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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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0년 10월 21일
전라도 나주 반남면
(현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석천로)
사망
1960년 10월 5일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봉소리
본관
진주 강씨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강달주는 1880년 10월 21일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자, 그는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거병한 심남일(沈南一)의 의병대에 가담해 호군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선봉장 강무경(姜武景)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해 훈련시켰다. 1908년 3월 7일 강진 오치동 전투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격퇴했고, 6월 25일에는 능주 전투를 치렀으며, 10월 9일에는 해남 성내에서 3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해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5월 12일, 심남일 의진은 보성 천동에 주둔하고 보성에서 거병한 안규홍(安圭洪)에게 통지하여 석호산(石虎山)에서 회동하여 서로 협조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 때 강달주는 후군장 김성재와 함께 소를 잡아서 군사들에게 먹여 사기를 북돋웠다. 이후 산 위에 올라가 깃발을 휘날리자 일본군 50여 명이 북을 울리며 싸움을 걸어왔고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8월 26일 심남일 의병대가 석정 전투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능주 일본 헌병대가 야습을 가하는 바람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의병을 해산하라는 칙명이 내려지자 부득이 군사를 해산하고 심남일과 함께 풍치(風峙)에서 피신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4월 4일 광주 지방재판소에서 폭동죄 혐의로 징역 5년형이 언도되었고, 이후 공소하였지만 5월 9일에 형이 확정되었다. 강달주는 투옥 생활 동안 가혹한 고문을 받아 발목이 불구가 되었으며, 출옥 후 나주군의 독립운동에 은밀히 참여했다가 3.1 운동 후 영암군 시종면 봉소리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했다가 1960년 10월 5일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강달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