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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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2년 3월 12일
황해북도 수안군 대천면 남정리
사망
몰년 미상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강국보는 1872년 3월 12일 황해북도 수안군 대천면 남정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곡산의 천도교인 이경섭(李景燮)을 통해 서울의 만세 소식이 수안군에 전해지자, 수안군 천도교 교구장 안봉하는 3월 1일과 2일 2차례에 걸쳐 천도교 관계자들과 논의한 끝애 군내 각면의 천도교인들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서 배포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이때 천도교 전도사였던 강국보는 각처 동지들에게 거사계획을 알려줬고, 대천(大千), 오동(梧桐), 연암(延岩), 공포(公浦) 등 각 면의 천도교인과 애국동지들에게 거사 계획을 전달하고 군중을 동원했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최양봉, 차제남, 김응하, 한진석, 유광선, 김태혁, 박이봉, 최석구, 김응도, 박태수 외 약 130~140여 명과 함께 교구실에 모여 헌병분견소를 향해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강국보는 이영철, 홍석정 등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고 "우리는 이미 조선독립선언을 했으니 속히 이 분대를 우리들에게 넘겨야 한다. 만약 수긍하지 않으면 잇달아 지방으로부터 습래하는 천도교도들이 늘어나 끝까지 이것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동 분대장 등이 해산할 것을 설유하자 일단 대표자 2명을 남기고 물러났다가, 오전 11시경에 다시 몰려들어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동욱이 선두에 서서 동 분대원에게 동 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자, 동 분대원들이 발포를 가해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체포된 강국보는 1920년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죄 혐의로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강국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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