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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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영소.jpg
성명
강영소(姜永韶)
이명
강영소(姜永昭), 강영소(姜永召), 강영소(姜泳韶)
생몰
1886년 2월 18일 ~ 1934년 8월 24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취룡리
매장지
시카고 어빙 파크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일생
2.1. 초년기
2.2. 하와이 이민
2.3.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2.4.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2.5. 다시 총회장에 선출되다
2.6. 시카고의 사업가
2.7. 사망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사업가.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인물.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일생[편집]



2.1. 초년기[편집]


강영소는 1886년 2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취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이력은 본인이 흥사단에 제출한 이력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부친 강명화(姜明化)와 모친 송씨 사이에는 5남 1녀가 있었는데, 강영대(姜永大), 강영소, 강영문(姜英文), 강영상(姜永商), 강영각(姜泳珏), 그리고 강봉강(姜鳳姜)이 바로 그들이었다. 실제로는 다섯째 강영렬(姜泳烈)도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력서에서 누락되었다.

이력서에 따르면, 강영소는 1898년부터 1900년까지 집에서 공부하면서 가축을 돌보고 나무를 베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증산공립소학교에서 1901년부터 1903년까지 공부했고, 1904년부터 솜 트는 일을 했다. 또한 형 강영대는 1898년부터 1902년까지 증산공립소학교에 재학했다가 1903년부터 1904년까지 서울의 한성사범학교에 재학했으며, 부친 강명화는 1900년 1월부터 증산공립소학교 부교원에 임명되어 1902년 9월까지 재임했다.


2.2. 하와이 이민[편집]


1905년 4월, 강영소는 부친의 뜻에 따라 자신의 아내와 강영대 부부, 그리고 강영각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다. 반면 강영소의 모친과 형제 일부는 증산에 남았다. 강영소가 언제 결혼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하와이 이민 이전에 국내에서 혼례를 올렸음은 확실하다. 강영소 아내의 성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후에 강영소의 아들 강오산이 사망했을 때 미국 애리조나주 보건부가 발행한 '강오산 사망 확인서'에는 모친의 이름이 ' Susoon Kang Kang'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강(姜)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5월 29일 하와이에 도착한 강영소 일가는 호놀룰루를 거쳐 오하후섬 예와농장에 배치되었다. 그는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고 예와농장에서 조직된 친목회에 참석했으며, 1906년 호놀룰루에서 조직된 공진회에도 참가했다. 그러다가 부친이 1905년 12월 미주의 공립협회 회원이 되어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했고, 형 강영대도 1906년 7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공립협회 나성지방회의 학무직을 맡았다. 막내 강영각 역시 1909년 7월 미국 본토로 옮겨 캘리포니아 남부 리버사이드 근처 업랜드의 소학교에 진학했다.

반면, 강영소는 하와이에 오래 머물렀다. 1907년 9월 하와이 각처의 한인단체들이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었을 때, 강영소는 총무와 서기 등을을 맡았다. 뒤이어 1909년 2월 미주의 공립협회와 한인합성협회가 국민회로 통합되었을 때, 하와이 측의 발기인이었던 그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총무가 되었다. 이후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발행한 <신한국보>의 사무 겸 재무를 도맡았으며, 한인식산흥업회사의 서기로도 활동했다. 그는 하와이 교민사회에서 <신한국보>가 지니는 의미를 강조하며, 그 유지와 확장을 촉구하는 '기념일기사(紀念日記事)'라는 글을 '창해소년(滄海少年) 강영소'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이력서에 그가 글씨와 그림을 잘하고 부기에 능통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때, 그는 단체나 회사의 행정 사무에 적합한 인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강영소는 1906년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1907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하와이의 각지 청년회 모임에도 적극 참가했다. 그리고 일본 유학생들의 모임인 대한흥학회의 학보를 받아보며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듯 많은 일을 맡은 그는 건강을 해쳤고, 1910년 5월 하와이지방총회와 신문사의 직책을 뇌병으로 인해 사임하고 10월에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2.3. 독립운동에 뛰어들다[편집]


1910년 10월, 강영소는 미국 본토로 이주해 샌프란시스코의 북미지방총회관과 신한민보사를 방문한 후 로스앤젤레스로 내려가 거주했다. 이때 부친 강명화는 강영대와 강영각이 업랜드 공립소학교에 재학하였기 때문에 업랜드에 정착했으며, 그해 12월 1911년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강영소는 업랜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다가 1911년 5월 신한민보사 총무로 초빙되어 샌프란시스코로 옮겼고, 7월에는 하와이에 있던 부인과 딸 강단희(姜檀姬)를 불러들였다.

강영소는 대한인 국민회의 일도 지속하여 1911년 8월 북미지방총회 나성지방회에서 이름을 바꾼 상향지방회 재무에 선임되었고, 이어 중앙총회의 서기직을 겸임했다. 또한 강영소는 1910년 11월 2일에 '창해소년'이라는 필명으로 국민회 회원들이 독립군의 선봉이 되어야 한다는 칼럼을 신한민보에 게재했고, 11월 9일엔 미주 교포들의 잡기 습관에 대한 비판을 하는 글을 게재했으며, 12월 14일엔 민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기숙사 건립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다가 1912년 6월 신한민보사를 퇴사한 강영소는 대한인 국민회의 서기로 계쏙 일하는 동시에 상향지방회의 대의원과 학무원을 겸직했다. 또한 1913년에는 한인 교회 청년회 회장을 역임했고, 1914년에도 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13년 6월 아들 강오산을 낳았다.

강영소는 미국 본토에서 학업에 전념하는 형제들에 비해 정규교육을 이수하지 않고 국민회 등 교민단체 활동에 전념했고, 그 대신 독학으로 상당한 학식을 획득했다. 이무렵 안창호를 만난 강영소는 그의 협력자로 자처했고 1913년 5월 13일 자신의 셋집인 샌프란시스코 페리 가에서 안창호가 주최한 흥사단 창립식을 개최하게 했다. 흥사단은 민족 부흥을 위해 민족의 힘을 양성할 것을 강조하고 민족 구성원 개개인이 무실, 역행, 충의, 용감에 힘쓸 것을 주장하면서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조직된 단체였다. 흥사단 발기인회 주무는 정원도였지만, 마침 그는 자리를 떠나 있었기에 강영소가 대리를 맡아 처리했다.

이어 1913년 12월 창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강영소는 흥사단 단우번호 2번으로 참여했고 평안도를 대표하는 창립인사로 알려졌다. 이후 그의 형제들도 뒤따라 흥사단에 참여했는데, 특히 강영대는 22번 단우로서 창립 초기부터 전권기초위원과 이사부원으로 활동했다. 강영소는 1914년 2월 대한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는 총회장 이대위를 보좌하며 북미지방총회를 이끌었다. 훗날 경기도 창립위원장 홍언은 강영소가 별세한 뒤 그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사람이 다 말하기를 강영소는 미주, 하와이 국민회에 공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공이 있다면 자기 할 일 하고 간 것 뿐이라. 그런고로 가만 그의 성품을 생각하나니, 그는 공심이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아울러 사무처리에 능숙하여 동료들이 다 신뢰하였고, 또 천성이 온유, 겸손하여 일찍이 동료와 충돌한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장점이며 내가 그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1914년 8월 29일, 강영소는 북미지방총회의 국치기념일 행사에서 '합병의 원인'이라는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국망의 원인은 한국의 의뢰심과 일본의 야심과 함께 우리 인민의 무관심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인민의 능력을 배양하고 애국심을 길려 치욕을 씻을 날이 올 때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북미지방총회와 흥사단, 한인교회 등 여러 일을 맡았던 강영소는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1914년 9월 북미지방 총회에 3주간 휴가를 내고 새크라멘토에서 휴양했다. 그러나 그는 1915년에도 역시 북미지방총회 총무를 맡아 총회장 이대위를 보좌했다.


2.4.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편집]


1916년 1월 20일에 실시된 1916년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선거에서, 강영소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강영소는 1월 25일에 거행된 총부회장 취임식에서 다음과 같은 선서문을 봉독했다.

나 강영소는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의 회장의 직을 맡은 바 거룩하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사랑하는 동포의 뜻을 의지하여 본회 헌장을 보호하며 우리 동포의 복리(福利)가 되는 일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건국기원 4249년 1월 25일


강영소는 총회장을 맡기 직전에 한인교회 청년회 회장을 그만두고 학문국장을 맡았고 홍언이 그를 대신해 청년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해 북미지방총회에서는 2월 26일에 개최된 대의원회를 통해 사업계획 14개조를 결정했으니, 총부회장 선거조례 개정, 미주와 맥시코 채류 한인의 인구와 사업의 조사, <신한민보>의 발간 유지와 관련된 사항, 미주 한인단체에 대한 북미지방총회의 인가 문제, 미국에 입국한 동포의 대한인 국민회 입회건, 미국 동부지역 한인과의 연계, 총회관 가옥경비 상환건, 국어교육의 실시와 실업부의 설치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북미지방총회가 가장 중시한 것은 종종 휴간되는 <신한민보>의 유지 계간과 동포의 인구 및 산업조사, 국어교육의 실시, 동부 한인과의 연게였다.

실제로 신한민보는 1916년 1월에 한 차례도 간행되지 못했고 2월에는 2회, 3월에는 1회 간행에 그쳤다. 이에 강영소가 주관한 대의원회는 신문의 매주 1회 발행을 강조하며 북미지방총회 임원회의 신문 참여를 규정했다. 또한 4월 6일자 신한민보에는 강영소 명의로 신문의 정기 간행이 되지 못한 이유와 함께 신문의 유지 발전을 약속하는 '본보계간사'가 게재되었다. 또한 미국 이민국허가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신도동포주의조례를 제정해 상하이나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오는 동포들을 정비하고자 했다. 또 장인환의 가석방을 추진했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각종 민족단체들을 허가받았다.

강영소는 여기에 총회장으로서 각 지역을 순방하면서 동포들에게 국민회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고, 순행기를 신한민보에 연재하여 동포들의 현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새롭게 미국에 들어오는 동포들에 대한 관리에도 힘을 기울였다. 1916년 10월 상하이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입국한 한국인 학생이 신분을 망각하고 배에서 중국인 노름판에 어울렸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다. 이에 강영소가 주관한 북미지방총회는 한국인들의 명예를 손상시킨 책임을 물어 그를 상하이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이 시기 매우 불행했다. 1916년 4월 4일, 딸 강단희가 인후병에 걸렸다. 아이는 이후 열흘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4월 14일에 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당시 강영소는 신한민보 발행 건으로 사무실에서 밤을 새다가 이튿날에야 병원으로 갔으나 아이는 이미 죽었다. 딸을 매우 사랑했던 그는 이 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아 병을 얻어 총회와 신한민보사의 공무를 1주일 이상 보지 못했다. 또, 그의 부인도 딸이 죽기 전에 수술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재진찰 결과 대장과 신경에 문제가 있어 1916년 12월에 다시 입원했다.

강영소는 가정 일로 총회장 선거에서 출마하지 않으려 했지만, 1917년 1월 23일에 실시된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선거에서 255표 중 211표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그러자 강영소는 바로 대의회에 사임원을 제출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2차 사임원을 제출했다. 그럼에도 또 거절당하자, 그는 3차 사임서를 제출했고, 결국 대의회는 이를 받아들이고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총회장을 역임했던 이대위를 다시 총회장에 선출했다. 이무렵 칠레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던 부친 강명화는 아들이 힘든 와중에도 또다시 총회장에 선출된 것에 격분해 안창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전략) 영소의 병든 몸은 형역통찰(兄亦洞悉)이나 이 아이의 천성이 진솔하여 상대를 즐겨 따르므로 타인의 농락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병든 중에 3,4년을 홀로 힘썼으니 그만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작년만 해도 회장 투표하기 전에 형(강영대)이 선출되고 영소는 아니되면 좋겠다고 하였으나 형이 남북방으로 순행해 영소가 공무를 맡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사람들이 말한 까닭에 어린 아들이 작년에 회장을 맡은 것입니다.

이 아이의 공심은 유천가질(惟天可質)이라 공무에 몰두하느라 가정일을 돌보지 못한 까닭에 여아의 병세가 위중함에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끝내 비참하게 죽는 걸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자식 놈의 부인의 오장에 병이 생겨 발작함에도 다시 공무로 돌아갔습니다. 신문 간행은 영소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맡을 수 있는데, 영소가 병으로 죽은 후에야 다른 사람이 대신할 겁니까? 오형( 吾兄, 안창호를 지칭함.)이 가족을 멸하는 독술을 부리는 게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영소는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을 떠나든지 해야 쉴 수 있을 겁니다. 전 형의 독술을 압니다. 작년에 회장을 담당했으니 금년에는 다른 사람이 담당하고 영소는 회장 총무로서 시무하여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사무원, 서기, 회장 등 3,4년 동안 영수가 홀로 다 맡았지 다른 사람들은 도와주질 않고 이름만 올릴 뿐입니다. 영소가 금년까지 또 일을 맡다가 영소의 자식이 죽어버리고, 영소가 결국 병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면 형은 저와 한 하늘에 해와 태양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습니다. 저는 형을 살인범으로 지목할 것이며, 기필코 제 손으로 보복할 것이니 형은 거주하는 곳의 방비를 잘하셔야 할 겁니다.


강명화는 후에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고 여기고 1917년 6월 안창호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강영소가 공무에 바빠 집안일을 살피지 못하고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7, 8시에 신문사로 출근했다가 밤 11시나 12시에 귀가하여 딸의 병도 몰랐다고 밝혔다. 또 아내의 수술 이후 공무를 사임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2.5. 다시 총회장에 선출되다[편집]


그 후 강영소는 업랜드로 내려갔다가 1918년 3월 9일 홍사단 단우 문영운과 함께 리버사이드 재류동포들을 만나고자 차를 타고 가다가 온타리오 근처에서 기차와 충돌하고 말았다. 이때 문영운은 사망했지만, 강영소는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고 병원에서 사흘 만에 퇴원했다. 이후 강영소는 부인과 아들을 귀국시킨 뒤 미국 동부에서 활동을 준비하다가 1919년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마침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미국에도 전해져 독립 운동의 움직임이 고조되자, 대한인 국민회 중앙초오히에서는 국제 관련 외교를 전담하면서 독립 운동의 지원과 평화회의의 교섭을 위한 모금 등을 전개했다.

그해 3월 24일에 개최된 중앙총회의 임시위원회에서는 강영소를 사무원으로 선정했다. 강영소는 독립의연금 모집과 인구 등록 등의 일반 행정사무를 주도했고 재무 일도 겸임하다가 4월 29일 중앙총회의 하와이 특파위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로 파견되었다. 중앙총회에서 하와이에 특파위원을 파견한 것은 이승만 계열이 장악한 하와이지방총회와 박용만 계열이 장악한 대조선독립단의 통합을 주선하기 위해서였다. 이 두 세력은 1910년대 중반부터 대립하고 있었는데, 중앙총회는 독립운동의 연라고가 일치된 행동방침을 마련하려면 두 단체가 화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강영소는 6월 4일 하와이에 도착해 두 세력의 합동을 주선했고 7월 18일 합동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이 합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9월에 이르러 결렬되고 말았다. 결국 강영소는 이승만에게 자제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뒤 9월 289일 호놀룰루를 떠나 10월 5일 시애틀에 도착한 후 10월 9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또다시 북미지방총회의 총회장 후보로 선출되었고 11월 20일의 선거에서 1920년도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암담했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으로 고조되었던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 운동에 대한 열기는 1920년에 이르러 악화되었고, 독립운동 자금과 관련된 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대한인 국민회의 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졌으며, 구미위원부 내부의 갈등도 고조되고 있었따. 게다가 경비 마련이 어려워져 총회 활동 자체가 축소되었고, 신한민보도 발행 회수를 줄여야 했다. 급기야 강영소는 월급의 절반만 받으며 공무를 봐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고 사망한 동포에 대한 구제와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에 대한 의연금 1,000원 지원, 새로운 지방회의 설치 등을 추진했으며, 초등교과서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강영소는 1920년 10월에 가장 많은 대의원의 지지를 받으며 1921년도 총회장 후보에 추천되었지만 이를 거부했다. 이후 1920년 12월 15일 북미지방총회 대의회에서는 처분안 제2안으로 전임 총회장 강영소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기념장을 수여햐고 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단, 그 상금 금액은 200원으로 한정되었다. 또한 1921년 2월 1일 국민회 창립 12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국민회 훈장을 받았고 국민회의 단합과 조화를 강조하는 '국민회의 오늘'이라는 강연을 했다.


2.6. 시카고의 사업가[편집]


총회장에서 물러난 뒤 국민회를 떠난 강영소는 1921년 6월 사업을 목적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는 정원명(鄭元明)과 함께 8월 1일에 회사를 창립했다. 그가 다룬 업종은 기구 상점과 식물상점, 그리고 목수 공장의 세 종류였다. 이후 그는 사업을 순조롭게 이끌어갔고 1922년 9월에 지식과 수양을 목표로 하는 '금요강의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의 하와이 호놀룰루 지국을 운영했다.

1922년 12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강혜순과 결혼하고[1] 시카고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시카고에서 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1924년 시카고 지방회의 3.1절 기념식에서 '나의 고국'이라는 연설을 한 뒤 '열 가지 답답한 사건'이라는 기록을 낭독해 현실에 대한 그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외국인에게 외교를 너무 할 줄 모르는 이의 일도 답답하거니와 동포에게 외교를 힘쓰는 이의 일이 더 답답하다. (중략) 외국 사업에 너무 냉담한 것도 답답하거니와 자신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독립이 언제 되나 물어보는 이의 일이 더 답답하다.


강영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식당을 운영하던 동생 강영상의 도움을 받으며 시카고에서 로렌스 카페테리아(Lawrence Cafeteria)라는 이름의 식당을 열었고 1925년엔 천세헌(千世憲)과 동업으로 새 식당 디버시 카페테리아(Diversey Cafeteria)를 개업했다. 강영소는 시카고에서 식당업으로 크게 성공했고, 1930년 말 형제들과 함께 '강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창립했다. 로렌스 카페테리아는 1만 6천 달러의 자본금으로 이뤄진 합자회사로 총수입이 5만 달러에 이르렀고, 고용인은 14명이었으며, 강영소의 형 강영대가 지배인을 맡았다. 또한 디버시 카페테리아는 자본금이 2만 달러, 총수입은 6만 달러였고, 고용인은 16인, 지배인은 강영소 본인이었다. 이보다 큰 규모의 한인 식당으로는 김경의 워싱턴 카페테리아 뿐이었다.[2] 강씨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는 1931년 중반 윌슨 가에 윌슨 카페테리아(Wilson Cafeteria)를 새로 개업했다. 이로서 강영소 집안은 총 3개의 식당을 경영했다.

한편 강영소는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와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 지원 활동을 벌였다. 그는 1924년 이후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의 법무, 서기, 총무, 대의원을 역임했고 1925년 4월 안창호가 미국을 순방할 때 시카고에서 환영회를 열어줬다. 또한 국민회에 자금을 지원해주면서 1930년 2월 1일 국민회 창립 기념일에 '우리 국민회'라는 연설을 발표해 국민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1928년 재민동포문제 대책강구회 위원, 국내 한인수재구제회 서기, 1929년 임시정부 임시재정후원회 위원, 1930년 국내 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시카고 공동회 발기인 겸 재무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8년 3.1절에는 '3월 1일'이라는 기사를 지어 신한민보에 발표해 3.1운동의 투쟁 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강영소는 한인교회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1924년 7월 김창준을 목회자로 한 시카고 한인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는 이사부원으로 참여했고 부인 강혜순은 주일학교를 담당했다. 이후 그는 매년 이사부원으로 선출되어 교회에 관여했고 1931년에는 이사부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건물을 매입해 시카고 한인교회에 증여하기도 했다. 또한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 설치에 가담하고 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31년 1월 11일, 강영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22회 국민회 대의원회에서 시카고 지방회 대의원 천세헌의 대리로 이 대의원회에 참석했다. 이후 1월 18일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후 환영회에 참석해 '성공을 위해 준비하자'는 연설을 발표했으며, 2월 1일 시카고에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일 행사에서도 유사한 연설을 했다. 그해 4월에는 국민회 회원들에게 의견을 묻는 '재미한인통일ㅈ촉진의견서' 작성에 가담했으며, 5월 28일자 신한민보에 '재미 한인 통일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미 한인 단체들의 통합은 이뤄지지 못했다.


2.7. 사망[편집]


1931년 8월 5일 오후 1시, 강영소는 고혈압으로 뇌혈관이 터지는 바람에 실신했다. 그는 오른쪽 반신불수가 되어 병원에서 진찰받았고, 6개월 후에 어느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퇴원했다. 이후 그는 사회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와중에 형 강영대가 경영해 오던 로렌스 카페테리아가 파산 위기를 맞다가 김경에게 인수되었다. 그리고 디비시 카페테리아 역시 강영소 사후 법정관리로 넘어갔다가 1936년 1월에 다른 사업가에게 넘어갔다.

1934년 8월 24일, 강영소는 병이 재발되어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8월 26일 오후 9시 45분, 그는 끝내 눈을 감았다. 이때 그의 나이 만 48세. 시카고 한인사회는 한장호, 강영승, 김경, 나재원, 최능익을 장례위원으로 삼았고, 영결식은 8월 28일 오후 3시 링컨 가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한승곤 목사의 주례하에 거행되었다. 태극기로 덮은 그의 관은 임초, 김경, 정태은, 나재원, 한장호, 강영승이 운구했고, 10여 대의 자동차로 묘지로 이동해 어빙 파크(Irving Park)에 안장되었다.

국민회는 강영소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총회장 빅일규의 명의로 8월 27일자로 부고를 냈고, 신한민보는 8월 30일자 기사에 그의 사망 사실을 1면 상단에 보도했다. 이어 9월 6일 자에 장례 소식과 함께 홍언의 추도사를 실었으며, 9월 13일자에는 홍사단의 추도사 및 백일규의 추도사를 게재했다. 이 추도사들은 모두 강영소가 국민회와 미주 한인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지인들이 세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다.

YOUNG SO KANG

1886~1934

IN MEMORY OF HIS UNTIRING SERVICE K. N. A.


2011년, 대한민국 정부는 강영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가족 관계[편집]


파일:강명화가족_new.png
1920년대 후반 시카고에서 식당을 경영하던 시기에 촬영된 사진. 오른쪽부터 강영대, 강영소, 강영문, 강영상. 우축 하단은 강영각.

  • 강명화(姜明化, 1868~1933): 강영소의 부친. 1900년 1월부터 1902년 8월까지 증산군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재임했고, 1905년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주한 후 공립협회에 가임하여 활동하는 동시에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2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17년부터 사업차 칠레, 멕시코, 샌프란시스코, 한국 등을 오갔다. 1933년 2월 3일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한 달만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대(姜永大, 1885~1948): 강명화의 첫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에 가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강영소와 함께 대한인 국민회 및 신한민보에서 활동했고 191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원을 맡았다. 이후 1929년 11월 시카고에서 동생들과 함께 카페테리아 사업에 동참하여 1930년 말 강씨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의 지배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강영소가 사망한 뒤 사입이 부진하자 결국 다른 사업가들에게 넘겨주고 1933년 12월 대한인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흥사단 사업에 적극 참여해 독립금, 국방 공채 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을 꾸준히 지원했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문(姜英文, 1888~1965): 강명화의 셋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이 하와이로 이주했을 때, 고향에서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 봉강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1914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하여 9년만에 가족들과 재회했다. 이후 시카고에 자리를 잡아 하워드 식당을 경영했고 형과 함께 시카고 한인 교회를 이끌었다. 1938년 단우번호 299번으로서 흥사단에 입단했고, 1946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흥사단 미주위원부 서무원으로서 활동했다. 1947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을 맡았고, 1961년과 1962년에 이사부장을 맡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의 여동생 박영복과 결혼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상(姜永商, 1892~?): 강명화의 넷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1919년 대한인 국민회 오하이오 주 지방회 발기회원으로 참여했다. 형 강영소와 함께 국민회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고, 재미한인사회에서 임시정부 재원의 대부분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형제들과 함께 시카고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1944년 이후로 소식이 끊겼고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201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 강영렬(姜泳烈, ? ~ 1922): 신한민보 1922년 2월 9일자 <강영문 씨의 참보> 기사에 따르면, 강영렬은 강명화의 여섯 형제 중 다섯 째이며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2년 경에 독립군끼리 이념 문제로 대립하며 서로를 죽이는 것에 절망해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동족을 죽일 수도 없으며 그들에게 죽기로 애원하니 자살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고 한다.
  • 강영각(姜泳珏, 1897~1946): 강명화의 여섯번째 아들.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12살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업랜드 소학교와 클레아몬트중학교를 재학했고 포모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0년에 하와이로 돌아가 와히아와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1925년에 영문격월간 '한인소년'을 창간했다. 이후 포모나 대학을 졸업한 뒤 형 강영소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국민회에 가담해 여러 잡무를 맡았고, 1931년 흥사단에 입단해 단우 번호 261번을 획득했고 1944년에 제12반 하와이 반장이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쓰일 자금을 지원하다가 1946년 2월 4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그의 유족이 현재까지 살아있으며, 그 중 딸 수산 강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가문이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을 통보받았다.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강봉강(姜鳳姜, ?~?): 강명화의 막내 딸. 독립운동가 양우조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1] 첫번째 부인은 조선으로 귀국하던 중 선상에서 사망했다.[2] 워싱턴 카페테리아는 1930년에만 13만 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벌었고 고용인은 4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