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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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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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5대 황제
세종 헌황제 | 世宗 憲皇帝


파일:Portrait_of_the_Yongzheng_Emperor_in_Court_Dress.jpg

출생
1678년 12월 13일
청나라 북경 자금성 동육궁 영화궁
사망
1735년 10월 8일 (향년 56세)
청나라 북경 원명원 구주청안전
능묘
태릉(泰陵)
재위기간
제5대 황제
1722년 12월 27일 ~ 1735년 10월 8일 (12년 27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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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 )

중국식 : 인쩐(胤禛)
만주어 : 인전( )
한국어 독음: 윤진
부모
부황 성조 인황제
모후 효공인황후
형제자매
35남 20녀 중 4남
배우자
효경헌황후 오랍나랍씨
후궁
30명 [ 펼치기 · 접기 ]
효성헌황후 뉴호록씨, 돈숙황귀비 연씨
순의황귀비 경씨, 제비 이씨, 겸비 유씨, 영비 무씨
무빈 송씨, 귀인 이씨, 귀인 곽씨, 귀인, 해귀인
귀인 장씨, 노귀인, 나상재, 상재 이씨, 상재 마씨
춘상재, 상재 고씨, 상재 상씨, 상재 고씨, 길상재
답응 소씨, 영답응, 왕답응, 격격 소씨, 격격 장씨
격격 이씨, 격격 장씨, 궁인 난영, 궁인 운혜

자녀
9남 4녀
신장
169cm[1]
한호
화랴순 톱 한( )[2]
칸호
나이랄투 톱 칸( )[3]
묘호
세종(世宗)
시호
중국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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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만주어 : 텀거투러허 황디( )
연호
1723년 ~ 1735년
중국식 : 옹정(雍正)
만주어 : 화랴순 톱( )


1. 개요
2. 후계자 다툼, 황제 즉위
3. 업적
3.4. 지정은제 확립
3.5. 부정부패 근절
3.7. 개토귀류(改土歸流)
4. 일 중독자 & 악덕 고용주
5. 대의각미록
6. 사망
7. 가정 관계
8. 평가
9. 기타
10.1. 드라마
10.2. 소설
10.3. 영화
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청나라 제5대 황제.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부황이 열어젖힌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어나간 군주이다. 강희제의 치세가 워낙 길었기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즉위하였고,[1] 이후 13년 동안 재위했다.[2]

부친과 아들의 재위기간이 길고 그들의 화려한 업적들에 비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내치에 전념한 것과 독한 인상 탓에 근대까지도 비교적 존재감이 묻혀있던 군주였으나, 현대에 연구가 진행되면서 강희제의 오랜 치세 이후에 불안정할 수 있었던 제국을 있는 힘껏 통치하여 청나라의 전성기를 유지시킨 군주라는 재평가도 받고 있다.


2. 후계자 다툼, 황제 즉위[편집]


강희제 17년인 1678년 12월 13일, 강희제의 4남이자 덕비 우야씨의 장남으로 자금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우야씨는 서비(庶妃)[3]로 옹정제를 기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황귀비이자 내궁을 관리하던 동가씨[4]의 유일한 자녀가 요절했는데 강희제는 그녀에게 옹정제를 양자로 줘 버렸다. 동가씨는 옹정제를 친자식처럼 총애하며 길렀고 강희제가 정무를 보는 도중에 붓을 놓거나 옥새를 가져오는 등 강희제의 잔시중을 들게 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주었다고 한다.[5]

청나라 시절 황자들의 교육은 상서방(上書房)이 맡았는데, 강희제는 직접 나라의 특급 인재들을 뽑아 황자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옹정제를 비롯한 황자들은 상서방에서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3가지의 언어를 배웠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들을 익힘과 함께 말 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익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린 나이에 춘일독서, 하일독서 등 시가를 창작하여 부친을 기쁘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옹정제는 아버지인 강희제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16세 때 공자의 고향 곡부로 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낸 일, 19세 때 부친이 최후의 몽골 제국으로 불리는 준가르의 갈단 칸을 공격할 때 따라가서 정홍기의 군영을 관장한 일 등 여러가지 일을 거들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워 옹친왕(雍親王)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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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가 살았던 옹친왕부, 옹화궁(雍和宫, 융허궁)[6]

강희제에게는 아들이 모두 35명이 있었는데 어려서 죽거나 양자로 준 아들을 제외하면 26명이 있었다. 이 아들 가운데서 둘째 아거(阿哥)[7] 윤잉(1674~1725)만이 효성인황후가 낳은 아들이었다.[8] 적장자인 윤잉을 강희제는 몹시 귀여워했다.[9] 강희제는 그렇게 예뻐한 적장자인 윤잉을 빠르게 황태자로 만들고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윤잉은 강희 36년(1697년) 3차 준가르 원정 때 강희제 본인은 직접 원정에 참전하였고 윤잉을 베이징에 두어 정사를 대신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윤잉은 이때부터 강희제의 신뢰를 잃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윤잉은 자신의 심복들을 보내는 등으로 부친의 행동을 관찰하고 탐문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참다못한 강희제는 윤잉을 한 차례 황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감금시킨다.[10]

윤잉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쫒겨나자 황자들은 저마다 황태자가 되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황태자당(윤잉의 붕당), 황장자당, 황8자당, 황4자당 같은 파당이 형성되었다. 강희 47년(1708년) 9월, 강희제는 황태자 폐위 사건에 연루 된 황태자, 황장자, 황3자, 황4자(옹정제), 황5자, 황8자, 황13자를 연금하였고, 황태자와 황장자, 황13자를 제외한 황자들은 11월 석방되었다. 황태자를 복위시킬 마음이 있었던 강희제는 11월 14일, 여러 황족과 대신을 불러서 황1자를 제외한 황자들 중에서 황태자를 추천하라 명하였고 악륜대, 규서, 왕홍서, 마제, 동국유 등 황8자당에 속한 많은 대신들이 황8자를 추천하였다. 강희제는 이를 빌미로 황8자가 황장자와 결탁하였으며 당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하였고, 황8자당의 세력을 약화시킨 다음 이틀 뒤인 16일 황태자를 석방하면서 황태자 복위 의사를 밝혔다.[11] 그리고 강희 48년(1709년)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강희 51년(1712년) 윤잉은 몇몇 대신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다시 황태자 자리에서 쫒겨나 함안궁에 연금되고 만다.

이렇게 태자 윤잉은 다시 폐위되었고 능력 있는 황자들이 다시금 황태자 자리를 노리고 황위 다툼을 벌인다. 특히 황4자(옹정제), 황8자, 황14자들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하여간 황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와중에, 옹정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융과다(隆科多), 연갱요(年羹堯) 등 자신의 세력은 모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견제받을 만큼 크게 파당을 만들지는 않고, 후계자 쟁탈전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늙고 기력이 떨어진 강희제는 말년에 아들들의 이런 행각을 보고 진저리를 치던 바, 옹정제의 이런 태도는 강희제의 마음을 잘 공략했다. 더구나 마침 강희제는 옹정제의 아들이자 뒷날의 건륭제인 어린 손자 홍력의 귀여움과 똑똑함에 흠뻑 빠져있던 바, 손자에 대한 애정은 옹정제에게도 영향을 끼쳤다.[12] 최후까지도 불분명했던 후계자 자리였지만 강희제는 죽기 전에 옹정제를 후계자로 만들어 놓았다. 다만 이 과정은 상당히 논란이었던지라 옹정제의 정적들은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조서를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옹정제는 정적들을 마구 패서 이런 논란을 잠재웠다.[13] 이 논란이 사라진 건 강희제의 유조가 공개된 2013년이다.


3. 업적[편집]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문무가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던 데 반해 철저할 만큼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었다. 선제인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 평정, 대만 정복, 러시아와의 분쟁, 외몽골 정복 등을 감행하고 준가르와 전쟁을 치르는 등 외정에 직접 관여하여 성과[14]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교하면 철저하게 평화주의나 부전(不戰)주의로 일관했는데, 즉위 초기에는 연갱요가 서북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1731년 티베트의 갈단 체링에게 청군이 대패한 뒤로는 군사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는 작업에서 거의 손을 놓았다.

그렇지만, 내치에서는 선제 때 마무리가 안 된 수준의 내정 체계를 크게 정비하여 강희제와 거의 동급의 찬사를 받는다. 팔기군 체제를 손보고 군기처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으로 권력을 황제에 집중시켰고, 1727년 러시아캬흐타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명확히 그었다. 또한, 하술되는 '본인 즉위 문제'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황태자 밀건법[15]도 시행했다. 다만 만주족 후비에게서 난 소생이 본인 뿐이던 건륭제 등의 사례로 실제 이 법의 효과가 있었던 때는 적다.[16]


3.1. 군기처[편집]


본래 황제 중심의 정치에서는 황제가 모든 일을 알아야 했는데, 이런저런 관리를 거쳐서 올라오는 상소문(제본)은 비밀성이 뚝 떨어지다 보니 황제가 쉽게 휘어잡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옹정제는 황제에게 곧바로 바칠 수 있는 사적인 연락통인 주접[17]을 강화시켰다.

이를 통해 옹정제는 각 관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알아냈는데, 아무래도 황제가 모두 하기엔 일손이 모자란지라 군기처라는 주접 전담 부서를 만들어 돕게 하였다. 이들은 황제의 최측근이었고, 황제 집무실 근처에서 숙직하며 필요할 때마다 바로바로 대응했다.

여담이지만 이 주접이 유명한 까닭은 '주비 유지'란 것 때문인데, 쉽게 말하면 빨간펜 선생님이었다. 다만 부정적이라서 문제였다. 황제와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접이다 보니까 당연히 황제가 직접 답장을 썼는데 그 답장이 '그래 잘 받았다'가 아니라 보낸 사람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내용이 이게 뭐냐', '왜 긴 종이에다 적게 써서 종이를 낭비하냐' 등등. 오죽하면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걸 두고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 군주'라고 평할 정도.[18] 이런 옹정제의 비밀 정치에서 주고받은 편지뭉치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자금성의 구석진 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이들은 추리고 추려서 112권에 달하는 <옹정주비유지>라는 제목의 전집으로 정리, 출판되었다. 각종 욕설과 비난이 자유자재로 쓰이지만 악플만으로 일관하지 않고 열일하는 부하한테 선플도 달아주는 등[19] 정조 어찰첩의 대륙 스케일이라 볼 수도 있을 듯.


3.2. 숙청[편집]


옹정제가 황제에 올랐을 때 사정은 불안한 점이 많았다. 티베트 정벌에 나섰던 친동생인 황자 윤제는 군사력을 손에 쥐었고, 융과다(隆科多)와 연갱요(年羹堯)라는 측근들은 분명 유능했지만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이복형제들이었던 강희제의 다른 황자들도 마찬가지로 위협적인 인물들이었다.

옹정제는 무자비했다. 온갖 꼬투리[20]에 말도 안 되는 듯한 죄명을 붙여 윤제와 그의 가족, 측근들을 때려잡았고 다른 형제인 윤사는 아키나(akina, 阿其那), 윤당은 서스허(seshe, 塞思黑)라는 호칭으로 부르도록 했는데 이는 만주어로 각각 개와 돼지를 뜻하는 말이다.[21] 옹정제는 이렇게 형제를 탄압하고 유배시키고 집안에 가두는 등 어쩌면 악랄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형제들을 잡았다.[22]

때마침 서북 지역의 전쟁에 나섰던 옹정제의 신하 연갱요가 승리를 거두면서 옹정제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만약 이 전쟁이 뜻한 바대로 끝나지 않았다면 다른 황자들에게 공격받았을 수도 있지만, 승리를 거두면서 자신의 위상을 제대로 잡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 연갱요가 문제였다. 승리를 거둔 데다 옹정제에게 매우 좋은 대접을 받자 연갱요는 자신감이 넘쳐서 무례하게 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옹정제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군에서 연갱요가 가지는 영향력이었는데, 연갱요와 함께 군대를 둘러보던 옹정제는 병사들이 땀에 젖어 몹시 힘들어 하자 말했다.

"날이 더운데 중무장을 하고 있으니 고생들이 많구나. 모두 갑옷을 벗고 쉬도록 하라."


하지만 놀랍게도 연갱요는 침묵을 지켰고, 병사들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옹정제는 못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번 말했으나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옹정제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가 돼서야 연갱요가 느긋하게 말했다.[23]

"황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희들은 옷을 벗고 쉬거라."


그때가 돼서야 병사들은 옷을 벗었다. 이 모습을 본 옹정제는 연갱요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손을 대진 않고 오히려 "쉬지 않고 일을 하려는 모습이 가상하다."라는 듣기 좋은 말로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연갱요의 부하인 악종기의 위상을 높여주며 정보를 수집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이를 갈면서 기회를 엿보던 옹정제는 즉위 3년째인 1725년, 연갱요를 숙청하는 데 나서기 시작한다. 이 해의 2월에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데다 하늘에 좋은 길조가 나타나자 많은 신하들이 옹정제의 덕을 칭찬하며 아부하는 말을 올렸는데, 물론 연갱요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글을 쓸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朝乾夕惕)는 말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夕惕朝乾)라고 바꾸어 적어버렸다.

연갱요가 실수는 했지만 큰 일은 아니었는데 옹정제는 이 일을 꼬투리 삼아 연갱요를 마구 공격하고 비난했다. 그와 함께 동시에 연갱요의 영향에 있는 지방의 관리들을 경질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임명하며, 신하들에게는 "요새 연갱요가 너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니 조심하라."는 식으로 정치질을 해서 그의 영향력을 없앴다. 끝내 연갱요는 버티지 못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사후 연갱요의 재산은 옹정제에게 모두 몰수된다. 사실상 옹정제에 의해 숙청당한 셈.

다음 대상은 바로 외삼촌인 융과다였다. 그는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역시 그 권력은 그냥 두고 보기에는 상당했으니 옹정제는 융과다를 제거하려 했다. 융과다가 국경 문제 때문에 러시아 사신과 협상을 하러 떠난 사이, 옹정제는 그를 체포하고 베이징으로 압송하여 41가지의 죄를 묻고 그를 처리했다.[24] 다만 연갱요와는 달리 옹정제는 융과다에게는 최소한의 동정을 보였는데, 목을 베고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며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 대신 작은 집에 연금시키고, 융과다가 연금된 지 1년 만에 사망하자 장례도 치러주었다.

연갱요의 후임 천섬총독이었던 악종기도 옹정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준가르는 티베트 쪽을 배회하며 청나라의 국경을 교란시켰기에 옹정제는 준가르를 물리치려고 했지만, 적의 상황을 잘못 판단한 옹정제는 예상 외로 막강한 준가르의 전력에 고전했다. 그러자 옹정제는 최전선 지휘관인 악종기를 희생양 삼아 크게 질책했고, 악비의 후손인 녹영 출신 그지깽깽이라고 악종기를 멸시하던 만주 관료들이 때맞춰 악종기를 탄핵했다. 악종기는 안절부절 못하며 필사적으로 지키고 수비하려 했지만 끝내 모든 관직을 잃고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악종기는 15년간이나 콩밥을 먹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금천 반란의 조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사천 지역에서의 오랜 공적과 경험을 재평가받아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3.3. 문자의 옥[편집]


옹정제의 탄압은 측근과 형제들만 머물지 않았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文字之獄)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시기를 걸치며 더욱 강화시켰고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다.

강서성에서 과거를 책임지는 관리 사사정은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시제를 냈는데, 유(維) 자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이라 해서 옹정제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해 구족을 베어버렸다. 문제는 이게 창작이 아니라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25] 또 한림학사 서준이 '폐하'(陛下)의 '폐'(陛) 자를 들개를 뜻하는 '폐'(狴)자로 바꾸어 쓰자 그를 죽여 버리기도 했다.[26] 이렇게 무자비한 탄압에 옹정제의 권력은 커지기만 했다. 설령 형제나 아들이라도 황제인 자신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하는 신하임을 강조하여 사적으로는 형제나 아들이나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지간임을 강조하였다.[27]

전설의 무기인 혈적자가 이때 옹정제가 보낸 환관 무사들이 숙청 대상자를 암살할 때 썼던 무기라고 전한다.


3.4. 지정은제 확립[편집]


지정은제는 명나라 때의 일조편법(一條鞭法)에서부터 출발한다. 당시 지방에 세력이 컸던 향신세력(鄕紳勢力)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이에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다.

그때까지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점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그것을 일관화시켜 과세 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하던 은으로 납세시켰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국고에는 10년분의 식료와 4백만 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세, 노역을 대신 하는 정은, 잡세, 잡역 모두 은으로 내게 했는데, 이때쯤이면 민간에서는 화폐 경제가 활발해졌고(무협 소설이 그래서 배경으로 명나라를 쓰기가 편하다) 나라 입장에서도 가격이 요동치는 현물보다는 화폐가 편했다.

청나라 시기에도 이런 일조편법은 쭉 계승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는데, 그 하나만을 꼽자면 지방의 유지들은 관리들과 유착해 자기들 세금을 일반 농민들에게 떠넘겼고, 못살겠다 싶은 농민들은 달아나서 나라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못 얻었다. 특히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워낙 많이 도망쳐도 관리들이 책임을 피하려고 숫자를 속이고 하다 보니 정세(인두세)를 매기기가 힘들었다.

정역(征役), 즉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려면 인구 조사는 필수인데 가난한 농민들은 대책이 없으니 도망가거나 납세를 안 하고, 부자들은 당연히 이를 피해버렸다. 나라의 재정은 엉망이었고, 관리들도 문책을 겪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청나라 강희제 50년인 1711년에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실시되었다. 정세는 사람의 머리수만큼 걷는 것. 결국 사람이 늘어나면 더 걷어 들이는데, 바로 이 해인 강희제 50년에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켰다. 말 그대로 세금이 더 안 늘어났다.

이는 엄청난 뜻이 있는데 이때부터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났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애를 많이 만들어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했으나 정세 대상인 농민들이 도망쳐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풀기 위해 지세 1냥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하도 큰 일이기에 우선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끝내 시작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선 반대가 극심했다. 정세를 지세에 통합하면 토지의 소유자는 세금이 늘어나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세금이 사실상 면제였다. 당연히 땅 가진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야하는터라 반대했다.

1726년, 향시에 응시한 천여 명의 응시생들은 단체로 시위하면서 항의했고, 상인들에게는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다. 지정은제에 찬성하던 순무 이위(李衛)[28]는 이들을 간단하게 때려잡아 처벌했다. 그 뒤 2년 동안 지정은제는 복건, 섬서, 감숙, 강서, 호북, 강소, 안휘성을 걸치고 산서성에서도 시행해 건륭 연간에는 완벽하게 정착했다.

옹정 5년, 계주의 지주 서리 진순예(秦順兒)는 지세를 납부하라고 재촉했지만 지방의 유력자들은 반발하고 거부하며 오히려 진순예를 탄핵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진순예는 그대로 두고 지세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때려잡았다.

당시 중국의 사회계층들인 향신(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사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 관리나 대지주, 유력 인사 등)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실질적인 향촌 지배자였다. 이들은 지세 납부에 반발하며 계속해서 저항했는데 1727년 동광현의 지현 정삼재(鄭三才)는 혀를 내두르면서 황제에게 이렇게도 보고했다.

"이곳의 악랄한 향신들이 온갖 구실로 관을 위협하고 지세를 내지 않아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격노한 옹정제는 진상 조사를 철저하게 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향신들은 영향력이 워낙 커 관리들도 다루기가 힘든 존재들이었기에, 순진한 지방관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고...

당시에 얼마나 지세 납부에 대한 향신들의 반응이 나빴나 하면,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퍼져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아예 향시의 시험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누군가가 나가면 응시자들의 답안을 뺏어서 찢어버렸다. 호광 지역에서도 이들은 단합해서 지세 납부를 거부하며 관과 맞서면서 뻗댔다.[29]

옹정제는 이에 강력히 대응했다. 응시생들이 단체 활동을 한 번만 더 벌이면 영원히 응시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산동 지방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 명의 공명을 모두 박탈시키는 등 불이익을 주거나 벼슬길 자체를 아예 막아버렸고, 지세를 미납한 사람은 모조리 체포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 끝에 향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로 바뀌었고, 지정은제를 확립했다. 즉 현대 중국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밀어붙여서 해낸 것이다. 심지어 이때 중국은 영토도 넓은 주제에 교통도 통신도 극악이라 각 행정 구역 경계에 숨어사는 사람을 못 잡아내던 때였고, 향신들의 힘이 지방관보다 강한 것도 당연한 데다, 이미 그놈의 '꽌시' 문화로 지방관과 향신이 결탁하기 쉬운 시대였다.[30] 이를 극복해 낸 것은 그야말로 조세 행정에 있어 몹시 철두철미했다고 볼 수 있다.


3.5. 부정부패 근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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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설상의 고대 신 중 하나인 신농에게 제사를 올리는 옹정제의 모습

옹정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 문제를 가장 많이 손봤다. 명·청 시대에는 모선(耗羨)이라는 공공연한 관행이 있었는데, 본래 지정한 세금보다 쌀이나 은을 조금 더 걷는 것이었다. 이 관행은 기본적으로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부가세의 필요성과 관리들의 봉급이 너무 적다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청나라 시대, 북경의 문무 관리들의 1년 봉은은 다음과 같았다.[31]

품계
봉급
품계
봉급
품계
봉급
품계
봉급
품계
봉급
1품
180냥
2품
150냥
3품
130냥
4품
105냥
5품
80냥
6품
60냥
7품
45냥
8품
40냥
정9품
33냥 1전
종9품
31냥 5전

관료에게는 봉은 외에 봉미도 지급했다. 봉은 1냥 당 봉미 10말을 추가했는데, 외직에 나간 문관들은 봉미가 없었고, 무관의 봉은은 북경에 있는 무관의 절반이었다. 이 계산으로 보면, 지방 최고의 수장인 총독은 연봉이 180냥, 포정사는 150냥, 안찰사와 염운사는 130냥, 도원과 지부는 105냥, 동지와 지주 80냥, 통판과 주동 60냥, 현령과 학부교수 45냥, 현승, 교유, 훈도 각기 40냥, 주부 33냥 1전, 전사와 순검 31냥 5전이었다. 재부는 12냥, 포병 8냥, 문자, 마부, 고사, 옥졸은 연봉이 6냥이었다.[32] 청나라 시대의 소설인 홍루몽을 보면, 제법 무난하고 사는 농민이 1년에 20냥 정도를 버니 말단 관리들은 봉급만으로 생활하자면 사실상 빈민이었다. 더구나 상사의 접대, 지인과 자신을 추천해준 은인에게 주는 선물, 부족한 행정 비용 문제까지 겹친다면?

이런 상황에서 세금을 규정액보다 조금 더 걷는 "모선"은 관리들 입장에서는 생계와 임무 수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었다.[33] 강희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1냥을 걷을 때 1할만 걷는다면 청렴한 관리"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선은 정규 세금이 아닌 부가세이고 필요할 때마다 걷는 것이다보니 내는 사람은 내고 안 내는 사람은 안 내는지라, 지방의 막강한 향신과 지주들이 갖은 수를 써서 내지 않으려 하여 다른 농민들에게 세금이 전가되는 폐단이 심했다.

옹정제는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부정부패를 막으면서도 이런 관행을 완전히 근절시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에 모선귀공(耗羨歸公)제를 실시해서 모선을 정규 세금화하여 모선의 징수 과정과 징수량을 국가에서 파악해 부정부패가 일어날 소지를 줄였다. 그리고 관료들의 모선 징수를 합법화하는 대신, 그 수치를 정해 놓고 그 범위 안에서만 징수하게 했다. 또한 관료들에게 양렴은을 지급해서 관료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들은 가혹하게 처벌했다. 양렴은은 말 그대로 '청렴을 기르는 은'이라는 의미인데, 명청대의 관료 봉급이 중국 역사상 역대급으로 낮았고, 관료가 현실적으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계는커녕 자비로 지출하는 경비조차 충당하기 힘든 구조를 감안하여 원래 녹봉의 최대 300배에 달하는 양렴은을 관료에게 지급하여 관료들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대신 부정부패에 대해서 엄단하는 정책을 취했다. 관료의 봉급이 지나치게 낮은 것 자체가 부정부패의 한 유인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했던 것이다.[34]

만약 모선귀공 제도를 했는데도 또 다른 부패가 있다면 오히려 새로운 제도는 부담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서 옹정제는 각 성의 지세 보유량을 확실하게 파악하면서, 측근들을 모아 적자 상황을 관리시켰다. 적자가 나면 책임자가 사재로 채워야 했다. 그리고 조사해서 세금을 착복한 사람이 나오면 옹정제는 만주족이든 몽골의 귀족이든 한족 신사층이든 예외없이 모조리 처벌했고, 이들은 추징금을 납부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메워야 했다. 심지어 강희제의 자식들까지 착복한 세금을 메우기 위해 가재 도구와 집까지 팔아 황제에게 돈을 바쳤다.[35]

중앙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도 이러한 조사는 철저했다. 옹정제는 심지어 "몰수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각 부와 주현에서 세금을 횡령한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모조리 국고에 집어넣고, 은닉한 재산까지 찾아내서 몰수해 경매에 붙여서 팔았다. 지주의 착취로 부당하게 천민이 된 사람은 확실히 조사해서 다시 원래 신분을 회복시키고, 못된 지주는 강력히 처벌했는데 심지어 사형까지 시켰다.

이전까지의 관행으로는, 횡령죄가 드러나도 횡령금을 채워놓으면 관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이러한 제도의 허점(횡령한 금액을 채워놓기 위해 관리들이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마련함)을 깨달았다. 옹정제는 즉위하자마자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곧바로 관리들을 파직시켰고, 옹정제 3년에 호남성에서 조사를 시작하자 무려 호남성의 관원들 중 절반 이상이 부패혐의로 쫓겨났다. 허베이 성에서도 3년 이상인 고참 관리들 대부분이 파직으로 밀려났다.

관리가 백성들의 돈을 뺏어먹으면, 그 혜택은 관리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친척들까지 돌아간다. 그래서 옹정제는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가족과 친구는 물론 이런 친척들까지 다 털어 재산을 뺏어갔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은 자기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까지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꼼짝도 못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대신 횡령금을 배상하는 제도도 없앴다. 그리고 죄를 추궁받아 자살한 사람마저도 철저하게 털어서 가족들에게 책임을 물었기에, 탐관오리는 자살해도 그 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조금이라도 흠을 보이는 관리는 곧바로 파면하고, 후임자를 바로 임명했기에 많은 관리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대신할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비리가 너무나도 심한 관리나 지주의 경우엔 배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처형했다. 적자로 적자를 메우는 편법을 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36] 이러한 정책들은 끝내 성과를 내어, 옹정 10년차에는 원래 적자에 시달리던 하남성[37]이 70만 냥의 은을 보유하며 완연한 흑자로 돌아섰다. 뒷날의 역사학자 장학성(章學誠)은 이렇게 말했다.

"옹정제가 관료 사회를 개혁하여 기강을 바로잡은 일은, 실로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쾌거로다!"


그러나 옹정제의 개혁에도 한계가 있었다. 모선귀공제와 양렴은은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않았기에 나중에가면 점점 그 가치가 떨어졌고, 옹정제 사후의 청 조정이 물가 상승, 행정 비용 상승, 영토 확장, 인구 증가 등의 사회 변화에 맞춰 제도를 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38]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제도 자체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다. 결국 관료들은 다시 부가세인 누규를 추가로 징수해야 했고, 관료 사회의 기강은 다시 무너지고 부정부패가 퍼져나갔다.[39]


3.6. 농업 장려[편집]


옹정제는 매년 경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보여주기 식이지만 일전의 제왕들은 한두 번 하다 마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옹정제는 이를 정례화해서 계속했는데, 옹정제 밖에 그런 인물로는 1900여 년 전의 검소한 황제 한문제 정도가 대표적. 옹정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관리들에게도 강요했고, 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벌했다.

농업을 발전시키려는 옹정제의 생각은 파격적인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 전부터 중국의 왕조에서 농업을 중시했으나, 이는 생산량과 수탈하는 문제의 이야기지 농민의 사회적 지위나 이익하고는 무관했다. 그런데 옹정제는 농민에게 벼슬을 내려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당시 지방에서는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는 있어도, 생산을 지도하는 관리는 없었다. 옹정제는 경험 많고 모범적인 농민들을 8품의 벼슬에 임명하고, 농민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게 했다. 물론 이런 제도도 금세 폐단이 나타나 가짜 농부들이 이 벼슬을 받고 행세하는 일도 있었지만, 옹정제는 이런 사람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자수를 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여 이런 가짜 농부들을 없앴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잘 활용한 셈.


3.7. 개토귀류(改土歸流)[편집]


옹정제는 믿을맨 삼총독 중 유일한 만주인인 시린기오로 오르타이를 운귀광총독에 기용하여 묘족의 반란을 제압[40]하고 서남지역 지방 행정제도 전반에 걸쳐 일대 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개토귀류 정책이다. 당시 서남지역에서는 토사제(土司制)가 실시되었는데 이 제도는 토착 소수민족들의 우두머리로서 대를 이어 세습되는 토사들이 지방 세력을 키우고 군벌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할거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예로부터 남명 잔당이 할거하고, 남명을 일소한 삼번왕에 의해 발발한 삼번의 난에서도 주요 전역이었을만큼 중원에 비해 청나라의 통제력이 미약했음에도 청나라에게 있어 서남지역이 갖는 가치는 막대했다.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풍부한 구리 광맥이었다. 청나라 중앙정부가 아무리 지정은제를 실시해도 은 어디까지나 세금 납부의 편의성을 위한 고액권이었을 뿐, 일상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구리로 만든 동전이었기에 화폐주조권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청은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해야만 했다.[41] 동전의 유통량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면 은 : 동전의 교환비가 불안정하여 국민들의 납세 부담이 커지거나 국가 재정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전 국토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실질적인 화폐인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구리가 많이 산출되는 서남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

게다가, 경제적인 문제와 맞물리는 정치-행정적인 문제도 있었다. 사실, 청나라의 통치 체제는 하나의 중앙정부가 여러 세력들을 각각의 방식에 맞춰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청나라의 황제는 만주와 몽골의 지배자이자 한족들의 천자이며 티베트 불교와의 최왼 관계를 통한 티베트의 보호자,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를 겸하는, 동군연합과 유사한 다중 지배 통치 체제의 최정점에 있었다. 청나라가 괜히 키메라의 제국이라 불린 게 아닌 것.

각 직책들은 하나같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1. 만주와 몽골의 지배자 자리는 청나라 황실의 강력한 지지기반, 특히 무력기반인 팔기군을 제공했는데, 이는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이 많이 믿는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2. 한족의 천자 자리는 청나라의 재정적 기반을 제공받는 기반인데, 여기서 징수하는 세금을 통해 만주와 몽골의 빈약한 경제력을 보완하여 귀족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함과 동시에 그들이 제공하는 무력으로 한족들을 통제했으며,

3. 티베트의 보호자 자리는 제정일치 체제인 티베트의 상징적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와 최왼 관계를 맺어 한족에게서 비롯되는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에서 제공되는 무력으로 티베트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대가로 티베트의 실질적인 통치권,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만주-몽골의 귀족들에 대한 통치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부여받았고[42],

4.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 자리는 한족의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의 무력으로 통제하여 반란 세력을 통제함과 동시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경제의 혈액과 같은 화폐, 그것도 실질적으로 많이 쓰이는 동전의 주조에 필요한 구리를 안정적으로 수급하는 등,

이처럼 청나라는 매우 정교하면서 유기적이고 다원적으로 작동되는 통치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43] 무력과 경제력을 확실하게 장악해야 이러한 통치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핵심인 화폐 주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서남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것.

따라서, 옹정제는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서남지역의 토착 소수민족 세력을 견제하고, 나아가 이들을 중국화시키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인 유관으로 하여금 지방을 다스리게 하고 조정이 파견한 군대로 지방군을 대체하게 했으며 토지를 통일적으로 측량하고 세수표준을 통일시켰으며 세습적인 토사제를 폐지하고 부역제도를 개혁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으니, 이것이 큰 틀에서 "토사제를 폐지하고 유관제를 도입"한 개토귀류(改土歸流) 개혁의 골자였다. 이처럼 개토귀류 정책은 지방 할거 세력을 견제하고 변방을 공고히 했으며 서남 지역 소수민족의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인 한화, 그리고 경제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4. 일 중독자 & 악덕 고용주[편집]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과 쌍벽을 이룰 법한 지독한 일 중독자였고 청 세종 옹정제 역시 조선 세종처럼 신하들도 자기처럼 일하길 원해서 이를 강요하다시피한 악덕 고용주였다. 옹정제는 13년 통치 중 선제인 강희제를 본받아 정무에 주력했는데 이게 도가 넘어서 잠도 고작 4시간밖에 안 자는 정도로까지 심해졌다. 보통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하여 늦은 밤까지 대신들조차 질릴 만큼 철저하게 집무에 임했다. 특히 제위에 오른 이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순행을 가지 않았고 그저 수도인 북경에서 일만 계속 했다. 아직 어린 아이였던 8세에 즉위해 16세에 친정을 시작한 아버지 강희제나, 팔팔한 청년이었던 25세에 즉위한 아들 건륭제와 달리, 인생의 장년기인 44세에 즉위해서 황제의 업무를 집행한 시점이 다른 황제들에 비해 늦었음에도 재위 13년 만에 57세로 사망한 것은 과도할 만큼 세심하게 정무를 집행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다시 말해 과로사.

옹정제는 철저하게 지방관을 관리 감독하고 이중삼중으로 감시망을 펼쳐서, 늘 모반 가능성을 염두에 둬 세밀하게 관리들을 통제했으며 전국의 수많은 관리들이 보내는 보고서를 빠짐없이 읽고 모두 황제 전용의 붉은 먹으로 주석을 덧붙여 써서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업무를 보았다. 이를 주접(朱摺)이라 하며, 이후 청 황제 업무의 표준이 되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주접이 많아 청 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황제표 공포의 빨간펜 사실 이것은 선제인 강희제가 도입한 제도였는데 옹정제는 아버지가 만든 이 제도를 매우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그야말로 신하들을 한계치까지 인정사정없이 쥐어 짜낸 공포의 황제. 오죽했으면 청나라의 어떤 문인이 '옹정제 때 관리들 평가를 보면 부지런하고 유능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건 칭찬할 게 못 된다. 그 시대에는 그러지 못했으면 관직 생활을 못 했으니까.'라는 말을 했겠는가. 신하에게도 부담이었지만 이 주접을 통한 정치는 옹정제 본인에게도 엄청난 신체적 무리를 주었다. 옹정제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날아오는 주접에 모두 친히 답서를 작성했다. 이처럼 근면한 황제는 옹정제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중에는 정책 관련의 진지한 답변은 물론, 옹정제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가운데는 형편없이 일하는 관리에게 '월급만 축내는 밥버러지'라는 등 대놓고 면박하는 글까지 있다. 원문에는 '無知(멍청한 놈)', '無識小人(무식한 소인배)', '覽, 笑之(쭉 훑어봤는데 웃기는구나)' 등의 표현들이 있다.[44] 마치 뒷날 조선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 어찰을 연상케 하는 수준. 이것들을 보면 옹정제는 상당한 독설가였다. 이 때문에 신하들 입장에선 죽어나는데 내용을 빼먹고 쓰면 나중에 귀신 같이 알아서 그걸로 까고,[45] 쓸데없이 장황하게 써서 진짜로 중요한 내용을 못 보고하면 또 그걸로 욕먹었다. 그런데 어떤 관리들[46]은 정말 글 잘 쓰는 사람들에게 대필을 맡겨서 글을 적절히 꾸며 옹정제를 속이기도 했다니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듯하다.

이러한 관리의 철저한 감독, 감시에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하루는 왕운금(王雲錦)이라고 하는 신하가 신나게 마작을 하고 놀았다. 그런데 마작패 하나가 사라져서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자 퇴근해서 그냥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황제가 그를 불러 "어제 뭐하고 놀았냐?"고 묻자 깜짝 놀란 그 신하는 감히 황제를 속일 엄두가 안 나서 마작을 하고 놀았다고 이실직고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황제가 사라진 마작패를 그에게 던지면서 솔직하게 말했으니 이번은 봐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그 신하는 공포에 질려서 그 뒤로는 도박할 엄두를 못냈다는 이야기.

또 한 가지 에피소드로는 형부의 신하가 옹정제를 알현했는데, 황제가 담당하는 부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물어보기에 그 신하는 대충 "잘 돌아갑니다."라고 대답했다. 조금 뒤 황제는 다시 "그래, 거기 부서에 걸린 현판도 잘 있더냐?" 하고 물어봤을 때도 신하는 "예, 제대로 걸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그 관청 건물에 걸려있던 현판을 가져오게 해 그 신하 앞에 집어던졌다. 황제가 전날 밤에 측근을 시켜 관청의 현판을 떼어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형부의 현판은 본보기 삼아 한동안 원위치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쯤되면 전근대판 빅 브라더.[47]


5. 대의각미록[편집]


옹정제가 그토록 일 중독자였던 까닭으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하나로 옹정제가 제위를 계승할 때 강희제가 지목한 열넷째 아들(十四子)의 유언을 고쳐 넷째 아들(第四子)로 조작했기 때문에 관리들의 반대가 있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48], 삼번의 난이나 대만의 정씨(鄭氏) 일족(정성공 문서 참조)의 저항처럼 한족의 반란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족들의 반청 여론을 크게 의식해서인지 옹정제는 주원장의 13남 대간왕 주계의 12대손인 주지련을 연은후에 봉하고 황제 직속의 정백기 한군으로 대기시켜 신분을 안정케 하고[49] 선조들의 제사를 돌보게 할만큼 한족들의 반청모의에 대해 전전긍긍하며 당근과 채찍을 수시로 꺼내들었다. 특히 옹정제의 치세에는 유명한 반청(反淸) 모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천섬총독 악종기에게 반란을 권하는 통고문이 온 것. 앞서 말했듯 악종기는 악비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기에 악비처럼 한족을 위해 싸워주길 기대한 듯 싶지만 악종기는 이를 적절히 이용해먹으며 증거를 수집한 뒤 옹정제에게 보고해 버렸고, 옹정제는 사건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모반자의 사상적 스승인 여유량(呂留良)을 부관참시하고 그 일족과 친구들을 처벌하였으며 저서들을 압수해 파기했다. 이 직후 만주족의 통치가 천명(天命)을 따라 올바르다는 식의 주장을 담은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50] 직접 저술하여 널리 읽게 했다. 그러나 이 저술은 바로 다음 황제이자 아들인 건륭제가 금서(禁書) 처분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책에 논리적인 허점이 많아 되려 한족 지식인들의 공박의 빌미가 될 우려가 있어 금서 처분시켰다고.[51] 다행히(?) 문자의 옥에서도 이 책은 여차저차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2021년에는 대의각미록의 한국어 번역(!)판이 출간(알라딘)되었고,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는 대의각미록을 중심으로 옹정제를 조명한 <반역의 책(Treason by the Book)>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옹정제의 이런 기행에 대해 옹정제의 의지나 통치철학과는 별개로 백성들이 해명은 잊고 유언비어만 기억하는데 건륭제가 그 책을 싹 회수해버리자 백성들은 더욱 유언비어가 진실인 줄 믿게 되었으니 덤앤더머 고구마 부자라는 투로 언론플레이의 미숙을 지적했다.


6. 사망[편집]


이렇게 심한 일 중독자다 보니 몸이 남아날 리가 없었고 말년엔 과로로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 요양을 해야할 지경까지 되었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아 이게 수명을 더욱 갉아먹고 만다. 1735년 8월 20일(음력)부터 상태가 나빠졌지만 21일에도 건천궁에서 평상시처럼 정사를 봤다고 한다. 그러나 22일에 가면 건강이 나빠져 결국 쓰러졌고 보친왕 등이 간호하였으나 위독해졌다. 결국 23일에 옹정제는 원명원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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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서릉의 태릉(泰陵) 전경
황제의 유해는 허베이 성 바오딩시 이현에 조성된 청나라 황실의 능구(陵區)인 청서릉(淸西陵)의 첫 번째 황릉인 태릉에 안장되었다.


7. 가정 관계[편집]



7.1. 아내[편집]


1679년 출생 ~ 1731년 사망
옹정제와 생사를 건 황위쟁탈전을 같이 한 조강지처로, 13살 때 패륵이었던 옹정제의 적복진으로 간택되었다. 옹정제 즉위 후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옹정 9년에 붕어한 후 효경황후로 추봉되었다.
효경헌황후의 유일한 아이로 옹정제의 유일한 적자. 2살 때 조부 강희제(康熙帝)로부터 화석단군왕(和碩緞郡王) 작위에 책봉되었지만 5년 후 1704년에 홍역으로 인하여 향년 7세로 요절하였다. 사후 31년이 지난 1735년에 이복동생인 건륭제가 등극 후 단친왕(端親王)으로 추봉해 주었다.

1692년 출생 ~ 1777년 사망
개국오대신 액역도의 사촌인 액역등의 증손녀로 1704년에 수녀 간택에서 옹친왕부의 격격으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말년의 강희제가 그녀의 친아들 홍력을 귀여워하며, 홍력의 친모인 뉴호록 씨에게 직접 아들을 잘 둬서 좋겠다고 칭찬한 이후로 입지가 상승곡선을 탔다. 또한 옹정제 연간 초부터 일어난 연갱요의 숙청, 그로 인한 연귀비의 병사 등의 치열한 궁중 암투 속에서도 꿋꿋이 존버에 성공했다. 결국 친아들 건륭제가 등극한 후 성모황태후에 올랐다. 건륭제는 생모에게 둘도 없는 효자였기에 아들의 황제 등극 이후에는 큰 호강을 누리며 살았다. 청의 전성기에 태어나 최전성기의 황태후로 살다가 나라가 기울어지기 전에 죽은 청조 역사상 가장 복받은 여성.



7.2. [편집]


  • 돈숙황귀비 연씨(敦肅皇貴妃 年氏)
생년 미상 ~ 1725년 사망
옹정제가 가장 사랑한 후궁. 또한 위에서 언급된 연갱요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원래는 포의 출신이었지만 조부인 연중륭이 과거에 합격하면서 양백기 한군에 편입되었고, 아버지 연하령이 자수성가해서 종2품 순무의 자리까지 올라가 옹정제의 측복진으로 출가하였다. 옹정제의 등극 이후 귀비로 책봉되었고 아이도 4명이나 낳았으나, 원래부터 몸이 허약하여 옹정 3년에 사망한 뒤 돈숙황귀비로 추봉되었다.
  • 황4녀 1715년 ~ 1717년
  • 7남 복의 1720년 ~ 1721년
  • 8남 화석회친왕 복해 1721년 ~ 1728년
  • 9남 복패 1723년 ~ 1723년

  • 순의황귀비 경씨(純慤皇貴妃 耿氏)
1689년 출생 ~ 1784년 사망
황제의 사랑 따윈 됐고 미래의 황태후에게 잘 보이면 된다는 걸 보여준 후궁. 상삼기 포의 출신의 후궁이었으나 잠저 시절 때부터 희귀비 뉴호록 씨(훗날의 숭경황태후)와 자매처럼 지냈고, 그 공으로 건륭제 등극 이후 바로 귀태비로 승진하면서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다. 숭경황태후의 사후에는 황귀태비로까지 승급되어, 사망 당시 최종시호는 순의황귀비. 95세의 나이로 엄청나게 장수한 후궁이기도 하다. 다만 생존을 위해 아들의 야망까지 억누르느라 아들 홍주는 형 홍시의 죽음 이후, 제대로 비뚤어졌는지 조선의 양녕대군 수준의 개망나니로 살았다. 자기 장례식을 치른다거나 군기대신을 후드려 패는 등, 황자 신분으로 온갖 기행을 다 저지르고 다녔다. 그래도 건륭제와는 어릴 때부터 연년생 형제로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건륭제가 최대한 실드쳐주면서 사고를 치면서도 그럭저럭 무탈히 삶을 마쳤다.

  • 제비 이씨(齊妃 李氏)
1676년 출생 ~ 1737년 사망
시첩 출신의 후궁으로 옹정이 청년기에 가장 사랑한 후궁이었다. 처음에는 시첩의 신분이었다가 아이 넷을 낳고 나서야 측복진으로 진봉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연귀비가 시집오면서 총애는 밀렸고 홍시 문제까지 겹쳐서 냉대 받게 된다. 원래는 포의 출신이었으나, 장자 홍시의 체면 때문인지 제비에 대한 정이 남은건지 포의에서 좌익기(양황기, 정백기, 양백기, 정람기)로 올려주기는 했다. 홍시는 위의 형들이 모두 어릴 때 죽어 실질적으로 장자였지만, 장자이기만 할뿐 계승자 후보에서는 홍력에게 밀렸고, 이에 대한 반발심리로 숙부이자 옹정제가 증오해마지않는 8황자당과 어울려 지냈다. 이로 인해 옹정제의 큰 분노를 샀고 몇가지 사건이 겹친 끝에 결국 황실 족보에서마저 제명되어 감옥에서 죽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윤사의 양자로 출계시켰다가 윤사를 족보에서까지 제명해버리는 대숙청을 단행하면서 함께 쓸어버린 것. 이후 건륭제는 제위에 오른 후에 형을 다시 족보에 올려주기는 했다.
  • 황2녀 화석회각공주 1695년 ~ 1717년[52]
  • 2남 홍분 1697년 ~ 1699년
  • 황2자 홍윤(弘昀) 1700년 ~ 1710년
  • 황3자 홍시(洪時) 1704년 ~ 1727년

  • 겸비 유씨(謙妃 劉氏)
1714년 출생 ~ 1767년 사망
말년의 옹정제에게 가장 사랑받은 후궁. 1729년 궁녀를 뽑는 수녀 간택에 참여했다가 옹정의 눈에 들어서 한번에 답응이 되었고, 몇 달뒤인 1730년 1월에 상재로, 또 두 달 뒤인 3월에 귀인이 되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3년 뒤 아들 홍염을 낳고 겸빈이 됐다가 건륭제가 즉위하면서 태비가 되어서 최종 품계는 겸비. 홍염은 강희제의 황17자이자 옹정제의 심복인 아우 과친왕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과친왕의 양자로 출계하여 과군왕작을 이어받았다. 홍염도 홍주처럼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녔는데, 황자 신분으로 도적질을 했다. 물론 홍주에게 그랬던 것처럼 건륭제는 홍염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 황6자 다라과공군왕 홍염(果恭郡王 弘曕) 1733년 ~ 1765년


8. 평가[편집]


문무를 겸비하였으나 옹정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적인 측면에서 국력을 과시한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보다는 내치에 힘써 뭔가 겉으로 보여줄만한 건덕지가 적었고, 아우가 오를 제위를 빼앗아 자신이 대신 올랐다는 소문 등으로 인해 근현대까지만 해도 민간에서는 폭군이라는 인상이 강해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학계 등지에서 옹정제 재평가가 이뤄지며, 현재는 옹정제가 외정(外征)을 철저히 삼가고 내적 충실과 국가의 안정에 힘써 강희제의 60년 치세 뒤 동요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다져놓은 명군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이는 그의 아들 건륭제가 말년의 사치 등으로 현대 들어 점점 평가절하되는 현상과 대비된다. 사실 강희제와 더불어 당대 유럽 일각에서 '청나라야말로 이 세상의 유토피아'라는 평가를 내리게 만든 군주기도 한걸 보면, 당대에도 평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모양. 요컨대 강희제에 의해 전성기에 진입한 청 제국이 옹정제의 치세를 거치며 더욱 반석 위에 올라서고, 건륭제 때 그 영화를 누렸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옹정제가 진짜 폭군에 불과했다면, 청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리도, 강건성세에 자가 들어가서 건성세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옹정제가 명군이자 성군인 것은 부정할 순 없으나, 나중엔 옹정제 자신도 그런 자신을 보필하는 신하들의 피로도를 걷잡을 수 없이 치솟게 한 것은 옥의 티라고 볼 수 있다. 즉 옹정제의 "시스템"은 지속 가능성이 낮았다는 것이 한계다.

실제로 일본의 동양사학자 중 한명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를 세심하게 조명한 평전 <옹정제>에서 옹정제의 재위기간이었던 13년이 본인과 관료들이 버틸 수 있는 최대 한계라 봤는데, 충분히 일리가 있다. 오늘날 회사로 비유하면 야근 강요는 기본에 불법 사찰, 사내 정치질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관료들 피를 말리다시피 하며 그들의 역량을 쥐어짜낸 악덕 고용주였던지라 그 이상 했다가는 서로 뒷감당이 어렵다는, 즉 혹사당한 신하들이 황제를 몰아내려는 반정 내지 역성혁명을 모의하고는 더욱더 나아가면 내전까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말. 따라서 옹정제의 재위 기간은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 재위 기간의 5분의 1에 불과한 결과로 나타났다. 그래도 미야자키는 옹정제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라기보다 구도하는 수도자처럼 경건하고 치열한 자세로 정치에 임하며, 전제 군주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한의 선을 실천한 군주'라 호평했다. 한국판 위키백과도 참고.

더욱이 말년에 사치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은 특히 임기가 무한보장되는 전제군주제 시절 지도자에게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의외로 폭군이라는 인상과 달리 옹정제의 인품을 알 수 있는 한 마디가 한국의 도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바로 "이 한 몸을 위해서 천하를 희생시키지는 않으리라(不以天下奉一人)."[53] 물론 그 대신 천하를 위한답시고 자신과 신하들을 나랏일에 갈아넣었다. 갈려나갔던 신하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겠지만...

한편으로 미야자키는 옹정제를 소심하고 내성적인 인물이라 분석하기도 했다. 옹정제한테 잘못 찍혀 목이 잘린 신하들이 들으면 머리 없는 귀신도 뒷목을 붙들고 쓰러질 말이겠지만, 단순히 옹정제의 천성이 나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내성적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사소한 거라도 이루고야 마는 강한 의지가 숨어있는 성격이라 본 것. 가령 옹정제는 순진무구한 촌뜨기 선비인 증정에 대해 듣고는 천자로서 반역도랍시고 그냥 목을 쳐버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아들인 건륭제는 비슷한 반청 사상가를 문답무용으로 다짜고짜 목을 날려버렸다. 허나 옹정제는 사상 개조해 보겠답시고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면서 직접 하나하나 반박하며 종국엔 증정의 승복을 받고 반성문까지 받아 귀향시킨걸 보면 확실히 독한 성격이었던 듯.

9.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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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악덕 고용주였다는 사실과 별로 안 어울리지만 이런 그림도 있다. 참고로 위의 그림은 서양 가발을 쓴 모습이다. 실제로 옹정제는 코스프레를 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장의 그림으로 남길만큼 코스프레를 즐겨했다고 한다.#1#2 심지어 혼자만 하기 심심했던지 당시 보친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건륭제까지 불러다가 동반 출연을 한 모습으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54]

위에 소개된 코스프레 그림들을 보면 아무리 중국 천자라도 남자의 주적은 피할 수 없었던 듯 보인다. 훈남이었던 옹친왕 시절 머리가 조금 자란 상태의 초상화##를 보면 중년에 황제에 오르고 격무에 시달리며 스트레스성 탈모가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55]

전술했듯,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조서를 위주하여 황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이 많았지만, 2013년에 강희제의 유조가 공개되면서 옹정제를 후계자로 정한 것은 강희제 본인이었단 것이 밝혀졌다.

청나라의 야사가 담긴 '청대야사필기대관'이라는 책에 따르면, 옹정제의 한족 신하들이 스스로를 '노재'(奴才)[56]라고 하는 걸 듣자 엄히 질책하면서 다시는 그런 말 실수를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 일은 심지어 정사에서도 나온 기록이다. 옹정제가 왜 한족 신하들이 스스로 노재라고 칭하는 것을 금지시켰냐면 처음부터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재는 황제의 가노(家奴), 포의를 뜻한다. 즉 만주족 신하들은 대대로 청 황제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써도 되지만, 한족 신하들은 피고용인이지 진정한 황제의 사람은 아니기에 노재라고 칭할 자격은 없다고 여겨 그리 일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만한을 가리지 않고 관료들을 골고루 불신했던 옹정제였음을 감안하면[57] 딱히 만인이라고 함부로 노재라 칭해도 옹정제한테 욕 안 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몸소 수행했으며, 스스로에게 원명거사(圓明居士)라는 호를 붙이기도 했다. 여러 화두를 타파할 정도로 상당히 높은 경지였다고 하나, 말년에는 도교연단술에 심취해서 단약을 과다복용한 부작용, 즉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58] 실제 사인은 비소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검시를 통해 밝혀낸 광서제의 예처럼 청서릉을 발굴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솔직히 옹정제의 생활 습관으로는 단약이 아니었어도 딱히 오래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다.[59] 오히려 현대에 비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옹정제 정도만 해도 일찍 죽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옹정제의 치세(1722년 ~ 1735년) 기간은 조선 왕조의 경종(1720년 ~ 1724년)의 재위 기간과 영조(1724년 ~ 1776년)의 재위 초반 10년과 일치한다.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년 ~ 1867년 / 1868년)의 쇼군은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1716년 ~ 1745년)다.

그의 평가는 오늘날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굉장히 좋다. 중학교 2학년 역사 교과서(미래엔)에서도 옹정제가 일 중독자로서 보낸 삶과 증정과 벌였던 쪼잔한 키배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황제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화이사상을 제시하였다고 서술된다.


10. 대중매체에서[편집]


원래는 아버지인 강희제, 아들인 건륭제에 밀려 영화나 드라마 등의 주인공인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주인공으로 많이 안 나왔을 뿐이지, 강희 만년의 후계자 분쟁 과정의 논란이 해결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흑막으로 나왔던 적도 많았었다. 결국엔 악역 그래도 최근에는 강희제, 건륭제 관련 사극이 원체 많이 나와서인지 대타격으로 옹정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도 나오고 있다.


10.1. 드라마[편집]


  • 《대내군영(大內群英, Dynasty)》[60] 배우 : 만자량
홍콩 RTV(現 aTV) 제작. 이 드라마는 애당초 무협 드라마에다가 여사낭과 옹정이 러브라인으로 맺어지는 막장 설정이니(결말은 배드 엔딩) 해당 드라마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매우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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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청십삼황조(滿清十三皇朝之雍正, The Rise and Fall of Qing Dynasty)》 배우 : 위열(煒烈)
만청십삼황조 역시 홍콩 aTV에서 만든 드라마로, 청나라 13명의 황제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단, 1980년대에 제작했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야사를 참고했기 때문에 내용전개에 있어서 현재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사실과 다른점이 많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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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이 옹정제.

  • 《구왕탈위(九王奪位, Secret Battle Of The Majesty)》[62] 배우 : 강화
이 드라마도 홍콩 aTV에서 제작했고, 옹정제를 '황위를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의 캐릭터로 설정하였으며, 황제에 등극하고 자신의 절대 권력을 확립하는 피 튀기는 과정이 여과없이 나온다.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조를 위조하였다는 설을 채택하였고, 심지어는 강희제를 살해한 것이 옹정제 자신이라는 설정까지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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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기협전(江湖奇俠傳, Legend Of Yung Ching)》 배우 : 정소추
홍콩-대만 합작 드라마. 여사낭이 등장한 건 다르지 않으나 강희제의 유조를 위조했다는 설과 강희제 살해 or 독살설은 채용하지 않았다.

  • 《옹정왕조(雍正王朝)》 배우 : 당국강[63]
대륙 제작. 강화가 연기한 <구왕탈위>의 옹정제보다 잔인함은 줄어들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훌륭한 행정가이자 황제인 옹정제의 모습을 그렸다. 폭군으로 묘사되기 일쑤인 다른 시리즈에서의 옹정제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만큼 불쌍하리만치 일만 하다 윤상, 홍시, 윤사 등의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 둘 잃어가며 한 인간으로서 무너져가는 처연한 일 중독 황제를 잘 묘사한 당국강의 명연기가 일품이다. 짬이 날 때 코스프레를 하면서 어진 한 번 그려보라고 선교사들 불러다 놓고도 상소문 받아 읽다가 화딱지가 나서 다 내쫓아버리자 선교사들이 그림 언제 다 그리냐고 투덜대거나, 옹정 3총독 중 이위가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옹왕부 가노였는데 옹왕부의 다른 시녀와 눈이 맞아서 연갱요가 있는 사천으로 쫓겨나 글을 배우고 일도 배우기 시작했다는등 코믹한 설정도 눈에 띄는데, 이 설정이 인기가 있었는지 이위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 코미디(!)물인 《이위당관》과 《이위사관》이 《옹정왕조》의 대부분의 배우들을 그대로 유지한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다만 이위역의 배우가 교체되기는 했다.) 《옹정왕조》에서는 염친왕 윤사가 실제보다 오래 살아서, 변경의 팔기군을 북경에까지 끌어들여 쿠데타를 모의했다가 다 죽어가는 윤상에 의해 가까스로 제지당한 후 아키나라고 개명당하며 유폐된다. 이 과정에서 어리바리한 철부지 홍주와 홍력에게 열등감을 가진 홍시를 끌어들인다고까지 설정했다. 홍시가 그 후에도 철없이 굴다 사사당한 것도 윤사의 충동질 때문이었다는 설정, 그리고 홍주는 아버지와 형제들 간의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끼며 개망나니 행세나 하면서 몸을 낮춘다는 설정은 덤. 그래도 형제는 형제인지 윤상, 홍시를 잃으며 쇠약해진 말년의 옹정제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먹인 사건 또한 윤사의 죽음이었다고 묘사된다. 당국강이 연기한 옹정제의 말년은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을만큼 불쌍하고 불쌍하다. 아들 홍시를 자결하게 만들면서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져 툴리션(圖理琛, 도리침)[64]에게 업혀 황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또한 황제가 아니라 심문관인 척 증정이라는 이상한 선비를 만나서는 황제가 밤마다 음주가무나 즐기며 엽색행각을 일삼는다는 말에 정말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생애 마지막밤에도 침침해진 눈으로 빨간 붓을 들고 열일하고 있었지만 먼저 사망한 윤사가 남긴 애증 어린 유서를 읽으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윤사의 환영을 보다가 끝내 산더미 같이 쌓인 밀지 위에서 피를 토하며 사망한다. 국내 p2p 사이트에서도 쉽게 드라마와 자막을 구할 만큼 옹정제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중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 《구오지존(九五至尊, The King of Yesterday and Tomorrow)》 배우 : 강화
TVB 제작. 위의 구왕탈위와 배우는 같지만 작품의 성격은 타임슬립물로 위와는 전혀 다르다. 현대 홍콩으로 여사낭과 함께 날아갔는데 현대 홍콩에서 이대하(李大蝦)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대륙 제작. '냉면왕(冷面王)'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침착하며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데다가 여자에게도 냉정한 나쁜남자 설정이다. 여주인공 마이태 약희를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면서도, 황제에 등극하기 위해 물 밑에서 고군분투하고 끝내 최후의 승자에 올랐다. 그러나 공포 정치와 정적 숙청으로 약희와 틀어져 헤어지고, 끝내 약희의 진심과 죽음을 뒤늦게 깨달아 오열한다.

대륙 제작. 전반적으로 보보경심과 견환전의 옹정제를 섞어놓은듯 하다. 한 여자에게 빠지면 한 여자만 바라보는듯 싶다가도 정작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여자는 이용하려고만 하는등. 역사는 결국 4황자 손을 들어주지만 사랑은 쉽게 되지 않는 캐릭터로 나온다. 동생을 편애하는 친모와 그런 동생을 미워한다.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않는 성격이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크고 술수에 능하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중 살인을 제일먼저 고려할 정도로 잔인한 성품을 지녔다.

대륙 제작. 독재자에 정적에게 잔인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일편단심이었던 대부분의 옹정제와는 달리, 특정 후궁을 편애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황제의 면목을 보인다.[65] 그러나 끝내(드라마니까) 희귀비 견환을 총애하고, 견환과 자신의 동생의 사이를 의심하던 중 병으로 쓰러져 후환을 두려워한 견환이 독살시킨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싱크로율로는 역대 옹정제 역인 배우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옹정제(옹정황제의 여인) 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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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위노(食為奴, Gilded Chopsticks)[66] 배우 : 황지현(黃智賢)
홍콩 TVB에서 제작한 궁정극. 이 드라마에선 8황자 윤사가 악역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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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소설[편집]


  • 2005년 로맨스 소설 《보보경심》: 드라마 보보경심의 원작 로맨스 소설로 동화(桐华) 작가가 썼다. 대한민국에서는 2013년 번역 출판되었다.


10.3. 영화[편집]


  • <옹정대파십팔동인>[67]
재위를 14황자에게 넘어갈 조서를 4황자라고 조작한 옹정제(황가달분)는 업적을 남기기 위해 한족의 반만주족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반만주세력의 본거지인 소림사에 직접 들어가 무공을 익혀 십팔동인진을 깨트린다는 이야기이다.

  •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한 혈적자 1,2편
본작의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창작물을 통틀어 가장 악독하게 묘사된 옹정제라 할만 한데, 성군의 면모는 모조리 쳐내고 폭군의 면모는 몇 배로 불려 만들어 낸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된다. 한족을 극히 싫어해서 자기에게 바쳐진 미녀가 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접 참살하고, 반란분자 찾는다는 명목 하에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려 들며[68], 자기에게 직언을 올리는 충신들도 못마땅하게 여겨 만만하면 대놓고 숙청하고, 대놓고 숙청하기 힘든 거물이면 암살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혈적자를 사용하는 황제 직속 암살 부대를 만들면서 본작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 화소소림사(한국개봉명 '불타는 소림사', 1976)[69]
<소림사십팔동인>을 감독한 곽남굉 감독의 또다른 작품. 여기서 옹정제는 아예 소림사를 불태웠다. 이에 격분한 소림승들이 옹정제를 암살한다는 내용. 황궁에 5명의 가짜 황제를 두어 카케무샤로 삼는 치밀함과 악랄함을 보여준다.

11. 둘러보기[편집]


청의 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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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이 있는 인물만 기재





청사고(淸史稿)

[ 본기(本紀) ]

||<-2><tablewidth=100%><tablebgcolor=#00386a><width=33%> 1권 「태조기(太祖紀)」 ||<-2><width=33%> 2·3권 「태종기(太宗紀)」 ||<-2><width=33%> 4·5권 「세조기(世祖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노이합제 ||<-2> 애신각라 황태극 ||<-2> 애신각라 복림 ||
||<-2> 6·7·8권 「성조기(聖祖紀)」 ||<-2> 9권 세종기(世宗紀)」 ||<-2> 10·11·12·13·14·15권 「고종기(高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현엽 ||<-2> 애신각라 윤진 ||<-2> 애신각라 홍력 ||
||<-2> 16권 「인종기(仁宗紀)」 ||<-2>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2> 20권 「문종기(文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옹염 ||<-2> 애신각라 민녕 ||<-2> 애신각라 혁저 ||
||<-2> 21·22권 「목종기(穆宗紀)」 ||<-2> 23·24권 덕종기(德宗紀)」 ||<-2> 20권 「선통제기(宣統帝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재순 ||<-2> 애신각라 재첨 ||<-2> 애신각라 부의 ||
||<-6><width=1000> 214권 「후비전(后妃傳)」 ||
||<-6><bgcolor=#fff,#191919> 태목황후 · 문덕황후 · 서혜 · 무조 · 왕폐후 · 화사황후 · 위황후 · 상관소용 · 숙명황후 · 소성황후 · 왕폐후 · 정순황후 · 원헌황후 · 양귀비
장황후 · 장경황후 · 정의황후 · 예진황후 · 소덕황후 · 위씨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선의황후 · 곽귀비 · 왕현비 · 효정경황후 · 정강귀비 · 각순귀비 · 효각민황후 · 액이덕특씨 ||
※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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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 본기(本紀) ]

||<-2><tablewidth=100%><tablebgcolor=#00386a><width=33%> 1권 「태조기(太祖紀)」 ||<-2><width=33%> 2·3권 「태종기(太宗紀)」 ||<-2><width=33%> 4·5권 「세조기(世祖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노이합제 ||<-2> 애신각라 황태극 ||<-2> 애신각라 복림 ||
||<-2> 6·7·8권 「성조기(聖祖紀)」 ||<-2> 9권 세종기(世宗紀)」 ||<-2> 10·11·12·13·14·15권 「고종기(高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현엽 ||<-2> 애신각라 윤진 ||<-2> 애신각라 홍력 ||
||<-2> 16권 「인종기(仁宗紀)」 ||<-2> 17·18·19권 선종기(宣宗紀)」 ||<-2> 20권 「문종기(文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옹염 ||<-2> 애신각라 민녕 ||<-2> 애신각라 혁저 ||
||<-2> 21·22권 「목종기(穆宗紀)」 ||<-2> 23·24권 덕종기(德宗紀)」 ||<-2> 20권 「선통제기(宣統帝紀)」 ||
||<-2><rowbgcolor=#fff,#191919> 애신각라 재순 ||<-2> 애신각라 재첨 ||<-2> 애신각라 부의 ||
||<-6><width=1000> 214권 「후비전(后妃傳)」 ||
||<-6><bgcolor=#fff,#191919> 태목황후 · 문덕황후 · 서혜 · 무조 · 왕폐후 · 화사황후 · 위황후 · 상관소용 · 숙명황후 · 소성황후 · 왕폐후 · 정순황후 · 원헌황후 · 양귀비
장황후 · 장경황후 · 정의황후 · 예진황후 · 소덕황후 · 위씨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선의황후 · 곽귀비 · 왕현비 · 효정경황후 · 정강귀비 · 각순귀비 · 효각민황후 · 액이덕특씨 ||
※ 26권 ~ 160권은 志에 해당. 161권 ~ 213권은 表에 해당. 청사고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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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215·216·217·218·219·220·221권 「제왕전(諸王傳)」
애신각라 예돈 · 애신각라 액이곤 · 애신각라 재감 · 애신각라 탑찰편고 · 애신각라 막이합제 · 애신각라 서이합제 · 애신각라 아이합제 · 애신각라 파아랍 · 애신각라 저영 · 애신각라 대선 · 애신각라 아배 · 애신각라 탕고대 · 애신각라 망이고태 · 애신각라 탑배 · 애신각라 아파태 · 애신각라 파포태 · 애신각라 덕격류 · 애신각라 파포해 · 애신각라 아제격 · 애신각라 뇌모포 · 애신각라 다이곤 · 애신각라 다탁 · 애신각라 비양과 · 애신각라 호격 · 애신각라 엽포서 · 애신각라 석새 · 애신각라 고새 · 애신각라 상서 · 애신각라 도새 · 애신각라 박목박과이 · 애신각라 복전 · 영친왕 · 애신각라 상녕 · 애신각라 융희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잉 · 애신각라 윤지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우 · 애신각라 윤사 · 애신각라 윤당 · 애신각라 윤아 · 애신각라 윤도 · 애신각라 윤상 · 애신각라 윤제 · 애신각라 윤파 · 애신각라 윤례 · 애신각라 윤의 · 애신각라 윤희 · 애신각라 윤호 · 애신각라 윤기 · 애신각라 윤비 · 애신각라 홍주 · 애신각라 홍휘 · 애신각라 영황 · 애신각라 영련 · 애신각라 영장 · 애신각라 영기(永琪) · 애신각라 영종 · 애신각라 영선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기(永璂) · 애신각라 영성 · 애신각라 영린 · 애신각라 면개 · 애신각라 면흔 · 애신각라 면유 · 애신각라 혁위 · 애신각라 혁강 · 애신각라 혁계 · 애신각라 혁흔 · 애신각라 혁환 · 애신각라 혁합 · 애신각라 혁혜 · 민군왕
222권 「아합출등전(阿哈出等傳)」
아합출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호이간 맹가포록 대산 오이고대, · 청길노 · 양길노 ,납림포록 금태석 포한 포양고 포이항고, 포점태 · 배음달리
224권 「장황언등전(張煌言等傳)」
225권 「액역도등전(額亦都等傳)」
장황언 ,나륜 장명진 왕익, · 정성공 ,정금 정극장 정극상 정극거, · 이정국
액역도 · 비영동 ,삭해 왜흑, · 하화례 ,다적례 화석례 도류, · 안비양고 · 호이한
83권 「제제공주전(諸帝公主傳)」
동안공주 · 장사공주 · 양양공주 · 평양소공주 · 고밀공주 · 장광공주 · 장사공주 · 방릉공주 · 구강공주 · 노릉공주 · 남창공주 · 안평공주 · 회남공주 · 진정공주 · 형양공주 · 단양공주 · 임해공주 · 관도공주 · 안정공주 · 상락공주 · 양성공주 · 여남공주 · 남평공주 · 수안공주 · 장락공주 · 예장공주 · 북경공주 · 보안공주 · 동양공주 · 임천공주 · 청하공주 · 난릉공주 · 진안공주 · 안강공주 · 신흥공주 · 성양공주 · 합포공주 · 금산공주 · 진양공주 · 상산공주 · 신성공주 · 의양공주 · 고안공주 · 태평공주 · 신도공주 · 의성공주 · 정안공주 · 장녕공주 · 영태공주 · 안락공주 · 성안공주 · 수창공주 · 안흥소회공주 · 형산공주 · 회양공주 · 대국공주 · 양국공주 · 설국공주 · 식국공주 · 금선공주 · 옥진공주 · 곽국공주 · 영흥공주 · 천장공주 · 영국공주 · 흥당공주 · 서평공주 · 낭령공주 · 광화공주 · 창락공주 · 수춘공주 · 장녕공주 · 연경공주 · 정락공주 · 낙온공주 · 영청공주 · 위국문의공주 · 안화공주 · 보강공주 · 창원공주 · 창녕공주 · 금화공주 · 인수공주 · 영수공주 · 당흥공주 · 영평공주
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장혁덕 · 액색혁 · 차극 · 파합나 · 송권 · 부이점 · 여궁 · 성극공 · 김지준 · 왕영길 · 당숭아
247권 「팽이술등전(彭而述等傳)」
팽이술 · 육진분 · 요연저 · 필진희 · 방국동 · 우붕거 · 왕천감 · 조정표
250권 「이위등전(李霨等傳)」
이위 · 손정전 · 두입덕 · 풍부 · 왕희 · 오정치 · 황기 · 송덕선 · 이상아 · 아란태 · 서원문
251권 「도해등전(圖海等傳)」
252권 「감문혼등전(甘文焜等傳)」
마가도해 · 이지방
감문혼 · 범승모 · 마웅진 · 부홍열
253권 「막락등전(莫洛等傳)」
막락 · 진복 · 왕지정 · 비아달 · 이흥원 · 진계태 · 진단적 · 마비 · 엽앙류
255권 「장용등전(張勇等傳)」
장용 · 조양동 · 왕진보 · 손사극
256권 「채육영등전(蔡毓榮等傳)」
채육영 · 합점 · 항애 · 화선 · 동위국 · 동국정 · 주유덕 · 장덕지 · 윤벽 · 왕계문
257권 「조국조등전(趙國祚等傳)」
조국조 · 허정 · 주구 · 서치도 · 호세영 · 당희순 · 이린 · 조응규 · 조뢰 · 이방술 · 진세개 · 허점수
261권 「양첩등전(楊捷等傳)」
양첩 · 석조성 · 만정색 · 오영 · 감리 · 황오 · 방태 · 목혁림 · 단응거
262권 「위예개전(魏裔介等傳)」
263권 「왕홍조전(王弘祚等傳)」
위예개 · 웅사리 · 이광지
왕홍조 · 요문연 · 위상추 · 주지필 · 조신교
264권 「학유눌등전(郝維訥等傳)」
265권 「탕빈등전(湯斌等傳)」
학유눌 · 임극부 · 유홍유 · 유건 · 주배 · 장정추
탕빈 · 손지욱 · 육롱기 · 장백행
266권 「엽방애전(葉方藹等傳)」
267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엽방애 · 심전 · 여두눌 · 서원공 · 허삼례 · 왕사정 · 한담 · 탕우증
장옥서 · 이천복 · 오전 · 장영 · 진정경 · 온달 · 소영조 · 숭축 · 왕서령
268권 「미사한등전(米思翰等傳)」
269권 「장옥서등전(張玉書等傳)」
미사한 · 고팔대 · 마이한 · 전육선 · 두진 · 살목하
삭액도 · 명주 ,여국주 불륜,
270권 「학욕등전(郝浴等傳)」
271권 「서건학등전(徐乾學等傳)」
272권 「탕약망등전(湯若望等傳)」
학욕 · 양소온 · 곽수
서건학 ,옹숙원, · 왕홍서 · 고사기
탕약망 · 양광선 · 남회인
106권 「두이최고곽조최양노이유이유손형전(杜二崔高郭趙崔楊盧二劉李劉孫邢傳)」
두정륜 · 최지온 · 고지주 · 곽정일 · 조홍지 · 최돈례 · 양홍례 · 노승경 · 유상도 · 이경현 · 유덕위 · 손처약 · 형문위
107권 「부여진전(傅呂陳傳)」
108권 「유배루전(劉裴婁傳)」
부혁 · 여재 · 진자앙
유인궤 · 배행검 · 누사덕
109권 「최양두종축왕전(崔楊竇宗祝王傳)」
최의현 · 양재사 · 두회정 · 종초객 · 축흠명 · 산운 · 왕여(王璵)
110권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
사대내 · 풍앙 · 아사나사이 · 아사나충 · 집실사력 · 글필하력 · 흑치상지 · 이근행 · 천남생 · 이다조 · 논궁인 · 손유정 · 울지승 · 상가고 · 배분
111권 「곽이장삼왕소설정당전(郭二張三王蘇薛程唐傳)」
곽효각 · 장검 · 왕방익 · 소열 · 설인귀 · 정무정 · 왕효걸 · 당예 · 장인원 · 왕준
112권 「왕한소설왕류풍장전(王韓蘇薛王柳馮蔣傳)」
왕의방 · 한사언 · 소안항 · 설등 · 왕구례 · 유택 · 풍원상 · 장흠서
116권 「이왕위육이이두전(二王韋陸二李杜傳)」
117권 「배유위이길전(裴劉魏李吉傳)」
왕침 · 위사겸 · 육원방 · 왕급선 · 이일지 · 두경전 · 이회원
배염 · 유의지 · 위현동 · 이소덕 · 길욱
118권 「장위한송신이이배전(張韋韓宋辛二李裴傳)」
119권 「무이가백전(武李賈白傳)」
장정규 · 위주 · 한사복 · 송무광 · 신체부 · 이발 · 배린 · 이중민 · 이감
무평일 · 이예(李乂) · 가증 · 백거이
304권 「장조등전(張照等傳)」
장조 · 감여래 · 진덕화 · 왕안국 · 유오룡 · 양여곡 · 장태개 · 양석불 · 팽계풍 · 손희렴 · 몽린
305권 「전진군등전(錢陳群等傳)」
전진군 · 심덕잠 · 김덕영 · 전재 · 제소남 · 진조윤 · 동방달 · 전유성 · 추일계 · 사용 · 왕창
306권 「조사일등전(曹一士等傳)」
307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조사일 · 이신수 · 호정 · 중영단 · 시조생 · 저인지
윤계선 · 유우의 · 진대수 · 장윤수 · 진굉모
308권 「나소도등전(那蘇圖等傳)」
나소도 · 왕초증 · 서사림 · 윤회일 · 왕서 · 방현 · 풍광유 · 양석불 · 반사구 · 호보전 · 왕창
123권 「이소로위조화전(李蕭盧韋趙和傳)」
124권 「요송전(姚宋傳)」
이교 · 소지충 · 노장용 · 위거원 · 조언소 · 화봉요
요숭 · 송경
318권 「아계전(阿桂傳)」
319권 「우민중등전(于敏中等傳)」
장가아계
우민중 · 뉴호록 화신 · 소릉아
322권 「두광내등전(竇光鼐等傳)」
323권 「황정계등전(黃廷桂等傳)」
두광내 · 이수방 · 범의빈 · 조석보 · 사진정 · 전풍 · 윤장도
황정계 · 악미달 · 양정장 · 장유공 · 이시요 · 오미태 · 관보
324권 「방관승등전(方觀承等傳)」
방관승 · 부찰부명안 · 주원리 · 이한 · 이세걸 · 원수동 · 정대진 · 유아 · 육요 · 관간정 · 장조규 · 호계당
325권 「이청시등전(李淸時等傳)」
326권 「개태등전(開泰等傳)」
이청시 · 요입덕 · 이굉 · 하위 · 오사작 · 살재 · 난제석 · 한횡
개태 · 아이태 · 계림 · 원푸
131권 「종실재상전(宗室宰相傳)」
132권 「유오위장류침전(劉吳韋蔣柳沈傳)」
이적지 · 이현(李峴) · 이면 · 이이간 · 이정(李程) · 이석 · 이회
유자현 · 오긍 · 위술 · 장예 · 유방 · 심기제
133권 「이곽양왕장우전(二郭兩王張牛傳)」
134권 「우문위양왕전(宇文韋楊王傳)」
곽건관 · 곽지운 · 왕군착 · 장수규 · 왕충사 · 우선객
우문융 · 위견 · 양신긍 · 왕홍
135권 「가서고봉전(哥舒高封傳)」
136권 「이광필전(李光弼傳)」
137권 「곽자의전(郭子儀傳)」
가서한 · 고선지 · 봉상청
이광필
곽자의
138권 「이이마로전(二李馬路傳)」
139권 「방장이전(房張李傳)」
140권 「최묘이배려전(崔苗李裴呂傳)」
이사업 · 마린 · 이포옥 · 노사공
방관 · 장호 · 이필
최원 · 묘진경 · 배면 · 배준경 · 여인
141권 「최등위위이한노고전(崔鄧魏衛李韓盧高傳)」
최광원 · 등경산 · 최관 · 위소유 · 위백옥 · 이징(李澄) · 한전의 · 노종사 · 고하우
142권 「이양최류위로전(李楊崔柳韋路傳)」
이린(李麟) · 양관 · 최우보 · 유혼 · 위처후 · 노수
143권 「고원이위설최대왕서치신전(高元李韋薛崔戴王徐郗辛傳)」
고적 · 원결 · 이승 · 위륜 · 설각 · 최한형 · 대숙륜 · 왕굉 · 서신 · 치사미 · 신비
144권 「내전후최엄전(來田侯崔嚴傳)」
내진 · 전신공 · 후희일 · 최녕 · 엄여
145권 「원반여양엄두전(元王黎楊嚴竇傳)」
146권 「이이전(二李傳)」
원재 · 왕진 · 여간 · 양염 · 엄정 · 두참
이서균 · 이용(李鄘)
147권 「삼왕노신풍삼이곡이로전(三王魯辛馮三李曲二盧傳)」
왕사례 · 노경 · 왕난득 · 신운경 · 풍하청 · 이봉(李芃) · 이숙명 · 곡환 · 왕건휴 · 노군 · 이원소 · 노사매
148권 「영호장강이유전왕우사전(令狐張康李劉田王牛史傳)」
영호창 · 장효충 · 강일지 · 이유(李洧) · 유옹 · 전홍정 · 왕승원 · 우원익 · 사효장
149권 「유제오반왕이전(劉第五班王李傳)」
150권 「이상조최제로전(李常趙崔齊盧傳)」
유안 · 제오기 · 반굉 · 왕소 · 이손(李巽)
이계 · 상곤 · 조경 · 최조 · 제앙 · 노매
151권 「관동원조두전(關董袁趙竇傳)」
152권 「장강무이송전(張姜武李宋傳)」
관파 · 동진 · 원자 · 조종유 · 두역직
장일 · 강공보 · 무원형 · 이강(李絳) · 송신창
153권 「단안전(段顏傳)」
154권 「이성전(李晟傳)」
155권 「마혼전(馬渾傳)」
단수실 · 안진경
이성
마수 · 혼감
156권 「양대양이이한두형전(楊戴陽二李韓杜邢傳)」
양조성 · 대휴안 · 양혜원 · 이원량 · 이관(李觀) · 한유괴 · 두희전 · 형군아
157권 「육지전(陸贄傳)」
158권 「위장엄한전(韋張嚴韓傳)」
육지
위고 · 장건봉 · 엄진 · 한홍
159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포방 · 이자량 · 소흔 · 설파 · 번택 · 왕위 · 오주 · 정권 · 육긍 · 노탄 · 유성 · 최융 · 장정보
160권 「서여맹유양반최위전(徐呂孟劉楊潘崔韋傳)」
161권 「장초이정서왕풍유전(張趙李鄭徐王馮庾傳)」
서호 · 여위 · 맹간 · 유백추 · 양풍 · 반맹양 · 최원략 · 위수
장천 · 조연 · 이서 · 정운달 · 서대 · 왕중서 · 풍항 · 유경휴
162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요남중 · 독고급 · 고소련 · 위하경 · 단평중 · 여원응 · 허맹용 · 설존성 · 이손
163권 「공목최유양마전(孟簡等傳)」
공소부 · 목녕 · 최빈 · 유공작 · 양어릉 · 마총
164권 「설해삼최노이설위호정이왕은전(歸奚三崔盧二薛衛胡丁二王殷傳)」
귀숭경 · 해척 · 최연 · 노경량 · 설빈 · 위차공 · 설융 · 호증 · 우공저 · 왕질 · 은유 · 왕언위
165권 「삼정고권최전(三鄭高權崔傳)」
166권 「가두영호전(賈杜令狐傳)」
정여경 · 정순유 · 고영 · 정인 · 권덕여 · 최군
가탐 · 두우 · 영호초
167권 「백배최위이이황보왕전(白裴崔韋二李皇甫王傳)」
백지정 · 배연령 · 최손 · 위거모 · 이제운 · 이실 · 황보박 · 왕파
168권 「위왕육유류정전(韋王陸劉柳程傳)」
169권 「두배이위전(杜裴李韋傳)」
위집의 · 왕숙문 · 육질 · 이우석 · 유종원 · 정이
두황상 · 배기 · 이번 · 위관지 · 풍숙 · 봉오
170권 「이고이주이유범이왕맹조이임장전(二高伊朱二劉范二王孟趙李任張傳)」
고숭문 · 이신(伊愼) · 주충량 · 유창예 · 범조희 · 왕악 · 맹원양 · 왕서요 · 유창 · 조창 · 이경략 · 임적간 · 장만복
171권 「이오왕양조고유석전(李烏王楊曹高劉石傳)」
이광진 · 오중윤 · 왕패 · 양원경 · 조화 · 고우 · 유면 · 석웅 · 고원유 · 봉오 · 정훈 · 경회 · 위박
172권 「우왕이두범전(于王二杜范傳)」
173권 「배도전(裵度傳)」
174권 「이이원우양전(二李元牛楊傳)」
우적 · 왕지흥 · 두겸 · 두아 · 범정전
배도
이봉길 · 원진 · 우승유 · 이종민 · 양사복
175권 「두유이장양웅백전(竇劉二張楊熊柏傳)」
176권 「한유전(韓愈傳)」
두군 · 유서초 · 장우신 · 양우경 · 장숙 · 웅망 · 백기
한유
340권 「왕걸등전(王傑等傳)」
341권 「경규등전(慶桂等傳)」
왕걸 · 동고 · 주규
경규 · 유관지 · 대구형 · 대균원 · 탁진 · 장후 · 노음부
342권 「보녕등전(保寧等傳)」
343권 「서린등전(書麟等傳)」
보녕 · 송균 · 배탄 · 박계특
서린 · 각라길경 · 각라장린 · 비순 · 장백령 · 백린
344권 「늑보등전(勒保等傳)」
345권 「서린등전(永保等傳)」
늑보 · 액륵등보 ,호시현, · 덕릉태
영보 · 혜령 · 의면 · 영선 · 복녕 · 경안 · 태승은
386권 「문경등전(文慶等傳)」
385권 「숙순등전(肅順等傳)」
386권 「계량등전(桂良等傳)」
문경 · 문상 · 보윤
숙순 · 목음 · 초우영
계량 · 서린 · 관문 · 문욱
389권 「백준등전(柏俊等傳)」
390권 「가정등전(賈楨等傳)」
391권 「왜인등전(倭仁等傳)」
백준 · 인괴 · 서상 · 전경
가정 · 주조배 · 주봉표 · 단무겸
왜인 · 이당계 · 오정동
392권 「새상아등전(賽尙阿等傳)」
393권 「이성원등전(李星沅等傳)」
394권 「서광진등전(徐廣縉等傳)」
새상아 · 눌이경액
이성원 · 주천작 · 노숭광
서광진 · 엽명침 · 황종한
395권 「상대순등전(常大淳等傳)」
상대순 ,쌍복 왕금수 왕수동, · 장문경 · 도은배 ,다산, · 길이항아 · 나준전 · 서유임 · 왕유령
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403권 「승보등전(勝保等傳)」
404권 「승격림심등전(僧格林沁等傳)」
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405권 「증국번전(曾國籓傳)」
406권 「낙병장등전(駱秉章等傳)」
407권 「강충원등전(江忠源等傳)」
증국번
낙병장 · 호림익
강충원 · 나택남
408권 「이속빈등전(李續賓等傳)」
409권 「탑제포등전(塔齊布等傳)」
이속빈 · 정예의 · 증국화 · 이속의 · 왕진 · 유등홍 · 장익풍
탑제포 · 필금과 · 다융아 · 포초,송국영 누운경 담등달, · 당인겸 · 유송산
410권 「팽옥린등전(彭玉麟等傳)」
411권 「이홍장전(李鴻章傳)」
팽옥린 · 양악빈 · 왕명산 · 손창개 · 양명해 · 사준여
이홍장
412권 「좌종당전(左宗棠傳)」
413권 「증국전등전(曾國荃等傳)」
좌종당
증국전 · 심보정 · 유곤일
414권 「이신전등전(李臣典等傳)」
이신전 · 소부사 · 이원길 · 유연첩 · 팽육귤 · 장시일 · 오유수 · 주남계 · 나봉원 · 이상화 · 소경연 · 오종국
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황익승 · 정의방 · 왕길 · 오가방 · 이성모 · 이조빈 · 강복산 · 유배원
416권 「정학계등전(程學啟等傳)」
정학계 · 하안태 · 정국괴 · 유명전 · 장수산 · 주성파 · 주성전 · 반정신 · 오장경
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이조의 · 단기 · 정수창 · 증기봉 · 저유립 · 서철산 · 계중행 · 유함방 · 진횡거 · 유지개 · 이용청 · 이금용 · 김복증 ,웅기영 사복가, · 동조용
452권 「홍여규등전(洪汝奎等傳)」
홍여규 · 양종렴 · 사박 · 사극관 · 심보정 · 주기앙 ,주기조, · 종원한 · 서경장 · 서진 · 괴광전 · 진휼성 · 반민표 · 엄작림 · 당석진 · 누춘번
457권 「장동재등전(蔣東才等傳)」
장동재 · 이남화 · 동리고 · 동전승 · 우사한 · 조덕경 · 마복진 · 정문병 · 방요 · 등안방
458권 「서연욱등전(徐延旭等傳)」
서연욱 · 당형 · 하경 · 장조동
459권 「풍자재등전(馮子材等傳)」
풍자재 · 왕효기 · 진가 · 장종한 · 소원춘 · 마성치 · 왕덕방 · 장춘발 · 소득룡 · 마유기 · 오영안 · 손개화 · 소득승 · 장고원 · 구양이견
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좌보귀 · 원영산 · 등세창 · 유보첨 · 대종건
송경 · 여본원 · 서방도 · 마옥곤 · 의극당아 · 장순
462권 「정여창등전(丁汝昌等傳)」
463권 「당경숭등전(唐景崧等傳)」
정여창 · 위여귀 · 엽지초
당경숭 · 유영복
464권 「이단분등전(李端棻等傳)」
이단분 · 서치정 · 진보함 · 황준헌 · 증화 · 양심수 · 양예 · 유광제 · 담사동 · 임욱 · 강광인
465권 「서동등전(徐桐等傳)」
466권 「서용의등전(徐用儀等傳)」
서동 · 강의 · 조서교 · 고아랍계수 · 하영년 · 희탑랍유록 · 육현
서용의 · 허경징 · 원창 · 토묵특입산 · 최가연원
471권 「성선회등전(盛宣懷等傳)」
472권 「육윤상등전(陸潤庠等傳)」
성선회 · 서징
육윤상 · 세속 · 이극탄 · 양정분 · 서방 · 노내선 · 심증식
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진시림, · 요문섭 ,황정린, · 낙종린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장극억 가박, · 소사요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유후, · 장기 ,석가소, · 유형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 성유 · 소의진 · 고염무 · 장이기 · 만사대 · 호위 · 모기령 · 염약거 · 혜주역 · 진후요 · 장림 · 임계운 · 전조망 · 심융 · 강영 · 저인량 · 노문서 · 전대흔 · 왕명성 · 대진 · 단옥재 · 손지조 · 유대공 · 공광삼 · 소진함 · 왕염손 · 왕중 · 무억 · 장술조 · 척학표 · 정걸 · 손성연 · 왕빙진 · 능정감 · 계복 · 강성 · 전대소 · 허강좌 · 공음식 · 육기 · 광계
484·485·486권 「문원전(文苑傳)」
원랑 · 하덕인 · 채윤공 · 사언 · 최신명 · 유연우 · 장창령 · 최행공 · 두심언 · 왕발 · 원만경 · 이적(李適) · 위원단 · 유윤제 · 심전기 · 송지문 · 염조은 · 윤원개 · 유헌 · 이옹(李邕) · 여향 · 왕한 · 손적 · 이백 · 왕유 · 정건 · 소영사 · 소원명 · 이화 · 맹호연 · 유태진 · 소설 · 우소 · 최원한 · 우공이 · 이익 · 노륜 · 구양첨 · 이하(李賀) · 오무릉 · 이상은(李商隱) · 설봉 · 이빈(李頻) · 오융
487·488·499·490·491·492·493·494·495·496권 「충의전(忠義傳)」
하후단 · 유감 · 상달 · 경군홍 · 여자장 · 왕행민 · 나사신 · 장도원 · 이육덕 · 고예 · 안금장 · 왕동교 · 오보안 · 이징(李憕) · 노혁 · 장개연 · 최무피 · 안고경 · 가순 · 장순 · 허원 · 남제운 · 뇌만춘 · 요은 · 정천리 · 방견 · 장흥 · 채정옥 · 부령기 · 유내 · 맹화 · 장비 · 주증 · 장명진 · 석연분 · 오서 · 고목 · 가직언 · 신당 · 황갈
497·498·499권 「효의전(孝義傳)」
이지본 · 장지관 · 유군량 · 왕소현 · 임경신 · 지숙재 · 정원사 · 무홍도 · 정잠요 · 원양 · 배경이 · 양문정 · 심계전 · 허백회 · 진집원 · 장수 · 서원경 · 여상안 · 양열 · 목종세 · 후지도 · 정구라 · 하징수
500·501권 「유일전(遺逸傳)」
왕적 · 손사막 · 전유암 · 맹선 · 왕우정 · 왕희이 · 이원개 · 위대경 · 무유서 · 백이충 · 오경 · 노홍 · 오균 · 반사정 · 사마승정 · 하지장 · 진계 · 장지화 · 공술예 · 육우 · 최근 · 육구몽
502·503·504·505권 「예술전(藝術傳)」
왕적 · 손사막 · 전유암 · 맹선 · 왕우정 · 왕희이 · 이원개 · 위대경 · 무유서 · 백이충 · 오경 · 노홍 · 오균 · 반사정 · 사마승정 · 하지장 · 진계 · 장지화 · 공술예 · 육우 · 최근 · 육구몽
506 · 507권 「주인전(疇人傳)」
설봉조 · 공사연 · 왕석천 · 방중통 · 매문정 · 명안도 · 유상규 · 왕문계 · 주홍 · 박계 · 허여란 · 이황 · 왕래 · 진걸 · 시왈순 · 이예 · 낙등봉 · 항명달 · 정취충 · 사가화 · 오가선 · 나사림 · 고관광 · 좌잠 · 증기홍 · 하란상 · 추백기 · 이선란 · 화형방
508·509·510·511권 「열녀전(列女傳)」
배숙영 · 왕난영 · 경상자 · 위무기 · 하후쇄금 · 왕아족 · 왕옥영 · 요아 · 두백랑 · 두중랑 · 이묘법 · 왕화자 · 사소아 · 봉순
222권 「남만전(南蠻傳)」
남조 · 임읍 · 파리국 · 반반국 · 정랍 · 수진랍국 · 타원국 · 가릉국 · 타화라국 · 타파등국 · 동사만 · 서조만 · 장가만 · 동여국 · 표국
518·519·520·521·522·523·524·525권 「번부전(藩部傳)」

526·527·528·529권 「속국전(屬國傳)」
조선 · 류구 · 월남 · 면전 · 섬라 · 남장 · 소록 · 구르카 · 호한 · 보노특 · 합살극 · 안집연 · 마이갈랑 · 나목간 · 탑십간 · 바다흐샨 · 박라이 · 아부한 · 감거시


[1] 1722년 즉위 당시 나이가 이미 44세.[2] 나중에 그의 아들인 건륭제가 87세로 장수하고 사망했을 때 태자 가경제의 나이가 35세로,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즉위했다. 다만 사망했을때의 나이가 56세라서 요절하지 않았고 당시의 평균 수명을 보면 나름대로 오래살았다. 그나마 가경제는 옹정제보다는 한참 젊은 나이에 즉위해서인지 24년간 재위했다.[3] 서비나 빈 미만 후궁들이 황손을 낳으면 황후나 빈 이상 높은 후궁이 맡아 길렀다. 봉작되지 못한 관녀(官女)와 함께 서비(庶妃)로 통칭/명나라와 청나라 후궁에겐 품계가 없다.[4] 강희 28년(1689년)에 황후로 진봉됐으나 이틀 후에 사망하여 효의인황후란 시호를 받았다. 효의인황후의 아버지 동국유(1643~1719)는 강희제의 외삼촌이 된다. 따라서 강희제와 효의인황후는 부부이자 사촌(외사촌/고종사촌) 관계였다.[5] 이 덕에 효의인황후의 남동생인 융과다가 외숙부로서 옹정제를 물심양면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융과다 역시 옹정제에 의해 숙청됐다.[6] 현재 베이징 최대의 티베트불교 사원이다.[7] 만주어로 왕자, 황자,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8] 윤잉 전에 승호(承祜)란 아들을 두었으나 요절하였다.[9] 윤잉이 겨우 한 살하고 일곱 달이 되었을 때 황태자로 책봉했을 정도다. 위에도 서술했다시피 윤잉은 첫째 황자, 즉 서자까지 포함시키면 장자는 아니다. 또한 강희제 이전 누르하치-홍타이지-푸린의 시대를 생각해보면 만주족 통치자들이 황태자라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비록 황후의 소생은 아니지만 서자인 황장자(皇長子) 윤제도 혜비 납라씨 소생으로서 윤잉의 외숙 색액도와 권력을 다투던 납란명주와 인척관계(叔姪인 것으로 생각된다.)로 세력이 매우 막강하였다.(누르하치 시기에는 적복진이 여럿 변경되기에 불명확하지만, 홍타이지 사후에 마지막 적복진인 오라나랍씨 소생인 도르곤이 계승권을 주장하고,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장성하여 여러 전공을 세운 숙친왕 호격 대신에 5비 중에 막내인 차서궁 장비 박이제길특씨의 소생에 어린 나이에 푸린이 즉위한 것에서 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푸린 사후에도 강희제는 장남이 아닌 3남이었음에도 조모 박이제길특씨의 지원을 받아서 등극된다는 점에서도 적자의 개념이 적복진 소생이기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10] 물론 단순히 이것뿐만 아니라 윤잉 자체가 주색에 빠지는 등 막장 짓들을 벌였었다.[11] 이게 사실 웃긴 게 청나라에서 이제까지 다음 후계자를 세울 때에 관리들과 상의를 한 적이 없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후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사후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아들들과 조카들 중에서 팔기의 수장이된 사람들로 구성된 회의체가 열렸고, 강희제는 조모이자 홍타이지의 측복진인 차서궁 장비이며, 순치제의 친모인 박이제길특씨의 지명으로 등극하였다. 다만 관리들의 의견을 잘 청취하던 강희제의 평소 행동을 보고 착각했을 수는 있지만, 왕조시대에 군주가 자신의 후계를 신료들의 의견을 결과에 반영시킬 수는 있어도 이에 따라서 세우지는 않는다.[12] 영락제가 손자인 선덕제를 총애해 그 아버지인 홍희제에게 다음 보위를 물려준 것과 같다. 하지만 홍희제는 영락제의 적자이자 장남이기에 당연한 후계자이다. 다만 동생들에 비하여서 무른 성격에 군사적인 전공이 없기에 교체의 빌미가 될 수있는 여지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교사회에서 장남이 아닌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주면 뒤가 너무 시끄러워진다는 것을 조카를 쫓아낸 영락제가 모를 리는 없다.(조카 건문제 측근에 간신 토벌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건문제가 사라졌다는 명분으로 즉위한 영락제는 많은 유학자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이를 자신의 武功으로 채우고자 한 것인데, 또다시 외정에만 몰두해야 하는 경우를 만들기에는 나라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13] 앞의 유조가 없어도 사실 조서 위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당시 청나라는 공식문서를 한자로만 작성한 것이 아니라 만주어로도 작성했기 때문이다. 조작되었다는 글자는 당시 황실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0황자"라고 표기하는 게 아니라 "황0자"라고 표기하였다는 걸 생각하면, 강희제가 옹정제를 차기 황제이자 후계자로 지명한 건 거의 확실하다. 다만 강희제 사망 당시에 베이징이 거의 폐쇄 상태였다는 점, 옹정제가 후계자로서 강희제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 강희제의 유조 발표 때에도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인해서 아직까지도 약간의 의혹들이 남아 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 평전에서 황장자와 한때 황태자였던 황2자는 부황의 눈 밖에 난 이후이고, 황3자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부족해 외면받던 상황에서 가장 큰 정통성을 가졌던 황4자 윤진(옹정제)이 황위를 물려받는 게 맞았다고 주장했다. 아들인 홍력의 총명함이나 쓸데없이 앞에 나서지 않는 옹정제의 치밀함은 부가적이라고 봤던 것. 다만, 황3자 성친왕 윤지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크게 부족하진 않았다. 그는 강희제로부터 기하학을 사사하고, 서양 학문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고금도서집성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주로 학술 분야에 행적이 있으니 문약했다고 평가하기도 어려운 게 윤지는 가르단과의 전쟁에 종군하여 다양한 헌책을 내놓아 그 공으로 군왕이 된 사람이었다. 능력은 있으되, 황제로서의 재목은 아니었던 듯 하다. 게다가 윤지는 강희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의 복상 기간 중에 예법에 어긋난 일을 하여 부황의 진노를 사는 일도 있었다.[14] 강희제 중반기까지의 외치는 외몽골 일대까지 안정시키는 등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강희제 말년에 이르면 준가르가 강화되고, 황자들의 후계다툼이 커지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15] 생전에 황태자를 발표하지 않고 적어서 상자 안에 봉해 두었다가 사후에 공개하는 방법. 생전에 황태자의 파벌을 형성하거나 선조처럼 황태자를 바꾼다고 신하들이 대립하는 경우가 없어지는 효과가 있었다.[16] 오히려 건륭제는 너무 장수하는 바람에 아들들이 요절하자 슬퍼하며 자신이 봉인해놨던 유조를 직접 꺼내보이는 일도 여러 번 있었고, 결국 죽기 전에 아들 가경제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으로 물러나기까지 했다.[17] 본래의 의미는 문안 인사나 하사품의 답례 등 그냥 개인 연락망이었다.[18] 명 홍무제 주원장이 처음 계획하고, 영락제가 체계를 구축한 황제가 모든 행정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은 옹정제에 이르러서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최고의 체제를 만들었다. 중국 전역의 지방관들과 직접적인 통교는 여럿 체계를 거쳐서 진행되는 행정적인 지연을 방지하고, 민생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업무를 가장 빠르게 진행하는 등의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업무 과다로 황제의 수명 단축과 황제 측근의 총애받는 권신들이 모든 국정사무를 농단할 문제점들을 발생시켰다.[19] 옹정제가 신하들 중 가장 믿고 신임했던 3총독인 하남총독 전문경, 절강총독 이위, 운귀광총독 시린교로 오르타이 3명 중에서도 오르타이는 만주인이라 유달리 옹정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오르타이에게 옹정제는 대략 "흐규흐규, 니 편지 읽으면서 야밤에 눈물이 난다. 너 같은 착한 놈은 조상님들도 9대조까지 극락왕생하실 거야", "니 글은 진짜 정성이 느껴진다. 한글자 한글자 읽을 때마다 각잡고 읽는중!",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오르타이 무병장수하고 자손만대 부귀영화 대박나게 해주세요. 우리 오르타이 하고 싶은거 다해" 같은 편지를 보내며 '주접을 떨었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옹정제가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던 오르타이는 사후 10년 만에 후손들이 문자의 옥에 휘말려 자기 위패까지 태묘에서 쫓겨났다는 게 아이러니하다.[20] 예를 들어 옹친왕 시절부터 예산 낭비에 대해선 봐주지 않는 옹정제의 까탈스러운 성격을 잘 알기에, 강희제의 능원 공사에서 돈을 아꼈더니 네놈은 선황을 능멸할 셈이냐며 질책했다. 이에 옹정제의 형제들이 돈을 아끼지 않자, 돈을 물쓰듯이 낭비한다고 욕하는 식이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냥 화병이 나서 죽어버리라는 듯이, 정말 온갖 문제에 대해서 열심히 꼬투리를 잡았다.[21] 다만 현대 만주어에서 개는 인다훤(indahūn), 돼지는 울갼(ulgiyan)이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나 옹정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러 중드를 계기로 이런 설들이 많이 퍼졌는데,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생몰년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소 연식이 오래된 분석으로, 21세기, 2010년대의 연구에서는 이것과는 다른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단어들이 당대 만주어로 개새끼, 돼지새끼가 아니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만주어학자들마다 해석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현대 한국어로 치면 극혐이, 짜증이, 개색이, 십색이 같은 영 좋지 않은 뜻임에는 다들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전산화와 번역이 완료되지 않은 수많은 청대 만주어 사료들이 전문가들의 손을 타다보면 정확히 알게 될 날이 올 듯. 일각에서는 '(죄를) 갖고 가다'란 뜻의 아치나(acina)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도마에 올려진 생선 혹은 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22] 강희제는 조선의 세종과 비슷하게 아들들에게 여러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황태자로 삼은 윤잉은 다른 형제들보다 더 엄격한 교육을 받았지만, 장성한 다른 황자들도 모두 고등교육을 받고 여러가지 업무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강희제 말년에 장성한 황자들의 후계다툼은 강희제 본인이 단초를 만든 것이었다(강희제 본인은 황태자 윤잉에게 보위를 승계하고자 하였기에 이러한 혼란을 생각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엄격한 4황자인 옹정제보다는 8황자 윤사가 형제들과 관료들 사이에서 깊은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황위는 황제가 지정하는 것이지 형제들과 신료들의 추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은 헛된 꿈을 놓지 못하고, 옹정제 시대까지 와서도 황제와 대립하였다. 원~명나라 이전시기까지는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지 못하였기에 변경될 여지가 있었으나, 이후 시기에는 이러한 생각은 정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다.[23] 황제는 소위 천병의 소유자이며, 최종 군통수권자다. 병사들이야 명령체계를 따른다 쳐도, 연갱요는 두 번이나 군령을 씹은 것이다. 약간 더 부연하자면 황제는 최종 군통수권자이며, 팔기 중 상삼기(양황기, 정황기, 정백기)를 관장하는 기주이다. 이에 비하여 연갱요는 준가르 정벌을 위하여 파견된 대장군으로 옹정제로부터 지휘권을 이양받은 것이지 본인이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였다(일단 연갱요 본인도 양황기 한군 소속이다). 그런데 이때는 준가르 정벌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생긴 것으로 이양된 지휘권이 옹정제에게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이같은 행태가 나타난 것이다. 비슷한 사례인 주아부 같은 경우에는 한 문제가 주아부가 통솔하는 군영으로 갔을 때에 생긴 것으로 이때는 북방의 흉노가 갑작스럽게 침공할 여지가 있는 상태에서 사전에 연락하지 않고서 황제가 진짜로 왔는지 판단되기 어려웠기에 용인되는 것이었다. 또한 연갱요 이전에 대장군직을 황제의 형제나 황자가 맡았기에 이러한 행태가 용인 되었을 지는 몰라도 옹정제로서는 이 지위를 가지고서 자신에게 대항한 동복동생인 황14자가 머릿속에서 떠올랐을 것이다. 연갱요는 만인도 아닌 한인 출신에 오직 옹정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높은 지위에 이르렀음에도 자신이 잘난 것으로 착각해서 오만불손한 행보를 보였으며, 연갱요의 말년이 괴로워진 것은 모두가 그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군대에서도 상관이 명령을 잘못 내릴 수 있고 이에 대해 하급자가 반대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는 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는 장수가 황명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허나 연갱요는 항명도 아닌 무시를 했다. 상급자가 명령을 했으면 따르던지 안따르던지 뭐라도 반응은 보여야하는 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군대의 예법이다. 군통수권자로부터 군령이 두번씩이나 내려왔는데 정면으로 무시한 데다 그 무시를 말리는 사람도 없게 만들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24] 그 죄들 중에는 '자신을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이라는 죄명도 있다.[25] 다만 사사정을 죽인 것은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다.[26] 심지어 서준은 이렇게 하고서도 뻔뻔스럽게 한자도 모르면서 문자를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며, 옹정제를 비꼬는 시를 짓기까지 했기 때문에 괘씸죄로 목이 베여서 효수되었다.[27] 옹정제가 과한 측면이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강희제 말년의 황자들의 황위 계승 다툼과 이 과정 속에서 황8자이던 염친왕 윤사가 신하들의 중망을 받아서 옹정제에게 대항하였던 측면을 고려하면 전혀 이해 못 할 것은 아니기는 하다. 강희제의 그 많은 아들들 중에서 옹정제의 편에 있었던 사람은 아주 어린 황자들 몇을 빼고는 황13자 윤상과 황16자 윤록, 황17자 윤례 등이 전부였고, 나머지들은 여러 트집을 잡아서 박해하였으니 옹정제가 사람 불신에 빠진 것이 이해가 될 정도이다.[28] 중국 드라마 이위당관(李衛當官)에서의 이위가 바로 이 사람이다.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무술을 익혔지만 무관직에서는 출세하기 힘든 한인인지라 정작 벼슬살이에 필요한 글공부는 못해서 겨우 연납으로 호부에서의 말단 벼슬자리를 얻어 성실히 일하던 중 옹친왕의 눈에 띄었던 인물인데, 어지간한 매관매지션들이 백성에게서 본전을 뽑으려 쥐어짜는 탐관오리로 흑화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자신을 과거 합격자가 아니라고 깔보던 웬만한 과거급제 출신 기성 관료들보다 훨씬 나은 일처리와 청렴함(!)을 선보인 덕에 관료집단을 극혐하던 옹정제가 크게 신임했다. 사실 저학력은 어쩔 수 없었는지 일처리가 실제로 뛰어났다기보다는 불도저식 업무로 일관했다는 평가도 있긴 하나, 오히려 과거제의 학맥에 연연하며 썩어가던 관료사회의 고인 물을 정화하는 데에 꼭 필요한 강단 있는 성품이야말로 옹정제가 옹친왕 시절부터 아주 높이 평가하던 장점이었다. [29]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인 순치제와 강희 초년에는 사회지도계층인 향신들을 회유하고자 비교적 많은 양보를 하였다(이 양보라는 것이 엄청난 것은 아닌데, 이전 시기 향신들이 각 지방에서 가지고 있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강희제가 친정을 한 이후에는 황제가 천하제1의 유학자라는 것을 타이틀로서 한족들을 통치하고자 하면서 또한 많은 우대와 대화를 하였다. 이에 향신들은 몇십년에 이르는 동안 각 지방을 예전처럼 장악하고,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여 강력한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서생들은 주원장 이후 편성된 황제독재체제로 구성된 행정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유학은 周代 봉건이나, 宋代에 君臣共治라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음). 강희제의 양보와 배려를 마치 자신들이 원래부터 가졌던 권리인 마냥 생각하였기에 이딴 웃기지도 않는 일을 벌였다. 다만 옹정제는 어차피 만주인이건, 한인이건 고위관료들과는 원래부터 척을 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가신들(대표적으로 일 잘하는 3총독 전문경, 이위, 시린교로 오르타이)이 그들보다 훨씬 유능하였기에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30] 현대 중국에서도 지방 유력가들과 관료들이 꽌시 문화를 통해 결탁하고 카르텔을 형성하곤 한다.[31] 출처는 등예쥔, 치국[32] 참고로 은 1냥(兩) = 1200푼(이건 공식적인 시세이고, 실제로는 등락이 있었다.)[33] 최하위 지방관인 지현조차도 1년 지출이 천 냥이 넘는데, 국가에서 받는 돈은 100냥이 안 되니 방법이 없었다.[34] 오늘날에도 금융업계의 연봉이 유달리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무나 민감하고 돈 되는 정보를 많이 알고 있기에 사적으로 내부자거래가 성행하면 직업윤리 내지는 컴플라이언스(규율)가 무너지기 때문에 가족 및 친인척의 증권거래, 부동산거래 등이 상시 감시당하는 대신 높은 연봉과 쏠쏠한 성과급으로 입을 틀어막는 것이다. 이런 규율은 오늘날 공직사회에서도 청탁금지법 등의 여러 형태로 존재하지만 공적 영역의 한계상 내부자들의 부패를 틀어막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데, 이 폐단이 쌓이고 쌓이면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 부동산 투기 사건 같은 일이 터진다. 근세 중국과 조선에서는 이 폐단을 끝끝내 근절해내지 못했는데, 옹정제는 자신의 치세에나마 이 적폐를 일신하려 노력한 보기드문 동양 군주였다. [35] 강희제도 자신이 근검절약하고, 근검절약하는 청렴한 관리들을 우대하여(고위직 임명과 자신의 내탕금으로 생활 보조 등) 부정부패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흘러갔지만, 노년이 되면서 황제의 국정 장악력은 떨어졌고, 황자들이 후계자가 되기 위하여 여러 부정부패들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국고의 자금을 관료들이 빌리고서 계속해서 갚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생활이 어려운 관리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갚도록 하는 좋은 제도였는데, 문제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갚는 것을 계속해서 미뤄버리면서 국고가 비게되었다. 강희제도 나중에 이것을 깨닫고 황4자 옹친왕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그 뿌리가 깊고 거대하였기에 황제가 되고 나서까지도 이와 같은 부정부패 일소에 전력을 다하였다. 잘 알려진 김용의 소설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의 모티브가 된 인물 중 한 명인 위동정이라는 인물도 국고에서 많은 금액을 빌렸는데, 옹친왕에게 혹독하게 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이 국고에서 빌린 이유는 강희제가 강남에 원행을 갔다가 올 때에 최소금액으로 다녀오면서 총신이던 위동정의 집에 자주 갔었는데, 위동정으로서는 황제에게 극진히 대우하면서 많은 금액을 지출하였다. 강희제는 내무부에 이야기해서 내탕금을 받으라고 했지만, 황제가 집에 오신것으로 이미 황은이 망극하옵니다인데 받을 수 없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국고에서 금액을 빌렸다. 이후 이 사실을 들은 강희제는 내탕금으로서 결손부분을 채웠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옹정제는 즉위 후 베이징 밖으로 사적인 순행을 떠난 적은 없다.[36] 그에 반하여 그 아들인 건륭제 때부터는 이런 기강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황제 개인까지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착복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게다가 현대 중국도 민국, 중공 가릴 것 없이 부정부패와 비리가 끊이지 않아서 중국 정부에서 근절 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해도 제대로 되지않는 상황이다. 이러니 재위 당시의 옹정제가 보통 위인이 아닌 셈.[37] 이곳이 옹정제의 믿을맨 3총독 중 전문경이 관장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전문경은 이미 강희 때부터 오랫동안 일한 고령의 관료였기에 건강을 많이 해쳐 틈만나면 사직을 청했으나, 옹정제는 전문경의 건강을 내심 걱정하면서도 사직을 끝끝내 허락하지 않다가 희대의 풍작을 일궈내어서야 유종의 미로써 사직을 허락했다. 결국 전문경은 옹정 10년 사직 이후 2년여만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옹정제는 하남성에 사당을 지어 기리도록 했다. [38] 개정을 안 하고 구제도로 회귀한 데에는 신하들의 불만 또한 크게 작용했다. 허구헌날 신하들을 두들겨패고 가산을 몰수하고 목을 치는 옹정제는 결과적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성군이었음이 역사적으로 평가가 굳어지고 있지만 그거야 오늘날 중국사 교과서에 나올 평가일 뿐, 당대에 그 밑에서 일하던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살 떨리는 폭군의 치세였다. 옹정제에게 신임받은 장정옥, 오르타이 등의 총신들마저 건륭 연간에는 구제도로의 회귀를 추진한 것은, 아버지만큼 범인을 초월한 수준의 근면한 인물이 아니었던 건륭제의 성품 못지 않게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관료들의 원성 또한 크게 작용했다.[39] 가깝게는 이러한 관료제도를 만든 명 태조 홍무제에게 죄가 있고, 멀게는 봉건제를 가장 좋은 이상적 사회구조로 여기고 행하려던 유학 자체에서 이러한 문제점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청나라의 대부분의 제도는 명의 것을 이어받았는데, 홍무제는 과거 유랑하던 사람으로 반지식인층 사람에 가까웠다. 이에 금의위라는 감시기구를 통하여서 통제하며, 관료들의 급여도 매우 짜게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사실 홍무제가 짜게 주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이기는 하지만, 유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정부체계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생긴 문제이기도 했다. 유학에서 바라보는 가장 이상적 국가였던 주나라는 봉건제를 실시하면서 중앙의 관리 급여는 거의 무급이었다. 이게 가능한 것은 관료가 되는 것이 지방의 제후들로 이미 분봉을 받았고, 따라서 영지내에서 세금을 받는 조치만 취해도 자기 소득이 생겼기때문에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위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나라 시대에는 중원에서도 미개척지가 많았기 때문에 관료들에게 토지를 넉넉하게 줄 수 있었지만, 인구가 이때보다 수십배 이상 늘어나고 중원괴 장강 일대가 개척될대로 개척된 명청대에는 시대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고, 미개척지를 나눠줄려해도 만주처럼 봉금령이 지정된 지역이나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같이 농업생산성이 한참 떨어지고 인구도 적은 동네들이 아니라면 넉넉하게 힘들었다. 이에 지방에 자기 소유의 넉넉한 땅을 소유하고 있는 금수저가 아니고서는 청백리로서 먹고 살려면 고위직이 아닌 이상 힘들었다. 비슷한 제도를 가진 조선왕조 또한 500년 내내 중앙정부는 예산부족에 시달리고 자원봉사에 가까운 관리의 녹봉 때문에 생계형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40] 운귀광총독의 관할은 운남, 귀주, 광서 3성이었다. 원래 상설직 총독으로서는 운귀총독이 2개 성을 관장하는 형태였지만, 묘족 반란 평정에서 광서성에 대한 권한 역시 보장해줄 필요가 있었다. 옹정제는 이렇듯 주요 심복을 순무나 총독에 기용할 때 관할 구역을 쪼개거나 합병하여 실무에 최적화하는 일이 잦았다.[41] 유럽 국가들도 금본위제, 은본위제를 택했지만 실제로는 그에 가치를 엮은 지폐를 활용한 것과 같다.[42] 초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43] 이전에도 중화제국의 황제와 유목민의 대칸 자리가 겸임된 적은 있었지만 그 때는 적어도 양쪽 자리 중 하나에만 주로 집중한 면이 강하다.[44] 다만 잘 하는 부하들은 낯뜨거울 정도로 칭찬했다.[45] 애초에 날아오는 주접이 하루에도 수십 통이기 때문에 남들 다 쓴 내용을 자신만 쓰지 않으면 꼼짝없이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46] 그냥 아무개도 아니고 옹정제의 삼총신 중 하나인 전문경도 했다![47] 여기까지 보면 조선의 태종, 세종, 정조를 보는듯 하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공신들을 숙청한 데다가 신하들 머릿속과 행동양식을 꿰고 앉았던 인물이고, 세종은 과로는 기본에 신하들을 종신노예급으로 부린 인물인 데다가 신하들이 똘똘 뭉쳐 조작 및 은폐 공작한 사건에 대해 글 몇줄 읽고 수상한 점을 찾아낸 인물이며, 정조는 옹정제처럼 관료들을 불신하여 막후정치를 실시하며 수많은 욕설을 후세에 전한 독설가였다. 게다가 세 국왕들 모두 희대의 천재 군주들이었다. 태종은 조선 왕 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 관료 출신, 세종과 정조는 희대의 책벌레로 말빨로는 이들을 당할 신하가 없었다. 그나마 태종은 숙청으로 악명높은 이미지와 달리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 신료들이나 일반 백성들에겐 의외로 자비로운 편이었고, 세종은 능력만 있다면 인격 따위 상관 않고 등용했으며, 정조는 입은 걸걸해도 처벌까지 참혹하게 행하지는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이들을 모신 신하들은 옹정제의 신하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훨씬 편하게 일한 것이다.[48] 조선왕조실록에서 중국에 갔다온 사신들이 경종에게 보고할 때 이런 루머에 대해 언급할만큼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소문이었으나, 만몽한 3개 언어로 쓰인 강희제의 유조가 21세기에 공개되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49] 이 때문에 오늘날 이 후손들은 중국 행정상에서 만주족(!)으로 분류된다. 단순히 기인의 후예라면 만몽한 불문하고 만주인으로 분류하는 중국의 주먹구구식 행정 탓이라 볼 수도 없는게, 장제스 등의 여러 한족 군벌들을 멀리하고 선통제를 마지막까지 따른 것을 보면 일리가 있다.[50] 즉 '황제가 대의(大義)를 통해, 명나라를 옹호하고 대청의 천명을 부정하여 잘못된 길에 든(迷) 증정을 깨우치게 한(覺) 기록(錄)'인 것이다.[51] 애초에 대의각미록은 저 악종기 사건의 주범으로 잡혀온 증정이라는 인물과 옹정제가 중심 인물인데, 이 둘의 토론을 통해 증정이 사상 개조되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건륭제 즉위 이후 저 증정이 대역 죄인으로 모가지가 날아갔다. 그 결과 증정과 옹정제의 토론이 주인 대의각미록도 같이 파묻혔다.[52] 아들복은 그럭저럭 있지만 딸복이 없었던 옹정제의 딸 중 유일하게 장성한 딸이다. 강희 51년 7월에 화석군주로 책봉되고, 9월에 오랍나랍 성덕에게 하가. 옹정제 등극 뒤에 화석회각공주로 추봉.[53] 원전은 당나라 장온고가 지은 대보잠. 옹정제는 이 글귀를 대전 양 기둥에 적어 두었다.[54] 주세페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나름 의미심장한(건륭제가 강희제와 옹정제 모두가 인정하는 미래의 천자임을 상징하는) 부자간의 초상화인데, 건륭제가 늘그막에 이 그림을 다시 보고는 구석에 먼저 세상을 떠난 카스틸리오네를 그리워하는 감상평을 썼다.[55] 변발을 국시이자 민족 정신으로 규정한 청나라였기에 탈모 따위 무슨 의미가 있었겠냐마는, 아무리 만주족이라도 현실적으로 매일매일 대머리 깎으며 살 것도 아니고 빛나는 스킨헤드보다는 오늘날의 스포츠 머리 내지는 훈련병 머리로 지내는 기간이 당연히 더 많았다. 물론 대청 황제씩이나 되면 중요한 공식석상에서는 금전서미만 남기고 빡빡 민 후 관모를 쓰는 게 정석이었지만, 옹정제는 오덕이었던지라 관모를 쓰지 않은 엉뚱한 차림으로도 많은 초상화가 남았고 그 덕에 M자 탈모의 흔적마저 전해지고 말았다. 사실 변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청나라에선 대머리도 가짜 변발을 붙여야 했기 때문에 황제가 대머리라면 문제의 소지가 있었을 법도 하다. 단지 옹정제 본인의 절대권력 탓에 같은 청나라 황족이라도 옹정제의 대머리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지 못했을 뿐.[56] 조금 애매한 번역이긴 하지만 번역하자면 하인이 주인에게 소인이라고 하는 거라 보면 된다.[57] 오히려 옹정제의 최측근 가신들 중에는 만인 못지않게 한인도 많았다. 강옹건 3대를 섬긴 장정옥이나 연갱요가 대표적. 또한 전문경이나 이위처럼 진사를 못 따고 연납으로 임용되어 진사 출신자들에게는 낙하산 취급을 받는 한인 부하들도 많았다. 연갱요는 한족이긴 하지만 집안이 한족팔기였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일반 다른 한족이라고 보기는 좀 그렇다. 팔기에 편입된 한족도 엄연히 기인 취급을 해 줬기 때문이다. 기인내에서도 만족 몽골 한족 이런 식으로 서열이 존재했고 위에서도 설명되어 있지만, 연갱요 집안은 포의에서 한군으로 편입된 가문이다. 연갱요 여동생이 옹정제의 첩이 된 것만 봐도 연갱요 집안은 팔기에 속하는 귀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에는 청나라의 귀족이 아니면 궁녀가 될 자격조차 없었다. 팔기 귀족에 딸 중에서만 궁녀를 뽑았기 때문이다. 연갱요는 총독이었는데 총독조차 팔기 출신 기인들만 임명을 했다.[58] 이는 건륭제가 즉위하자마자 도사들을 자금성에서 내쫓은 일이 야사로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비슷한 예로 건륭제가 즉위하자마자 여유량의 일족을 주멸하고 증정을 포함한 다른 사상적 관련자들까지 목을 날려버린 일과 엮어 여유량의 딸(또는 손녀)가 궁녀로 자금성에 들어와 옹정제를 암살했다는 야사가 생긴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이런 야사들은 건륭제의 후속 조치 때문에 더 수상해보이는 지경이다.[59] 평균 수명시간이 위에 나온 것처럼 4시간일 정도로 업무에 몰두했다. 20~30대 한창 나이대의 청년이라도 이러면 건강 해치기 딱 좋은데, 옹정제는 즉위할 때 이미 쉰을 바라볼 시기였다.[60] 속편도 있으며 이 속편은 국내에도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속편에는 장국영 출연.[61] 이점에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조선왕조 오백년과 비슷하다.[62] 해외 출품명은 군림천하. 한국에서도 이 제목으로 알려졌다.[63] 당국강은 뒷날 강산풍우정에서 홍타이지 역을 맡았다. 1994년 삼국지 드라마에서는 중국사의 또 한명의 과로사의 아이콘인 제갈량 역으로도 호연을 선보였다.[64] 정황기 출신의 이번원 고위 관료로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러시아에 사신으로 갔다오고 캬흐타 조약에 대표로 나서는 등, 대몽과 대러 외교에서 잔뼈가 굵은 청나라의 베테랑 외교관이었지만 드라마에서는 러시아와 외몽골 외교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지라 옹정제가 신임하는 황궁 시위로만 나왔다.[65] 다만 이 작품에서도 일찍 죽은 첫 적복진 순원황후에게만 일편단심이긴 하다.[66] 국내 방송명은 요리왕 고천보.[67] 전작 <소림사십팔동인>에 나왔던 황가달, 전붕, 상관영봉이 그대로 나오고 플롯도 거의 비슷하여 한국에서는 소림사십팔동인 2라고 알려졌다.[68] 이 학살 미수 사건이 누가 반역자고 무고한 양민인지 몰라 일단 죽인다는 것도 아니고, 죄 없는 무고한 양민들을 계속 처형하다 보면 결국 반란분자들이 자수할 것이라는 정신나간 발상으로 저지른 짓이다.[69] 남기남 감독이 찍은 동명의 영화와는 관계없는 홍콩-대만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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