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서주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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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2. 도겸의 연주 침공
2.3. 조숭 일가의 몰살
3. 진행
3.1. 조조의 1차 침공
3.2. 조조의 2차 침공
5. 결과
6. 영향
6.1. 연주(兗州)의 반기
6.2. 여포의 부활과 유비의 등장
6.3. 서주(徐州) 출신 인물들
6.4. 형주(荊州) 백성들의 도주
6.5. 조씨 몰살의 나비효과
6.6. 후대의 악명



1. 개요[편집]


후한 말기의 군벌 조조가 2차례에 걸쳐 서주를 침공한 사건.

침공 당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한국, 일본, 중국의 『삼국지』 팬덤에서는 주로 서주 대학살이라고 부르나[1] 역사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는 아니다.

조조의 아버지였던 조숭은 본래 초[2]에 살고 있었지만, 군벌들이 합심하여 동탁을 토벌할 때 그곳은 전쟁터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서주 낭야로 가서 난을 피했다고 한다.

이후 조조가 연주를 근거지로 세력이 안정되자 아들의 초청을 받은 조숭은 연주로 향한다. 다만 이때는 조조가 도겸의 침공을 막은 이후로 낭야에 머물던 조숭은 아들과 도겸이 싸우자 불안함을 느꼈을 수 있다. 이후 전재산을 들고 연주로 향하던 조숭은 도겸의 수하인 장개 일당에게 죽는데[3]이 때 조숭과 조조의 동생인 조덕을 비롯해 일족들이 살해당한다.

이에 조조는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193년, 194년 두 차례 서주를 쳐들어가게 된다.


2. 배경[편집]



2.1. 군웅할거[편집]


동탁의 전횡에 반발해 제후들이 동맹을 맺었다. 원술의 부하 손견이 분전해 낙양까지 진군했으나 동탁은 이미 장안으로 천도한 뒤였다. 이후 제후들은 유우, 조조, 유표 등 친원소파와 공손찬, 도겸, 손견 등 친원술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두 군벌 세력은 다른 군벌들과 제휴를 맺어가며 서로 서로를 견제했는데, 이것이 공손찬의 종제 공손월의 죽음으로 터졌다.[4] 192년 공손찬은 대군을 이끌고 계교에서 싸웠으나 국의의 전술에 휘말려 크게 패했다.


2.2. 도겸의 연주 침공[편집]


  • 1차 침공

우독(于毒), 백요(白繞), 수고(眭固)[5]

등의 흑산적(黑山賊) 10여만 명이 위군, 동군을 공략하였으나, 왕굉이 막을 수 없어, 태조가 병사를 이끌고 동군에 들어가 복양(濮陽)에서 백요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원소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태조를 동군 태수로 삼고, 동무양(東武陽)을 다스리게 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이 당시만 해도 조조는 원소 산하의 군벌이었다.[6]

원술이 원소와 서로 틈이 벌어지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손찬은 유비를 고당(高唐-청주 평원군 고당현)에, 선경(單經)을 평원(平原-평원군 평원현)에, 도겸을 발간(發幹-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핍박했다. 태조가 원소와 만나 이를 공격해 모두 격파했다.

『삼국지』 「무제기」


조조는 192년 여름에 황건적을 크게 격파해 이기고 연주목에 오르며 청주병을 얻었다. 이때 원소와 원술-공손찬은 크게 대립하고 있었고, 마침내 계교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계교 전투에서 대패한 공손찬은 원소의 장수 최거업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평원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192년 겨울, 공손찬은 휘하의 연주자사 선경, 별부사마 유비와 동맹인 서주목 도겸의 군대로 원소-조조를 쳤으나, 원소와 조조는 이를 격파했다. 선경은 평원군 평원현, 유비는 평원군 고당현에 주둔한데 비해 도겸은 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했다. 즉 도겸은 조조의 세력권인 연주 깊숙히 침공해 있었던 것이다.

  • 2차 침공
193년 초 헌제는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와 태복(太僕) 조기(趙岐)를 시켜 공손찬과 원소, 둘의 분쟁을 화해하게 했다. 이 시기 원담유비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섰다. 하지만 원술-도겸과 조조의 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4년(193) 봄, 견성(鄄城)에 주둔하였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군량보급로를 끊으니, 원술이 군대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封丘)에 주둔하였으며, 흑산의 나머지 적들과 어부라(남흉노 선우)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이 장수 유상(劉詳)을 시켜 광정(匡亭)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광정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원술이 퇴각하여 봉구를 보전하니, 마침내 이를 포위하였고, 합쳐지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으로 패주하니,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도착하여 도랑의 물을 터뜨려 성을 수공(水攻)하였다. 영릉(寧陵)으로 패주하니, 또 추격하여 구강(九江)으로 패주시켰다.

여름, 태조가 돌아와 정도(定陶)에 주둔하였다.

하비(下邳)사람 궐선(闕宣)이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천자라 자칭하였다. 서주목 도겸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와 비(費)현을 취하고, 임성을 공략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193년 도겸은 궐선과 함께 다시 군대를 일으켜 연주 태산군의 두 현을 취하고 임성국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 화현과 비현은 다른 곳에서도 언급된다.

흥평(興平) 원년(194) 봄, 태조가 서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 태조의 부친 조숭(曹嵩)이 관직을 버린 후에 초현으로 돌아왔는데, 동탁의 난 때, 난을 피해 낭야(瑯邪)에 가 있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래서 태조가 동쪽으로 정벌하여 복수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주 :《세어》에 이르길 「조숭은 태산군 화현에 있었다. 태조가 태산군 태수 응소(應劭)에게 영을 내려 자기 가족을 연주로 모시게 했는데, 응소의 병력이 채 이르기 전에, 도겸이 비밀리에 보낸 수천 기에 붙잡혔다. 조숭의 가족들은 응소의 영접인 줄 알고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도겸의 병사가 이르자, 태조의 동생 조덕(曹德)을 문 가운데서 죽였다. 조숭이 두려워 하자, 먼저 그 첩을 나가게 했는데, 첩이 뚱뚱하여 문을 나갈 수 없었다. 조숭이 측간으로 달아나다 첩과 함께 해를 입고, 온 집안이 모두 죽었다. 응소가 두려워서 관직을 버리고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후에 태조가 기주(冀州)를 평정하니, 응소는 이때 이미 죽었다.」고 한다. 위요(韋曜)의 《오서》(吳書)에 이르길 「태조가 조숭을 맞이하며 보낸 물자수레가 200대였다. 도겸은 도위(都尉) 장개(張闓)를 보내 기병 200명을 거느리고 호위하며 전송하게 했다. 장개가 태산군의 화현과 비현 사이에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여, 이로 인해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그 허물을 도겸에게 돌리고 그래서 정벌한 것이다」라 한다.

『삼국지』 「무제기」



2.3. 조숭 일가의 몰살[편집]


조숭이 살해당한 정확한 년도와 날짜는 불분명하지만 대략적으로 초평 4년(193년)으로 추정된다.[7] 『삼국지』 「무제기」, 『삼국지』 「도겸전」, 『후한서』 「도겸열전」에는 모두 초평 4년(19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고, 「무제기」에 '193년 가을, 조조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분명 존재하며, 이때 명분이 조숭 때문이었다. 『삼국지』 「도겸전」과 『후한서』 「도겸열전」을 봐도 사건의 발생은 1차 침공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기에 따르면 193년에 조조가 1차 침공의 명분으로 일가의 학살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조숭 일가를 몰살한 주체가 사서마다 다른데, 두 가지의 기록이 전해진다.

하나는 『삼국지』 「무제기」의 주석 《오서》의 기록으로 조조가 보낸 짐수레만 100여 대였고, 도겸이 도위 장개를 보내 조숭을 허창까지 호송해주려 했는데, 본래 도적 출신이었던 장개가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후 회남으로 도주했으며, 조조는 이를 도겸의 허물로 돌리고 이 때문에 그를 정벌했다고 한다. 『삼국지』 「도겸전」에도 《오서》의 기록만 주석으로 인용하여 같은 기록이 서술되어 있다. 『후한서』 「도겸열전」도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졸들이 조숭의 재보에 눈이 뒤집혀 그를 습격하여 죽여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자치통감』에서도 '전임 태위 조숭이 난을 피하여 낭야에 있었는데, 아들 조조가 태산 태수 응소에게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조숭의 치중은 100여 대였다.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켰는데 병사들이 조숭의 재보를 탐내 화현과 비현 사이에서 조숭을 엄습하여 죽이고, 아울러 어린 아들 조덕추도 죽였다.'라고 되어 있다.

다른 기록은 역시 『삼국지』 「무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세어』[8]의 기록으로 도겸이 수천 기병을 보내 조숭을 살해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후한서』 「응소열전」의 기록도 이와 같다. 그러나 『세어』 자체가 책의 성격상 사실에 풍문이나 과장이 좀 섞인 쪽에 가까운지라 사서로서는 가치가 낮고, 『오서』의 내용인 '조조는 격문을 띄워 도겸에게 허물을 씌우고 서주를 정벌하려고 했다'는 기록도 있는지라 이후의 역사 기록들도 『오서』, 『자치통감』, 「도겸전」 쪽의 내용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편이다.


3. 진행[편집]



3.1. 조조의 1차 침공[편집]


이에 조조도겸을 공격한다.

초평(初平) 4년 (AD 193)에 조조(太祖)는 도겸을 정벌하고 십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팽성(彭城)에서 도겸과 크게 싸웠다. 도겸의 군대는 패한 후 도주하였는데, 죽은 자의 수가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사수(泗水)는 시체로 막혀 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도겸은 물러나 담현(郯)을 지켰다. 조조는 양식이 부족하였으므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조공(曹公)의 부친이 도겸의 관할하에 있던 태산(泰山)에서 살해되니, 그 허물은 당연히 도겸에게 돌아갔다. 태조는 도겸을 토벌하려고 생각했으나 그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도겸의 주와 군의 군대를 일시에 해산시키도록 할 것을 상주했다.

태조가 팽성(彭城)으로 진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자 도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저항하였고, 청주자사 전해(田楷)가 와서 도겸을 구하려고 하니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 「오서」[9]

신 송지의 의견으로, 이때 천자는 장안에 있었고, 조공이 아직 정무를 장악하지 않았을 때이다. 파병(罷兵)의 조서는 조씨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국지』 「도겸전」


태조가 도겸(陶謙)을 정벌할 때, 자기 집안에 일러두길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탁에게 가서 의지하라"고 했다. 후에 돌아와 맹탁을 만나고서는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친밀함이 이와 같았다.

『삼국지』 「장막전」


서주 정벌에 종군하였는데, 조인은 항상 기병을 지휘하여 군의 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陶謙)의 장수 여유(呂由)를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돌아와 팽성(彭城)에서 대군과 합류하여 도겸군을 대파했다.

『삼국지』 「조인전」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중략)

흥평(興平) 원년(194년) 봄, 태조가 서주(徐州)에서 돌아왔다. 당초 태조의 부친 조숭은 관직을 떠나 초(譙)로 돌아갔었는데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낭야(瑯邪)로 피난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태조는 원수를 갚기 위해 동쪽을 정벌한 것이다.

『삼국지』 「무제기」


태조(조조)가 당도하여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만 명을 갱살(坑殺)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도겸이 그 군사를 이끌고 원무(팽성 원무현)에 주둔하자 태조는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을 따라 취려, 수릉, 하구의 여러 현들을 공격해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조만전」


한나라 초평(初平) 4년, 조조가 도겸을 쳐서 팽성의 부양(傅陽)을 격파했다. 도겸이 담성(郯城)으로 물러나 지키니, 조조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이에 되돌아갔다. (조조는) 지나는 길에 있던 추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하여 모두 도륙(屠戮)했다. 무릇 남녀 수십 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섯 현의 성읍(城保=城堡)[10]

에는 사람의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 처음에 삼보(三輔)[11]가 이각(李傕)의 난을 당하니,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다가(流移) 도겸에게 의탁하였는데 모두 (이 때) 다 죽었다(殲).[12]

『후한서』 「도겸열전」


(초평 4년) 가을,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공격해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웠는데, 도겸군이 패하자 달아나 담현을 보전했다. 당초, 경(京, 장안), 락(雒, 낙양)에서 동탁의 난을 만나자 백성들이 유이(流移-유망, 유랑)하여 동쪽으로 나와 서주 땅(徐土)에 의탁한 자가 많았는데, 조조가 당도하여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조조는 담현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이내 떠나서 취려(取慮), 수릉, 하구의 여러 현을 공격해 차지하고 이들을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자치통감』


조조가 일단 도겸의 세력이 강한 것을 봐서 외교전을 시도했다는 일화까지 나올 정도로 조조는 도겸을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친족을 진류 태수 장막에게 부탁했다.

출진한 조조는 조인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삼아 도겸군을 격파하고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조인의 기병 별동대와 합류한 뒤 팽성으로 진격하여 많은 인민들을 죽였고(多殺人民)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온 도겸과 전투를 치뤘다. 도겸은 대패해 정사에 따르면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기가 죽은 도겸은 함부로 나오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장기간의 원정이었기 때문인지 조조는 양식이 부족해졌고, 청주자사 전해가 구원군으로 내려오고 있었기에 조조는 결국 퇴각한다. 이때 조조군은 퇴각하면서 취려, 수릉, 하구 등 다섯 고을을 도륙한다.

문제가 되는 건, 「조만전」에서 팽성국 원무현으로 후퇴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담현으로 후퇴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지명 오기 같은 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자치통감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온대로 담현으로 후퇴했다고 기록했다.


3.2. 조조의 2차 침공[편집]


(194년)여름, 순욱(荀彧), 정욱(程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城)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東海)에까지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 담(郯)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曹豹)가 유비와 함께 담(郯)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한 곳이 많았다.

손성(孫盛)이 말했다 - 무릇 죄악을 정벌하여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 예로부터 아름다운 궤범(軌範)이다. 그러나 도겸의 죄로 말미암아 그 속부(屬部)를 잔륙한 것은 과오이다.

『삼국지』 「무제기」


태조가 도겸을 공격할 때 하후돈을 남겨 복양(濮陽)을 수비하게 했다.

『삼국지』 「하후돈전」


비(費), 화(華), 즉묵(卽墨), 개양(開陽) 공격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현(諸縣)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삼국지』 「조인전」


태조가 우금을 불러 대화를 나누어 보고 군사마(軍司馬)로 삼고, 군을 이끌고 서주(徐州)로 나아가 광위(廣威)를 공격하게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삼국지』 「우금전」, 다만 1차 침공 때인지 2차 침공 때인지 불확실하다.


흥평(興平) 원년(194년), (태조, 즉 조조가) 재차 동쪽 정벌에 나서서 낭야(瑯邪)와 동해(東海)의 여러 현을 공략하여 평정시켰다. 도겸은 두려워하며 단양(丹楊)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마침 장막(張邈)이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呂布)를 맞아들였으므로 태조는 환군하여 여포를 공격했다. 이 해 도겸이 병으로 죽었다.

『삼국지』「도겸전」


흥평(興平) 원년, 조조(曹操)가 다시 도겸을 쳐서 낭야(琅邪)와 동해(東海)의 여러 현을 공략하여 평정하니, 도겸은 모면하지 못할까 두려워 단양(丹陽)으로 도주(逃走) 하고자 하였다. 마침, 장막(張邈)이 여포(呂布)를 맞아들여 연주(兗州)를 점거하니, 조조가 되돌아와 여포를 쳤다. 이 해에 도겸이 병으로 죽었다.

『후한서』「도겸열전」


조조가 사마 순욱, 수장령 정욱을 시켜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가서 도겸을 공격했다. 땅을 공략하며 마침내 낭야, 동해에 까지 이르렀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시켰다.

『자치통감』

194년 여름(『자치통감』에 따르면 4월),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조는 2개월만에 서주로 돌아와 도겸을 공격했다. 양분은 동해군 양분현을 말하고, 담현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다.

진수, 손성, 배송지, 사마광 등이 모두 잔륙, 잔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무제기」는 여포가 연주를 차지해 조조가 돌아가는 길에 담현을 지나는데 조표유비가 동쪽에서 요격했다고 한다. 조조는 이를 격파하고 담현을 지나쳐 담현 서쪽의 양분현을 함락시켰다. 「조인전」에서는 조인이 비, 화, 즉묵, 개양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고 한다. 여기서 '별장'에 해당되는 건 「무제기」의 기록을 볼 때, 조표와 유비로 판단된다.


4. 서주 대학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서주 대학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결과[편집]


서주를 지배하고, 연주, 예주[13], 양주(楊州)의 일부까지 영향력을 미치던 도겸의 힘은 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하여 크게 쇠퇴했다. 연주의 태산군과 임성국을 잃고, 팽성국은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졌으며, 낭야국과 동해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광릉군도 설례와 도겸의 동맹인 착융의 약탈을 겪고, 서주백을 자칭한 원술의 침입을 받았다.

원술은 오경을 광릉태수로 임명하고, 노숙에게는 동성현장을 권유하였다. 장소와 장굉 등 서주 명사들의 강동 이주 시기도 이때로 여겨진다.

팽성상 설례와 하비상 착융은 양주로 도망치고, 그 와중에 광릉태수 조욱은 착융에게 죽었다.. 기도위 장패는 독립해 소규모 군벌이 되었다.

결국 유비는 하비로 처소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의외로 하비의 피해가 적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 하비는 유비, 여포, 원술, 조조의 각축장으로 변해 노숙에게 "회수와 사수 사이에는 자손을 남길 땅이 없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당장 조조에게 털린 후에 진등이 유비한테 호구수가 100만이라며 풍요롭다고 말했는데,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서주의 호구수는 270만이며 도겸 통치기에 각지의 유민까지 몰려 인구가 불어난 상황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100만호만 남았다는 것은 피해가 컸다는 뜻이다. 이 점은 청나라의 역사학자 심가본도 지적했다.

이런 인구 감소는 단순히 민간인 학살뿐만 아니라 대규모 유민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조는 이나 같은 주요 가축까지 남기지 않을 정도로 서주에서 철저한 파괴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에, 서주 주민들이 잠시 전란을 피해 피신했더라도 경제 기반이 파괴되어 그 상태에서 바로 유민이 되었을 확률도 높다. 또 조조의 서주 침공은 2년에 걸친 장기간의 원정이었으며, 침공 범위도 넓었으므로 이 기간 동안 많은 인구가 전란을 피해 서주를 떠났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원래 부유했던 서주에 의탁한 유민들이 원래부터 서주에 살던 사람들과 더불어 잔륙되고, 나머지도 도망친 것으로, 조조는 잔륙과 함께 대량의 유민을 양산한 것이다.

조조와 여포가 싸우는 연주보다는 상태가 좋았는지, 아니면 하비 일대는 멀쩡했는지 거듭된 싸움으로 인해 식량이 궁해진 조조가 서주를 다시 치려 하자,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서주가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위벌(威罰)이 실행되어 그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의 치욕을 생각하니 필시 사람들마다 스스로 지키려 하며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격파할 수 있다 해도 가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삼국지』 「순욱전」[14]

[15]

여기서 에 '조만전'이 주석으로 들어간다.

순욱의 조언은 서주가 연주보다 방어가 탄탄하다기 보다는 일단 본거지인 연주를 먼저 찾는 게 중요하지, 가뜩이나 조조가 인심을 잃은 서주 땅을 얻어봐야 소용 없다는 뜻이다. 이는 조조군 최고의 모사이면서 당대의 명사였던 순욱이 전략적 행보를 조언할 때 민심의 향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다. 또한 조조의 침공 당시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는 것을 조조군 내부에서 말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 모사인 순욱이나, 실제 선봉에 섰던 조인이나, 원소의 장수로서 학살에 참여했다가 조조에게 반해 귀순한 주령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군량 담당관이었던 하후연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정욱 같은 인물들도 알았을 것이다. 조조가 헌제를 옹립한 후 들어온 순유곽가도 과거의 이런 행적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 비슷한 행동을 했던 하후연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순욱, 조인, 주령만큼 특수성이 있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그 외에도 제갈량의 일가가 형주로 이주한 시기가 서주 대학살이 벌어진 시기와 비슷해서, 제갈량의 집안이 서주 대학살로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실제로 『자치통감』에 나오는 조조의 침공 지역에는 제갈량의 고향인 서주 냥야도 포함되어 있었으며[16], 삼국지』「제갈근전」에는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이 고향 친구였던 은모를 변호하면서 한 말 중에 "자신과 은모가 고향의 엄청난 재난 때문에 그곳의 생명들이 거의 다 목숨을 잃어 고향을 버리고 피난했다"는 증언을 한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 제갈량도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6. 영향[편집]



6.1. 연주(兗州)의 반기[편집]


「여포전」 주석에 진궁이 조조에게 반심을 품은 이유가 "스스로 의심을 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장막이 도박에 응한 것을 바탕으로, 연주 호족들의 조조에 대한 불만 및 공포와 연주 주민들에게 내재되어 있었던 조조에 대한 공포심이 두 차례에 이은 서주 대학살로 극대화되어 반란까지 이어졌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연주를 빼앗기게 된 계기가 된 서주 침공 당시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조는 1차 침공 때, 8개월이나 서주에 머물며 도겸을 공격했고, 식량 문제와 전해, 유비의 구원으로 인해 연주로 돌아간 지 불과 두 달만에 다시 서주로 가서 도겸을 공격했다. 이렇게 서주에서 너무 오래 머문 나머지 연주를 직접 관리하지 못해 반란 세력이 결집할 시간적 여유를 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식간에 연주의 거의 모든 지역이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조조가 서주를 공략하는 동안 여포는 당시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를 공격했고, 순욱이 지킨 3개의 성을 제외한 연주 전 지방이 함락되었다. 연주가 공격당했을 때 연주 호족들과 주민들이 조조에게 반발해서 모반을 꾀했고, 장막, 진궁여포와 손잡으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여포는 원소의 객장이었다가 쫓겨나 장양에게 의탁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진궁과 장막은 당시 조조 진영 내에서 별로 힘 있는 세력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연주를 빠르게 점령하고, 조조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것은 조조에게 등을 돌린 연주 호족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지』 「무제기」와 「장막전」에서 여포군이 무력만으로 점령한 게 아니라 연주의 군현들이 대대적으로 호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 이를 단순히 서주 대학살만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 연주 호족들의 이탈은 애시당초 조조가 비록 포신으로부터 연주목으로 추대되긴 했으나, 조정에서 임명된 정식 연주자사도 내쫓은, 원소의 수하로서 연주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는 태생적인 단점이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조조가 변양 등 연주 호족들을 함부로 잔혹하게 죽여 호족들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한 것 또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소의 격문에서도 지적하는 사안이다. 또한 장막이 조조에게 반기를 든 이유는 신변 때문으로 조조가 장막을 옹호하기는 했지만, 조조가 원소의 명에 따라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원소와 조조는 갑을 관계였기 때문이다.

장막은 원소-조조 라인에서 밀려났지만 나름대로의 명성은 있었고, 당시 여포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남부에는 아직 원술이 건재했고, 북부에는 공손찬이 조조의 스폰서인 원소와 적대하고 있었다. 진궁이 굳이 잘 나가는 조조의 세력을 박차고 나간 건 세력 내부에서 나가리가 되었지만, 명성과 실력이 있는 자들끼리 힘을 합쳐서 독자적인 세력이 되는 선택지도 한 번 해볼 만한 도박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작금에 천하가 갈라지고 무너져서 영웅호걸들이 나란히 일어나고 있는데, 그대는 1,000리나 되는 지역의 무리를 거느리고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맡고도 칼자루를 쥔 채 사방을 둘러보고만 있으니, (다른 제후들과 같이) 충분히 호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연주의 군대는 동쪽으로 정벌을 간 탓에 (연주가) 비어있습니다. 여포는 장사이므로 그와 싸워서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를 임시로 맞이하여 함께 연주를 다스리고 있다가, 천하의 형세를 보아 때에 따라 사태가 변하기를 기다려 응대한다면 이 역시 한 시대를 종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궁


그렇다 해도 반군이 순식간에 동아, 범, 견성 3개 현을 제외한 연주 전역을 장악했다는 사실에서 조조가 서주 전선에 무리할 정도로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필요 이상으로 서주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반란세력에게 충분한 기회를 허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무기력하게 연주를 상실한 것이 학살에 대한 반감은 아닐지라도 서주 침공과 학살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일각에서 말하는 서주 지역 학살의 전략성을 반박하는 논거가 되기도 한다. 당장 본거지 연주가 위태로울 정도로 병력을 동원해놓고 서주에서 학살하는 것이 무슨 전략적 판단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판은 성공적인 전략 판단이 아니었다는 말일 뿐 조조의 학살이 전략적 판단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아니다. 전략적 판단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전략적인 판단 하에 벌인 행위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그런 판단 없이 마음가는 대로 벌인 행위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만약 조조가 서주를 침공해 학살을 벌인 것이 전략적 판단이었다면 필요 이상의 전력을 동원하여 연주를 상실한 결과를 낳은 점에서는 좋지 않은 판단이 되었다.

결국 조조가 194년 다시 도겸을 공격하자 장막의 동생 장초와 진궁 등이 접근해 여포를 불러 그를 연주목으로 세우며 조조와 싸울 것을 권했다. 장막의 높은 명성은 조조에 대한 민심 이탈로 이어져 연주 전역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서주와 연주에서 악명을 쌓고 오랜 기간 연주를 관리하지 않아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았던 조조는 일생 최악의 수세에 몰렸다.


6.2. 여포의 부활과 유비의 등장[편집]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조는 회군을 하고 결국 도겸에 대한 복수도, 서주를 손에 넣는 것도 실패했다.

공손찬의 휘하에 있던 유비는 원소의 공격을 받고 있던 공손찬을 떠나 본격적인 군벌로 자리잡는다. 유비의 부하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반대했지만, 유비는 나름대로 도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서주로 향했다.

처음엔 부하들의 우려대로 서주로 와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으나, 조조의 본거지 연주가 배신하여 조조가 후퇴하면서 결과적으로 서주행은 성공했다. 그렇게 서주는 뜬금없이 유비에게 넘어갔고, 유비는 본격적인 군벌 생활을 시작한다. 조조는 표를 올려 유비를 진동장군, 의성정후로 삼으며 유비의 서주 지배를 묵인한다.

이 때 원소는 한때 공손찬의 객장이었고, 국경지대에서 싸운 적도 있는 유비가 서주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현덕은 홍아(고아)하고 신의가 있소. 지금 서주가 그를 즐거이 추대하니 실로 내 소망에 부합하오."라고 받아들였다. 공손찬의 객장으로 원소군과 싸운 적이 있는 유비가 하남(河南) 군벌이 되었음에도 자기 뜻대로 되었다고 수긍한 것이다. 원소는 하북(河北)에서 자신과 공손찬이 싸우는 동안 상관도 없을 터인 하남(河南)으로 내려간 시점에서 유비의 본질을 파악하고 하북의 공손찬을 돕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다.

여포와 유비는 두고 두고 조조의 발목을 잡았다. 원소공손찬을 격파하고, 하북 전역을 장악하면서 기반을 다지는 동안 조조는 여포와 5년 넘게 싸워야 했고, 관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보다 비교적 열세에 놓였다.

여포는 도중에 꺾었지만 유비는 서주 → 하북 → 여남 → 형주 → 익주 순으로 도망가며 끝까지 맞서싸워서 조조의 천하통일을 저지했다.


6.3. 서주(徐州) 출신 인물들[편집]


수많은 서주(徐州) 출신 인물들이 전란을 피해 타 지역으로 피난갔는데 주로 간 곳은 양주(揚州)와 형주(荊州)였다. 동오에서 본거지 양주 다음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이 서주의 전란을 피해 양주로 이주한 서주 사람들이었다. 동오의 명신인 제갈근, 보즐, 노숙, 여대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하는 서주 출신 인물들과 당시 서주에 있던 인물들의 목록이다.

  • 조위
    • 진등, 진규 - 서주(徐州) 하비(下邳國) 회포현(淮浦縣)[17]
    • 진교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동양현(東陽縣)[18]
    • 왕랑 -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19]
    • 장패 -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화현(華縣) [20]
    • 제갈탄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제갈장(諸葛璋)?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21][22]

  • 촉한
    • 미축, 미방 -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구현(朐縣)
    • 제갈량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손오
    • 제갈근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서성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거현(莒縣)
    • 장소 - 서주(徐州) 팽성국(彭城國)
    • 엄준 - 서주(徐州) 팽성국(彭城國)
    • 보즐 - 서주(徐州) 임회군(臨淮郡) 회음현(淮陰縣)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회음현(淮陰縣)
    • 노숙 - 서주(徐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 서주(徐州) 하비국(下邳國) 동성현(東城縣)
    • 여대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해릉현(海陵縣)

참고로 노숙의 고향인 임회군은 서한 시절 때 설치된 행정구역으로, 동한 말 하비국에 편입되었다.

다만 노숙의 고향인 동성현은 회수 이남으로 조조와 도겸의 분쟁 지역과 어느 정도 거리가 존재하고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술이 노숙의 명성을 듣고 동성현의 장으로 임명했으나 노숙은 원술이 공업을 세우기에 부족하다 보고 사람들을 인솔해 남쪽의 거소현으로 가서 주유를 따랐다. 주유가 동쪽으로 장강을 건널 때, 그를 따라 동행하다가 곡아현에 거처를 정하고 머물렀다.

『삼국지』 「노숙전」


노숙이 거소현으로 간 것은 원술이 공업을 이루기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조조군의 학살을 피해서 간 것이 아니다.

여대의 고향인 해릉현은 서주 소속이긴 하나, 조조의 침공 지역이 아니었고 심지어 장강 북변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조의 침공을 피해 도망칠 위치도 아니다.

장소가 서주를 떠난 것은 조조의 서주 침공 이전에 관리와 갈등이 있어서였다.

보즐의 경우 고향인 회음현이 회수 이남에 위치하며, 조조가 침공한 지역이 아니었다. 다만 조조의 1차 침공 때 큰 피해를 입은 지역과 회음현은 거리가 가까운 편이므로 조조의 침공을 피해 달아났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성의 고향인 낭야군은 조조의 침공 지역이었으므로 마찬가지로 가능성이 있다.

제갈량과 동생 제갈규의 경우엔 숙부인 제갈현이 원술로부터 예장태수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유표한테 의탁했다고 나오기에 고향을 떠난 직접적인 이유는 제갈현이 원술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다. 특히 제갈량의 경우 본전에 난을 피해 이주했다는 언급조차 나오지 않는다.

제갈근은 난을 피해 강동으로 왔다고 하나, 제갈근이 도착했을 무렵에 이미 손책이 죽었다고 하니 피난을 간 시점은 조조의 침공 시점과는 별개인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면 조조의 학살을 피해 도망쳤다고 추정할 여지가 있는 인물은 서성, 보즐 정도이다. 이마저도 구체적인 시점이 언급되지 않고 전란을 피해 내려갔다는 묘사만 있기에 황건적의 난, 착융의 수탈, 원술, 유비, 여포의 분쟁, 조조와 여포의 분쟁, 조조와 유비의 분쟁 등 다른 이유로 피난 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이번에는 다른 지역을 살펴보자.

여범은 여남군 사람인데 난을 피해 수춘으로 가서 손책을 만났으며, 이후 그를 따라 강동으로 갔다고 한다.

호종은 여남군 사람이며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

정병은 여남군 사람이며 난을 피해 교주로 갔다.

복양흥은 진류 출신이고 아버지 복양일이 난을 피해서 강동으로 내려왔다.

법정, 맹달 역시 난을 피해 익주로 들어간 사례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난을 피해 익주, 형주, 양주로 내려간 사람은 결코 드물지 않다. 그렇기에 피난을 간 인물이 조조군의 학살을 피해서 내려갔다는 묘사가 존재하거나 피난을 간 시점이 조조군의 서주 침공이 아닌 이상, 그 인물이 조조를 피해 내려갔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들이 황건적을 피해 내려갔을 가능성도, 착융과 같은 인물의 수탈을 피해 내려갔을 가능성도 모두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주는 남북으로 길이가 300km가 넘고, 중간에는 회수라는 강이 동서로 가로질러 흐른다. 서주의 중심 도시인 팽성의 경우, 낭야국 거현, 광릉군 회음현보다는 오히려 예주 양국 수양현과 거리가 더 가까우며, 예주 패국 패현, 일명 소패는 당연히 수양현보다도 팽성과 더 가깝다. 조조의 1차 침공 당시 공격한 지역들 중 수릉현, 하구현 등 서주 북부의 낭야국보다는 예주 동부의 패국과 더 가까우며, 조조의 2차 침공 당시 공격한 지역인 낭야국은 서주 남부의 광릉군보다는 청주 제국, 북해국과 더 가깝다. 심지어 여대의 고향인 해릉현보다 연주의 방여현, 임성현이 팽성, 담현에 더 가깝고, 장패의 고향인 연주 태산군 화현이 보즐의 고향인 회음현보다 도겸이 농성한 서주 동해국 담현에 더 가깝다.

이러한 사실들은 서주 출신 인물이 전란을 피해 이주했으니 조조 학살의 피해자일 것이라 추측하거나 서주 출신 인물들 중에서만 조조 학살 피해자를 찾으려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인지 보여준다.

다만 유독 동오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 「오지」나 오나라의 어떤 인물이 지은 「조만전」에는 조조의 잔인함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서주에서 동오로 내려온 내려온 유랑민들의 기억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6.4. 형주(荊州) 백성들의 도주[편집]


조조가 형주를 침공할 때, 수만 명의 형주 사람들이 유비를 따라 도주했다. 서주에서 형주로 도망친 난민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때 도주한 형주 사람들 중에는 서주에서 형주로 도망쳤다가 재도주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조조가 형주 침공을 시작한 시기가 208년이니 2차 서주 침공 기준으로 14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번성에 주둔 중 조조가 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본인 무리(眾)를 이끌고 번성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양양현을 지나갈 때는 많은 사족과 형주의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갔고, 당양현을 지나갈 때 그 규모가 10여만 명이었다. 당시 유비는 부하들이 진언했듯이 서둘러 강릉으로 가서 조조와 맞서야 했지만, 조조의 추격군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행군 속도가 느려지더라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귀부한 자들을 버리지 않고 동행했다.


6.5. 조씨 몰살의 나비효과[편집]


조숭은 측간으로 달아났으나, 첩과 함께 해를 입었고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23]

조숭이 살해당하면서 조조의 동생 조덕 등의 조씨 일족들은 몰살당했다. 즉 조씨에게만 군권을 나눠주는 위나라의 관행에서 잠재적인 정권 핵심 엘리트 층이 모조리 날아간 것과 동급의 충격이었다. 군부 엘리트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면, 조조가 받은 가장 큰 피해일 수도 있다. 이때의 혼란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휴는 아빠 따라 오군에 갔다가 조씨 집안에 들어오면서 천리마 소리를 듣고, 조씨가 아니라 조씨를 하사받았다는 소문이 있는 조진이 후대에 조씨의 주요 인물로 떠오른다.



6.6. 후대의 악명[편집]


다음은 제갈근이 자신과 동향 사람인 은모를 변호하며 한 말인데, 그 속에서 전란[24]의 참사를 엿볼 수 있다.

저와 은모의 고향은 난을 만나 뒤집어져, 생명들이 거의 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상의 묘를 버리고, 노인과 아이를 업으며, 풀을 헤치며 나가다가 성화에 귀의하게 되어…(후략)

瑾與殷模等遭本州傾覆,生類殄盡。棄墳墓,攜老弱,披草萊,歸聖化…

서주에서 피난온 생존자인 제갈근의 증언에서 나타났듯이, 당시 서주 백성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갈근이 말한 난이 서주대학살이 아니라면 서주대학살의 참사는 제갈근이 말한 것보다 더욱 끔찍했을 것이다. 결국 조조가 서주를 차지했지만 그렇다고 서주 사람들이 조조를 좋아했을까?

이는 서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원소 사후 기주, 유주 사람들이 원상을 따라 대규모로 이주한 것 조조가 형주를 침공할 때 수만 명의 형주 사람들이 조조에 대한 공포로 고향을 버리고 도주한 사건도 있었다.

대상이 다를 뿐 유비 따라 형주 사람들이 도주한 것과 같은 이유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원상을 따라 백성들이 이주한 것은 원상이 오환에 망명하여 완전히 정착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 형주 사람들이 적이 눈 앞에 도달해서 당장 따라가다가 추격을 당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따라가겠다고 한 것과는 조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다. 어떻게 보면 백성들이 어차피 도망가는 마당에 유비의 피난길에 붙는 게 더 안전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라 할 수 있기도 하다. 심지어 기득권인 형주 호족, 유종의 주변 신하들마저 유비에게 붙어 탈출을 시도했으니, 당시 유비가 형주에서 얻은 인심을 알 수 있다. 어느 쪽이던 조조의 악명을 두려워해 백성들의 인심을 얻은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붙어 이주했다는 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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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徐州大虐殺'(서주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약간 다르게 '徐州大屠杀'(서주대도살)이라고 표기한다. 바이두 백과사전 참고. '도살'이라는 단어가 다소 뜬금없어 보이지만, 중국어에서의 도살은 제노사이드의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난징대학살이 중국어로 '南京大屠杀'(남경대도살)인 것이다.[2] 조숭이 살던 초는 譙이고(예주 초국)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는 楚로 다른 곳이다.[3] 재물에 눈이 먼 장개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관점이 이상하게 많지만, 당시 장개가 도겸의 부하였던 점, 도겸이 연의와 달리 성인군자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도겸이 오히려 사주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장에 도겸은 원술과 동맹으로, 원소-조조 동맹 축과는 적대 관계였다.[4] 사정은 18로 제후의 해체가 나온 동탁 토벌전 문서 참조.[5] 眭 음은 반절법상 신수절(申隨切)로 ㅣㄴ+ㅅ의 합으로 인해 수가 된다.[6] 비슷한 사례로 조조 휘하의 군벌인 장패, 이통이 있다.[7] 유독 『후한서』 「응소전」에만 194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8] 곽반이 지은 필기 소설집인 『위진세어』를 뜻한다.[9] 「무제기」에 따르면 193년 가을에 조조가 서주로 갔고 『자치통감』에 따르면 193년 6월이다. 또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서주에서 본거지인 돌아온 때는 194년 봄, 『자치통감』에서는 194년 2월이다.[10] 『후한서』에 주석을 단 혜동(惠棟, 1697~1758)이 말하길,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작은 성(城)을 보(保)라 한다.'”[11] 사례교위부 경조윤, 우부풍, 좌빙익을 말한다.[12] 혜동이 말하기를 “또 배송지(裴松之)는 '생각건대 손성(孫盛)이 이르기를 무릇, 죄지은 자를 쳐서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伐罪弔民) 예부터 (내려오는) 규범으로, 도겸이 죄를 지었다 하나 그 부속(部屬-딸린 사람들)까지 죽인 것은 잘못이다.'라 했다.”라고 하였다.[13] 여포의 거주지였다가 유비의 근거지가 된 소패성은 삼국지 게임에는 서주 소속으로 나오지만 사실 예주 패국 패현이다. 이 부근까지 도겸의 지배지였기에 도겸을 도우러 온 유비가 주둔할 수 있었던 것이고, 훗날 서주의 지배자가 된 유비/여포가 각각 여포/유비에게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14] 서주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던가 치욕이라고 언급한 것을 근거로 순욱이 학살을 안좋게 생각했다는 것은 알 수 없다. 서주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가족을 죽인 조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얘기로 조조가 서주에서 민심을 잃었다는 뜻이다.[15] 또 학살로 인해 천하의 민심을 잃었다고 해석해도 안되는 것이 민심을 잃은 것이 '학살이 비도덕적이라서'가 아닌 '자신의 친족을 죽여서'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없었던 이역만리의 백성들이 학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이 대목에서 파악할 수 없다.[16] 다만 양도현은 잔륙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17] 『후한서』 「진구열전」에 의하면 진규의 백부인 진구가 하비국 회포현 사람이다.[18] 난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는데 후에 돌아와 광릉태수 진등의 공조가 되었고 계속해서 조조 세력, 위나라에서 일했다.[19] 도겸의 추천으로 회계태수가 되었는데, 이때 조욱이 같이 광릉태수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조가 서주를 침공할 당시에는 서주에 없었고 이미 회계군에 부임한 것으로 보인다.[20] 서주 출신은 아니나 태산군 화현은 서주와 경계에 존재한다. 또한 도겸으로부터 기도위로 임명되어 도겸 휘하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21] 삼국지 제갈량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달며 인용한 제갈량집에 나오는 인물로, 223년 경에 위나라에서 알자복야 직위를 역임한 인물이다.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낸 것 외에는 알려진 행적이 전무하나, 당시 존재하는 제갈씨는 모두 낭야국 양도현이 본적이었으므로 제갈장 역시 낭야국 양도현 출신일 확률이 높다.[22] 제갈근전 주석에 인용된 위요의 오서에 의하면, 제갈근의 선조는 본래 갈씨로 낭야국 제현(諸縣) 사람이었는데 후에 낭야국 양도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양도현에는 이미 갈씨가 존재하여 사람들이 제갈근의 선조를 제갈(諸葛)씨라 불렀고, 이 때문에 제갈씨가 되었다. 제현 출신의 갈씨가 이주했는데 이주한 곳에 원래 갈씨가 존재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탄생한 성씨이므로 양도현 외에 제갈씨가 존재할 확률은 극히 낮으며 양도현 출신이 아닌 제갈씨가 존재했다는 별도의 근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당시 제갈씨들은 모두 양도현 출신으로 취급해야 한다.[23] 원어로는 闔門皆死.[24] 정확히 말하자면 위의 '결과' 문단 끝부분에서도 잠시 언급된, '이것이 서주대학살이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으나 정황상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전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