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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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מבצע עופרת יצוקה
Gaza War (2008-09), Operation Cast Lead
Gaza Massacre, Battle of al-Furqan
الحرب على غزة 2008–09
مجزرة غزة
معركة الفرقان

1. 개요
2. 배경
3. 이스라엘의 폭격
4. 결과
5. 향후 전망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미국의 정권이 조지 W. 부시에서 버락 후세인 오바마로 교체되기 직전인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월 사이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하의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하마스 간에 일어났던 전쟁.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 이후에는 제1차 가자 전쟁이라고도 한다.


2. 배경[편집]


팔레스타인 전역을 휩쓸었던 제1차 인티파다제2차 인티파다 이후 팔레스타인과 하마스 양측간의 대립은 계속 격화되어 갔다. 이미 2006년에 이스라엘이 한 번 침공하여 수백여 명의 사망자를 낳았던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경제 봉쇄로 인해[2]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1제곱킬로미터당 4,500여 명이 살고 있는 고밀도 인구지역인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에게 계속 경제 봉쇄를 풀 것을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세력이 커질까봐 이 말을 듣지 않았다.

2006년 6월경 가자지구 근처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길라드 샬리트 상병이 하마스 무장단체에게 납치, 억류되었다. 하마스는 샬리트 상병의 석방을 조건으로 수감중인 팔레스타인 재소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고 샬리트 상병 구출을 위해 가자지구를 공격했지만 구출에는 실패했다. 결국 지루한 대치 속에 몇 차례 협상이 이루어졌으나 별 진전은 없었고 하마스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로켓포를 쏘아올리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봉쇄하는 형태의 상황이 이어졌다가 결국 2008년 말에 대대적인 가자지구 공습에 나서게 되었다.


3. 이스라엘의 폭격[편집]


파일:external/imgnn.seoul.co.kr/SSI_20140725140819_V.jpg
(UN 난민구제사업국 학교를 집어삼킨 이스라엘군 155mm 백린탄)

당시 이스라엘 본국에서는 그 광경을 보고 환호하는 이스라엘 민간인들의 모습이 그대로 찍혀나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스라엘인들 입장에서는 3년 전인 2006년 레바논 전쟁에서 헤즈볼라에게 예상 밖의 고전을 펼치며 사실상 패배했던 것을 설욕했다는 만족감의 표시였을지는 모르지만, 전황이 이스라엘의 일방적 우위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이러한 모습은 세계 각국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만 높이는 자충수가 되었다. 거기에 가자 지구 거주 민간인이나 기자들이 찍은 민간인 희생자 사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도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어그로를 대량으로 끌어오는 계기를 제공했다.

1월 3일에는 리비아의 제안으로 휴전을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세계 각국의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1월 8일 휴전 결의안에는 기권으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미국 상원이, 다음날인 1월 9일에는 미국 하원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4. 결과[편집]


그렇게 1달을 보낸 결과

이스라엘: 13명 사망(그 중 10명은 군인. 3명은 민간인 ,10명 중 4명은 이스라엘 군의 오폭으로 사망), 518명 부상(그 중 336명은 군인, 182명은 민간인)

가자 지구: 1,417명 사망(그 중 236명이 군인)[3], 5,380명 부상, 건물 4,100여 채 파괴, 건물 17,000여 채 부분 파괴, 어린이와 청소년 112,000여 명 포함 200,000여 명이 집을 잃음, 재산 피해 19억 달러이다. 1:100의 교환비이다.

결국 전황은 이스라엘의 우세로 끝났지만 하마스는 장기전과 시가전을 통해 이스라엘군을 괴롭히기로 마음먹었으며 이를 뻔히 알고 있는 이스라엘은 2차 레바논 전쟁의 실패를 교훈 삼아 시가지를 포위한 채 폭격을 통해 가자지구를 초토화시킨 뒤 철수했다.[4] 2006년 헤즈볼라와의 레바논 전쟁 실패를 교훈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무장 세력들을 불과 한번의 전쟁으로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대신 군사력을 동원할 때마다 최대한 그들의 전력을 감소시켜 전력 회복에 많은 시간이 걸리도록 강요함으로써 일정 기간 동안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전략으로 선회했다.[5] 가자 전쟁이 그러한 변화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 보인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 자아도취적인 국민들의 반응 등 막장 짓거리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이스라엘 안티가 늘어나면서 국제적인 고립만 더욱 가중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미국에서도 비판이 굉장했다. 한마디로 단기적 군사대결에서는 이겼지만, 중-장기적 외교전에서는 손해가 더욱 컸다는 것.

한편 원수지간인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파타가 중동 민주화를 계기로 화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스라엘은 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하마스와 비밀 협상을 벌여 팔레스타인 수감자 1027명을 석방하고 하마스가 억류해두었던 길라드 샬리트 상병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런 훼방(?) 혹은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2012년 2월 6일 카타르 도하에서 팔레스타인 수반이자 파타의 수장인 마흐무드 압바스와 하마스 정치국장인 칼리드 마샬은 경쟁 파벌인 양측이 이미 2011년 4월과 5월 화해 협정을 체결했지만 실행되지 못했던 화해 과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합의에 서명하였다.


5. 향후 전망[편집]


헤즈볼라나 하마스가 최신 러시아 장비와 유럽 용병 교관을 쓰고 경제적으로도 유럽과 미국에도 투자를 늘리는 등 아랍 자본의 또다른 경제전으로 예전과 같은 중동전쟁의 완승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스라엘 전문가들의 평이 많다.

무엇보다 가장 큰 정국변화는 2010년~2011년의 "아랍의 봄". 그동안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던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의 몰락으로 인하여 친미ㆍ친이스라엘 정당이 전무하고 반이스라엘 성향을 보이는(그나마 미국은 중립적으로 여기는 정당이 많으나 이스라엘은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 야당만 넘쳐나는 이집트가 대대적으로 이스라엘에 전쟁을 걸면[6] 4차 중동전쟁 못지 않은 피해를 당할 전망이다.[7]

그동안 미국이 이집트에 대하여 미국제 장비를 대거 수출하였고[8] 이웃 리비아수단 공화국과 국경분쟁으로 전쟁을 벌이면서 꼬박꼬박 실전을 치른 터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전쟁을 벌이진 않았으나 이스라엘에 유화적이던 튀니지도 친미 벤 알리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스라엘에겐 더 시름으로 다가왔다.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친미적 야당은 거의 전무하고 혐이스라엘 야당과 시각이 크기 때문이며 두 나라 여론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극히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몰락하고 하마스가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하다가 이집트에서도 테러단체로 지정되면서 하마스가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2014년 이후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대두가 큰 변수로 다가왔다.


6. 관련 문서[편집]




7.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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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문자료를 단순 직역했는지, "군함"이라고 적어야 할 것을 "전함"이라고 잘못 표기했다. 현대 전 세계 어느 국가도 전함(Battleship)이라는 함급을 운용하고 있지 않으며, 영어로 "Vessle"이라고 표기하면 "군함"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구축함/순양함/전함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던 19세기까지는 "전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해서, 사전에는 "전함"이라는 의미도 같이 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생긴 오역으로 보인다.[2] 2006년 침공 당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 단 하나 있던 발전소를 미사일로 때려부쉈다.[3] 여기서 군인은 하마스 대원들과 다른 무장단체 대원들이다. 하마스 소속 경찰도 255명의 사망자를 내기는 했다.[4] 어차피 이스라엘 경제력과 물량으로 전쟁을 오래 할 수 없다. 게다가 장기전과 시가전으로 나가면 이스라엘은 힘들어진다. 특히 하마스 족치는데 신경쓰던 2011년에 이스라엘에서 '고물가 땜에 못살겠다. 전쟁보다 민생부터 살려라'는 30만 인파의 최대 규모 시위가 벌어졌기에 이스라엘 정부가 전쟁에 신경쓰기가 더욱 힘든 상황이었다.[5] 이를 두고 이스라엘은 '잔디 깎기' 전략이라고 표현했다.[6] 이집트의 군사력은 2018년 3월 기준으로 세계 14위(13위이스라엘), 전차 보유대수는 4,487대로 규모로만 따지자면 세계 4위다. (군사력 순위, 전 세계 국가 전차 보유수)[7] 실제로도 이집트는 제4차 중동전쟁 (욤키푸르 전쟁) 당시 미국 지원만 아니면 이스라엘을 패망하기 직전까지 몰고갔던 전적이 있으며 2013년에 이슬람 강경파 정당인 무슬림 형제단이 이집트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는 이스라엘 정부는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부전선에 대해 다시금 크나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8] 다운그레이드 버전이긴 하지만 미국산 M1A1 에이브람스 전차도 1,005대 가량 공급하였고 125대가 추가 발주되었다. 사실상 사방이 적 국가로 둘러싸인 이스라엘군에겐 짜증날 정도로 부담이 되는 기갑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