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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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백제의 제4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3대 기루왕의 장남.
2. 생애[편집]
재위 기간은 39년으로 결코 짧지 않지만 《삼국사기》를 통해 남겨진 기록이라고는 고작 7줄뿐이다. 그마저도 일식이나 별의 움직임 같은 천문 현상[1] 말고 업적이라고 할만한 건 북한산성[2] 을 축조했다는 기사가 전부다.
그 외에 165년에[3] 일식에 관한 기사가 있다. 다만 같은 해 1월의 일식 기사가 《자치통감》에 165년의 일로 그대로 등장하는 걸로 봐선 155년보다는 165년으로 보는 게 더 옳아보이긴 하지만, 신라가 신라 건국기로 설정한 시기부터 낙랑군이 망하는 4세기 초 일식 및 월식 기사를 주로 낙랑군에서 입수한 일월식 기사로 채운 정황이 역력하기에[4] 정황으로 봐선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백제로 도망온 신라의 반역자인 아찬 길선을 돌려보내지 않은 걸 계기로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아달라 이사금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고, 신라군이 군량이 떨어져 물러나서 막아낸 걸로는 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나라를 언제 배반할지 모르는 자를 받아주다니 님 바보 아님?"이라는 식으로 혹평했다. 이후 근초고왕 대에 등장한 인물 사기도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다시 백제로 귀순했기에 평가가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고고학적으로는 백제든 신라든 이 시기에는 각기 한성과 경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기지만 애초에 아달라 이사금이 재위했던 시기가 165년일 가능성 자체가 대단히 적은 상황인데, 《삼국사기》상 연대보다는 상당히 후대에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3. 기타[편집]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초기 기록에서 많이 드러나는 문제점이지만 재위 기간이 굉장히 길어 계보에 의심이 있기도 한다. 개루왕 혼자 길면 몰라도 앞뒤로 다들 40~50년 정도씩 재위한다고 써 있는데 계산해보면 아들을 가진 시기나 수명이 부자연스럽다. 특히 다루왕이나 기루왕과 다르게 개루왕은 기록도 거의 없고 기루왕이 태자로 책봉하지 않은채 즉위하는데다가 아들이라고 불리는 고이왕과의 나이차도 심하게 나는 등 이유로 온조왕 직계, 초고왕계, 고이왕계를 모두 하나로 연결하기 위한 가공의 국왕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 제21대 왕인 개로왕이 '근개루왕'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사람과의 연관성 때문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기록상 개루왕은 초고왕과 고이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점과 개로왕이 왕족 중심의 왕권 강화를 시도해서 이와 연관있는 걸로 추측되지만 확실치 않다.[5] <도미 부부 설화> 건에서도 개루왕이 등장하지만 시기상 개로왕 시기로 보는 의견이 많다.
- 부여왕 해부루(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 된다),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해유류), 고구려의 제3대 왕인 대무신왕(해주류) 등 婁(별이름 루), 留(머무를 류) 등을 왕명으로 쓰는 왕들이 모두 해씨였기 때문에(비류는 流(흐를 류)자를 쓰지만 역시 해씨이다.) 婁를 쓰는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을 모두 마찬가지로 해씨로 보고[6] 해부루 → 우태 → 비류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으로 이어지는 소위 해씨의 비류왕계 왕가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다루왕 및 '루'자 돌림 왕들은 온조왕계와는 다른 왕통이 되며 후에 초고왕이 즉위함으로써 비류왕계 왕가가 물러나고 부여씨의 온조-초고왕계 왕가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7] 게다가 이후 고이왕이 집권한 뒤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권력 투쟁을 벌이다 근초고왕 대부터 초고왕계로 일원화되는데 고이왕 시기 우씨(우태를 통해 연관된다) 왕족의 대거 출현을 근거로 고이왕계를 비류왕계를 이은 우씨의 비류-고이왕계 왕가로 해석[8] 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초기 백제를 비류왕계 - 초고왕계, 초고왕계 - 고이왕계의 권력 다툼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 39년간 왕으로 있었지만 기록은 고작 7줄. 책계왕, 사반왕, 계왕, 혜왕 등에 비해 기록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재위 기간 대비 기록 수를 대입하면 거의 최고 수준으로 기록이 적은 왕이다. 5년에 한 줄도 안 되니 말 다했다. 게다가 천문 현상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남는 개루왕의 행적은 재위 5년에서 끝나기에 이후의 긴 공백 동안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28년에 길선이 망명했다는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대조했을 때 실제로는 재위 38년의 일이기 때문. 애초에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왕이니만큼 <신라본기>의 연표를 따르는 것이 올바르다. 백제의 제2대~제7대 국왕은 결사팔대라는 의혹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개루왕의 기록은 왕명이 같은 개로왕의 것이 된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개루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개루왕이 즉위하다
四年夏四月 한산에서 사냥하다
五年春二月 북한산성을 쌓다
十年秋八月 형혹이 남두를 범하다
二十八年春一月 일식이 나타나다[9]
三十八年冬十月 신라의 아찬 길선이 망명해 오다
三十九年 개루왕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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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불길한 천문 기록들을 역사적 사건을 은유한 것이라고 해석해보려고도 하는데 결국 결론은 알 수 없다로 귀결된다.[2] 그런데 현재 우리가 아는 북한산성이 아니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북쪽의 아차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아차산성 발굴에서 '북한산성' 관련 기와가 나온 번면 북한산에는 삼국시대 성터 유적이 확인된 바가 없다. 구리시 문서 참고.[3] <백제본기>에는 155년이라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는 165년으로 되어 있다.[4] 낙랑군이 망하는 4세기 초 부분이 꽤 적어지거나 부정확해지며, 일월식 기사는 이후 신라가 독자적으로 천문학적 역량을 키우는 수백 년 뒤로 가야 다시 정확해진다. 김용운 교수의 《한국수학사》 참조.[5]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초고왕과 고이왕의 관계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고이왕이 50년을 재위했는데 초고왕의 동생이라면 70살에 즉위해 120살까지 왕을 했다는건데 만약에 120살까지 왕을 하다가 죽었다는게 사실이라 해도 그 정도면 증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 뒤를 이은 책계왕은 고이왕의 아들인데 학계는 이를 토대로 고이왕은 초고왕 동생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초고왕과는 혈연이 꽤 멀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6] 해씨는 고구려 국성인 고씨와 동일시되고, 부여계 성씨로 추정되며 한성백제 때부터 활동한 귀족으로 백제 개국공신 해루도 있다. 후에 해씨는 대성팔족 중 하나가 된다.[7] 노중국. 1988.《백제정치사연구》[8] 천관우. 1976.《한국의 국가형성》, 노중국. 1988.《백제정치사연구》[9] 《이십사삭윤표》 등의 사서와 비교하면 이 날짜는 정확히 개루왕 38년(165년, 을사) 음력 1월 3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