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메이 시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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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메이 시즈카의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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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히로시마 6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7대
가메이 시즈카


제48~49대
사토 고지












일본국 제35 ~ 47대 중의원 의원
가메이 시즈카
亀井静香 | Kamei Shizuka

파일:가메이 시즈카.jpg
출생
1936년 11월 1일 (87세)
히로시마현 쇼바라시
현직
JSS 대표이사 회장[1]
재임기간
제69대 운수대신
1994년 6월 30일 ~ 1995년 8월 8일
제64대 건설대신
1996년 11월 7일 ~ 1997년 9월 11일
국무대신 (우정개혁) 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금융)
2009년 9월 16일 ~ 2010년 6월 11일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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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도쿄도립 오이즈미 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경제학부 (상업학과 / 학사)
최종 계급
경시정
가족
누나 이데이 치에코[1]
형 가메이 이쿠오[2]
배우자, 슬하 자녀 3명
전처 소생 자녀 2명[3]
소속 정당

의원 선수
13 (중)
의원 대수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지역구
舊 히로시마 3구 → 히로시마 6구
약력
벳푸화학공업 사원
국가공무원채용1종시험 합격
돗토리현 경찰본부 경무부장
사이타마현 경찰본부 형사2과장
경찰청 보안국 공안1과 이사관
경찰청 장관관방 조사관
舊 히로시마현 제3구 중의원
운수정무차관
중의원 농림수산위원장
제69대 운수대신 (무라야마 내각)
제64대 건설대신 (제2차 하시모토 내각)
히로시마현 제6구 중의원
건설대신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국민신당 대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분야]겸 우정개혁담당대신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 간 내각)
간 나오토 내각총리대신 보좌관 (간 제2차 개조내각)
감세일본 간사장


1. 개요
2. 생애 및 정치 활동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5.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히로시마현 제6구 중의원, 운수대신, 건설대신, 지수회(現 니카이파) 회장,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담당), 국민신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편집]


히로시마현 쇼바라시에서 출생. 고향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고등학교 중퇴 후 상경해 도쿄도립 오오이즈미 고등학교[2]로 편입해 졸업, 이후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다.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안보투쟁 당시 경찰의 대처를 보고 분노해 경찰을 강하게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국가공무원 1종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경찰이 된다. 합격 성적이 매우 좋아 다른 부처들의 스카우트를 받았으나 원래 목표하던 경찰이 되기 위해 경찰청에 들어간다.[3] 이후 돗토리현, 사이타마현에서 경찰로 근무하다가 경찰청 보안국 공안제1과 이사관이 되는데, 보안국 초대 극좌사건 총괄책임자로 부임하여 아사마 산장 사건, 텔아비브 국제공항 총기난사 사건 등 당시 일본 연합적군에 의해 발생한 유명한 극좌 사건에서 경찰대응을 진두지휘한다. 이후 경찰청 장관관방 조사관을 마지막으로 1977년 경찰을 퇴직한다. 당시 계급은 경시정.

경찰 퇴직 후 퇴직금으로 정치인을 지망한 그는, 1979년 당시 정계 은퇴한 나가야마 다다노리 의원의 후임으로 구 히로시마현 제3구에 자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된다. 당선 후 의정활동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지 등에 반발해 “대한민국 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증은 없다. 단교해야한다.”라는 망언을 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1994년 자사사 연립정권(自社さ連立政権)[4] 발족으로 출범한 무라야마 내각에서 운수대신으로 임명되어 처음 입각했다. 1996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 실시된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히로시마현 제6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건설대신을 역임한다. 1999년에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역임한다. 그 뒤에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밀려 2위에 그쳤다.

그러다가 지수회 회장이던 2005년 고이즈미 내각이 추진하는 우정민영화에 반발해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한다. 창당 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기업인 호리에 타카후미를 꺾고, 자신의 지역구인 히로시마현 제6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당선 후 국민신당 대표대행을 역임한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국민신당 소속으로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해 민주당의 지지까지 받으면서 6만 표 이상의 표차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국민신당 대표를 맡는다. 이후 민주당, 사회민주당과 3당 연립정권인 민사국연립정권(民社国連立政権)을 구성해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담당, 우정개혁담당) 등을 역임한다. 간 내각에서도 유임되었으나 2010년 6월 경 우정개혁 법안이 무산되면서 금융담당대신직을 사퇴한다. 이후 간 제2차 개조내각에서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역임한다.

그러다가 노다 제3차 개조내각이 추진하는 소비세 인상 법안에 반대해 국민신당 대표로서 연정 탈퇴를 선언하면서 당내 연정 유지파와 대립 끝에 국민신당을 탈당한다. 탈당 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다가 ‘반TPP당’을 창당, 이후 감세일본, 일본 미래당, 녹색바람 등에 합류하다가 다시 무소속으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 은퇴했다.

가와이 가쓰유키가 현금을 뿌린 사람 중에 가메이 시즈카의 비서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계 은퇴 후로는 사토 고지를 지원하고 있으며, 사토 고지는 가메이 시즈카의 지원덕에 험지인 히로시마에서 야권 후보로 재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75 - 2005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2005
우정민영화 반대로 강제 제명


2005 - 2012
창당

[[무소속|
무소속
]]

2012
당내 노선 차이로 탈당
반TPP당
2012
창당


2012
합당

[[무소속|
무소속
]]

2012
당내 노선 차이로 탈당


2012 - 2013
창당

[[무소속|
무소속
]]

2013 -
탈당
정계 은퇴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히로시마 3구


59,350 (11.6%)
당선 (5위)
초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6,562 (17.0%)
당선 (2위)
재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3,862 (14.7%)
당선 (5위)
3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6,514 (22.5%)
당선 (1위)
4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7,433 (18.6%)
5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1,064 (18.3%)
당선 (2위)
6선[5]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히로시마 6구
122,071 (48.84)
당선 (1위)
7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8,790 (57.92%)
8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7,659 (51.34%)
9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0,979 (41.53%)
10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7,287 (60.17%)
11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1,078 (49.00%)
12선
2014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무소속|
무소속
]]

89,756 (52.16%)
13선

5. 기타[편집]


  • 상술했듯이 한국과의 단교를 주장하는 등의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한일합병에 대해서는 식민지 수탈론의 입장을 취했다.
  • 또 한국계 일본인 중의원 의원 아라이 쇼케이의 자살 당시 그의 유서를 받은 사람 중 한명으로, 상당히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다나카 마키코가 그를 가리켜 “조용하지 않은 사람(静かじゃない人, 시즈카쟈나이히토)”[6]라고 비난했다.
  • 마쓰시마 미도리 전 법무대신이 기자 시절 그를 취재했다고 한다.
  • 다케다 료타 전 총무대신이 정계 입문 전 그의 비서로 근무했다.
  • 하라구치 가즈히로 전 총무대신이 현직 재임 당시 3월 16일에 참의원 총무위원회에 지각을 했었는데, 본인은 직전까지 있던 중의원 본회의가 어린이 수당 법안 표결을 위해 시간을 연장했다고 해명했었다. 하지만 같은 중의원 의원인 가메이 시즈카 당시 우정개혁담당대신은 참석하고 있었기에 재평가를 받았다.
  • 시즈카(静香)'는 전형적인 일본 여성의 이름이지만[7], 남성이다. 가메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형 이쿠오가 친구를 소개시켜 줬는데, 형의 친구는 호방한 미남인 이쿠오의 동생이기도 하여 시즈카라는 이름을 듣고 '어떤 미소녀일까' 기대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남자여서 대실망했다라던(...)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바로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전 환경대신이다.#
  • 아키히토와의 오찬 자리에서 일본 황실교토 이주를 제안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 히로시마에서 지반이 엄청나게 탄탄하였다. 가메이 시즈카의 히로시마 저택은 흡사 야쿠자 본부처럼 생겼다.[8]
  • 그의 친형인 가메이 이쿠오는 참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가메이 히사오키 전 중의원 의원, 가메이 아키코 전 중의원 의원 부녀와 먼 친척관계이다. 다만 가메이 히사오키-가메이 아키코 부녀쪽이 가메이 가문의 직계에 가깝다.

[1] Japan Security Support. 나리타공항을 비롯해 국내 여러 공항의 경비 등을 담당하는 업체로 매출 100억엔에 가까운 중견업체. 태양광 사업도 한다고 한다. 회장 취임 자체는 중의원 재직중인 2016년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1988년 경찰청 의뢰로 JAL과 가메이 시즈카가 공동출자하여 세운 합작회사로 반쯤 개인회사이다. 회사 홈페이지 여담으로 이 회사의 특별고문이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이다.[2] 가토 가쓰노부가 고교 후배이다.[3] 사실 일본 관료 중에서도 권한이나 조직내 지위, 퇴임 이후 재취직 등 무엇 하나 꿇리는 게 없는 최고의 관료가 경찰 관료이기 때문에, 대부분 1종 시험 합격자가 경찰청 입청시험에 붙으면 절하고 들어가는 수준이다. 현재도 선호도가 재무성, 경제산업성, 총무성 등 최상위 부처와 비슷하다.[4] 민당(由民主党), 일본회당(日本会党), 신당 사키가케(新党きがけ) 3당의 연립정권이다[5]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6] 시즈카는 일본어로 '조용함'을 뜻한다. 일종의 언어유희.[7] 가상 인물이지만, 예시로 도라에몽신이슬(日: 미나모토 시즈카)의 경우가 있다. 특히 그냥 静라면 참작 여지가 있는데 静香의 뒤에 붙은 香자로 인해 무조건 여자 이름이다. 그럴 만도 한게, 부모가 뱃속의 아이가 여자아이라고 생각해서 지어둔 이름을 남자아이로 태어나서도 그대로 붙여준 것이기 때문이다.[8] 파일:亀井静香広島自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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