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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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RAI 2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인’ 명단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기의 인물들이 완전히 배제되고 투표율도 6%에 불과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주세페 베르디
지오반니 팔코네
갈릴레오 갈릴레이
토토
6위
7위
8위
9위
10위
라우라 파우지니
안나 마냐니
루이지 피란델로
엔리코 페르미
단테 알리기에리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갈릴레오 갈릴레이[1]
Galileo Galilei

파일:472px-Justus_Sustermans_-_Portrait_of_Galileo_Galilei,_1636.jpg

본명
갈릴레오 디 빈첸초 보나이우티[2] 데 갈릴레이
Galileo di Vincenzo Bonaiuti de' Galilei
출생
1564년 2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피사
(現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사)
사망
1642년 1월 8일 (향년 77세)
토스카나 대공국 아르체피니
(現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렌체 아르체트리)
국적
[[토스카나 대공국|

파일:토스카나 대공국 국기(메디치).svg
]] 토스카나 대공국
직업
천문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학력
발롬브로사 수도원 (졸업, 1575~1578)
피사 대학교 (의학 / 중퇴, 1580~1585)
종교
로마 가톨릭
서명
파일:갈릴레오 갈릴레이 서명.svg

1. 개요
2. 이름의 표기법
3. 생애
4. 업적
4.1. 업적의 한계
5. 에피소드
6. 성격
7. 인간 관계
7.1. 케플러와의 관계
7.2.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8.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8.1. 새로운 편지 발견과 교회와의 관계 재해석
9. 여담
10. 저서
11.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철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망원경을 개량하여 이것을 천체 관측에 응용하여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이 정당함을 입증하였다. 지동설 증명 등으로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과학자' 로 평가받는다.

2. 이름의 표기법[편집]


한국에서 과거에는 그의 이름을 '갈릴레오'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근래에는 '갈릴레이'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는 영어의 영향이다.

갈릴레오의 이름을 포함한 많은 이탈리아식 이름은 -o가 남자의 '이름'이고[3] -i가 '성'인 조합이 많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Silvio Berlusconi, Benito Mussolini. Leonardo Bonucci가 있다. 이는 이름은 단수형이고 성은 복수형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4]갈릴레오가 이름이고, 갈릴레이는 성이다.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호칭이 아닌 공식적인 호칭에서는 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갈릴레이'가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성이 아닌 이름으로 표기하는 것은 존경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예컨대 유명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일반적으로 '미켈란젤로'라고 부르지만 '부오나로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라고 부르며, 일본한국에서도 '갈릴레오'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갈릴레이'라고 해서 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단 위키피디아나 NASA의 목성 탐사선 갈릴레오처럼 Galileo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는 영어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에서도 '갈릴레이'라고 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3. 생애[편집]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피사의 몰락 귀족인 피레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 1520~1591)는 의류 교역업자이자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는데[5],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종종 지적 권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현했다. 이런 성격은 아들 갈릴레오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갈릴레오의 집안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그가 태어났던 때는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갈릴레오는 10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했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집안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갈릴레오가 보수가 많은 직업인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의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의학보다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4학년 때 대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1585년 피렌체로 돌아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갈릴레오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몇몇 대학에 편지를 보냈고 결국 피사의 모교에서 수학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대신 보수는 형편없었다.[6]

피사 대학에서의 교수 계약이 끝나자, 갈릴레오는 다시 심각한 재정 곤란에 빠졌다. 159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그에게는 가족들을 부양할 경제적 책임이 주어졌다. 여동생들이 결혼하여 출가하자, 갈릴레오는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아둔 월급을 탈탈 털어서 혼수를 준비해줘야 했다.

1592년 갈릴레오는 파도바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년 동안 재직하며 기하학, 천문학, 군사기술 등을 가르치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부양할 가족들이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그의 경제적 궁핍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해 유럽 전역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개인 지도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피렌체의 지도자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 대공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도 있었다.

1609년 갈릴레오는 당시 막 개발되었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망원경의 개량에 착수했고, 자신이 개발한 망원경을 가지고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인류 최초로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다.

목성의 위성을 통해 우리는, 지구가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으며, 다시 그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거부하고 우주의 이러한 체계마저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울 수있는 강력하면서 우아한 주장을 갖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눈앞에는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목성의 주위를 배회하는, 그리고 그들 모두 12년의 공간을 태양 주위로 대회전하는 궤적을 밟는 4개의 별이 펼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갈릴레오의 저서 《시데리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 中


이 발견은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부쉈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과 그 밖의 발견들을 책으로 정리했다. 이 책은 쉽게 구성되었고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에[7],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무려 550쇄까지 인쇄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토스카나 대공국의 제4대 대공인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에게 헌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 '메디치 성'이라고 명명했다.[8]이는 토스카나의 메디치 궁정의 막강한 후원을 얻기 위한 계산적인 행동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면서, 드디어 갈릴레오는 진저리나는 대학 체제에서 벗어나 엄청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손에 쥐게 되었다.

1611년,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접견했다. 교황청은 이 저명한 학자를 환영했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했다. 교황을 접견하는 이는 누구라도 교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교황은 그 전통을 깨고 갈릴레오를 무릎 꿇게 하지 않았다. 당시 교황청의 주도 세력이었던 예수회 또한 갈릴레오의 주장을 지지했다. 갈릴레오는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곳에서 강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세력도 당연히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오에게 끊임없이 태클을 걸었다. 개중에 토마소 카치니라는 도미니코회수도자는 종교재판소에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종교재판소는 조사에 착수했지만 카치니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판결한 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갈릴레오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갈릴레오도 이런 분위기를 알았다.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철학자들을 피상적이며 불성실한 종교적 열성을 가진 천박하고 저속한 저자로 공격했다.

토마소 카치니가 갈릴레오를 공격하고 1년 뒤,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향했다. 자신을 방어하고,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개인적으로 로마 당국에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 당시 로마의 분위기가 갈릴레오의 1차 방문 때와는 달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인해 교황청은 '새로운 것'에 민감한 상태였고, 갈릴레오의 주장이 물리학과 수학의 한계를 넘어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든다고 여겨 그를 만나기를 꺼렸다.

갈릴레오는 침묵하지 않고 이곳 저곳에서 논쟁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교황청은 모든 《성경》해석에,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교황청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행동에 매우 민감했다. 개인이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개신교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성경》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과 일치할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은 교황청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벨라르민 추기경은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설파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권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만두었다.

1613년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라는 저서를 냈는데 이후 그 내용을 높게 평가하지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만은 《성경》에 반하므로 믿을 수 없다는 이의를 피사 대학으로부터 받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성경》에는 거짓이 없으며 《성경》은 잘못될 수 없습니다.[9]

단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간혹 잘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며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편지 때문에 성직자들이 그를 적으로 여기고 종교재판소에 회부할 꼬투리를 잡기 위해 눈이 벌개졌으며, 재판소에서도 편지를 조사했지만 무혐의로 판정했다. 그러고 나서도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성경》에 반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 의해 재판소에 고발이 들어갔고, 재판소는 1616년 2월 24일 해당 도서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판결문에 피고인과 도서의 이름을 적지 않고 대신 스스로 조심하라는 경고장을 갈릴레오에게 보냈다.

갈릴레오는 수년 동안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공공연히 가르치고 옹호하는 것을 자제했다. 이윽고 1624년 봄, 새로운 교황인 우르바노 8세의 즉위 축하식에 참여하기 위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출발했다. 우르바노 8세는 예전부터 갈릴레오와 절친한 사이였다. 새 교황과 갈릴레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갈릴레오가 환대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메달 2개와 그림, 그리고 아들 빈첸초를 위한 교회 장려금을 포함한 많은 선물을 교황으로부터 받고 로마를 떠났다.

《천문 대화》를 저술했으나[10] 6개월 만에 발행을 금지당했고 끝내 1632년 9월 23일,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편지가 왔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의 망명도 고려했으나 결국 출석을 결심하고 1633년 2월 로마에 도착, 최종 판결을 6월에 받았다. 그는 혐의를 인정하면서 그때껏 연구한 것과 정반대로 지동설을 비난했고, 교황청은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해 감금령을 내렸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11] 곧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다. 금고형으로 3년을 지냈는데, 한 번은 위에서 언급된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지내다가, 후에 시에나 대주교의 자택에서 손님으로 지내다가 다음엔 피렌체 근처의 아르체트리라는 작은 시골에서 국가 연금을 받으면서 평온하게 연구에 전념하며 살았다.

늘그막에는 노환으로 실명이 되었는데 1642년 1월 8일, 찾아온 두 제자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때 제자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지 않나 하여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숨을 거둬서, 제자들과 나누던 평범한 대화가 유언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토스카나 대공은 갈릴레오를 기리기 위해 산타크로체 성당 본당에 묻고 성대한 기념비를 세워주려 했지만,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평범한 시민으로 부속 성당에 묻을 것이며, 아무런 허례나 예식을 갖추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12]


4. 업적[편집]


아이작 뉴턴이 말하길, "내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봤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그 거인 후보 중에서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다. 특히 유일무이하게 뉴턴에게 관성에 대한 힌트를 주는 논문을 쓴 사람[13]이다. 우연히도 갈릴레오는 뉴턴이 태어나기 바로 전 해에 사망했다.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렇지만 물리학자로 보는 건 아이작 뉴턴에 의해 고전물리학이 성립된 이후의 사후적 평가이다. 당대에는 저명한 수학자였으며, 직업면에서도 수학자로 커리어를 쌓았다. 당시에 수학자는 천상이자 논리의 학문인 천문학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되었고, 이에 갈릴레오의 업적은 직업면에서는 평가하자면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 수학적으로 천문학의 원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피터 디어, 2011. 《과학혁명》, 뿌리와 이파리)[14]

천동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저서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종교 권력에 대항한 과학의 순교자 정도로 인식하곤 하는데,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 자세한 건 천동설 문서로.

유명한 일화로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통념을 깨기 위한 것으로,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무거운 추와 가벼운 추를 동시에 낙하시켜서 두 추가 동시에 지면에 떨어지는 것으로 증명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갈릴레오가 한 실험은 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고도의 사고실험이었다.[15]

만약 무거운 물체가 먼저 땅에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서로 연결해서 떨어뜨리는 경우를 고려해 본다면,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려 하고 가벼운 물체는 그보다 늦게 떨어지려 할 것이므로, 그 결과는 처음의 무거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늦고, 가벼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빨리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물체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전체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서 더욱 빨리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도 나온다. 하나의 가정에서 이처럼 상반된 두 결론이 나왔으므로, 그것은 애초의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동시에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 中


갈릴레오는 사고실험만 한 것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려고 했다. 갈릴레오는 길다란 판자에 홈을 만들어 놋쇠의 철구를 굴려 낙하에 필요한 시간을 측정하여 이론에 대한 실험근거를 제시했다. 다만 과학사학자 버너드 코헨은 "시간 측정을 자기 맥박으로 했다"면서, "이 실험은 갈릴레이가 실험 결과를 사전에 얼마나 확고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에 불과하다" 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험에 있어서 누구나 가설을 세우고 기대한다는 점과 그 때 '초단위'로 시간을 잴 수 있는 기계식 시계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가 가진 자원을 가지고 실험을 통해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과학적 실험이다.[16]

떨어지는 물체의 속력이 점차 늘어나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수식으로까지 나타냈으나, 정작 왜 그러한 방식으로 늘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아예 호기심을 갖지 않았는데, 힘이라는 관점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훗날 갈릴레오의 이론은 아이작 뉴턴이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미래에 아폴로 15호의 승무원들이 달에서 실험하여 이를 입증한다.

}}}
당시 실험 영상.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 깃털을 들어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BBC에서 NASA의 세계 최대 규모의 진공 실험실을 방문해서 실험한 영상 (2분 45초부터)

}}}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찰했으며 목성위성 4개를 비롯한 수많은 위성과, 토성 고리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또한 금성의 위상 변화도 관측했다. 당시 파도바 대학교의 수학 교수이던 갈릴레오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17] 궁정의 후원을 얻었다. 참고로 그때 갈릴레오의 연봉은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학계에는 신학/철학/수학으로 나눠지는 일종의 위계 질서가 있었다. 이중 수학자는 카스트 수준의 하위층(?)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수학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봉급이 8배까지 차이 났다. 갈릴레오는 수학 교수였고, 이 때문에 갈릴레오가 발표하는 천문학 주장들은 다른 학자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더욱이 천문학은 신학/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직 신학자나 철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학문이라는 고정관념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얻으려 했고, 결국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가 되었다.

그와 관련하여 유명한 건 지동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야기된 여러 상황들 탓에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으며 어쩔 수 없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을 중단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관성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았으나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등속직선운동이 아니라 등속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18]

그 외에도 최초로 온도계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기압 때문에 정확한 온도는 측정하지 못하여 유용하지는 않았다.

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요새 건축 능력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4.1. 업적의 한계[편집]


당시 지동설이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지구가 정말 움직인다면 사람들이 왜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갈릴레오도 여기에는 대답하지 못했고, 저서에서는 그저 천동설 지지자를 바보 얼간이라는 식으로 조롱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가 제자리에서 점프하면 왜곡된 궤도로 움직일 것'

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갈릴레오는

'너는 움직이는 함선에서 점프하면 다른 곳에 착지하니?'

라는 정도의 말만 했을 뿐 과학적으로 이를 설명하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밝혀진 모든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갈릴레오가 발견한 과학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지동설이라는 결론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작 뉴턴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나오고 나서 그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뉴턴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또한 갈릴레오는 밀물/썰물이 달의 인력 때문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 매우 황당하게 적어놓기도 했다.

갈릴레오가 저지른 오류들은 후대에 아이작 뉴턴이 고전물리학을 정립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그리고 우주에서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동설의 증거는 연주시차가 될 수 밖에 없는데 당시 관측 장비로는 이 미세한 차이를 잡아낼 수 없었다.요하네스 케플러의 스승이자 당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 중 한 명인 티코 브라헤도 결국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 더욱이 당시의 지동설도 천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했는데, 이는 행성들이 원 궤도가 아닌 '타원' 궤도를 돌기 때문이었다. 이 오류는 결국 나중에 케플러가 해결했다. 무엇보다도 갈릴레오는

'왜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함이 합당한가'

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합리적 설명을 하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의거하여, 천체는 에테르라는 지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보았고, 지상계와는 전혀 다른 논리체계를 적용해서 해석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서 지상계의 먼 곳을 관찰해보니,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흡사했습니다. 아마도 천상계 역시도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라고 했을 뿐, 어째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과 흡사한지 논리적으로는 입증할 수 없었다.[19] 다만 이러한 사례가 갈릴레오의 의미를 절하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어차피 시대적 한계상 갈릴레이가 모든 의문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오히려 이를 부족한 근거로 억지로 규명하려는 것보단 모호한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5. 에피소드[편집]


파도바에서 생활하던 무렵,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비나라는 여인을 만나 1남 2녀를 낳았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집을 구해주고 가족의 뒷바라지를 해주었을 뿐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다.[20] 결국 1610년 갈릴레오가 피렌체로 떠날 때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두 딸은 피렌체 근처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살아서는 떠날 수 없는[21] 봉쇄수녀원이었다.[22] 아들인 빈첸초 갈릴레이는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갈릴레오는 빈첸초의 교육비를 부담하고 결혼 후 신혼집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경제적 의무는 다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큰딸 비르지니아 갈릴레이수녀원 생활에 잘 적응했지만, 작은딸 리비아 갈릴레이는 심리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종종 정신적 & 육체적인 발작을 보이곤 했다. 이에 대해 비르지니아와 갈릴레오 부녀가 주고받은 편지 여러 통이 지금까지 보존되었고, 이를 토대로 연구한 《갈릴레오의 딸》이라는 서적이 나오기도 했다.

망원경을 접한 갈릴레오는 파도바로 돌아오자마자 3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었고, 곧 그것을 개량하여 8배율 망원경으로 진척시켰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로원 의원들을 초대하여 망원경의 효율을 설명했고, 이에 감동한 원로원은 많은 선물과 함께 갈릴레오의 교수 연봉을 2배 인상했다. 하지만 이미 망원경은 몇몇 유럽 국가에서 활용되는 상황이었다. 원로원은 나중에 이를 알고는 인상된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고, 갈릴레오의 월급이 앞으로도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했다.

늘그막인 1638년에는 당시 30세의 젊은이였고, 훗날 《실락원》을 쓴 잉글랜드 왕국의 시인 존 밀턴이 그를 찾아 방문하기도 했다.


5.1. 그래도 지구는 돈다[편집]


갈릴레오가 재판장에서 나가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정말 이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가 이런 말을 하여 남들이 들어서 후세에 남기도록 했을 가능성은 낮고, 후대의 창작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 문서로.

다만 요하네스 케플러와 주고 받은 편지를 봤을 때, 자신의 발표가 천동설 지지자들을 자극할 것으로 예상한 듯 하다.[23]


6. 성격[편집]


갈릴레오는 논쟁을 즐기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당시 기독교를 독실히 믿던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의 인물로 찍혔었다. 그의 편지에서는 '내 말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열받는다'는 식의 불평이 여러 번 발견된다. 대표적인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 보자면

  • 대학생 시절부터 그는 강사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서 논쟁꾼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갈릴레오와 대학 간의 관계는 한번도 원만한 적이 없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교편을 잡아 온 강사들을 조롱하고 비판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낡은 생각을 양처럼 고분고분 받아들인다고 동료 학생들을 비난했다. 그의 이런 반골 기질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아서 기존 학자들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 1591년 갈릴레오가 피사 대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던 무렵 그는 강한 주장과 급진적인 과학 의견 때문에 동료 교수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는 특유의 거만한 태도로 선배들을 조롱하며 그들이 구식 사고 체계에 노예처럼 매여 있다고 비난했는데, 비난이 지나쳐서 무모한 지경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갈등을 빚은 교수들이 일부러 갈릴레오의 수업에 학생들을 심어둬서 질문 공세를 퍼부으며 수업을 교란하는 일도 있었다.
  • 1592년에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가 피사에서 가까운 리보르노 마을의 항구를 개량하는 대규모 기술 사업을 승인하면서, 아버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서자인 조반니 데 메디치가 발명한 기계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근데 갈릴레오는 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거라면서 대놓고 깠다(...) 이건 곧 발명가인 조반니 데 메디치를 비난한거나 다름없었고, 심지어 메디치 가는 피사 대학교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스폰서를 까다니 패기 보소 1592년 가을, 갈릴레오는 계약이 끝나자마자 대학에서 해고당했다.
  • 본격적으로 교황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을 때 갈릴레오는 로마에 찾아가 이집 저집 다니며 수십 명과 논쟁을 벌였다. 피렌체 대사인 귀차르디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는 열정적으로 싸움에 몰두해서, 주변 상황을 전혀 보거나 느끼지 않는다……이것은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기록을 남겼다.
  • 갈릴레오는 교황청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가설 이상으로는 가르치거나 쓰지 않겠다'고 흔쾌히 약속했고 갈등은 일단락됐지만 이후에도 로마에 남아 사람들과 논쟁을 계속했다(...). 귀차르디니는 갈릴레오의 후원자였던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에게 '갈릴레오는 수도자들과 고집을 겨루고, 공격했다가는 자기만 망할 것이 뻔한데도 명사들과 다툴 기세입니다. 그가 미친듯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는 소식을 피렌체에서도 곧 듣게 되실 겁니다.' 하는 내용으로 편지를 썼고, 코시모 2세는 갈릴레오를 피렌체로 다시 소환했다.
  • 갈릴레오는 조석 현상의 원인을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그는 조석 현상이 지구의 움직임과 관련있다고 믿었는데, 당시에도 조석 현상이 과 지구의 인력 때문이며 지구의 공전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무덤에 갈 때까지도 이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 갈릴레오가 재판에 회부되고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교황청이 부추기지 않아도 많은 학자들이 얼씨구나 들고 일어나서 그를 공격했다. 갈릴레오가 그동안 적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7. 인간 관계[편집]



7.1. 케플러와의 관계[편집]


갈릴레오와 동시대 인물이자 똑같이 지동설을 지지했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갈릴레오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는 갈릴레오의 학술을 지지하는 논문과 저서를 여러 개 발표했고, 자신의 모든 출판물을 보내며 논평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요구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갈릴레오가 대체 왜 그랬는지는 과학사의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자신과 경쟁 상태에 있는 다른 천문학자의 생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갈릴레오의 오만함 때문이거나, 가장 우아하며 가장 아름다운 대칭을 보여주는 ''에 집착하느라[24] 일부러 무시했다는 추측도 있다. 갈릴레오는 '모든 자연운동은 원형'이라고 강하게 믿었다.

케플러 이론이 지닌 원거리 작용이라는 특성 때문에 거부했다는 의견도 있다. 갈릴레오는 행성간의 중력과 같이 원거리에서 작용하는 힘이라는 개념이 신비주의적이라고 여겼다. 그 대신에 물체간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이나 물체 고유의 특성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한 이유로 갈릴레오가 자신의 이론체계에 케플러의 중력이론을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는 추측도 있다.

아니면 정말로 단순하게도 갈릴레오가 케플러의 출판물 내용을 이해하지 못 할 정도로 어려워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케플러의 책들은 뛰어난 수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었고[25] 타원형 궤도로 정확한 행성의 궤도를 알아냈지만 아직 뉴턴이 만유인력을 알아내기 이전이라서 행성들이 태양 근처에 갔을 때 왜 빨리 움직여 공전궤도가 타원형이 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7.2.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이[편집]


갈릴레오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미켈란젤로 갈릴레이(Michelangelo Galilei, 1575~1631)였다. 약 100년 전에 태어난 위대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는 다른 인물이다. 형 갈릴레오와 11살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으로, 당시 유명한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였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의 뒤를 따라 작곡가가 되었다. 이탈리아 반도 출신이었지만 주요 활동 지역은 동유럽의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중유럽에 위치한 신성 로마 제국의 남부 지역 강국이었던 바이에른 선제후국이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가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유력 귀족이었던 라지비우 가문에 고용되어 크라쿠프, 그단스크, 토룬, 빌뉴스 등지에서 일했다. 한편 그는 고향 피렌체를 다스리던 메디치 가문의 궁정 음악가에 지원했지만 여러 번 고배를 마시면서 그냥 쌩까고 취업난은 역사가 깊다 일터가 있었던 폴란드에서 한동안 일하다가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26]에게 고용되어 뮌헨으로 일터를 옮겼다. 그 후 그는 8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 갈릴레이의 음악은 힘차고 웅장한 음률이 특징이며, 즉흥적이고 빠른 음색이 특징인 '토카타'(toccata) 형식이 주를 이룬다. 미국의 음악가 폴 베이어(Paul Beier)가 1620년 미켈란젤로 갈릴레이가 펴낸 악보집인 《Il primo libro d'intavolatura di liuto》를 음반으로 제작했다.

쾌활하고 진취적인 그의 음악성과는 달리 형 갈릴레오와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갈릴레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갈릴레오와 주고 받은 편지들에 따르면, 그는 그의 아들[27]의 사정이 어려움을 들어 형에게 자주 돈을 빌리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8.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편집]


갈릴레오에 대한 흔한 인식은 그가 '종교적 반지성과 싸운 과학의 순교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까지는 갈렐레오가 과학적 순교자라기 보다는 당시 종교재판은 '지동설이 맞는가, 틀리는가'가 아니라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종교적 권위가 무너지게되는 사태들'이 관심 대상이었던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후술할 2018년 갈릴레이의 새로운 편지가 발견되면서 세간에 알려진 것 처럼 갈릴레오가 종교적 반지성과 싸운 과학의 순교자로써의 면모가 재조명되는 방향으로 학계의 시각이 옮겨갔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우선 천동설을 당시 교회가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어야 할 교리'로 천동설을 가르쳤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자연철학자(훗날의 과학자)들의 영역이었지 종교의 영역은 아니였고, 당시 유럽 사람들도 당연히 성직자의 능력 밖임을 알았다. 교회가 천동설을 가르친 것은, 어디까지나 중세의 교회가 교육, 복지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기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천동설을 가르쳤다는 것은, 중세의 교과서에 천동설이 사실로 나왔다는 것일 뿐이다. 물론 천동설이 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에게 나름의 사유대상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천동설과 지동설 둘 중에 그들 개개인의 호오는 있을 수 있겠으나 딱 여기까지다.[28] 심지어 갈릴레오 이전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성직자 신분이었으며, 가톨릭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후술하듯 가톨릭에 의해 검열이 이루어졌었다.

다만 고려해야 할 점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관한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죽기 직전에야 공개하였고, 1616년에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 학술지[29]는 주교들이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이단이라고 선고했으며,[30]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는 내용을 정정하고서도 여전히 금서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고[31] 보고한다.

교황 우르바노 8세가 그를 종교재판으로 몰아세운 것은 당시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시대적 배경인 종교개혁과 연결해서 생각하여야 한다. 가톨릭 내부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 문제에 갈릴레오가 연루되고, 여기에다가 그의 저서들이 교회를 풍자한다는 소문까지 도는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의 주제는 '지동설이 맞느냐 틀렸느냐'가 아니었고, 성직자들은 당연히 이것을 판단할 권한도 능력도 책무도 관심도 없었다. 재판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초래한 여러 상황들'이었다.

사실 우르바노 8세는 갈릴레오와 절친한 사이로, 교황이 되기 전 있었던 논쟁에서 갈릴레오를 변호한 적이 있다. 그 외에 지동설과 관련하여 교황청이 주관하는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고. 당시 가톨릭 내부에선 '지동설이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지동설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32] 갈릴레오가 책을 출판하기로 한 것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그가 교황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과, 당시 가톨릭 내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각에선 갈릴레오가 가톨릭의 근본교리인 성체성사의 실체변화(성변화)를 부정한 탓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당시든 지금이든 개신교는 가톨릭의 성변화(聖變化) 교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가톨릭과 갈릴레오의 관계에 대해서는 갈릴레오의 저서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에 나오는 다음 내용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존경하는 독자들에게>

몇 년 전에 로마 교황청은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의견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위험한 사조를 막기 위한 온당한 조치였다. 이 칙령이 분별 있는 심리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격정에 의해서 잘못 내려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솔한 사람들이 있다. 천문학 관측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성직자들이 성급하게 금령을 내려서 지성적인 사색을 방해하고 있다는 불평이 있다.

이런 오만하고 무례한 불평을 듣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현명한 결정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 넓은 무대에 나서서 진실을 증언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 나는 로마에 있었다. 재판정에서 가장 높은 고위 성직자가 나를 반겨 주었으며, 그들은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들은 그 칙령을 미리 내게 알려준 다음에 공표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외국 못지않게 잘 알고 있음을 밝히겠다. 알프스 너머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모든 사항을 다루겠다. 이 모든 것들은 로마의 검열을 거쳤음을 밝힌다. 우리도 지적 즐거움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으며, 매우 교묘한 이론을 발견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을 보이기 위해서 나는 이 책에서 코페르니쿠스 편인 것처럼 꾸몄다. 순수한 수학 이론으로서 지동설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론에 비해 더 낫다는 점을 조목조목 밝혔다. 그러나 그게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일부 소요학파 철학자들의 주장에 비해 낫다는 말이다. 사실 이 사람들은 걷지도 않으니 소요학파라는 이름을 붙일 값어치조차 없다. 그들은 그늘을 숭배하며, 정당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색을 하지 않고 몇몇 그릇되게 이해한 원리들을 바탕으로 철학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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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실제로 갈릴레오는 한때 수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저작에서 '성서와 자연은 모두 성스러운 말씀에서 생겨났습니다. 전자는 성령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고, 후자는 하느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집행한 결과물입니다.' 하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즉, 모든 소송 관련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훌륭한 신앙의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 거기에 반대되는 소송 외 기록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양중심설과 지동설이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이론들에 대해 그릇된 철학적 신학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천문학 지식 영역의 ’과도기적 상황’의 결과였으며 우주론에 대한 주석학적 ‘혼돈’의 결과였다. 17세기 초엽까지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일원론적 세계관의 계승자들인 갈릴레오 동시대의 일부 신학자들은 문자 그대로가 아닌, 성서의 깊은 의미를 풀이할 수 없었다. 성서는 창조된 우주의 물리적 구조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이들 신학자들로 하여금 사실에 입각한 관찰의 문제를 신앙의 영역으로 바꾸어 놓도록 그를 유도했다.

오늘날과는 매우 동떨어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신앙과 아주 오래된 우주론을 분리할 수 없었던 갈릴레오의 재판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더구나 그 이론이 아직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본질상 가톨릭 전동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잘못 믿었으며 그 이론의 가르침을 금지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믿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재판의 이러한 주관적 오류는 그들 재판관들로 하여금 “갈릴레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징계 처분으로 이끌어가게 했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가르멜회 신부인 포스카리니(Foscarini)에게 보낸 1615년 4월 12일자 서한에서 코페르니쿠스 학설이 재기하는 다음 두 가지 명제를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은 실제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옳은가 아니면 그 학설은 단지 추측과 가정에 근거한 것인가?”, “코페로니쿠스 이론(태양중심설)은 성서의 내용과 양립할 수 있는가?”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하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지구의 부동설(不動說)을 단언하고 있는 성서의 구절들을 ‘매우 신중하게 해석’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일단 지동설이 확증된다면 신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이론과 명백히 대립되는 성서 구절들에 대한 ‘해석을 재검토’해야만 하며,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견해들이 오류라고 밝혀지면 그 오류들을 더 이상 고집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지구는 세번째 하늘(궤도)에 있다는 것이 옳다고 입증된다면, 또한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도는 것이 실제로 입증된다면 이러한 주장에 반대되는 듯이 보이는 성서의 설명을 상당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증명된 것이 거짓이라고 단언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는 모른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33]

실상, 갈릴레오는 지구가 이중으로 움직인다는 사실, 즉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지구의 공전과 양극의 축을 중심으로 한 지구의 자전 등을 반박의 여지 없이 명백하게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바닷물의 조수 현상에서 거기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조수 현상의 참다운 원인은 그후에 뉴턴만이 밝혀낼 수 있게 된다. 갈릴레오는 무역풍 현상에서도 지동설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내세웠지만 당시로서는 아무도 그 명료화에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지동설에 대해 광학적이며 역학적인 증거를 발견하기까지는 그후 150년 이상이 더 걸려야 했다. 갈릴레오의 반대측으로서는 갈릴레오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에 대해 납득할 만한 반론을 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들이 점차 명확해졌고 그에 따라 1633년 판결의 상대적 성격이 드러나게 되었다. 1741년,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지동설에 대한 역학적 증거 앞에서 베네딕도 14세는 검사성성으로 하여금 「갈릴레오 전집」의 초판에 “교회 인가”(imprimatur)를 부여하게 하였다.

1633년 판결의 이러한 명백한 파기는 검사성성의 교령에서 명백해졌는데, 이 교령은 ‘금서 목록’의 1757년 판에서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서들을 삭제했다. 실상은 이 교령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1820년, 로마의 라 사피엔차(La Sapienza) 대학 교수이며 참사원이었던 세텔레(Settele)는 「광학과 천문학의 기본 원리」라는 자신의 저서를 출판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청의 출판 검열관이었던 안포시(Anfossi) 신부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는 세텔레에게 그 책에 “교회 인가”를 내어주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사건은, 1633년 판결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파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부당하게 출판 금지 조치를 당한 저자는 교황 비오 7세께 호소를 해서 교황으로부터 1822년 호의적인 판결을 얻어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자, 도미니코회의 전임 총장이며 검사성성 위원인 올리비에리(Olivieri) 신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단지 하나의 가정[34]으로서가 아니라 이론으로 제시했던 저서들에 대한 교회 인가에 호의적인 보고서를 작성했다.

교황청의 결정은 1846년 햇빛을 보게 된 새 금서 목록의 출판 때 실질적인 실현을 보게 된다.[35]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작은 지구는 비록 천체의 중심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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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5세, 회칙 In Praeclara Summorum(1921.4.30.): AAS 13(1921), 211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1월 10일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에서 교회와 갈릴레오의 불편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여러 분야에 걸친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였다. 그에 따라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7원 3일, “갈릴레오 사건이 속한 16-17세기 천동설-태양 중심설 논쟁의 연구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를 설립하였고,[36] 가론(Garonne) 추기경에게 그 연구를 조정해 나갈 임무를 맡겼다. 1992년 10월 31일 “갈릴레오 사건이 속한 16-17세기 천동설-태양중심설 논쟁의 연구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는 너무도 명백한 재판의 이러한 주관적 오류가 그들 재판관들로 하여금 “갈릴레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징계 처분으로 이끌어가게 했다는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갈릴레오는) 신앙의 진리와 과학의 진리가 결코 서로 모순될 수 없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성서와 자연 세계는 둘 다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전개됩니다. 성서는 성령으로부터 받아 쓴 것이고, 자연 세계는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매우 충실한 수행자입니다.’ 그는 베네데토 카스텔리 신부에게 1613년 12월 21일자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며 동일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덕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사목 헌장, 36항). 갈릴레오는 자신의 과학적 탐구에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자극하시며 그의 통찰들에 영감을 던져 주시는 창조주의 현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청 과학원에서 행한 연설(1979.11.10.): Insegnamenti, II, 2(1979), 1111-1112면.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

36. 그러나 많은 현대인은 인간 활동과 종교의 더욱 밀접한 결합으로 인간이나 사회나 학문의 자율성이 침해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세 사물의 자율성을, 피조물과 사회 자체가 고유의 법칙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이 점차 이를 분별하고 이용하고 안배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와 같은 자율성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것은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사실, 만물은 창조의 조건 자체에서 고유의 안정성과 진리와 선, 또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은 이를 존중하여야 하고, 학문이나 기술의 각기 고유한 방법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덕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37]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을 보존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어떤 때에는 바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없지 않았지만, 거기에서 논쟁과 갈등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신앙과 과학을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던 정신 자세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38]

그러나 만일 ‘현세 사물의 자율성’이란 말이, 피조물들이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는다거나 인간이 피조물을 창조주께 돌려 드리지 않고 멋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하느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생각이 몹시 그릇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어떠한 종교이든 모든 신앙인은 언제나 피조물들의 언어 안에서 창조주의 현현과 목소리를 들어 왔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피조물 자체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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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3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8.1. 새로운 편지 발견과 교회와의 관계 재해석[편집]


한편 2018년 9월, 살바토레 리차르도(Salvatore Ricciardo)는 갈릴레오의 새로운 편지를 발견하여 네이쳐지에 기고하고, 동료 교수들과 같은 주제로 영국학술지 Notes and Records (SCI-E급)에 논문을 올린다.(The reappearance of Galileo's original Letter to Benedetto Castelli(2019))

Galileo wrote the 1613 letter to Benedetto Castelli, a mathematician at the University of Pisa in Italy. In it, Galileo set out for the first time his arguments that scientific research should be free from theological doctrine.

He argued that the scant references in the Bible to astronomical events should not be taken literally, because scribes had simplified these descriptions so that they could be understood by common people. Religious authorities who argued otherwise, he wrote, didn’t have the competence to judge. Most crucially, he reasoned that the heliocentric model of Earth orbiting the Sun, proposed by Polish astronomer Nicolaus Copernicus 70 years earlier, is not actually incompatible with the Bible.

갈릴레오는 이태리 피사 대학의 수학자 베네데토 카스텔리에게 1613년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처음으로 과학적 연구가 신학적 교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천문학적 사건에 관해서 성서의 부족한 근거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러한 설명을 단순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종교 당국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그는 썼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그는 70년 전에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태양을 도는 지구의 태양중심모델(지동설)이 실제로 성경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였습니다.

Nature지 #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자면, 1613년 갈릴레오는 친구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새로 만든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천문학에 관한 교리를 반박했다. 이후 가톨릭의 천문학 교리를 비판한 그의 편지는 사본을 통해 이탈리아 도처에 유포되었다. 1615년에 도미니코회 수도자 니콜로 로리니(Niccolò Lorini)는 편지의 사본 중 하나를 보고 격분하여 이를 로마 종교재판소에 전달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갈릴레오는 교회의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자신의 본 뜻을 숨기기로 결심하고, 친구 피에로 디니(로마의 성직자)에게 '로리니가 종교 재판소에 전달한 버전은 변조된 듯하다'는 뜻을 전달하고, 실제로는 자신의 원래 편지를 완곡하게 변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완곡한 버전'의 그 편지를 디니에게 동봉하며 "이게 진본이니 바티칸의 신학자들에게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갈릴레오는 디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적(敵)들의 사악함과 무지를 호소하며 종교재판소가 사기꾼들에게 기만되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렇듯 2가지 버전이 존재하다보니, 그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둘 중 어느 것이 갈릴레오의 진의(眞意)였는지'를 둘러싼 혼란이 야기되었었다.

학자들은 그 동안 디니 버전을 갈릴레오의 본 뜻으로 파악해서 '갈릴레오는 적어도 성경과 가톨릭 교회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과학의 뜻을 펼치려고 했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2018년 9월, 갈릴레오가 로리니 버전에서 디니 버전으로 직접 자필 수정한 원본 편지가 발견되면서, 갈릴레오의 본 뜻은 '갈릴레오가 가짜라고 주장한 로리니 버전'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즉, 갈릴레오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로리니의 편지'가 실제로는 갈릴레오의 진짜 편지였다는 것. 그렇지만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을 두려워한 나머지, 편지 내용을 고쳐서 다시 쓴 후 교황청에 보냈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단재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이 성경과 서로 다르지 않다"고 편지를 조작했을 따름이며, 사실 실제 편지내용에서는 갈릴레오가 과학과 신학을 분리해서 봤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이 원본 편지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성경과 양립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과학적 연구가 신학적 교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성서를 근거로 천문학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논문의 공동저자인 Franco Giudice 교수는 "갈릴레오가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는 '과학의 자유'에 대한 최초의 세속적 성명서(secular manifesto) 중 하나다." 라고 말하였다. [39]


9. 여담[편집]


"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를 근거로 지동설이 맞다고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를 '벼락출세한 점쟁이'라고 욕할 정도였다...[40]
  • 가끔 갈릴레오가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는 잘못된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41] 참고해두자면 지구가 둥글다는 건 고대 그리스의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훨씬 전에 주장했고, 중세의 종교 성상물에서도 땅이 '사과처럼' 구형으로 표현되곤 한다.
  • 무언가를 주장할 때는, 책 속에서 가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서로 다른 견해를 취하게 함으로써 토론을 붙이는 기법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주는 척하다가 신랄하게 깎아내리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러한 이유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싶었지만, 당시 교황청의 종교재판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 갈릴레오는 해왕성?!을 눈으로 본 첫 번째 사람이었다.[42] 1612년 12월 28일 갈릴레오는 목성을 관측하고, 관측 그림을 그리면서 목성 옆에 있었던 별 하나를 같이 그려 놓았는데, 후대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 별이 사실 해왕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그 시점에서 해왕성은 역행 운동에 접어들 시기라 천구상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갈릴레오는 그냥 항성이려니 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오늘날의 대중들에게는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 정도로 인식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왜곡이 있으며 과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는 아니다. 동시대의 교황과 인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의견을 바꾸는 대가로 심한 형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재판의 결과로 고문당한 적도 없고 살해당하지도 않았으며 수갑을 차지도 않았다. 이에 대한 증거로 갈릴레오는 형식적인 고문의 위협을 받았을 뿐으로 어떤 문헌에도 고문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43]을 당했을 뿐이다. 물론 이것도 종교재판에 의한 형벌이고 억압내지는 박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의견을 바꾸기를 강요받았고, 지동설에 관한 자신의 저작은 모두 불태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 르네 데카르트는 본래 철학보다 과학(수학)에 흥미가 있었으며, 1619년 11월 10, 11일 밤에 생생한 꿈을 3번 꾸고 일생을 과학에 바치기로 마음먹었지만[44], 1633년 갈릴레오가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아 지동설에 대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과학을 버린 후 철학을 선택했다.
  • 반실재론적[45] 과학철학자 파이어아벤트는 갈릴레오의 이론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작을 주로 이탈리아어로 썼는데 이것이 라틴어를 쓰던 천동설에 비해 대중에게 친숙하게 인식되어 그의 이론이 큰 호응을 얻었다는 주장이다. 즉 갈릴레오의 지동설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순전히 사회적 이유라는 건데 이런 주장이 결국 과학전쟁으로 이어진다. 나중에는 같은 인문학 계열의 앨런 차머스가 갈릴레오의 이론이 널리 퍼진 이유는 풍부한 증거와 설득력있는 주장 때문이라며 파이어아벤트를 반대했다.[46]
  • 결혼한 적이 없지만 두 딸과 한 아들을 두었다. 가정부 마리나 감비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들이었다. 출신 때문에 혼삿길이 막힌 거나 다름없는 딸들을 그는 아르체트리의 산 마테오 수도원에 보냈다. 작은 딸 리비아 갈릴레이는 평생 병치레를 했으나 큰 딸 비르지니아 갈릴레이는 16살에 베일을 쓰고,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되었다. 마리아는 34살에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아버지 갈릴레오와 평생 편지를 주고받았다. 갈릴레오의 편지는 찾을 수 없으나 마리아가 보낸 124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이 편지들은 피렌체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고, 《갈릴레오 전집》에 수록되었으나 역사가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 《뉴욕 타임스》의 과학기자를 지낸 소벨의 베스트셀러 논픽션 《갈릴레오의 딸》(1999)이 나오면서 거장의 인간적인 면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0. 저서[편집]




11. 창작물에서[편집]


  •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박해받는 지식인으로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묘사한 <갈릴레이의 생애>라는 연극을 남겼다.
  •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일부 게임에서 NPC로 나온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천문학 보고물을 선호하는 피사의 NPC로, 천문학자 전직 퀘스트를 할 때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다음 순서로 마지막에 찾아가면 '케플러 씨에게 소개를 받았나? 그 사람과는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라고나 할까. 이 일은 가끔은 외부세력의 압력을 받기도 하지. 하지만 절대 굴복해서는 안돼.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으니까.'라 말한다. 천문학자 전직 퀘스트 초반에 필요한 갈릴레오식 망원경은 파마구스타 교회 탐색이나 유저 간 거래로 구거나, 대자연의 강에 메모리얼 앨범 보상으로 메르카토르가 준다.
    • <대항해시대 5>에서는 청년으로 나와 라몬의 해도에 감춰진 비밀을 찾기 위해 항해하는 주인공 일행이 토스카넬리의 추천을 받아 갈릴레오를 찾아갔는데, 갈릴레오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서 뉴턴에게 찾아갈 것을 이야기했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는 고용 가능한 S급 측량사 항해사이다.
  •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 파카 고스트로 나온다. 담긴 갈릴레오 고스트 아이콘을 통해 고스트 체인지한 형태. 간바라이징에 등장하는 특별 고스트 체인지이다.
  • 고딕 메탈 밴드 해거드의 3집 앨범 [47]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주제로 한 콘셉트 앨범이다.
  • 밴드 의 전설중 전설의 노래인 <Bohemian Rhapsody>에서도 갈릴레오가 등장한다. 진짜 갈릴레오를 묘사하려는 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갈리지만 '위기를 극복한 위대한 자'라는 의미에서는 당대 천동설을 지지하던 분위기에서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의 모습과 어느 정도 일치하기는 한다.
  • 록밴드 부활1997년 여름에 발매한 5집 앨범 <불의 발견>에는 <믿음>이라는 노래가 수록되었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언급했다. 해당 곡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 마치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유일하게 주장한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갈릴레오 이전에도 지동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많았다. 대중적으로 퍼진 전형적인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 1975년 영화 <갈릴레오>가 만들어졌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으로 하임 토폴이 그외 주요 출연진으로는 에드워드 폭스, 존 길구드, 마이클 고 등이 있다.
  • 뮤지컬 <최후진술>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동갑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죽은 이후에 만났다는 허구의 줄거리를 갖고 있다. 극 중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존 밀턴이 등장하기도 한다. 갈릴레이의 생가 이름, 브루노, 메디치 가문이 언급되는 등 고증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의 딸 비르지니아 갈릴레이(세례명 마리아 첼레스테)의 이야기를 다룬 극이다. 갈릴레이가 케플러를 묵살하지 않고 그와 협업했으며, 비르지니아가 스스로의 종교적 선택으로 수녀가 되었다는[48] 두 가지 허구적인 설정에 기반하여 신념과 이념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었다. 위에서 언급한 <최후진술>처럼 메디치 가문과 브루노가 언급되긴 하지만, 말 그대로 스쳐지나가듯 언급된다.
  • 애니메이션 <갈릴레이 돈나>에서는 젊은 시절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등장한다. 작화상 미청년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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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갈릴레오의 집안 성씨는 보나이우티(Bonaiuti)였으나, 피렌체의 의사였던 갈릴레오 보나이우티(Galileo Bonaiuti)를 존경하는 뜻에서 14세기 후반에 갈릴레이(Galilei)로 성씨를 바꿨다고 한다. 즉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갈릴레오 보나이우티의 이름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2]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원래 조상의 성씨는 보나이우티였지만 후손들이 그를 존경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인 갈릴레이로 성씨를 바꾸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이름을 성씨랑 비슷하게 지어서 이름만 들어도 대충 성씨를 유추할 수 있는 집안이 있었는데 갈릴레 갈릴레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3] 여자의 경우는 -a. 다만 안드레아(Andrea)와 니콜라(Nicola), 마티아(Mattia)는 이탈리아어권에서 남자 이름이다.[4] 다만 Leonardo Leo, Nicola Porpora등 예외도 있다.[5] 이 사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피렌체의 예술가 모임인 카메라타(camerata)는 오페라가 탄생한 모임으로 유명하다.[6] 당시 의학 교수는 1년에 2,000 스쿠디를 받았지만, 갈릴레오는 60 스쿠디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대학에서 수학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7] 당시의 교양 서적은 전부 라틴어로 쓰였다.[8] 아예 이 네 위성에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와 그 남동생들의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한다. 물론 지금은 현재 사람들이 아는 가니메데, 칼리스토, 이오, 유로파로 바뀌었지만.[9] 이 때까지 이렇게 알고 있었으나, 2018년 새로운 편지의 발견으로 갈릴레오가 직접 《성경》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자세한 것은 아래 관련 문단 참조.[10] 서적 검사 관리이던 제자가 초본의 내용을 보고 너무 위험하다면서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고, 제자와 갈릴레오를 지지하는 성직자가 상당 부분을 고친 끝에 겨우 낼 수 있었다.[11] 종교재판소에서 특별히 의자를 마련해 앉아서 재판을 받게 해 줄 정도였다.[12] 교황청이 아예 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의 죽음이 주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촐한 장례식을 치르게 강요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13] 갈릴레이는 천체의 움직임에 관한 논문에서 지동설 주장 뿐만 아니라, 천체는 다른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계속 그 궤도로 영원히 도는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을 써놨다. 물론 이쪽은 과학적 증명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후배 철학자 뉴턴에게 결정적 힌트였을 거라는 설이 많다. [14] 하지만 수학적으로 천문학을 재구성하려고 한 동시대의 인물로는 케플러도 있으며 케플러는 '케플러의 법칙'을 만들어서 이름을 남긴 반면, '갈릴레오의 법칙' 같은 건 없다. 지동설 또한 갈릴레오의 오리지날은 아니다.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받고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감과 투쟁심을 안겼지만, 그것 역시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갈릴레오를 이토록 유명하게 만든 최대의 공로자는 우르바노 8세 교황일지도 모른다.[15] 사실 이 자유낙하 통념에 대한 비판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이미 지적된 것이었고, 갈릴레오도 비잔티움 제국 때 제기되었던 지적을 참고로 고도의 사고실험을 한 것이었다.[16] 물시계로 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 있는데, 물시계로 하는 것이나 맥박으로 하는 것이나 오차는 있다. 물론 이것은 얼마 정도의 정확성을 과학적 실험으로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지금의 원자시계에 비하면 앞의 실험들이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과학 혁명 시대의 모든 실험과 오차들도 제대로된 실험이라고 보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가 과학 실험을 그가 가진 자원하에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 그런 실험이 역사상에서 최초였다는 점, 또한 쉽게 따라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남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17] 당시 세속 군주이던 코시모 2세의 아버지 코시모 1세는 제우스에 비유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4명이었다. 갈릴레오는 당시의 신화적 의미와 발견을 결합시켜 코시모 2세에게 헌정했다.[18] 관성이 등속직선운동이라는 생각은 데카르트에게서 나왔다.[19] 이것을 입증하려면 '광학' 이론을 빌려와야 하는데, 이건 갈릴레오보다 훨씬 후대의 물리학이다.[20]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갈릴레오가 전통적인 결혼 및 가족 제도에 대해 큰 저항을 느꼈다거나, 혹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 봐 최소한의 지원만 해주고 버린거나 다름없다는 등이다.[21] 오늘날도 봉쇄수도원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이 불가능하다. 물론 수도자를 그만두고 퇴회하는 것은 자유이다.[22] 갈릴레오의 딸들은 수녀원에 보내질 당시 12세, 13세였는데 이는 수녀원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오늘날은 대개 만 18세 이상에 고등학교 졸업 이상) 하지만 갈릴레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규칙을 무시하고 들여보냈다. 역시 옛날이나 지금이나 빽이 중요한 거다 [23] 갈릴레이가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케플러는 그래도 지동설을 발표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편지를 받은 당시에는 갈릴레이가 케플러의 의견을 무시했다.[24] 행성의 궤도에 관한 문제에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수용하여 궤도가 완전한 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타원형이라 주장했다. 원형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자 코페르니쿠스가 해결하지 못한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다 풀어냈다.[25] 이 점에서 갈릴레이와 캐플러의 재능 차이나 나오는데 갈릴레이는 스토리 작가 소질이 있어 설명을 잘하는 반면, 캐플러는 그런 소질이 없다 보니 설명이 딱딱하다.[26] 1623년에 바이에른 선제후가 되었다.[27] 이름이 '빈첸초'(Vincenzo)로 갈릴레오의 아들과 이름이 같다. 헷갈리지 말길.[28] 실제로 성경의 내용을 근거 삼아서 천동설을 주장한 쪽은 루터교성공회의 고교회파였다. 특히 갈릴레오 이전의 인물인 마르틴 루터"야훼께서 기드온을 위해 멈추라고 한 건,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 하며 일방적으로 지동설이 틀렸다고 개소리를 시전했다. 오늘날의 인식과는 달리, 당대의 가톨릭칼뱅파 역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29] Galileo's Non-Trial (1616), Pre-Trial (1632–1633), and Trial (May 10, 1633): A Review of Procedure, Featuring Routine Violations of the Forum of Conscience[30] "This pronouncement shows that the cardinal inquisitors accepted the determination of the consultors that heliocentrism was a heresy." The Sentence and abjuration 파트의 12번째 문단[31] "This seems to indicate that the cardinal inquisitors considered Copernicus's book to be still prohibited, even though the required corrections had been issued in 1620." Galileo's non-trial of 1616 파트의 4번째 문단[32]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하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지구의 부동설(不動說)을 단언하고 있는 성서의 구절들을 ‘매우 신중하게 해석’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일단 지동설이 확증된다면 신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이론과 명백히 대립되는 성서 구절들에 대한 ‘해석을 재검토’해야만 하며,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견해들이 오류라고 밝혀지면 그 오류들을 더 이상 고집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교황청은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는데 지동설이 매우 유용함을 인정하여 하나의 가설로는(계산할 때는 쓰려고) 인정했다는 얘기도 있다.[33]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가르멜회원 Foscarini 신부에게 보낸 1615년 4월 12일자 서한, “…Dico che quando ci fusso vera demostratione che il sole stia nel centro del mondo e la terra nel cielo, e che il sole non circonda la terra, ma la terra circonda il sole, allhora bisogneria andar con molta consideratione in esplicare le Scritture che paiono contrarie, e pitosto dire che non l'intendiamo, che dire che sia falso quello che si dimostra” Opere di Galileo, op. cit., vol. XII, p. 172.[34] P. Maurizio Benedetto Olivieri. O.P., Di Copernico e di Galileo, scritto postumo, Bologne, 1872 참조.[35] 교황청 과학원, Copernico, Galilei et la Chiesa. Fine della controversia(1820). Gli atti del Sant'Uffizio, a cura di W. Brandm Iler e E.J. Greipl, Leo Olschki ed., Firenze, 1992년 참조.[36] Antonio Favaro가 편찬한 Edizione Nazionale delle Opere di Galileo Galilei, Florence, Giunti Barbera, 1890-1909년 참조; 1929-1939년. 20 vol.(재판); 「사목 헌장」 제1부 3장 36항에 인용된(“지상 사물들의 자율성”) Pio Paschini 주교의 Vita e Opere di Galileo Galilei, 2 vol., Lev, 1964년 참조.[37]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 제3장, Dz 1785-1786(3004-3005) 참조.[38] 피오 파스키니,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와 저술』, 제2권, 교황청 과학원, 바티칸, 1964 참조.[39] “Galileo’s letter to Castelli is one of the first secular manifestos about the freedom of science — it’s the first time in my life I have been involved in such a thrilling discovery,” says Giudice. 〈Nature 561, 441-442 (2018)〉 #[40] 이는 마르틴 루터가 생각보다도 보수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크다.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성서무오설을 철석같이 믿던 전형적인 예수쟁이인데다, 당대에 벌어지는 여러 민중봉기를 숱하게 비판하여 대중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는 등, 생각보다 꽤나 꽉 막힌 사람이었다. 되려 기독교 근본주의자 이미지가 있는 장 칼뱅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배격하고 자연과학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개념인에 가까웠다. 당대의 가톨릭 교회도 극도로 부패한 조직이었다는 점과는 별개로, 당대 기준으로는 대단히 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41] 일부 학습만화가 그런 경우가 있다.[42] 천왕성을 처음 눈으로 본 사람은 알 수 없다. 맨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해왕성은 맨눈으로 절대 볼 수 없고, 쌍안경 정도는 있어야 겨우 볼 수 있다.[43] 외부와의 접촉을 제한 및 감시하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지만, 일정한 장소 내에서는 신체의 자유를 허락하는 감금형벌에 해당한다.[44] 그래서 중학교 수학 교과서에 르네 데카르트의 이름이 뻔질나게 나오는 것이다. 그가 좌표의 개념이나, 함수의 정의와 관련된 여러가지 개념들을 처음으로 고안해서, 해석학의 기초를 다져놓은 사람이기 때문이다.[45] 과학철학에서 반실재론(anti-realism) 혹은 도구주의(instrumentalism)란, ‘과학의 목표 자체는 진리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실험 관찰의 결과들을 경험적으로 적절하게 기술함으로써 현 단계에서 유용한 지식을 얻는 것'이며, 과학적 이론화의 진짜 목적은 '진실성'이 아니라 '경험적 적절성'이라는 주장이다. 이 경우 과학은 '진실'에 대해선 불가지론의 스탠스를 취하고,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함을 추구하게 된다. 예컨대 갈릴레이 당시의 주전원을 사용한 천문학자들은 '진실'을 의도한 게 아니라 단지 경험을 잘 설명하는 유용한 가설로써 주전원을 사용한 것인데, 이러한 태도가 반실재론이며, 재판 당시 교계가 갈릴레이에게 요청한 것도 바로 이 스탠스('가설'로써 주장하라)이다. 오늘날 물리학자 중에서는 대체로 이론물리학자들이 반실재론을 취한다.(참고: 김도현, <갈릴레오 사건: 교회와 과학자 집단 간 갈등의 시발점>)[46] Alan Chalmers의 논문 - , 동일인물의 책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open university press,1999,챕터 10-11[47]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의미[48] <시데레우스>의 비르지니아는 1600년에 8살이었고, 1605년에 수녀원에 들어갔다는 설정이 넘버에 직접 언급되며, 1600년생인 실존인물보다 나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