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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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장.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767호

768호

769호
전북대학교 구 중앙도서관
서울 보화각
담양 모현관

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 Kansong Art Museum


파일:서울간송미술관.png

개관
1938년
설립자
전형필
운영 기관
간송미술문화재단
관장
전인건[1]
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료
무료
연락처
02-744-7830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간송미술문화재단)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간송커뮤니티)

1. 개요
2. 소개
3. 소장품
4. 사실 미술관이 아니다?
5. 관람 관련
5.1. 기본 정보
5.2. 엄청난 관람객 수
6. 여담
7. 2020년 소장품 경매 관련
8. 항목이 생성된 소장품 목록



1. 개요[편집]


대한민국박물관.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으로 전형필(全鎣弼, 1906년~1962년)이 1938년에 완공하였다. 간송(澗松)은 설립자인 전형필의 아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성북동) 에 위치해 있다. 서울특별시 3대 사립박물관 (간송미술관, 리움미술관, 호림박물관) 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손꼽힌다. 전형필의 장남인 전성우가 관장직을 물려받았고, 전형필의 차남이자 상명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를 지낸 전영우가 관장직을 맡았다가 전성우가 2018년 작고하면서 아들 전인건이 관장직을 물려받았다.


2. 소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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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은 조상 대대로 한양종로 상권을 모조리 장악하여 서울을 넘어 전국 최고의 부호였다. 전형필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살펴보면 논이 4만 마지기 (약 800만평 정도), 여기서 나오는 순수익이 연간 15만 원이었다. 당시 서울 시내의 큰 기와집 1채가 1000원 하던 시절이었다.[2] 그는 이 막대한 재산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지켜 내는데 바쳤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과 함께 국외로 반출될지도 모르거나 제 빛을 보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문화재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그간 모아둔 컬랙션을 보관과 연구를 하기 위해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葆華閣)을 1938년에 설립했다.[3]


3. 소장품[편집]


소장 문화재는 주로 고서화 위주인데, 규모 자체는 다른 대형 박물관에 비해 다소 초라하지만 유물의 질적 수준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의 상당수가 여기 있다. 국보급 문화재만도 10여 점이 넘고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원본, 신윤복미인도김득신파적도, 겸재 정선의 작품 등 한국의 그 어떤 박물관도 따라갈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지정문화재는 국보 12점, 보물 32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최근 미인도와 김득신의 풍속도 등이 보물로 추가 지정되어 보물이 32점이 되었으며 문화재청과 협조로 조사, 지정이 진행되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재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형필의 아낌없는 수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귀중한 문화재를 수집,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바가지를 쓰는 것도 전혀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치가 있겠다 싶으면 상대방이 제시한 가격에서 웃돈을 얹고 매입하기도 했다. 일례로 김태준으로 부터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할 때는 그 책의 제대로 된 값을 치러야 한다며 상대가 처음 제시했던 가격의 10배의 돈을 얹어 그 액수가 무려 11000원이었는데, 상대방(김태준)이 처음 제시한 책값 1000원+전형필이 추가로 얹은 10000원이었다.[4]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팔아 사회주의 운동에 돈을 썼으며, 후에 경성 콤그룹의 거물 김태준은 지리산 빨치산으로 붙잡혀 죽었고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한다. 후에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이 사망한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고,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현재까지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진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안동본과 2008년 상주에서 배익기 씨에 의해 발견된 상주본[5]만이 유이하기에, 전형필이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이 아니었더라면 한글의 과학성과 독창성은 오랜 기간 단순한 추측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의 노력 덕분에 한글의 창제원리가 학술적으로 규명되어 전 세계 언어학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국어학자들에게는 실로 하늘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전형필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이 소중한 유산들이 우리 세대에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전형필에 대한 지지는 거의 절대적이다. 본격 '돈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이다.


4. 사실 미술관이 아니다?[편집]


엄밀한 의미에서 간송미술관은 법적으로 "미술관"이 아니었다. 정식 미술관이 되면 문화재급 유물을 대여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 소장품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상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단 것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실제로 간송미술관은 연구 및 보존 시설에 가깝게 운영되어 왔고, 개방 일수도 규정[6]에 한참 미달했다. 다만 하도 운영이 어려워서 2019년 9월에 와서 비로소 정식으로 미술관으로 등록을 했고, 신관 건축 비용 등을 지원받게 되었다.

참고로 미술관으로서 관람객들이 출입하는 그 건물을 포함한 미술관 부지 전부가 간송의 후손들이 소유한 사유지이다. 사실상 일반인이 집 앞마당에 미술관을 차려서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미술관 정문에서 보화각 건물로 가기 전 오른쪽에 있는 출입이 통제된 언덕길이 있는데, 그 길을 타고 올라가면 간송의 후손들이 거주하는 저택이 나온다. 그 집은 원래 미술관 건축 당시 이미 방대해진 수장품을 건축 기간동안 보관하려고 지은 임시 별장이었지만 6.25 전쟁 이후부터 주거지로 쓰이고 있다. 저택에는 북단장(北壇莊)이라는 당호가 있는데, 인근에 자리하고 있던 선잠단(先蠶壇)[7]의 북쪽에 있다는 의미로 오세창이 지었다.

5. 관람 관련[편집]



5.1. 기본 정보[편집]


간송미술관은 문화재의 전시보다는, 문화재의 보호와 연구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어서 관람이 많이 까다롭다. 개방 기간은 1년에 단 두 번, 봄과 가을에 각각 2주일 뿐이고 5월, 10월 하순에만 대중에게 개방한다. 전시회를 가고 싶다면 이 시기에 신문 기사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해당 시기가 되면 모든 언론에서 한 번씩은 간송미술관 전시회 소개 기사를 실어주니 그 때 확인해서 가면 된다. 그 외의 기간에는 일절 개방하지 않는다. 물론 사진촬영은 엄금. 게다가 전시 기간에도 모든 문화재를 상설 전시하는 게 아니라, 해당 전시회의 주제에 맞춰서 일부 문화재만 전시하는 형태라서 관람객 개인마다 원하는 문화재를 보기 힘들다. 이것이 아쉬운 점. 게다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박물관에 연락을 하는데 그 전화번호도 구하기 엄청 어렵다고 한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 내려서 6번 출구로 나와 성북초등학교 방면으로 올라가면 된다.[8] 걸어서 20분 이상 소요되니 마을 버스나 서울 버스 2112, 서울 버스 1111을 타고 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전시기간에 가보면 버스를 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평일 오전이 아닌 이상 지하철역인 한성대입구에서만 내려도 엄청난 줄이 기다리고 있어 20분 거리를 2시간만에 가는 진경험을 할 수 있다. 1년에 4주만 개방하는 만큼 인파가 엄청날 수밖에 없다. 평일 오전 일찍 가더라도 기다리지 않고 입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 반나절 스케쥴을 텅텅 비우고 가야 겨우 볼 수 있다.

통상 관람 시간은 저녁 5시까지다. 성북초등학교를 바로 옆으로 주차 안내 표지판이 있는 곳이 미술관 입구다. 입구에 가면 철망으로 된 우리 안에 개와 공작새(무려 흰공작이 있다), 온갖 화분이 즐비하고, 그 앞에 세워진 2층 건물 하나가 바로 간송미술관이다. 1시간이면 관람하는데 충분하니 부담 없이 두세 시간을 기다리고[9] 다녀올 수 있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유물이 즐비한 간송미술관에 처음으로 간다는 설렘을 안고 가는 사람이면 작고 초라한 시설에 실망할 수도 있다. 전시실 면적도 좁아서 1층은 매우 좁고 2층에 올라가야 그나마 좀 공간이 있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 같이 제대로 조명이 갖춰진 전시 시설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열장도 유물만큼이나 유물급(...)이며, 유물에 대한 설명은 없고 유물과 작가의 이름이 들어간 안내판 정도만 있으니 시설에 대해서는 너무 기대하지 말자.

간송미술관에서 봐야할 것은 시설이 아니라 유물이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간송미술관은 국보가 12점, 보물이 32점, 서울시 지정문화재가 4점이나 있는 곳이다.[10] 게다가 관람료는 무료다.[11]


5.2. 엄청난 관람객 수[편집]



개방 기간이 1년에 4주를 넘지 않기 때문에, 한 번 개방이 됐다 하면 줄이 길게 늘어서서 걸어서 10분 거리가 세 시간까지도 늘어난다. 나이 지긋한 노인부터 시작해서 수녀, 승려, 일본인 관광객, 관련 전공 학생들까지 말 그대로 입구부터 출구까지 다닥다닥 붙어가면서 봐야 한다. 게다가 전시관도 협소하며 동선이 완전히 망가져서 정말 사람끼리 어깨를 맞대고 봐야 한다. 좀 편하게 보고 싶다면 평일에 가자.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설립한 재단이 운영하는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아예 하루 날을 잡고 이 곳에 견학을 온다. 이 때문에 보성중고등학교 재학생들은 일반인들보다 편안하게 볼 수 있다.

사실 2008년 신윤복전 이전만 해도 간송미술관은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명소" 정도[12]였는데 2008년 신윤복을 다룬 문근영 주연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히트치면서 혜원 신윤복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고 하필 그때 간송에서 혜원 신윤복전을 기획하면서 대중에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붐비게 되었다.[13] 특히 저 신윤복전 이전에는 젊은 사람보다 관람객들이 나이가 있으신 분들 위주였으나 공짜라는 것과 성북동 명소 쯤으로 소문이 나면서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몰리게 되었다. 간송미술관의 명성이 높아지고 미술관의 유물들이 빛을 보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나 이전에 한적하고 조용하게 관람하던 사람들은 예전과 분위기가 달라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게 당연하다. 국보들이 쌓여 있는 곳인데 입장료도 공짜라니 사람이 몰릴 수 밖에 없다.

어린이와 같이 오는 것은 비추천. 유명한 소장품이 나온다고 기사 타는 날에는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린다. 실제 2006년 간송 전형필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때 사람들이 성북초등학교 초입의 언덕길까지 우산 들고 서있는 광경이 있었다. 게다가 잘못 갔다가는 콩나물 시루마냥 빽빽히 들어찬 사람들 덕에 제대로 보물 구경도 못하고 나오기도. 진열장에 개기름이 묻어 유물이 잘 안 보이기도 한다. 이런 헬게이트가 열리는 상황 속에서 사실 천천히 제대로 관람을 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근처에 있는 성북초등학교에 주차가 가능하지만, 수업이 있는 시간에는 주차할 수 없다. 수업이 있는 토요일 주말에는 2시 이후에나 가능. 주말에는 전시장 밖에서 입장까지 3~4시간은 기본으로 걸리기 때문에 성북초등학교에 주차하려고 2시 이후에 왔다가는 줄만 서고 그림은 감상하지도 못하고 가는 수가 있으니 주의 바람.

이젠 간송미술관이 널리 알려지다 보니 성북초등학교 측에서 주차를 막는 분위기다.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알아서 재주껏 주차하자. 다만 근처 대부분의 도로변이 견인 지역이라서 잘못하면 여러분들의 차가 견인차에 실려서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미술관 내 유물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면, 원본 유물만큼은 못하겠지만 전시도록을 사서 보는 것이 편하다. 한동안 현금으로만 구매가 가능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카드 결제도 가능해졌다. 가격은 약 2~3만원 사이. 전시도록 외에도 일부 그림들의 영인본, 사진 인쇄본 또한 판매하고 있으니 소장용으로 구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전에 대구미술관에서 간송 특별전을 했는데 여기도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미인도 앞에는 진짜 엄청나게 많았다. 대구 엠빅에서 뉴스로 내보낼 정도이다.

6. 여담[편집]


이 박물관이 하마터면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가 있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이 함락됐을 때, 북한군이 유물들을 평양으로 이송하려 했던 것. 다행히 미술사학자인 최순우 등이 이송 준비를 진행하는 척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14] UN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까지 이송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중요 문화재들을 부산으로 피난시켰지만,[15] 전시 상황이란 한계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서적류나 그림들은 미처 피난시키지 못해서 많은 수가 사라졌다고 한다. 심지어는 서울에 두고 온 문화재가 누군가에 의해 유출되어서 간송 일행보다 부산에 먼저 내려와서 골동품상에 팔리고 있기도 했다고 한다.

2012년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는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의 훼손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소장품을 목격한 관련 인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보존 상태가 상당히 열악한 것으로 알려져 우려를 사고 있다. 또한 건물인 보화각 역시 세운지 70년이 넘은 낡고 작은 건물이라 소장품을 보관하기에는 적합하다고 보기 힘들고, 건물 자체의 상태마저 썩 좋은 상태가 아닌 상황. 하루라도 빨리 대책이 필요하나,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간송미술관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며, 소장품을 경매에 부친다면 다 파는데만 1년이 넘게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경매에 소요되는 각종 절차를 제외하고도 그 정도 걸린다는 것이다. 그 가치는 전형필이 구입한 가격을 아득히 뛰어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2020년, 대구광역시에서 착공할 대구 간송미술관에 대해 공모전을 했는데, 당선작은 이렇다고 한다. 지금의 간송미술관 부지보다 10배 이상은 넓으며 수집한 대부분의 물품들을 한꺼번에 전시할 수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한 달에 겨우 4번만 못 보게 된다. (월요일 휴관일)

6.1. 변화?[편집]


전시보다는 연구 및 보존에 초점을 맞춘 간송미술관이었지만 2014년부터 기존의 모습을 바꾸려 하고 있다. 매년 봄가을 2주씩 열리는 헬게이트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으니... 2014년 3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개관전으로 간송 소장품 상설전을 열었다.[16] 간송미술관 측에 따르면 외부 전시를 추진하는 이유는 1938년에 지은 간송미술관(보화각)이 다수의 관람객에게 소장품을 공개할 대규모 전시를 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사실 전시장에서는 공기의 질이나 작품 안전을 위해 인원수를 제한해야 옳다.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관람객 과밀 현상에 우려를 표했을 정도. 결국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전시를 여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또한 동년 8월부터 '간송미술문화재단'이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형태를 바꿀 예정이고, 해외 전시도 추진한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3월에 간송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가 열려 소장품 정보를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정보를 찾기 어려운 과거에 비해 대중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변화의 움직임 중 하나라고 봐도 될 듯. 또한 2014년 3월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일반 공개를 시작하기로 했다. 3개월에 한 번씩 전시 작품을 교체하며 약 3년간 진행할 예정이라고.

개관 78년만에 '제 2의 개관'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나왔다. 2016년 현재 미술관 건물로 쓰이는 보화각 옆에 서울시의 협력을 얻어 신관을 짓고, 2021년까지 미술관 일대에 문화공원을 조성하여 개방할 예정이라고 하며,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6.1.1. 대구간송미술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간송미술관(대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2020년 소장품 경매 관련[편집]


2020년 막대한 상속세로 인한 재정난으로 인해 소장품 중 금동여래입상(보물 제284호)과 금동보살입상(보물 제285호)을 경매에 내놓게 된 것이 밝혀져서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이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구입을 검토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는 1년에 40억원 밖에 안되는 유물 구입 비용을 개당 15억원 짜리 불상 경매에 투자하기 선뜻 망설여졌을 뿐더러, 공공기관이 일반 소비자와 함께 가격을 흥정하는 경매에 참여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경매 전에 구입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경매를 맡은 케이옥션이 입찰 취소는 안된다고 선을 그었고 간송 측에서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사전 합의는 무산된 듯하다. 결국 경매는 진행되었다.

다만 이 금동불상들은 1차 경매에선 유찰되었고, # 그 후 8월에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두 불상을 구입하였다. #

이를 두고 '국가에서 보호해야 하였어야 하는데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혹은 '이게 다 상속세 때문이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국가에서는 간송미술관을 지원해야 할 의무가 없다. 이 글에서도 상술되어 있듯 간송미술관은 법적으로는 미술관에 등록되지 않았으며, 단지 그 상징성 때문에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박물관법에 의해 미술관으로 등록하면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동시에 간섭도 받을 수 밖에 없다. 간송 후손들의 변하지 않는 원칙도 이 때문이다. 국가의 지원도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엄밀히 말해 간송미술관의 문화재들은 완전한 사유재산이다. 물론 각종 국가지정문화재들이 수두룩한 간송미술관이므로 국가 지정 문화재의 보존을 위해서 국가가 도의상 지원해 줘야 한다는 시민들의 주장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법률로 규정된 국가의 의무가 아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법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개인이 사유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든 이는 개개인의 자유이다. 오히려 (법률상) 미술관이 아니니 특별히 개방할 의무도 없는데도 열람일을 정하고 관람을 허용하는 간송미술관 측이 어마어마한 대인배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이를 지원할 이유도 없다. 간송 측도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같이 정작 간송 후손 측의 태도(국가의 지원도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변함이 없는데도 이를 둘러싼 기사가 여럿 쏟아져, 상속세 폐지를 위해 여론 조성을 하려는 설계 하에서 만들어진 기획 기사라는 비판도 있었다. 마침 금동여래입상과 같이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는 상속세 과세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이와는 무관한데도 언론이 '국보급 문화재'란 표현을 이용하며 이를 조장했다는 것. 더욱이 간송 후손들이 페이퍼컴퍼니에 재산을 은닉한 정황이 파악되면서 돈이 없던 게 아니고 빼돌리기 급급했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또한, 최근 경매에 올라온 보물들 중 일부는 간송문화재단 소유가 아닌 전인근 관장의 소유로 상속세 한 푼 없이 전인근 관장이 판매 수익을 받게 된다. #

다만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많은 소장품들의 어마어마한 상속세는 여전하고[17], 간송미술관 측에선 특별히 다른 수익 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 채로 무료 개방을 지속해오고 있기 때문에 동정의 여론이 꽤 있는 편이다. 비슷한 일을 겪은 프랑스의 '피카소 미술관'의 경우 작품으로 상속세 대납을 진행하여 소유권은 정부가 지니고, 관리와 운영은 후손들이 맡는 방법을 택한 경우도 있다. 국가가 간송미술관을 보호해야 할 의무는 당연히 없지만, 전형필 선생의 뜻을 존중하여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8. 항목이 생성된 소장품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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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형필의 장손[2] 현재 강남의 50평대 아파트 가격이 20억원대임을 감안하면 오늘날 화폐 기준 30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3] 보화각이라는 이름은 오세창이 지은 것으로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뜻이다.[4]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 김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세종이 광산 김씨 문중에 여진족 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데, 이용준이 왜곡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나중에 연구로 확인해야 할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 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국문학자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에게 훈민정음 해례본만 팔았다. 그러나, 정말로 광산김씨문중의 가보라면 문중에서 간송미술관에 소송을 제기할 수 밖에 없고,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건으로 반환을 받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렇다할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들도 이를 입수한 경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5] 이마저도 배익기 씨와 정부가 보상금을 놓고 실랑이가 오가던 도중, 배익기 씨의 자택에 화재가 발생하며 크게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6]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 21조 (개관) 제 16조 제 1항에 따라 등록한 박물관 또는 미술관은 연간 문화체육관광부령으로 정한 일수(연간 90일, 1일 4시간) 이상 일반 공중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여야 한다.[7] 조선시대 당시 매해 음력 3월, 국왕이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 것처럼 왕비가 행차하여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고 풍악을 울리며 기원하던 곳이다.[8]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한국에서 최고로 유명하다는 나폴레옹 제과점이다. 안내판에 보면 만해 한용운이 머물렀던 심우장, 최순우 옛집이 인근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간송미술관으로 가는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면 수연산방이 있다. 예전에는 조용한 동네였으나 망가진 삼청동을 필두로 성북동 일대도 망가질 조짐이 보인다. 간송미술관 주변마저 카페 골목처럼 변해서 시끄럽다. 오랫동안 이 곳을 다니던 사람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이다.[9] 관람객 폭증으로 부담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게 되었다.[10] 개인이 설립한 사립 미술관에서 이러한 유물들을 소장한다는 것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 곳이라면?[11] 참고로 리움미술관의 입장료는 10,000원이다. 국보와 보물의 가치를 가진 유물들을 소장하면서 관람료가 무료라면 거의 대인배나 다를 바 없다.[12] 일단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한성대입구역도 800 m 이상 떨어져 있고 성북동 부촌으로 들어가는 길 앞이라 버스 망도 잘 안 잡혀있어서 접근성이 안좋다. 그리고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에 위치한 것도 아니다.[13] 상기 링크된 기사에 당시 10만명이 왔다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4] 유물 목록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거나 유물의 포장 작업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기도 하고, 북한측 담당자들에게 고급 술을 대접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최순우 등이 부역자로 몰릴 것이 두려워서 양념을 친 것으로 보이고, 현실적으로는 북한군이 급히 퇴각하면서 가져갈 여력이 없어서 두고 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15]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 본인이 피난 생활 때 베개 밑에 두고 잠을 잘 정도로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16] 자그마치 훈민정음 해례본이 전시됐다.[17] 전시를 유지하는 문화재는 상속세가 유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