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드미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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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가짜 드미트리들
3.1.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 1세
3.2.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 2세
3.3.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 3세
4. 종결
5. 의의
6. 매체에서


1. 개요[편집]


Лжедмитрий(Lzhedmitry(False Dmitry).

러시아 역사에서 혼란 시대라 부르는 시기에 이반 뇌제의 막내 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를 참칭3명의 인물[1]을 칭하는 표현이다.


2. 배경[편집]


유럽 러시아 지역은 오랜 기간 초대 노브고로드 공작 류리크의 부계 자손들, 소위 류리크 왕조의 군주들이 다스려왔다. 하지만 이반 4세가 선포한 루스 차르국 시기에 이르러 러시아의 군주 자리를 세습해오던 왕실의 핏줄이 끊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은 이반 4세 그 자신이었다.

사실 발단은 이렇다. 당초 이반 4세에게는 첫 부인 아나스타샤가 낳은 자신의 핏줄을 이은 직계 아들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장남인 이반이 황태자로 공인되어 차기 차르위를 계승할 예정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비 옐레나 역시 임신한 상태였기에 계속 왕실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반 4세는 황태자비 옐레나가 너무 더워서 얇은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2] 복장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벌컥 화를 내며 옐레나를 마구 구타하였고, 그 바람에 옐레나는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당연히 황태자는 그 유산소식에 크게 상심하고 분노하여, 이전 아내들을 수도원에 보낸 것도 모자라 왜 죄없는 아이를 태어나기도 전에 죽이냐고 따지면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에 화가 난 이반 4세는 그만 정신줄을 놓으셨고 부지깽이를 집어들어 황태자까지 마구 두들겨패고 말았다. 이반 4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황태자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고,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이반 4세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큰 소리로 슬피 울면서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를 한다고 해서 시간이나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결국 머리에 중상을 입은 이반 황태자는 3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파일:Iván_el_Terrible_y_su_hijo,_por_Iliá_Repin.jpg
일리야 레핀(Илья́ Ефи́мович Ре́пин, 1844년 ~ 1930년, 러시아),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Иван Грозный и его сын Иван 16 ноября 1581 года)>, 1885년, 캔버스에 유화, 199×254cm,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탸코프 미술관 소장.
본래 레핀은 이 그림에서 러시아 민중을 억압하는 기득권 세력과, 그들에게 탄압받고 저항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은유하려 했다. 즉 레핀은 이반 4세를 억압자로 표현한 것. 그런데 재미있게도, 레핀이 이반 4세의 표정을 너무나도 실감나게 묘사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이반 4세에게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고.

이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인해 황태자를 잃었으나 이반 4세에게는 다행히 보위를 이을 수 있는 다른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들 병약하거나 요절해서 자식이 없다는 것. 이반 4세가 죽은 뒤 차르가 된 표도르 1세는 자식도 없이 얼마 못가 요절했고, 그 외에 2번째, 7번째 아내들이 낳은 바실리와 드미트리도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결국 류리크 왕조 직계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게다가 방계 쪽으로 눈을 돌리려 해도, 이반 4세의 사촌과 그 가족들이 있긴 했으나 이미 이반 4세에 의해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지 오래였다. 결국 이반 4세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왕조의 대를 끊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인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반 4세의 마지막 아내 마리야 표도로브나 나가야(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Нага́я)가 낳은 막내 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는 1582년에 태어나서 1591년에 죽었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죽음을 놓고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많았던 까닭에[3] 어쩌면 죽지 않고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3. 가짜 드미트리들[편집]



3.1.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 1세[편집]






루스 차르국 비왕조 초대 차르
가짜 드미트리 1세
Лжедми́трий I


파일:640px-Dmitry_Pretender.jpg

출생
1581년
사망
1606년 5월 17일 (향년 25세)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재위기간
루스 차르
1605년 6월 10일 ~ 1606년 5월 17일
서명
파일:가짜 드미트리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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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미상
이름
미상
아버지
미상
어머니
미상
형제자매
미상
배우자
마리나 므니셰흐 (1605년 결혼)
자녀
없음
종교
러시아 정교회



표도르 1세의 사후 공석이 된 차르위에는 표도르의 처남이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정통 류리크 왕조의 피가 흐르지 않는 이상 류리크 왕조의 아닌 인물이 차르가 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내부적으로는 보리스에 대한 반발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리스의 통치가 이거 영 아니올시다 수준이었기에 러시아의 대귀족 보야르들이 대놓고 보리스를 디스할 정도로 여론도 나빴다.

게다가 하필 보리스 고두노프 치세 기간에 루스 차르국에는 심각한 가뭄이 일어 수많은 백성이 굶주렸기 때문에 고두노프에 대한 불만이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짜 드미트리 사건의 시작과 혼란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첫 번째 가짜가 등장했다.

당대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이 인물의 본명은 그리고리 혹은 유리 오트레피예프(Григорий/Юрий Отрепьев)이다. 진짜 드미트리는 1582년생이고, 드미트리를 자칭한 오트레피예프는 1581년생이었다. 가족들이 그를 성직자가 되라고 수도원에 맡겼는데 정작 당사자는 수도원을 탈출하고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가 됐다.

이 시절 길가에 떠도는 소문을 주워듣고는 자신이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 확신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계기로 그렇게 믿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인물은 나머지 가짜들과는 달리 자기가 우글리치의 공작 드미트리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분위기에서 진짜가 됐건 가짜가 됐건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은 차르 입장에서 골치 아픈 존재였다. 결국 보리스는 명령을 내려 이 가짜를 체포하려 했으나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직감한 가짜 드미트리는 잽싸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망명을 선택했다. 여기서도 가짜 드미트리는 자신이 이반 4세의 막내 아들 드미트리이며 류리크 왕조의 정당한 계승자 자격으로 저 괴뢰 차르를 몰아내고 자신이 차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원조를 요청했다. 비록 가짜 드미트리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부터 국가 단위의 지원을 약속받지는 못했으나 이러한 러시아의 혼란에 관심을 가진 몇몇 귀족들로부터 사적인 원조를 받아내면서 보리스에게 대항할 세력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짜 드미트리는 자신에게 원조한 귀족 들 중 한 명의 딸인 마리나 므니셰흐와 사귀게 되어 약혼까지 했다.

가짜 드미트리는 1604년 폴란드인카자크인으로 구성된 용병 부대를 이끌고 루스 차르국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보리스는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의 숙부를 데려와 진짜 드미트리는 죽었고 저놈은 가짜라는 것을 입증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는 그 때 죽은 인물은 자신의 대역이였다면서 당당하게 맞섰고, 그 결과 보리스에 불만이 많던 세력들이 죄다 가짜 드미트리 쪽으로 붙어버렸다. 이로 인해 차르 보리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가짜 드미트리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의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아무래도 용병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드미트리가 병력의 양과 질에서 불리했기에 대체로 차르의 군대에게 밀리는 형태로 전개됐다. 하지만 1605년 4월 보리스가 급사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애초에 보리스는 그렇게까지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차르였고, 류리크 왕조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짜 드미트리가 대세였기에 결국 차르의 군대도 즉시 깃발을 바꿔 가짜 드미트리의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이자 그 뒤를 이어 차르가 된 표도르 2세는 1605년 6월 가짜 드미트리의 모스크바 입성과 함께 폐위당한 직후 살해됐다. 보야르들은 가짜 드미트리의 존재를 인정했고, 심지어 드미트리의 생모까지 그가 진짜 아들임을 선언하면서 마침내 가짜 드미트리가 러시아의 차르에 오름으로 상황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는 러시아의 차르가 되는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은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를 모시는 인물들 중에는 폴란드 출신 인물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필연적으로 폴란드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폴란드인들을 중용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보야르들은 가짜 드미트리의 행동을 묵인했으나 정작 가짜 드미트리가 총애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막장이었던 까닭에 민중들이 가짜 드미트리의 통치에 불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짜 드미트리는 러시아 귀족의 딸이 아닌 폴란드 귀족의 딸 마리나 므니제치를 왕비로 맞이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는 전통적인 앙숙 관계였으며 종교적인 문제로도 대립하는 사이였다. 결국 묵인하고 있던 보야르들도 가짜 드미트리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에 보야르들의 실세였던 바실리 슈이스키가 기존의 태도를 번복하고 지금 차르로 있는 드미트리는 가짜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는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일고의 대응가치도 없는 헛소문으로 치부했고, 바실리 슈이스키가 소문을 퍼뜨렸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처벌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가짜 드미트리의 큰 실책이 되고 말았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1606년 5월 가짜 드미트리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규합하여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저 더러운 폴란드 앞잡이와 그 똘마니들을 몰아내고 러시아를 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반기를 들었다. 게다가 드미트리의 생모마저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종전의 태도를 번복하고 "저 놈은 내 아들이 아닌 가짜"라 선언했다. 이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의 10개월에 불과한 짧은 치세가 막을 내렸다.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도망가려던 가짜 드미트리는 성에서 도망치다 추락하는 바람에 두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는데 이 상태로 근위병에게 발각되어 끔살당했다. 이때 그는 '배신'에 충격을 받았는지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욕설을 총동원해서 퍼붓다가 죽었다고 하며, 이후 분노한 러시아인들은 그의 시체에 온갖 모욕을 가하여 훼손했는데, 시체를 대포에 집어넣고는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해버렸다.



3.2.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 2세[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Pseudo-Dimitrij.jpg
가짜 드미트리 2세(Лжедмитрий II/False Dmitry II)라 부른다.

바실리 슈이스키가 반란을 일으켜 가짜 드미트리 1세를 몰아내고 러시아의 차르 바실리 4세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실리 4세도 예전의 보리스 고두노프와 비슷한 이유로 정적들에게 공격을 받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사실 바실리 4세도 남계 혈통으로 따지고 들면 류리크 왕조의 후손이긴 했다. 다만 슈이스키란 귀족 가문이 류리크 직계, 방계와 따지면 촌수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계 혈통까지 따지고 들면 직계에 훨씬 가까운 귀족들도 많았기 때문에 결국 정통 왕가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정통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반 4세의 손녀와 바실리 4세의 아들이 결혼해도 상관없을 정도의 머나먼 촌수였다. 그 결과 바실리 4세 역시 그에게 반발하는 세력의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607년 자신이 이반 뇌제의 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는 진짜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돌아와 류리크 왕조를 부활시키고 러시아를 다스릴 것이란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사태이기도 했다. 다만 가짜 드미트리 1세와는 달리 이 인물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경 지대에 수감됐다가 탈옥한 죄수였던 것 정도로만 추측되고 있다.

어쨌든 갑툭튀한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자신이 진짜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임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것으로 알려진 가짜 드미트리 1세 역시 자신이었다란 골때리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튈 수밖에 없었으나 간신히 사태가 진정되어 복귀할 수 있었으며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된(...) 그 인물은 자신을 모시고 같이 도망치던 시종이라 떠벌리기 시작했다.

일단 상단에 첨부된 두 그림을 참고하면 어떤 관점에서 봐도 동일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목소리는 물론 체형까지도 완전히 달랐으므로 제정신으로 판단하면 '믿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란 소리가 나올 수준의 허언이었다. 그런데 드미트리의 생모가 "너야말로 진짜 내 아들"이라 증명까지 했고, 마리나 므니셰흐도 "당신이야말로 진짜 내 남편"이라 공표해버렸다.

그런데 실제로 이 인간은 첫 번째 가짜와는 달리 자기가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임 차르의 막내 아들이라는 점으로 인해 단절된 차르의 혈통을 잇기 쉽다는 점을 이용해 루스 차르국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는 이름이 워낙 위상이 높아 그 이름을 등에 업어 한 몫 잡아보려는 심보로 자기가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고 우겼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드미트리가 나타났다고 믿은 러시아 민중들은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열렬하게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민중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가짜 드미트리는 반란군 잔당을 규합하여 모스크바로 진출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가짜 드미트리군과 차르군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에서 맞붙었는데 이 때 바실리 4세의 동생 이반이 개털리는 바람에 모스크바가 함락당할 뻔 했으나 조카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가 이들을 저지하면서 모스크바는 사수해낼 수 있었다.

모스크바 입성에 좌절한 가짜 드미트리 세력은 근교 투시노로 물러났으며 여기에다가 아예 살림을 차려버렸다. 이에 가짜 드미트리에 복속된 세력은 세금까지 갖다 바쳤고, 이를 바탕으로 가짜 드미트리는 병력을 조련하고 성을 쌓는 등 러시아의 차르나 다름없는 수준의 대우와 활동을 했다. 이를 계기로 가짜 드미트리는 "투시노의 악인"(тушинский вор/투시니스키 보르)이라는 별칭이 붙게 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처하자 바실리 4세는 스웨덴 국왕 칼 9세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코렐라(Корела)[4]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면서 1609년 2월 스웨덴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실리의 조카 미하일은 병력을 이끌고 차례차례 가짜 드미트리의 세력을 분쇄해나갔고 세력을 잃은 가짜 드미트리는 칼루가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스웨덴의 개입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좋은 빌미거리[5]를 제공하고 말았고, 국왕 지그문트 3세가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내세워 역시 러시아의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를 몰아세우던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폴란드군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고, 그 덕분에 기회를 얻은 가짜 드미트리는 다시 한 번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한편 폴란드 군대를 막기 위해 이동 중이던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총사령관 미하일이 바실리 4세의 동생에게 암살당했고, 용병료를 지급하지 않고 무시하는 바람에 스웨덴군과 러시아군의 반목마저 격화해 그야말로 분위기는 그야말로 막 나가게 됐다. 결국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3만은 클루쉬노 전투에서 폴란드의 원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가 이끄는 5천의 윙드 후사르에게 탈탈 털리고 말았다. 이 참패로 인해 바실리 4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세임에 끌려가 절을 하면서 폐위당했다.

가짜 드미트리는 이를 기회삼아 자신이 러시아의 정당한 차르임을 역설하며 인정받으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귀족들은 이미 지그문트 3세와 협상을 마친 상태였고, 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선출했다.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맞섰지만 결국 힘에서 밀려 다시 칼루가로 도망쳐야 했다.

한편 차르로 선출된 브와디스와프는 가톨릭 신자였는데 차르가 되려면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자 지그문트 3세는 아들의 즉위를 거부했고, 이를 핑계삼아 러시아의 직할 통치를 선언했다. 여기에 스웨덴마저도 폴란드와의 협상과 떼인 용병료 지급을 빌미로 루스 차르국을 공격하면서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짜 드미트리는 다시 기회를 잡고 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재규합하여 중앙 정부에 대항하려 했으나 1611년 12월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 그 부하라는 놈은 가짜 드미트리의 시체를 아예 토막내버렸다. 이후 마리나 므니셰흐가 우글리치 공작의 유지를 잇는다면서 그의 어린 아들 작은 악당 이반을 지도자로 내세워 저항을 계속했으나 결국 진압당했다. 이 때 작은 악당 이반을 비롯하여 그들을 지지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처형당했지만 마리나 므니셰흐는 죽음을 면하고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몇 년 후 감옥에서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3.3.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 3세[편집]


가짜 드미트리 3세(Лжедмитрий III/False Dmitry III)라 부른다.

아직 러시아의 동란이 마무리되지 않은 1611년 자신이 드미트리임을 자처하는 인물이 또다시 나타났다. 역사학자들은 시도르카라 불리던 보제[6]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카자크인들과 프스코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프스코프의 도적"이란 별칭이 붙었다. 하지만 앞서 등장한 가짜 드미트리들과는 달리 별 활약도 못 해 보고 1612년 3월 지지 세력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4. 종결[편집]


더 이상 자신이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오지 않게 되자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후 이반 뇌제와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의 류리크 왕조는 대가 끊어진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어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왕조가 러시아의 마지막 왕조로서 마지막 황제니콜라이 2세의 치세까지 304년 동안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5. 의의[편집]


사실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와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비교해보자면 지지층이 상당히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는데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이 막 섞여있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그 비중은 천지차이였다. 첫 가짜의 경우 이반 4세의 막내 아들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가 살아서 제위에 올라달라는 러시아 민중들의 갈망과 가짜 드미트리에게 빌붙어 한 자리 해먹겠다는, 나아가서는 폴란드가 러시아를 잡아먹길 바라는 폴란드 귀족들이 반반씩 섞여 있었으나 두 번째 가짜의 경우 첫 번째 가짜에게 실망한 일부 러시아 민중들로 인해 러시아인들의 지지율은 좀 내려간 대신 폴란드가 러시아를 잡아먹어서 '강점기'를 만들려는 야욕은 더욱 강해진 탓에 폴란드인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다.

마리나가 두 번째 가짜도 자신의 남편이라고 선언했는데, 애초에 마리나 므니셰흐는 폴란드 여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가짜와 두 번째 가짜가 외모가 닮았는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마리나 므니셰흐의 의도는 어떻게든 다시 러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데에 있다[7]. 그러고 보면 보리스 고두노프나 바실리 4세나 자신들은 차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작자들이긴 한데 의도치 않게 러시아 제국을 폴란드로부터 지키려는 애국지사가 되었다. 그래도 바실리 4세가 스웨덴을 끌어들여 싸움박질을 시키고 용병료를 주지 않은 건 너무 하잖아.

이렇게 러시아 제국과 폴란드 간의 권력의 암투를 벌이고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을 먹으려 하고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상황 속에서 그 우글리치의 공작 드미트리라는 이름값이 워낙 컸던지라 러시아 제국은 가짜 드미트리들 때문에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심한 진통을 겪었다.

그렇게 두 번씩이나 된통 당해서인지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 때는 앞의 두 명의 가짜들과는 달리 별 소동조차 없었다. 그 놈의 드미트리 때문에 나라가 폴란드의 손에 넘어갈뻔한 일이 두 번이나 발생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민중들도 이젠 차르보다는 나라가 넘어갈 걱정을 더 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

6. 매체에서[편집]


  •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동명의 오페라가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다루는 내용이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3년 9월 29일 방송분에 등장하였다. 2019년 3월 24일 방송분에 또 등장하였다.
  • 킹덤 언더 파이어에서도 드미트리 Jr.라는 인물이 캠페인 중에 2명의 가짜가 등장하는데, 이 캐릭터의 경우 큐리안의 추적을 피해 세운 대역이다.
  • 은하영웅전설알베르트 대공가짜 알베르트 대공 사건이 이것을 모티브로 하지 않았나는 의견이 있다.
  •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에서는 표도르 2세가 조선과 손을 잡고 가까워지는 바람에 산 채로 대포에 들어가서 발사(...)되는 신세가 된다.
  •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편에서는 전근대편인 21권에서 다루며, 진짜 드미트리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다룬 108~109페이지에선 드미트리가 사고로 죽었다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발표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안 봐도 비디오야! 밀로 (미트리를 죽이고 리발 내미는 거지!"라 말하는 장면을 넣었다.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 일당을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하는 장면도 118페이지에서 나온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아에곤 타르가르옌이 사실 이것을 모티브로 한 가짜가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 모드인 TNO에서 세르게이 타보리츠키로 플레이 뒤 황폐화 된 러시아의 이츠쿠르크 지역에서 자신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로 지칭하는 지도자의 군벌이 등장하는데 해당군벌의 지도자는 전 NKVD 소속의 폴란드인 스파이인 미하일 골레네옙스키로 생긴 것만 로마노프 황가와 유사하지 실질적으론 관계가 없는 인물이나 황폐해진 러시아를 재건하고자 전 지도자 타보리츠키가 내세운 허황된 알렉세이 구세주 이론과 사회주의 사상을 조합하여 나라를 통치한다. 현실의 가짜 드미트리와 달리 탐욕으로 가득한 사기행각이 아니라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고자 하는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 그를 아는 지인들은 이런 행위를 묵인해준다. 그러나 바로 옆 부랴티야의 군벌 지도자인 잔케비치는 이를 눈치채고 그를 폴략(폴란드인을 비하하는 비속어)이라며 멸시하고는, 진정한 알렉세이인 자신이 가짜 알렉세이를 처단하겠다고 선언하며 전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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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명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마지막 1명(가짜 드미트리 4세)은 존재에 대해 신빙성을 의심받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3명으로 본다.[2] 임산부는 체온이 높아 더위를 많이 탄다.[3] 나중에 차르가 된 보리스 고두노프바실리 슈이스키를 시켜 조사한 발표에 따르면, 드미트리는 간질을 앓았고 손칼을 가지고 놀다가 발작 때문에 칼이 목에 찔려 죽었다. 하지만 어린이였던 드미트리가 자살할 리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고두노프가 드미트리를 암살하고 사고사로 조작했다."고 믿었다.[4] 스웨덴어로는 켁스홀름(Kexholm), 핀란드어로는 캐키살미(Käkisalmi), 현재 러시아프리오제르스크.[5]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그문트 3세는 본래 스웨덴 왕자 시기스문드로, 스웨덴 국왕도 겸했으나 루터교회 국가의 가톨릭국왕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체류해야하는 약점을 잡혀 숙부 칼 9세에 의해 폐위당했다. 이후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 회복을 평생의 목표로 삼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외정책을 추진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칼 9세의 개입은 지그문트 3세에게 가짜 드미트리 사태에 직접 개입할 좋은 명분을 제공한 셈.[6] Diakonos. 정교회에서 주교-사제-보제의 삼성직 중 마지막인 최하급 성직자. 가톨릭의 부제와 같음.[7] 일단 마리나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름없는 귀족의 딸 A로 사느니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사기꾼을 꼬셔서 결혼하고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바람을 넣으면서 자신도 러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어 호의호식하려는 의도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보든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멀쩡한 나라를 내전 상태로 몰아넣어 헬게이트로 만든 악녀라는 점에서 러시아인들에게 좋은 취급을 받을 사람은 아니고, 결국 그 욕심 때문에 되려 두 남편은 모두 끔살되고 아들 역시 어린 나이에 살해당했으며 자신도 외국의 감옥에 갇혀 비참하게 옥사했으니 인과응보의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