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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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개화기에 일어난 변화 (일)
2.1. 정치 제도적 변화
2.2. 사회 문화적 변화
2.3. 경제적 변화
2.4. 생활 환경적 변화
3. 개화기 사건
4. 개화기 인물
4.1. 한국인
4.2. 외국인
5. 개화기에 대한 평가
5.1. 긍정적 평가
5.2. 부정적 평가
6.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


1. 개요[편집]


개화기()는 1876년 맺은 강화도 조약 후, 한국에서 서양 문물이 유입되어 종래의 전근대적 사회 질서 및 풍습이 타파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근대적 사회로 변화되어 가던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개화기의 끝을 어디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보통 1910년 경술국치를 개화기의 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강화도 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시기를 따져보면 대략 34년이다.[1] 초기 개화기(1876~1884), 정체기(1884~1894)[2] , 갑오개혁기(1894~1897), 대한제국 시기(1897~1910)[3]로 나누어진다.

일본에는 비슷한 시대로는 메이지 유신 직전 막말(幕末, 바쿠마쓰) 시대와 유신 이후 메이지 시대가 있다. 자국 문물이 난무하던 시기에 서양 문물이 물들어가는 때라서 그런지 일본에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등 그때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다. 사실 한국에서도 이 시대를 다룬 작품은 생각보단 많기는 하나, 일본과는 다르게 결말이 좋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진지한 시대극이며, 가벼운 분위기로 개화기를 낭만적으로 그리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개화기는 청나라의 광서제, 선통제 시대, 유럽의 패권국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치세 후반기 ~ 에드워드 7세 시대, 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한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와 동시기에 해당하며, 벨 에포크 시기와 상당부분 겹치는 기간이다. 소위 구한말과도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4] 해당 문서도 참조할 것.


2. 개화기에 일어난 변화 (일)[편집]


개화기 중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때를 '개혁'이라고 해서 따로 지정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개혁들이 개화기 때 일어났다.
  • 갑오개혁 - 갑오 개혁은 최근 교과서에서 1차와 2차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 을미개혁 - 갑오 3차 개혁이라며 갑오개혁에 포함되기도 한다.
  • 광무개혁 -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 후 직접 주도한 개혁이다.


2.1. 정치 제도적 변화[편집]


  • 민주주의의 도입 시도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발표되었던 개혁 정강 14개조에서 급진 개화파 세력은 "대신(大臣)과 참찬(參贊)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政令)을 의결하고 반포한다."라는 문장을 실어 입헌 군주제를 시도하려 했다. 1894년, 갑오개혁을 진행할 때에는 정부 사무와 왕실 사무를 각각 의정부와 궁내부로 분리하여 입헌 군주제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독립협회의 활동 기간 중에는 실제로 입헌 군주제의 실현이 성공할 뻔했다. 1896년에 설립된 독립 협회는 꾸준히 자유 민권 운동을 진행해오며 연좌제 폐지 운동, 피고의 인권 존중 운동 등을 진행해왔다. 실제로 "칙임관은 정부에 뜻을 물어 과반수가 동의하면 임명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헌의 6조가 황제의 재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1898년 10월, 드디어 중추원 관제가 선포됨으로써 자그마치 조선 최초의 의회가 설립되었다! 는가 싶더니... 보수파 세력이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공화정를 추종한다고 모함하여 고종이 황국협회를 동원, 독립 협회를 강제 해산시켜버렸다. 그렇게 조선은 입헌 군주제의 도입에 실패하였다.[5][6]
  • 정치 기구의 신설
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정치 기구를 신설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880년에 설치된 통리기무아문. 이 기구 산하에 12사를 편성하여 초기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 군제 개혁
유럽의 군대를 모방하여 서구 무기를 도입하고 군대의 질적 향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중구난방으로 하다가 결국 실패.


2.2. 사회 문화적 변화[편집]


  • 근대적 학문의 유입과 교육계의 근대화
서구 문명과 접촉하는 일이 잦아진 조선 정부는 전문 통역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동문학. 1883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묄렌도르프의 주도로 세워지게 된다. 하지만 이를 최초의 관립 학교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통역관 양성소 느낌이 진하여 보통 최초의 관립 학교라고 하면 육영공원을 떠올린다. 1886년, 보빙사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의 건의로 세워진 육영 공원은 말 그대로 "육영", 영재를 육성하는 진짜 관립학교였다. 대상은 주로 상류층 자제였다. 참고로 이 학교의 선생님이 그 유명한 헐버트.
또한, 근대적 교육을 받기 위한 민간의 노력 역시 존재하였으므로 개화기에는 수많은 사립학교가 세워지게 된다. 최초의 사립학교는 원산학사. 1883년, 덕원 부사 정현석과 원산 주민이 합세하여 세운 이 학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학교라고 평가받는다. 특징은 문예반과 무예반을 따로 편성하여 교육했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가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창 들어올 시기이다 보니 선교사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역시 빈번하였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배화학당, 숭의여학교, 정신여학교 등등이 전부 이 시기에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학교. 그 외에도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대성학교, 점진학교, 오산학교, 휘문의숙, 양정의숙, 기호학교(중앙학교),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 호명학교, 봉양학교, 보성전문학교보성중학교 등이 있다. 이런 근대화된 교육 체계에서 법학, 수학, 외국어, 역사학, 물리학, 화학, 지리학, 의학, 철학 등 서구식 학문, 서구식 학습 방법이 도입되었다.

  • 서구 예술의 유입
문학계에서는 기존의 고전 시가와 고전 소설의 형식을 탈피한 신체시,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1906년)을 필두로 하여 이해조의 《자유종》(1908년),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10년) 등의 신소설이 꾸준히 등장하였다. 최초의 신체시는 잡지 《소년》에 발표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이다. 개화기에 등장한 문학 작품들은 대부분이 순 한글로 되어있으며 언문일치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상당수의 작품이 신식 교육, 여권 신장, 신분 의식 타파, 자유 연애, 문명 개화 등을 주제로 삼고 있었다. 이런 새로운 형식의 시도는 20세기의 다양한 소설과 시, 수필, 희곡과 같은 근현대 문학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일부 작가들은 문명 개화에 집중한 나머지 의병 활동을 비난하거나 일본의 정치 선전에 동원되어 친일적 색채를 띠는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술계도 서양화가 도입되었다. 기존의 한국화 작가들이 서양적인 그림체를 혼용해서 쓰기도 했다. 음악도 서구 클래식 음악이 도입되고 서양 무용도 도입되었다. 건축계에도 신고전주의, 로마네스크, 네오 르네상스, 바로크, 고딕 양식 등 서구 건축양식이 도입되면서 한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한양절충(韓洋折衷) 양식이나 완전한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음력이 공식적인 달력이었으나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양력(그레고리력)을 공식적인 달력으로 도입하였다. 다만 여전히 일상생활에서는 음력이 쓰이고 있었다.

기존에 쓰던 도량형이 서구식 체계로 변화되었다. 다만 기존것을 완전히 갈아엎진 않고 일상생활에서는 병행해서 썼다.

개화기는 초창기 페미니스트들이 서구사회에서 막 여권 운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에 영향을 받아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 미약하게나마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1898년 여성인권선언인 여권통문이 발표되었다. 또한 여성교육과 애국운동을 같이 하는 신여성 운동이 일어났다. 참고글, 참고글2

유교가 사실상 국교화된 조선시기를 벗어나 서구식 종교인 개신교가 유입되었고 천주교 역시 탄압에서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숭유억불로 억눌리던 불교 역시 개화기 시절 숨통을 틔었고 여타 신흥종교들이 태어났다.

  • 신문물 유입에 따른 새로운 직업의 탄생
대표적으로 우편을 나르는 집배원, 전보를 치는 전보사 직원,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 전차나 철도의 운전기사,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 서양의학을 공부한 의사, 신문사의 기자, 단발령 이후 생겨난 이발사 등등 이전엔 없던 새로운 직업들이 생겼다.


2.3. 경제적 변화[편집]


개화기가 되면서 쇠퇴하는 것이다. 쇠퇴하게 된 다른 하나는 바로 왕조 그 자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으로 흥선대원군을 비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항과 통상이 군사력의 열세, 근대적 조약에 대한 무지 등의 이유로 경제 성장이나 기술 개발보다는 선진국에 의한 경제적 종속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말인즉슨, 무조건 '폐쇄 = 악, 개방 =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7]

  • 수공업의 쇠퇴
    • 일본, 청나라에서의 신문물 수입으로 인해 조선의 수공업이 망한다. 영국제 면포인 옥양목이 들어왔는데, 무명에 비해 가격에 거의 차이가 없고 품질은 훨씬 좋은 등 대량 생산된 외제 물품이 국산품의 성능을 앞질러 수공업이 거의 망하고 만다.
  • 상업의 쇠퇴
    • 원래 외국 상인들이 개항장에서 사방 10여 리까지만 드나들 수 있어, 개항장에서 시전 상인이나 보부상들이 이를 매입해 사람들에게 팔면서 이문을 남길 수 있었으나, 1882년 사방 50여 리로 늘고 1883년부터 조약을 추가로 맺어 외국 상인들이 전국 어디든 장사할 권리를 얻게 되자 시전 상인과 보부상은 시장에서 밀려나고 만다. 이러한 정부의 행동에 반발해 1890년에는 시전 상인들이 연좌 시위를 하기도 했으나 정치인들이 늘 그렇듯이 통하지 않았다. 몇몇 악질적인 외국 상인들은 정세에 어두운 조선사람들을 속여서 폭리를 취하거나 고리대를 하기도해 지탄을 받았다.
  • 농촌의 몰락
    • 일본 상인들이 쌀 가지고 장난쳐서 농민들은 빚더미에 나앉았다. 그 장난질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입도선매이다. 말 그대로 쌀이 서기도 전에 쌀을 사간다는 것으로, 쌀을 수확하기도 전에 미리 돈을 받고 쌀을 수확하면 그대로 쌀을 넘기는 방식이다. 이 입도선매로 인해 당장 돈이 급한 농민이 쌀을 미리 헐값에 팔아넘겨 많은 농민들이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몰락한 농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매도하였고 그 결과 지주 및 상인이 토지를 집중 소유하는 불건전한 경제 구도가 자리 잡았다.
    •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1883년에 맺어진 조일통상장정 제37관을 근거로 들어 방곡령을 선포했고, 방곡령 선포가 황해도와 경상도 등지로 확산되었지만 일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1개월 전에 미리 대사관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금 11만 원을 뜯어내는 역관광을 시전하는 등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


2.4. 생활 환경적 변화[편집]


모두 알다시피 개화기는 서구 문물이 조선으로 쏟아 들어오는 시기였다. 다음은 개화기에 유입된 서구 문명을 정리한 것이다. 개인이 소지가 가능한 개인간 유통되는 물건들은 황학동, 인사동 골동품상이나 코베이 경매 등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

민중들을 계몽하기 위해 여러 신문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의 신문들은 순 한문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게 국문으로도 출판되었으며, 몇몇 신문들은 영문판으로도 출판되었다. 이러한 신문들은 국민들을 계몽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특히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활동에 도움을 주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년에 이완용 내각이 신문지법을 공포해 언론사를 탄압하면서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폐간되고 만다. 서구식 신문은 국민들을 크게 계몽시켰으나 의 병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한계점 역시 가지고 있었다. 개화기 때 발행된 신문들은 다음과 같다.
  • 한성순보》 : 1883년에 처음으로 발간된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 박문국에서 10일마다 출판. 순 한문으로만 쓰였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
  • 한성주보》 : 7일마다 출판된 국한문 혼용 신문.
  • 독립신문》 : 최초의 민간에서 출판한 신문이자 일간지. 해당 문서 참조.
  • 황성신문》 : 해당 문서 참조.
  • 제국신문》 : 부녀자들을 타깃으로 한 신문으로 순수하게 한글로만 적혀져 있었다.
  • 대한매일신보》 : 해당 문서 참조.
  • 스포츠의 전파
  • 테니스 : 거문도 사건 때 영국군이 테니스장을 지으면서 전파되었다.
  • 야구 :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을 세우고 야구를 전파하였다.
  • 축구 : 1882년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군함의 승무원이 처음으로 축구를 선보였으며 1896년 황성 축구 구락부라는 최초의 선수단이 생겼다.
  • 농구 : 1907년 질레트가 소개했다.
  • 당구 : 1884년 들어왔다.


3. 개화기 사건[편집]


개화기에 일어난 사건들 목록이다.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변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의 한국사와는 비교도 안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것의 2배 정도 되는 단체들이 조직되고 그 단체 수의 2배 정도 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기록이 비교적 잘 보존되면서 공부거리가 폭증한다. 거기에 연도까지 더하면 그랜드슬램 달성.

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 펼치기 · 접기 ]
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병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풍도 해전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4. 개화기 인물[편집]


개화기 때에 활동한 인물들.


4.1. 한국인[편집]


  • 고종
  • 김개남
  • 김구[8]
  • 김봉학[9]
  • 김옥균
  • 김홍집
  • 김홍륙
  • 명성황후
  • 민영익
  • 민영환
  • 박에스더
  • 박영효
  • 박정수[10]
  • 서광범[11]
  • 서상돈[12]
  • 서재필[13]
  • 손병희
  • 순종
  • 신돌석
  • 신채호
  • 안경수[14]
  • 안중근[15]
  • 안창호
  • 어윤중
  • 이동휘
  • 이완용
    • 을사오적
    • 정미칠적
    • 민영기
    • 이하영[16]
  • 이진호
  • 우범선
  • 유길준
  • 유인석
  • 윤치호
  • 원용석[17]
  • 이상재
  • 이상철
  • 이승만[18]
  • 이용익
  • 이윤용
  • 이종호
  • 장석주 (장박)
  • 장지연
  • 전봉준
  • 정병하
  • 구한 말의 탐관오리
    • 조병갑
    • 조병식[19]
  • 조병세
  • 조희연
  • 주시경
  • 지석영
  • 최시형
  • 최익현
  • 하란사
  • 한규설
  • 홍계훈
  • 홍범도
  • 홍영식
  • 홍종우
  • 황현
  • 흥선대원군
  • 헤이그 특사


4.2. 외국인[편집]


  • 더럼 스티븐스
  •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 릴리아스 언더우드
  • 모리스 쿠랑[20]
  • 피에르 모방 신부
  • 미우라 고로
  • 샤를 알레베크
  • 안토니트 존탁[21]
  • 어니스트 베델
  •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22]
  • 위안스카이
  • 이사벨라 버드 비숍
  • 이노우에 가오루
  • 이토 히로부미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 펠릭스 클레르 리델
  • 필립 제이슨
  • 하나부사 요시모토
  • 헨리 아펜젤러
  • 호리모토 레이조[23]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 호러스 뉴턴 알렌
  • 호머 헐버트


5. 개화기에 대한 평가[편집]



5.1. 긍정적 평가[편집]


한반도 최초의 신분 제도에 대한 법적 철폐가 이 때 이루어졌다. 사실상 현대 문명의 초석인 서구문물들이 한국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5.2. 부정적 평가[편집]


주체적으로 개화하려는 모습이 부족했고 일본에 의존한 갑신정변이나 일본의 압박에 의해 시작된 갑오개혁 등에서 외세에 휘둘리는 모습이 보인다.


6.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 《노다지》[24], 《이화》,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먼동》, 《김구》[25]찬란한 여명
  • 닥터 진
  • 명성황후(드라마)/(뮤지컬)
  • 제중원
  • YMCA 야구단
  • 조선총잡이
  • 불꽃처럼 나비처럼
  • 그림자 살인
  • 미스터 션샤인
  • 녹두꽃
  • 곤 투모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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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이 한국을 실제로 완전히 지배한 35년 이전부터 그와 거의 비슷한 시간 만큼 침략의 손길을 뻗고 있던 것이다.[2] 다만 이 때도 근대화가 멈춘 것은 아니며, 점진적인 개혁은 꾸준히 시행되었다.[3] 1904년(한일의정서)부터 1910년(경술국치)까지 시기를 국권피탈기라고도 부른다.[4] 시기상으로는 거의 동일하다.[5] 사실 가능성이 있었다는 게 황제의 동의가 있었다는 건데, 아무리 잘 봐줘도 황제가 변심한 것이므로(황국 협회는 어용 단체다) 가능성은 원래 없었다.[6] 이런 성공에 고무된 나머지 박영효 추천 등 민중이나 황제나 모두 염증을 느낄만한 무리수를 많이 둔것도 실패의 원인 중 하나다[7] 예를 들면 이집트는 근대화를 위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농간으로 식민지로 주저앉았다.[8]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 참여.[9] 을미사변이 벌어지자 의병에 참여하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의 살해를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음독 자결하였다.[10] 을사조약의 체결 이후 의병으로 활동했다.[11] 갑오개혁에 참여하였다.[12] 국채보상운동 주도.[13] 미국인으로 국적을 바꾼다.[14] 독립협회 1대 회장. 김재풍 등과 황제 양위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김재풍은 체포되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는 데 고종이 용서할 것처럼 하여 조선에 돌아왔는데 이 사건이 아니라 다른 사건을 트집을 잡아 죽였다 [15]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농민군을 진압한 적이 있다.[16] 을사조약에 반대한 대신이였지만, 나중에 변절하였다.[17] 을사의병[18] 독립협회 참여[19] 방곡령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수탈할 미곡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후 조병식은 충청 감사가 되어서 동학도들의 애절한 호소를 그냥 다 씹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후 이리저리 좌천당했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탐관오리 일직선. 나름 지조있는 탐관오리 인생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직 고종의 전제 왕권 유지와 독립협회를 때려부수는 것만 목적이었던 정치 깡패 집단인 황국 협회의 간부가 되어 직접 독립 협회를 때려부수고 민권 운동을 탄압했다. 그야말로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닌 인물.[20] 한국학의 선구자[21] 손탁호텔의 그 손탁이다.[22]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일으킨 주범[23] 임오군란 때 살해당한 일본군 교관으로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에 대한 명분이 되었다.[24] 정확하게는 초반부 부분[25] 역시 초반부 부분 애초에 1875년에 태어났다 보니 자연히 개화기를 다루는 부분이 없을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