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기/금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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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금지 찬성론
2.1. 개를 식용하는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인구 증가
2.2. 비위생적이고 잔혹한 개 도축 과정
2.3. 국가 이미지 개선
3. 금지 반대론
3.1. 다른 동물과 비교한 개의 특별적 지위 부정
3.1.1. 반려동물 대표성("인류의 친구") 담론의 결함
3.1.2. '교감 능력' 및 '충성심' 담론의 결함
3.1.3. 지능에 따른 식용 금지 담론의 결함
3.2. 개 식용과 국가 이미지 문제
3.3. 육식주의의 상징성 담론의 결함
3.3.1. 개고기와 환경
3.4. '생산·유통과정 개선'과 '원천 금지'의 법적 차이
3.4.1. 제도적 금지의 위헌
3.5. '애견인들에 대한 사회적 폭력' 주장의 결함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법적으로 개고기의 식용 또는 식용 도축을 금지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을 다루는 문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개고기 생산·판매 금지론'이라 할 것이다. 개고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보편 도덕률에 위배되는 것이 확실한 인육의 경우에도 형법 제161조(사체등영득죄) 및 식품위생법 제4조(위해식품판매등금지)에서 채취와 판매를 금지하고 있으며, 중국발 인육 캡슐 등을 개인이 실수로 또는 알면서도 섭취하였다고 해서 이것을 법적으로 제재할 수 없다. 애초에'섭취'라는 행위의 사전적 의미와 그 기준의 판단에도 모호성이 있으며, 생산과 판매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만으로도 식용 수요는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판매 자체는 불법이나 처벌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2#3

2. 금지 찬성론[편집]


파일:20170722038700061_01_i_20170722123903895.jpg
▲ 모란시장 앞에서 개고기 반대 시위를 하는 동물보호단체 케어
파일:thbus71in.jpg
안산시 시내버스 차내에 부착된 광고


2.1. 개를 식용하는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인구 증가[편집]


개는 수많은 역사를 거쳐 인간과 함께해온 동물이며 그 만큼 개에 대한 인간의 애정은 특별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를 키우는 가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현대에는 전 세계에 어디를 가도 개를 키우는 집을 흔히 발견할 수 있을만큼 개는 이미 대중친화적인 동물이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자신의 반려이자 가족이기도 한 애완견이 누군가에게 먹힐 수도 있는 식량으로 취급된다는 것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조차 개를 잡아먹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었다.

서울대 수의대 수의인문사회학교실에서 조사한 설문결과에 따르면 22년 기준 국민 10명중 6명은 개 식용을 법으로 금지한다는 데에 동의한다고 하며, 10명 중 9명은 개 식용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고 한다.링크 실제로 젊은 층에서는 양질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굳이 개고기를 찾아먹으려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며, 이에 맞춰 개고기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중이다.

국민정서상 대다수의 국민들이 개를 식용하는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나라도 이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어쩌면 이렇게 개를 식용하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가 '부정적'이라는 것이 개고기 논란을 종결시킬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하단에 후술되는 개고기 찬성론의 각 사항들을 보면, 결국 그 상당한 의견들의 근본골자가 되는 부분은 '생명에는 그 우열을 나눌 수 없다'는 명제에 그 기초를 둔다. 즉 개든, 소든, 돼지든, 물고기든, 모두 하나의 동등한 생명인데 다른 건 다 식용하면서도, 무슨 근거로 개만 식용하면 안된다고 하느냐는 반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역시 '인간의 모든 올바른 행위는 항상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라는 잘못된 믿음에 기인한다.

예컨대, 사람이 배변냄새를 역하게 여기는 것은 배변의 성분이 어떻고 저떻고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건강 및 생존의 유익 상, 배변 앞에서 이성적으로 이걸 먹지 말지 따지는 것보다, 감각적으로[1] 배변의 역겨움을 느끼고 피하는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남성이 여성의 늘씬하고 건강미 있는 육체에 매료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성이 남성의 육체미 있는 건강한 신체에 더 끌리는 것은 이성적으로 따지기 이전에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한 편이 더 건강한 자식을 낳을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육체를 가진 남녀가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것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이기 이전에, 남녀의 본능적 선택의 결과이다.

이처럼 모든 올바른 판단이 반드시 이성적 이해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비만이 건강에 안 좋다는 사실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과거로 가서, '비만도 아름다운 것이다!, 누가 늘씬하고 근육질 있는 몸만 아름답다고 정의했는가?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사회에 비만도 권장하자!' 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그 시대상 이성적인 주장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보편적인 정서'나 '보편적인 선택'을 무조건 지금 당장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부정하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한 생명체의 생존적 기능[2]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비이성적 생각이다. 다시 말해, 어쩌면 시대에 따라 180도 바뀌기도 하는 불완전한 '이성'이라는 이름 하에, 한 인간의 수 천년간 DNA에 대를 넘어 발달시켜온 '단련된 본능'이라는 위대한 기능을 무시하는 꼴이니,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3]

2.2. 비위생적이고 잔혹한 개 도축 과정[편집]


개 도축 과정이 비위생적이고, 비인도적이므로 개고기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 법률상 개는 축산법과 식품위생법의 규제를 받으나, 도축, 유통 등에 있어서 각종 위생규제를 하는 축산물위생관리법의 규제대상에서는 빠져있는데다가, 대다수의 개농장은 축산법조차 지키지 않은 미신고 상태로 운영되고 있기에 위생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들은 건축법, 가축분뇨법등을 당연스레 어기게 되며, 식용견들은 별도의 처리가 필수적인 음식물 쓰레기를 그냥 사료로 주거나 분뇨 배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사육되게 된다#

예를 들어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동물을 도축할 때에는 해당 법이 지정한 방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으나, 개는 해당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므로 개를 도축할 때는 그러한 방식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그러다보니 개 농장마다 도축 방식이 제각각이다. 또한 축산물위생관리법에 의하면 축산물은 유통 전 사전검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개는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검사 없이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위생에 대한 염려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물론 개고기도 식품위생법상과 축산법상의 각종 규제는 받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해당 법의 위생 규제만으로 충분했다면 애초 축산물위생관리법을 따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위생 문제에 대한 지적과 관련해서는 '그러니까 개를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 포함시켜서, 축산물위생관리법에 의한 체계적인 위생관리 규제를 받도록 하면 될 것 아니냐'는 반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개고기 금지론자들은 이러한 제안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금지론자들은 개고기 섭취 자체를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축산물위생관리법은 적용 대상 동물을 식품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해당 법 적용에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개고기 소비량이 축산물위생관리법에 의한 위생 관리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가령 우리나라 국민들이 평균적으로 하루 걸러 하루씩 개고기를 먹는 상황이라면, 국민들의 안전한 식생활을 위해 개고기를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켜서 엄격한 위생 규제를 해야 할 것이지만, 현재의 개고기 소비량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다.

또한 과거에는 개를 훔쳐가서 먹어버리는 사례가 굉장히 많았다.12345[4] 극단적인 경우로는 정들여서 키운 개가 개장수에게 도난당하는 상황에서 하는 정당한 비판까지 전부 다 개빠로 매도하고, 적반하장 말 그대로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든다고 온라인 상에서 갖가지 궤변과 혐오표현을 내뱉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2.3. 국가 이미지 개선[편집]


대외적으로 국가 이미지가 나빠지고 개고기 섭취가 조롱거리로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개고기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굳이 욕 들어가며 먹을 필요가 있냐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금지 반대론자들은 "타국의 식문화를 조롱하고, 놀리는 행위는 자문화 중심주의의 발로로써, 그러한 사람들이야 말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며, 더욱이 너희는 주권국가 국민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냐?"고 반문하지만, 개고기 금지론자들은 개고기를 먹는다고 욕 듣는게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내가 먹지도 않는 개고기 때문에 타국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입장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즉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개고기 금지론자들 입장에선 그러한 반문을 적절한 반론이라고 느끼질 못할 것이다.


3. 금지 반대론[편집]


▲ 당시 개고기 금지론자로 알려져 있던[5] 박소연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진중권
(2013년, EBS 토론카페)


개고기 금지 반대론자는 개고기 애호가와는 다르다. (개고기 애호가 역시 금지 반대론자의 하위 분류로 포함될 수는 있으나,) 대부분의 반대론자들은 개고기를 적극적으로 섭취해야 한다는 '찬성론'이 아니라, 개에게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려는 '금지 반대'에 방점을 찍는다.

개고기 금지 반대론에서는 개고기를 섭취하는 행위 자체가 역사적 또는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오류이자 모순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국가의 안보나 공공의 질서 유지에 위해가 되는 것이 아닌, 개인의 생활 양식과 자유 의사에 따른 철저한 기호 문제를 민형사법적 잣대를 들이대서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주요한 논지로 든다.


3.1. 다른 동물과 비교한 개의 특별적 지위 부정[편집]


금지론에 대항하여 가장 먼저 제시되는 논리는 "소, 돼지, 닭[6]" 이야기 이다. 가축과 다른 야생동물은 잘 먹고, 심지어 미식의 이름 하에 자연의 섭리에 맞지 않는 엽기적인 방법으로도 소비하면서[7], 왜 개고기만은 금지해야 하냐는 주장이다. 비건을 포함한 개고기 금지 찬성론자들은 개고기'만' 금지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동물들 중에서 왜 개고기'만' 차별을 둬야 하는지에 대해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소 돼지 닭 이야기가 뒤이어 나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물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견인이거나 개고기 섭취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고기 이야기 하는데 왜 다른 동물을 언급하냐며 불쾌해하고 개만 논의의 대상으로 한정짓고 싶어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무언가를 법으로 금지를 시키려면 중대한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심각한 논리적 결함이 있음에도 상당수의 금지론자들은 감정에 호소하는데 중점을 두며 또 그게 잘 먹혀서 여론몰이로 합리화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개고기를 먹고 싶으면 동물단체처럼 시위를 하라는 둥, 여론의 지지를 받으라는 둥 비아냥으로 일관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며 선악구도로 몰고 가려는 금지론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초식동물이 아닌 이상 먹이사슬의 위쪽 동물이 먹이사슬의 아래쪽 동물을 먹는 건 자연의 섭리지 그걸 두고 '옳다, 그르다', '착하다, 나쁘다' 따위의 얘기는 절대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호랑이는 나쁜 동물이라서 육식을 하고, 토끼는 착한 동물이라서 채식을 하는게 절대 아니다. 또한 포식자가 먹이사슬의 아래쪽 생물 중 무엇을 먹을지는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무엇을 먹으라 마라 할 권한은 없다. 다만, 멸종위기 종처럼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하고 중대한 사유가 있다면 예외적으로 간섭할 수 있을 뿐이다.

금지론자들은 "소, 돼지, 닭은 맛있게 먹으면서 왜 개한테만 그러냐?"는 얘기를 하도 듣다보니, 아예 작정하고 소, 돼지, 닭을 일절 먹지 않고서 "우리는 소, 돼지, 닭 어느 것도 먹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소, 돼지, 닭을 들이 밀며 반박하지 말라"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8][9] 하지만 그들은 다음의 세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첫째, 소, 돼지, 닭만이 동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맛있게 먹을지도 모르는 각종 생선, 오징어, 문어, 낙지, , 가재, 새우, 해삼, 조개, 전복 등도 모두 동물이다. 사실 도살 과정의 잔인성으로 따지면 수생동물의 도살과정이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 그나마 소, 돼지 등은 도살 규정이라도 있어서, 도살시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고자 노력이라도 하지만, 수생동물에게는 그런 규정도 없다. 반면 스위스 등의 몇몇 다른 나라에서는 수생동물 도살시에도 고통을 최소화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생선은 손질 과정에서 참수당하고, 배가 갈린다. 문어와 게는 산 채로 펄펄 끓는 찜통에 들어간다. 심지어 살아있는 채로 회떠지기까지 한다. 새우는 산 채로 소금을 뒤집어쓰고 프라이팬에 올려진다. 낙지는 온 몸이 토막내어진다. 그들이 진정 동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단체라면, 그들의 주장에 일관성이 있다면 수산시장 앞에서 먼저 시위해야 하는 것 아닌가?[10] 하지만 동물보호단체들이 성남 모란시장 앞에서 개고기 반대시위하는 건 자주 볼 수 있지만 그들이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시위했다는 기사는 난 적이 없다. 그러니 동물보호단체에 대해 "자기 눈에 귀엽고, 예쁜 동물만 동물인 동물차별단체일 뿐이다", "실상은 개보호단체, 고양이보호단체, 또는 포유류보호단체일 뿐" 등의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둘째, 설령 그들이 소, 돼지, 닭 뿐만 아니라 어떤 동물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라고 하여도, 타인의 식생활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간섭 또는 강요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개를 먹고 싶지 않으면 자기만 안 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들 자신들이 채식주의자라는 것은 단지 그들의 선택일 뿐, 그들에게 어떠한 특권도 부여해주지 않는다. 또한 식물 역시 생명을 가진 생물이므로, 다른 생물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해당 문제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셋째, "소, 돼지, 닭은 맛있게 먹으면서 왜 개한테만 그러냐?"는 질문은 금지론자에게만 묻는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소, 돼지, 닭은 맛있게 먹는데 왜 개는 안되냐?"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윗 문단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개고기 금지론자들은 자신들만의 잣대로 소, 돼지, 닭외 수많은 동물들의 식용은 침묵하면서 유독 개에게만 다른 잣대와 논리를 들이밀고 있는것이다.

개고기 금지론자들은 간혹 개고기를 고래고기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고래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고 고래잡이를 금지하는 이유는 멸종위기 종이라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하고 중대한, 그리고 합리적인 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개는 멸종위기 종이 아니다. 따라서 개고기를 고래고기에 비유하며 금지를 주장하는 것은 억지로 갖다 붙인 유비추론에 불과하다.


3.1.1. 반려동물 대표성("인류의 친구") 담론의 결함[편집]


금지론자들은 "개가 반려동물이라는 점"을 간섭 정당화 사유로 내세우지만, 그건 개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나 그런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사유는 되지 못한다. 즉 개를 반려동물로 생각하지 않고 , 돼지, 생선처럼 '먹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반려동물이면서 동시에 먹거리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의 시각만이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컨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무엇을 먹을지 말지는 개인의 자유지 타인이 이래라 저래라 강요 및 간섭할 권한은 없는 것이다. 미니돼지 키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삼겹살 먹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닭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들이나, 물고기를 기르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한테 치킨 먹지 말라, 물고기 먹지 말라고 안 하고.

사실 따지고 보면, 애완동물이니, 반려동물이니 하는 것 자체가 동물보호와 반대되는 인간 중심의 이기적 개념일 수 있다. 아무리 '반려동물' 따위의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해도[11] 본질적으로 사람이 동물을 사람의 이기적 목적(예: 귀여운 생명체를 곁에 둠으로써 느끼는 행복, 기쁨, 즐거움 등)을 위해 이용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이자 인류동물학자인 할 헤르조그 교수는 “사람이 동물을 반려동물이라 명명하는 것은, 동거하는 동물이 소유 대상이 아닌 듯 보이게 포장하는 언어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일부 애견인과 동물애호가들은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난 동물은 없다고 말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길러지기 위해 태어난 동물도 없다. 반려동물은 주체적으로 사는 권리를 빼앗기고, 사람에 의해 행동 반경과 먹는 음식의 종류와 양, 활동의 내용과 범위, 그리고 때로는 생존 기간까지 조정당하고 지배받고 있다. 심지어 사람은 동물을 애완용/반려용이라는 목적에 부합하게끔 또는 사람의 눈에 더 귀엽고 예뻐 보이게 하려고 품종개량[12]하기도 하고 성욕을 잃도록 중성화수술을 시키기도 하고[13] 짖지 못하게 성대수술을 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자연에서 자유로이 살던 동물을 사람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인간의 영역 안에 가둬 놓고[14], 애완동물/반려동물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기르는 것 자체가 사람의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을텐데, 도대체 애견인들은 무슨 낯짝으로 동물보호 타령하며 타인에게 개를 먹지 말라고 강요한단 말인가?라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개가 인간에게 기여하기 때문에 이들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인류 역사에서 개보다 훨씬 더 큰 기여를 해온 소와 말은 완전히 무시 당하는 상황이 된다.
우선 소는 기원전 3천년 전부터 이미 가축화가 이루어져 있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농경신의 상징적인 동물로 제사의 제물로 쓰여질 정도로 숭배의 대상이였으며 중국에서도 기원전 1800년전 소를 길들였다는 기록이 있다.[15]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함부로 도축하는것을 금지했을 만큼 고대 농경사회에 있어서 빼놓을래야 빼 놓을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기록이 있고 또한 소는 개와는 달리 우유를 얻거나 도축하면 고기의 양은 물론이고 가죽에서 부터 뼈까지, 심지어 똥 또한 무엇하나 버리는것 없이 두루 쓰일정도로 매우 쓰임새 있는 동물인데다 인간이 주식으로 쓸 수 없는 풀을 소비하는 먹이 경쟁도 없다는 장점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가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큼 그 중요도는 두말하면 입이 아플정도다.
그리고 말 또한 고대 운송업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동물이였기에 오늘날 자동차의 출력단위인 마력으로써 표현되고 있기도 하고 전쟁터의 기마나 고대 로마의 전차부대의 핵심 동물로 쓰였을만큼 가히 인류와 함께 동고 동락한 화려한 과거사를 자랑하며 오늘날까지 경마나 승마같은 스포츠까지 개 못지않게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개는 그저 인간의 경비 역할이나 사냥에 종종 쓰였을 뿐, 고기의 양도 많지 않고 가죽은 질이 좋지 않아 두루 쓰이지 못하는데다 심지어 육식이라 먹이까지 경쟁해야 한다는 점까지 따지고 본다면 과연 개가 소랑 말처럼 특수성이 강해 대체가 불가능할지, 또는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가 크게 바뀔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지를 본다면 커다란 의문이다.

반려 동물 문화가 자리잡은 선진국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에서나 급격히 인식이 좋아진 것 일뿐, 대한민국 역사 중 근대시절만 해도 오히려 개는 취급이 좋지 못했다. 평범한 단어 앞에 개 라는 글자를 붙이면 순식간에 부정적인 요소나 심지어 욕설로까지 변하는것이 명백한 증거, 그만큼 개는 흔했고 여차하면 먹어도 그만인 존재였다는것, 애초에 소나 말과는 달리 육식성이라 인간과 먹이경쟁을 해야하는 개는 과거 하루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었을때는 오히려 잡아먹어야만 하는 식량거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였다.
그나마 먹거리가 풍족한 양반들이나 경비용으로 길렀을 것이다.

심지어 다른 가축과 비교하는 비판에 "우리나라 결식아동을 돕자는 운동에 아프리카에는 더 심하게 굶는 아이들도 많은데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유#까지 나오는데, 다른 동물을 차별하는 시선은 둘째치더라도 이 말이 우리 곁에 있는 것부터 지켜야한다는 의도라면 개만큼이나 닭, 소, 말도 충분히 우리 곁에 있는 동물이고 우리가 가까이서 지켜줄 수 있는 동물이다. 그들에게는 개와 다른 동물들 간의 공감 거리가 국내와 아프리카 만큼이나 먼 것이다.

애초에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주관적 가치관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에 대해 '어떤 동물은 먹어도 되고, 어떤 동물은 먹지 말라'고 강요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식문화는 해당 지역의 자연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소를, 누군가는 벌레조차도 친근하게 여기는 등 저마다가 주관적인 기준을 가졌는데, 누가 무슨 권리로 특정 동물은 먹어도 되고, 다른 동물은 먹어선 안 된다고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아사가 빈번했던 시절에 개고기를 먹으며 생명을 연명한 바 있기에 개고기를 먹으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어려웠던 과거에 먹었던 음식이라 한들, 지금 먹어서는 안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3.1.2. '교감 능력' 및 '충성심' 담론의 결함[편집]


개가 유전적으로 뛰어난 친화력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고기 금지론자의 상당수는 단순한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는 인간과의 교감 능력이 높고, 충성심이 강하므로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 대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므로 문제가 된다. 이는 인간과의 교감과 인간에의 충성심을 기준으로 생명의 가치에 경중을 판단하는 인간 중심적 사고이다. 그러한 주장대로라면 '고양이는 주인에게 충성스럽지 않은 동물이니 도축해서 먹어도 될 동물이다'는 얘기도 가능하게 되는데, 그들은 또 거기에는 반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일 것이 자명하다.

사실 개만 인간과 교감 가능한 동물인 것은 아니다. 능력의 높고 낮음에 차이는 있을지 언정 인간과 교감이 가능한 동물은 개 말고도 많다. 예를 들어 , 도 개 못지않은 교감능력을 갖고 있다. 이외에도 개보다 뛰어난 교감능력을 가진 동물들도 많이 있다. 그럼 그 모든 동물의 식용을 금지해야 하나? 아니면 인간과 교감 가능한 동물 중에서도 개만 특별 대우해야 하나?

게다가 교감 능력으로 식용 가능 여부를 판단하자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남긴다.
  • 인간과의 교감 능력을 식용 가능 여부를 정하는 기준으로 사용하는게 합당한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의 발로는 아닌가?
  • 교감능력의 정도는 어떻게 계량화 할 것인가? 객관적인 계량화가 불가능하다면, 결국 인간 개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직감이 유일한 측정도구라는 것인데, 개에 대한 개개인의 느낌과 직감은 다르다. 그렇다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느낌과 직감을 측정도구로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그것의 근거는 무엇이며, 애초에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느낌과 직감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정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 설령 교감 능력의 정도를 어떻게든 계량화 했다고 치더라도, 그 후엔 "얼마만큼의 교감능력이 있어야 식용불가능하다고 인정할만한가?"라는 문제점이 남아있다. 만약 교감 능력의 정도를 척도로서 사용한다면, 얼마나 교감능력이 좋아야 식용이 불가능한지 보편적이고 통상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는게 가능한가? 개를 식용금지 시켜야 할 만큼 개의 교감능력이 높다고 느끼지는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식용 금지시킬 정도의 교감능력이라고 느낀다는게 개고기를 식용 금지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만약 더 민감한 사람의 느낌과 직감을 판단기준으로 사용한다면, 가장 민감한 채식주의자의 기준을 채용하여 모든 고기 섭취를 금지시켜야 한다. 이것이 옳은가?
  • 교감능력은 개체에 따라 다른데 그렇다면 교감능력이 떨어지는 개는 먹어도 좋다는 것인가? 똑같은 논리로, 정신이상으로 교감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은 동물 취급 받거나 식용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고 가능한가?

이처럼 교감능력 운운하는 주장은 사실 굉장히 모호하며 추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이야기다. 게다가 충성심의 경우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이 생물체는 우리한테 잘보이려고 아양을 잘 떠니까 먹지말자." 라는 것이지만, 이게 도덕적으로 옳은지에 대해서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3.1.3. 지능에 따른 식용 금지 담론의 결함[편집]


개고기 금지론자들 중 상당수는 는 지능이 높으므로 먹어선 안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런데 개만 지능이 높은 건 아니다. 가령 과학자들에 의하면 문어는 지능이 매우 높은 동물이라고 한다. 그러면 문어도 먹어선 안되는가? 그리고 근본적으로 지능의 높고 낮음이 생명 가치의 높고 낮음까지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하등동물이라도 생명 가치까지 미개한 것은 아니다는 주장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만약 지능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결정한다면, 지능이 여타 동물들보다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사람은 식용, 또는 이에 준하는 가축적 지위를 부여하여도 정당한가? 보편적인 상식과 도덕을 가진 이들 중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지적 장애인 사례 가운데서는, 개를 포함한 식육목 동물에 비해 사리판단이나 행동력은 물론 지남력조차 떨어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지능이 높고 인간과의 교감이 가능한 것은 , 돼지, , , 오리, 거위 등도 마찬가지다.[16] 또한 개의 지능은 전체 생물군 안에서 보면 준수한 편이지만, 정말 지능이 높은 동물들 사이에서 보면 떨어지는 편이며, 예를 들어 승마 경기에 출전하는 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은 지능이 매우 높으며, 인간과의 교감능력도 매우 뛰어나다.[17] 그러면 말고기도 금지해야 하는가? 몇몇 국가에서는 원숭이도 먹는데, 원숭이는 개보다 지적능력과 교감능력이 훨씬 뛰어나다.[18] 이러한 최고로 지능이 높은 동물들도 버젓이 식용이 되고 있기 때문에 지능을 근거로 식용을 금지시키려는 주장에는 명백한 모순이 존재한다.

개보다 지능이 높은 동물들은 우리가 좀처럼 보거나 먹기 힘든 동물들만이 아니다. 예를 들면 돼지는 우둔하다는 편견이 존재하나 실제로는 개보다 더 영리하다. 애완동물로 돼지를 기르는 사람과 그의 애완돼지 사이에는 감정 교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19] 괜히 조지 오웰이 돼지를 우두머리로 선택한게 아니다. 소도 마찬가지로, 소 역시 덩치 때문에 애완동물로 적합하지 않아 잘 드러나지 않는 것 뿐이지, 인간과의 교감은 개 이상으로도 가능하다.[20] 식용으로 키우는 소들도 같은 우리 안에 있던 소 중 한 놈이 안 보이면 남은 녀석들이 눈치를 채고서 오랜 시간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있다. 그 만큼 소는 영리하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도축되어 사람 입에 들어가는 동물들인 소, 돼지, 닭중에 지능이 개 이하인건 건 닭 정도밖에 없다.[21] 그러나 개고기 반대론자들은 지능이 높은 동물은 먹지 말자고 주장하면서 이 개보다 영리한 동물들이 먹히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끽해야 본인이 비건이라서 안 먹는 정도지 소나 돼지를 먹지 말자는 운동은 안 한다. 사실 이마저도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오히려 본인들도 소나 돼지를 잘 먹고 있으며 개고기 대신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한다.

어떤 생물을 '인간' 또는 '인간에 준하는 존재'로 다룰지, 아니면 '인간 외 생물'로 다룰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감수성과 같은 개별적이고 파편화되어 있는 태도가 아니라, 그 생물을 사람에 준해서 다뤄야 할 정도의 객관적인 징표, 특히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명확한 언어체계, 상호교섭을 가능케 하고 또 이행을 기대할 수 있는 정도의 사회성 및 지적능력 등이 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 의할 때 개는 '인(사람)'이 아니며, 사람에 준하여 다룰 정도의 객관적 징표들을 갖추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적어도 현재까지 개와의 의사소통은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이루어지고 있고, 그마저도 서로의 행동을 이해하는 정도의 친밀성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며[22], 개들이 인간과 대등한 교섭을 요구할 정도의 독자적인 사회를 이루고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3.2. 개 식용과 국가 이미지 문제[편집]


개고기의 식용 여부와 선진국(developed country) 여부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으며, 그 밖의 다른 사회, 문화적 통계 역시 개고기의 식용 여부가 한 나라의 발전 척도에 대한 판단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연구는 이루어진 바 없다.

비록 지난 세기 근대화세계화에 있어서 서구화(westernization)가 지배적이었던 탓에, 개고기 식용 문화를 일찍 사문화한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한국에 대한 멸칭, 인종차별 또는 부정적 이미지로서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한국의 개 식용 문화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저해하는 극단적 문화상대주의에 기인하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 단언할 수 없고, 단지 증오발언으로 간주할 여지가 충분하다. 가령 동남아시아에서 그들의 전통적인 식문화에 따라 곤충을 소비하더라도, 번데기를 제외한 충식에 혐오감을 느끼는 한국인이 동남아에 대하여 "선진국인 한국은 충식을 하지 않으니, 개발도상국인 동남아 국가는 충식을 도태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

예의라는 것은 쌍방이 서로에게 지켜야 하는 것이지, 한 쪽이 무조건적으로 다른 쪽에게 맞춰주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좋아하더라도 인도인 앞에서는 소고기를 먹지 않고, 무슬림 앞에서는 돼지고기를 자제하듯이, 상대방 또한 한국인이 혐오할만한 곤충류 요리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 수르스트뢰밍같은 음식을 권하는 것을 자제하려 할 것이다. 즉, 예의를 지키고자 한다면 개고기를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만 개고기 먹는 것을 삼가는 것으로 족하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개고기 식문화를 비난했던 프랑스의[23]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에 대해 대철학자이자 대문학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무식한 소리하고 있다"고 일갈한 바 있다.# 그리고 진중권은 "서구에서도 교양있는 사람들은 브리지트 바르도와 같은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유럽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할 권리는 없다"고 논평한 바 있다.# 이처럼 모든 서구인들이, 혹은 모든 외국인들이 다른 나라의 식문화에 대해 자신들의 문화 기준으로 비난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외국인들과 만나 대화해보면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해 "그건 한국의 문화일 뿐,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정말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인권과 관련해서는 선진국에서 특정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비핵화, 민주주의, 종교의 자유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조차 상대주의가 우선하는 국제사회에서는 비핵화를 제외하면 강력한 권유 정도에 그친다. 하물며 인류 가치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24] 개고기 식용 문화를 국가간에 금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3.3. 육식주의의 상징성 담론의 결함[편집]


개고기 금지론자들 가운데 특히 채식주의와의 교집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사람에게 잡아 먹히는 동물을 하나라도 줄여가자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됐냐?"고 주장한다. 육식에 제기되는 '환경적 문제'와 '윤리적 폭력성'은 개 식용을 통해 상징(symbolize)화 되고, 개 식용을 금지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향에서 반론이 제기된다.

첫째, 사람은 잡식동물이므로 사람이 육식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 그에 대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인간에게 잡아 먹히는 동물을 하나라도 줄이자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둘째, 사람에게 잡아 먹히는 동물을 하나라도 줄여가자는 전제 자체에는 동의하는 사람이더라도, 왜 그 방법이 꼭 개고기 섭취 금지여야 하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가령 "나는 닭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 잡아 먹히는 동물을 줄여갈 생각이다."라는 사람이 있다면 개고기 금지론자들은 그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닭은 먹어도 좋으니, 제발 개를 안 먹는 방법을 택하라"고 강요라도 할 것인가? 또한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소를 먹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 잡아 먹히는 동물을 줄여가고자 한다."고 말하며 "당신도 소를 안 먹는 것에 동참하라"고 강요한다면 개고기 금지론자들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결국 금지론자들의 주장은 다른 동물들이 더 많이 죽어도 상관없으니 개는 살리고 보자는 동물차별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적어도 개고기를 먹는 끼니는 다른 동물들을 먹지 않는다고 치면 오히려 개고기를 먹음으로써 다른 가축들을 살려준다는 주장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3.3.1. 개고기와 환경[편집]


개는 닭처럼 한두 달 만에 키워서 도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나 양과 다르게 잡식동물이며 고기 사료를 먹기 때문에 효율이 낮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그대로 다른 동물에 대입시킨다면 소고기우유는 소 사육 과정에서 소의 방귀로 인한 메탄가스 발생이 지구 온난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데다가 브라질에서 소 목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아마존 밀림을 파괴하니까 먹지 말아야 하고#, 양고기의 경우 내몽골과 호주의 사막화를 심화시키니까[25] 먹지 말아야 하며 염소고기의 경우 염소가 풀을 뜯을 때 풀뿌리까지 다 뜯어먹는 이유로 중동과 아프리카의 토양 유실과 사막화를 조장하니까 먹지 말아야 한다. 결정적으로 태국이나 미국, 남아공 등에서 인기리에 관광 상품으로 판매되는 악어고기의 경우 생닭고기를 사료로 하여 사육되는데 고기 부산물로 만드는 개사료를 먹는 개보다 식량 자원으로서의 효율이 더 낮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로 얻을 수 있는 열량은 그 고기를 얻기 위해 투입되는 사료에 비해 턱없이 낮다. 1파운드의 쇠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16파운드의 곡물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소, 돼지 축산업이 쇠퇴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열량 외에도 단백질과 지방의 조화에서 얻을 수 있는 풍미, 곡물과는 다른 종류의 식감 등 차별화된 가치를 고기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고기도 비록 얻을 수 있는 양은 적지만, 취향의 영역에서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오늘날 가축 사료로 재배되는 곡물들은 똑같은 옥수수라 하더라도 인간이 먹는 곡물과 다른 방향으로 개량된 종자이고, 가축 사료용으로 재배되는 옥수수의 경우에는 식용 옥수수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개량되어 있다. 이런 가축 사료용 작물들은 식용 밀이나 쌀을 재배하지 않는 더 척박한 지역에서 훨씬 더 적은 수자원을 가지고 재배된다. 환경단체에서 소고기 1키로를 사람이 먹는 쌀 한 포대와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리고 개, 고양이가 먹는 사료의 재료는 인간이 먹지 못하는 고기 부산물이다. 식용 개 사육이 환경을 더 파괴한다는 주장은 다시 말해서 애완견이나 애완묘 사육이 지구 환경을 악화시킨다는 궤변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3.4. '생산·유통과정 개선'과 '원천 금지'의 법적 차이[편집]


타인이 기르는 개를 훔쳐서 개고기 시장에 팔거나 먹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개고기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물론 그런 사례가 흔했고 부도덕한 경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고기를 금지해야 한다면 타인이 기르는 돼지를 훔쳐서 돼지고기 시장에 팔거나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돼지고기를 금지시켜야 할 것인가? 과거 장애인 시설에서 기르던 닭 20마리를 훔친 사건이 있었는데, 이런 사건이 개 이외의 동물에서 절대 없다고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일부의 범죄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이를 전체의 문제로 전가시켜 금지시키고자 한다면 세상에 깨끗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한국인 한명이 범죄만 저질러도 한국인 전체가 범죄자 민족인건 아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일부의 사례만 가지고 전체를 금지시켜야한다고 주장할거면 마찬가지로 닭고기도 금지시켜야 할 것이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의 애완돼지를 먹으려 들지는 않는다. 개 절도 범죄를 개고기 금지의 이유로 드는 것은 전형적인 연쇄반응의 오류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애완동물 유기 문제 및 애완동물이 일으키는 피해 등을 근거로 애완견을 기르는 것 역시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게 된다. 게다가 절도 자체가 이미 범죄인데 이러한 범죄를 저지를 정도의 사람이라면, 개고기 섭취를 불법으로 규정해도 무시하고 개고기를 먹을 것이다.

또한 일부 개고기 금지론자들은 유기견이 개고기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다며 개고기를 먹는 사람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절도범의 공범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펴기도 하는데, 이는 형법에 대한 어설픈 지식의 발로다. 이 논리대로라면 쌀 절도가 많이 일어나는 국가에서는 쌀을 구입하는 것 자체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장물 취득이므로 쌀 구입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이런 논리대로라면 유기견 문제의 근본원인은 개를 기르는 것에 있다며, 개를 기르는 것을 금지하자는 주장도 가능하게 된다.

개는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26] 해당 법의 엄격한 위생 규제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위생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먹어선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금지론의 이유라면, 개를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켜서 엄격한 위생 규제를 받게 하면 될 일이다. 그렇지만 금지론자들은 그것도 극구 반대한다. 그들은 개를 식품으로 다루면 안된다는 입장이므로, 축산물의 위생 관리를 다루는 법에도 포함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축산물위생관리법에 개를 포함시키는 것을 마치 국가의 개고기 공식 합법화나 다름없다고 주장하지만, 위생적인 환경에서 식용견을 인도적인 방법으로 도축한 개고기는 이미 합법적인 개고기 생산 방법이었다.[27] 일부에서는 개고기 섭취가 불법은 아니지만 합법으로 정한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양비론을 들고 나오지만 이는 죄형법정주의에 반하는 주장이다. 다른 주장으로는 식품위생법과 관련한 식약처의 지침에 개고기가 원료로 지정되지 않았으니 개고기는 이미 불법이라고도 주장하지만, 이 지침은 가공식품의 원료로 사용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며 가공하지 않은 생고기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개고기 반대론자들이 그런 입장이라면, 적어도 금지론의 이유로 위생을 들먹거려선 안될 것이다. 그들의 극렬한 반대 때문에 개고기가 엄격한 위생 규제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위생 운운하며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육견인이나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 입장에선 금지론자들의 이러한 태도가 마치 적반하장처럼 느껴질 것이다. 개고기 금지론자들이 진정으로 개고기의 비위생과 유통을 규제하는 것을 원한다면 오히려 위생 관련 법의 강화를 요구했어야 맞을 것이나, 그들은 개라는 생물 자체가 개고기라는 이름과 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원치 않기에 법 제정 반대를 외치는 것이다. 정작 이들의 반대 때문에 양심적으로 위생적인 환경에서 도축과 유통을 하려는 개고기 업자들이 피해를 보고, 비양심적으로 대놓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도축과 유통을 하는 개고기 업자들이 이득을 보고 있다. 업자 입장에서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키울수록 비용이 절감되기에 위생적인 환경보다 가격 경쟁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위생적인 업자들이 우위를 점하면서 깨끗한 환경과 유통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 입장에서는 개고기를 기피할 이유가 하나 더 늘은 셈이기에 개고기의 사양화도 빨라지고 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위생에 관한 모든 일에 양심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굳이 개고기가 아니라도 축산물위생관리법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양심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울타리라고 할 수 있는 법과 규제를 만드는 것이다. 개고기 금지론자들이 이러한 비위생 업체에 대한 단속, 규제, 처벌을 요구해도 정작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축산물위생관리법을 반대한 것 또한 개고기 금지론자들 자신이였던 것이다.

즉, 개고기금지론자들은 축산물위생관리법상의 규제 대상에 개를 포함시키는 것은 극구 반대하면서, 축산물위생관리법의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통제가 되지 않는 위생 문제를 들먹거리며 이래서 개고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순환 논법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28] 참고로 만약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에 개가 포함되면, 육견인들은 위생 관리 방법에 있어서 해당 법의 엄격한 규제를 받게 되지만, 그럼에도 육견인들은 오히려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소비자들에게 당국에 의한 위생 규제를 받는 깨끗한 고기가 유통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개고기를 먹는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개고기의 가격이 비싸질 수 있지만 개의치 않고 이를 환영한다. 식재료로써도 애완용으로 길러진 동물들은 고기를 얻기 위해 육사에서 관리된 동물들보다 체내 염분과 중금속의 비율이 높아서 결코 좋은 고기가 못 된다. 거기에 더해 오랜 시간 비위생적인 도심에서 방치된 유기견들은 당연히 기피대상이다. 위생적인 연유 뿐만이 아니다. 개고기 금지론자들은 개고기 소비자들을 자기 가족들을 먹는 괴물 취급하지만 실제로는 육견 목적의 육사에서 자란 개라면 먹어도 개인이 애완용으로 키우던 걸 납치해 온 개는 절대로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소비자들이 대다수이다. 개를 축산물로써 규제하지 않으므로써 소비자들은 선택권도 없이 기피하는 고기를 먹게 되고, 출처 불명의 개고기를 쉽게 유통시킬 수 있기에 몰지각한 인간들이 돈 들여 관리한 육견이 아닌 남의 개나 유기견들을 가져다 팔 수 있는 것이다. 즉 개고기를 합법적으로 관리하지 못해 개와 견주들과 개고기 소비자들 모두가 피해를 보는 작금의 사태는 오히려 개고기금지론자들의 반대를 위한 반대에 의해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축산물위생관리법상의 위생 규제를 받는 동물에 개가 포함된 외국 선례가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외국의 선례가 없다고 해서 대한민국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다. 세계 각국은 서로 식생활 문화가 다르므로 축산물위생관리법의 규제 대상 동물도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민들이 까마귀 고기를 즐겨 먹는 나라가 있다고 하자. 그 나라에선 까마귀를 축산물위생관리법의 규제 대상에 포함시키는게 마땅할 것이다. 설령 까마귀가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이 된 외국의 선례가 없다고 해도 그 나라에선 까마귀를 축산물위생관리법의 규제 대상에 포함시켜 엄격한 위생 규제를 받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인 것이다. 실제로 축산물위생관리법에는 제주도민을 제외한 한국인들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말고기도 포함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위생적인 개고기 도축에 대한 사례가 없으니 규제를 신설하기 위한 연구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미 닭과 같은 소형 가축부터 소와 같은 대형 가축까지 다양한 크기에 따라 최적화된 규제가 이미 적용되고 있으며 동물복지를 고려하더라도 개의 습성 등에 관한 자료도 충분히 있기에 규제를 만드는 데 천문학적 비용이니 운운하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개고기 금지론자들 중에는 '개는 식용을 위한 품질 개량을 한 적이 없으니, 먹어서는 안 된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는 '식용을 위해서 품질 개량을 한 생물만을 먹어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일 뿐이다. 왜 굳이 개량한 생물만을 먹어야 하는가? 개량된 생물은 먹혀 마땅한 존재고, 개량되지 않은 생물은 존중받아야 할 존재인가? 우리는 개량되지 않은 자연산 광어를 먹어서는 안 되고, 개량된 양식 광어만을 먹어야 하는가? 심지어 원양에서 잡아오는 참치 같은 경우에는 품질개량이라는 것이 가능할 턱이 없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만약 진짜로 식용을 위해 품질개량을 한 개가 등장하기라도 하면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 될 수 있을까? 실제로 식용견을 기르는 육견인들 입장에서는 같은 먹이를 주고 살이 잘 오르는 개가 당연히 더 이익이기 때문에, 품종 자체는 잡종이지만 나름대로 식용견으로서 품종 개량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모순적이게도 애견인들이 정의하는 품종은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종이 아니라 애견인들이 외모에 따라 근친혼을 통해 나온 것들을 임의로 정의한 것에 불과하며, 이 때문에 순혈이라고 불리는 품종견들은 유전적 다양성이 낮아져 다양한 유전병에 시달린다.

게다가 개고기가 축산물위생관리법의 관리 하에 유통되면, 산지 불명이거나 식용견으로서의 위생이 엄격하게 관리되지 않은 개들, 가령 훔친 개나 유기견들은 유통시키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즉, 육견 목적으로 품종 개량된 개처럼 애초 처음부터 식용 용도로, 그리고 식용 목적에 따른 엄격한 위생 관리를 받은 개가 아니면 도축[29] 및 유통될 수가 없게 된다.[30] 하지만 개를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켜서 해당 법에 의한 위생 규제를 받게 하는 것은 상술하였듯이 개고기 금지론자 등 동물보호단체들의 반대에 가로막혀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금주법 시대에 질 나쁜 밀주를 만들어 비싸게 팔던 마피아들이 이득을 보았듯이,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또는 비위생적 과정으로 개고기를 조달하는 일부 개장수들의 살길만 트이고 있다.[31] 즉, 산지 불명이거나 비위생적인 고기가 유통될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것은 오히려 개고기 금지론들자 인 것이다.

3.4.1. 제도적 금지의 위헌[편집]


만약 으로써 개고기 섭취를 금지한다면, 이는 위헌 소지가 다분하고, 결국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법률로써 제한하려면 국가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이어야 하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대한민국 헌법 제37조 2항)는 까다로운 헌법적 조건[32]이 있다. 그런데 현재 동물보호단체가 주장하는 정도의 논리로는 설령 개고기 금지 법률이 제정되더더라도 위헌 시비를 벗어나긴 힘들 것이고, 결국 헌법재판소로 간다면 위헌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하다.[33]


3.5. '애견인들에 대한 사회적 폭력' 주장의 결함[편집]


남이 키우는 반려견을 식용으로 쓸 목적으로 잡아먹는 범죄 행위가 아닌 이상, 개고기를 먹는다는 자체만으로 사회적 폭력이라고 매도하기는 어렵다. 이는 상호주의를 완전히 무시한 발언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만큼 상대방의 입장 또한 존중한다는 원칙을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로,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면 옆집에 개가 있으면 언젠가 나를 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니 개 양육을 금지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친다면, 그 사람의 의견을 듣고 그것을 국가에서 금지시키는 것도 타당하다는 논리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2021년 6월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개 식용에 대한 인식에서 72.1%가 개 식용을 법으로 금지하기보다 개인의 결정에 맡겨야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 가운데 개를 키우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즉 개고기 식용 자체가 사회적 폭력이라는 주장은 대중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애초에 대중의 공감을 얻더라도 국가가 영합하여 통제할 당위성 따위는 없다.

4. 여담[편집]


  • 시대가 지나며 개고기 수요 자체가 감소하고# 개를 절도하는 경우가 감소하면서 개고기 금지 관련 논쟁 자체가 과거에 비해 관심을 못 받는 편이다.

  • 한국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되었을 당시 영남대학교 박홍규 교수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번역자 서평에 개고기 관련 이야기들이 많이 추가되었다. 정작 역자는 사이드가 방대하게 인용한 문예 작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34] 각주를 통한 보충이 부실한 대신, 본문하고 직접 상관도 없는데다가 오늘날 대중적으로 관심이 멀어진 개고기 이야기만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서 2010~20년대 기준 읽기 불편하다는 비판이 있다.

  • 2000년대 당시 개고기 옹호론을 주도한 안용근 교수#의 경우 부친이 개장수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두고 당시 개고기 반대자들은 안용근 교수의 부모님을 두고 개망나니(...) 개도둑 등등 접두사 를 붙여서 조롱하면서 패드립하는 일이 많았다. 다만 여기에는 안용근의 잘못이 더 컸는데 시각장애인 안내견 관련해서 개털이 사람 기관지에 얼마나 안 좋은지 아냐고[35][36]개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에게 대신 봉사하면 될 일이라고 재수없다고 비방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이 외에도 90년대 말에서 00년대 초반 안용근이 공개한 글에서는 선진국에서 개를 키우는 돈을 갖다가 개발도상국에 다 갖다주면 전 세계적인 기아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부터, 개 키우는 집에서 개를 키우는데 드는 비용을 갖다가 불우이웃 돕기를 하면 한국에 노숙자 등 불우이웃이 없어질 것이라는 주장 등 오늘날 기준으로는 개고기 옹호하는 사람 입장이라도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하고 다녔다.[37]
[1] 또는 본능적으로[2] 단련된 감각과 본능[3] 즉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는, 지금 단계에서 이해되고 안 되고,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 자체로 상당히 고려해보아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왜 개라고, 고양이라고 먹으면 안 되느냐 고 반문하기 전에, 왜 '인류 보편'의 사람들이 돼지,말,소 등을 먹는 것에는 반감을 가지지 않으면서 개와 고양이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는 지를(특이 선진화될수록), 어쩌면 그것이 현 단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선택의 유리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4] 실제로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개장수가 밖에 키우는 개를 멋대로 잡아가는 것이 전통처럼 이어져왔다. 한국의 경우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으나 아직까지도 개장수가 개를 훔쳐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개장수가 데려간 개들은 펫샵에 팔려갈 강아지를 낳거나 보신탕집에 보내진다.[5] 현재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박소연은 개고기 금지론자 코스프레를 한 것에 불과했다. 자세한 건 박소연(사회운동가) 문서 참고.[6] + 염소, 말, 오리[7] 가장 대표적인 요리가 바로 오르톨랑[8] 실제 2017년 초복, 모 개고기 반대 단체의 여성 시위자가 개고기 판매 상인에게 했던 말이다. 당연하지만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라도 되지 않는 한은 실제로 소고기나 닭고기를 끊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인터넷 댓글 등에서 나온다면 말할 것도 없고.[9] 설령 정말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호에 불과하며 법률을 통해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채식주의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고기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보강할 뿐이지 개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논리는 아니기 때문. 쉽게 말해서 개고기를 금지하는 사람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먹지 않는다고 너도 먹으면 안 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10] 이건 궤변 같은 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소위 서구 선진국 중 한 곳에서는 이미 새우를 잡을 때 안락사시킨 뒤 유통하도록 하고 있고, 심지어는 통각 신경이 없는 일부 해양생물조차도 고통과 공포를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11] 애완동물이라는 용어에 대해 동물을 장난감으로 보는 것이라는 비판이 가해지자 '반려동물'이라는 대체 용어가 나오게 된 것이다.[12] 단적인 예로 불독은 짧은 입과 기관지 때문에 먹는것과 호흡이 불편하고 치와와 같은 종은 억지로 작게 개량하려는 인간 때문에 두통 발병률이 높으며 골든 리트리버의 경우도 품종개량의 부작용 때문에 관절염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 심지어 닥스훈트는 품종개량에 대한 부작용으로 종 특유의 유전병 특성까지 띄게 되었다 .[13] 다만, 이건 암컷 개들에 한해 4살 정도까지 임신이 되지 않으면 자궁 축농증이란 병이 생겨서 좀 필요하긴 하다.[14] 감금으로 인한 자유의 박탈은 그 무엇보다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처벌의 기본중의 기본은 구금이라는 것과, 왜 고위층 인사들이 가진 능력을 총 동원해 본인이나 자식 군대를 면제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답이 나올것이다.[15]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소의 가축사.[16] 가령 영화로도 만들어진 '워낭소리'에서 보여준 소 주인 할아버지와 소의 이야기를 통해 증명이 가능하다. 또한 도축장이나 우시장에서 소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소 주인 역시 정든 소와의 이별에 슬퍼서 눈물을 흘린다. 구제역 사태가 발생했을 때 농민들은 키운 가축들을 생매장해야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기도 했다. 농촌에서 소를 키우는 농민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자식처럼 키웠다.'는 것이다.[17] 경주마들이 단순히 기수의 박차에 맞춰 무작정 달릴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들은 대부분 경마라는 스포츠의 대략적인 규칙과 승패를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 일본 경마계의 전설인 심볼리 루돌프가 기수의 성급한 지시를 무시하고 스스로의 페이스로 달려 결국 1등을 한 일화도 있고 생에 첫 패배시 분노에 미쳐 날뛴 일화도 있으며 카메라 앞에서 포즈도 취하는 등 동물도 지능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 여러 일화들이 있다[18] 물론 우리나라는 원숭이를 거의 먹지 않고, 따라서 개고기 금지론자들도 원숭이고기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므로 원숭이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19] 돼지를 애완동물로 기르는 경우는 개에 비해 극히 적다고 반론하기도 하지만, 소수인 것이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 소수 개체든 다수 개체든 모든 애완동물은 그 자체가 소유주의 삶의 파트너이다. 개체 수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적은 개체 수의 애완동물이 갖는 가치가 폄훼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이 논리로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적다는 것도 개고기를 금지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보일 수 있다.[20] 경북 상주시의 의로운 소 누렁이와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 등의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21] 지능은 개보다 낮지만 전체 동물중에서는 높은 편이고 사회성도 있다.[22] 예를 들어 사람이 '왈왈왈왈'과 같은 어떤 특정한 소리냈을 때 그 소리의 의미를 모든 개들이 똑같이 이해한다든가 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23] 이 주장이 말도 안되는 것이, 프랑스에서는 달팽이나 푸아그라, 오르톨랑을 먹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문화니 이런 음식들도 먹으면 안된다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즉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논리 전개이다.[24] 멸종 위기 동물은 결국 멸종에 이르면 인류 전체에 피해가 가지만 개는 멸종 위기 동물도 아니고, 관심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앞으로 멸종 위기 동물이 될 가능성도 사실상 없다.[25] 호주의 양 방목의 환경파괴 관련해서는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문명의 붕괴>의 <오스트레일리아의 채굴> 편 참조[26]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면 도축, 유통, 판매 등을 할 때 축산물위생관리법상의 엄격한 위생 규정을 따라야 한다.[27] 개인의 제조만 가능하고 유통, 판매가 금지된 말벌주와 비교된다.[28] 왜 개고기가 없어져야 하는가?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대상에 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엄격한 위생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축산물위생관리법의 적용 대상에 개를 포함시키면 될 일인데, 왜 반대하는가? 개고기가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29] 도축되는 개들이 안쓰럽더라도 몇 번이나 강조되었듯이 이는 인류 전체가 이미 닭, 소, 돼지 등을 이용해 온 방식이며, 사실 인간이 아니더라도 육식은 자연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일이므로 악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30] 물론 그래도 축산물위생관리법을 안 지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어느 법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31] 다만, (비록 축산물위생관리법에 의한 엄격한 위생 관리를 받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현재의 법상으로도 위생에 대한 법적 규제가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가령 판매된 개고기가 사람의 건강을 해칠 정도의 비위생적이라면 식품위생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타인의 개를 훔치면 형법에 의해 절도죄로 처벌받는다. 다만 법이라는 것은 기존 법으로 적용하기에는 사각지대가 생기거나 보다 구체화할 필요성이 생길 때 입법하는 것도 있다.[32] 이른바 과잉금지원칙[33] 쉬운 예로 평범한 성인의 경우 면허증이 없더라도 자신의 소유로 차량을 구입하고자 하는데는 국가가 일절 개입할 수 없으며 법적으로도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그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운전면허 자격증을 보유하도록 하고 있다. 소유자가 운전하고자 하는 자유를 국가가 제한하는 타당한 여러가지 이유중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질서유지와 공공복리이며 덧붙여 타인과 운전자 본인의 안전등 여러 합당하고 타당한 이유가 따라주어야 한다.[34] 책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영문학 전공이고 번역자는 법학 전공이라서 참작 여지는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개고기 관련 번역자 개인 감상을 쓸 시간에 차라리 원문을 제대로 번역에 좀 더 충실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애초에 문학이 전공자들만 건드릴 수 있는 특수 학문 분야도 아니고...[35] 반려견 행동 전문 수의사 설채현의 말에 따르면 개털이 사람 기관지에 해롭다는 연구로써 밝혀진 통계는 없다고 개인 유투브 방송에서 밝힌 바 있다.[36] 동물 알러지의 정확한 원인은 털이 아닌 동물의 피부 즉, 각질이다. 애시당초 털은 미시적 단위로 보면 굉장히 큰 물체라 사람의 기관지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입으로 삼켜봤자 기도가 아닌 식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기관지는 털을 만날 일도 없다.[37] 적지않은 이들이 동물애호가, 보호론자들을 이런식으로 비아냥거리지만 논할 가치도 없는 저질스러운 언행일뿐이다. 비용 문제로만 따져도 인간의 복지를 위한 비용은 동물의 복지를 위한 비용을 아득하게 초월하며, 무엇보다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봉사는 그 대상을 위해 행한다는 것에 진정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었든 동물이 되었든 봉사의 대상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중시하게 된다면 봉사의 의미는 퇴색된다. 정녕 타인을 위해 경제적 기부를 하고 싶다면 일상에서 소비하는 물품을 기부하는 것이 당연히 더 낫고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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