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넨드라

덤프버전 :





파일:네팔 국기.svg
네팔 왕위요구자


[ 펼치기 · 접기 ]





네팔 12대 국왕
갸넨드라
ज्ञानेन्द्र शाह


파일:gyanendra.jpg

출생
1947년 7월 7일 (76세)
네팔 왕국 카트만두
재위기간
제12대 국왕
1950년 11월 7일 ~ 1951년 1월 7일
2001년 6월 4일 ~ 2008년 5월 28일
제1대 왕위요구자
2008년 5월 28일 ~ 현직
칭호
갸넨드라 비르 비크람 샤허 데브
대관식
1950년 11월 7일
2001년 6월 4일
신장
178cm[1]
부모
아버지 마헨드라 국왕
어머니 인드라 락쉬미 왕비
배우자
코말 왕비
종교
힌두교

1. 소개
2. 생애
3. 갑자기 즉위한 왕
4. 네팔 왕실 참극의 배후설
5. 폭정과 퇴위
6. 평가
7. 가계



1. 소개[편집]


네팔마지막 국왕. 폐위되고 네팔이 공화국이 된 이후에도 현재까지 왕정복고와 네팔 신 정부에게 몰수당한 구 왕실 재산의 반환을 주장/요구하고 있다.


2. 생애[편집]


갸넨드라는 1947년 7월 7일 네팔의 9대 왕 마헨드라와 인드라 왕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비렌드라의 동생이자 디펜드라의 숙부였다. 그가 네 살이던 1950년, 그의 조부이자 8대왕 트리부반은 라나 가문과의 갈등끝에 가족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뉴델리로 망명해 버렸고, 당황한 모한 샨시르 라나 당시 총리는 유일하게 궁에 남아있던 4살배기 갸넨드라를 급한대로 왕위에 추대해 권력을 이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네팔 국민들의 반발로 갸넨드라를 왕위에 올리고 라냐가문이 통치를 이어가는 일은 유야무야되고 결국 다음해인 1951년 1월 7일, 트리부반은 전국민의 열화와 같은 환호속에 카트만두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를뻔한 일은 헤프닝으로 남고, 둘째 손자였던 갸넨드라는 이후에는 왕좌와 거리가 먼 삶을 사나 싶었다. 그런데...


3. 갑자기 즉위한 왕[편집]


2001년 6월 1일, 갸넨드라는 갑자기 네팔 제 2의 도시인 포카라로 공무차 출장을 떠났다. 그날 밤 9시(한국 시간 6월 2일 새벽 12시 45분)경 나린얀히티 왕궁의 연회장에서 왕세자 디펜드라가 아버지 비렌드라와 가족들을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네팔 왕실 학살).[2] 연락을 받고 급히 카트만두로 올라온 갸넨드라는 비렌드라가 죽고 디펜드라가 권총 자살을 기도해 혼수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약 3일간 대리 청정을 거쳤고, 혼수 상태였던 조카 디펜드라가 죽자, 갸넨드라는 네팔 제 12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4. 네팔 왕실 참극의 배후설[편집]


갸넨드라가 당시 포카라로 출장중이라 현장에 없었고, 그의 자식들은 현장에 있었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아서 참사를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없고 갸넨드라가 평소 평판이 안 좋았던 데다가, 갸넨드라의 자식들은 다치지 않은 것은 맞지만, 부인인 코말 왕비가 현장에 있었다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배후설은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른 배후설로 갸넨드라는 공범 내지 바지사장이고, 진짜 배후는 인도미국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이런 류의 배후설은 마오이스트 반군 계열에서나 나오는 배후설이라 진지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갸넨드라가 물러난 뒤 네팔 공화국에서도 국민들의 요구로 조사를 했으나 디펜드라의 단독범행이고 갸넨드라는 사건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5. 폭정과 퇴위[편집]


어쨌든 즉위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뒤에 벌인 행태. 2001년 6월 4일 즉위한 갸넨드라는 헌법을 바꾸고 전제 정치를 부활시켰다. 또한 비상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게다가 형 비렌드라는 마오이스트 반군과 대화랑 협상을 통해서 휴전을 하고 이들의 무장해제를 권유해 제도권 정치에 끌어들이게 하려는 노력을 하여 평화적으로 내전을 종식시키려고 시도했었지만 갸넨드라는 이를 무효로 하며 반군에 대한 강경 진압에 들어갔다. 당연히 마오이스트 반군은 분노하여 다시 내전이 터지고 만다. 그러한 상황에서였다면 정치권의 원내 세력들이라도 지지층으로 확보했어야 하는건데 갸넨드라는 그러긴 커녕 국회를 해산하고 총리를 파면하여 공석으로 한 일 때문에 국민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민주화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왕실을 지지하는 국민들과 정치권내의 집권 여당들까지 돌아서게 만든다. 더군다나 갸넨드라의 삽질로 마오이스트 반군은 힘을 얻었고 이들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네팔 전체를 장악하며 마침내 수도 카트만두로까지 진격했다.

결국 갸넨드라는 국민과 여러 정당들에게도 버림받은 나머지 대국민 사과문으로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2007년 왕정 폐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친 결과, 왕정 폐지 의견이 왕정 유지 의견보다 과반수에 도달해 2008년 5월 28일에 왕정이 폐지됨으로써 갸넨드라는 즉위한 지 7년만에 물러났고 샤 왕조는 종말을 맞이한다. 초대 국왕인 프리트비 나라얀이 1768년에 즉위한 후 딱 24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다만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됐을 뿐이기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긴 했어도 그 외의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6. 평가[편집]


비록 정치적으로 몰락한 폭군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왕위를 잃고 폐위당한 아시아권 다른 나라들의 전 군주들과 비교해볼 때 네팔에 거주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물론 폭군이라고 해도 국민들을 대량학살하거나 상식을 뛰어넘는 짓을 한 그런 폭군이 아니라 사실상 이 사람은 평범한 암군에 가까웠던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인의 사유재산이 아닌 왕궁 등 왕실재산은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면서 다른 왕정폐지국들과 마찬가지로 몰수되어 국가 소유가 됐다.

오만의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폭정 끝에 아들반정으로 쫓겨난 뒤 망명국인 영국 런던의 도체스터 호텔에서 2년간 쓸쓸하게 살다가 숨졌으며,[3] 이란의 팔라비 2세는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축출된 뒤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4] 1980년에 이집트에서 지병인 암으로 숨졌고 현재 남아있는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나 파라 팔라비 전 황후,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 등 일가족들도 망명객 신분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를 떠돌며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 하고 있다.[5] 이라크파이살 2세는 1958년 반 왕정 쿠데타를 일으킨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의 쿠데타 군대의 총탄 세례를 받고 참혹하게 총살당했으며 라오스의 전 국왕인 사방바타나는 1975년 라오스 내전에서 패전해 공산 반군인 파테트라오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당하고 공산당 정권이 성립된 이후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옥사하여 참혹한 최후를 맞은 것을 감안하면[6], 갸넨드라와 그 일가족들은 폐위되어 왕위와 왕족 지위를 잃어버리고, 재산마져 몰수당했음에도 몰락/폐위 이후 사망하거나 해외에서 망명객 신세로 여생을 보내기는커녕 네팔 국내에 거주하면서 왕정 복고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나마 네팔은 왕정 폐지 후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정치 세력들이나 정당이 일부 있기라도 하지, 이란[7]이나 이라크,[8] 라오스[9]는 그마저도 없다.


7. 가계[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파라스 왕자
1971년 12월 30일
생존 (52세)
히마니 라쟈
슬하 1남 2녀
1녀
프레라나 샤 싱
1978년 2월 20일
생존 (46세)
쿠마르 라즈 바하두르
슬하 1남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0 22:53:33에 나무위키 갸넨드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5ft 10in[2] 이 참극 속에서 갸넨드라의 형제들 중에선 여동생인 쇼브다 공주만 살아남았다.[3] 그래도 이 쪽은 군주만 교체하고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4] 팔라비 왕가의 인도 내지 망명 불허를 요구하던 이란 신정부의 압력으로 미국, 멕시코, 모로코, 파나마, 바하마 등 여러 나라들을 전전했다.[5] 실제로 이란에서는 이란 혁명 당시 국외로 도주했던 팔라비 2세 전 국왕과 그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선고한 궐석재판에서의 사형 판결이 유지되어, 현재 이란 정부의 공식 입장 역시 이 사형판결에 의거해 팔라비 왕가가 망명을 접고 이란으로 돌아올 시 사형에 처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이 사형판결의 존재로 인해 지금도 서방에 망명 중인 팔라비 구 왕가들이 아직까지도 이란으로 귀국하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세한건 팔라비 왕조 문서 참조.[6] 심지어, 라오스는 1960, 70년대 당시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공산당계 정당인 라오인민혁명당의 당수가 라오스의 왕자였던 쑤파누웡이었다. 그리고 당시 쑤파누웡의 정적이자 반공계열 공화주의자들의 구심점이던 수바나 푸마도 그의 이복형인 왕자 출신이었다. 이렇게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왕국으로 개국했음에도 왕족들 내부에서 직접 이념을 막론하고 공화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최종적으로 1975년 라오스 내전에서 승리한 왕족 출신의 공산주의 지도자 쑤파누웡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초대 국가주석이 되어 정치적 정통성마져 확고하게 차지하면서, 라오스는 냉전 시기였던 1970년 왕정이 론놀 장군의 군사 쿠데타로 폐지된 이후에 내전과 론놀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한 크메르 루주 정권의 폭압적 통치, 베트남군의 침공 등 극심한 혼란기를 겪고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쫓겨난 왕실을 다시 원복시키자는 주장까지 힘을 얻어 냉전 종식 이후인 1993년 폐위당한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재차 복위하면서 왕정이 복고됐던 남쪽 이웃나라 캄보디아와 달리 왕정 복고에 대한 명분이나 주장이 힘을 잃어버리거나 아주 미약한 극소수의 망명 라오스인 반공 세력들만이 현 공산정권의 축출과 왕정복고를 주장하고 있는 상태다.[7] 실제로 이란에서는 팔라비 왕조의 복고 내지 망명 중인 팔라비 2세 전 국왕의 자녀들을 용서해주거나 귀국해주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게 되면 반혁명 혐의로 인해 사형 또는 징역형 등 처벌을 받을 수 있다.[8] 단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붕괴된 직후에 정국 혼란을 빚는 과정에서 1958년 폐지된 하심 왕조에 대한 왕정 복고의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다. 자세한건 왕정복고 참조.[9] 여기는 공산당 1당제 국가이며 현재까지도 왕정 폐지를 주도한 파테트라오 출신의 지도부와 그 후예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다.