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근호(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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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근호.jpg

출생
1888년 11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
사망
1960년 2월 24일
부산시 영도구
(現 부산광역시 영도구)
본관
진주 강씨
부모
아버지 강형석, 어머니 신해운
학력
신흥무관학교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강근호는 1888년 11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에서 아버지 강형석(姜亨錫)과 어머니 신해운(申海雲)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함흥중학교에 진학했으며, 1916년 2학년 재학 중 배일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자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길림성 용정촌의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강근호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해 사관연성소 교관과 구대장을 지냈으며, 1920년 9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제1중대장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이 후 일제가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해 간도 참변을 단행하자, 그는 대원들과 함께 러시아의 자유시로 후퇴했다. 그러나 1921년 6월에 벌어진 자유시 참변 이후 러시아 적군에 편입되었으며, 이후 이르쿠츠크의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2년 공산주의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그는 석방되자 마자 중국으로 탈출해 길림성 일대에서 유랑 생활을 하며 용정촌의 영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연길의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소 교관으로 있으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8.15 광복으로부터 2년 뒤인 1947년에 조국으로 귀국한 강근호는 수원에 있던 대한민족청년단 중앙 훈련소의 교관으로 있다가 1949년 2월 육군사관학교에 8기로 들어갔다. 그러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했고, 육군 제103사단 113연대장을 맡았다. 전쟁 중인 1952년 이시영의 증손녀이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이정희를 만났고, 1953년 연병장에서 그녀와 결혼해 아들 강귀철과 딸 강정화를 낳았다.

1956년 중령으로 전역한 강근호는 부산 영도구에 정착했고 1960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향년 72세. 그는 생전에 "청산리 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근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