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희(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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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제희.jpg

성명
강제희(康濟羲)
본관
신천 강씨
생몰
1891년 6월 13일 ~ 1978년 8월 25일
출생지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운평동[1]#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2. 만주에서의 독립 운동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재령
1978년 건국포장이 직접 원봉 강제희에게 수여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강제희의 아들 강홍주 목사에게 대리추서되었다. 강제희의 사망 이후 강제희의 자녀 강홍주 목사가 독립유공자의 유족 대표로서 광복회원으로서 독립유공자 발굴 및 유족발굴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현재 강홍주의 사망이후 강제희의 자녀 강신애가 광복회원이나 요양중이다. 그래서 강제희의 손자 강영환이 광복회원 강신애를 인천 서구에서 보필하며 강제희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2. 생애[편집]


현재 서울대(경성전문대)룰 졸업하고 일제의 특채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에 돌아와 대한민국의 독립을 준비하였다.


2.1. 3.1 운동[편집]


강제희는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운평동 출신으로, 창성 읍내교회 장로였다. 1919년 초 이승훈으로부터 밀파된 의주군 월화면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이 그를 찾아와 3.1 운동에 관한 밀지를 전달했다. 강제희는 거사를 주도할 경우 닥치게 될 일신의 문제 때문에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주위의 계속된 권유를 마침내 받아들여 전창교회로 가서 시위 계획을 짰다.

첫째, 읍내의 거사 날짜는 4월 1일 오전 10시로 한다.

둘째, 읍내 회집 장소는 서문 밖 들판으로 한다.

셋째, 느즐령을 경계로 고개 밖 4개 면과 고개 안 5개면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거사하되 고개 안 5개면은 읍내 집회에 동원하고, 고개 밖 4개 면은 대유동교회가 주동하는 대유동 집회에 동원한다. 전창교회는 영내 5개 면의 동원 책임을 진다.

넷째, 대중 동원을 위해 각 면에 동원 책임자 5명씩 선정하여 밀파하고, 이들 동원책임자는 각 부락에 잠입하여 4월 1일 아침 일찍이 읍내 집회장소로 모이도록 이 집에서 저 집 릴레이식으로 전령을 전달한다.

다섯째, 당일 사용할 태극기 등은 읍내에서 준비하여 둘 터이니 사전 발각될 우려가 있으므로 대중들은 소지하고 다니지 말 것.


이윽고 4월 1일이 도래하자, 강제희는 오전 9시 50분에 보통학교 학생 편으로 헌병 분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발송했다.

우리는 오늘 독립선언 축하식을 위하여 모인다. 우리 행동은 어디까지나 질서정연하고 생명 재산에 대하여 일체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이 명시하고 있는 바다. 만일 그대들이 경찰권에 자세하고 부당하게도 우리 집회를 제지 혹은 간섭하려 든다면 어떠한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그때에는 책임은 그대들에게 있을 것이므로 미리 알려 둔다.


정각이 되자 읍내와 각 면에서 동원되어 모인 군중 2,000여 명이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이 시위행렬을 막아선 헌병분대장이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협상할 필요 없다. 우리 방침은 이미 그대들에게 보낸 통고장에서 밝혀 둔 바가 있으니 그것과 조금도 틀릴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보병과 헌병이 합세하여 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군중은 돌을 들어 대항했다. 2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4~5명이 다쳤다.

한편 4월 1일 대유동교회는 전창교회의 연락을 받은 즉시 대유동에 1,000명 가량의 군중을 동원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의 일부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자 헌병은 보병과 함께 발포하여 해산시켰다. 그리고 광산 노동자의 봉기를 두려워하며 병력을 증강했다. 속칭 ‘지경’이란 광산지대의 장터에서는 4월 4일 천도교인 중심의 시위투쟁이 벌어졌고, 5일에는 기독교인 중심의 투쟁이 벌어졌다. 4월 5일 오전 11시 청산면 학송리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300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헌병대와 충돌하여 6명이 죽고 25명이 다쳤다. 4월 6일 오후 2시에는 청산면 청룡리에서 천도교인 약 70명이 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헌병대와 충돌하여 7명이 죽고 5명이 다쳤다.

이무렵, 강제희는 4월 1일 시위를 주동하다가 부상을 입고 피신해 4월 2일 밤 만주로 망명했다.


2.2. 만주에서의 독립 운동[편집]


만주로 망명한 강제희는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및 안동현(安東縣) 등지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8월에 일제 토벌대가 만주로 오자 관전현에서 무리를 모아 이를 습격해 창성헌병대의 헌병 1명을 사살한 뒤 도주했으며, 1919년 말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창성군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하여 보고했다.

1920년 1월 임시정부 국무령 1호에 의해 임시정부의 연락기관인 동시에 재정 조달기관인 연통제(聯通制)가 조직되자, 강제희는 그해 1월 12일 연통제에 가담해 창성군의 군감으로 임명되었으며, 창성군에서 압록강 건너 90리 거리에 있는 관전현 향로구에 창성군 임시군청을 개설하고 창성군 내에 사람을 밀파해 하부기구를 편성했다. 이때 강창을(姜昌乙)·선우황(鮮于晃)·강제은(康濟殷)·강이달(姜利達)·강용철(姜容澈)·김홍빈(金洪斌) 등 수십 명을 창성군의 연통제 조직원으로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성군 일대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했고,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한일관계사> 등을 국내에 배포했다.

이렇게 약 2년간 관전현과 창성군에서 활동한 그는 창성 출신 이용익의 밀고로 창성군 내 지하 독립 투쟁을 벌이던 300여 명이 체포되자 북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북만주의 한교회장(韓僑會長)이 되었고, 동녕(東寧)·목릉(穆稜)·밀산(密山) 등지에서 무장단체와 협동하여 국내 일경주재소 습격 등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이후 해방이 찾아오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김일성의 븍한건설유혹을 마다하고 그 날밤 남한으로 오게 되었다. 독립운동으로 재산을 헌납한 강제희는 군산과 울산 인천 등지에서 장사를 하며 여러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울산 국민회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1978년 8월 25일에 울산 울주 상북교회에서 사망했다. 원봉 강제희는 대한민국 대전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손자 강영환은 만세운동 당시 즉사한 독립유공자 박찬소의 유해발굴을 하고 있으며 강제희와 같이 독립운동 하였지만 아직 훈장이 전달되지 않은 독립유공자 문장규 등 여러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고 있다.

최근 강영환은 묘비없이 50년을 넘게 묻히신 독립유공자 이준명 애국지사의 유해를 남원에서 발굴하여 대전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준명 지사님을 모셨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8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상훈법 개정으로 1990년 강제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위 사실들은 독립유공자 원봉 강제희의 아들 강홍주 목사가 강제희의 말씀을 받아 적어서 국가보훈처에 제공하였다.

[1] 신천 강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