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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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립 배경
3. 교육과정
4. 도시 간이학교와 농촌 간이학교의 차이
5. 해방 이후


1. 개요[편집]


간이학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취학하지 못한 조선인들을 위해 부설한, 2년제의 속성 초등교육기관이었다.

2. 설립 배경[편집]


1930년대에 농촌 피폐가 심각한 가운데 농촌청년의 대다수가 농업을 싫어하고, 학교를 나와도 농업을 계승하지 않고, 안정된 봉급생활을 찾아 도시로 향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다음 세대를 담당할 농촌청년의 농업 경시와 이촌의 증대는 조선에서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고정시켜 일본을 위한 식량공급기지로 만들려는 총독부의 구상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3. 교육과정[편집]


간이학교는 교육과정이 2년이었으며, 한 학년에 40명씩 총 80명이 한 학급에서 수업을 받았다. (일종의 복식학급) 당연히 남녀 분반은 없었다. 교복도 없었다고 한다.[1]

간이학교의 교과목은 수신[2], 국어[3], 조선어[4], 산수[5], 직업[6] 정도였다. 그나마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당 30시간[7]의 수업 중 국어(일본어)가 12시간, 직업이 10시간이고 나머지 수신, 조선어, 산수를 합쳐도 8시간에 불과했다. 대략 수신은 2시간, 국어는 12시간, 조선어는 2시간, 산수는 4시간, 직업은 10시간이었던 셈. 이 때문에 사실상 국어(일본어)와 직업 2과목은 월요일~토요일까지 매일 들었던 셈이다. 오늘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할머니들이 소학교가 아닌 간이학교나 서당에서 글을 배웠을 정도이다. 그나마도 1938년 3월 15일 조선어가 교육과정에서 빠지면서 조선어에 배당되었던 2시간은 다른 교과목으로 이동하였다.

간이학교의 교과서는 일반 보통학교나 소학교 교과서와는 달랐가나 출판 주체는 모두 조선총독부였다.

간이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대부분 8~9세였고, 졸업은 10~11세에 했다. 교원(훈도)은 한 학교에 1명이었다. 그마저도 일본인보다는 조선인이 더 많았다고 한다.[8]

학년은 일제강점기 시절 다른 교육기관들과 마찬가지로 4월 1일에 시작하였고, 3학기 체제[9]였다. 당연히 농촌에 있는 간이학교는 농번기 방학도 줬다. 매일 정오에는 기미가요 방송이 나갔다.

당시 성적은 ‘갑을병정’ 체제로 나갔는데, 제일 잘 하는 과목에서는 ‘갑’을 받고, ‘정’을 받으면 불합격이었다.

당시 간이학교의 월사금(현재의 수업료 및 공납금)은 일반 보통학교보다 약간 하향된 20~30전이었다.[10]

4. 도시 간이학교와 농촌 간이학교의 차이[편집]


농촌 간이학교에서는 학교마다 전답과 우사·돈사·퇴비장 등의 실습시설을 갖추도록 하였다. 교원은 한 학교에 한 명씩으로 하되 반드시 학교가 있는 마을에 정주하여 직업도야에 힘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였다. 즉, 농촌 간이학교의 교원은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근무시간에 관계없이 모든 촌락민을 계몽, 교육해야 하므로 일종의 촌락개학(村落皆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도시 간이학교는 본교의 교사와 교지를 사용하고 교원의 겸임도 가능한 반면, 농촌 간이학교는 독립된 교사를 사용하고 반드시 전임교원을 배치하게 하였다.

5. 해방 이후[편집]


해방 후에는 분교장으로 전환되었고, 1960년대에는 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농어촌 인구 감소로 일제강점기 시절 간이학교였다가 승격된 국민학교 중 일부가 폐교되거나 분교로 재격하되었고 도시에 있는 것은 아직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한편 간이학교의 유산인 ‘복식 학급’은 농어촌의 소규모 초등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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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1940년대에는 국민복몸뻬가 사실상 교복 역할을 했다. 해방 후 국민학교는 교복이 존재하지 않았다.[2] 현재의 바른 생활, 도덕.[3] 일본어. 과목만 국어이고 실제 시간표에는 독화, 철방, 서방으로 나뉘었다. 독화는 말하기•듣기•읽기, 철방은 글짓기, 서방은 서예. 당시 교육과정상 1학년 때 가나를 배웠는데 히라가나가 여성적이고 약한 느낌의 문자라는 인식이 강해 가타카나히라가나보다 먼저 배웠다. 교과서 지문도 거의 가타카나와 한자만 썼다.[4] 한글은 여기서 배웠다. 당시에는 한글을 배울 때 '가갸거겨' 하는 모음 순서대로 배웠다. 초창기에는 아래아도 들어갔으나, 1933년 한글 맞춤법이 반영된 이후에는 아래아를 배우지 않고 ㅈ, ㅊ, ㅋ, ㅌ, ㅍ, ㅎ 받침이 들어간 글자도 배웠다.[5] 현재의 수학. 다만, 여기에서는 기초적인 수와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주산 등만 가르치고 비례식 등은 가르치지 않았다. 시대 특성상 숫자는 당연히 일본어로 읽었다. 당시 간이학교 산수 교과서를 보면 덧셈을 ‘寄せ算(よせざん)’으로 표기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덧셈을 ‘足し算(たしざん)’으로 표기한다.) 간이학교산술서를 보면 1학년 교재에 2단부터 9단까지의 구구단이 순서대로 표기돼 있었는데, 이를 보면 간이학교에서는 구구단을 겨우 1학년 때 배웠다는 걸 알 수 있다.[6]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중 하나. 농촌 간이학교는 농업을, 어촌 간이학교는 수산업을 선택했고, 도시 간이학교는 공업이나 상업을 선택했다.[7] 토요일은 반공일 (오전만 근무하고 오후부터 쉬는 날)이라 4교시만 했으므로 월~금은 5~6교시였을 것이다. 이 당시에는 4교시 1일 (토요일), 5교시 4일, 6교시 1일 해서 30시간을 채웠다. 예를 들면 월요일은 6교시, 화요일•수요일•목요일•금요일은 5교시, 토요일은 4교시 하는 식이다.[8]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교사는 간이학교로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9] 1학기는 4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2학기는 9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3학기는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지금도 연세 90이 넘은 어르신들이 '2학년 3학기 때~'와 같은 말을 하는데, 그 3학기가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였다. 이를 음력으로 환산하면 1학기는 주로 2월 말/3월 초~7월 말/8월 초, 2학기는 8월 초~11월 중하순/12월 초, 3학기는 11월 중하순/12월 초~2월 말/3월 초였으므로 설날은 3학기, 추석은 2학기에 있었다. 그마저도 당시 학생들은 학교에 가야 했다. 여름방학은 7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겨울방학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부터 1월 14일까지, 봄방학은 3월 22일부터 4월 4일까지 했다.[10] 당시 보통학교의 월사금은 40~50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