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인노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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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신적강하한 미야케 11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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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족 가계도 · 구 미야케





閑院宮(かんいんのみや
간인노미야

파일:간인노미야 문장.png
본가
황실(皇室)
가조
나오히토 친왕(直仁親王)
종별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
직궁가(直宮家)
출신지
야마시로국 오타기군 교토
(山城国愛宕郡)
근거지
교토
도쿄도
당주
단절

파일:external/pds.exblog.jp/a0287992_2172573.jpg
파일:external/pds.exblog.jp/a0287992_1282730.jpg
6대 당주 고토히토 친왕(載仁親王)
7대 당주 하루히토(春仁)의 말년

1. 개요
2. 성립
3. 역대 당주
4. 1947년 신적강하와 그 이후
5. 기타




1. 개요[편집]


간인노미야(閑院宮)는 일본 황실에 존재했던 세습친왕가이다. 에도시대에 있던 네 세습친왕가 중 가장 나중에 생겼으며, 현재의 황실은 이 궁가의 후손이다. 고토히토 친왕이 미야케를 계승한 뒤, 구 미야케 11곳 중 하나가 되었다.


2. 성립[편집]


당시 일본 조정에서는 황위 계승 예정자 이외의 황자들은 세습친왕가의 후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출가시켜 법친왕(法親王)이 되는 것이 관례였다.[1] 그런데 1654년 고코묘 덴노가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급서하자 혈통상으로 가까운 남자 황족이 죄다 출가해버린 탓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당시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에게 황실에 새로운 세습친왕가를 둘 것을 건의했다. 당시 히가시야마 덴노도 같은 생각이어서 자신의 아들 히데노미야(秀宮)[2]를 새로운 궁가의 당주로 하기 위해 쇼군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1710년 새로운 세습친왕가인 간인노미야(閑院宮)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뒷날 간인노미야의 2대 당주 스케히토 친왕의 아들 모로히토(師仁) 친왕[3]이 119대 고카쿠 덴노로 즉위했다. 만약 간인노미야가 없었다면 황위는 부계혈통상 한참 먼 후시미노미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히가시야마 덴노는 이러한 점을 우려했던 듯하다.


3. 역대 당주[편집]


대수
당주
생몰년
1대
나오히토(直仁)[4]
1704-1753
2대
스케히토(典仁)
1733-1794
3대
하루히토(美仁)
1758-1818
4대
다쓰히토(孝仁)
1792-1824
5대
나루히토(愛仁)
1818-1842
6대
고토히토(載仁)[5]
1865-1945
7대
하루히토(春仁)
1902-1988


4. 1947년 신적강하와 그 이후[편집]


113대 히가시야마(東山) 덴노의 차남, 나오히토(直仁)가 개창한 세습친왕가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후시미계 마지막 직계 황통인 118대 고모모조노 덴노가 붕어하자, 2대 당주 스케히토(典仁)는 장남 하루히토(美仁)에게 친왕가를 잇게 하고, 6남 토모히토(兼仁)에게 황통을 계승시켰다. 이 토모히토(兼仁)가 바로 119대 고카쿠 덴노로 현 직황족의 직계 조상이다. 황적이탈 당시에는 직황족을 뺀 간인가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당주 하루히토(春仁) 부부가 강하했다.[6] 전후 하루히토는 이혼했으며,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1988년에 단절되었다.


5. 기타[편집]


  • 본래 간인노미야는 천황의 직궁가와 부계혈통상 가장 가까운 세습친왕가였다. 그러나 5대 나루히토(愛仁) 친왕이 요절하고,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 고토히토(載仁) 친왕을 6대 당주로 맞으면서 부계혈통상으로 후시미계 다른 미야케와 별 차이가 없어졌다.
  • 6대 당주 고토히토 친왕은 일본 육군의 수장으로서 수염참모총장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일본 해군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伏見宮博恭王)과 함께 황족을 각각 등에 업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육해군이 각각 나이 많은 황족을 수장으로 내세워서 조카뻘에다가 나이도 한참 아래인 천황이 이를 통제하는데 애를 먹었다는 말도 있다.
  • 신적강하 이후 구황족들이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올랐는데, 이 집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7대 당주 하루히토 부부의 이혼소송이 가십거리가 된 적이 있다. 이때 하루히토가 동성애자이고, 그의 애인 역할을 하던 부관[7]이 하루히토의 부인 나오코(直子)를 폭행하기까지 했다는 등의 폭로전이 벌어져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한 적이 있다. 이후 스미히토(純仁)로 개명한 하루히토는 '카스가 흥업(春日興業)'이라는 부동산 회사를 차리고 대표 이사를 지냈다. 사업 수완이 있었는지 여타 구황족들과는 달리 신적강하 이후에도 풍족하게 잘 살았다.[8] 이혼한 뒤에 재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하루히토, 아니 스미히토가 죽은 1988년에 간인노미야는 단절되었다. 사생아가 적어도 네 명은 있다는 증언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 간인노미야는 직계 기준으로는 단절되었지만 방계 가문이 현 황실의 직계 조상이며, 이외에도 간인노미야에서 신적강하한 화족 가문에도 방계 후손들이 남아 있다. 모두 초대 당주인 나오히토 친왕의 후손으로,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 스미토모(住友) 재벌의 총수였던 스미토모 도모이토(住友友純). 살리카법 기준으로 따진다면 이들이 후시미노미야 출신 구황족들보다 오히려 계승순위가 앞선다. 물론 이쪽 집안 사람들은 신적강하한 지 적어도 300년 이상이나 지났기 때문에 황적복귀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부계로 따져서 현재의 황실과 가장 가까운 사람도 16촌 정도이니 사실상 남이다.
  • 옛 세습친왕가 가운데 유일하게 교토에 있는 궁가의 저택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교토 어소(京都御所)의 부지 남서쪽 귀퉁이에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입장할 때 방명록에 본인의 이름을 쓰면 된다. 매주 월요일과 매년 연말연시[9]에는 휴관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입장 가능하다. 홈페이지
[1] 친왕이 출가하는 경우, 입도친왕(入道親王)과 법친왕(法親王)이 있다. 둘 다 왕자 출신 승려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건 환속해서 자식을 보면 그 자손이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가의 여부에 차이가 있다. 입도친왕의 자손은 가능하나, 법친왕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2] 뒷날의 나오히토(直仁) 친왕.[3] 나중에 토모히토(兼仁)로 개명한다.[4] 113대 히가시야마 덴노의 아들. 그의 딸 이소노미야 도모코 여왕이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에게 출가한다.[5] 봉사손으로 입적.[6] 적손은 아니며 원래는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16남이었으나, 간인 궁가가 단절하자 하루히토의 아버지 고토히토(載仁)가 봉사손으로 입적했다. 하루히토는 황적이탈한 뒤 스미히토(純仁)로 개명했다.[7] 하루히토는 종전 당시 육군소장이었다. 군대가 해체된 뒤에도 그의 부관은 하루히토 개인의 집사로서 계속해서 수발을 들었다.[8] 야마노테선 타마치역 앞의 NEC카스가(春日) 빌딩이 그의 재산이었다.[9] 12월 29일부터 이듬해 1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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