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석

덤프버전 : r

이 문서의 r1 버전에 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저작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포함된 버전으로 문서를 되돌리거나 링크하는 행위는 금지됩니다. 만일 되돌리거나 링크할 경우 저작권 침해로 간주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전 백산무사단 제2부 외무원
강진석
康晋錫


파일:강진석.jpg

이명
김재룡(金在龍), 한성룡(韓成龍)
본관
신천 강씨
출생
1890년 12월 29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용산방 하리[1][2]
(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일동 하리마을)
사망
1942년
사망지 미상
가족
아버지 강돈욱, 어머니 위돈신
남동생 강용석, 강창석, 여동생 강반석
매제 김형직
조카 김일성, 김철주, 김영주
경력
평양 청년회원
1919년 12월 ~ 1920년 9월 26일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제2부 외무원
1920년 12월 20일 ~ 1921년 4월 14일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서훈 갈등
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김일성의 큰외삼촌이라는 점 때문에 현재까지 서훈 박탈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2. 생애[편집]


1890년 12월 29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용산방 하리(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일동 하리마을)에서 아버지 강돈욱(康敦煜)과 어머니 위돈신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영 교수의 <김일성 열전>에 따르면,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에게는 아들로 '강진석' '강용석', '강창석'이 있었고 막내 딸로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있었다. 이 중 장남인 강진석은 즉 김일성의 큰외삼촌이다. 일본 내 지한파 연구자인 와다 하루끼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도 강진석은 김일성의 외삼촌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아버지 강돈욱은 1929년 4월 30일 조선총독부 평안남도지사 소노다 히로시(園田寬)로부터 비료매매업 면허(매매 제403호)를 취득해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대타령리(現 평양시 보통강구역 유경1동) 742번지에서 비료매매업을 경영했고, 평양부 교외에 기백창덕학교(紀白彰德學校)를 설립해 1937년 8월 14일 이사에 취임해 활동하던 인물이다.

1919년 음력 11월 중순 평양부 신양리(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에서 김용배(金用培)가 독립운동 후원을 목적으로 청년회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해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 음력 7월에는 고향인 대동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이춘성(李春成)과 만나 그와 함께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에서 박봉욱(朴奉煜)과 홍치룡(洪致龍)으로부터 각각 군자금 150원과 50원을 모집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7일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임강현(臨江縣) 모아산(帽兒山)[3]에 가서 그곳에서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4] 제2부 서기로 활동하고 있던 김준삼(金俊三)[5]을 만나 백산무사단에 입단했다.

그렇게 1920년 12월 20일 백산무사단 제2부 외무원에 임명되었고, 1921년 2월 27일 상부로부터 김준삼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아 3월 22일 군자금 모집원 사령서와 자동권총 1정, 실탄 25발, 경고문 50매, 군자금 영수증 용지 100매, 여비 30원을 지참하고 조선에 잠입했다. 그는 이튿날 평안북도 자성군 장토면 호하동(現 자강도 중강군 호하노동자구)에 있던 독립단 군자금 모집원 신훤(申楦)[6]을 찾아가서 백산무사단에서 군자금을 모집한다는 취지를 설명했고, 신훤에게서 승낙을 받아냈다.

4월 2일, 강진석은 신훤과 함께 평안북도 자성군 여연면 건하동(現 자강도 중강군 건하리)에 있던 양기조(梁基祚)의 집을 습격해 군자금 100원을 지급받고, 다시 평양부로 이동했다. 4월 14일 평양부에 도착한 신훤·이경임(李敬妊)·신근(申槿)·유사로(兪似老)·이정선(李丁善)·황용호(黃龍浩) 등 일행 6명과 함께 평양부 염점리 84번지(現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김준모(金俊謨)의 여인숙에 투숙했다. 그러나 그해 4월 24일 이들의 정보를 입수한 평안남도경찰부와 평양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출동했고, 격투 끝에 전격 체포되었다. 그후 1921년 8월 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공갈, 가택침입,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 등이 적용되어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았고, 평양형무소와 경성형무소에서 7년 11개월 17일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28년 3월 28일 경성형무소에서 가출옥한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강진석이 1942년 사망했다고 기술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3. 서훈 갈등[편집]


2012년, 국가보훈처는 강진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2016년 6월 강진석이 김일성의 외삼촌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자, "6.25 전쟁을 일으키고 무력도발을 서슴지 않는 등 한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자의 외삼촌에게 건국훈장을 서훈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국가보훈처2012년 67주년 광복절을 맞아 애국지사 198명을 포상할 때 강진석을 애국장 수훈자에 포함시킨 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관보와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에 수훈 사실을 포함시켰지만 2016년 애국자 수훈자 명단에는 포함시키지 않은 점을 들어 "최근 1년 사이에 강진석이 김일성의 외삼촌임을 뒤늦게 알고 이를 숨기기 위해 조직적으로 은폐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그간 정부가 북한 정권 참여자는 물론 최고 권력자의 친인척에게도 서훈한 전례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검증 부실로 인한 '사고'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지난 2012년 강진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는데 이후 지난해 9월 '어떻게 김일성의 외삼촌을 서훈 대상자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는 민원이 접수돼 내부 검토를 거친 결과 서훈 대상에 해당한다는 결론이 났다. 북한 정권(그의 조카 김일성)이 성립되기 전에 이와 무관하게 사망하여 북한정권의 성립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으므로, 지금도 서훈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은폐 의혹은 사실이 아니며, 지난해 9월 제기된 민원에 따라 내부 검토 작업을 거치면서 일시적으로 내용을 뺐던 것인데 서훈 유지 결정이 났기 때문에 다시 업데이트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강진석의 건국훈장 서훈에 대한 논란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고, 박승춘 보훈처장은 "김일성 부모에게도 훈장을 검토할 거냐"는 질의에 "검토하겠다"고 답했다가(...) 여론의 맹비난을 받았고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박승춘 보훈처장의 해임을 촉구했다.

결국 2016년 6월 29일, 국가보훈처는 강진석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을 빠른 시일 내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 대해 일각에서는 "강진석이 비록 김일성의 외삼촌이긴 했지만 독립운동을 했던 건 엄연한 사실인데 건국훈장을 추서해놓고 박탈하는 건 지나치지 않느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연좌제를 적용하느냐"고 반박했고, 반공주의가 여전히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음이 이번 사건으로 드러났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2018년 10월, 자유한국당홍문표 의원은 국가보훈처와 행정안전부에서 자료를 받아 확인한 결과 2012년 강진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애국장이 취소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며, “김일성의 친족을 대한민국 정부가 훈장을 서훈 했다는 사실은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온 애국 순국선열사들에 대한 모욕이며 더욱더 충격인 것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까지 방치한 국가보훈처행정자치부는 어느 나라 조직이고 공무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

홍문표 의원은 2019년 2월 26일 유관순의 서훈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격상시킨다는 정부의 발표를 환영하면서도 강진석에 대한 건국훈장 서훈을 조속히 박탈할 것을 촉구했다. #

이러한 논란은 북한이 강진석에게 "선생님"이란 칭호를 붙이고 떠받들고 있는 사실 때문에 더 거세진 면도 있다. 김일성대학 초빙교수였던 이서행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에 따르면, 북한에서 '선생'의 이름은 최고 존엄의 표현이며, 김일성 아버지한테도 김형직선생이라고 하듯 외삼촌 강진석도 선생이라고 부른다고 증언했다.# 더군다나 북한에서는 집단성과 동질성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김씨일가를 제외하고는 님이라는 호칭을 잘 붙이지 않는다. 때문에 "북한이 떠받드는 김일성의 친족을 우리까지 덩달아 떠받들어야 하느냐"는 비판이 일었다.

강진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적극 협조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진정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한 독립운동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7] 비록 1928년 이후로 행적을 알 수 없고 김일성이나 북한 정권 수립 후 도움을 준 행적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8] 그러나 불행히 조카를 잘못 두는 바람에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서훈 박탈 논란에 휩쓸리고 있으니, 사돈인 김형권[9]과 함께 쌍으로 안타까운 인물들이라 할수 있겠다.


4. 기타[편집]


북한이탈주민으로 대한민국에 거주중인 강명도는 10촌으로, 정확히는 강진석의 8촌 동생 강영겸(康永謙)의 손자이다. 건국훈장 수여 당시 강명도가 대신 가족을 대표해서 훈장을 수령할 수 있다고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02-14 12:57:32에 나무위키 강진석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인근의 대타령리와 함께 신천 강씨 집성촌이다.[2]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용산방 하리 → 1896년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112번지[3]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린장시(臨江市) 마모얼산(猫耳山).[4] 백산무사단은 '백두산의 무사들'을 뜻하는 말로서 본부 아래 제1, 2, 3, 4, 5부를 두고 재무, 경호, 통신, 외무 등의 업무를 관장했다.[5] 이준삼(李俊三)이라고도 한다. 평안남도 은산군 제남면 추평리(現 은산군 남옥리) 출신으로, 1921년 당시 25세였다.[6] 이분은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아 1962년 10월 31일 별세했고,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7] 그리고 자신의 매제이자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 역시 독립운동가였는데, 이 사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8] 보훈처에서는 없다고 주장하며 객관성도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김일성의 외삼촌씩이나 되는 것도 모자라 독립운동 기록도 뚜렷한 사람인데 김일성 정권에 기여한바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조카 김일성이 선전홍보를 안했을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김일성 본인이 자기 책에서 외삼촌은 해방 전에 사망했다고 써놨을 정도이다. 북한이 강진석을 찬양했다는건 강진석이 독립운동가라서 조카 김일성에게도 그걸 갖다 씌우려는 목적으로 그런거지, 강진석이 김일성 정권을 직접 도와줘서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럴만한 기록도 전혀 없다.[9] 이쪽은 김일성의 친삼촌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나 마찬가지로 박탈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