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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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규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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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35번}}}
윤석환
(1984~1990)

강병규
(1991~1994)


진필중
(1995~2002)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1번

황일권
(1993~1994)

강병규
(1995~1999)


최경훈
(2001~2002)
SK 와이번스 등번호 1번
팀 창단

강병규
(2000)


정대현
(2001)





파일:강병규[도칸남자].jpg

강병규
姜炳圭 | Kang Byeong-gyu

출생
1972년 6월 30일[1] (51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림동
(現 서울특별시 관악구 미성동)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86cm, 81kg, O형
학력
미성초등학교 (졸업)
성남중학교 (졸업)
성남고등학교 (졸업)
한양사이버대학교 (광고홍보학과)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OB)[2]
소속팀
OB-두산 베어스 (1991~1999)
SK 와이번스 (2000)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강병규tv[도칸남자]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경력
2.3. 피칭 스타일
2.4. 연도별 주요 성적
3. 방송인 강병규
3.1. 과거 진행한 주요 프로그램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방송인.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성남고 시절 전설적인 우완 에이스로 활약했다. 1990년 제20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전 경기 완투하는 투혼으로 성남고를 결승까지 올려놓았던 것은 전설로 알려져 있다.[3][4][5] 1991년 신인 지명에서 LG와 OB(지금의 두산)가 모두 강병규를 고졸 연고 자유계약을 할 때 영입을 시도하는 바람에[6]결국 주사위 던지기로 결정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7][8]


2.2. 프로 경력[편집]


파일:external/www.donga.com/414-2.jpg
OB 베어스 시절 프로필 사진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701000031481.jpg
두산 베어스 시절 타석에 나온 모습 (출처: 포토로)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414000039421.jpg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702150952568Z1.jpg
(출처: 포토로)
(출처: 포토로)

통산 성적은 56승 63패 평균자책점 4.15. 패가 승보다 많지만[9] 그래도 강병규는 방송에서의 이미지나 이후의 일들로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선수시절까지 폄하되는 경향이 큰데, 이미지와 달리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가 절대 아니었다. 선발 투수의 지표인 시즌 10승을 두 번이나 기록했다. 게다가 1990년대는 우승한 1995년을 제외하면 베어스의 암흑기였던 점이 크고, 타선도 우동수 트리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강하다고 볼 수 없는 타선이었다.[10] 통산 247경기 중 137경기가 선발이었는데 완투를 15회 기록하였고, 선발 투수 등판시 평균 6이닝을 먹어주는 이닝 이터형 투수였다. 9회 2사까지 무실점으로 막다가 백투백 홈런을 맞고 2:1로 진 경우도 있었다.[11]

즉 방송에서 유머 소재로 삼던 것[12]처럼 형편없는 실력의 선수는 절대 아니었다.[13] 1, 2선발을 맡을 만한 선수까지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어느 팀에 가도 3, 4선발 정도는 할 수 있는 투수였다. 이닝을 많이 먹었다고 하지만, 평균자책점[14]이 4.15라는 것은 선발 투수로서 아주 뛰어났다고 볼 순 없다. 커리어 하이는 첫 10승을 기록하고 WAR 2.85를 기록한 1993년. 클래식 스탯과 세이버 스탯 모두 이 시즌이 제일 훌륭하다.[15] WAR로 볼 때, 보통 1선발급 선수는 5~6 WAR를 먹어주는데 강병규는 1~2점대의 시즌 WAR을 기록한 편이다.[16] 굳이 비교하자면 삼성의 전병호와 통산 누적 WAR이 비슷한 편인데 누적 스탯은 두 시즌을 더 오래 뛴 전병호가 약간 더 쌓았고 평균자책점은 강병규가 좀 더 낫다. 또한 LG의 최원호와도 비슷한 편인데 30대 후반까지 선수 생활을 한 최원호보다 누적 스탯은 조금 딸리나 비율 스탯이나 통산 WAR은 비슷하다. 스탯티즈 기준 통산 WAR이 12.6인데 이 수치는 통산 341위에 해당한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나서 지금까지 활약한 선수가 3,000명이 넘는다는 걸 기억하자. 상위 10%대의 선수였다는 뜻이다.

게다가 90년대 초/중반 OB 베어스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뽑은 투수들로 재미를 본 적이 드물었다. 권명철(92년 입단), 김경원(93년 입단), 진필중(95년 입단), 박명환(96년 입단) 정도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 데뷔한 선수들 중 OB에서 성공한 투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17] 강병규가 비록 저 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90년대 OB의 쓸 만한 선발 투수이자 롱 릴리프로 꾸준히 활약했음을 감안하면 OB 베어스의 역사에 이름 석 자를 남길 만한 정도는 충분히 된다.[18]

유독 삼성에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엽에게는 약했다고 한다. 특히 이승엽이 1999년 54홈런을 치던 시즌에 그가 3개를 맞았는데, 그걸 가지고 토크쇼에서 참 많이 써먹었다.[19] 이승엽비타민 게스트로 나왔을 때 이런 아픈 기억을 웃으면서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승엽에게 가장 많은 홈런을 허용한 투수는 태평양-해태/KIA에서 활약했던 최상덕(7개)이다. 하지만 이승엽에게 3홈런을 허용한 시즌이 그의 커리어 하이였다는 게 함정이었다.

평소 장호연을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연봉 협상을 질질 끌어서 임의탈퇴 위기에 가기도 할 정도로 구단과 마찰이 잦았다. 그렇다고 장호연의 피칭 스타일이나 자기관리를[20] 본받았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관리는 충실했던 장호연과는 달리 놀기 좋아한 탓에 스프링캠프에 늦게 합류하면서 이게 체력 부족으로까지 나타나 전반기에는 괜찮은 선발이었다가도 후반기에는 폭망하는 시즌의 반복이었다. 그나마 괜찮게 한 게 1993년과 1999년. 이때가 강병규 역사상 유이한 두 자리 승수 시즌이다. 게다가 99년은 역대급 타고투저 상황이었기 때문에 13승을 거뒀음에도 정작 평균자책점은 상당히 높다.[21]

한국야구선수협의 선수협 파동에서 송진우, 김재현, 마해영 등과 함께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선 공로가 있다. 다만 나중에 보인 막장 행각으로 다 까먹었다. 강병규/논란 및 사건사고 참조.

선수협 파동이 터지자마자 2000년 시즌을 단 1주일 앞두고 SK 와이번스의 창단지원선수[22]로 선정되어, 광속 트레이드되었다. 그 말고도 타 팀의 선수협 관련자들은 대부분 트레이드되었다. 살아남은 회장님이 특이한 케이스였다.[23]

SK 와이번스로 이적한 후, 당시 강병철 감독이 낮 경기에 강병규를 중간계투로 등판시키려 했으나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낮 경기에는 뛰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도 안 되는 드립을 날려 SK 코치들은 물론 프런트 전체에게도 완전히 찍혔다. 두산에서 내쳐지면서 야구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식었던 것으로 보인다.[24][25]결국 2000 시즌을 날린 후 박재용, 박정현, 김정수, 장광호 등과 같이 SK에서 방출당했다. 방출 이후 LG의 영입 이야기가 나왔으나 당시 LG 트윈스 프런트는 LG 투수들 가운데 강병규 정도의 선수는 쌓이고 쌓였다며 영입하지 않았다.[26][27]


2.3. 피칭 스타일[편집]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146km/h까지 나왔지만 그 위력은 평범한 수준이였다. 위력적인 결정구 부족으로 안타를 많이 허용하는 타입(통산 피안타율이 .278)이었지만, 구위에 비하면 공격적인 피칭으로 이닝을 많이 먹던 투수였다.


2.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1
OB 베어스
17
60⅔
2
2
0
-
0.500
2.67
58
4
26
23
24
18
1992
18
67⅔
1
4
1
-
0.200
5.05
79
8
25
33
39
38
1993
29
139⅔
10
9
0
-
0.526
3.09
124
4
36
70
52
48
1994
18
78
5
5
0
-
0.500
4.27
46
4
25
41
46
37
1995
18
103⅔
5
6
0
-
0.455
4.60
112
12
39
50
56
53
1996
25
121⅔
7
11
0
-
0.389
3.99
119
9
45
55
63
54
1997
48
103
6
5
2
-
0.545
3.58
105
4
37
54
48
41
1998
34
134
5
10
1
-
0.333
3.63
143
10
40
74
57
54
1999
두산 베어스
29
143⅓
13
(8위)
9
0
-
0.591
5.21
164
19
48
92
92
8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2000
SK 와이번스
11
26⅔
2
2
0
-
0.500
8.44
39
7
13
7
25
25
KBO 리그
통산(10시즌)

247
978⅓
56
63
4
-
0.471
4.15
1036
81
334
499
502
451


3. 방송인 강병규[편집]


두산 베어스 시절인 1999년 11월, 출발 드림팀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정수근, 홍성흔 등과 함께 개그맨 뺨치는 입담과 꽤 준수한 외모 덕에 예능계에 도장을 미리 찍어두었다. 해당 방영분[28] 이로 인해 선수 시절부터 연예계 진출 제의를 여러 번 받게 되었고, 그 덕에 2000년 야구선수 은퇴 후 KBS 시트콤 "멋진 친구들"[29]로 첫 데뷔해 여러 방송사의 주말 버라이어티 MC를 맡으면서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연예계 진출을 이룬다. 본인은 연예계 진출 초창기 자신이 연예계 롤 모델로 같은 야구선수 출신으로 스포츠와 버라이어티를 접목해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 야구해설가 에가와 스구루를 꼽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donga.com/414-1.jpg

운동선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연예인 못지 않은 준수한 외모[30]와 186cm, 81kg의 모델 뺨치는 허우대를 바탕으로 괜찮은 진행 능력까지 뽐내며 방송인으로서 무난한 이미지를 구축하였으며, 자신의 야구 성적 등을 끌어내 망가지는 등, 주로 '망가지는 MC' 컨셉을 밀어 붙였다. 위험한 초대에서 허구한 날 물에 빠지거나[31] '위대한 밥상'에는 손도 못 대는 비타민 MC[32] 등이 그런 역할이었다. 서장훈이나 강호동처럼 딱히 선수로서 입지가 좋았던 게 아니었음에도[33] 불구하고 메이저 예능 프로에 순탄히 캐스팅 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예능인으로서 재능과 포텐이 높았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무한도전의 초창기[34] 시절 표영호의 원래 자리는 강병규가 맡을 뻔했다는 얘기가 있었다.[35] 강병규는 당시 출연 제의를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하필 당시 출연 중이던 비타민의 녹화 시간이 겹치던 관계로 과감하게 무모한 도전 출연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 후 무한도전이 뜨고 나서 강병규가 속으로 배아파했다는 후문이었다.

이경규가 2001년 봄 개편부터 KBS 2TV <夜!한밤에> 메인 MC로 합류할 당시 보조 진행자 물망에 한때 거론되기도 했다.

2012년 1월 경에는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TV조선 토크쇼 노코멘트에 게스트로 나오기도 했다. 또한 10월 19일에는 채널A의 스포츠 프로그램인 '스포츠 베토벤'에 출연. 함께 나온 사람은 정수근. 다만 이 시기는 강병규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나쁘던 시기였던 만큼 정수근과 더불어 좋은 소리를 듣지 못 했다.

하지만 여러 사건사고들로 물의를 빚은 결과 사실상 방송인으로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2020년 KBO LG U+ 야구앱 해설위원을 하다가, 2021년 1월 10일 TV조선 시사 교양 프로그램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박철순이 만난 사람으로 8년 만에 TV 방송에 나왔다. 당연하지만 단발성 출연이지 방송 복귀는 아니다.


3.1. 과거 진행한 주요 프로그램[편집]


  • 가족오락관: 1995년 12월 13일 선수 시절 패널로 출연.
  • 일요일은 즐거워 (KBS 2TV)
  • 일요일은 101% (KBS 2TV)
    • 골목의 제왕
    • 대결 흑과 백
    • 두 개의 탑
    • 슈퍼챔피언
    • 후아유
  • 자유선언 토요대작전 (KBS 2TV)
  • 위기탈출 넘버원 (KBS 2TV): 강병규가 공동 MC를 맡았을 때는 토요일 밤 10시 5분에 방영되었지만, 일요일 같은 시간에 방송된 비타민의 공동 진행을 맡아왔던 탓에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지적을 샀으며, 결국 2006년 가을개편 때 이혁재와 동반 하차했다.[36]
  • 비타민 (KBS 2TV): 강병규는 <비타민> 때문에 2005년 7월 부분개편부터 채널과 시간대를 변경한 KBS 2TV <싱싱 일요일> 메인 MC 제의를 고사했고 상습도박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탓에 KBS·EBS·MBC 뿐 아니라 나중에는 SBS에서도 출연정지 연예인 명단에 올라야 했다.
  • 좋은 친구들 (SBS)
  • 도전 1000곡 (SBS)
  • 테마쇼 환상특급 (KBS)


4.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병규/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한창 이병헌과 갈등이 있을 때 자신에게 깐족대던 김용호 기자를 번호까지 털어버리는등 트위터로 제대로 역관광을 먹인 적이 있다. 연예인으로서는 더이상 잃을게 없었던 강병규라 그런지 작정하고 온갖 욕설을 다 내뱉는 게 압권. 이때 강병규가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못한 인물임에도, 그 트위터로 싸웠다던 김용호 기자가 연예계, 특히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으로 취급될정도의 악명높은 기레기라 네티즌들이 강병규를 옹호했다.

  • 유재석[37]이 강병규의 팬이었다. 심지어 유재석은 OB 베어스[38]의 팬이라고. 강병규가 등판한 경기를 유재석이 직관했다고 한다. KBS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의 인기 코너였던 MC대격돌 운명의 바퀴에서 한참 야구 이야기를 하던 도중[39] 이미 공포의 쿵쿵따 시즌 2에서 많이 다루었다고 이야기를 했다가 옆에 있던 유재석이 그때 욕을 엄청 했어요.라고 했을 정도로 유재석으로부터 욕을 매몰차게 먹었다.[40]

  • 훗날 김용호 전 기자가 밝히길 조폭두목하고 싸워서 강병규가 그냥 이겼다 한다. 성남고 1년 후배인 박종호와 더불어 실제로 싸움을 잘한다고 한다.

  • 삼성 라이온즈강봉규와 이름이 비슷해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신문에선 강봉규를 강병규라고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어떤 팬은 이병규와 헷갈리기도 한다.

  • 마구마구에서는 실명으로 있었다가 은퇴 선수 초상권 및 이름 사용 문제로 2011년 2월 16일자 업데이트 때 강경호로 바뀌었다. 흑역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직 선수들의 경우는 KBO에서 일괄 관리하는 초상권 및 이름 사용권을 은퇴 선수의 경우는 선수 개개인이 갖고 있기 때문에 합의가 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다. 다만 슬러거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협의가 잘 이뤄졌는지 본명으로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마구마구 문서 참조.

  • 박명환야구TV에서 종종 언급되는 이름이다.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포함)시절 일화를 언급할 때 강병규에 대한 기억을 출연진들이 말하고는 한다. 함께 베어스에서 몸 담았던 구자운, 이경필, 그리고 SK에서 함께했던 오상민 편에서 언급되었다. 이 중에서 강병규가 가장 선배이다.

  •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이름은 강병규tv. 시사적인 얘기랑 연예계에 관련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곳 같다. 구독자수는 비공개[41].

  • 정치 성향은 친민주당, 친문, 친조국 성향이다.[42] 평소 트위터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고 미래통합당과 보수 진영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하며 # 조국 수호 집회에 참가해 인증하고 조국이 법무부장관에서 사퇴하자 "문재인이 조국을 버렸다#" 라고 주장 할 정도로 극단적인 친조국 성향을 보여주었다.

  • 2008년 말 사건사고로 연예계에서 물러난 직후인 2009년 초 KBS에서 야구 예능 프로그램인 천하무적 야구단을 런칭했는데, 만일 그가 08년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 프로그램에 코치인 이경필과 세트가 되어 감독으로 합류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을 것이다. [43][44]

  • 특이하게 MBC에서는 한 번도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없다. 2005년 무모한 도전의 영입 대상으로 오른 적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파일:쿵쿵따.jpg

  • 박명환야구TV에서 강원래가 술회하길 삼성과 두산의 경기 전날밤 강남구 신사동에서 강원래, 이승엽, 강병규 셋이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이승엽이 내일 시합이 있어 일어나겠다고 하자 강병규가 '앉어! 내가 내일 선발인데 너 삼진이야! 알았어?'라고 말했으나 삼진은 커녕 홈런을 내줬다고 한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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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5월 20일.[2] 이 계약 과정은 후술된 문서 참고.[3] 결국 성남고는 결승에서 대전고에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4] 이 당시 멤버들 중 프로에서 성공한 선수들이 꽤 있다. 최경환과 동기생이고 박종호의 1년 선배다.[5] 야심만만에 게스트로 출연해 이 당시의 썰을 살짝 푼 적이 있다. 전국대회 4강에 진출해야 대학 입학이 보장되는 시스템으로 인해 야구부 선수들 모두 투혼을 불사르며 끝내 4강을 넘어 결승전까지 진출하며 함께 참전한 선수들 모두 대학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6] 대학 진학이 일반적이었던 그 당시 정서로 인해 강병규도 대학교에 진학하려고 했고 경희대 입학이 확정적이었으나 가정 형편 악화로 인해 프로 직행으로 방향을 선회했다.[7] 출처: 이종남 기자의 사람 좋으면 꼴찌[8] 강병규 본인이 2012년 신인 드래프트가 열린 2011년 8월 25일 트위터에 OB로 가게 된 스토리를 게시한 적이 있었는데, 당초 LG 입단이 유력했으나 서울지역 고졸 연고 자유계약 선수들의 입단을 놓고 OB와 LG가 주사위 던지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순번에서 OB가 이겨 그대로 OB에 입단하게 되었다고 한다.[9]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코너인 돌격 앞으로라는 코너에서 강병규에 대한 문제가 나왔는데 문제내는 성우가 승이 많냐 패가 많냐고 하면서 강병규를 디스하기도 했다.[10] 일단 90년대 초반이 투고타저 시대였고, 당시 OB는 제대로 된 규정타석을 채운 3할 타자가 1명 있을까 말까였다. 91년은 김광림(.307), 92년은 김상호(.300), 93년 김형석(.306), 김광림(.300), 94~96년 없음, 97년 김상호(.315), 이종민(.304), 98년 타이론 우즈(.305)이었고 심지어 우승을 거두던 95년에도 규정타석 3할 타자가 아예 없었다. 그 우동수 트리오가 본격적으로 재능이 만개한 것도 1999년의 일이었다.[11] 1993년 대구시민구장에서 열린 대 삼성전이었는데, 당시 상대 투수는 박충식이었다. 신인왕 후보로 주목 받고 있던 박충식과 피칭 대결을 벌여 8회까지 무실점으로 삼성 타선을 봉쇄했으며 9회에 올라 선두 타자를 내보낸 뒤 맞이한 타자는 괴물 타자 양준혁. 큰 위기였으나 다행히도 양준혁을 병살타로 잡아 내어 순식간에 원 아웃만을 남겨 두었다. 그러나 후속 타자인 김성래에게 솔로 홈런, 그 다음 타자인 정영규에게 연속 타자 홈런을 맞으며 결국 패전 투수가 되었다.[12] 방송 시작 후 1년쯤 지나서 패널 방송인 포지션에서 MC로 조금씩 입지를 다질 무렵에 일반인 대상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야구를 좋아한다는 일반인에게 다른 진행자가 "예전 프로야구 선수 강병규 선수 아세요?"라고 물어보면 일반인이 "누구죠? 이병규 선수는 아는데요?"라고 답하면 가만히 있던 강병규가 민망해져서 웃는 식.[13] 애초에 진짜 실력이 형편없어서 은퇴한 선수였으면 2군에서만 4년간 뛰다가 그대로 사라진 윤현민 마냥 선수 출신인 것만 언급하고 넘어갔지, 프로 시절 이런 저런 해프닝이나 흑역사를 풀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기간 꾸준히 1군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그만큼 에피소드나 유머 소재로 쓸 해프닝도 많은 것이다.[14] 평균자책점이 전부는 아니지만 수비지표가 없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부족한 KBO 리그 기록에선 평균자책점으로 밖에 따질 수 밖에 없다. 다만 요즘은 세이버매트릭스가 많이 발달되어 WHIP, ERA+ 등 다양한 지표를 동원하여 투수를 평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평균자책점으로만 투수를 평가한다는 말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15] 13승을 따 내며 다승 8위까지 기록한 1999년을 커리어 하이로 보는 사람들도 간혹 있으나 ERA도 5점대를 기록했고 WAR도 1.9라서 승리를 제외한 세부 스탯은 93년이 더 낫기 때문에 93년이 커리어 하이라고 볼 수 있다.[16] 이건 강병규가 선수 시절 등판한 경기 중 절반 가까이를 계투로 등판했던 것이 크다.[17] 류택현이 선수 생활을 20년 넘게 했다고는 하지만 베어스에서 뭔가 제대로 된 성적을 남긴 것은 96~97 시즌에 불과하다. 게다가 두 시즌 동안 베어스의 성적이 영 좋지 않았고 유지현을 거르면서 데려온 1차 지명 선수라는 것을 생각하면 만족스러운 성적은 절대 아니었다.[18] 이 부분은 성남중-고 3년 선배인 차명석과 비슷하다. 90년대 팀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투수였다는 점과 10년간 프로 생활을 하며 성적을 꾸준히 쌓고 은퇴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다만 현역 시절 차명석은 대한민국 최초의 프라이머리 셋업맨이자 중간계투 최초 억대 연봉자라는 타이틀이 있다.[19] 좋은 친구들의 코너인 기막힌 대결에서 강병규가 벌칙의상으로 이승엽 유니폼을 입게 됐는데 강병규가 나 차라리 여장할래라고 하면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강병규가 은퇴를 안 했더라면 당시 300홈런을 친 이승엽이 400홈런도 빨리 나왔을 거라고 디스하기도 하였다.[20] 하체의 중요성을 인지해 비시즌에 스키를 타면서 하체를 단련했을 정도로 자기관리가 철저했다.[21] 다만 이닝도 많이 먹었고 이 시즌이 역대급 타고투저였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해 WAR은 1.9를 기록, 무난한 3선발 정도의 수치를 기록했다. 당시 두산의 에이스는 강병규의 2년 후배인 이경필로, 이 시즌 강병규와 똑같이 13승을 기록했는데 평균자책점은 3.12로 굉장히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22] 각 팀의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들을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인 당 10억원을 주고 데려갈 수 있는 제도였으며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기존 구단들의 텃세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핵심 전력을 보호선수로 묶어두고 잉여자원을 10억원씩 주고 데려가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2할대의 승률을 거둘 정도로 전력이 약했던 99 쌍방울의 전력을 물려받은 SK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 선수들을 데려간다. 두산은 강병규를 보호 선수에 묶지 않았는데 이건 강병규가 이미 구단 윗선에게 제대로 찍혀있음을 암시한다.[23] 다만 송진우는 FA 때 삼성과 한화 두 구단에서 제안을 했을때 한화를 선택한 이후 구단 측과는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그래서 원클럽맨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24] 다만 SK는 직전 시즌 13승을 기록한 강병규에 대한 기대가 컸다. 2000년 강병규의 연봉은 1억 원이었다. 00시즌 SK 선수단의 기반이 된 99시즌 쌍방울은 10승을 거둔 투수가 아예 없었고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가 박정현인데 5승 1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3.92였다. 더군다나 박정현은 허리 부상으로 인해 재기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던 선수였다. 그래서 전 년도에 두산에서 10승 이상을 거둔 강병규에 대한 기대가 클 수 밖에 없었다.[25] 먼 훗날 2018년 개인 방송에서도 ''10년 잘 써먹고 10억 받아서 내보냈네. 야 두산 참 장사 잘 해, 예나 지금이나." 라고 두산을 대놓고 깠다.[26] 그도 그럴 것이 강병규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식어 00년 태업에 가까운 성적을 냈다. 중간계투요원으로 올라와서 불만 지르고 8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27] 하지만 00년 LG 투수진을 보면 오히려 강병규가 영입되는 것이 더 나았다. 에이스 역할을 한 해리거는 00년에 200이닝을 넘게 던졌고 장문석은 선발과 계투를 오가면서 137이닝을 던졌다. 이승호최향남을 빼면 계투요원 중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투수는 없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고 하나 강병규가 LG에 입단하여 다시 부활했더라면 치열한 4강 싸움 가운데서 LG가 다시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8] 같이 출연한 두산 선수들은 강병규를 포함해 진필중, 심정수, 정수근, 홍성흔 이 다섯이다.[29] 유재석, 남희석, 이휘재가 주연을 맡은 일일 시트콤이다. 임현식, 윤해영도 출연하였다.[30]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초대 MC를 공동으로 맡은 이혁재보다 연하 같지만, 사실 강병규가 1살 위다.[31] 플라잉체어 도입 이후 큰 신장과 더불어 타고난 운동신경 덕분인지 다른 MC들과 비교시 묵직하면서도 시원하게 날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회 게스트로 출연한 김선아의 경우 강병규의 플라잉체어로 날아가는 모습이 가장 멋있었다며 우승자로 선택하기도 했다.[32] MC팀이 이기는 날이 거의 없었지만 그 대신 개편된 이후에는 시식 권한이 많이 늘어났다.[33] 어디까지나 이 둘이 리그를 재패한 넘사벽 수준이었던 것이지 위에서 서술했듯이 강병규는 아예 실력이 없던 선수가 아니었다. 상술된대로 실력이 객관적으로 진짜 없던 선수 출신 연예인은 윤현민 같은 경우들이고, 강병규와는 경력 수준 차이가 비교도 안되게 많이 난다.[34] '무모한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유재석, 노홍철, 정형돈, 표영호 등이 주축 멤버였던 시절.[35] 정작 표영호도 오래 가지 못 했다.[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혁재와 함께 진행했을 당시에 넘버원은 리즈시절로 불릴 만큼 많은 인기가 있었다.[37] 유재석과 강병규는 1972년 생 동갑내기다.[38] 現 두산 베어스. 참고로 유재석은 OB 베어스의 어린이 회원이었다.[39] 오랜만에 잡힌 선발 경기라 평소에 잘 하지도 않던 데이터 분석이나 식단관리도 꼼꼼히 준비했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했지만 1회에 안타-안타-볼넷-홈런을 내리 당하고 바로 강판당했던 경험을 얘기 했었다.[40] 강병규는 유재석과 친분이 꽤 있던 편으로, 72년생 동갑인 데다 MC대격돌에서 위험한 초대, 운명의 바퀴 등 인기 코너를 함께 진행했다. 이 인연으로 2008년 유재석의 결혼식 때 강병규도 초대되어 참석했다.[41] 다만, 2020년 초 커뮤니티에 구독자 1만명이 돌파되었다고 알린 것을 볼 때, 구독자가 최소 1만명 이상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42] 다만 과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지금성향과 비교하면 정반대 성향 후보였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명단에 있었다. 비슷한 케이스는 개그맨 강성범, 시사평론가 김용민이 있다.[43] 게다가 연예계 데뷔 후 KBS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그였기 때문에 본인 입장에서도 KBS 입장에서도 아쉬운 일.[44] 선수 시절 통산 성적이 247경기(137선발) 56승 63패 평균자책점 4.15, 통산 WAR도 12.6으로 나름 족적을 쌓았고 예능감도 상당히 괜찮았기 때문에 야구와 예능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