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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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투표 아이콘(흰 테두리).svg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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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
2
민주통합당
문재인

3
통합진보당
이정희
사퇴
4
무소속
박종선

5
무소속
김소연

6
무소속
강지원

7
무소속
김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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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姜智遠


파일:강지원 변호사.jpg

출생
1949년 3월 17일 (75세)
전라남도 완도군
학력
서울재동초등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 / 학사)
소속 정당

[[무소속|
무소속
]]

경력
제12회 행정고시 합격
제18회 사법시험 합격
제8기 사법연수원 수료
전주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성폭력 수사·재판 디딤돌·걸림돌' 심사위원장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장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지역분과위원장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초대 상임대표
가족
배우자 김영란, 슬하 2녀
외부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4. 여담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법조인, 사회운동가이다.

2. 생애[편집]


1949년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7남매 중 넷째(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강대혁(姜大爀)은 전라남도 목포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후 광양·완도·완도 등지의 군수전라남도청, 전남상공회의소 등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했고, 모친 이효임(李孝任)은 경성사범학교[1] 출신으로 광주 관내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7남매 중 강지원을 포함한 5명은 서울대학교에 진학했으며, 나머지 2명은 각각 이화여자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에 입학한 수재 집안이다.

서울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경기중 3학년 때 한 문제 차이로 경기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입학했으며 1967년에 졸업(63회)했다.[2]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해 1972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에 제12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재무부와 관세청에서 근무하였다.

부산세관 공무원으로 재직 중 사법시험에 관심을 가졌고,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3] 이후 사법연수원을 8기로 수료한 뒤 검사로서 1978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지방검찰청서울고등검찰청 등의 검사로 활동했다.

사법연수원 성적까지 합산해서 1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이 아닌 전주로 발령이 났다. 그 이유는 중앙정보부에서 강지원의 학생운동 전력을 문제삼았고 결국 전주지방검찰청으로 부임했는데 첫 사건이 소년사범 사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운명으로 이 때부터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검사로 재직중이던 1989년,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맡게 되며[4] 청소년 선도운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1997년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검사장으로 승진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자리인 재경지청장 보직에 동기들이 진출할 때도 그는 청소년 문제에 전념하기 위해 2선이나 한직법무연수원, 사법연수원서울고등검찰청 근무를 자청했다.

또한 검사로 재직중이던 때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꼭지 이경규가 간다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5]

2002년 검찰을 떠난 후[6], 변호사KBS 라디오EBS, YTN등을 통해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와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장,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지역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2년 9월 4일, 한국 최초의 매니페스토(정책중심선거) 후보가 되겠다며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했다. 결과는 53,303표, 지지율 0.17%를 얻고 3위로 낙선. 순위만 놓고 보면 꽤 선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선거는 한국 대선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양강 구도(박근혜 vs 문재인)였기 때문에 강지원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 중 18대 이전의 대선에서 가장 적은 득표를 한 3위 후보는 3위 후보는 16대 대선권영길인데, 957,148표/3.93%로 강지원의 득표수 기준 약 18배, 득표율 기준 약 23배에 달한다. 강지원을 다른 역대 '3위 후보'와 비교하기에는 체급 차가 민망한 수준. 그리고 이후 대선까지 보면 18대 대선 다음으로 극명한 양강 구도로 치러진 20대 대선에서 3위 심상정의 득표가 803,358표/2.37%로 득표수 기준 15배, 득표율 기준 14배로 격차가 줄어들었다고 해야할지조차 의미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심상정은 19대 대선에서는 5위였지만 2,017,458표, 6.17%를 득표했으니 자릿수가 두개나 차이나서 비교가 민망해질 지경이다.) 선거 구도로 설명하자면 원래 한국의 대선에서는 양당 후보(1~2위) 이외에도 제3지대 정당 후보나 진보정당 후보, 또는 무소속이거나 선거용 급조정당이라 해도 상당한 정치적 존재감을 가진 후보가 몇명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후보가 한명만 나와도 3위, 몇명 더 나오면 3~4위나 3~5위 정도를 차지하고 그 뒤를 미미한 존재감의 군소후보들이 잇게 된다. 하지만 18대 대선에서는 이례적으로 양당 후보 외에는 약간의 정치적 존재감을 가진 후보조차 나오지 않아 거품급 군소후보들 중 하나인 강지원이 어부지리로 3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7]. 사실 강지원의 0.17% 득표는 거품후보 치고도 별로 좋은 득표가 아니다. 허경영이 17대 대선에서 96,756표(0.4%), 20대 대선에서 281,481표(0.83%)를 득표한 것은 오랫동안 개그에 매진한 결과로 인정해주더라도 16대 대선에서 김길수가 단발개그로 받은 51,104표(0.2%)와도 비슷한 수준에 불과한 것. [8][9]

3. 가족 관계[편집]


부인은 대한민국의 최초 여성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전 대법관이다. 이른바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제안한 그 사람 맞다. 김영란이 강지원의 옆 방에 근무하는 검사의 검사시보로 오면서 호감을 갖기 시작했고 '평생 웃게 해주겠다'고 해주며 결혼에 골인했다. 검사-판사의 결혼은 당시에 큰 화제였으며 김영란이 부서 회식이 있는 날에는 처음엔 데리러 갔다가, 그 다음엔 합석을 하게 됐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회식에 강지원이 김영란 대신 참석했다고 한다. 법조인들이다보니 부부싸움 때도 논리를 바탕으로 치열하게 전개 및 반박한다고 밝혔다.

'재능을 살리자',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딸 2명을 모두 대안학교에 보내고 수능을 거부한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큰딸은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디어아트와 광고업무를, 둘째는 영화촬영 일을 하고 있다. 강지원은 '부모로서 부모가 원하는 길을 강요하지 않고 하고 싶은 분야를 스스로 찾아가게 한 것, 그거 하나는 잘했다고 믿는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4. 여담[편집]


한편, 최진실의 前 남편인 조성민과의 이혼 및 가정폭력 소송에서 여성운동계와 함께 연대하며 최진실을 변호하기도 했다. 최진실-조성민의 송사 이후 친족법이 개정되는 데에 적지않은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MBC 이브닝뉴스 앵커로 활동하기도 했다. 뉴스쇼로 개편되면서 합류하였는데 개편을 거치며 2013년 연말에 하차했다.

2016년부터 4년여간 KBS2 <제보자들>에 스토리 헌터로 출연했고, 2017년 9월 12일,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노력과 맞물려 같은 날 출범한 국방부 적폐청산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작은 결혼식에서 주례로 초청받아 주례를 서 준적이 있다.


5. 소속 정당[편집]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2
제18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무소속|
무소속
]]

53,303 (0.17%)
낙선 (3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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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울대학교 사범대학[2] 경기고 재학 당시 태권도부 학생과 보이스카우트 학생 간 싸움이 벌어졌고 이 중 1명이 사망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3] 합격 동기로 김희옥 KBL 총재가 있다.[4]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근무 당시 정치적 사건으로 계속 윗선과 부딪히다가 한직인 공안부로 가게 됐고 서울보호관찰소장을 겸직하게 됐는데 이 곳에서 본격적인 적성을 찾았다고 한다.[5] 이 당시 '네가 연예인이냐'면서 법조계 내에서도 좋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6] 사표를 낼 당시 청와대에 유착하고, 줄 대고, 눈치 보는 검사가 검찰 내부의 3적이고 이들이 검찰을 망쳤다고 일갈했다.[7] 진지하게 평가하자면 강지원의 3위는 당시 한국의 진보정당이 겪고 있던 혼란상 덕분이라 볼 만 하다. 독자정당/독자후보 노선을 중시하는 PD계진보신당 계열의 분열-합류-재이탈 등등 갈팡질팡 행보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통합진보당에 합류했던 주류는 선거 직전 진보정의당을 차려 나왔지만 결국 자기네 대선후보를 출마시키지는 못했고, 이 행보에 따라 움직이지 않던 비주류는 (어차피 당선 가능성은 원래 없었지만) 유의미한 득표율을 얻을 가능성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굳이 단일화를 시도하지도 않고 그냥 두명의 후보(김소연, 김순자)를 각각 따로 내놓았다. (만약 김소연, 김순자의 표가 합쳐졌다면 강지원은 그나마도 이기지 못하게 된다. 결국 강지원 역시 소수파의 소수파의 소수파가 가지는 미세한 조직력조차도 이기기 힘든 철저한 개인단위의 군소후보였던 것.) 반면 통합진보당의 주도권을 잡고 대선후보 이정희를 후원하던 NL계는 PD계에 비해 독자후보를 통한 대선완주를 덜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것은 문재인 지지 선언 및 후보 사퇴라는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결국 16대 이후 대부분의 대선에서 적어도 2~3%의 표는 꾸준히 얻어가던, 그래서 다른 제3지대 후보가 없을 경우에도 3위가 군소후보에게 넘어가지는 않게 하는 벽 역할을 하던 진보정당 후보가 유독 18대 대선에서만 등장하지 않은 것은 해당 대선이 극명한 양강구도로 진행됨에 따라 제기된 사표론의 영향도 있지만 위와 같은 정세적 상황의 영향도 있다는 것.[8] 사실 강지원은 그 이전 유명세가 있었기에 그나마 0.2%라도 받은 것에 가깝긴 하다. 물론 원내 3당 소속의 이정희 후보의 사퇴가 아니었다면 3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9] 초기에는 4~5%정도의 지지율을 자랑하여 박근혜 측에서 보수표를 지키기 위해 단일화 상대로 여기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양강 분위기에 박근혜로 보수가 모두 집결하여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