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레 단눈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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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레 단눈치오
Gabriele d'Annunz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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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3년 3월 12일
이탈리아 왕국 페스카라
사망
1938년 3월 1일 (향년 74세)
이탈리아 왕국 가르도네 리비에라
국적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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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시인, 소설가, 극작가
소속
이탈리아 국가주의단[1]
서명
파일:D'Annunzio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3. 영향
4. 여담
5. 작품
6.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카르나로 이탈리아인 섭정국두체. 다방면에서 활약하면서 20세기 초반 이탈리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문인이다.

2. 생애[편집]


쾌락을 주는 그의 재능은 가히 악마적이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1863년 3월 12일 아브루초(Abruzzo)주의 페스카라에서 대지주이자 군수인 프란체스코 라파넷따의 아들로 태어났다. 작가의 재능을 어렸을 때부터 숨길 수 없었는지, 16세의 나이로 첫 번째 시집인 '이른 봄에(Primo Vere)'를 발표하고, 로마 사피엔짜 대학교로 입학하며 본격적인 문인으로써, 사회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사진과 같이 대머리에다 키도 작은 그는 묘하게도 많은 귀족 여성들과 엮였는데,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은 그의 매력적인 목소리와 언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화려한 관용구와 찬사, 로맨스를 섞은 화법으로 여러 귀족 영애들을 꼬시다 결국 갈레세 공작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귀족 사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물론 지주이자 군수였던 아버지의 재산도 있었겠지만, 특별히 부유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수많은 여성들의 후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후에 그가 모험에 가까운 짓거리를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이혼 후에도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여배우로 꼽히는 엘레오노라 두세(Eleonora Duse)와 5년간 동거하며 무슨 짓을 했는지 그녀는 평생 벌어들인 돈을 모조리 단눈치오에게 퍼부었고, 그로 인해 그의 문학 및 희곡 작품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와 소설 작품들은 프랑스 자유주의와 니체의 영향이 깊게 보인다.

그러다 결국 막대한 빚을 지고 프랑스로 도망친 와중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데, 이로 인해 그의 똘끼가 본격적으로 발휘되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누가 안 그랬겠냐마는, 단눈치오는 중증의 로마 제국 빠돌이었고, 이로써 작가에서 민족주의자로 탈바꿈한 단눈치오는 마치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이탈리아에 재림하게 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에 빠져들었다. 이탈리아로 복귀한 그는 이 전쟁이 과거의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라고 연설하였고,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1915년 5월 23일 연합국 측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이끌었다. 특히나 런던 밀약에서는 아드리아 해 쪽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이탈리아에게 주겠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단눈치오에게는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52세의 나이로 단눈치오는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한다. 군대 경험도 없던 나이든 문학가 나부랭이가 용맹함을 보였고, 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취향으로 인해 그의 활약들은 전설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비행' 은 단눈치오가 비행기 9대를 동원하여 700마일 떨어진 오스트리아 빈 한가운데에서 선전 인쇄물 대부분이 자뻑과 허풍으로 가득차있는을 날리고 무사귀환했다. 당시의 비행기 수준과 아무리 대공무기가 미비한 시대였다고 해도 대단한 짓거리. 해군에서도 소형 잠수정을 몰아 자폭공격으로 전함을 침몰시키는 등 목숨을 아끼지 않는 미친 짓을 한 결과 오른쪽 눈을 잃었지만 전쟁이 끝날 때 즈음 그는 이탈리아에서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전쟁영웅이 되어있었다.

다만 전쟁이 끝난 후 런던 밀약의 내용과는 달리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베네치아 공화국 소속의 오스트리아 일부 영토를 할양받지 못하자 단눈치오와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격분했고, 당시 막 두각을 나타내던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명대사와 함께 1919년 200명의 의용군들을 이끌고 피우메로 무작정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극우파 출신의 퇴역 군인들이나 탈영한 현역 사병들이 합류해서 피우메에 도착했을 때는 전차와 장갑차, 트럭과 함께 2,500에 가까운 병력이 되었다. 종전선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소위 의용군이라는 작자들이 국제법상 불법 침공을 감행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기겁해서 연합군 이탈리아 사령관 피타루를 파견한다.

이때 단눈치오는 피타루와 그의 휘하 병력이 총을 겨누자 자신의 외투를 젖히며 훈장이 가득 달린 옷을 보여준다.

나를 죽여야 한다면 여기를 쏘시오.

일설에는 피타루는 그만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전쟁영웅으로써 인기가 자자하던 단눈치오를 쏠 군인은 없었고, 진압군까지 흡수해버린 단눈치오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도시를 점거해버렸다(...). 난데없이 의용군이 점령해버린 이 도시를 어떻게 해야할지 연합국은 답이 없었고, 민족자결주의적으로 투표를 통해 결정하라는 권고에 피우메 시민들은 그냥 닥 단눈치오를 지지해버렸다.

뜬금없이 한 도시국가의 수장이 되어버린 단눈치오는 스스로를 두체라 칭했고, '카르나로 헌법' 이라 불리는 평등주의 헌법을 제정한 뒤, 양원제 의회체계에다 선거제를 통해 선출되는 대표들과 종교, 언론, 사생활의 절대적 자유[2] 등을 제정했다. 게다가 사회보장제도나 최저임금제, 의료보험 등을 도입했다![3] 다만 그놈의 로마빠기질이 어디 가질 않았는지 안찰관, 호민관, 비상시에는 독재관(...) 까지 도입함으로써 고대 로마 흉내를 냈고, 심지어 국기와 고유 통화까지 가진 국가를 만들어버렸다. 양판소마냥 한 난봉꾼 시인바드이 현실에 만들어 낸 도시국가였던 것.

다만 당연하게도 이런 이상적인 개념들은 작은 도시국가 피우메에서 이루어지기엔 지나치게 스케일이 컸고, 본인도 정치나 내정 쪽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매일같이 발코니에서 연설을 하는 데에나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도시는 곧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고. 게다가 그의 여성편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했으며, 그러자 피우메에서도 자신들의 두체를 따라 문란한 생활을 하는 등 도시가 거대한 매춘굴이 됐다고 한다(...). 그 후로도 약 16개월동안 무정부 상태를 유지하다 최종적으로 1921년 이탈리아의 졸리티 내각에 의해 흡수되어 끝이 났다.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꽤나 평화로운 퇴장이었다고. 일부 이탈리아인들은 만약 그가 다른 마음을 먹고 이탈리아로 진군했다면 위화도... 피우메 회군 충분히 당시 정부를 끌어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그랬다면 무솔리니의 파시즘과는 다른 방향으로 갔을지도?

그 후 1924년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몬테 네소보공(公)으로 봉해졌고, 파쇼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대선배의 예우를 받다 1938년 가루다 호반에서 사망했다.


3. 영향[편집]


항상 그가 입에 달고 살던 난장판이라는 표현답게 단눈치오는 이탈리아의 난장판 같은 현대사에 영향을 준 부분이 꽤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태동시킨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대부가 단눈치오였으며, 1920년대에 무솔리니가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무대를 휘어잡기 시작하자 그의 저서, 이념과 명언들은 젊은 추종자들에게 이용당한다.

실제로 그는 파시스트보다는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대선배를 기념하기 위해 강제로 파시스트로 낙인찍힌 감도 없잖아 있다. 애초에 그의 영묘라 할 수 있는 빅토리알레 저택(Vittoriale degli Italiani) 자체가 파시스트 기념물이나 마찬가지라... 가르다 호수 근처인 그의 저택을 방문해보면 개인 저택 주제에 전투기와 군함, 원형 극장, 그의 전리품 등이 넘쳐난다.

예술가로써의 단눈치오는 분명 근현대 이탈리아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신낭만주의 작가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탈리아인의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필요하다면 피를 흘리라는 광기에 빠진 영웅이 되었다. 예술가의 자질을 가진 자가 정치색을 드러낼 때, 최악의 경우는 아돌프 히틀러이고, 최선(?)의 경우는 이 단눈치오라고 할 수 있겠다.


4. 여담[편집]


  • 육군으로 복무할 때는 잘 보이는 화려한 망토와 쌍권총(...)을 들고 돌격했다고.
  • 의외로 오리엔탈리즘에 깊게 심취하여 동양의 문물이나 정신적 세계, 이념 등이 그의 작품에서 자주 묘사된다.
  • 상기했듯 여성편력이 굉장히 화려했다. 160cm 남짓한 키를 가진 대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는 재주는 누구보다도 대단했다고 한다.
  •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도시국가의 수장으로 지낼 때 사용한 두체라는 호칭은 무솔리니가 그대로 사용했고, 고대 로마에 미친 것도 동일하다. 심지어 일부 무솔리니의 연설은 단눈치오의 연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많다고.


5. 작품[편집]


  • 조춘 (1880)
  • 죽음의 승리 (1894)
  • 쾌락 (1889)
  • 죄없는 자 (1893)
  • 알초네(1904)
  • 페드라 (1909)


6. 매체에서[편집]


하츠오브아이언4의 모드인 레드플러드에 피우메 음악국을 이끄는 지도자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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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ssociazione Nazionalista Italiana[2] 심지어 시대를 앞서 여성의 평등까지도 규정했다.[3] 일반적인 파시스트 = 극우 라는 주장과는 다르게 실제로 파시즘은 상당 부분 좌성향, 그것도 사회주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물론 그것도 초기 파시즘 한정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