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서주 침공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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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2. 도겸의 연주 침공
2.3. 조숭 일가의 몰살
3. 진행
3.1. 조조의 1차 침공
3.2. 조조의 2차 침공
4. 결과
5. 영향
5.1. 연주(兗州)의 반기
5.2. 여포의 부활과 유비의 등장
5.3. 서주(徐州) 출신 인물들
5.4. 형주(荊州) 백성들의 도주
5.5. 조씨 몰살의 나비효과
5.6. 후대의 악명
6. 서주대학살
6.1. 학살의 이유
6.2. 당시의 여론
6.3. 학살에 대한 해석
6.4. 《삼국지연의》에서의 서술
6.5.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후한 말기의 군벌 조조가 2차례에 걸쳐 서주를 침공한 사건.

침공 당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한국, 일본, 중국의 『삼국지』 팬덤에서는 주로 서주 대학살이라고 부르나[1] 역사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는 아니다.

본래 조숭은 초[2]에 살고 있었지만, 군벌들이 합심하여 동탁을 토벌할 때 그곳은 전쟁터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서 난을 피한 것이다. 당시 조숭은 서주 낭야로 가서 난을 피했다고 한다.

이후 조조가 연주를 근거지로 세력이 안정되자, 아들의 초청을 받은 조숭은 연주로 향한다. 다만 이때는 조조가 도겸의 침공을 막은 이후로 낭야에 머물던 조숭은 아들과 도겸이 싸우자 불안함을 느꼈을 수 있다. 이후 전재산을 들고 연주로 향하던 조숭은 도겸의 수하인 장개 일당에게 죽는데 이 때 조숭과 조조의 동생인 조덕을 비롯해 일족들이 살해당한다.

193년, 조조가 도겸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다.

194년, 다시 아버지 복수의 명분으로 서주에 쳐들어갔는데 이때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후퇴한다.


2. 배경[편집]



2.1. 군웅할거[편집]


동탁의 전횡에 반발해 제후들이 동맹을 맺었다. 원술의 부하 손견이 분전해 낙양까지 진군했으나 동탁은 이미 장안으로 천도한 뒤였다. 이후 제후들은 유우, 조조, 유표 등 친원소파와 공손찬, 도겸, 손견 등 친원술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두 군벌 세력은 다른 군벌들과 제휴를 맺어가며 서로 서로를 견제했는데, 이것이 공손찬의 종제 공손월의 죽음으로 터졌다.[3] 192년 공손찬은 대군을 이끌고 계교 전투에서 싸웠으나 국의의 전술에 휘말려 크게 패했다.


2.2. 도겸의 연주 침공[편집]


  • 1차 침공

우독(于毒), 백요(白繞), 수고(眭固)[4]

등의 흑산적(黑山賊) 10여만 명이 위군, 동군을 공략하였으나, 왕굉이 막을 수 없어, 태조[5]가 병사를 이끌고 동군에 들어가 복양(濮陽)에서 백요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원소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태조를 동군 태수로 삼고, 동무양(東武陽)을 다스리게 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이 당시만 해도 조조는 원소 산하의 군벌이었다.[6]

원술이 원소와 서로 틈이 벌어지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손찬은 유비를 고당(高唐-청주 평원군 고당현)에, 선경(單經)을 평원(平原-평원군 평원현)에, 도겸을 발간(發幹-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핍박했다. 태조가 원소와 만나 이를 공격해 모두 격파했다.

『삼국지』 「무제기」


조조는 192년 여름에 황건적을 크게 격파해 이기고 연주목에 오르며 청주병을 얻었다. 이때 원소와 원술-공손찬은 크게 대립하고 있었고, 마침내 계교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계교 전투에서 대패한 공손찬은 원소의 장수 최거업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평원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192년 겨울, 공손찬은 휘하의 연주자사 선경, 별부사마 유비와 동맹인 서주목 도겸의 군대로 원소-조조를 쳤으나, 원소와 조조는 이를 격파했다. 선경은 평원군 평원현, 유비는 평원군 고당현에 주둔한데 비해 도겸은 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했다. 즉 도겸은 조조의 세력권인 연주 깊숙히 침공해 있었던 것이다.

  • 2차 침공
193년 초 헌제는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와 태복(太僕) 조기(趙岐)를 시켜 공손찬과 원소, 둘의 분쟁을 화해하게 했다. 이 시기 원담유비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섰다. 하지만 원술-도겸과 조조의 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4년(193) 봄, 견성(鄄城)에 주둔하였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군량보급로를 끊으니, 원술이 군대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封丘)에 주둔하였으며, 흑산의 나머지 적들과 어부라(남흉노 선우)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이 장수 유상(劉詳)을 시켜 광정(匡亭)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광정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원술이 퇴각하여 봉구를 보전하니, 마침내 이를 포위하였고, 합쳐지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으로 패주하니,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도착하여 도랑의 물을 터뜨려 성을 수공(水攻)하였다. 영릉(寧陵)으로 패주하니, 또 추격하여 구강(九江)으로 패주시켰다.

여름, 태조가 돌아와 정도(定陶)에 주둔하였다.

하비(下邳)사람 궐선(闕宣)이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천자라 자칭하였다. 서주목 도겸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와 비(費)현을 취하고, 임성을 공략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193년 도겸은 궐선과 함께 다시 군대를 일으켜 연주 태산군의 두 현을 취하고 임성국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 화현과 비현은 다른 곳에서도 언급된다.

흥평(興平) 원년(194) 봄, 태조가 서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 태조의 부친 조숭(曹嵩)이 관직을 버린 후에 초현으로 돌아왔는데, 동탁의 난 때, 난을 피해 낭야(瑯邪)에 가 있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래서 태조가 동쪽으로 정벌하여 복수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주 :《세어》에 이르길 「조숭은 태산군 화현에 있었다. 태조가 태산군 태수 응소(應劭)에게 영을 내려 자기 가족을 연주로 모시게 했는데, 응소의 병력이 채 이르기 전에, 도겸이 비밀리에 보낸 수천 기에 붙잡혔다. 조숭의 가족들은 응소의 영접인 줄 알고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도겸의 병사가 이르자, 태조의 동생 조덕(曹德)을 문 가운데서 죽였다. 조숭이 두려워 하자, 먼저 그 첩을 나가게 했는데, 첩이 뚱뚱하여 문을 나갈 수 없었다. 조숭이 측간으로 달아나다 첩과 함께 해를 입고, 온 집안이 모두 죽었다. 응소가 두려워서 관직을 버리고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후에 태조가 기주(冀州)를 평정하니, 응소는 이때 이미 죽었다.」고 한다. 위요(韋曜)의 《오서》(吳書)에 이르길 「태조가 조숭을 맞이하며 보낸 물자수레가 200대였다. 도겸은 도위(都尉) 장개(張闓)를 보내 기병 200명을 거느리고 호위하며 전송하게 했다. 장개가 태산군의 화현과 비현 사이에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여, 이로 인해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그 허물을 도겸에게 돌리고 그래서 정벌한 것이다」라 한다.

『삼국지』 「무제기」



2.3. 조숭 일가의 몰살[편집]


조숭이 살해당한 정확한 년도와 날짜는 불분명하지만 대략적으로 초평 4년(193년)으로 추정된다.[7] 『삼국지』 「무제기」, 『삼국지』 「도겸전」, 『후한서』 「도겸열전」에는 모두 초평 4년(19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고, 「무제기」에 '193년 가을, 조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분명 존재하며, 이때 명분이 조숭 때문이었다. 『삼국지』 「도겸전」과 『후한서』 「도겸열전」을 봐도 사건의 발생은 1차 침공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기에 따르면 193년에 조조가 1차 침공의 명분으로 일가의 학살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조숭 일가를 몰살한 주체가 사서마다 다른데, 두 가지의 기록이 전해진다.

하나는 『삼국지』 「무제기」의 주석 《오서》의 기록으로 조조가 보낸 짐수레만 100여 대였고, 도겸이 도위 장개를 보내 조숭을 허창까지 호송해주려 했는데, 본래 도적 출신이었던 장개가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후 회남으로 도주했으며, 조조는 이를 도겸의 허물로 돌리고 이 때문에 그를 정벌했다고 한다. 『삼국지』 「도겸전」에도 《오서》의 기록만 주석으로 인용하여 같은 기록이 서술되어 있다. 『후한서』 「도겸열전」도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졸들이 조숭의 재보에 눈이 뒤집혀 그를 습격하여 죽여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자치통감』에서도 '전임 태위 조숭이 난을 피하여 낭야에 있었는데, 아들 조조가 태산 태수 응소에게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조숭의 치중은 100여 대였다.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켰는데 병사들이 조숭의 재보를 탐내 화현과 비현 사이에서 조숭을 엄습하여 죽이고, 아울러 어린 아들 조덕추도 죽였다.'라고 되어 있다.

다른 기록은 역시 『삼국지』 「무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세어』[8]의 기록으로 도겸이 수천 기병을 보내 조숭을 살해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후한서』 「응소열전」의 기록도 이와 같다. 그러나 『세어』 자체가 책의 성격상 사실에 풍문이나 과장이 좀 섞인 쪽에 가까운지라 사서로서는 가치가 낮고, 『오서』의 내용인 '조조는 격문을 띄워 도겸에게 허물을 씌우고 서주를 정벌하려고 했다'는 기록도 있는지라 이후의 역사 기록들도 『오서』, 『자치통감』, 「도겸전」 쪽의 내용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편이다.


3. 진행[편집]



3.1. 조조의 1차 침공[편집]


이에 조조도겸을 공격한다.

초평(初平) 4년 (AD 193)에 조조(太祖)는 도겸을 정벌하고 십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팽성(彭城)에서 도겸과 크게 싸웠다. 도겸의 군대는 패한 후 도주하였는데, 죽은 자의 수가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사수(泗水)는 시체로 막혀 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도겸은 물러나 담현(郯)을 지켰다. 조조는 양식이 부족하였으므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조공(曹公)의 부친이 도겸의 관할하에 있던 태산(泰山)에서 살해되니, 그 허물은 당연히 도겸에게 돌아갔다. 태조는 도겸을 토벌하려고 생각했으나 그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도겸의 주와 군의 군대를 일시에 해산시키도록 할 것을 상주했다.

태조가 팽성(彭城)으로 진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자 도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저항하였고, 청주자사 전해(田楷)가 와서 도겸을 구하려고 하니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 「오서」[9]

신 송지의 의견으로, 이때 천자는 장안에 있었고, 조공이 아직 정무를 장악하지 않았을 때이다. 파병(罷兵)의 조서는 조씨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국지』 「도겸전」


태조가 도겸(陶謙)을 정벌할 때, 자기 집안에 일러두길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탁에게 가서 의지하라"고 했다. 후에 돌아와 맹탁을 만나고서는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친밀함이 이와 같았다.

『삼국지』 「장막전」


서주 정벌에 종군하였는데, 조인은 항상 기병을 지휘하여 군의 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陶謙)의 장수 여유(呂由)를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돌아와 팽성(彭城)에서 대군과 합류하여 도겸군을 대파했다.

『삼국지』 「조인전」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중략)

흥평(興平) 원년(194년) 봄, 태조가 서주(徐州)에서 돌아왔다. 당초 태조의 부친 조숭은 관직을 떠나 초(譙)로 돌아갔었는데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낭야(瑯邪)로 피난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태조는 원수를 갚기 위해 동쪽을 정벌한 것이다.

『삼국지』 「무제기」


태조(조조)가 당도하여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만 명을 갱살(坑殺)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도겸이 그 군사를 이끌고 원무(팽성 원무현)에 주둔하자 태조는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을 따라 취려, 수릉, 하구의 여러 현들을 공격해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조만전」


한나라 초평(初平) 4년, 조조가 도겸을 쳐서 팽성의 부양(傅陽)을 격파했다. 도겸이 담성(郯城)으로 물러나 지키니, 조조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이에 되돌아갔다. (조조는) 지나는 길에 있던 추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하여 모두 도륙(屠戮)했다. 무릇 남녀 수십 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섯 현의 성읍(城保=城堡)[10]

에는 사람의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 처음에 삼보(三輔)[11]가 이각(李傕)의 난을 당하니,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다가(流移) 도겸에게 의탁하였는데 모두 (이 때) 다 죽었다(殲).[12]

『후한서』 「도겸열전」


(초평 4년) 가을,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공격해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웠는데, 도겸군이 패하자 달아나 담현을 보전했다. 당초, 경(京, 장안), 락(雒, 낙양)에서 동탁의 난을 만나자 백성들이 유이(流移-유망, 유랑)하여 동쪽으로 나와 서주 땅(徐土)에 의탁한 자가 많았는데, 조조가 당도하여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조조는 담현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이내 떠나서 취려(取慮), 수릉, 하구의 여러 현을 공격해 차지하고 이들을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자치통감』


조조가 일단 도겸의 세력이 강한 것을 봐서 외교전을 시도했다는 일화까지 나올 정도로 조조는 도겸을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친족을 진류 태수 장막에게 부탁했다.

출진한 조조는 조인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삼아 도겸군을 격파하고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조인의 기병 별동대와 합류한 뒤 팽성으로 진격하여 많은 인민들을 죽였고(多殺人民)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온 도겸과 전투를 치뤘다. 도겸은 대패해 정사에 따르면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기가 죽은 도겸은 함부로 나오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장기간의 원정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양식이 부족해져서 군사를 물렸다.

청주자사 전해가 구원군으로 내려오고 있었기에, 조조군은 이때 퇴각하면서 취려, 수릉, 하구 등 다섯 고을을 도륙한다.

문제가 되는 건, 「조만전」에는 팽성국 원무현으로 후퇴했다는 부분이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담현으로 후퇴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지명 오기 같은 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자치통감』은 진수의 『삼국지』와 범엽의 『후한서』에 나온대로 담현으로 후퇴했다고 판단하여 기록했다.



3.2. 조조의 2차 침공[편집]


(194년)여름, 순욱(荀彧), 정욱(程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城)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東海)에까지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 담(郯)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曹豹)가 유비와 함께 담(郯)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한 곳이 많았다.

손성(孫盛)이 말했다 - 무릇 죄악을 정벌하여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 예로부터 아름다운 궤범(軌範)이다. 그러나 도겸의 죄로 말미암아 그 속부(屬部)를 잔륙한 것은 과오이다.

『삼국지』 「무제기」


태조가 도겸을 공격할 때 하후돈을 남겨 복양(濮陽)을 수비하게 했다.

『삼국지』 「하후돈전」


비(費), 화(華), 즉묵(卽墨), 개양(開陽) 공격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삼국지』 「조인전」


태조가 우금을 불러 대화를 나누어 보고 군사마(軍司馬)로 삼고, 군을 이끌고 서주(徐州)로 나아가 광위(廣威)를 공격하게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삼국지』 「우금전」, 다만 1차 침공 때인지 2차 침공 때인지 불확실하다.


흥평(興平) 원년(194년)에 조조는 재차 동쪽 정벌에 나서서 낭야(瑯邪)와 동해(東海)의 몇 개 현을 공략하여 평정시켰다. 도겸은 두려워하며 단양(丹楊)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마침 이때, 장막(張邈)이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呂布)를 맞아들였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돌려 여포를 공격했다. 이 해 도겸이 병으로 죽었다.

『삼국지』「도겸전」


흥평(興平) 원년, 조조(曹操)가 다시 도겸을 쳐서 낭야(琅邪)와 동해(東海)의 여러 현을 공략하여 평정하니, 도겸은 모면하지 못할까 두려워 단양(丹陽)으로 도주(逃走) 하고자 하였다. 마침, 장막(張邈)이 여포(呂布)를 맞아들여 연주(兗州)를 점거하니, 조조가 되돌아와 여포를 쳤다. 이 해에 도겸이 병으로 죽었다.

『후한서』「도겸열전」


조조가 사마 순욱, 수장령 정욱을 시켜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가서 도겸을 공격했다. 땅을 공략하며 마침내 낭야, 동해에 까지 이르렀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시켰다.

『자치통감』

194년 여름(『자치통감』에 따르면 4월),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조는 2개월만에 서주로 돌아와 도겸을 공격했다. 양분은 동해군 양분현을 말하고, 담현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다.

진수, 손성, 배송지, 사마광 등이 모두 잔륙, 잔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무제기」는 여포가 연주를 차지해 조조가 돌아가는 길에 담현을 지나는데 조표유비가 동쪽에서 요격했다고 한다. 조조는 이를 격파하고 담현을 지나쳐 담현 서쪽의 양분현을 함락시켰다. 「조인전」에서는 조인이 비, 화, 즉묵, 개양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고 한다. 여기서 '별장'에 해당되는 건 「무제기」의 기록을 볼 때, 조표와 유비로 판단된다.



4. 결과[편집]


서주를 지배하고, 연주, 예주[13], 양주(楊州)의 일부까지 영향력을 미치던 도겸의 힘은 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하여 크게 쇠퇴했다. 연주의 태산군과 임성국을 잃고, 팽성국은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졌으며, 낭야국과 동해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광릉군도 설례와 도겸의 동맹인 착융의 약탈을 겪고, 서주백을 자칭한 원술의 침입을 받았다. 원술은 오경을 광릉태수로 임명하고, 노숙에게는 동성현장을 권유하였다. 장소와 장굉 등 서주 명사들의 강동 이주 시기도 이때로 여겨진다.

팽성상 설례와 하비상 착융은 양주로 도망치고, 그 와중에 광릉태수 조욱은 착융에게 죽었다.. 기도위 장패는 독립해 소규모 군벌이 되었다.

결국 유비는 하비로 처소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의외로 하비의 피해가 적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 하비는 유비, 여포, 원술, 조조의 각축장으로 변해 노숙에게 "회수와 사수 사이에는 자손을 남길 땅이 없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당장 조조에게 털린 후에 진등이 유비한테 호구수가 100만이라며 풍요롭다고 말했는데,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서주의 호구수는 270만이며 도겸 통치기에 각지의 유민까지 몰려 인구가 불어난 상황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100만호만 남았다는 것은 피해가 컸다는 뜻이다. 이 점은 청나라의 역사학자 심가본도 지적했다.

이런 인구 감소는 단순히 민간인 학살뿐만 아니라 대규모 유민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조는 이나 같은 주요 가축까지 남기지 않을 정도로 서주에서 철저한 파괴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에, 서주 주민들이 잠시 전란을 피해 피신했더라도 경제 기반이 파괴되어 그 상태에서 바로 유민이 되었을 확률도 높다. 또 조조의 서주 침공은 2년에 걸친 장기간의 원정이었으며, 침공 범위도 넓었으므로 이 기간 동안 많은 인구가 전란을 피해 서주를 떠났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원래 부유했던 서주에 의탁한 유민들이 원래부터 서주에 살던 사람들과 더불어 잔륙되고, 나머지도 도망친 것으로, 조조는 잔륙과 함께 대량의 유민을 양산한 것이다.

조조와 여포가 싸우는 연주보다는 상태가 좋았는지, 아니면 하비 일대는 멀쩡했는지 거듭된 싸움으로 인해 식량이 궁해진 조조가 서주를 다시 치려 하자,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서주가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위벌(威罰)이 실행되어 그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의 치욕을 생각하니 필시 사람들마다 스스로 지키려 하며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격파할 수 있다 해도 가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삼국지』 「순욱전」[14]

[15]

여기서 에 '조만전'이 주석으로 들어간다.

순욱의 조언은 서주가 연주보다 방어가 탄탄하다기 보다는 일단 본거지인 연주를 먼저 찾는 게 중요하지, 가뜩이나 조조가 인심을 잃은 서주 땅을 얻어봐야 소용 없다는 뜻이다. 이는 조조군 최고의 모사이면서 당대의 명사였던 순욱이 전략적 행보를 조언할 때 민심의 향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다. 또한 조조의 침공 당시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는 것을 조조군 내부에서 말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 모사인 순욱이나, 실제 선봉에 섰던 조인이나, 원소의 장수로서 학살에 참여했다가 조조에게 반해 귀순한 주령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군량 담당관이었던 하후연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정욱 같은 인물들도 알았을 것이다. 조조가 헌제를 옹립한 후 들어온 순유곽가도 과거의 이런 행적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 비슷한 행동을 했던 하후연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순욱, 조인, 주령만큼 특수성이 있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그 외에도 제갈량의 일가가 형주로 이주한 시기가 서주 대학살이 벌어진 시기와 비슷해서, 제갈량의 집안이 서주 대학살로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실제로 『자치통감』에 나오는 조조의 침공 지역에는 제갈량의 고향인 서주 냥야도 포함되어 있었으며[16], 『삼국지』 「제갈근전」에는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이 고향 친구였던 은모를 변호하면서 한 말 중에 "자신과 은모가 고향의 엄청난 재난 때문에 그곳의 생명들이 거의 다 목숨을 잃어 고향을 버리고 피난했다"는 증언을 한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 제갈량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5. 영향[편집]



5.1. 연주(兗州)의 반기[편집]


「여포전」 주석에 진궁이 조조에게 반심을 품은 이유가 "스스로 의심을 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장막이 도박에 응한 것을 바탕으로, 연주 호족들의 조조에 대한 불만 및 공포와 연주 주민들에게 내재되어 있었던 조조에 대한 공포심이 두 차례에 이은 서주 대학살로 극대화되어 반란까지 이어졌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17]

연주를 빼앗기게 된 계기가 된 서주 침공 당시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조는 1차 침공 때, 8개월이나 서주에 머물며 도겸을 공격했고, 식량 문제와 전해, 유비의 구원으로 인해 연주로 돌아간 지 불과 두 달만에 다시 서주로 가서 도겸을 공격했다. 이렇게 서주에서 너무 오래 머문 나머지 연주를 직접 관리하지 못해 반란 세력이 결집할 시간적 여유를 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식간에 연주의 거의 모든 지역이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조조가 서주를 공략하는 동안 여포는 당시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를 공격했고, 순욱이 지킨 3개의 성을 제외한 연주 전 지방이 함락되었다. 연주가 공격당했을 때 연주 호족들과 주민들이 조조에게 반발해서 모반을 꾀했고, 장막, 진궁여포와 손잡으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여포는 원소의 객장이었다가 쫓겨나 장양에게 의탁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진궁과 장막은 당시 조조 진영 내에서 별로 힘 있는 세력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연주를 빠르게 점령하고, 조조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것은 조조에게 등을 돌린 연주 호족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지』 「무제기」와 「장막전」에서 여포군이 무력만으로 점령한 게 아니라 연주 지역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

단, 이를 단순히 서주 대학살만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 연주 호족들의 이탈은 애시당초 조조가 조정에서 임명된 정식 연주자사도 내쫓은, 원소의 수하로서 연주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는 태생적인 단점이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조조가 변양 등 연주 호족들을 함부로 잔혹하게 죽여 호족들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한 것 또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소의 격문에서도 지적하는 사안이다. 또한 장막이 조조에게 반기를 든 이유는 신변 때문으로 조조가 장막을 옹호하기는 했지만, 조조가 원소의 명에 따라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원소와 조조는 갑을 관계였기 때문이다.

장막은 원소-조조 라인에서 밀려났지만 나름대로의 명성은 있었고, 당시 여포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남부에는 아직 원술이 건재했고, 북부에는 공손찬이 조조의 스폰서인 원소와 적대하고 있었다. 진궁이 굳이 잘 나가는 조조의 세력을 박차고 나간 건 세력 내부에서 나가리가 되었지만, 명성과 실력이 있는 자들끼리 힘을 합쳐서 독자적인 세력이 되는 선택지도 한 번 해볼 만한 도박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작금에 천하가 갈라지고 무너져서 영웅호걸들이 나란히 일어나고 있는데, 그대는 1,000리나 되는 지역의 무리를 거느리고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맡고도 칼자루를 쥔 채 사방을 둘러보고만 있으니, (다른 제후들과 같이) 충분히 호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연주의 군대는 동쪽으로 정벌을 간 탓에 (연주가) 비어있습니다. 여포는 장사이므로 그와 싸워서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를 임시로 맞이하여 함께 연주를 다스리고 있다가, 천하의 형세를 보아 때에 따라 사태가 변하기를 기다려 응대한다면 이 역시 한 시대를 종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궁


그렇다 해도 반군이 순식간에 동아, 범, 견성 3개 현을 제외한 연주 전역을 장악했다는 사실에서 조조가 서주 전선에 무리할 정도로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필요 이상의 학살로 서주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반란세력에게 충분한 기회를 허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무기력하게 연주를 상실한 것이 학살에 대한 반감은 아닐지라도 서주 침공과 학살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이는 일각에서 말하는 서주지역 학살의 전략성을 반박하는 논거가 되기도 한다. 당장 본거지 연주가 위태로울 정도로 병력을 빼놓고서는 세월아네월아 학살이나 벌이고 있는 게 무슨 전략적 판단이냐는 것이다.

결국 조조가 194년 다시 도겸을 공격하자 장막의 동생 장초와 진궁 등이 접근해 여포를 불러 그를 연주목으로 세우며 조조와 싸울 것을 권했다. 장막의 높은 명성은 조조에 대한 민심 이탈로 이어져 연주 전역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서주와 연주에서 악명을 쌓고 오랜 기간 연주를 관리하지 않아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았던 조조는 일생 최악의 수세에 몰렸다.


5.2. 여포의 부활과 유비의 등장[편집]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조는 회군을 하고 결국 도겸에 대한 복수도, 서주를 손에 넣는 것도 실패했다.

공손찬의 휘하에 있던 유비는 원소의 공격을 받고 있던 공손찬을 떠나 본격적인 군벌로 자리잡는다. 유비의 부하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반대했지만, 유비는 나름대로 도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서주로 향했다.

처음엔 부하들의 우려대로 서주로 와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으나, 조조의 본거지 연주가 배신하여 조조가 후퇴하면서 결과적으로 서주행은 성공했다. 그렇게 서주는 뜬금없이 유비에게 넘어갔고, 유비는 본격적인 군벌 생활을 시작한다. 조조는 협천자를 한 후, 유비에게 '진동장군 의성정후'라는 관직을 내려서 서주 지배를 묵인한다.

이 때 원소는 한때 공손찬의 객장이었고, 국경지대에서 싸운 적도 있는 유비가 서주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현덕은 홍아(고아)하고 신의가 있소. 지금 서주가 그를 즐거이 추대하니 실로 내 소망에 부합하오."라고 받아들였다. 공손찬의 객장으로 원소군과 싸운 적이 있는 유비가 하남(河南) 군벌이 되었음에도 자기 뜻대로 되었다고 수긍한 것이다. 원소는 하북(河北)에서 자신과 공손찬이 싸우는 동안 상관도 없을 터인 하남(河南)으로 내려간 시점에서 유비의 본질을 파악하고 하북의 공손찬을 돕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다.[19]

유비는 이 사건으로 학살자에 맞서는 영웅의 명성과 당위성을 얻었으며, 실제로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천 명의 전쟁 난민들을 거두어 보호하는 등 실질적인 행동을 취해서 어느 지역을 가든 호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유비가 서주를 잃고 난 이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도 말년에 촉한의 황제까지 오를 수 있었던 기반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여포와 유비는 두고 두고 조조의 발목을 잡았다. 원소공손찬을 격파하고, 하북 전역을 장악하면서 기반을 다지는 동안 조조는 여포와 5년 넘게 싸워야 했고, 관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보다 비교적 열세에 놓였다.

여포는 도중에 꺾었지만 유비는 서주 → 하북 → 여남 → 형주 → 익주 순으로 도망가며 끝까지 맞서싸워서 조조의 천하통일을 저지했다.


5.3. 서주(徐州) 출신 인물들[편집]


수많은 서주(徐州) 호족들이 전란을 피해 타 지역으로 피난갔는데 주로 간 곳은 양주(揚州)와 형주(荊州)였다. 동오에서 본거지 양주 다음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이 서주의 전란을 피해 양주로 이주한 서주 사람들이었다. 동오의 명신인 제갈근, 보즐, 노숙, 여대가 모두 서주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하 서주 출신 인물들과 당시 서주에 있던 인물들의 목록이다.

  • 조위
    • 진등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20]
    • 왕랑 -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21]
    • 장패 - 도겸으로부터 기도위의 관직을 받았다.
    • 제갈탄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촉한
    • 미축 -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구현(朐縣)
    • 제갈량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손오
    • 제갈근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서성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거현(莒縣)
    • 장소 - 서주(徐州) 팽성국(彭城國)
    • 엄준 - 서주(徐州) 팽성국(彭城國)
    • 보즐 - 서주(徐州) 임회군(臨淮郡) 회음현(淮陰縣)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회음현(淮陰縣)
    • 노숙 - 서주(徐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 서주(徐州) 하비국(下邳國) 동성현(東城縣)
    • 여대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해릉현(海陵縣)

참고로 노숙의 고향인 임회군은 서한 시절 때 설치된 행정구역으로, 동한 말 하비국에 편입되었다.

다만 노숙의 고향인 동성현은 회수 이남으로 조조와 도겸의 분쟁 지역과 어느 정도 거리가 존재하고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술이 노숙의 명성을 듣고 동성현의 장으로 임명했으나 노숙은 원술이 공업을 세우기에 부족하다 보고 사람들을 인솔해 남쪽의 거소현으로 가서 주유를 따랐다. 주유가 동쪽으로 장강을 건널 때, 그를 따라 동행하다가 곡아현에 거처를 정하고 머물렀다.

『삼국지』 「노숙전」


노숙이 거소현으로 간 것은 원술이 공업을 이루기 부족했다고 봤기 때문이지 조조군의 학살을 피해서 간 것이 아니다.

여대의 고향인 해릉현 역시 장강 바로 북쪽으로 조조의 침공 지역이 아니었고 장소가 서주를 떠난 것도 조조의 서주 침공 이전에 관리와 갈등이 있어서였다.

정리하면 서주의 전란을 피해서 피난간 인재는 제갈근, 제갈량 형제와 서성, 보즐 정도가 된다. 이들에 대한 묘사는 난을 피해 강동/형주로 갔다 정도이지 구체적인 시점이 나와있지 않다.

여범은 여남군 사람인데 난을 피해 수춘으로 가서 손책을 만났으며, 이후 그를 따라 강동으로 갔다고 한다.

호종은 여남군 사람이며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

정병은 여남군 사람이며 난을 피해 교주로 갔다.

복양흥은 진류 출신이고 아버지 복양일이 난리를 피해서 강동으로 내려왔다.

법정, 맹달 역시 난을 피해 익주로 들어간 사례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난을 피해 익주, 형주, 양주로 내려간 사람은 결코 드물지 않다. 이들이 조조군의 학살을 피해서 내려갔다는 묘사가 존재하거나 그 시점이 조조군의 서주 침공이 아닌 이상, 조조를 피해 내려갔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들이 황건적을 피해 내려갔을 수도, 착융의 수탈을 피해 내려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명사는 아니지만 손권의 아내 보연사도 보즐의 일족으로, 난을 피해서 여강으로 피신했다가 강남으로 이주한 뒤 손권의 아내가 되었다.

유독 동오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 「오지」나 오나라에서 지어진 「조만전」에 조조의 잔인함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서주에서 동오로 내려온 내려온 유랑민들의 기억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5.4. 형주(荊州) 백성들의 도주[편집]


조조가 형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수만 명의 형주 사람들은 유비를 따라 도주했다. 서주에서 형주로 도망친 난민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때 도주한 형주 사람들 중에는 서주에서 형주로 도망쳤다가 재도주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당시 유비는 부하들이 진언했듯이 서둘러 강릉으로 가서 조조와 맞서야 했지만, 결국 백성들과 형주의 사족들이 귀부하자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하며 함께 가려 했고, 형주 사람들은 오로지 '조조가 두려웠기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죽음의 위기를 불사하면서까지 도망쳤다.

대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면, 반드시 고향을 기꺼이 버리지 않는데, 하물며 선주가 달아난 이후에, 그를 따르면 필시 살 수 없었고, 유종이 이미 항복해, 떠나지 않았으면 필시 죽지 않았으리라! 내가 형주의 백성을 헤아리니,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며, 닭과 개도 남겨두지 않았기에, 선주를 따라 달아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청나라 말기의 역사가 전진굉(錢振鍠)의 평

유비는 언론 플레이나 병력 문제 등의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조조군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 난민들과 동행했으나 조조군의 공격으로 수십명과 함께 도주한다.


5.5. 조씨 몰살의 나비효과[편집]


조숭은 측간으로 달아났으나, 첩과 함께 해를 입었고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22]

조숭이 살해당하면서 조조의 동생 조덕 등의 조씨 일족들은 몰살당했다. 즉 조씨에게만 군권을 나눠주는 위나라의 관행에서 잠재적인 정권 핵심 엘리트 층이 모조리 날아간 것과 동급의 충격이었다. 군부 엘리트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면, 조조가 받은 가장 큰 피해일 수도 있다. 이때의 혼란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휴는 아빠 따라 오군에 갔다가 조씨 집안에 들어오면서 천리마 소리를 듣고, 조씨가 아니라 조씨를 하사받았다는 소문이 있는 조진이 후대에 조씨의 주요 인물로 떠오른다.



5.6. 후대의 악명[편집]


제갈근이 자신과 동향 사람인 은모를 변호하며 한 말인데, 그 속에서 서주 대학살에 대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엿볼 수 있다.

저와 은모의 고향은 난을 만나 뒤집어져, 생명들이 거의 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상의 묘를 버리고, 노인과 아이를 업으며, 풀을 헤치며 나가다가 성화에 귀의하게 되어...(후략)

瑾與殷模等遭本州傾覆,生類殄盡。棄墳墓,攜老弱,披草萊,歸聖化...

서주 대학살의 생존자인 제갈근의 증언에서 나타났듯이, 당시 서주 백성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훗날 유비조조에게 패퇴하면서 서주는 조위의 차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서주 사람들이 조조를 좋아했을까?

이는 서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원소 사후 기주, 유주 사람들이 원상을 따라 대규모로 이주한 것[24] 조조가 형주를 침공할 때 수만 명의 형주 사람들이 조조에 대한 공포로 고향을 버리고 도주한 사건도 있었다.



6. 서주대학살[편집]


1차 침공 당시 조조는 도겸의 관할지인 서주에 쳐들어갔지만 이기지 못했고, 서주의 백성들을 학살하며 돌아간다.

삼국지에서 이 정도의 학살은 유례가 없고, 지휘관인 조조의 용인 또는 주도가 있었거나 조조군이 지휘관의 명령이 안먹힐 정도로 군기가 안잡혀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한 진수마저 서주대학살은 살육이란 단어로 묘사했다.[26][27]

2차 침공 때 다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백성의 시체로 강이 메워졌다'고 기록되었고, 진수 역시 백성을 잔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도륙된 사람들은 서주 토박이 외에 전란을 피하여 관중에서 이주해 온 피난민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조는 이때를 비롯해서 이후에도 몇 차례 저지른 학살에 대해 죄책감이나 후회가 전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서》에서 조조가 임종을 맞이할 때 완성에서 조앙을 잃고, 정씨와 이혼하게 된 것은 평생의 한으로 남았지만, 그 외에는 후회스러운 건 없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조조가 백성을 학살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조조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친동생과 기타 일족들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조씨 일가를 핵심 군부로 기용했던 그에게 일족의 몰살은 커다란 인적 손실이었고, 그에 대한 분노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사 삼국지》에서 민간인 약탈, 학살 및 포로 학살과 연관성이 전혀 없는 군벌은 거의 적은 편이며, 그 드문 예가 바로 유우오두미도의 장로 세력이다.

유비는 가는 곳마다 객장으로나마 대우 받았던 것 또한 그가 거느린 세력이나 유비 본인이 황제의 밀명을 받은 명분 덩어리였기 때문도 있지만, 백성들을 학살하지 않은 점도 한 몫 했다.[28][29]

오두미도의 장로는 관리를 두지 않고, 오두미도 제자와 신도에게 행정과 사법권을 맡겼으며, 병자에게 자기 과실을 나누어 주거나 의사(義舍)를 설치해 쌀과 고기를 공짜로 의사 안에 두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게 했다. 장로는 조조가 한중을 공격했을 때 파중으로 도주했는데, 측근들이 창고와 재화들을 불태울 것을 간언했으나 장로는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다.'라고 해서 창고에 봉해놓고 떠나, 훗날 조조는 장로가 창고를 불태우지 않은 것을 높이 평가해 열후에 봉한 적이 있었다.



6.1. 학살의 이유[편집]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는 성격이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친구인 원소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비인간적인 만행들을 눈에 안 띄게 자행했다면, 조조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해서 잔악함과 광기를 대놓고 표출했다. 말년에 갈수록 조조의 그런 성향은 심대해졌고, 만행의 수위와 횟수도 심각해졌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해서 도겸을 없애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분풀이로 서주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것이 후대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조조의 속좁은 복수심이 (연주 소실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도겸을 향한 복수는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화를 미쳤다. 조조는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더욱 번져가도록 내버려두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다... (중략) 도겸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에만 눈이 멀어서 자신의 기반을 닦는 것과 동시에 민심을 달래고 또 얻어야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도외시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큰 실책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의 사학자 장야신




6.2. 당시의 여론[편집]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며 인신공양으로 유명한 상나라 이래 잔혹한 일들이 끝도 없이 벌어진 고대 중국에서도 학살자에 대한 시선은 좋지 않았다.

'조위 정통론'을 내세운 정사서인 《정사 삼국지》 '무제기'에서 주인공이자 창업군주인 조조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저자 진수조차도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残戮, 잔인하게 도륙했다, 학살했다)'이라는 잔학한 뉘앙스로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저런 식으로 학살을 표현한 건 이게 유일하다. 역적으로 욕을 먹던 동탁의 양성 학살도 이 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유송 시대의 인물인 배송지도 '(단지 전란을 피해 서주로 온 것 뿐인 무고한)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坑殺, 구덩이에 넣고 파묻어 죽임)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죄 지은 도겸 때문에 그 속부(屬部)를 잔멸시킨 것은 잘못이다.',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라는 다른 사서의 어휘들까지 주석으로 인용하여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후한서]]』의 저자인 유송의 범엽 역시 이 사건에 대해 '죽은 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였다'라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진림을 비롯한 당대 귀족들은 높으신 분들 아니랄까봐 백성 학살은 알 바 아니었고 명사를 죽이는 것을 더 나쁘고 중요하게 보았다. 하지만 이건 높으신 분들의 마인드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고한 자신들을 죽이는 것보다 나쁜 건 없었다.

연주 호족들 중 조조에게 등을 돌리지 않은 호족은 극소수였는데, 조조의 편을 들었던 순욱도 서주보다 여포가 우선이라면서 조조의 행동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격주군문》에는 왜 빠져있는가이다. 사실 관계만 놓고 본다면 원소는 조조의 도겸 공격을 도왔으나 그 내용은 빠져있고, 오히려 조조가 도겸에게 패했다고 써져 있다. 자신과 서주 학살은 연관이 없으며, 서주 학살 자체를 빼놓은 채 도겸에게도 지고 여포에게도 져서 변방을 전전했다고 쓴 것이다.

또 《격주군문》이라고 조조의 악행이 싸그리 다 나오는 것은 아니다. 『후한서』 「효헌제기」에서는 조조가 '협천자'를 한 후 누구를 죽였네 하는 내용도 나오고, 동승도 조조에게 주살당했는데 《격주군문》에는 언급이 없다.결국 《격주군문》이라는 것은 언론플레이이고, 언급이 안 되었다고 하여 없는 사건 혹은 심하지 않은 사건이라 치부할 수도 없는 사안이다. 다만 그 정도가 심하다 해서 당시 지식인층에게 나쁘게 여겨졌다고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게다가 《격주군문》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조조의 반대편에 선 이들은 조조의 정복 행위로 인한 잔학함을 명백히 고발하고 있다.

진림: '스스로 삼공(三公)의 관직을 차지하였으나 그 행위가 걸왕(桀王)과 도적의 모습이며, 나라를 더럽히고 백성들을 학대하였으며 사람과 귀신에게까지 그 독이 풀어졌다. 더욱이 그 천박한 정치는 가혹하고 참혹하였으며, 금령이 잇따라 갖추어져, 주살처럼 좁은 길을 채웠고 함정 구덩이가 길을 막아, 손을 들어 그물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나 발을 딛는 곳마다 덫과 함정을 밟게 되어, 이에 연주와 예주에 걸려들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도성 또한 탄식하는 원망이 있었다.'

유비: '(조조는) 천하를 찢고 어지럽히며 백성과 만물을 잔인하게 훼손했습니다'(한중왕표)

손권: '조조의 행위는 살육과 정벌이 지나쳐'



'난세에는 다들 비슷한 짓을 했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주장이 있다. 몇몇 군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군벌들은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한 기록은 발견되며, 이들도 다른 자들을 비난할 처지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약탈과 군 단위로 이루어진 대규모 학살극은 엄연히 다르고, 당연히 더욱 끔찍한 범죄다. 게다가 조조는 신체 건강한 남성은 기본으로 힘 없는 여성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심지어 가축까지 수십만이나 도륙하여 거대한 강이 시체로 가득 차 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런 규모의 대학살은 그 당시 시대는 물론이고 중국사 전체를 살펴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간혹 단순한 약탈 수준의 사건이나 마을 몇 개 불태운 것을 가지고 피장파장의 논리를 들이대어 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투 병력이 아닌 무고한 시민 학살한 사례는 그 예를 찾기 매우 힘들다. 실제로 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그래서 그 사례가 어떤 게 있느냐?" 라고 물어보면 앞서 말한 피장파장의 논리에 기대어 퉁치는 수준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래 글은 《삼국지》에서 군벌들이 백성들을 괴롭힌 기록들을 모아본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서주 대학살의 규모나 잔혹성 그리고 비전투 병력인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불명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 공손찬은 이민족에게만 강경했던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가혹해 민심을 잃었다.
  • 원소는 '십상시 탄핵을 위해 관군을 흑산적으로 위장해 멀쩡한 마을을 불태우고 계엄령을 내린다. 십상시들을 죽인 뒤 낙양에 소집된 군대와 중앙군을 합쳐 흑산적을 토벌해 진상을 숨긴다'라는 계책을 하진에게 제의했고 하진은 실행했다.
  • 원술은 정당한 명분도 없이 함부로 칭제를 했고, 쓸데없이 사치와 학정을 일삼아서 민심을 잃었다. 게다가 손견과 손책을 시켜 여기저기 마구 들쑤시고 다녔는데 장자와 육강이 그 예시들이다.
  • 동탁은 집권 기간 내내 폭정을 일삼으며 낙양을 황폐화시킨 건 이미 유명하고, 그 사후 장안을 차지한 이각곽사에 의해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자세한 건 삼보의 난을 참조.
  • 여포는 권력 욕심 때문에 상관인 정원을 배신하여 죽이고 동탁 밑으로 들어간 뒤 동탁의 폭정에 협력했다. 이후 동탁과 사이가 틀어져서 동탁을 배신하고 죽인 뒤 이각곽사에게 패배한 후 장안에서 빠져나온 뒤 원소 밑으로 들어가고 기주에서 약탈을 일삼다가 원소에게 찍혀서 기주에서 도망친다. 이후 유비 밑으로 들어갔다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빼앗은 뒤 백성들을 약탈했다.
  • 도겸궐선과 손잡고 약탈을 일삼다가 그를 배신하고 죽였다.
  • 손견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덮어줄 유력자인 원술의 비호를 받기 위해서 원술의 명령을 받아서 남양 태수 장자를 죽이고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손책은 원술 휘하에서 그의 명령으로 육강을 공격했고 양주 군벌로 자리잡았다. 손책 사후 손권이 호족들 때문에 애먹기는 했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다. 손씨 가문의 민간인 학살은 원술과 결별한 이후에는 완전히 끝났다.
  • 사마의공손연의 난 중 요동의 남성 7,000명을 죽이고 그 인골로 전승 기념비를 만들었다.

딱 봐도 조조의 학살과는 결이 다르거나 규모가 차원이 다르다. 공손찬이 백성들에게 가혹했다는 것은 말 안 들으면 죽이고 무참히 수탈하는 일반적인 폭정 수준이었고, 원소는 마을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을 뿐이다. 원술 역시 동탁이나 공손찬 수준의 일반적인 폭군이었고, 여포, 도겸, 손견이 한 것 역시 약탈과 폭정 수준에 그친다.

사마의는 숫자로만 봐도 비교가 안되며, 군으로 징발될 수 있는 남성만 죽였을 뿐이다.[30] 물론 저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지만 서주대학살은 규모가 훨씬 컸다는 것이다.

다만 서진 말기의 혼란기에 석륵이 낙양을 빠져나가는 민간인을 포함한 10만명을 전부 죽인 사례는 존재한다.

이 사건이 축소된 이유는 '위진정통론'에 입각하여 나온 《정사 삼국지》에서 위의 시초, 위의 정통을 이었음을 자처하는 서진이 조조를 띄워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여양 전투 등 조조가 패한 몇몇 전투를 애매하게 기술하고 넘어가거나, 노성 전투를 생략하는 등[31] 후대의 역사가들도 진수의 편향성을 지적하며 다른 자료를 각주로 다는 등 진수는 《삼국지》를 상당히 편향적으로 쓰고 있다.[32] 당장 같은 학살을 두고도 동탁이 영천의 백성들을 학살해 남자는 도적이라며 죽이고 여자는 비첩으로 만들었을 때 동탁은 흉역하기 그지없었다고 《정사 삼국지》는 기록한다. 그런데 조조가 동탁보다 더한 학살을 백성들 상대로 저지를 때 진수는 같은 《삼국지》에서 단지 잔멸했다는 단어만 사용했을 뿐, 조조를 흉악하다고 하지 않았다.



6.3. 학살에 대한 해석[편집]


현대에 서주 대학살이란 명칭이 한국 《삼국지》 팬덤에 의해서 부각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서주 대학살이라는 명칭과 이미지는 한국 팬덤이 만든 것이 아니라 2000년에 한국에서 발간된 한 일본의 《삼국지》 인물평가 서적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33] 그뿐이 아니라 1980년대 중국에서 발간된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34]이 이미 제갈량의 인생 여정을 서주 대학살에서부터 시작하며, 1996년에 발매된 《삼국지 공명전》에서도 제갈량의 어린 시절 회상으로 서주 대학살을 보여주고 있다. 공명전이 흥했으면 서주 대학살이 20년은 일찍 유명해졌을 텐데 오히려 그 문제 많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대세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국내 삼국지 팬덤이 2000년대까지 《정사 삼국지》는 접근할 생각도 못하고 '대체 제갈량이 뭐 때문에 조조 제끼고 유비한테 간 거지?'라며 혼돈에 빠지느라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족히 20~30년 늦은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정사 삼국지》 혹은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실사 영상물, 게임, 만화 등 대중매체를 부단히 생산하면서 인물과 사건에 대해 정사까지 참고하는 해석과 재해석이 활발했던 반면, 한국의 《삼국지》 팬덤은 이런 매체 생산이 더뎠다. 물론 《고우영 삼국지》 같은 만화 작품들은 적잖이 나왔지만, 그 이전에 《삼국지연의》의 정역·완역 자체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모종강본 완역본》 나온 게 2000년대 후반의 일이니 말 다했다. 이문열은 제갈량이 조조에게 안 간 건 인재들이 넘쳐나니 자기가 가봤자 별로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 뻔해서 그랬다는 주장을 정설처럼 내놓았다. 정작 배송지는 제갈량이 최주평에게 '님이 조조 쪽에 붙어봤자 조조는 수많은 선비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눈에 띄지도 못할 거임'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제갈량 정도라면 아무리 조조 휘하에 선비가 많다 한들 출세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을 거'라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배송지의 활동연대는 제갈량이 죽은 후 20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1700년 넘게 후대 인물인 이문열보다 훨씬 가깝고, 오늘날에는 정사를 제한적으로 접한 소설가인 이문열과 달리 당대의 실존했던 기록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배송지의 의견이 설득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서주의 대학살은 당시부터 조조의 나쁜 이미지를 만들고 쌓아나가는 데 일조한 사건이었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인권 사상이 없었던 고대의 역사가들에게는 민중에 대한 대량학살보다는 자기와 같은 신분의 귀족 유명인사를 한두 명 죽이는 것이 더 크게 악행의 이미지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수의 《삼국지》나 《후한서》 등의 기록을 보면 서주에서의 대학살보다는 오히려 현대에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명사인 변양을 살해한 일이 크게 언급되어 있고, 진궁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끌어들인 사건에 대한 설명, 진림의 격문 등에는 서주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진림의 격문에서는 백성을 탄압했다며 천명을 거스른다는 내용보다는 조조의 선대인 조등조숭을 두고 대대로 썩어빠진 가문이라며 비난하는 내용이 더 많다. #

다만 진림의 격문에 서주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이유가 있다. 위에 설명되어 있듯이 조조의 학살을 강조하면 도리어 군웅들이 조조에게 두려움을 품고 싸우려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데다가, 또한 원소는 서주 침공 당시 장수 주령을 보내 지원했으므로 이 문제에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을 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주령을 보내 지원한 것은 원소가 '조조가 차마 저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모르고 지원한 것'이라고 말하면 되는 부분이다. 애초에 조조는 초기에 원소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며 협천자까지 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대해 원소는 상술한 논리로 대응했다. 이를 볼 때 당대 지식인들의 눈으로 볼 때 서주에서의 학살은 명사 살해보다는 다소 중요도가 낮은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이 당시에 중요도가 낮았던 사건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조의 악행을 상당히 부각시킨 《삼국지연의》에서는 언급되지만 관련된 전설이나 경극 같은 것이 찾아보기 어렵다라는 걸 근거로 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서주 대학살이 당대의 지식인들은 물론 민중들에게도 별 거 아닌 사건이었다고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 당시와 얼마 시간차가 없는 남북조시대의 《세설신어》 같은 문헌에도 조조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는 걸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35] 하지만 세설신어는 유송 무제의 조카인 임천왕 유의경이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인불 비평의 풍조를 배경으로 지식인들의 일화를 모아서 편찬한 책으로 귀족층의 문화이지 서민 문화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결정적으로 애초에 중국 역사상 어느 학살 사건도 전설이나 경극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다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주대학살이 당시의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엄연한 비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극이나 소설 등은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하고, 이런 작품들에서 백성만 대거 죽어난 사건이었을 뿐 딱히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서주 대학살을 다룰 이유가 없다. 이것이 다루어진다면 재미와 대중성 둘 다 해치는 길일 것이다. 실제로 《삼국지 평화》를 비롯해서 대다수 경극에서 서주 전투 자체가 생략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6번 항목과 7번 항목을 종합하면, 서주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대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비판받는 행동은 맞으나, 명사들 몇 명 살해한 사건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판단 기준이 달라진 지식인들은 이 사건에 명사들의 살해보다 더 큰 비중을 둔다.

한편 서주 대학살이 상대의 전투 능력을 말살하기 위한 초토화 작전이라는 식의 의견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임용한 교수가 있다. 링크. 중세 몽골의 학살이나 조선시대 여진 촌락에 대한 예방전쟁 같은 것과 비슷하게 보는 듯 하다. 한국사에서 가장 유사한 것은 전략적 목적에 의한 학살이었으나 그것이 상대의 결집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패전, 무시할 수 없는 적성세력 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고려의 여진 정벌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학살인가, 아버지를 잃고 눈에 뒤집혀서 벌인 만행인가, 둘 다인가는 알 수 없으나 임용한은 첫째가 주된 이유라고 보는 듯. 여기서 이전 시대의 전쟁에서 이런 일(집단살해)은 자주 있었다는 것이며, 임용한도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으나 당시 전쟁은 그랬다라고 넘어가는 듯하다. 물론 만약 조조가 전술적인 판단하에 행했다면 르메이미군2차대전일본의 민간인들도 생산 활동으로 전쟁을 간접적으로 돕는다며, 일본 주요 도시들에 있는 민가들을 폭격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다만 임용한은 학자라는 입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든 행동에 최대한 합리적인 동기를 부여해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그 원균에 대해서도 나름 억울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양반이다.#

윗 항목 조숭 일가의 몰살 기록 부분에 나와있듯이 서주 대학살 당시 조조는 본인의 친부와 친인척들이 서주 지역에서 도겸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오늘날에도 가족을 그것도 부모를 살해한 원수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효의 사상이 더 강했던,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후한말 시절에는 증오심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조조가 감정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가친척의 죽음에도 냉철하게 전술적인 판단을 내려 초토화 전략을 시행했다기보다는 조조가 본인의 친부와 친인척들의 비참한 죽음에 눈이 뒤집혀져서 저지른 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현대에 조조가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하고, 또 인권 사상의 대두로 인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규정되면서, 기존에는 비중이 컸던 명사 살해에 대한 악행은 별거 아닌 수준으로 하락하는 대신에 비중이 덜했던 그의 악행이 새롭게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조의 학살에 대한 현대인의 시각을 전근대 중국인에게 동일하게 대입하기는 어려울 뿐더러 역사를 해석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다.[36] 조조에 대한 반감은 어디까지나 황실을 핍박한 권신이었던 것과 명사들을 살해한 것이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조조의 학살을 이유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 아닌 이상 조조에 대한 반감의 원인을 학살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서주에서 일어난 학살들을 주 단위의 대학살이라고 보는 것은 틀린 해석이다. 조조가 서주 전역을 밀어버리라 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성을 점령하고 일어난 학살들의 합집합일 뿐이다. 전역이 서주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주 전체를 대상으로 한 학살로 보일 뿐이다. 이를 주 단위의 학살이라고 해석한다면 한나라의 건국자인 유방은 그의 부하들이 점령하는 곳마다 성 단위로 갈아버렸으므로 전국 단위의 학살을 자행한 것이 된다.

간혹 조조의 문학가로서 재능을 추켜세울 때 비판하는 측에서 '그래, 조조느님은 서주에서 정말 스케일 크게 행위예술을 하셔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잖아.'라며 비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조의 문학 재능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고 문학가로서의 재능과 학살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따라서 조조의 문학 능력을 칭찬할 때 서주 학살을 얘기하는 것은 논점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므로 자제해야 한다.

6.4. 《삼국지연의》에서의 서술[편집]


2차 삼국지 매체의 원조인 《삼국지연의》에서도 사실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10회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마침내 순욱, 정욱을 남겨 견성, 범현, 동아 3현을 수비하게 하고 그 나머지들은 다 죽이려고 달려서 서주로 왔다. 하후돈, 우금, 전위가 선봉에 섰다. 조조는 명령을 내렸다: 성(도시)를 얻으면 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도록 하라.
구강의 태수 변양은 도겸과 교분이 두텁고 서주의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병사 5,000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조조는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하후돈으로 하여금 길가에서 그를 가로막게 하고 죽였다. 당시 진궁은 동군의 종사였는데 도겸과도 교분이 두터워 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원한을 갚아 백성들을 모두 죽여 없애려 한다는 말을 들어, 별밤이 오기 전에 와서(또는 급속히 와서) 조조를 보았다. 조조는 (진궁이) 도겸을 위하여 중재인이 되고자 함을 알았기에, 보려하지도 않으려 했으나, 옛 은혜[37]를 없애지도 못하니, 다만 부득이하게 초빙하여 군막 안에 들여 만났다.
진궁이 말하기를:
"지금 명공께서 대군으로 서주에 임하여, 존부(尊父, 부친)의 원한을 보복하며, 도착한 곳에서 백성들을 다 죽여 없애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개는 이로 인해 이곳에 일부러 와서 진언합니다. 도겸은 인인군자(仁人君子)이지, 이익을 좋아해 탐내고 의리를 저버리는 무리가 아닙니다. 부친께서 살해당하신 것은 바로 장개의 악행으로, 도겸의 죄가 아닙니다. 게다가 주와 현의 백성들이 명공과 무슨 원수진 것이 있습니까? 살육은 상서로운 일(또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데 여러 차례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조조가 노하여 말하길:
"공은 나를 버리고 갔는데, 지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만나는 것이오? 도겸이 내 가족을 죽였으니, 맹세코 당연히 쓸개를 뽑고 가슴을 도려내어, 내 원한을 풀 것이오! 공이 설사 도겸을 위해 유세하더라도, 만일 내가 듣지 않으면 어찌할 것이오?"
진궁은 작별을 고하고 "나도 도겸을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탄식하며 말을 몰아 진류태수 장막에게로 갔다.
한편 조조의 대군은 가는 곳마다 인민들을 살육하고 분묘를 파냈다. 도겸은 서주에서, 조조가 군대를 일으켜 보복하고 백성들을 살육한다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말하였다.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서, 서주의 백성들이 이 큰 재난을 받게 했구나!"
遂留荀彧、程昱领军三万守鄄城、范县、东阿三县,其余尽杀奔徐州来。夏侯惇、于禁、典韦为先锋。操令:但得城池,将城中百姓,尽行屠戮,以雪父仇。当有九江太守边让,与陶谦交厚,闻知徐州有难,自引兵五千来救。操闻之大怒,使夏侯惇于路截杀之。时陈宫为东郡从事,亦与陶谦交厚;闻曹操起兵报仇,欲尽杀百姓,星夜前来见操。操知是为陶谦作说客,欲待不见,又灭不过旧恩,只得请入帐中相见。
宫曰:"今闻明公以大兵临徐州,报尊父之仇,所到欲尽杀百姓,某因此特来进言。陶谦乃仁人君子,非好利忘义之辈;尊父遇害,乃张闿之恶,非谦罪也。且州县之民,与明公何仇?杀之不祥。望三思而行。"
操怒曰:"公昔弃我而去,今有何面目复来相见?陶谦杀吾一家,誓当摘胆剜心,以雪吾恨! 公虽为陶谦游说,其如吾不听何。"
陈宫辞出,叹曰:"吾亦无面目见陶谦也!"遂驰马投陈留太守张邈去了。
且说操大军所到之处,杀戮人民,发掘坟墓。陶谦在徐州,闻曹操起军报仇,杀戮百姓,仰天恸哭曰: "我获罪于天,致使徐州之民,受此大难!"

10회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데 《삼국연의》 본문, 정사마냥 시체로 강이 막혔다거나 하진 않지만 살육에 대해서 분명하게 여러 차례 기술하고 있다. 사실 저 구절이 없다고 정사에 비해서 축소 기재되었다고 보기도 힘든 것이, 정사도 전문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도겸전'을 제외하고는 시체로 강이 막혔다 하는 기술은 없기 때문이다. 도겸의 저 통곡도 조조가 자신 대신 백성들을 살육하는 것에 대한 통곡이다.

아니 오히려 《연의》의 묘사를 보면 나관중은 조조군이 '처음부터 다 죽이려고 서주에 왔다'고 하며, 조조의 명으로 만일 성을 함락시키면 그 안에 있던 백성을 다 도륙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조조가 서주 백성들을 다 죽이려 하자, 진궁이 와서 말려도 조조는 분노로 눈이 돌아가 진궁의 조언을 내치는데, 이 과정에서 진궁의 입을 빌어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한답시고 조조와 원수진 것도 없는 무고한 서주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서주에서 일어나는 조조의 학살에 대해선 진수가 썼던 '杀戮(살육)'이라는 단어를 써서 분명하게 기술함으로서,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가 했던 표현과 동일한 강도로 '조조는 가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들을 살육했다'고 확실히 서술하고, 도겸의 말을 빌어 '이것은 서주 백성들이 받고 있는 큰 재난'이라고 묘사한다.

따라서 전근대시대 사람인 원말 명초의 나관중 입장에서도 조조가 한 황실을 핍박하고 명사들을 죽이는 것만을 악행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서주 대학살 역시 엄연히 '조조의 사악한 악행'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연의》의 주인공이자 '의로운 자'인 유비가 중과부적인 상황임을 알고도 서주를 구원하는 것을 대조되는 구도를 짜는 것으로서 확실히 재확인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언급 중에서 조조군이 실제로 학살을 자행했음을 알리는 문구는 담백하게 '살육인민' 4글자 뿐이고, 학살의 참상이나 규모에 대한 묘사 같은 건 일절 없다. 나머지 부분은 단지 조조가 그런 마음을 먹었거나,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므로 이 4글자를 지나쳤다면 서주대학살이 그냥 미수에 그쳤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또 이후로는 서주 대학살이 일절 언급되지 않는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유비나 원소나 손권 등이 이후 조조를 비난할 때도 서주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동승 일파나 복황후 등을 죽인 사건은 꾸준히 언급되는 것하고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상기한 원인들 때문에 《연의》만 읽은 사람들은 책을 읽음에 따라 다른 사건에 비하여 서주 대학살에 대한 주목도가 낮아지게 되는 편이다.


6.5. 창작물에서[편집]


정사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서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 사건은 서서히 알려졌지만, 그마저도 '군웅할거의 난세 속에서의 일반적인 학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가 재평가되면서 이 사건 역시 재조명되었으며, 재조명됨에 따라 이 사건은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이자 치부로써 부각되었으며, 이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기류를 막게 되었다. 이 사건은 여백사 사건과 결합함으로써 조조라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바뀌게 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조조에 대한 해석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38] 조조를 냉혈한이 아닌, 기존의 연의를 중심으로 해석된 '냉정하고 포부가 크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호걸'이라고 해석되는 매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 사건을 은근슬쩍 축소시키거나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심한 경우 아예 없었던 일 취급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39]

제대로 묘사하는 작품들은 어린 제갈량을 슬쩍 등장시켜 이때가 트라우마가 되어 조조를 증오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넣는 경우가 제법 있다.


직접적인 학살의 묘사는 없다. 오히려 이후 원술이 서주를 침공했을 때 서주 지역이 불바다가 되고 백성들이 살해 당하는 등 서주가 파괴되는 모습이 더 상세하게 나온다. 이 때문에 이후에 유비가 신야에 있을 때 박망파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도망가라고 써놓은 방문에 "조조가 오면 다 죽는다"고 써붙여 놓는데, 이 만화를 통해서만 삼국지를 접한 사람들은 '아무리 유비가 좋고 조조가 싫다 한들 살던 집도 버리고 따라갈 정도인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 뒤늦게 이 사건을 알고 신야 백성들의 그 선택을 이해하게 된다.


조순의 부음 소식을 들은 조조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데, 이 만화 최고의 명장면 충 하나이다. 서주 대학살 자체는 간략하게 묘사되지만, 학살로 인해 서주를 떠나는 어린 제갈량을 등장시켜 복선을 깔아놓는다.


분량 면에서 아주 간략하게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묘사상으로는 조조의 학살이 인디언을 학살한 솔저 블루베트남전밀라이 학살에 대놓고 비유된다. 참고로 원작이 연재될 시기는 1970년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렇다 치고 베트남전의 학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명쾌하게 서주 대학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셈이다.


저자는 온갖 부분에 확인도 안 된 정사 드립을 하며 작가의 사평을 집어넣지만, 유독 이 조조 대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평을 내리지 않는다. 장면 묘사에서도 조조의 직접적인 학살 묘사는 빼고, 다른 인물들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서술한다. 심지어 조조 사망 장면에서 꽤 긴 분량을 들어서 조조의 인생을 평가하면서, "조조가 시대를 넘어 역사의 악역이 될 이유는 모자란다."고 말하는데, 시대의 악역이 될 차고 넘치는 이유인 이 서주 대학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이 작품이 작가가 조금이라도 조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정사 타령하면서 조조빠 티를 다분히 드러낸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의도적으로 서주 대학살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배제하면서 그 시대에는 다들 그랬는데 왜 조조만 뭐라고 하냐며 물타기를 한다. 이런 논리는 일본 우익들이 일제의 전쟁범죄를 물타기 할 때의 패턴과 유사하다.


조조가 무리하게 온 서주를 들쑤시며 집집마다 학살을 일삼는 통에 수 많은 명사들이 피난길에 오른다. 이 때 제갈량이 김경한 삼국지에 첫 등장을 하는데 형인 제갈근손책을 찾아가고 일족들을 제갈량에게 맡기면서 제갈량은 제갈씨 일족의 수장이 된다. 이 때 형주로 피난을 떠나는 제갈량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는데 조조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도 예외없이 조조의 잔악무도함이 여과없이 묘사되어 있다. 다만 조조쪽 변호도 들어가 있는데 이 배경을 알기 위해 조조가 바라본 조숭이 묘사되어 있다. 조조는 조숭이 아무리 병신 취급을 받아도 우리 아버지니까 최고라며 항상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런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눈깔이 뒤집히고 이성을 잃어 이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조조에 대해 우호적이지만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정확히 짚고 넘어가며 그 예시중 하나가 바로 서주대학살이다.


조조와 곽가, 특히 암흑병법을 주창하는 곽가가 그 어느 매체보다 악랄하게 나와서 서주 대학살을 벌이는 이유부터 기가 막히다. 조숭은 그냥 서주 지나가다 병으로 죽었고, 조조의 가족 중 그 누구도 도겸과 그의 부하들에게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으나(하후돈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곽가의 암흑병법에 매료된(...) 조조는 조숭의 죽음을 도겸군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하여 도겸군이 조숭을 죽였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조숭의 복수를 명분으로 서주를 공격해 서주 군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악명을 천하에 떨치는 황당한 계책을 마음에 들어하여 웃으면서 받아들여 시작된다... 아무런 죄도 없이 학살당하는 서주 군인, 백성들 안습.

서주의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1만 명 가량 도륙한 것은 사실이나, 조조가 새로 얻은 군사인 곽가의 암흑병법으로 30만을 학살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설명된다. 서주 군민들에게 조조군의 잔혹성을 각인시킴으로써 저항할 의지 자체를 상실시켜 버리자는 어마어마한 뻥카.[40] 곽가 자신이 '대의를 위한 희생'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 암흑병법을 구사하는 책사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한편 제갈량[41]은 1만 명에 달하는 학살의 희생자들을 보고는 그들을 부여잡고 '눈물조차 다 말라버렸다'고 독백하면서 심리적으로 조조 세력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고, 직후 제갈량이 요원화를 끌어들이고 조조군을 방해하면서 수경팔기간의 대립이 시작된다. 얼핏 보면 서주 대학살의 진상을 '그거 사실 뻥임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로 일축해 버리는 황당무계한 전개지만, 합리적으로 따져 보면 은근슬쩍 말이 된다는 것이 함정(...) 애초에 서주 대학살 자체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단 말이 나올 만큼 막장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설명이 조조의 악행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이 곽가의 캐릭터성을 드러내기 위한 묘사에 가깝기에, 매니아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적었던 점도 있다. 오히려 이 학살로 인해 화봉요원의 조조와 그 조조를 뒤에서 휘두르는 곽가는 그 어떤 매체에서보다 더욱 잔인하고 사악하며 악랄하게 나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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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국에선 위와 같이 조조가 자신의 군은 '서주를 점령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 삼국이 주요 인물의 행동에 대해 재해석을 상당히 많이 한 작품인 만큼 조조가 수십만을 다 죽인다는 이유도 새로 달아놓았는데, 다름아닌 군량 부족이었다. 조조군은 관도대전 승리 후 하북을 제패하기 전까지 계속 군량 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럴 듯한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명령을 내린 직후 여포가 연주를 공격했다는 정보가 도달하였고, 결국 조조군이 철수해버린지라 조조의 명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저것도 좀 의문인게, 점령하면 남녀노소를 다 죽이라는데 거기에 있는 병사가 아닌 사람도 다 같이 죽이란 소리다. 그 사람들은 병사가 아니니 포로도 아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선 대놓고 등장하진 않으나, 유심히 살펴보면 유추해 볼 단서들이 있다. 예를들어 삼국지 10에선 189년 시랑군림 시나리오와 194년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 서주 휘하의 소패성과 하비성의 인구가 엄청나게 감소하여 있다.
하비의 인구는 217,000 -> 77,000
소패의 인구는 99,000 -> 31,000
특히 소패의 인구가 너무 적어 현재 소패의 군주로 있는 유비는 이벤트를 꺼도 국력이 너무 허약해 차라리 방랑군을 편성해 다른곳으로 이사가는게 나을 지경


도입부에서 어린 시절 제갈량이 서주 대학살 때 조조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서주를 구하러 온 유관장 삼형제를 몰래 지켜보는 모습을 통해 훗날 제갈량이 삼고초려를 하는 것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서주 보복전"이라는 미션이 있으며 조조가 주인공인만큼 학살 관련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조조의 책사들과 유비 모두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유비는 남말할 입장이 아닌것 같지만 심지어 저돌적인 이미지가 있는 하후돈도 출전하기 전에 말을 걸면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다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비측의 입장에서 하는 타 게임들은 당연히 조조군이 우세하는 양상으로 나오지만 조조가 주인공인 이 게임에서 그대로 나오면 당연히 전투가 싱겁게 되므로 오히려 도겸군의 병력이 훨씬 많다.[42] 심지어 도겸군은 스토리상 침공당하는 입장임에도 오히려 적극 아군을 향해 공격한다. 제8턴 시작 때 유관장 및 조운 4부대가 지원군으로 등장하고, 여포가 복양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도겸과 화목할지 아니면 계속 공격할지 선택지가 뜬다. 어느 선택지를 골라도 나중에 백은갑옷을 얻게 된다.

반면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조조만이 주인공이 아닌지라 유비전, 도겸전 등 다른 주인공 입장에서는 그 묘사가 잘 드러나 있으며, 대학살 후 장소, 노숙, 제갈 일가 등이 조조를 피해 피신을 가는 모습이 나온다. 특히 제갈량전에서는 제갈량이 출사하고 타도 조조의 기치를 세운 근본적인 이유가 서주 대학살의 복수로 그려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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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항로》에서는 서주 대학살이 확실미묘하게 그려진다. 일단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쌓인 모습이 두 페이지나 할애하여 묘사되고, 관우가 이를 보고 충격을 받고는 격노하며 "이런 게 무슨 왕의 패업이냐"고 일갈하는 장면을 넣는 등 대학살의 광경 자체는 아주 직접적으로 묘사된다.[43] 하지만 정작 조조의 의도 자체는 '아버지가 죽었다니 씁 어쩔 수 없지 도겸은 어차피 천하로 향하는 길의 방해물이니 조져버리겠다'(순욱의 독백) 정도로 묘사되고, 대학살의 원인은 약탈과 살육밖에 모르는 청주병을 무장시켜 주력으로 삼아 진격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나온다. 이미 출발 전부터 하후돈이 '청주병은 아직 도적떼 그 자체고 니 명성은 땅에 떨어진다'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주병이 조조 맹덕에게서 중황태을의 꿈을 보았다면 조조는 청주병들의 것이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이 대학살에 대해 유비는 '놈들에게 있어 전쟁은 땅따먹기고 일단 땅을 잔뜩 차지한 다음 거기에 원하는 천하를 그려 넣으려는 것이다'라고 짧게 평하고, 곽가는 '원래 패업은 힘으로 하는 거고, 조조 당신은 적이었던 청주병을 흡수하고 그 힘만을 중시해서 대 살육조차 단순히 병력의 힘이 드러난 것으로 치부했다'면서 '여기까진 좋았다'라는 맛이 간 평가를 내렸다(...).[44] 즉 굳이 요약하자면 서주 대학살에 대해 사적인 복수심이니, 광기니 하는 이유가 아니라 '청주병이라는 무자비한 병력을 풀어놓으면 일이 이렇게 되니까 이렇게 됐다' 같은 무미건조한 설명을 덧붙인 셈이다. 우스운 것은 조조의 캐릭터가 비정하고 잔인하기보다 선악을 초월하고 오명조차 신경쓰지 않기에 가장 합리적인 길을 택하는 침착한 초인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45]

서주 대학살도 인의도덕 같은 고리타분한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천하 통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조조[46][47]라는 식으로 넘기고 있는 것이다.


학살 묘사자체가 아예 안 나오며, 그저 침공을 했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고 어거지로 대강 넘겼다. 비판을 받자 나중에 사마의 사후를 묘사할 즈음에 지나가는 투로 살짝 언급된다... 지만 사실 <북해 전투5>에서 폭발한 조조가 서주에 사는 쥐새끼 한 마리, 풀 한 포기 안 남기겠단 발언을 하긴 했다. 직접 표현은 안 됐지만. 근데 여담으로 이 부분 자체가 조조를 띄우기 위해 도겸을 찌질이로 만든 경향이 있다.[48] 정사 기록을 따르면 애초에 도겸이 조조를 친 건 찌질해서가 아니라 공손찬과의 동맹 때문이었다.[49] 또한 작가의 착각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10여 성을 뺏긴 것도 또한 가을이라 기술되어 있으므로 조숭이 죽은 후이다. 애초에 1차 학살 자체가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였으나, 도겸의 수비가 굳어 어쩌지 못하자 후퇴하면서 화풀이 겸 학살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겸이 겁을 먹어 조숭 가지고 협박하다가 실수로 죽였다는 건 어폐가 있다. 애초에 위진세어와 오서가 충돌했는데, 오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위진세어의 기록을 따랐다. 위진세어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역사서가 아니다.[50] 이는 제갈량의 북벌 논란에서도 제기 되었듯이 작가가 사서간 애초에 위진세어는 사서도 아니다 내용이 충돌하면 그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내용이라도 지 입맛에 따라 고른다는 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진궁이 조조를 비판하며 말렸으나 듣지 않자 결국 실망하고 배신하는 전개를 넣어 조조에게 비판적인 내용을 넣기는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쟁에 명분이 없다는 거지 학살이 동반되었다는 묘사는 들어가지 않았다.


삼국지 12 PK의 '서주변천' 시나리오에 경우엔 아예 대놓고 조조가 서주에 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학살을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순욱은 조조를 말리나 듣지 않자 "후대에 학살로 평가 받을 거다."며 탄식하는 대사를 한다.


단 한 번도 서주 대학살을 다루지 않고 있다. 이미 조조를 야심차고 고독한 패왕으로 묘사하다 보니까 그의 이런 캐릭터에 해가 될 수 있는 서주 대학살 묘사를 의도적으로 안 넣는 걸로 보인다. 그나마 서주에서 싸우는 것도 조조가 세력을 확장할 때 도겸이 괜히 걸려든 걸로 묘사된다. 단, 6편 서주 전투 촉편에선 진지 대화에서 서주 병사들이 조조군을 가차없는 자들, 귀신 같은 존재라 칭하며 공포에 떠는 것으로 조조군의 잔학함을 간접적으로 묘사했다. 요코야마 삼국지 수준의 묘사라고 보면 된다. 진삼국무쌍 6편 드라마 CD에서도 언급된다. 6편처럼 한 줄기 스토리로만 진행되는 8편에서는 의외로 좀 더 직접적 묘사를 해준다. 시즌패스 3 노숙 IF 시나리오에서는 오나라가 서주를 손에 넣는 스토리가 나오는데, 서성이 서주 출신이라는 떡밥을 써먹어서 예전에 조조가 서주를 유린한 적이 있어서 자신도 서주 사람들이 위나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직접 설득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서주가 오나라에 붙게 하는 식으로 서주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조 세력의 첫 딜레마로 언급된다. 역사처럼 서주 침공을 감행할 수 있지만, 사방이 위험 천지인 세력의 위치를 고려해서 도겸에 대한 복수보단 세력을 성장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어 서주 침공의 발발 여부는 플레이어의 판단에 넘겨지는 것. 한편 유비 세력 또한 역사처럼 도겸을 도울지, 아니면 돕지 않고 힘을 기를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첫 딜레마이다.

세 번째 DLC인 배신당한 천하 트레일러에서는 조조가 아버지 조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하여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서는[51] 이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주로 쳐들어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때 분노로 굳어있으면서도 한쪽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는 표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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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인물은 제갈량. 이 시점에선 겨우 13세.

삼국지톡에서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서주를 침공한 조조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그냥은 못 간다고 저지른 일로 나온다. 그리고 서주에 붉은 비가 내리는 연출과 함께 창천항로의 묘사처럼 시체로 강을 메운 연출을 보여주었다. 조조의 인기가 높은 작품이지만, 여백사 살해 사건과 이 서주 대학살은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그려냈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는 군웅들이 아닌 서주의 평범한 백성들의 시각에서 대학살의 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잔혹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낭야중학교 학생들이 "어떤 미친 놈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겠어?"[52]하고 마음을 놓고 있다가 화를 당하며, 위의 사진에 나온 '시체가 강을 메운 광경'은 학살 당시 13살의 어린 소년으로 낭야중학교에 월반을 했던 제갈량이 목격한다. 창천항로에서 이 광경을 유관장 삼형제가 목격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

이 끔찍한 광경을 본 제갈량은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이후의 연출을 보면 이 사건을 계기로 조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그를 평생토록 증오하게 된 듯. 제갈근이 말하길, 제갈량은 너무나 영특하여 이 일을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53]

조조군의 병사들도 이런 무자비한 살육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살인 기계나 다름없는 몰골이 되었다. 유비는 이들을 보며 "이들도 한때는 백성이었으니 조조에게 협박이라도 당했나 싶었지만 아니었구나"라며 한탄하는 장면을 통해 조조군 하나하나가 이 학살의 책임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54] 조조 본인조차도 아서스 메네실을 연상시키는 피폐한 모습으로 눈에 핏발을 세우고 학살을 결심하더니, 이후로는 광기에 빠져 완전히 망가진 몰골로 등장하고 있다. " 전장에서 조조를 다시 만난 유비는, 조조를 향해 "한때 당신은 내 영웅이었으나, 지금의 당신은 영웅도 악당도 아닌 괴물이다"라고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여러 모로 '학살의 참혹함을 매우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파트를 기점으로 조조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이 추락했다.[55] 이후 조조는 관도대전 편에 들어서야 인기를 일정 수준 회복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영향을 받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한편 이미 서주에서 귀환한 조조가 '아직 도겸을 끝장내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서주를 치겠다'고 선언하여, 서주 대학살이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음을 몰랐던 독자들은 '이 미친 짓을 한 번으로 끝낸 게 아니란 말이냐'고, 알고 있던 독자들도 '1, 2차를 합쳐서 묘사했던 게 아니었단 말이냐'고 함께 경악했다. 이 일로 순욱진궁도 조조에게 크게 실망하는데, 그나마 순욱은 자신이 조조를 다시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지만, 진궁은 이미 여백사 일가족 살해 사건으로 조조의 본색을 봤던 터라 그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돌아서서 조조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한다.

다만 2차 학살은 1차처럼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조조가 서주성을 공격하는 장면으로 간략하게 넘어간 뒤 다른 인물에 의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56]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극적일 수 있으니, 이미 1차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한 만큼 2차는 묘사를 다소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크나큰 실책이라는 것을 상세히 묘사한다. 당장 이 일로 진궁장막은 조조에게 등을 돌렸고, 연주 전체가 반기를 들어 순식간에 갈 곳이 없어지며, 최대 동맹인 원소 또한 불똥이 튀는 걸 막으려고 조조와 연을 끊는다. 이로써 조조는 근거지도 동맹도 잃어 한때 완전히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기적으로는 순욱과 이때부터 어긋나고, 제갈량, 노숙을 비롯하여 서주 출신의 여러 인재들이 각지로 흩어져서 반 조조 세력에 임관하는 나비효과를 낳는다.

연의에서 서주 대학살이 이후로는 언급이 안 되는 것과 달리, 삼국지톡에서는 꾸준히 조조의 최대 악행으로 재차 언급이 된다. 여러 모로 역대 삼국지 관련 창작물 중 서주 대학살을 사서의 기록에 가깝게 묘사한 작품이다.

시즌 6 관도대전 3화에서 진궁이 유비에게 조조와 싸우게 부추기려고 "조조는 시체들로 서주 강물을 막은 괴물이면서 황제를 구한 영웅으로 이미지 포장 및 세탁을 한다."고 욕하며 같이 싸우자고 하나, 그 의도를 알아차린 유비가 단호하게 나오자 한 발 물러난다.

관도대전 24화에서 조조의 부인인 정영옥은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겠다는 조앙을 말리면서 "네가 조조의 아들이 맞긴 하구나. 뼈빠지게 키워놨더니 되고 싶은 게 사람 백정이냐?"고 다그친다.[57] 조조가 서주에서 벌인 학살은 가족마저 손사래를 치는 악행임이 꾸준히 묘사되고 있다. 가후 역시 조조를 '시체로 강을 메우는 색골'이라고 비판하며, 그런 아비에게서 태어난 조앙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놓곤 쏴죽인다

관도대전 30화에서는, 여포의 뒤치기로 서주를 잃은 유비를 따라 조조에게 망명한 미축에게 조조가 높은 관직을 주면서 서주의 민심 좀 잘 달래주라고 요구하는 한편, 서주 대학살을 매우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조 曰 "근데 말입니다? 우리가 큰 그림을 봐야지! 쬐그만 원한은 잊고! 함께 나라를 바로잡아야지 않겠소?" 시체로 강을 메립하다시피 한 게 쬐끄만 원한? 애초에 죽는 날까지 서주 대학살에 대해 반성이나 후회가 없던 양반이니 당연한 거지만...

관도대전 37화에서는 하후돈이 유비를 구하러 왔다가 왼눈에 화살을 맞자 화살을 뽑아 직접 눈알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이전을 비롯한 조조군 장졸들이 환호하자, 유비는 경악하면서 서주 대학살은 실수도 아닌 조조 개인이 원하여 조조군 전체가 기꺼이 그 명령을 따르고 실천한 짓임을 깨닫는다.

서주를 빼앗아 점거하던 여포 세력을 토벌한 후 조조가 유비와 함께 서주 백성들을 만나러 나오자 백성들이 환호하여 조조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자인 이 몸에게 니들이 별 수 있냐.'며 비웃었지만, 정작 서주 백성들은 유비에게만 환호하고 조조는 안중에도 없어서 조조는 어이를 상실한다. 관도대전 60화에서는 아예 말에 앉아있는 조조를 밀치며 낙마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병사들이 칼을 빼들며 조조를 낙마시킨 백성들을 베려고 하자 황급히 말린다. 물론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백성들에게 린치당해서 저 죽을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여기는 적진 한복판이란 말이다!"라고 소리치기까지 한다. 이 장면들을 통해 서주 백성들은 절대 서주 대학살을 잊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그때처럼 조조가 명령하면 망설이지 않고 다시 서주 백성들을 죽여버릴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58]

이 와중에 유비는 조조의 심리를 눈치채고 황급히 자기는 한 거 없고 조조가 여포로부터 서주를 구했다고 립서비스를 해주나, 얕잡아보던 유비의 무서움을 깨달은 조조가 하비로 가려는 유비를 수도인 허창의 자기 옆집에 잡아놓게 된다.

제갈량이 19세로 성장해 재등장한 76~78화 에피소드에서는 제갈량의 PTSD가 됐으며, 고향을 작살내놓고 벌은 안 받고 오히려 잘 나가는 조조의 행보에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며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도대전 83화에서는 80~82회에 나온 논영회 에피소드 때 조조가 자신과 유비를 영웅이라고 칭하자, 집에 돌아가면서 서주 대학살은 무슨 밥상에서 물 엎은 것처럼 여기고 있냐며, 영웅은 무슨 얼어죽을 영웅이냐고 속으로 독설을 퍼붓는다.

적벽대전 33화에서 유비가 신야성 백성들을 거둘 때, 원래는 유비가 '피난이 아닌 퇴각이니 따라오면 안 된다. 그대들은 조조의 백성이니 조조가 그대들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리려 했으나 피난민 행렬에 있던 한 노파가 서주대학살 당시의 참상을 기억해내고 '죽는 한이 있어도 따라가겠다'고 외친다. 유비를 따라간 형주 백성들 중에 서주 대학살 생존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정황을 반영한 묘사이며, 제갈량도 이들이 어린 시절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유비에게 피난민을 거둘 것을 진언한다. 다만 유비군도 빠듯한 상황이었기에 유비는 이들을 양양성까지만 데려다 주기로 하였으나, 채씨 남매가 자기 백성을 버리고 조조에게 투항하려 하는 바람에 실망한 형주 백성들이 추가로 유비군 행렬에 합세하였고 유비는 이들까지 데리고 남하하기를 결심한다.

다른 삼국지 매체들에서는 대부분 잊혀지는 것과 달리 삼국지톡에서는 잊을 만하면 언급이 되면서 조조의 흑역사이자 치부임을 지속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묘사에 대해 너무 자주 나온다며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다. 허나 유비가 조조에게 실망하고 적대시한 계기가 된 사건이며[59] 후일 유비 진영에 합류하는 제갈량의 인생을 비틀어버린 사건이며, 오나라에도 당시의 피해자가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에 못해도 적벽대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잊을 만하면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판은 본 작품에서 조조의 악행을 부각시키거나 조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이 나온 것에 대한 반발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논영회조차 조조를 까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서 유비가 서주 대학살 얘기를 꺼내며 "영웅은 얼어죽을"이라는 식으로 조조를 조롱하자 댓글창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초반 프롤로그로 다뤄지며, 피난 가는 제갈량과 제갈근이 조조에 대한 원한을 품고 남매가 함께 조조의 군대를 불살라버리겠다고 맹세한다.

국산 삼국지 만화의 숨겨진 명작 취급 받는 박봉성 삼국지는 2000년대 초 작품답지 않게 참신하고 정교한 해석을 시도하는 부분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서주 대학살이다.

조조가 서주 백성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충실하게 제시하고 직접적으로 '서주 학살 사건'이라고 언급할 뿐만 아니라, 학살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서주 민심을 묘사하는 한편, 이 때문에 조조가 유비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고 파악한다. 작중 조조는 순욱과 곽가의 경계도 마다하고 유비를 살려두는데, 서주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유비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통치를 안정시키려는 한편 유비를 조조의 앞잡이 정도로 부각시켜 이미지를 추락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조조군이 여포를 쫓아내고 서주에 입성하자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서주 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고 야유 소리가 들리는 와중, 개선 행진을 벌이는 조조의 말이 돌팔매질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돌을 던진 것은 전쟁통에 아들을 잃은 한 노파로, 노파는 "네놈 손에 죽은 수만의 원귀들이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거늘... 그 더러운 발로 감히 이 서주 땅을 밟으려 하느냐! 내 아들의 목숨을 살려내라. 이 살인마!" 하고 일갈하다가 조조군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다.

유비는 노파를 구해주며, 조조에게 노파의 잘못을 용서해줄 것을 요청한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서주 백성들이 조조를 적대시하지 않게 달래달라고 넌지시 제안한다. 유비는 제안을 받아 백성들을 위무하며, 서주성에 온 군대는 조조의 군대가 아니라 천자의 군대라는 명분을 드는 한편 '이 군대는 나 유비의 군대나 마찬가지인 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민심을 흡수해 버린다. 이는 조조의 계산과는 어긋난 결과로, 조조는 백성들에게 인망이 있다는 유비를 적당히 민심 수습용으로 써먹으려던 것이었으나 유비는 이를 역이용해 서주가 자신의 땅임을 못박아 버린 꼴이 된 것이다. 조조는 결국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에 분을 삭인다. 유비라는 인물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서주성에서 유비 삼형제와 재회한 미축은 서주 백성들의 엄청난 환호에 조조가 내심 놀란 눈치라고 평하며, 여포와의 싸움이 끝나면 조조도 서주를 유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학살 자체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서주 주민들이 조조에게 갖는 감정, 그에 얽힌 조조의 노련한 정략과 유비의 맞대응을 대조시켜 라이벌적인 면모까지 부각시킨 데다가 유비에 대한 조조의 경계심 역시 설명해 내었다는 점에서 높은 만화적 완성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000년대 초에 이러한 해석이 등장해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다.


  • 기타
진순신소설 《제갈공명》에서는 제갈량이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가 어렸을 적에 겪은 서주 대학살을 설명한다.

작가 권오석의 소설 조조라는 소설에서도 서주 대학살이 언급되었다.

평설 인물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도겸이 백성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우고 뒤에 숨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복수를 갈망하던 조조가 도겸의 목을 따러 가는데 방해가 되자 백성까지 죽이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학살이 발생했고, 도겸은 더이상 안 되겠다 싶어 유비를 불렀는데 유비는 백성들을 뒤에 숨겨 보호했기 때문에 손건, 미축이 근거지까지 버리고 유비를 따라나선 계기가 된 것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건 조조와 유비만 돋보이기 위한 전형적인 영웅관 위주의 해석이고, 현실적으로는 말장난에 가까우니 주의하자. 도겸이 어떻게 백성들의 뒤에 숨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백성들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리도 없기 때문이다.[60]

침착맨은 개인 방송에서 이 사건에 대해 서주 대효도라는 드립을 날렸다(...) 정확히는 침착맨 팬카페의 한 유저가 '아버지가 죽었다고 그렇게 길길이 화를 내며 끝장을 보려 한 것은 대단한 효심이다'라며 '서주 대학살이 아닌 서주 대효도라고 불러야 옳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소개한 것. 침착맨 본인은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다가, 이후에는 조조가 저지른 학살을 전부 '효도'라고 돌려서 조조를 까는 식으로 써먹었다.[61]

Fate/Grand Order진궁은 전쟁에선 냉혹하게 판단하지만 이건 전투에 있어서는 그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이고, 민간인을 상대할 때처럼 전투와 관계없는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예절을 지키는데 조조를 따른 이유도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 둘을 나눠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라 필요 이상으로 냉혹, 잔인하고 많은 희생을 내자 그날로 공사 구분 없는 인간이라 진저리를 치며 우정을 깨고 떠났다고 했는데, 그 공사 구분 없이 벌인 잔인한 사건이 정황 상 이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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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徐州大虐殺'(서주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약간 다르게 '徐州大屠杀'(서주대도살)이라고 표기한다. '도살'이라는 단어가 다소 뜬금없어 보이지만, 중국어에서의 도살은 제노사이드의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난징대학살이 중국어로 '南京大屠杀'(남경대도살)인 것이다.[2]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 땅이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조숭이 살던 초는 譙이고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는 楚로 한자가 다르다.[3] 사정은 18로 제후의 해체가 나온 동탁 토벌전 문서 참조.[4] 眭 음은 반절법상 신수절(申隨切)로 ㅣㄴ+ㅅ의 합으로 인해 수가 된다.[5] 태조는 조조를 말한다[6] 비슷한 사례로 조조 휘하의 군벌인 장패, 이통이 있다.[7] 유독 『후한서』 「응소전」에만 194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8] 곽반이 지은 필기 소설집인 『위진세어』를 뜻한다.[9] 「무제기」에 따르면 193년 가을에 조조가 서주로 갔고 『자치통감』에 따르면 193년 6월이다. 또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서주에서 본거지인 돌아온 때는 194년 봄, 『자치통감』에서는 194년 2월이다.[10] 『후한서』에 주석을 단 혜동(惠棟, 1697~1758)이 말하길,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작은 성(城)을 보(保)라 한다.'”[11] 사례교위부 경조윤, 우부풍, 좌풍익을 말한다.[12] 혜동이 말하기를 “또 배송지(裴松之)는 '생각건대 손성(孫盛)이 이르기를 무릇, 죄지은 자를 쳐서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伐罪弔民) 예부터 (내려오는) 규범으로, 도겸이 죄를 지었다 하나 그 부속(部屬-딸린 사람들)까지 죽인 것은 잘못이다.'라 했다.”라고 하였다.[13] 여포의 거주지였다가 유비의 근거지가 된 소패성은 삼국지 게임에는 서주 소속으로 나오지만 사실 예주 패국 패현이다. 이 부근까지 도겸의 지배지였기에 도겸을 도우러 온 유비가 주둔할 수 있었던 것이고, 훗날 서주의 지배자가 된 유비/여포가 각각 여포/유비에게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14] 서주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던가 치욕이라고 언급한 것을 근거로 순욱이 학살을 안좋게 생각했다는 것은 알 수 없다. 서주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가족을 죽인 조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얘기로 조조가 서주에서 민심을 잃었다는 뜻이다.[15] 또 학살로 인해 천하의 민심을 잃었다고 해석해도 안되는 것이 민심을 잃은 것이 '학살이 비도덕적이라서'가 아닌 '자신의 친족을 죽여서'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없었던 이역만리의 백성들이 학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이 대목에서 파악할 수 없다.[16] 다만 양도현은 잔륙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17]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인한 파장은 고요하지만 길게 이어졌으며, 서진을 세우고 조위를 무너뜨린 자들이 문벌귀족이 된 연주 호족들이라는 점에서 장기적으로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18] 『자치통감』에는 장막과 여포가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6만명의 군세를 손에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9] 애시당초 유비는 공손찬이 덕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그의 휘하에서 떠난 것이므로 틀린 말이 아니다.[20] 「여포전」을 보면 즌등은 광릉에서 위명이 있었다고 나온다. 또한 동양장에 제수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21] 도겸의 추천으로 회계태수가 되었는데, 이때 조욱이 같이 광릉태수로 임명되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조조가 서주를 침공할 당시에는 서주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원어로는 闔門皆死.[23] 물론 원상을 따라 백성들이 이주한 것은 원상이 오환에 망명하여 완전히 정착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 형주 사람들이 적이 눈 앞에 도달해서 당장 따라가다가 추격을 당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따라가겠다고 한 것과는 조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다. 어떻게 보면 백성들이 어차피 도망가는 마당에 유비의 피난길에 붙는 게 더 안전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라 할 수 있기도 하다. 심지어 기득권인 형주 호족, 유종의 주변 신하들마저 유비에게 붙어 탈출을 시도했으니, 당시 유비가 형주에서 얻은 인심을 알 수 있다. 어느 쪽이던 조조의 악명을 두려워해 백성들의 인심을 얻은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붙어 이주했다는 건 같다.[24] 대상이 다를 뿐 유비 따라 형주 사람들이 도주한 것과 같은 이유라고 추정할 수 있다.[23] [25] 진수의 자字[26] 강발상(康發祥)이 이르길 승조[25]의 <위지>에선 늘 회호(回護)함이 많았는데, 여기선 학살함이 많았다고 말하며, 직필(直筆)했다.[27] 사실 이마저도 상당히 왜곡, 축소된 기록으로, 진수는 동탁의 양성 학살은 강하게 비난한 반면 조조의 서주 학살은 동탁의 경우보다 규모도 더 크고 노약자 가릴 거 없이 학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잔륙' 한 단어로만 표현하며 이중잣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인 춘추필법 관점에서 보면 이는 문제가 없다. 춘추필법은 자국의 잘못은 최대한 감추는 경향이 있고 삼국지에서 자국은 조조와 위나라이기 때문에 남인 동탁의 학살은 대놓고 적은 반면 무제기의 주인공인 조조의 잘못을 최대한 감춘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살육 한 단어로 후대에 사실을 알린 것으로 볼 수 있다.[28] 비록 유비도 유장을 배신한 일과 장유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수염 콤플렉스를 건드리고 훗날 유씨의 정통성을 건드리자 냉혹하게 숙청을 하는 등 마냥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후자는 그 시절에 신하가 윗사람의 정통성을 건드리는건 사실 목을 베어주십쇼한거나 다름없는 일이라 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그뿐만 아니라 수염 문제도 유비가 먼저 그 신하의 수염을 놀려 맞받아친 것이다. 게다가 유장을 뒤통수친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지라 지금까지도 유비를 비판하는 주요 소스 중 하나로 사용된다.[29] 다만 장유와 서로 인신공격을 주고받은 건 당시 유비와 유장의 친위세력 간에 신경전도 포함됐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유비는 익주 평정 후에도 장온을 살려주고 관직도 내려줬지만 장온은 계속 유비를 자극하는 말들을 일삼아 어그로를 끈 거니까 따지고보면 장온의 자업자득이다.[30] 오히려 이게 '전략적으로 상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학살을 저지른' 케이스라고 봐야할 것이다. 당연히 조조가 벌인 것과 다르게 "이유가 있는 만행"이란 것일 뿐 사마의가 한 것도 만행이며 학살인 건 마찬가지이다. 훗날 사마씨의 후손이자 동진의 2대 황제인 명제가 요동에서의 학살과 고평릉 사변 이야기를 듣고 '서진이 금방 망할만하다.'며 탄식한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31] 배송지가 《한진춘추》를 인용하여 주석을 달아 후대에 알렸다. 하지만 한진춘추의 신뢰성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으며 당나라 시절에 편찬된 『진서』에는 사마의의 승리로 나오기 때문에 누구의 승리인지는 논란이 많다.[32] 여양 전투의 경우, 《후한서》에는 조조가 업까지 계속 진군했으나, 원상이 이를 역격해 깨뜨리자 허도로 퇴각했다라고 적혀있는 등 제대로 패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단순히 군을 물렸다고만 나와있다. 사실 조조는 이 전투 이후 "여태껏 패배한 장수에겐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앞으론 책임을 묻겠다"라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33] 해당 책의 원본 출판 연도를 계산해보면 일본에서는 90년대에 이미 이런 개념이 존재했다는 소리.[34] 국내에는 1990년 처음 정발되었다.[35] 예를 들어 《세설신어》에 보면 조조가 수면 중에 누군가가 다가오면 그 사람을 죽여버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는 '몽중살인'이라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의 자세한 내용은 양수(삼국지) 문서를 참고. 《세설신어》는 단순한 소설집이나 루머 모음집이지만, 당대 사람들이 특정 인물에 대하여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추측하는 데 이용되는 귀중한 사료이므로, 남북조시대 사람이 조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36] 당장 수호지에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육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나오지만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37] 《연의》에서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했을 때 진궁이 조조를 구해준 걸 뜻한다.[38] 실제 자료에는 이 모습에 제일 부합하는 사람은 숙적 원소이다. 원씨 가문이 멸문 되었을 때 자기 어머니가 있었다는 소리가 있고, 테러를 일으키려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들키지 않게 사용한다.[39] 서주 대학살을 전략적으로 내세우기에는 무리가 크고, 그렇다고 이를 반영했다가는 조조는 쓰레기가 되기 굉장히 쉽다. 그리고 사람 좋은 유비는 정작 정말로 목숨 걸고 백성을 구한 영웅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져 버린다. 이를 유비의 야망이라고 치부해도 위선이든 야망이든 눈 앞에 사람을 구하는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니 욕하는 것도 이상하다. 애초에 유비를 비난하기 위한 잣대를 그대로 조조에게 적용시켜버리면 조조는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다.[40] 조조의 부하 장병들이 그렇게 많은 수를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리면 주군의 명예가 더럽혀진다고 만류하지만 곽가는 되려 수를 더 부풀린다...[41] 여기서 제갈량은 10대 초반이었던 현실과 달리 수경팔기로 장성한 나이로 설정되었다.[42] 훗날 장판파 전투 등 스토리상으로 조조군이 우세여야 할 다른 전투에서도 이런 양상을 보여준다.[43] 여기서 일행은 기가 막히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시체가 강을 메운 덕분에 강줄기들이 평야로 흘러가서, 수량이 풍부해져 그걸로 농사 짓는 주민들을 보고 '조조의 정치는 (타인의) 피로 백성들을 살찌우는 것인가'라고 분노하게 된다.[44] 곽가가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은 '이렇게 검증된 청주병이라는 살육 병기를 보유하고도 대놓고 천하를 따먹지 않고 법이니, 농정이니 하는 내정에 힘쓰면서 시간 죽이는 이유가 뭐냐'라는 내용이다(...) 선 정복 후 내정의 기초를 모르느냐[45] 이를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는데, 역사에서의 조조의 대학살은 위버멘쉬가 되지 못할지언정 창천항로의 등장인물로서의 조조의 인물상은 (현실의 조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이러한 이해에 타당성이 있다. 행위 자체에 있어서 선악을 위시한 기성의 잣대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창출한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는 자를 위버멘쉬로 칭하며, 최소한 창천항로에서의 조조는 기존의 선악과 별개로 가장 합리적인 (비록 이 합리가 창천항로의 스토리 내부에서만 핍진성을 가지며, 작품의 외부세계에선 그 어떤 가치잣대에 비추어도 말이 되는 부분이 없다고 할지라도) 선택지를 골라 양질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46] 당연히 이런 평가는 실제 조조의 인물상과 거리가 멀다. 조조는 당대의 관습적/절대적 가치관이었던 유교의 충과 효라는 개념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편의적으로 수단화한 사람이지, 그걸 뛰어넘는 어떤 새로운 이념이나 비전을 제시한 적이 전혀 없다. 당장 서주 대학살을 자행한 명분부터가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효 이데올로기였고, 구현령을 발표하면서 선언했던 '아무리 불인불효할 지라도 능력만 있다면 그것에 상관 없이 인재로 뽑는다'란 구호가 무색하게 자신에게 사사건건 반항하는 공융을 불효죄로 숙청했다. 또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한 황실을 옹호하는 충신'이라는 충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을 수 있었는데, 이는 조조가 원소 산하의 그저 그런 군벌에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당대의 지배적 가치관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철저히 이용한 조조를 '구시대를 혁파하는 개혁가'라고 고평가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물론 정치적 차원의 윤리와 개인적 차원의 윤리는 별개의 문제라는 게 마키아벨리를 효시로 하는 근대 정치 철학의 시각이기에, 정치가로서 조조에 대한 판단은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인간 조조는 절대 위선자란 혹평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47]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서주대학살은 효의 가치를 내세운 의미있는 행보가 아니라 그냥 분풀이였다. 위 장야신의 평가에도 나오지만, 이건 그냥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연고지인 연주를 완전히 장악하기도 전에 서주를 침공했고, 군사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점령에 실패하자 그 지역의 무고한 백성을 수십만이나 학살했다. 이로 인해 연주에서 민심도 나빠지고 (민심 악화와 별개지만) 반란도 일어나서 연주를 거의 통째로 뺏길 뻔하고, 서주에서 민심은 당연히 최악이 되고 오히려 향후 최대 라이벌이 되는 유비에게 "인의"란 이미지까지 씌워주었다. 굳이 따지면 군사/경제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을 학살해 서주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지만, 잃은 것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점령해봤자 인프라와 인구가 줄어든 서주를 안정화해야하는 건 본인이니까 이득이라고 볼 수도 없다. 즉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순수하게 미쳐 날뛴 것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니까 저런 억지 해석이 나온 것이다. 조조는 분명 천재였지만, 감정기복이 심하고 인간적인 결함도 있는 사람이었다.[48] 다만 정사에서 도겸은 탐관오리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름 고증에 맞긴 하다. 그러나 도겸이 조조와 싸웠고, 조숭이 이 과정에서 살해 당했기에 의도적으로 과한 폄하를 받는다는 지적도 있다. 서주 대학살의 결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함을 낳았지만, 예전부터 서주에 살던 사람들은 물론 난을 피해온 난민들까지 정착해 살았다는 걸 보면 적어도 서주를 잘 다스린 인물인 건 맞다.[49] 공손찬과 도겸이 같은 라인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유비가 도겸을 도우러 가면서 언급하기는 했다. 같은 라인끼리는 도우며 살아야 한다나... [50] 곽반이 지은 필기 소설집이다.[51] 잘 보면 슬쩍 웃고 있다.[52] 후속 화들에서 조조는 서주 백성들을 벌레 취급하면서 '남김없이 몰살하겠다'고 단언하며, 자기 입으로 '서주는 내가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실수도 뭣도 아니고 명백하게 그리할 의지를 가지고 행한 짓이며, 그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도 없고, 서주 백성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며 자신이 그들을 몰살해도 된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후에 각주로 '조조는 죽을 때까지 서주 대학살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어넣어 확인사살을 했다.[53] 이는 후에 이릉 전투를 앞두고 '촉의 적은 위이기 때문에 오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제갈량의 의견에 정당성을 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살이 벌어지기 불과 몇 분 전까지 제갈량은 내심 조조에게 출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주 출신의 인재들이 다른 지역으로 피난가고서 반 조조 기치를 내세우는 다른 세력에 가게 된 원인이 조조에게 있음을 묘사하는 연출.[54] 훗날 유비는 서주 전투에서 하후돈이 화살에 꿰뜰린 눈을 씹어먹으며 장수들과 웃으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에 제정신이 아니라며 서주 대학살은 조조의 독선만이 아닌 부하들의 맹목적인 충성심도 함께한 것임을 깨닫는다.[55] 본격적인 학살 장면이 묘사되기 전까지는 조조에 대한 동정론도 어느 정도 있었으나, 학살 장면 묘사를 기점으로 몇몇 동정론자들도 전부 돌아섰다.[56] 각주로 학살을 또 벌였다고 적혀있기는 하다.[57] 조조와 정부인의 파국을 묘사한 29화의 덧글 중에는 '조조가 밖에서 학살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는 잘 해줘서 참았으나 기어이 자기 자식을 병크로 죽게 만든 시점에서 정부인에게 조조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 됐다.'는 내용이 공감을 받았다. 이외에도 작중에서 정부인은 조조가 불륜을 저지르던 학살을 하던 화나기 보다 언젠가 천벌받을 거라며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자기에게 막 대하는 것이 허탈하다는 말도 하였다.[58] 덧글에서도 '서주 사람들 시체로 강물을 막았었는데 환호를 받지 못하는 걸 이해 못하냐?'부터 '니(조조)가 한 짓을 백성들이 잊을 수 있겠냐?'는 일침이 있다.[59] 정사에서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할 때 쓴 한중왕표에서 조조를 동탁과 형님, 아우 할 학살자라고 깠다. 손권도 조조의 학살과 정벌은 정도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60] 애초에 (말도 안되지만) 설령 인간방패설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인간방패로 삼은 인간들을 주저없이 썰어버렸다는 점에서 조조의 잔학함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서주대학살의 가해자가 조조 1인에서 조조와 도겸으로 확장되는 것 뿐이고, 수십만의 백성을 학살한 주체는 여전히 조조다.[61] 장판파 전투 당시 조조의 병사들이 조운과 미부인을 포위하고 다가오는 것을 묘사할 때 "병사들이 효도하러(...) 오는데..."라고 하는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