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에게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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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관련 내용
3. 불편한 진실
4. 클리셰와 현실
4.1. 클리셰의 변화
5. 기타
5.1. 배틀물 클리셰, 스포츠 관용구로서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強強弱弱
2010년대 들어 등장한 인터넷 신조어 '강약약강'에 대비되어 쓰이는 신조어.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를 줄인 단어로 볼 수 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는 개념은 강자에게 비굴하게 나오지 않고, 약자를 핍박하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정확히 말해서 강자든 약자든 대등하게 대우한다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이 개념은 인류 역사상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기사도가 대표적이다. 어린이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강자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며, 강력한 적에게 맞써 싸워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약약강'은 강자에게 비굴하게 나오고 약자를 핍박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하긴 강약약강을 "강자를 존중하고 약자를 통술한다"라는 건 다른 단어인 '예절', '상명하복'으로 나타내야 하니 별수 없는 것이다. 더 묘한 점은 강자에게 공격적이고 약자에게는 신경 쓰지 않거나 넘어가는 점인데, 그런 경우엔 절대로 강강약약이라고 하지 않고 반항, 하극상이라고 선을 긋는다. 기독교에서의 목자란 양(신도)을 위협하는 늑대(악)를 막으며 양(신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니 이는 강강약강에 해당한다. 목자가 양(신도)이 가는 길로 따라 가는 것이 약약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 서술되어 있다.


2. 관련 내용[편집]


존경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말이 '너그럽게 대하면 절대 존경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한 어떠한 논거도 없다. 참고로 '존경'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말은 독재자들이 꺼낸 말이다. 손자병법과 오자에서 솔선수범해야 병사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또 한나 아렌트의 인용분도 강강약약이 부당하다는 논지와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혁명의 목적이 자유의 확립이고 반란의 목적은 해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1]

정치학자는 최소한, 훨씬 조용하게 진행되는 제2단계의 혁명과 헌법 제정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제1단계의 갑작스런 반란과 해방 운동, 전제정에 대한 봉기를 강조하기 쉬운 역사가의 함정을 어떻게 피할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중략) 근본적인 곡해는 해방과 자유를 구분하지 못한데 있다. 반란과 해방 운동이 새롭게 획득한 정치적 자유를 헌법에 담지 못한다면, 반란과 해방보다 더 무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도덕, 재산, 군대의 규율은 모두 헌법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실효를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존 애덤스)"

- 한나 아렌트, <혁명론>(홍원표 역) 241쪽-


이 글의 내용은 반란과 해방 운동이 정치적 자유를 헌법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혁명의 성공에는 새로 얻은 자유를 제도화 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와 강자에게 강하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은 상관없다. 해당 책에서 강자에게 강한 것은 잘못이라는 말은 찾을 수 없으며, 약자들이 힘을 모아 강자에 대항하는 사례인 반란과 혁명의 차이를 서술했을 뿐이다. 이는 전형적인 무관련성의 오류와 권위자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3. 불편한 진실[편집]


흔히 약자는 배려와 구호의 대상이 되기 쉽고 대중들은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동정과 공감을 보내게 되는데, 이곳까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강강약약이 어느 정도로 구현된다 하면 사회적 균등과 기회의 평등을 구현하는 데에 기여하므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게 현 대한민국 사회다.

일각에서는 이 개념의 의도를 과대하게 확대하여 강자를 공격하고 약자에게 굴종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전형적인 의도확대의 오류라고, 연민에 의거한 논증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예로는 동일한 범죄를 저지를 때 생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형량을 낮게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곧 '가난한 사람들'(혹은 기타 '불쌍한' 사람)은 처벌을 약하게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되는 논리가 있다. 이를 보편화하면 기업가노동자, 생산자와 소비자 등 경제 주체들을 집단별로 갈라서 탈세 등의 행정범죄에 대해 어느 한 쪽에는 무거운 형량을 매기고 다른 쪽에는 적은 형량을 매겨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향하게 된다. 더구나 '무고한 피해자이고 누구는 억압적인 악당이라는 식'의 판단으로 치달으면 사회 문제로 번진다. 이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이성보다 감성이 더 중시되며 원칙과 절차가 유명무실해지는 점이다. 이런 게 정의라는 신념 탓에 아이러니하게도 차별을 막고 정의를 나타내는 발언에 아무도 의혹을 제기하지 못하게 되어서 선악의 역설과 다른 차별을 부추기는 것에 동조하며, 후에 유죄추정의 원칙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매우 크다. 강자는 모두 악인이고 약자는 모두 의인일 수밖에 없으니 강자 하나를 놓치면 최소 100명의 약자들이 피해한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강강약약의 역풍이 제대로 된 부분은 대표적으로 한국에서 유행어 '언더도그마'로 불리는 약=선, 강=악이 있다.


일본 드라마 <리갈 하이>의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가 역설하는 문제점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구고신, 송곳


아이러니하게도 강강약약이 정의라고 여긴 사회에 끼치는 폐해는 크다. "너희 강자들은 가진 것도 많은데 1~2개 피해 좀 생겼다고 뭘 징징거리냐?"라든지 "가난하고 불쌍한 약자한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다니, 눈물도 없습니까?" 같은 호소가 당연시되면 사회가 정해진 규칙대로 잘 굴러갈 리가 없다. 전후사정과 세부사항을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가난한 약자이니까 면책권을 부여하는 것이며, 당연히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꼴이 된다. 이는 양 극단인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에 대한 비판에서도 마찬가지로 둘 다 옳지 않다. 시민의 권한이 커지고 있는 근현대로 올수록 언더도그마 정서가 사회질서를 흔들어 놓기 쉬워진다. 과거에는 물리적 폭력, 즉 파괴공작, 폭행, 지배계급원을 대상으로 한 집단린치, 저격 및 암살 등으로 이루어진 혁명만이 시민이 사회질서를 재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나, 법치주의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스마트폰 보급과 1인 미디어 시대가 진행되는 오늘날에는 시위, 연대발의, 개인 방송, 단톡방, 전자 민원만으로도 기존 올바른 법제도와 규정을 뒤흔들고 죄 없는 인물을 망가뜨릴 수 있게 되었다. 이 현상이 심화되는 사회일수록 그 공동체는 존속의 명분과 가치를 잃고 마는 것이다. 약자는 모두 선인이고 강자는 모두 악인이라는 이야기로 세뇌해 그저 강자라는 이유만으로 선량한 이를 악인으로 치부하고 이들에게의 불법적 행위를 정의로 둔갑시킬 수도 있고, 마지막 단계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거나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무리를 짓고 죄 없는 자나 대상에게 사적제재를 가하고 이를 광장에 게시하여 자부심을 고취하는 것이다. 강강약약에 제대로 심취한 시민들의 이런 광적인 행보는 사회를 퇴보시켜 결국 국가 전체를 파멸로 이끈다. 관련 내용은 '가난' 문서의 '재산과 선량함/악함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쟁' 문단 및 하위 문단에도 있다.

자신의 정의는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사실상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해당 정의 비판을 신성모독으로, 강약약강에서 조금이라도 부정적 요소를 지우려고 하는 사람을 악마 숭배자로 여기는 셈이다.[2]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하려는 지식인,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약자의 범죄는 생존을 위하는 몸부림,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식으로 마땅한 해결책 없이 무마하거나 약자의 범죄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며,[3]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을 부도덕한 인간으로 몰아 매장하기도 한다.[4]

게다가 강강약약이 정의이고 강약약강이 불의라고 못을 박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전자에는 부정적 요소를, 후자에는 긍정적 요소를 넣는 것을 싫어하는 점이다. 즉, 반항하극상은 강강약약에 넣기 싫어하고 상명하복예절은 강약약강에 넣기 싫어한다는 뜻.[5] 이러면 그 사람들은 '공평'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만이 그렇게 해석한다는데, 조건 없이 약자를 선인으로 치부해 용서해주고 강자를 악인으로(또는 악인을 강자로) 치부해 처단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역차별이다. 잘못된 길에서도 이를 비판했다.

이처럼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여론이란 휘발성이 강하고 비이성적이며 감정적이자 쾌락주의적이고 즉흥성이 커 무계획적이고, 대두된 논제를 심력을 기울여 분석할 의욕이 저조하여 희생물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경제적 불황에 시달리고 있거나, 정신병 등 심신미약 상태이거나, 구성원 간 갈등이 심하고 분열된 사회일수록 이런 여론이 불같이 솟아 비이성적, 감정적인 강강약약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약자들과 사회적 강자들에 대한 이미지의 영향도 크다. 드라마에서 부자들이 악인이고 선량한 시민들은 서민이나 소시민 이하의 재력을 가진 것으로 연출되는 것에 이유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인신공격의 오류처럼 자신들은 절대선이고 상대방들은 절대악이라는 전제를 까는 것과도 비슷하다.

'강강약약'을 맹목적, 긍정적으로 쓰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며, 애초에 힘=선악이라는 믿음 자체가 정직한지도 생각해 보자. 현실의 선악 개념이 애매하듯이 강약 개념도 상당히 애매하다. 약한 것이 죄악인 게 아니듯이 악행은 강자들만 하고 선행은 약자들만 한다는 보장 또한 이들의 논리와 달리 절대로 못 한다. 인간은 가난하다고 해서, 약자라고 해서 선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선악은 단순히 이러한 한 가지 요인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힘이나 계급을 떠나서 유명도, 악함, 부정한 방법으로 강자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걸 생각할수록 강자가 누구이고 약자가 누군지 정하는 기준이 확실한가? 강자가 의인이고 약자가 악인이라고 하면 누구 편을 드는 게 강강약약이냐는 문제도 있고, 비슷하게 정의로운 자만 강강약약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게 참으로 골치가 아픈 문젠데, 강자를 돕는다고 하면 강강약약을 내려버리는 것이고, 약자를 돕는다고 하면 자신이 오히려 이용되는 것이다. 사실 이건 선의 문제와 동일하다.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를 죽이는 게 바르대도 그 태생적 악한 존재가 막상 어리거나 약자라면 죽이기 힘들다. 이러한 논증이 그 유명한 아기 히틀러 논증이다. 아기인 히틀러를 죽여야 하느냐? 아니면 살려야 하느냐? 여기서 히틀러는 악인이고 개선할 가능성은 없으며, 필연적으로 전쟁과 학살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오래된 논증이며 난제 중 하나이다. 정답은 없다.

인간은 이기적 욕망에 싸여있다.

리바이어던, 토머스 홉스


심지어 강강약약이 정의라면서 자신들은 그렇게 하다간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서 정작 어느 누구도 시행할 생각조차 않고 (자신 기준으로 강강약약의 )반대 행동인 강강약강/강약약강 행위 및 이 행위가 (자신과 몇몇 사회상)상명하복, 예절이라는 합리화를 하면서 그저 누가 해주기만 바랐다.[6] 본인들도 정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정의를 바란 것. 이 정도면 넓은 관점을 가져서 차라리 예절 강약약강으로 수긍하면 되지만, 해당 단어를 이미 부정적으로만 쓸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그대로 수긍하겠다는 건 이 단어를 욕으로 안 보겠다는 뜻과 같다.[7][8]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라 힘과 무관하게 자신과 관련하여 좋으면 찬동하고 싫으면 꺼리는 경향이 있다.[9] 이들의 정의대로 실행하는 것이 자승자박이기도 하다. 이들 기준의 상대적 약자에게서 똑같이 당할 수도 있는 것. 입장이 변하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약자를 선인으로 여기는 마음을 악용하여 사기를 치거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도 한다. 곧 자신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지만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로 칭하면서 강강약약/언더도그마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언더독과 오버독의 위치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데, 몇 가지 예가 있으며, '강강약강' 문서에도 있다.

  • 선악이 상술된 대로 단순하면 모두가 가난한 시절인 해방 직후 조선은 안전했어야 하나, 그 시대가 '암살의 시대'로 불릴 정도로 테러와 암살이 끊이질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같은 식민지인 사이에서도 착취가 벌어졌다.
  • 한때는 홀로코스트 때문에 유대인이 언더독으로 응원받았지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어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언더독으로 응원받고 유대인이 되려 오버독으로 비난되는 위치이다.[10] 이런 논지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선악을 논하기 힘들 만큼 서로에게 반인륜적 범죄가 저질러지는 관계라고 주장한다.
  • 대한민국의 젠더 갈등에서 2030 남성과 2030 여성은 모두 자신을 피해자, 희생자, 2등시민, 언더독으로 규정하고 상대 집단을 비난할 때는 상대 집단의 강자적 측면, 기득권적 측면을 강조하며, 한편은 상대 집단을 비난하기 위해 '도태남', '도태녀'같은 패자의 이미지를 붙이는 경우도 흔하다.
  • 노년은 그 사람이 튼튼해도 반드시 노약자로 여기며 청년 이하는 그 사람이 아파도 절대 약자로 여기지 않는다.
  • 조카몬을 이용해 강강약약인 척하기도 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n, daß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신영균: 젠장... 독립이 되면은 다 잘될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차라리 왜정 때가 더 좋았어, 우리끼리 박터지게 싸웠어도 그 때가 더 좋았다고!

문영철: 야 인마, 헛소리 좀 그만해. 일본놈들 밑에서 개처럼 사는 게, 어떻게 지금보다 좋냐.

신영균: 왜놈들보다 공산당이 더 무섭다, 그 말이야! 일정 때에는 왜놈들이 공산당을 무서워하길래 그 공산당이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신영균이 개코의 장례를 치른 후 술자리에서 한탄하며.


최악의 상황은 강강약약 갈망이 조금조차 삐딱선을 타면 엽기적인 정의로 변모하는, "강자(=악인)에겐 어떠한 악행을 해도 괜찮을까?"라 하는 점이다. 어떤 약자를 상냥하게 대하다가도 그 약자가 자신보다 세져도, 또는 어떤 강자를 나쁘게 보다가도 그 강자가 자신보다 약해져도 태도를 쉽게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악인이 응당 벌을 받는 거야 당연하다 치고 악인들을 상대로 스너프 필름이나 성폭행저지르는 것당장은 정의라고 할지 몰라도 후에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악인으로 변모하고 만다. 실제로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극악적인 선택을 하고 본인도 그 강자와 동일해진 사례가 많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것이 정의라는 마인드가 있었고, 그것 탓에 현재 래디컬 페미니즘의 행태, 학생의 교권 침해 등으로 이어졌음에도 정의를 잃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마인드를 포기하지 못해 사태를 키웠다. 죽창드립 문서에도 들어 있겠지만 자기 나름대로 강강약약을 선택한 지존파도 결국에 선을 넘어 완전히 나빠졌다. 또한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 같은 강강약강, 수평 폭력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수평 폭력'이란 현실에 대한 분노, 특히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서의 분노를 자신보다 약한 자 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푸는 현상을 말하는데, 자기 편이 아니라고 그 약자를 강자로 몰아 수평 폭력을 자신도 모르게 휘두르는 것이다.

곧 대다수에 강강약약/언더도그마는 이익과 정치적 필요에 따라 활용되는 것에 불과하며,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약자 자신이 약한 것을 죄악으로 여기니 강자들만큼 세지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며, 자신보다 약한 자들과는 평등해지기 싫어한다. 결국 강강약약이 정의이고 강약약강이 불의라는 이유는 자신이 정의라고 여기는 약자라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니 이 두 단어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예외사항이라고 배제할 수밖에... 그러는 현실을 고려하면 '강강약강' 문서 내용처럼 약자의 입장에 있는 많은 사람이 강강약약을 부정없이 옹호하며 강약약강을 긍정없이 비난하는 바탕에는 동정심이 아닌 자기보신과 이기심이 자리잡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사람도 결국은 허례허식처럼 자신의 이권, 이득을 위해 노력할 뿐인 본성에 충실한 동물인 셈이다.

강강약약이 정의라는 마음가짐이 역설적으로 의인들을 우롱하는 행태이며, 사회적 약자의 범죄를 양산하고, 이러한 범죄는 사회적 약자 기피, 혐오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이들 핍박으로, 그리고 강강약약이 다시 극단적이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사실상 단어 자체가 겉으로나 정의지, 따지고 따질수록 뭔가 쎄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반항이 괜히 강강약약에서 제외된 게 아닌데, 반항은 상황별로 강강일 수도, 약강일 수도 있으나, 이마저도 강강약약에 포함되면 정의에서 어긋나므로 별수 없는 선택인 것.

참고로 일각에서는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일부라거나 극단화되어서 그럴 뿐이고 단어 자체는 그것만으로도 정의롭다고 하는데, '강강약약', '강약약강' 등 모두 자체에는 원래대로는 불의, 정의의 의미가 없으며, 그런 것과는 무색하게도 오히려 이런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색안경을 끼고 열심히 판단한다. 차라리 '선강악약', '선약악강', '강악약선', '강선약악'으로 부르는 게 나을 것이나, 애초에 정의 자체가 극단화된다는 생각은 하기도 싫어하니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조건 없이 약자를 선인으로 치부해 용서해주고 강자를 악인으로(또는 악인을 강자로) 치부해 처단하는 사람(심판, 도우미 등 제3자)이 막상 그 강자보다 세면 상대적 약자에게 강한 것이 되고, 그 약자보다 약하면 상대적 강자에게 약한 것이 된다.

4. 클리셰와 현실[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불쌍한 사연이나,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동정하는 것. 이를 악용하여 싸구려 동정심을 얻으려고 사람들을 자극하는 예로 언론플레이가 있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흔히 나온다. 공격측이 강/악이고 방어측은 약/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인 것.

처벌의 측면에서 보면 같은 범죄 행위로 말미암아도 고소득층은 더 주목받지만 저소득층보다 훨씬 적게 처벌 받는데, 이는 고소득층 인식 악화로 이어지고... 악순환이다. 위에서 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사례들은 신데렐라 등의 고전부터 시작해서 막장 드라마까지 역사적으로 대부분 매체의 클리셰로 등장한다. 가령 가난한 주인공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선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나오고,[11] 부자들은 각종 부정이나 비리, 범죄 등으로 부를 축적하여 가난한 주인공을 구박하고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매체에서는 고소득층 범죄자와 그를 심판하는 경찰을 묘사하는 것이 유행인 듯하고,[12] 동화에서는 인간의 선함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두 모습을 잘 말해주지 않아 어린아이들이 이러한 극단적 강강약약에 쉽게 빠지기도 한다. 이는 편향 가운데 '생존자 편향'과도 비슷하다.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나오는 초기 충녕대군의 모습이 이러는 어린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13]

막장 드라마의 악녀들 중 왔다! 장보리연민정, 뻐꾸기 둥지이화영, 이브의 사랑강세나, 내딸 금사월오혜상 네 사람 모두 태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출신인데,[14]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극단적 시점으로 볼 때는 그들의 '정상참작이 불가능한 악행'까지 미화되고 심지어 그들로 말미암은 피해자 비난이 나올 위험성이 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 중에서 천민 출신 친일파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이 이러한 논란에 휘말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인데, 아무리 조선 말기까지 양반들이 천민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다지만, 그랬다고 자수성가한 천민들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역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던 양반들을 괴롭히는 것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 않냔 게 시청자들의 시각이다.

현실에서 고소득층의 범죄율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범죄율보다 상당히 낮은 편이다. 대기업은 임금체불같은 그들 입장에서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데, 리스크 - 리워드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우파'란 단어가 탄생한 이유도 약자인 민중이 강자인 귀족보다 미개해서 차라리 귀족과 타협하자는 부르주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5]

정치인들은 자신이 서민, 하층민 출신임을 강조하거나 선거철에 소위 '민생 탐방', '민생 체험'을 하는데, 전통시장에 방문하여 시장상인과 악수하고 노점 음식을 사 먹는 등을 가리킨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슬프면서 웃기는 사실인데, 절대다수의 국민에게는 저 행위들이 일상의 한 부분이니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 사소한 행위들을 구태여 굳이 체험해도 정치를 더 잘 하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언더도그마와의 관련성보다는 지지 유세 목적으로 자신을 찍어달라고 홍보하는 성격이 강하며, 정치인은 약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고, '민'도, '생'도 없이 자신이 서민의 애환을 잘 아는 것처럼 선거철에 일회성 쇼를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뭘 해도 무근거하게 욕하는 사람은 욕할 것이라 정치인 입장에서 안 한다는 선택을 하면 끝이니 한다는 선택만 남아 과연 일회성 쇼이기만 할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4.1. 클리셰의 변화[편집]


하지만 2010년대 국내 창작물들이 극단적인 사이다만을 바라는 레파토리가 심화되면서 액션이나 스릴러의 주인공들의 상당수가 정의감을 던져버린 이기주의적 성향을 보여주고, 스스로 갑질하거나 악행을 저지르기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러한 클리셰는 완전히 뒤바뀐 추세이다.[16][17]

상위 문단에 적힌 클리셰 이전에는 이런 클리셰도 있던 듯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악당이 더욱 번성하는 수가 많고,[18]

현대 소설에서는 그것이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존중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뻔한 리얼리티가 싫었고, 그 무렵의 유행이던 '어둠과 악의 승리'라는 결말에 식상해 있었다.

악당은 수갑을 차라. 그런 단순하고도 정직한 느낌으로 지금 발표된 것과 같은 결말을 선택했다.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개정판에 추가된 작가의 말



5. 기타[편집]


  • 워낙 한국쪽에서 오랜 정의로서의 전통을 유지하다 보니 이 문서에서도 갑론을박이 있는 편이다. 사실 강자에게 강하다강약약강도 이런 요소 탓에 편집 제한이 걸릴 지경.


5.1. 배틀물 클리셰, 스포츠 관용구로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자에게 강하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개념은 개요에 서술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지만, 현실의 권력, 재력과는 거리가 멀다.


6. 관련 문서[편집]



[1] 여기서 자유(freedom)은 적극적 자유를, 해방(liberty)는 소극적 자유를 일컫는다. 전자가 "~를 할 자유" 정도의 의미라면, 후자는 "~에(게)서의 자유" 쯤 된다.[2] 그리고 비슷한 클리셰인 도와주고 누명쓰기,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현실에도 있다.[3] 당연하게도, 범죄자 한 명에 대하는 것으로 한정하여 해당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러한 범죄의 조건과 배경인 사회 구조를 개선하거나 개혁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 특히 사회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상당히 정치적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길고 지지부진한 과정을 거치는 일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발언들을 지식인들이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합리적이 아닌 판단일 수 있다.[4] 소위 말하는 언더도그마적 편향들은 본문과 같이 지식인들에게서 발화될 때보다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약자 자신에게서 발화될 때 더 문제가 된다.[5] 심한 경우 반항과 하극상은 불의라니 강약약강에 넣고 예절과 상명하복은 정의라니 강강약약에 넣어 자기합리화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강약 개념이 언더도그마 그 자체다. 다만 정의, 불의와 무관하게 강자가 약자에게 반항할 때도 있고, 근력/무력으로는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셀 수도 있고 상급자가 약점이 잡혀서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이런 하극상은 하급자 기준으로 강강이 아닌 약강일 수도 있다.[6] 당연히 '강약약강'이라는 단어를 부정적 의견으로만 즐겨쓰는 부류가 간과한 요소가 바로 이 '상명하복', '예절'이다. 심지어 이 두 단어가 먼저 나왔는데도...[7] 엄연히는 수긍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보단 한다고 보는 게 옳다. 그동안은 배운 걸 모조리 부정해야 하면 자살로 끝나면 다행일 것이니... 자세한 사항은 경로의존성 문서에도 있다.[8] 또한, 사회적으로도 금지어이지만, '동무', '인민' 같은 말들을 나쁜 말로 보겠다는 뜻과 같은 셈이기도 하다.[9] 일례로 이런 논리대로는 중대(中大)기업 상품은 되도록 사지 말고 소(小)기업 상품을 많이 사는 게 옳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등으로 대기업의 비싼 것을 선호하는 것이 있겠다.[10] 매일경제 2012-04-09일자 "[서평]'언더도그마"강자는 비난받을 수밖에 없나"[11] 간혹 너무나 어려운 생계 때문에 잠시 나쁜 길에 빠지기도 하지만 금방 후회하고 그만두는 묘사가 나온다.[12] 매체들은 매체 향유자들의 흥미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소득층 범죄자들이 범죄를 꾸미는 과정을 드라마틱한 서사로 쓰는 것이다. 평범한 일반인의 평범한 범죄같은 건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흥미를 유발할 요인도 없기 때문에 작품 내 시대적 상황을 묘사하는 용도밖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13] 극중에서 충녕대군은 백성은 선하고 착하다고 배우고 그렇다고 믿었는데 대군저를 나서고 시장에서 사람들의 아귀투쟁을 보면서 상당히 충격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성선설에서 나온다. 인간에게는 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존재한다. 배고프고 고달프면 이게 더욱 강해지니 지도자는 이들에게 배를 채우게 하고, 심성을 가르쳐야 선한 맘으로 가지, 자연스럽게 착한 마음으로 가지 않는다. 착하니 올바르게 간다는 건 개꿈이다.[14] 오혜상의 경우는 금사월의 친아버지의 양녀로 들어가서 그렇지, 사실 그녀의 친아버지가 고아원장이고, 게다가 그녀의 진짜 이름은 '금혜상'이다.[15] 물론 부르주아들도 귀족으로 말미암아 민중과 같이 탄압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좌파가 이겼다.[16] 동시기 일본 문화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라이트 노벨과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소드 아트 온라인의 흥행으로 일본식 이세계물현대인 천재론&먼치킨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 사이다를 중시한 나머지 현실 반영 문제가 일어나 살 사람만 사는 장르로 여겨진 데다 KADOKAWA가 라이트 노벨 문어발 애니화에 집착하여 '케모노 프렌즈 2'라는 삽질을 저지르면서 업계의 주적으로 여겨져 버렸으며, 자민당(일본)이 난공불락의 여당일 시기에 일본 정부에서 쿨 재팬 정책으로 두 분야를 지원하다 아베 신조 피살 사건으로 위기를 겪어 향후 정세에 따라 유행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17] 동시기 할리우드와 서양 게임업계는 국내 사이다물의 출세지향성과 반대라는 차이점만 빼면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한 극단적인 사이다 혹은 이미지 세탁을 중시해 평론가와 소비자 사이 평가의 괴리감을 떠오르게 했다. 사례로 스타워즈 시퀄 삼부작,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 의한 와우의 망가짐과 성차별, 라이엇 게임즈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오버워치 캐릭터 일부 설정변경 무단예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의 애비 편애의 개연성 붕괴 등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전세계에서 성향에 상관없이 사이다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사이다'가 사회 구성원들의 단순 불만에 머무르다가 서서히 부작용이 강한 스트레스 해소용 용어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다.[18] 권악징선, 악은 악으로가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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