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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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시조가 누구인가
3. 역사
3.1. 고려시대
3.2. 조선시대
3.2.1. 탄압
3.2.2. 복권
3.3. 현황
4. 인물
4.1. 고관대작
4.2. 문화인
4.3. 방송인
4.4. 체육인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려국성으로 고려 왕조 개창 이후 474년 동안 번성하였던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이다.

2. 시조가 누구인가[편집]


시조는 고려 태조의 증조부 국조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왕씨 성은 국조의 손자 세조 대에 이미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

국조세조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왕건의 조상이 왕씨 성을 썼는진 확신할 수 없다. 《고려사》 <고려세계>에는 태조 왕건의 조상이 누군지 알기 어렵다며 《편년통록》, 《편년강목》과 이제현의 <논평> 두 주장을 모두 실었다.

두 가지 주장을 요약하면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세조 용건 혹은 태조 왕건 대부터 왕씨 성을 썼다고 한다.[2] 반면 이제현은 국조 대부터 이미 왕씨 성을 써왔다고 주장한다.[3] 현실적으론 태조 왕건이 신라계 귀족이 아닌 고구려계 지방 토호란 걸 감안하면 원래 가문에 성씨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방 토호라고 해서 성씨가 무조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견훤의 아버지였던 아자개도 그 속성이 이씨(李氏)였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왕건의 가족 내력으로 보았을 때, 왕씨(王氏) 성은 이미 전부터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왕건의 사촌인 왕식렴왕만세, 그리고 그의 삼촌인 왕평달이 고려의 건국과는 상관없이 이미 왕씨 성을 쓰고 있었기 대문이다.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당나라의 숙종이 고려 \'의조'의 친부라 하지만, 이제현의 <논평>은 당 숙종이 고려 \'국조'의 친부라고 했다. 결국 둘 다 고려 왕씨 왕실이 당나라 이씨 황실의 직계 후손이란 걸 드러내고자 하는데, 이런 부분은 태조 왕건, 나아가 세조 용건, 의조 작제건 등 왕씨의 조상들이 신라 김씨들이 김일제의 후예를 참칭하는 것처럼 왕권의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한 숭조 사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재상이였다고 전해지는 왕산악이나 왕고덕, 당나라에서 무장으로 활약했던 고구려 유민 출신인 왕사례왕모중의 사례로 보았을 때 왕건의 선조들도 마찬가지로 고구려 멸망 전후로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 왕씨 귀족의 후손일 개연성이 충분하다.[4] 당장 북송의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는 고려 왕실인 왕씨가 고구려의 대족(大族), 즉 큰 씨족 또는 귀족이라고 서술되어 있다.[5]


3. 역사[편집]



3.1. 고려시대[편집]


지방의 유력 호족들과의 결혼으로 엄청난 수를 자랑했던 왕건의 자손들 상당수가 혜종~경종대의 왕위 다툼, 특히 광종대의 숙청에서 대거 살해되기는 했으나,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6]의 자손이나 왕건의 손자 현종이 살아남았고, 특히 고려 왕조를 중흥시키고, 100여년이 넘는 전성기의 서막을 연 명군 현종의 자손들은 매우 번창했다. 왕씨들은 고위 귀족과의 정략결혼이나 왕씨 일족간의 근친혼을 했고, 이는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상당한 수로 늘어났으리라 여겨진다.

다만 왕통에서 이어지는 직계는 인종을 마지막으로 급격하게 쪼그라든다. 인종 이후 의종부터 장성할때까지 성장하는 적자가 많아야 둘셋이었고 출신성분이 낮은 서자들만 많았다. 이런 왕자들을 스님으로 출가시키는 풍속에다, 무신정권과 몽골이라는 외부세력에 의한 권력다툼과 폐위 등이 더해져 차근차근 대가 끊어지기 시작해 우,창을 폐가입진으로 왕씨 호적에서 파냈을 땐 창왕의 18촌, 모계 9촌. 신종의 둘째 아들의 셋째 아들의 둘째 아들의 고손자인 공양왕이 왕위에 제일 가까운 왕족이었다.

3.2. 조선시대[편집]



3.2.1. 탄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왕씨 몰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노조는 고려 왕조의 정강군(定康君)이다.

-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6일 을미 1번째기사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개성 왕씨에게 약 20년에 걸친 시련이 닥쳤다. 태조 2년까진 도당과 대간이 왕씨를 주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에도 태조의 보호를 받아 무사했으나 태조 3년의 박위의 점괘 사건으로 유력 왕족들은 백수십명이 삼척, 강화, 거제에서 처형되고 방계들은 성을 바꿔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의 사돈, 7남 무안대군 이방번의 처가였던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7]와 그의 두 아들이 고려 왕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었지만 왕우가 병사하고, 두 아들 상장군 왕조(王珇)와 대장군 왕관(王琯)이 무인정사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 왕우의 대는 끊기게 되었다. 거기다 왕우의 장녀 삼한국대부인 왕씨는 이방번의 아내였는데, 자식도 없이 남편이 무인정사 때 사망하는 등 왕우의 자손들은 불운이 연달아 터졌다.

다행히 조선왕조가 안정된 태종 때부터 왕씨들에 대한 탄압을 풀어주기 시작해 세종과 문종을 거치며 복권되었다. 이중에 이름이 남은 이들이 후일 숭의전 부사로 고려 왕실에 올리는 제사를 맡게 되는 왕순례(王循禮)[8]와 개성 왕씨의 동양군파 중시조인 왕미(王亹) 등이었다. 왕미의 경우 그동안 외가 성인 민씨로 행세했다고 하는데, 《태조실록》 태조 3년 4월 26일 기사를 보면 왕손이 아닌 왕씨는 외가 성을 따르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3.2.2. 복권[편집]


태종 13년부터 왕씨들이 드러나도 처벌하지 않은 채 덮으며 넘어가고, 40여년이 지나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 왕조의 왕족들로 하여금 고려 왕실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에 따른 물품 등을 지급하는 식으로 예우해 주기 시작하면서 60여년 동안 계속된 왕씨 탄압이 잦아들고 차츰 복성했다. 세조생일 잔치에 왕순례를 초대해 2품에 준하게끔 우대했다.

단종~세조 시기부터 개성 왕씨는 사족의 일원으로 조선 사회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사족들은 중앙에서 벼슬한 쪽과 지역 향촌사회에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한 쪽으로 갈리는데 개성 왕씨는 후자쪽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789년 편찬된 《왕씨 족보》를 참고하면 전라도 지역, 구례여산, 조선 왕실의 본향이기도 한 전주에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구례 지역에선 왜란-호란 시기 의병활동을 바탕으로 확고한 지배 사족으로 자리잡았다. 다만 철학왕국인 조선 사회에서 내세울만한 이름난 학자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1789년 그때까지 전해오던 가전기록을 바탕으로 《왕씨 세보》를 다시 편찬했고, 태조 신성대왕 왕건이 수도로 정한 개성본관으로 했으며, 태조의 아들 중 종법상 서열이 15번째였던 왕원을 1세 조상으로 했다. 이것은 고려가 망한 지 거진 400여년 만의 일로 정조 대에도 개성 왕씨를 찾아내 본성을 쓰게 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과 교분이 있었던 왕희걸은 왕씨 문중에서 최초의 문과급제자로 기록되었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선조 때 왕의성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순조 4년에 지평(持平)·도승지로 증직되었다. 흥선대원군 대에는 대원군이 왕씨 인물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혀, 동부승지를 지낸 왕정양 등이 대단한 벼슬을 한 정치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3.3. 현황[편집]


왕미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 동양군(東陽君)파[9] 이외에도 평양공(平壤公)파[10], 양양공(襄陽公)파[11], 안경공(安慶公)파[12], 시중공(侍中公)파[13] 등 등이 존재한다. 현재 존재하는 개성 왕씨 인구 2만 명 중에 동양군파 이외의 나머지 파인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2천 명이니 이 성씨가 얼마나 조선 시대에 근근이 이어져 내려왔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수백의 본이 이어지는 조선의 전주 이씨나 신라의 경주 김씨밀양 박씨, 가야의 김해 김씨와 비교해본다면 그야말로 초라할 따름이다. 다만, 왕씨 복귀가 허용된 이후로도 복귀하지 않고 외가의 성이나 바꾼 성을 그대로 쓴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본향인 개성시와 매우 유사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기에는 각각 왕성(王姓)이랑 왕도(王都)로 흥했다가 고려가 망하자 그저 그런 존재로나마 없어지지 않고 후대로 이어나갔다는 점, 즉 흥망성쇠를 각각이 왕성(王姓)/왕도(王都) 역할을 한 고려라는 국가와 함께 했다는 점이 있다.


4. 인물[편집]



4.1. 고관대작[편집]





4.2. 문화인[편집]



4.3. 방송인[편집]



4.4. 체육인[편집]



5. 기타[편집]


  • 왕씨 일가의 대부분이 멸족을 당하게 되자 왕씨를 변형시켜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 차(車), 신(申)씨 등의 다른 성씨 혹은 왕을 상징하는 용(龍)의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려시대 과거합격자 명단인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과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에서 동일인이 성만 바꾼게 확인되는 옥씨(의령 옥씨 단일본)를 제외한 나머지 성관은 일방적인 주장외에 근거가 전혀 없다. 《개성 왕씨 세보》에 유(柳)씨, 이(李)씨 등 외가성으로 개성했다는 기록이 있는 왕씨들이나 태종 13년 왕거을오미가 외가성인 이씨성으로 살고 있었던 사례를 감안하면, 개성을 해도 외가성을 썼지 성씨를 만들어내는 사례는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옥씨는 문헌 기록에 남아 있는 근거 외에도 왕씨 집성촌이 경남 의령에 있을 정도로 근거가 많다. 다만, 개성 왕씨 족보를 보면 후손이 유(柳)씨로 변성했다는 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아마도 고려 왕비 중 유(柳)씨가 많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 거타지 설화를 베낀 의조 작제건과 원창왕후 저민의 설화를 바탕으로 서해 용왕의 후손을 자처했다. 우왕이 자신을 죽이러온 관원들에게 겨드랑이에 있는 비늘을 보여줘 혈통을 증명했다는 야사가 유명하다.

  • 왕서방의 임팩트 때문인지 해괴하게도 중국 성씨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왕씨성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다짜고짜 중국인으로 몰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왕씨가 중국 성씨라면 고려 왕조는 일절없는 중국 성씨가 한반도를 지배한 역사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편견의 희생 성씨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83년 초반에 삼양식품에서 왕서방면이라는 중국식 우동맛을 살린 라면을 내놓았는데, 왕서방면이 유행을 타는 과정에서 개성 왕씨 성을 가진 어린이들이 놀림거리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개성 왕씨 문중에서 항의를 해 동년 4월에 중화 우동면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은 종영된지 꽤 된 MBC타임머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왕서방(?) 열 받았다!(7회, 2001년 12월 30일 방송분)"는 제목으로 극화한 바가 있으며, 타임머신 제작진이 삼양식품의 홍보 팀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왕서방면에서 중화 우동면으로 상표를 바꾸는 데만 비용이 무려 1983년 당시 거액이었던 7억 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러한 거액을 감수했던 건, 삼양식품의 회장이 학창시절 집단따돌림의 피해자였기에, 놀림을 당하는 어린이들의 괴로움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라고.[14] 또한 성범죄영구제명된 전직 유도인인 왕기춘의 경우도 데뷔 초기부터 이름만 듣고 중국인으로 안 사람이 많았을 정도다. 그러나 왕기춘은 조상들의 산소가 집안 대대로 정읍시에 있고, 왕기춘 본인도 정읍이 고향인 순수 토종 한국인이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중국인이나 조선족[15]이라며 손절한다느니 하는 반응들이 많은데, 물론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조롱의 의미로 그러는 경우가 많다.

  • 씨족원류와 족보상의 기준이지만 고려 왕실의 혼인 정책 등의 경로로 개성 왕씨의 피가 흐르는 가문들이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낙랑공주 왕씨에게서 파생된 언양 김씨나 의성 김씨처럼 다양한 본관의 김씨들 상당수가 있으며 파평 윤씨인천 이씨 같은 가문들도 이들 낙랑공주 소생의 김씨 후손들과의 혼인을 통해 태조 왕건의 혈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6. 관련 문서[편집]


[1] 이상 국조의 족보관계는 《고려사》가 인용한 이제현의 <논평> 기준이다.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또 다르다.[2] 의종 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인용.[3] 실전된 기록 《왕대종족기》와 《성원록》을 인용.[4] 사실상 가장 유력한 설이기도 하다.[5] 고려도경은 고려를 고구려의 연장선으로 보았으며 왕씨가 고씨를 대체하였다는 식으로 고려의 개창을 서술하고 있다.[6] 어머니는 후삼국통일전쟁의 명장 유금필의 딸 동양군부인 유씨였다. 효은태자 본인은 광종때의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나 그 아들들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고 강조의 정변 이후 복권되었다.[7] 신종의 7대손이자 충렬왕의 외현손자로 공양왕의 형제였다. 이방우의 서자 순녕군 이덕근과 무안대군 이방번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이외에도 흥국사 공신 심덕부의 아들이자 세종의 장인이 되는 심온의 아우 심정, 태종의 총신 박석명을 사위로 두어 조선 건국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8] 성과 이름을 고쳐 제우지라는 성명으로 살았으나 이웃과 밭 경계를 놓고 다투다 이웃이 관가에 왕씨라고 밀고해서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때 왕씨인 것이 들통났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문종의 어명으로 복권되었다.[9] 광종 때 피살된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로부터 파생되었다. 정사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개성 왕씨 족보》에는 왕원(王垣)으로 기록되어 있다.[10] 평양공의 다른 후손은 모두 대를 잇지 못하거나 조선 건국 후 성씨를 바꾸었고, 승화후영녕공의 동생인 사공 왕정(王珽)의 후손만이 평양공파로 남아있다.[11] 신종의 차남 양양공 왕서(王恕)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그의 6대손이 공양왕이다.[12] 고려 고종의 차남 안경공 왕창(王淐)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족보상 안경공부터 왕희까지는 독자로 이어지는데, 왕희는 본래 개성 왕씨가 아니라 전주 왕씨였다. 자세한 것은 왕희 문서 참조.[13] 충정왕서자 왕제(王濟)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충정왕 항목 참조.[14] 참고로 1983년 당시 강남의 60평(약 200㎡) 아파트가 5000만 원 하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1983년 당시 7억 원을 2020년 화폐 가치로 환산하자면 24억 6,54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다. #[15] 조선족은 엄연히 한국계 중국인이다. 당연한 상식이지만 성씨는 혈통에서 나오는 거고, 혈통이 한국이니 응당 한국계 성씨를 가지는게 자연스러운데도 중국계 성씨로 착각해서 조선족으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무식한 소리이다(...). 물론 한족 혼혈이거나 모종의 이유로 한족의 성으로 개성(改姓)한 경우이면 한족 계열 성씨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다. 그렇게 몰아가는 사람들이 이런거까지 감안했을 확률이 몇이겠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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