수준의 산개는 힘들었다. 보병 간의 교전에서는 가능한 엄폐물을 활용하긴 했지만, 엄폐물이 없는 개활지에서는 기병돌격 역시 위협적이었기에 적군의 사격과 전장포 포격을 그대로 서서 버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무작정 대열에서 이탈하면 부대가 붕괴하며 더 많은 이들이 죽고, 전투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후술할 태형이 필요하다고 여겼다.[45] 영국군의 경우 일요일에 약식 재판을 열고 태형을 집행했다. 원칙적으로는 1000대 이상도 가능했지만, 보통은 병사들에게 공포심을 주기위해 존재하기만 한거고, 또 처벌이 가혹할수록 부대 분위기가 나빠질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처벌을 내리지 않거나, 30~50대 가량의 '상식적인' 수준으로 내려서 집행했다. 왕립 독일인 군단(KGL)에서는 체벌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없었고, 오히려 당대 미국은 연방 의회의 투표를 통해 체벌 규정이 더 완화되기까지 했다.[46] 당시에는 귀족 가문에서도 아내가 외간 남자와 눈을 마주치는 등 헤픈 행동을 했다고 남편이 회초리를 드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심지어 당시의 편지나 일기 등을 보면 그런 가정폭력을 감추기는 커녕 사랑의 매였다며 미화시켜 적기도 했다.[47] 모병제를 시행한 덕분에 사회의 낙오자나 범죄자들까지 끌어다 집어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기실 모병자원 대다수는 소득 수준이 낮았을지는 몰라도 낙오자 수준은 아니었다. 이건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 장병들에 대한 애정섞인 디스가 와전된 것에 가깝다.[48] 영화 제독의 연인에서 백군 병사들이 총알없는 착검 모신나강을 들고 붉은 군대의 기관총 앞으로 덤덤히 대열을 맞추어 걸어가다가 종군하며 부상자를 돌보던 수녀의 사망으로 분노, 장렬히 돌격하는 장면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다.[49] 단체활동이나 성직자는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북한마냥 개개인의 신앙까지 통제하려들진 않았고, 인구의 대다수가 신앙을 유지했다.[50] 소총이나 전차에 성수 뿌리는 그 행사 맞다. 장병들을 축복해주는 일환으로 장병들의 무기도 축복해준다.[51] 2010년대를 기준으로 K2의 납품가는 80만원 정도다.[52]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30만원은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의 월급 수준을 웃돈다.[53] 흑색화약은 터질 때 연기가 심하게 발생하기에 화약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선 피아 구별이 쉽지 않았다. 또한 지휘관이 멀리서 병력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는데 제대로 된 통신수단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눈에 잘 띄는 원색을 많이 사용했다.[54] 근대 시대에 멋진 군복은 군대에 지원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요즘에조차 철없는 젊은이들이 정복 입은 군인의 모습을 동경하여 지원하기도 한다. 하물며 어지간히 잘 먹고 잘 사는 지방 귀족들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흰색 단색으로 입고 다녔을 만큼 염색옷이 귀했던 당대에는, "군대에 가면 번쩍거리는 총칼을 차고 멋진 옷도 입을 수 있구나!"는 생각에 지원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대풍을 재현한 현 오스트리아 의장대의 화려한 군복도 그 멋짐에 오스트리아 내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용도로는 근대 스타일의 정복이 아직까지도 장교 및 사관생도용 예복으로 남아있다.[55] 대항해시대로 무역량이 증가하며 붉은색 염색에 필요한 코치닐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56] 사실 후대의 혁신적인 후장식 소총같은 물건은 아니고 플린트락 방식의 강선 파인 머스킷으로 보는 편이 맞다. 자세한건 소총 문서를 참고하자.[57] 사실 현재모두가 인식하는 프러시안 블루가 탄생하고 사용된 시기는 19세기 중후반~20세기 초이다. 그 전까지는 형식화되지 않은 푸른 군복을 사용했다.[58] 소련군, 그리고 현재 러시아군 기갑차량의 도색인 좀 칙칙한 어두운 진녹색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59]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군대처럼 요포를 말아서 배낭 위에 결속하는게 아니라 어깨에 직접 들러맸는데, 남북전쟁기 남군이나 보불전쟁기의 후기 프로이센군처럼 그렇게 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60] 아시가루 같은 평민 병 체제는 붕괴했기에 사무라이 같은 무사들이 전열보병이 되었는데, 불만이 막심했다고 한다.[61] 다만 크림전쟁에서도 참호가 이용되었고 참호전이 일어났었다.[62] 기술과 군대의 규모가 급속도로 진보하고 팽창했는데 군에선 느려도 안정성과 보수적인 방식을 취해야 하니 군사 전술, 전략이 따라잡는데 실패한 와중에 유럽에서의 20세기 첫 전쟁이 대전쟁으로 터져버린 것이다. 크림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그렇다 할 큰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는데 전장에서 신기술과 신무기들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19세기의 참호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1차대전에 이르러서는 참호가 방어진지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군사기지의 역할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선의 길이가 예전보다 더 길어지고 전선의 고착화와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부상자가 그 원인이다.[63] 사실 제식 자체가 고대 그리스의 호플리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훈련 방식이나 전열보병 시대의 훈련은 직접적으로 내려져온다.[64] 의장대를 나온 사람은 잘 알 수 있다[65] 전열보병 시절의 관점으로 보면 모든 병사들이 개틀링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